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언론

“혼자로는 힘들어 ‘한반도 통일 설계도’ 그릴 연구소 세웠다”[박한식의 평화에 미치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10. 14. 05:26

“혼자로는 힘들어 ‘한반도 통일 설계도’ 그릴 연구소 세웠다”

등록 :2020-10-13 22:28수정 :2020-10-13 23:06

 

‘평화가 통일 가져다주는 게 아냐
통일이 평화를 이루게 하는 길이다’
학자적 소명으로 남북 오가며 연구

‘남·북·미’ 정부 차원 대화 막히자
민간 차원 비공식 ‘트랙Ⅱ 회담’ 주선
인력·재정·행정 등 물적지원 절실
1995년 조지아대학 ‘글로비스’ 설립
“세계화 추세 반영해 ‘글로벌’ 명칭”

대학쪽 전폭 지지·물심양면 지원도
국외 단기연수 통해 매해 100명 견학
나치 수용소·히로시마 원폭 현장 등
“10년간 소장 맡아 열정과 혼신 쏟아”

2015년 76살 때 은퇴…집필 몰두중
‘박한식’ 이름 딴 ‘기금석좌직’ 신설

길을 찾아서-41회 국제문제연구소(GLOBIS)

박한식 교수는 1970년부터 재직했던 미국 조지아대학에서 2015년 공식 은퇴했다. 도미 유학 50년 만이자 교수 재직 45년 만이었다. 2015년 12월 조지아대학(UGA) 국제행정학부는 교내 딘러스크홀에서 박 교수의 은퇴 기념식을 열어주었다. 뒤이어 ‘평화학’을 주제로 한 박 교수의 고별 강연에는 예정된 인원의 두배인 200여명의 수강생이 몰려 성황을 이뤘다. 사진 조지아대학 누리집 갈무리

 

지난 40회 연재에서 잠시 언급했 듯이, 학문의 목적은 문제 해결(Problem Solving)에 있고, 우리 사회가 품고 있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발견해 내고(identify) 원인을 찾아서 처방을 제시하는 것이 학자의 소명이라는 생각은 내 평생의 지론이다.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남북 분단과 군사적 대치 그리고 한반도 통일이었다. 1965년 미국 유학길에 오를 때부터 통일에 기여해야겠다는 결심으로 학자의 삶을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남북 분단과 군사적 긴장을 해결할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을 제시하고 그 사회를 도안하고 설계하는 것이 학자인 나의 책무라고 믿으며 평생을 애면글면 해왔다. 통일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 없이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 조성 노력만을 강조하는 시각은 근시안적이며 분명 한계가 있다. 내가 늘 강조했듯이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고, 전쟁이 없다고 해서 평화가 오는 것도 아니다.해방 이래 지난 75년의 세월 동안 정통성 경쟁과 체제 경쟁으로 점철되어온 남북관계를 볼 때, 통일 없이 진정한 평화가 도래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평화가 통일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고 통일이 평화를 이루는 길이다. 남북 상호 대화와 협력을 통해 꾸준히 통일을 모색하는 일련의 과정만이 진정한 평화에 이르는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1965년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 박 교수(뒷줄 왼쪽)는 당시 청소년적십자 부장이던 서영훈(뒷줄 오른쪽) 선생의 남산 대한적십자사 사택을 찾아가 유학 인사를 하고, 서 선생의 가족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 서유석 교수 제공

 

통일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어릴 때부터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부르며 자랐지만 아직까지 통일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통일에 대한 열망만으로는 통일을 성취할 수 없다는 교훈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통일의 열망을 통일의 결실로 안내할 수 있는 현실적인 ‘통일의 길’, 즉 ‘통일의 설계도’를 마련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그 일은 학자들과 이론가들의 몫이다.

 

통일의 설계도를 고민하고 도안하는 학자의 연구는 마치 작곡가가 아름다운 멜로디의 곡을 완성하는 창작 작업에 견줄 수 있다. 작곡가가 음악에 대한 소양과 영감을 가지고 한 곡조의 아름다운 선율을 완성해 가는 과정은 수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여서 악보를 썼다 고치기를 반복하는 힘겨운 작업이다. 통일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노력도 이와 마찬가지다. 하지만 산고를 이겨내고 탄생한 곡은 오케스트라의 아름다운 연주에 의해 세상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기 전까지는 그 가치가 드러나지 않는 먼지 쌓인 한 장의 종이 악보에 불과하다.훌륭한 연주를 위해서는 작곡가의 의도와 취지를 이해할 수 있는 혜안과 지혜를 가진 지휘자가 필요하고 그 지휘자는 각각의 연주자와 악기가 제소리를 내면서도 불협화음이 생기지 않도록 조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능력과 역량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통일을 위해 정부가 할 일은 바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은 구실이다. 오케스트라는 조화이고 음악이 조화의 예술인 것처럼 사회 각 분야의 역량을 모아 협업과 조화를 통해 학자들이 설계한 통일의 길을 실천하고 이행하는 것이 정부의 소임이다.

