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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강 칼럼] 하나의 작은 불꽃 [그 불씨가 바로 전태일이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10. 29. 05:05

[하종강 칼럼] 하나의 작은 불꽃

등록 :2020-10-27 14:26수정 :2020-10-28 14:10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 와중에 “완전히 씨가 말라 버린” 노동운동이 어떻게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꽃피울 수 있었을까? 그 불씨가 바로 전태일이다.

하종강 ㅣ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공단 근처 작은 교회에 노동조합 간부들이 서른 명 남짓 모였다. 차례로 일어나 소개하는 시간에 “○○노동조합 위원장 직무대행 아무개입니다”라고 소개하는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소개가 모두 끝난 뒤 참석자들에게 물었다. “위원장님들은 다 어디 가고 직무대행들이 오셨습니까?” 한 참석자가 답했다. “위원장님들은 구속되었습니다!”, 다른 참석자가 더 큰 소리로 답했다. “노동법 위반으로 구속되었습니다!”

 

그날 강의의 주제가 ‘노동법의 원리와 체계’였으니 강사에게 처음부터 ‘엿을 먹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노동법이 노동자 때려잡는 데에나 쓰이는 세상에 당신은 무슨 한가하게 노동법 교육을 한답시고 왔느냐?’고 항의하는 마음들이 읽혔다.

 

아,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하나… 잠시 망설인 뒤에 다음과 같이 입을 열었다. “동지 여러분, 우리가 ‘위원장님들은 다 사형당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합시다. 우리 아버님, 어머님들이 노동운동을 하실 때는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어느 날 한강에 시체로 떠오르고… 간밤에 죽창에 찔려 죽고… 그랬답니다. 그래도 열심히 했답니다.”

 

사실 이 얘기는 우리 집안의 한 어르신께 들은 사연이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한창이던 무렵 도시마다 노동자들이 수만명씩 모여 집회를 벌이는 장면이 두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뉴스 화면에 나왔다. 어느 날 뉴스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르신이 무심하게 스치듯 말씀하셨다.

 

“내가 아무한테도 말을 못하고 살았지만… 사실은 전평 조합원이었다. 그때 활동하던 사람들은 어느 날 아침 한강 변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간밤에 죽창에 찔려 죽기도 하고 그랬지. ‘6·25 사변’ 때에는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모두 다 죽었는데… 다들 너보다 잘생기고 똑똑하고 아까운 사람들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회사에 돌아와 보니 노동조합 간부들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화신백화점 강당을 빌려 대의원대회를 하던 날…”

 

40년 전 이야기를 마치 어제 겪은 일처럼 설명하셨다. 40년 세월 동안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경험을 감히 공개할 수 있도록 용기를 준 세상이 바로 ‘87년 노동자 대투쟁’이다. 1987년 7, 8월 두 달 사이에 발생한 노동쟁의가 모두 3241건이었다.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2019년 노사관계 통계’에 따르면 2019년 1년 동안 발생한 총 ‘노사분규’는 141건에 불과하다.)

 

그 어르신 말씀처럼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 와중에 “완전히 씨가 말라 버린” 노동운동이 어떻게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꽃피울 수 있었을까? 그 불씨가 바로 전태일이다.

 

식민지 조선 땅에 노동운동의 불꽃이 타오른 시점은 러시아혁명이 발생하는 등 세계적 격동기였던 1920년대였다. 그 변혁적 노동운동의 전통은 후대에 이어지지 못했다.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 와중에 “씨가 말랐다”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거의 소멸했다. 식민지 시기에 노동운동을 전개했던 그 선배 활동가들이 계속 살아남아 한국 노동운동의 전통을 이을 수 있었다면 지금 우리 사회 노동운동은 훨씬 더 발전된 모습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노동운동뿐 아니라 정치·경제 체제의 전반적 모습이 지금과 사뭇 달랐을 것이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1995년 베를린영화제 본선에 진출했을 때, 번역된 영화 제목은 “A Single Spark”(하나의 작은 불씨)였다. 1970년 전태일 열사 사건이 불씨가 되어 70년대, 80년대 노동운동이 살아남았고 그렇게 차곡차곡 쌓여진 노동자들의 열망이 1987년 7, 8월에 거대한 활화산처럼 분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노동운동에 처음 발을 디뎠던 70년대 말, 동일방직·원풍모방·반도상사·콘트롤데이터·와이에이치(YH)무역 노동조합의 노동자들이 전태일 열사의 동료·후배인 청계피복노동조합 노동자들과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선생님과 전태일 열사의 동생들과 같이 활동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70년대 한국 노동운동의 주역이었던 그 노동자 활동가들 중 상당수가 87년 대투쟁 이후 건설된 노동조합의 노동자들과 함께 활동하며 영향을 끼쳤다. 지금 민주노총은 그 활동의 성과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노동운동의 전통이 지금까지 그렇게 이어져 왔지만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전태일 열사에서 멈춘다. 지금 한국 노동운동의 모습은 ‘전태일’이라는 불씨로부터 시작된 성과이다. 오는 11월13일 전태일 열사 서거 50주기를 맞아 무수히 많은 중요한 요소들 중에서 한 가지만 짚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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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하종강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