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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인정 못 받으면 나한테도 아무 의미 없나요?”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12. 9. 11:23

“남 인정 못 받으면 나한테도 아무 의미 없나요?”

등록 :2020-11-21 16:28수정 :2020-11-21 17:26

 

[토요판] 그림책 작가들의 ‘돌파하는 힘’
(4) 유설화

달리기에서 거북한테 패배한 토끼
남 시선 상관 않는다면 어땠을까
내 한계 어딘지 살피는 건 중요해

“자유롭고 거침없는 작가 보면 샘나죠
평범한 그림체지만 그게 제 것이고요

타인의 기대와 자기욕심 잘 다뤄야죠
내 불안 정체 무엇인지 질문하면서요”

 

서해로 넘어가는 가을 햇빛이 예쁜 그림자를 드리우는 10월 말 늦은 오후, 인천 서구 왕길동 자택의 작은 서재가 유설화 작가의 작업실이다. 여러 초등학교에서 요청해 온 온택트 강연을 잘 진행하려고 작업실 벽면에 소음 방지 패드를 붙였다. 등 뒤로 대표작인 <슈퍼 거북> 포스터가 보인다. 해란 작가

 

▶ 최혜진. 사람을 인터뷰하는 에디터이자 미술과 문답한 과정을 글로 쓰는 작가. <그림책에 마음을 묻다> <우리 각자의 미술관>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등을 썼다. 삶에 위로를 받고 싶을 때면 늘 그림책이 곁에 있던 것을 생각하며,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과 ‘세상을 돌파하는 힘’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달리기 경주에서 토끼를 이긴 거북이가 있다. 거북이가 결승점을 통과한 순간, 이야기는 멈추고 정지 화면으로 승리가 박제된다. 가장 극적인 순간을 동결시킨 스틸 이미지, 그 위로 흐르는 엔딩 크레디트. 하지만 삶의 문법은 다르다. 현실은 원 테이크로 이어지는 무편집 원본 영상. 자신이 러닝 타임 어디쯤 와 있는지 누구도 모른다.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섰던 이도 무대에서 내려와 자신에게 할당된 다음 장면을 맞이한다. 토끼를 앞질러 결승점에 들어온 거북이의 다음 장면은 어땠을까?여기 상상 하나가 있다. 동물 사이에서 거북이는 영웅이 된다. 토끼를 이긴 거북이는 분명 재빠를 거라고 온 마을이 기대한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거북이는 비장한 표정으로 ‘빠르게 살자’라고 쓰인 하얀 띠를 머리에 두르고, 빨라지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한다. 번아웃이 올 때까지 이를 악물고 자신을 몰아붙인다. 이 이야기에서 승리는 좋은 사건일까 나쁜 사건일까?

유설화 작가의 대표작들. 해란 작가

작업 중인 유설화 작가. 그는 2014년 이전까지 약 10년간 수십권의 책에 삽화를 그렸다. 그 10년의 시간은 단련의 시간이었고, 책 만드는 일이 결국 소통하는 작업임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해란 작가

 

달리기 경주에서 거북이에게 진 토끼가 있다. 체면을 구기고 내상을 입은 토끼는 달리기의 ‘달’ 자만 들어도 진저리가 난다. 달리는 법을 잊어버리기 위해 온갖 훈련을 한다. 귀가 축 늘어지고, 털에 윤기가 사라지고, 배가 볼록 나올 때까지 뛰고 싶은 욕망을 옭아매다가 우연히 휩쓸린 달리기 대회에서 전력 질주를 하고 만다. 그리고 깨닫는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자신은 달려야만 하는 존재이며, 앞으로는 타인의 인정과 상관없이 마음껏 달리고 싶다고. 질문해보자. 이런 패배는 좋은 사건일까 나쁜 사건일까?익숙한 우화에 참신한 뒷이야기를 붙인 <슈퍼 거북>, <슈퍼 토끼>의 작가 유설화는 주위의 인정과 자기 수용의 역학 관계를 탐구하는 책을 만든다. 버려진 상처 때문에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숨기며 악착같이 돈을 모은 유기견 월월씨(으리으리한 개집), 인간에게 쓸모없다는 이유로 버려진 말, 개, 닭, 고양이가 결성한 음악 밴드(밴드 브레멘), 타고난 장난기로 주변과 불화를 일으키는 엄지 장갑(잘했어, 쌍둥이 장갑) 등 그가 무대 위로 올린 인물들은 하나같이 질문을 품고 있다. ‘주위에서 인정하지 않는 나의 본성을 어떻게 해야 할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 흔들렸던 유설화 작가가 그려낸 이야기는 감추고 싶은 게 많아 웅크린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유설화 작가가 작업 중인 그림들. 해란 작가

