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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체계’로 이해한 루만 사회학의 정수 [사회적 체계들/루만 지음]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11. 8. 08:25

세상을 ‘체계’로 이해한 루만 사회학의 정수

 

체계이론 정립한 루만의 전기 대표작 ‘사회적 체계들’ 전면 개역판
생물학의 ‘자기생산’ 개념 빌려 스스로 작동하는 자율적 체계 제시

 

사회적 체계들: 일반이론의 개요니클라스

루만 지음, 이철·박여성 옮김/한길사·5만8000원

체계이론을 세운 독일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 한길사 제공

 

니클라스 루만(1927~1998)은 지그문트 바우만(1925~2017)과 함께 근년에 가장 많이 소개되고 연구되는 사회학자이다. 루만의 이름은 사후에 오히려 더 높아지고 있으며, 학자들 사이에선 20세기 최고의 사회학자라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국내에는 루만의 마지막 주저 <사회의 사회>를 비롯해 여러 종의 저작이 번역돼 있다. <사회적 체계들>도 루만을 알려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주저 가운데 하나다. 이 책은 이미 2007년에 <사회체계이론>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된 바 있다. 그러나 루만의 까다로운 용어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이번에 <사회적 체계들>이라는 제목으로 전면 개역판이 다시 나왔다. 루만 사회학에서 ‘사회적 체계’(soziales System)와 사회체계(Gesellschaftssystem)는 그 함의가 아주 다르다. 이번 개역판이 책 제목을 ‘사회적 체계들’이라고 한 것은 루만의 원제를 충실히 따른 것이다.

 

독일 북부 뤼네부르크에서 태어난 루만은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마흔이 될 무렵까지 법원·정부·대학에서 행정 관료로 일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이 시기에 낮에는 행정 업무를 하고 밤에는 학문을 연구했다. 1960년 루만은 하버드대학 단기 연수 과정에 참여했는데, 이때 미국 사회학을 이끌던 탤컷 파슨스로부터 구조기능주의 이론을 배우고 큰 자극을 받았다. 루만은 1965년에야 뮌스터대학 사회학과에 등록해 박사학위를 받고, 1968년에 신설 빌레펠트대학의 사회학부 정교수가 됐다. 이후 루만 사회학의 체계적 구축 작업이 본격화했다. 대학 임용 때 루만은 연구계획을 제출하라는 대학 당국의 요구를 받고, ‘연구 대상: 사회이론, 연구 기간: 30년, 비용: 없음’이라고 짧게 답했다. 이 답변 그대로 루만은 이때부터 세상을 떠나는 1998년까지 30년 동안 성실하고도 일관성 있게 연구를 계속해 70여 권의 저작과 450여 편의 논문을 써내며 독자적인 사회이론을 구축했다.이렇게 세워진 루만 사회학은 흔히 ‘체계이론’ 또는 ‘사회적 체계이론’이라고 불린다. 루만의 체계이론이 구축되는 과정은 3단계로 나뉘는데, 첫 번째 단계를 이루는 것이 1984년에 출간된 <사회적 체계들>이다.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정치·경제·법률·학문·가족·종교·예술을 포함한 근대사회의 개별적 기능체계들을 탐사하는 책을 쓰고, 마지막으로 1997년 <사회의 사회>를 펴냄으로써 자신의 사회이론을 완성했다. 말하자면 <사회적 체계들>을 토대로 놓은 뒤 여러 사회적 체계들을 분석한 책들을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사회의 사회>라는 지붕을 덮은 셈이다. 이렇게 체계적으로 자신의 이론을 정립해 완결하고 세상을 떠난 사람도 루만 말고는 달리 찾아보기 어렵다.<사회적 체계들>은 부제가 ‘일반이론의 개요’인데, 여기서 ‘일반이론’은 ‘체계에 관한 일반이론’을 뜻한다. 따라서 이 책은 일차적으로 루만 자신이 생각하는 ‘체계’를 먼저 제시하고, 그 체계에 입각해 ‘사회적 체계’를 설명하는 방식을 따른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대로, 루만은 세상 모든 것을 ‘체계’라는 틀로 설명한다. 세상은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이 체계를 루만은 크게 네 가지, 곧 ‘기계’, ‘유기체’, ‘사회적 체계’, ‘심리적 체계’로 나눈다. 여기서 ‘심리적 체계’란 ‘의식을 지닌 인간’을 가리키는 루만식 표현이다. 체계를 쉽게 이해하려면, 생명체를 떠올려 보는 게 좋다. 루만은 현대 수학·물리학·생물학으로부터 중요한 아이디어를 얻었는데, 특히 1970년대 칠레의 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가 내놓은 ‘자기생산’(Autopoiesis)이라는 개념은 루만 사회학에 중대한 통찰을 주었다.

