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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을 일 없는 사건의 연속, 바닥에서 선택한 웃음

성령충만땅에천국 2020. 12. 9. 11:39

웃을 일 없는 사건의 연속, 바닥에서 선택한 웃음

등록 :2020-12-05 09:03수정 :2020-12-05 10:04

 

[토요판] 그림책 작가들의 ‘돌파하는 힘’
(5) 고정순

링 위에서 두들겨 맞는 권투선수
손바닥이 상처투성이가 된 아이
불러주는 사람 없어 사라진 아이
‘그림책 출판 어둠 담당’이래요

난독증·학습 장애·중증의 질병
붓과 손 동여매고 그림 그리기도
고통이 내게 무얼 가르치나 생각
“코너에 몰릴 땐 팍 웃어버려요”

 

고정순 작가의 작업실이자 집인 서울시 은평구 아파트는 미니멀리스트의 집처럼 세간이 매우 적고 정리정돈이 완벽하게 되어 있었다. 거실에는 테이블 하나만 덩그러니 있었는데, 매일 화구를 들고 나와 이 자리에서 작업하고 마치면 다시 모든 재료를 깨끗하게 정리해 수납한다. 매일 아침 청소로 하루를 시작하게 한 아버지 덕에 생긴 습관이다. 워낙 잠이 없어서 하루에 두세시간 정도 자고 나머지 시간에는 늘 작업을 한다. 매일 루틴을 철저히 지켜서 자칭 별명이 ‘칸트’다. 작가 뒤에는 작업 중인 차기작 원화가 놓여 있다. 인간에 의해 지구에서 고통받는 여러 동물을 향한 미안함을 담은 책으로 오스트레일리아 산불에 희생된 코알라를 기리는 작품도 들어가 있다. 해란 작가

 

철학자 세네카가 말했다. “우리를 눈물로 몰아가는 것들에 대해서는 웃음, 그것도 많은 웃음이 올바른 대응법이다.” 좋은 말씀이다. 하지만 반문이 든다. 눈물 나게 괴로운데, 웃으라니요. 사람 마음이 어떻게 그래요? 원망스럽고, 화나고, 미워하기 마련이에요. 웃을 일이 없는데 어떻게 웃어요?

 

고정순 작가의 그림책은 이에 대한 대답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시련을 마주하고 있다. <가드를 올리고>의 무명 권투선수는 링 위에서 흠씬 두들겨 맞는 중이다. 총 44쪽의 본문 중 40쪽이 맞는 장면이다. <철사 코끼리>의 소년 ‘데헷’은 사랑하는 아기 코끼리 ‘얌얌’을 잃었다. 고철을 주워 철사 코끼리를 만들고, 손바닥이 온통 상처투성이가 될 때까지 끌고 다닌다. <나는 귀신>의 아이는 가정과 학교에서 모두 소외되었다. 불러주는 사람, 보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점점 사라져간다. <어느 늙은 산양 이야기>의 산양은 쇠락해가는 몸을 바라보다 죽을 날이 다가왔음을 직감하고, 죽기 딱 좋은 곳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웃을 일 없는 사건의 연속’. 인터뷰 준비를 하며 드문드문 목격한 고정순 작가의 생애 역시 그래 보였다. 쪽방촌과 성매매 집결지를 이웃에 둔 영등포 무허가 흙집에서 보낸 유년기, 난독증과 심각한 학습 장애, 화실비 대신 청소를 해주며 오후반 수업을 들은 직업학교 시절, 생활비를 벌기 위해 했던 오만가지 아르바이트, 난방시설이 없거나 싱크대 옆에 변기가 붙어 있는 작업실을 전전한 20대…. 여기서 끝이 아니다. 27살에 드디어 평생 헌신하고 싶은 꿈―그림책 작가―을 발견했지만, 중증의 다발성통증증후군 진단을 받게 되었다. 합병증을 일으키는 독한 약을 먹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었다. 붓을 손에 동여매고 그림을 그렸다. 빚을 갚으려고 홍대 골목을 돌며 그림을 팔았다. 어렵사리 계약해 준비하던 책은 인쇄를 앞두고 출판사의 일방적인 통보로 엎어졌다. 데뷔까지 12년이 걸렸다.그런데 기묘하게도, 울어 마땅한 그와 그의 주인공들은 기어코 웃는다. 자꾸만 쓰러지는 사람이 자꾸만 일어나 옅게 웃는다. 고단한 내력을 투명하게 비추는 시리고 아린 웃음. 인터뷰 내내 맞은편에서 빛의 세례가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지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에게 스며 나오는 존엄의 빛이었다.