 

끝까지 하다 보면 겸허해져요

―27살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셨다고요.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고등학생 때 미대에 가고 싶었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웠어요. 취직이 잘된다는 선생님 말씀만 믿고 농학과에 진학했어요. 터무니없는 선택이었지요.(웃음) 전공 공부 대신 미술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했어요. 결국, 자퇴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미술 학원에 다녔고요. 학비를 벌어 스물일곱살에 시각디자인 전공으로 다시 대학에 갔어요. 그랬으니 수업이 얼마나 재미있었겠어요. 일러스트 수업 때 교수님이 다시마 세이조의 <뛰어라 메뚜기>를 보여주시는데 전율했지요. 그림책이 정말 멋있는 예술이구나, 나는 저걸 해야겠다 결심했어요.”―인터넷 서점에 작가님 이름을 검색하면 85권의 목록이 나와요. <슈퍼 거북>이 나온 2014년 이전까지 약 10년간 수십권의 책에 삽화를 그리셨는데, 그 시기를 어떻게 기억하시나요?“지망생 시절에 동화 합평 교실에 다니면서 황선미 선생님의 <마당을 나온 암탉>, 윌리엄 스타이그의 <아벨의 섬>을 읽고 동화에 푹 빠졌어요. 힘들고 외로운 마음을 보듬고 다시 꿈꿀 수 있게 하는 글에 그림을 보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어요. 하지만 일감을 얻기 무척 어려웠지요. 출판사 문턱은 너무 높아서 아예 쳐다볼 수 없었고, 아동용 전집을 만드는 기획사를 열심히 찾아다녔는데, 제 그림이 특출나지 않으니 그조차도 어려웠지요. 합평 교실에서 알게 된 동화 작가님 소개로 겨우 첫 삽화 작업을 할 수 있었어요. 그 뒤로는 일이 들어오는 대로 모두 받아서 했어요. 거절하면 다시는 일이 안 들어올 것 같은 불안감에 매일 12~16시간씩 작업했죠. 가슴 아팠던 기억도 있어요. 약속대로 삽화를 가져갔는데 기획사에서 혹평하면서 자신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림 수정을 하라는 거예요. 작업비를 미루는 회사, 유명 작가 그림체를 노골적으로 따라 하라고 지시하는 회사도 있었어요. 그 요청만큼은 받아들일 수가 없더라고요. 저에게 그 10년은 단련의 시간이었어요. 책을 만드는 일이 결국은 소통하는 작업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었고, 출판사와 관계 맺는 요령이나 스스로 만든 작업 규칙을 엄수하는 법을 터득한 시간이었지요.”