 

마투라나는 생명체의 근본특성을 ‘자기생산’으로 보았다. 자기가 자기를 생산하면서 자기를 유지해 가는 것이 생명체다. 이 생명체는 외부 환경의 영향을 받지만 그 환경과는 분리된 자율적 체계다. 체계로서 생명체는 매 순간 신진대사를 하면서 자기의 구조를 스스로 재생산해 나간다. 이 반복되는 신진대사 활동이 멈추면 생명체는 소멸한다. 체계도 이 생명체와 유사한 방식으로 자기동일성을 유지한다. 이런 자기생산적인 자율적 체계는 인간의 심리적 체계에서도 발견되며, 사회적 체계도 자기생산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렇게 루만의 체계이론은 세상 모든 것을 포괄하는 보편이론의 성격을 띠고 있다. 모든 것을 체계로 설명하려는 이런 야심 때문에 루만은 ‘사회학의 헤겔’이라고도 불린다. ‘정신’으로 모든 것을 설명한 헤겔 철학의 거대 기획을 사회학에서 해낸 사람이 루만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사회적 체계’란 무엇인가. 사회적 체계는 사회관계에서 형성되는 온갖 형태의 체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사회적 체계를 루만은 ‘상호작용’, ‘조직’, ‘사회’ 세 가지로 구분한다. 여기서 짐작할 수 있듯이 루만이 말하는 ‘사회적 체계’는 거시적 구조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관계가 형성되면 ‘사회적 체계’라고 부를 수 있다. 가령, 상점에 들러 물건을 살 때 점원과 손님 사이의 관계도 ‘사회적 체계’이며, 길거리에서 길을 묻는 사람과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의 짧은 만남도 ‘사회적 체계’를 이룬다. ‘상호작용’은 이런 관계를 가리킨다. 두 사람 이상이 만나 일시적이나마 동일한 관심사로 엮이는 것이 ‘상호작용’이다. 그 관심사가 끝나면 상호작용은 해체된다. 마찬가지로 ‘조직’은 동호회에서부터 기업체까지 아우르며, 가입과 탈퇴의 방식으로 구성된다. 이런 온갖 사회적 체계를 포괄한 것이 사회다. 루만은 이 사회를 ‘사회체계’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사회적 체계’와 ‘사회체계’는 루만의 이론 안에서 엄연히 위상이 다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사회적 체계의 작동 방식이다. 루만은 사회적 체계가 ‘소통’(커뮤니케이션)의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말한다. 소통은 정보를 알려주고 그 정보를 이해하는 과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소통은 ‘정보-통보-이해’의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누군가 생각 곧 정보를 다른 사람에게 통보하면, 그것을 받아들여 이해하는 순간에 소통이 성립한다. 생명체가 끊임없는 신진대사로 자기를 유지해가듯이, 사회적 체계도 끊임없는 소통의 반복으로 자기를 유지해간다. 만약 소통이 사라지면 사회적 체계는 소멸한다. 물건을 사고 나면 손님-점원의 ‘상호작용’이 끝나는 것과 같다. 루만의 사회적 체계는 구조를 이루고 있지만, 이 구조는 구조주의의 구조처럼 확고하지는 않다. 이 사회적 체계의 총합으로서 ‘전체 사회’를 지구적 차원에서 보면 ‘세계사회’가 된다. 루만은 진화론적 관점에 서서, 사회가 성장하고 진화하며 그 결과로 세계사회가 필연적으로 성립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더 생각해볼 것은 루만의 사회적 체계에서 인간의 위상이다. 루만 이전의 사회학에서 인간은 사회를 능동적으로 만들어가는 ‘주체’로 설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동시대 독일 사회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이 인간을 행위의 주체로 그리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루만의 인간은 주체가 아니라 체계를 구성하는 ‘기능적 요소’일 뿐이다. 인간은 수많은 사회적 체계 속에서 그 체계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역할을 한다. 집에서는 부모인 사람이 직장에서는 직원이고 동호회에서는 회원이며 정당에서는 당원이다. 따라서 이렇게 다른 사회적 체계에 놓일 때마다 개인의 기능과 성격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루만의 사회학은 주체를 기능으로 대체한, 주체 없는 사회학이다. 그런 점에서 루만은 하버마스로 대표되는 주체의 패러다임을 체계의 패러다임으로 바꾼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체계 안에서 주체를 배제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루만은 개인들의 고유한 개성을 구출한다. 사회적 체계의 눈으로 보면 개인은 체계를 이루는 요소에 지나지 않지만, 개인 그 자체로 보면 각자가 고유한 개성과 인격을 지닌 존재다. 따라서 개인은 체계와 마찰을 빚을 수도 있고 체계에 반기를 들 수도 있으며 체계 안에서 다른 꿈을 꿀 수도 있다. 젊은 날 루만이 관료 생활을 하면서 학자의 꿈을 키워간 것이 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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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968783.html?_fr=mt0#csidx204909ff7cc2ce69b02e15072cc924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