박한식 교수는 2009년 북한 억류 미국 기자 석방 주선, 2010년 ‘간디·킹·이케다 평화상’ 수상 등의 활약상이 알려지면서 2011년 <조지아 매거진> 표지에 ‘피스메이커’로 소개되기도 했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나는 한민족 통일의 청사진으로 ‘변증법적 통일론’을 제안한다. 앞으로 남은 연재에서 더 소상하게 서술할 계획이지만, ‘변증법적 통일론’은 남북 간의 특수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남북 간의 현격한 ‘이질성’을 현실적으로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남과 북의 이질성을 찾아서 조화시키고 또한 동질성을 발견해서 꾸준히 진작시키는 노력만이 통일의 바람직한 길이다. 이러한 노력을 위해서 남과 북 모두를, 특히 북한을 관찰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었고 1980년 이후로 북한을 50여 차례 방문한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내가 관찰한 남과 북의 이질성과 동질성에 관해서는 앞으로 상세하게 설명할 예정이다.1980년부터 북한을 방문하기 시작하면서 부닥친 가장 큰 난관은 인프라스트럭처, 즉 기반시설의 부재였다. 한 개인 학자가 북한을 관찰하고 북한과 소통하고 통일 연구를 위해 매해 여름 북과 남을 방문하는 것은 재정적으로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또한 미국과 북한 사이에 준정부 차원 또는 학술 차원에서 다양한 교류를 주선하고 성사시키는 것도 교수 개인의 역량으로는 여간 힘에 부치는 일이 아니었다. 특히 남·북·미 간의 정부 차원 대화가 수월하지 않던 상황에서 ‘트랙Ⅱ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인적·재정적·행정적 등 물리적인 지원을 해줄 수 있는 든든한 뒷배경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1995년 조지아대학 내에 ‘국제문제연구소’(GLOBIS: The Center for the Study of Global Issues)를 설립했다.국제문제연구소 설립은 의외로 쉽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조지아대학 관계자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고 제안서를 제출하자마자 설립 허가가 승인되었다. 학교의 지원도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2층짜리 단독 건물도 배정받았고 학교에서 직접 고용한 정규직 직원 2명과 박사과정 학생들을 여럿 연구조교로 고용할 수 있는 넉넉한 예산도 지원받았다. 특히 재정이 넉넉하지 못했던 많은 한국 박사과정 유학생들은 거의 모두가 국제문제연구소를 거쳐 갔다. 또한 각종 학술회의와 유명 연사 초청 토론회 그리고 북한 방문단 초청과 트랙Ⅱ 같은 국제 행사도 국제문제연구소가 있었기에 큰 어려움과 부족함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더욱이 연구소 설립 이전에 내가 개인적으로 주선하고 추진했던 여러 행사들과 달리 국제문제연구소의 이름으로 들어오는 후원금과 기부금은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나의 주된 연구영역이 북한과 남북통일 문제이긴 했지만, 나는 연구소의 명칭을 북한연구소 또는 통일연구소라고 이름 짓고 싶지는 않았다. ‘글로벌’이라는 단어를 꼭 포함시키고 싶었다. 그때만 해도 글로벌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않던 시기였다. 내가 ‘글로벌’을 특별히 좋아했던 연유는 인류 전체가 공동숙명체 또는 공동운명체라는 의미가 담긴 단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또한 1990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냉전이 종식되고 냉전 기간 내내 막혀 있던 동서 간 교류의 물꼬가 터지면서 소위 세계화(globalization)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더불어 소련의 붕괴로 인해 군사적,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미국에 대적할 만한 강대국이 사라짐으로써 미국의 헤게모니가 절정으로 치닫는 국제정치적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에 1990년대 이후의 세계화는 세계의 ‘미국화’(Americanization)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국의 일방적 독주 체제 아래 속도가 붙기 시작한 세계화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롭고 다양한 세계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테러리즘이다. 북한과 미국의 군사적 긴장과 북한의 핵무기도 미국 주도의 세계화라는 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한반도 통일 문제도 우리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엄연한 세계 이슈이기도 하다는 생각도 했다.국제문제연구소를 설립하면서 내가 역점을 두고 추진했던 또 하나의 업무는 글로벌 교육이었다. 미국 학생들에게 세계화 또는 세계의 미국화로 인해 생겨난 글로벌 문제들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자각을 심어주고 싶었다. 사실 미국 학생들 대부분은 우물 안 개구리이다. 외국 여행도 영국과 캐나다 그리고 프랑스 정도가 고작이고 다른 나라와 문화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다. 사실 나는 미국이 잘되어야 세계가 잘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미국이 붕괴되면 세계가 제대로 지탱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이 잘되기 위해서는 미국 사람들이 글로벌 양심을 가지고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수용하며 무지와 우월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시작이 교육이라고 생각했다.나는 1995년 이후 국제문제연구소의 국외 단기연수 프로그램을 통해 여름마다 100명이 넘는 미국 학생들을 이끌고 외국 현장학습을 실천했다. 특히 현장을 직접 보고 체험함으로써 미국 학생들이 평화와 세계 문제에 대해 스스로 느끼고 깨닫고 배우길 바랐다.현장 견학 학습을 위해 선정한 장소는 전 세계에서 모두 네 곳이었다. 독일 뮌헨에 위치한 다하우 강제수용소 추모 사이트(Dachau Concentration Camp Memorial Site)에서는 유대인들을 학살한 나치의 만행을 학생들에게 견학시켰고, 일본 히로시마 박물관의 원폭돔을 방문해서 전쟁과 핵무기의 야수성과 잔인성에 대한 교훈을 일깨워 주고자 했다. 히로시마에서 미국 사람이라는 사실이 부끄럽다고 치를 떨며 눈물을 흘리던 어린 학생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전쟁의 참상을 학생들에게 직접 눈으로 목격하게 함으로써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기 위한 노력이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현장학습에서는 넬슨 만델라 박물관에 들러 인종차별의 부당함을 가르쳤고, 한국의 판문점 견학을 통해서는 한반도 평화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학생들에게 각인시켜 주려고 노력했다.

