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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괴로움의 산물 / 고경태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10. 22. 20:33

[편집국에서] 괴로움의 산물 / 고경태

등록 :2020-10-21 16:13수정 :2020-10-22 02:41

 

고경태 ㅣ 오피니언 부국장

 

“박원순 시장의 죽음은 저희 모두에게 충격이었어요. 갈등은 박래군 소장님이 서울특별시장 장례위원 명단에 이름을 올리면서부터 시작됐죠. 내부 활동가들이 그런 공적 추모는 또 다른 위력이라고 만류했는데도 듣지 않으셨거든요. 저희는 인권활동을 지원하는 조직이라 다른 단체 활동가들 만날 기회가 많은데 차가운 눈초리로 ‘박래군 소장이 이름 올려 충격받았다. 너네 입장은 뭐냐’고 계속 물어왔어요. 박래군이라는 사람이 인권운동가로서 상징성이 있으니 그랬을 겁니다. 돌이켜 보면 시민사회 안에서 성희롱 사건은 계속 있어왔지만 제대로 논의되거나 해결되지 못할 때가 더 많아요. 그래서 떠나는 활동가들도 많고요. 대화가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매주 모여 토론했어요. 두달 만에 성명서를 쓴 셈인데, 누구를 향해 쓰는 글인지 고민하며 대상을 인권활동가들로 한정했어요.”(인권재단 사람 사무처 활동가 ㄱ)

 

“박래군 활동가가 박 전 시장에 대한 개인적 추모를 넘어 서울특별시장(葬) 장례위원으로 참여한 것은 잘못된 결정이었습니다. 시장이라는 지위는 지속적인 성추행을 감추고 피해자의 호소마저 묵살하는 위력으로 작용하며, 그에 대한 대대적인 추모 행렬 또한 위력의 한 형태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중략) 이 문제를 토론하는 과정에서 사무처 내에 여러 이견이 있었습니다. (중략) 그러나 사무처 활동가들은 함께 일하는 동료를 포기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그동안 사무처 내에서 권력과 성폭력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짐작해왔을 뿐 적극적인 소통의 과정이 부족했다는 점을 뼈아프게 마주합니다.”(2020. 8. 31. 박래군 활동가의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장례위원 참여에 대한 인권재단 사람 사무처 입장, 박래군 등 활동가 7인 일동)

 

“나를 비판하는 성명서를 내가 왜 썼냐고? 괴로워, 묻지 마. 박 시장 돌아가시고 나도 무지 힘들었는데, 장례위원 건 때문에 후배들도 이렇게 힘들어할 줄 몰랐어. 처음엔 장례위원에 이름 안 올리는 건 비겁하다고 생각했지. 그거 한다고 위력에 의한 성폭력 문제를 외면하고 그런 건 아니지 않냐 해서. 박 시장하고 33년 알고 지냈잖아. 박 시장 없었으면 광화문 세월호 천막이나 박근혜 탄핵 집회를 위한 광장 확보가 가능했겠어? 그렇다 해도 후배들은 생각이 다르지. 토론 끝에 성명서를 냈는데, 틀린 말은 없어.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거야. 성추행 의혹이 바로 사실로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고소가 이뤄진 상황을 고려해 그와 관련한 가정을 하고 적절한 장례 절차를 합의했어야 해. 서울시장이니까 감내해야 할 부분 인정해야 하는데 감정적 대응 한 측면이 있지. 이제부터라도 그 죽음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함께 성찰해가야 해. 젠더 민주주의에 관해 암묵적으로 같은 생각 하는 줄 알았지만,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이 없었고 이번에 그 차이가 드러난 셈이야. 선배 그룹이 억울해도 열린 마음으로 후배들 이야기를 들어야 해. 11월엔 같이 공부도 하기로 했어. 암튼 이 성명서는 괴로움의 산물이야.”(인권재단 사람 사무처 박래군 소장)

 

뒤늦게 접하게 된 성명서의 배경이 궁금했다. 비판의 대상이 된 인물이 성명에 참여한 점도 눈길을 끌었다. 활동가 ㄱ과 박래군 소장에게 이야기를 들어본 이유다. 나온 지 두달 됐지만, 주변에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언론에 보도된 적은 없다.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회자되는 경우도 못 봤다. 극비였나? 아니다. 인권활동가 대상의 반공개 성명이었다. 박 소장과 함께 장례위원으로 참여했던 박진 활동가가 속한 다산인권센터도 비슷한 시기, 비슷한 내용과 형식의 성명을 냈다. 박진 활동가는 “모두 상처가 깊다”며 이에 관한 언급을 꺼렸다.

 

최영애 국가인권위원장은 지난 9월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사건은 그냥 사건이고, 오거돈 전 부산시장 사건도 어떤 사건이다. 그러나 박원순 사건은 우리의 삶 전체가 도전을 받는 것이었다.” 박 전 시장이 떠난 지 100일, 성찰과 토론을 통해 그 도전을 이겨나가는 두 인권단체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괴롭고, 또 괴로운데 말이다.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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