“‘이기거나 진다고 원래 생김새가 바뀌는 건 아닌데, 승패 이후에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질문이 오랫동안 제 안에 있었어요. 토끼와 거북이 우화를 통해 오래된 질문을 새롭게 꺼내볼 수 있었지요.” 해란 작가

 

―첫 그림책 <슈퍼 거북>과 6년 후 출간한 후속작 <슈퍼 토끼>는 성공과 실패의 정의가 다음 사건에 의해 바뀐다는 진실을 보여줍니다. 사회가 인정하는 성공의 의미에 대해 오래 숙고한 흔적이 느껴져요.“승부에 연연하지 않는 친구들을 보면 신기해요. 저는 승부에 집착하며 살았던 사람이거든요. 어릴 때 시험을 보거나 달리기 경주를 하면 이기고 싶다, 망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컸어요. 초등학교 4~5학년 무렵 같은 반에 정말 예쁘고 똑똑한 친구가 있었어요. 저도 공부를 못하지는 않아서 항상 그 친구가 1등, 제가 2등을 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시험에서 제가 1등을 한 거예요. 청소 시간에 친구가 울면서 저에게 항의했고, 저는 잘못한 게 없는데 미안하다고 사과했어요. 그날 이후로 저를 향한 선생님과 부모님의 기대가 갑자기 높아져서 부담스러웠고요. ‘이기거나 진다고 원래 생김새가 바뀌는 건 아닌데, 승패 이후에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질문이 오랫동안 제 안에 있었어요. 토끼와 거북이 우화를 통해 오래된 질문을 새롭게 꺼내볼 수 있었지요.”―<슈퍼 거북>의 주인공 꾸물이는 ‘경주에서 이긴 거북이는 당연히 빠를 것이다’라는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기로 해요. 빨라지기 위해 억척스럽게 노력하는 장면에서 꾸물이가 너무나 진심이라서 웃기면서 짠하고, 독자로서 응원하고 싶어져요. 하지만 꾸물이는 본성에 반대되는 노력을 한 건데요. 이런 노력에도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너무 노력한 나머지 피로가 쌓인 꾸물이는 토끼와의 재경주에서 잠에 들어 결국 져요. 대중의 관심은 다시 토끼에게 쏟아지고, 자신을 향한 기대감이 낮아진 틈을 타서 꾸물이는 제자리로 돌아가 느린 삶을 되찾지요. 어찌 보면 원점처럼 보일 수 있어요. 하지만 꾸물이는 남들의 속도에 더는 흔들리지 않아요. 자기 증명에 대한 강박에서도 놓여나고요. 얼핏 무의미해 보이는 노력의 시간이 가져다준 결과예요. 스스로 설득이 되는 지점까지 노력해본 자가 가질 수 있는 고요이지요. 자기를 끝까지 소진하면 오히려 결과에 겸허해져요. 더 할 수 있는 노력이 없을 때까지 해보면 남들이 뭐라든 스스로 인정할 수 있어요.”―<슈퍼 토끼>의 재빨라씨, <으리으리한 개집>의 월월씨 모두 본성을 감추려고 억척스럽게 노력하다가 우연한 순간에 본성대로 반응하는 모습을 보여요.“본성을 잠시 감출 순 있어도 없앨 순 없다고 생각해요. 제 안에 감추고 싶은 부분이 여전히 많아서 자꾸 그런 이야기를 짓나 봐요. 망치는 걸 두려워하는 습성, 과감한 표현보다 자잘한 설명에 능한 그림체, 욕먹지 않으려는 모범생 경향… 이런 저의 눈에 반짝이는 작가들이 보여요. 자유롭고 거침없이 그리는 작가들이요. 배가 아프죠. 샘도 나요. 그런데 그게 전부예요. 며칠 질투하다 제자리로 돌아와요. 정보의 이해를 돕는 데에 최적화된 저의 그림체는 오랫동안 평범하다는 평을 들었어요. 하지만 그게 내 것이에요. 삽화가로 부단히 애쓴 10년이 만들어준 소중한 내 것이죠. 빛나는 재능을 가진 이들처럼 일필휘지로 그리지 못하지만, 제 책이 자랑스러워요.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했고, 이것이 내가 만들 수 있는 최상의 것임을 알기 때문이에요.”