박한식 교수는 1995년 조지아대학 내 국제문제연구소(글로비스)를 개설해 20년간 소장으로서 한반도 통일 문제를 국제적 시각에서 통찰하는 연구와 교육 활동에 매진했다. 조지아대학은 2015년 ‘1만6570일, 총 2300만분’의 헌신을 기려 박한식 교수의 이름을 새긴 의자를 학교 내에 설치했다. 또 기금을 모아 ‘박한식 평화연구 석좌교수직’을 두기로 했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

 

국제문제연구소에 대한 나의 애착은 마치 자식과 같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국제문제연구소를 ‘박한식(Han S. Park)연구소’로 알고 있을 정도였다. 내가 만들었고 2015년 은퇴할 때까지 소장으로서 열정과 혼신을 쏟아부은 곳이기도 하다. 20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연구소 사무실로 출근을 했고 책상에 앉아 연구하고 집필했다. 5년 전 은퇴하면서 사무실을 정리하고 이삿짐을 옮기면서 참 많이 서운하기도 했다. 지금은 다른 소장이 그 자리에 앉아 있지만 국제문제연구소 설립 취지인 글로벌 교육과 글로벌 문제에 대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성실히 수행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2015년 12월 조촐한 은퇴식을 끝으로 나는 더 이상 연구소에 나가지 않고 있다. 1970년 조지아대학에 왔으니 45년 동안 가르치고 연구했다. 76살에 은퇴를 했으니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훨씬 오래 현역에 있었던 셈이다. 마음 같아서는 현역에 좀 더 있고도 싶었다. 주위에서 은퇴 직후 갑자기 늙거나 유명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아온 터라, 은퇴를 좀 더 늦출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특별히 아픈 곳은 없었지만 의사의 은퇴 권유도 있었다. 사실 은퇴 이후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마무리하고 싶은 집필 작업도 있었기에 서운하지만 은퇴를 결정했다.세계화에 관한 저서를 집필하고 싶은 욕심이 상당했지만, 사실 은퇴 전에는 강의와 연구소 일로 인해 심적·물리적 여유가 없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책을 쓰는 작업은 원래 책상에 진득하게 앉아서 많은 시간의 사색과 고민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은퇴 후 상당한 시간적 여유가 허락되었고, 2년 남짓 작업 끝에 2017년 방대한 저서인 <세계화: 축복인가 저주인가?>(Globalization: Blessing or Curse?)를 출간할 수 있었다.

박한식 교수는 은퇴 이후 2017년 저서 <세계화: 축복인가 저주인가?>(사진)를 출간했다. 조지아주의 주요 대학 출신들이 모인 연구재단 ‘평화와 지속가능성을 위한 글로벌센터’도 운영 중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은퇴식에서 조지아대학은 국제문제연구소를 통한 나의 평화 노력과 글로벌 교육에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해 주었다. 또한 과분한 은퇴 선물도 함께 전해 주었다. 지난 45년간 나의 평화에 대한 열정과 헌신 그리고 공헌에 대한 보답으로 조지아대학에서 내 이름으로 기금석좌교수직(endowed chair professor)을 만들어 주었다. 영어로는 ‘박한식 프로페서십 오브 피스 스터디스’(Han S. Park Professorship of Peace studies)이다. 일반적으로 기금을 기부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명칭을 짓는데, 조지아대학에서 은퇴한 교수의 이름을 따서 기금석좌교수직을 만든 건 처음 있는 일이다. 나에게는 고맙고 영광스러운 은퇴 선물이었다.

 

구술집필 권준택 뉴욕 유티카대학 교수/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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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박한식의 평화에 미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