고정순 작가. 사진 해란 작가

버려진 상처와 장애 가진 아이들

―작가 소개에 자주 나오는 문장이 있습니다. ‘글로 쓸 수 없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고, 그림으로 그릴 수 없는 이야기를 글로 쓴다.’ 자기표현 도구를 두가지나 가진 셈인데, 뜻밖에도 유년기에는 난독증과 학습 장애를 겪으셨다고요.

 

“저는 인식 체계가 좀 다른 것 같아요. 숫자나 단어는 암기를 너무 못하는데, 풍경이나 정서는 아주 세밀하게 기억해요. 학교에서 나머지 공부 하기 일쑤였고, 빨리 글을 떼야 한다는 스트레스로 아예 글자를 읽지 못하는 상태가 된 적도 있어요. 우울한 성향에 잘하는 것 하나 없고, 벌레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니 부모님 걱정이 크셨지요. 그리고 제가 보고 느낀 사실을 이야기하면 어른들 입장에서는 황당한 이야기로 들릴 때가 많았어요. ‘거짓말하지 마라’라는 훈계를 늘 들었지요. 그러면 기가 죽어 한참 입을 닫았고요. 내 안의 느낌을 설명할 언어가 없었어요. 이해받고 싶다는 욕망이 가득했죠.”

 

―자기표현 방법을 깨친 계기가 있나요?

 

“초등 고학년이 되면서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그때부터 일기를 썼어요. 학교보다 일기가 더 좋았어요. ‘오늘은 재밌었다’라고 한 획 한 획 쓰면 ‘아, 내가 재밌었구나’ 하면서 저의 감정을 다시 인지할 수 있었는데, 감겨 있던 눈이 떠지는 것처럼 마음이 환해졌지요. 그때부터 뭐든 끼적이는 걸 좋아했고, 중학교에 올라가 시를 만났어요.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워 늘 갑갑했던 제 안의 여러 느낌이 시의 세계에서는 편안하게 수용되는 것 같았어요. 한참 후에 그림책을 알았을 땐 저에게 꼭 맞는 언어를 찾은 느낌이었고요.”

 

―‘그림책 출판계의 어둠 담당’이라는 농담을 즐겨 하실 정도로 작가님 책에는 슬프고 아픈 이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나는 귀신>에서는 가정 폭력 피해자 어린이를, <코끼리 아저씨는 코가 손이래>에서는 열악한 환경에서 희생하는 소방관을 불러냈습니다. <아빠는 내게 지켜줄게>의 ‘아빠’는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는 택배노동자이고, <점복이 깜정이>의 두 주인공은 버려진 상처와 장애를 가지고 있어요.

 

“오랫동안 남들과 다르다고 느끼며 가졌던 제 안의 외로움과 소수성 때문일 거예요. 비슷하게 외로운 존재가 있으면 알아봐주고 싶어요. 단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알아봐주면 누군가는 살 수 있거든요. 개인의 아픔이 사회적 문제와 연결되는 경우도 많지요. 그럴 때는 정확하게 현실을 알리고 ‘우리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 좀 해보면 어때요?’ 권하는 마음으로 책을 만들어요. <철사 코끼리>에서 주인공 ‘데헷’은 자신을 아프게 하던 철사 코끼리를 용광로에 녹여서 아름다운 종을 만드는데요. 슬픔과 고통을 다른 의미로 승화한 장면이에요. 살면서 시련과 부정적 사건을 막을 도리는 없어요. 일단 찾아오면 온몸으로 겪을 수밖에 없지요. 다만 그 끝에서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면 고통에 지지 않을 수 있어요. 고통이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깨닫는 인식의 전환이요. 행복과 즐거움도 물론 소중해요. 하지만 나와 타자에 대해 간절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건 반대의 감정이에요. 삶의 우선순위를 통렬하게 고민하게 하지요. 부정적 사건이 벌어지면 저는 자문합니다. ‘자,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키고 싶은 게 뭐지?’라고요.”

