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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서울시장 사건 피해자를 의심하는 분들에게 / 이대호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10. 6. 04:31

[기고] 서울시장 사건 피해자를 의심하는 분들에게 / 이대호

등록 :2020-10-05 04:59수정 :2020-10-05 11:28

 

지난 11일 오후 서울시청 앞에 마련된 고 박원순 서울시장 분향소에서 시민들이 조문을 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이대호 전 서울특별시 미디어 비서관

 

저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참모로 2년 가까이 일했습니다. 2016년 12월에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실에서 일을 시작했고, 이듬해 3월 시장실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2018년 4월 사직해 지방선거를 치렀습니다. 피해자와 함께 일했던 기간이기도 합니다. 이후 2019년 5월까지 정치인 박원순과 함께 꾸었던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일들을 하다 지금의 직장으로 옮겼습니다.

 

직장 상사라는 존재가 보통 그렇습니다. 불만도 많았고 미울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고인을 참 좋아했고 진심으로 존경했습니다. 지위가 높았지만 소탈했고, 늘 성실했으며 지혜로운 분이었습니다. 서울시장은 한쪽 편을 들기 어려운 첨예한 갈등을 상대할 일이 많습니다. 그럴 때 부와 권력을 덜 가진 사람 입장을 단호하게 우선했던 그분의 모습들은 제 안의 무언가를 일렁이게 했고, 제 삶에 주요한 지표로 남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실종으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일들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고인을 좋아하고 존경했던 많은 분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언제로 시간을 돌린다면 이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까 하는 쓸모없는 상상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함께 일했던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무엇보다 저 자신을 책망하는 일에서 한동안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피해자의 피해 주장이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피해자 쪽 변호인단은 더 자세한 조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수사기관에 의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조사, 결과 발표를 일관되게 요구합니다. 유족 쪽 요청으로 중단된 고인의 휴대전화 포렌식 조사 재개도 피해자 쪽 요청 사항입니다. 사건 당시 고인과 대책회의를 했다고 알려진 핵심 측근들도 근거를 들어 피해 사실 자체를 부정하거나 무고를 주장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또 피해자는 평범한 직장인이자 좋은 동료였습니다. 저처럼 함께 일했던 여러 동료가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회사에서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하고, 주말에는 가족, 친구와 시간 보내길 좋아하는 흔한 직장인이었습니다. 거짓 피해를 주장해 얻을 것은 없습니다. 외려 피해 사실을 알린 지금, 일상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관심, 낙인의 시선, 의심의 눈초리를 얻기 위해 안온한 일상을 포기할 사람은 없습니다.

 

피해자를 의심하고 추궁하는 분들이 많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인을 좋아하고 존경했던 분들 중에 피해자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피해자의 과거 행동이나 그가 작성했던 문서를 제시하며 ‘가짜 피해자인 것 같다’고 주장합니다. ‘합리적 문제제기’라며 피해자의 신원이 드러날 수 있는 자료를 공개합니다. 이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고인의 누명을 벗겨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위대한 정치인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런 행동들이 잘못되었고, 고인의 명예를 지키고 싶다면 더더욱 하지 않아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심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심이 당사자가 등장하는 영상을 검증도 없이 배포하는 일이어서는 안 됩니다. 편견을 조장하고 신원을 노출해 피해자를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직장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피해자의 희망을 꺾는 일입니다. 피해 주장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면 국가인권위원회, 경찰의 조사 결과를 기다리는 편이 바람직합니다.

 

저는 비서실에서 일하는 동안 고인이 성폭력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 팀의 실패였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예외는 없습니다. 아무리 존경받을 만한 삶을 살았더라도 힘을 가진 사람은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누가 폭력을 저질러도 처리될 수 있는 제도, 피해를 본 사람의 입장을 우선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더 많은 사람들을 지킬 수 있습니다. 고통받고 있는 피해자만이 아닙니다. 반성, 사과, 속죄, 용서, 화해를 거쳐 곁으로 돌아올 수도 있었던 어떤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그를 존경했던 사람들이 명예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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