<슈퍼 거북> <슈퍼 토끼>는 밑그림부터 수작업으로 진행했고, 색연필과 잉크 펜을 이용했다. 현재 작업 중인 차기작은 컴퓨터로 밑그림을 그린 뒤 출력해서 색연필로 채색하고 있다. 해란 작가

 

나라는 사람의 윤곽 확인하기

―건강하게 인정 욕구를 다루는 지혜는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나의 자리를 헷갈리게 하는 타인의 기대와 자신의 욕심을 잘 다루어야겠죠. 저 역시 인정 욕구 때문에 괴로웠던 시간이 길었어요. 여전히 노력 중이고요. 그때마다 이렇게 생각해요. ‘언제나 주목받을 수는 없어. 무대 위에 설 때도 있고, 응원석에서 박수를 보낼 때도 있는 법이야. 결점 많고 답답해도 이게 나야. 현실을 직시하고 여기에서부터 해보자.’ 본성에 맞는 선택인지 확신이 들지 않을 땐 반대로 해보면 알 수 있어요. 늘 일을 벌이며 바쁘게 살지만, 본성에 어긋난 느낌에 시달린다면 느리게 살아보는 거예요. 이때 자신의 반응을 면밀히 관찰해야 해요. 느려진 속도에 평온함을 느끼는지, 지루함이나 불안감을 느끼는지, 불안의 정체는 뭔지 끊임없이 질문하면서요. 죽을 때까지 모르는 게 자기 자신이라고 하잖아요. 아무리 내 몸, 내 생각이어도 노력 없이 파악할 수 없어요. 세상의 소음 속에서 내 목소리를 분간하려면 노력, 그거 해야지요.”인정에 목마른 사람에게 “왜 이렇게 남을 신경 써? 자기만족이 중요하지”라는 말은 도덕 교과서처럼 들린다. 올바르지만 죽어 있는 말이다. 타인의 관심에 완벽히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모두에게 통용되는 인정 갈망과 자기 수용의 적정 비율도 없다. 균형점은 결국 스스로 알아내는 수밖에 없다.인정 욕구는 질문하게 한다. ‘왜 사람들이 나를 안 알아주지?’ 노력하면 알아줄 거라는 기대로 최선을 다해본다. 그래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으면 다음 단계의 질문과 대면하게 된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나에게도 의미가 없나?’ 유설화 작가는 이 질문에 차곡차곡 답하듯 그림책을 지었다. 기대감과 실망감이 밀물 썰물처럼 들고 나는 풍경을 모두 지켜보며, 묵묵히.온 힘을 다해 뛰어도 우리는 여전히 자기 자신밖에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이 턱에 차도록 뛰어볼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윤곽을 확인하기 위해, “여기까지가 한계이고, 너는 최선을 다했어”라고 자신이 설득되는 지점을 찾기 위해. 경계에 울타리를 세우면 비로소 안심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 보이는 소중함이 있다.

 

∙유설화 작품 목록 2014년, <슈퍼 거북>, 책읽는곰2017년, <으리으리한 개집>, 책읽는곰2018년, <밴드 브레멘>, 책읽는곰2019년, <잘했어, 쌍둥이 장갑>, 책읽는곰2020년, <슈퍼 토끼>, 책읽는곰∙대표작<슈퍼 거북> ∙작가 소개 오랜 시간 동시, 동화, 논픽션 지식책 등 다양한 분야의 어린이책에 삽화를 그렸다. 2014년 발표한 첫 그림책 <슈퍼 거북>이 서울시 한 도서관 한 책 읽기 사업에 선정되면서 이름을 알렸고, 발표한 책 대부분이 매해 5쇄 이상 증쇄할 정도로 어린이 독자에게 열렬한 지지를 얻고 있다. 색연필과 펜으로 밝고 설명적인 그림을 즐겨 그리지만, 언젠가는 틀을 깨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비밀스러운 열망을 품고 있다.

조금 더 솔직한 작업을 위해 주문을 외듯 스스로에게 전하고픈 메기지를 남겨놓은 것이라고 한다. 해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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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토요판] 그림책 작가들의 ‘돌파하는 힘’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970904.html#csidxae1c18bf0aefccfa76843c488ecdd2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