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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노멀-미래] ‘인류의 세번째 미래’ 길목에 서다 / 곽노필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9. 14. 05:47

[뉴노멀-미래] ‘인류의 세번째 미래’ 길목에 서다 / 곽노필

등록 :2020-09-13 15:08수정 :2020-09-14 02:39

 

곽노필ㅣ콘텐츠기획팀 선임기자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불확실성투성이다. 과거의 미래도, 현재의 미래도 그랬다. 코로나19 사태로 현재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농도가 한층 더 짙어졌다. 이 뿌연 안갯속을 헤쳐나가는 최선의 방법은 미래를 계획해서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번영을 일군 인간의 특장점이기도 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은 인류에게 ‘미래’가 어떻게 등장했는지 알려준다. 우리는 자원이 부족할 땐 ‘지금 당장’에 몰두한다. 당장의 해결책이 급한 마당에 미래가 끼어들 여지는 별로 없다. 그러다 물자가 풍요해지기 시작하면 한숨을 돌리고 생각할 여유가 생긴다. 생각은 꿈을 만들고, 꿈은 목표를 만든다. 세속적 욕구의 충족은 정신의 세계가 펼쳐질 수 있는 토대다.

 

한 연구에 따르면 식량과 연료, 자원에서 얻는 에너지 총량이 1인당 하루 2만칼로리를 넘어서는 때와 이 시기가 일치한다.인류의 첫번째 미래 만들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신이나 절대자에게 의탁한 미래 만들기다. 오늘날까지 추앙받는 성인과 사상가들이 이 시기에 등장해 종교와 철학, 과학의 뿌리를 내렸다. 조로아스터와 석가모니, 공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 이어 예수가 등장하던 시기다. 기원전 800년부터 서기 200년에 이르는 이 1천년의 시기를 그래서 ‘축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때 탄생한 규범과 원리는 이후 1천년 동안 사회를 규율하고 내일을 준비하는 준거가 됐다.

 

미래 만들기는 하나의 그릇을 만드는 것과도 같다. 그릇은 언젠간 차고 넘치게 된다. 그릇 안의 무수한 요소들이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때가 되면 이 새것들까지 담을 수 있는 더 큰 그릇이 필요하다.

 

신에게 의탁한 그릇이 넘칠 때 과학과 기술이 새로운 미래 만들기 주체로 등장했다. 르네상스에서 태동한 두번째 미래 만들기는 18세기 산업혁명과 함께 본궤도에 올랐다. 신학과 경전의 시대는 가고 과학의 시대가 열렸다.200여년이 흐른 지금 과학기술의 시대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을까? 그렇다고 볼 수 있는 현상을 우리는 지금 목격하고 있다. 과학기술 문명은 효용을 무색하게 하는 후유증을 낳기 시작했다. 그 맨 앞에 기후변화, 즉 지구 온난화가 있다. 21세기 들어 유독 잦아지고 있는 기상이변, 전세계를 뒤덮은 코로나바이러스는 과학기술의 그릇도 넘쳐흐를 지경에 이르렀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물증이다.

 

더 늦기 전에 ‘세번째 미래 만들기’를 시작할 때가 아닐까? 그렇다면 어떤 미래를 만들어야 할까? 신도 과학도 아니라면 의탁할 대상은 인간 자신일 수밖에 없다. 사슬을 이어가다 보면 결국 위기를 자초한 인간과 마주하게 된다. 인간 자신한테 의탁하는 미래는 공존의 미래다. 결자해지라고나 할까. 과학기술 문명이 부른 기후위기는 인류를 공통 이해관계자로 만들었다.

 

과학은 이제 번영에서 공존으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 지금의 혼돈은 거대한 전환의 길목에 섰음을 알리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인간 사이의 공존, 인간과 자연의 공존, 나아가 지구와 우주의 공존까지 아우르는 상상력을 발휘할 때다. 신의 시대는 정신문화로, 과학의 시대는 기술 문명으로 미래 만들기 임무를 완수했다. 공존의 시대는 지구공동체라는 더 푸근한 미래를 만들 수 있다. 코로나19로 전세계가 공통의 위기의식을 갖고 있는 지금이 좋은 기회일 수 있다.

 

국회미래연구원이 확인한 한국인의 선호 미래상은 성장이나 경쟁, 개인, 현재 중심이 아닌 분배와 공존, 공동체, 미래가 어우러진 사회였다. 공존의 미래를 모색할 싹은 이미 사람들 마음속에 움트고 있다는 얘기다. 미래의 길이 합의되면 갖가지 이해관계로 엉킨 현안의 실타래를 푸는 방법을 찾기가 그만큼 쉬워질 것이다.

 

nop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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