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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숙의 강화일기] 거기는 시골 텃세 없어요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11. 10. 04:09

[김금숙의 강화일기] 거기는 시골 텃세 없어요

등록 :2020-11-08 11:58수정 :2020-11-09 02:38

 

김금숙 ㅣ 그래픽노블 작가

 

“거기는 시골 텃세 없어요?” 오랜만에 통화를 하게 된 지인에게 강화도 시골로 이사 왔다고 했더니 물어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별로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요. 우리 마을엔 텃세 같은 거 없는데요. 여긴 도시에서 온 사람이 반, 원래 살던 사람이 반이에요.” 그는 몇년간 시골에서 살았는데 텃세 때문에 고생을 한 모양이다. 전화를 끊고 난 뒤 그의 질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문득 이제는 고인이 되신 만화가 오세영 선생님이 떠올랐다. 내가 프랑스에서 살 때였으니까 십수년 전이다. 잠시 한국에 다니러 왔던 그때 시골에 터를 잡은 선생님 집에 초대를 받았다. 많은 만화가가 모였다. 나는 검은색 배경에 하얀 동그라미가 그려진 면티와 약간 바랜 보라색의 치마를 입었던 걸로 기억한다. 저녁에는 모닥불을 피웠다. 그러니 아마도 한여름은 아니고 9월 중순쯤 되지 않았을까 싶다. 집 옆으로 계곡이 흘렀다. 마당에는 단풍과 온갖 꽃들, 강아지, 닭, 텃밭, 정자까지 환상적이었다. 나는 선생님께 이런 곳에 사셔서 정말 좋으시겠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고 했다. 자세한 말씀은 하지 않았지만 그곳의 텃세가 말도 못 한다고 했다.

 

우리 집은 마을 안에 있으면서도 집 앞이 작은 숲이어서 마치 산속에 사는 느낌이다. 이사 오고 한달 뒤 남편은 집과의 경계선에 있는 숲에 들어가 한평도 안 되게 파를 심었다. 그늘이 져서 자라지도 않았다. 며칠 후 동네 어르신이 찾아왔다. 왜 남의 땅에 파를 심었느냐고 화를 내었다. 우리는 죄송하다고 말했다. 잠시 언성이 낮아진 틈을 타서 어르신이 이 숲 주인이냐고 물었다. 그는 먼 친척 땅이라고 했다. 그 숲을 오래전부터 관리한다고 했다. 숲 관리인은 우리가 숲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다. 걷기만 해도 쫓아왔다. 다른 사람은 그 숲을 지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숲과 우리 집 사이에 그물망을 치고 못이 송송 박힌 긴 나무토막으로 경계를 만들었다.

 

올해 초, 우리는 집 앞마당에 울타리를 쳤다. 당근이와 감자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숲 관리인이 다시 찾아왔다. 누구 맘대로 울타리를 치느냐는 것이었다. 당황스러웠다. 내 집도 마음대로 못 할까 싶었다. 화가 난 남편이 언성을 높이려는 것을 내가 제지했다. 이 마을에서 우리가 계속 살 수 있을까 걱정과 후회가 엄습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는 일요일도 없다. 허리가 기역자가 되고 팔과 얼굴은 햇빛에 그을어 벼를 벤 논처럼 가을 색이다. 햇빛에 노출되니 주름도 도시 사람보다 많다. 이른 아침부터 밭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육지 것들은 침략자처럼 보였으리라. 시간이 지나면서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지내다 보니 알게 된 것이 있다. 우리에게 감을 따서 준 집의 아저씨는 숲 관리인의 조카뻘이요, 그 건넛집은 형수 댁이요, 또 건넛집은 당숙 집이요, 또 그 건넛집은 삼촌 집이란다.

 

올해 여름은 비도 많이 내렸지만 태풍 때문에 불안했다. 숲에 있는 큰 참나무는 바람이 불 때마다 우리 집 지붕을 내리쳤다. 면사무소에 문의했지만 숲 주인의 연락처를 알 수 없었다. 나는 숲 관리인을 찾아갔지만 숲 주인의 연락처를 알아내지 못했다. 추석이 오기 전 숲 주인이 나타났다. 벌초를 하기 위해 온 것이다. 그를 만나 사정 이야기를 했다. 그는 숲 관리인과 친척이 아니라고 했다. 숲에 들어와도 된다고 했다. 모기와 뱀이 많으니 집과의 경계 부위에는 제초제를 뿌리라고도 했다. 우리 집으로 넘어오는 참나무는 자르라고 했다.

 

오후, 당근이와 감자를 데리고 산책을 나간다. 우리 마을을 지나 건넛마을까지 걷는다. 얼마 전 우리에게 호박을 따 주었던 할머니가 밭에 물을 주고 계신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대답이 온다. “산책 가? 집에 들어와서 커피 한잔 하고 가.” 강화에 이사 오고 두번째 가을을 사는 동안 몇몇 마을 사람들은 우리의 인사를 받아주게 되었다. 어떤 이웃은 고구마를 삶았다고 집까지 가져다가 준다. 건넛마을을 걷다가 며칠 전 가지를 한 움큼 준 할아버지를 또 만났다. 그는 호박을 준 할머니의 시아주버니다. 나는 그에게 우리 마을 인심이 참 좋다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그쪽 마을이 텃세가 제일 없어. 다른 마을에서는 텃세가 심해서 외지 사람들은 못 살아.” 할아버지 뒤로 보랏빛 가을 해가 서산으로 넘어간다. 고개를 돌리니 깊고 적막한 푸른 하늘 위에 동그란 달이 하얗게 떴다. 강화는 아름답다. 강화의 풍경은 어지러운 내 마음을 쓸어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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