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訴訟]=자유 평등 정의

[세상읽기] 판사 비판은 사법독립을 침해하는가 / 류영재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9. 15. 04:32

[세상읽기] 판사 비판은 사법독립을 침해하는가 / 류영재

등록 :2020-09-13 15:06수정 :2020-09-14 02:40

 

판사봉, 판결봉,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처음 형사재판을 맡았던 2013년부터 2020년 현재까지, 우리 사회는 성범죄를 젠더적 관점에서 재인식해오고 있다. 성범죄에 피해자 중심적 관점을 도입했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하거나 피해자가 처한 상황의 맥락을 모두 소거하는 태도를 문제라고 인식했다. 재판 절차에서 피해자가 한낱 증거로서만 취급당하며 소외되거나 반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점을 지적했고 미성년자가 성착취 당하는 상황을 ‘미성년자의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로 호도해서는 안 된다고 외쳤다. 각종 유형별 성범죄의 특성을 정리하고, 디지털 성범죄의 해악을 재발견했다.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의 나를 돌이켜 보면, 당시의 나는 젠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판사였다. 과거의 내가 행한 재판은 시민사회가 치열한 고민 끝에 문제 제기의 대상으로 삼은 바로 그 재판들과 다를 게 없었다.

 

성범죄 재판도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사회의 인식 변화에 발맞춰 변화해왔다. 문제는 변화의 속도다. 기존의 재판 관행을 존중하며 법적 안정성을 추구하는 사법의 특성상 재판이 사회변화를 선도하진 못한다. 그러나 재판이 그 시대의 인식을 따라가기는 해야 한다. 시대의 인식과 재판 간 괴리가 지나치게 커지면 사법은 사회의 현상을 규범의 영역으로 적절히 포섭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신뢰를 상실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사법이 시대의 인식을 늦지 않게 따라갈 수 있을까. 해답의 실마리를 성범죄 재판의 변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시민들은 재판을 방청하고 판결문을 상세히 분석하여 성범죄 재판의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비판해왔다. 그 비판을 통해 판사들은 재판을 돌아보고 사회 인식의 변화를 체감하게 된다. 이는 재판의 변화로 이어진다.재판에 대한 비판 내용이 모두 옳지는 않다. 그러나 비판은 사법이 사회와 괴리되는 것을 막고 성찰하게 만든다. 재판에 대한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폐쇄적인 사회에서는 규범의 해석을 판사가 독점하게 되고 이를 통해 판사는 주권자인 시민들 위에 군림하게 된다. 이는 민주주의 및 법치주의의 관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한편, 개개의 재판은 독립되고 판사는 자신이 행한 재판을 독립하여 책임진다. 이른바 재판독립의 원칙, 법관독립의 원칙이다. 따라서 개별 재판에 대한 비판은 필연적으로 그 재판을 행한 판사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재판에 대한 비판이 사법과 시민사회 간 괴리를 줄이고 사법을 민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허용되어야 한다면, 재판을 근거로 한 판사에 대한 비판 역시 그러하다.

 

최근 적지 않은 판사들이 거센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일련의 성범죄 재판을 행한 판사들이 그러했고, 8·15 집회 허가 결정을 내린 판사가 그러했다. 대부분 재판 내용에 대한 비판과 분노가 그 재판을 행한 판사에게까지 향한 사례들이다. 판결에 대한 비판과 그 재판을 행한 판사에 대한 비판이 유리되었던(보통 ‘법원’의 책임으로 돌아갔다) 예전과 다르게 재판을 행한 판사의 책임을 강하게 요구하는 것이 요즈음의 특징이다. 이러한 추세에 한 명의 판사로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나 역시 평범한 판사고, 비판받는 판사들과 나 사이에 별다른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판사들로 하여금, ‘판사에 대한 비판’을 ‘사법독립 침해’로 인식하게 만든다. 그러나 두려움을 딛고 냉정히 판단하면, 역시 ‘재판을 이유로 한 판사 비판’을 곧바로 사법독립 침해라 보기는 어렵다. 재판과 판사에 대한 비판이 합리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면 이를 겸허히 받아들여 재판을 개선해 나가야지 그 비판의 수용을 곧 여론재판이라고 인식해서는 곤란하다.

 

최근 대법원장은 재판에 대한 합리적 비판을 넘은 근거 없는 비난이나 공격이 사법부의 독립을 침해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12명의 대법관들이 고심한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낸 소위 ‘전교조 전합 재판’에 대해, 판결 내용과 관계없이 대법관들의 기존 학회 활동과 임명권자만을 근거로 위 판결을 정치적 판결로 치부한 최근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대법원장의 우려에 공감이 간다. 하지만 합리적 비판과 근거 없는 비난 및 공격의 경계가 언제나 명확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합리적 비판의 폭을 한없이 축소하여 사실상 재판과 판사에 대한 비판을 사법독립 침해로서 허용하지 않는 사회를 만든다면 이는 사회뿐만 아니라 사법의 비극이 될 것이다.

류영재 ㅣ 대구지방법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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