원화를 모아둔 서랍. 아크릴 물감, 크레파스, 파스텔 크레용, 색연필, 사인펜, 동판화 등 작품마다 매우 다른 재료와 기법을 사용한다. 서랍 가장 위쪽에 놓인 건 최근작 <늙은 산양 이야기>의 원화다. 판화를 어렵게 배워가며 한 작업으로 몸을 많이 써야 해서 체력적으로 힘들었는데, 한계치를 넘어가니 정신이 오히려 맑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해란 작가

고정순 작가의 책들. 해란 작가

 

―27살에 발병한 다발성통증증후군이 진행되면서 심장 판막에 이상이 생기기도 하고, 손아귀에 힘이 풀려 끈으로 붓과 손을 단단하게 동여매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셨어요. 질병이라는 시련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고 계신지요?

 

“질병 덕분에 정신승리를 잘하는 사람이 되었지요.(웃음) 고통이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는지 자꾸 생각해요. 예전에 의료 민영화 시도가 있었을 때, 제일 먼저 광화문에 달려간 사람이 저예요. 장애인 학우들과 공부 모임도 계획하고 있고요. 예전에는 독선적이고 불같은 성격이었어요. 질병이 공감할 줄 아는 사람으로 바꿔주는 것 같아요. 저만 외톨이인 줄 알았는데, 세상에는 정말 아픈 사람이 많더라고요. 발병 초기에는 억울함과 두려움에 짓눌려 있었는데, 이제는 역으로 저의 고통을 팔고 다녀요. 강연 가면 초반에 이렇게 말해요. ‘저의 생애주기와 작품을 떼어놓을 수 없어서 제 강연은 사연팔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요.(웃음) 몸이 불편한 독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면 제 고통을 전시하는 것도 괜찮아요. 고통으로 연대할 수 있다면요.”

 

―<가드를 올리고>에서 내내 얻어맞던 무명의 복서는 겨우 일어나 만신창이가 된 얼굴로 희미하게 웃어 보입니다. 그리고 다시 가드를 올리죠. <늙은 산양 이야기>는 죽음을 향해 가는 이야기인데, 그 안에 유머가 있어요. 끝끝내 웃음을 선택하는 이 기묘한 힘의 정체가 궁금합니다.

 

“어머니가 남겨주신 정신적 유산 같아요. 무허가 흙집을 벗어나려고 밤낮 가리지 않고 시장에서 일하시면서도 늘 유머러스하셨어요. 고등학생 때 선생님이 어머니를 모셔 오라고 한 적이 있어요. 성적 나쁜 꼴찌 그룹 학생들은 야간대학 지원서를 써야 해서요. 상담이 생각보다 길어져서 바깥에서 기다리던 저는 창피함이 몰려왔죠. 그런데 교무실에서 나오는 어머니가 밝게 웃으시는 거예요. ‘야, 여기 모인 애들 중에 네가 공부 제일 잘한대. 네가 1등이란다야.’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막내 이모가 알려주셨어요. 그날 어머니가 이모를 붙잡고 엄청 우셨대요. 제가 온전한 개인으로 홀로 서지 못할 것 같다고요. 그런데도 당신의 불안의 무게를 딸에게 전가하지 않으려고 제 앞에선 농담을 하신 거예요. 어머니 영향인지 저도 코너에 몰렸다고 느낄 때는 팍 웃어버려요. 안 웃으면 어쩔 거예요? ‘내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을 때는 화, 원망 등 다른 감정이 올라올 수도 있죠. 하지만 진짜로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는 웃음밖에 기댈 곳이 없어요. 웃는다고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웃다 보면 상황에서 한 발짝 떨어질 수 있고 무게를 견디기가 조금은 수월해지지요.”

고정순 작가는 초기에는 깔끔하게 정리된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연필 스케치를 하고, 펜으로 윤곽선을 똑떨어지게 그린 후 색으로 채우는 방식을 취했다. 그 방식이 갑갑하고 표현력이 떨어지는 그림을 만든다는 것을 깨달은 뒤에는 여러 바탕색을 겹치고 쌓으며 우연히 만들어지는 질감 위에서 연습 없이 곧장 그리는 방식을 좋아하게 되었다. 해란 작가

 

건강한 단념, 산뜻한 체념

―누군가의 눈에는 열악해 보일 수 있는 나의 환경을 수긍하고 아끼는 마음이 산문집 <안녕하다>에 가득 담겨 있습니다. 원망 대신 감사를 선택하는 힘은 어디에서 올까요?

 

“제가 아는 긍정은 ‘뭐든 할 수 있다’는 무한긍정의 희망과는 달라요. 저는 현실 인식을 먼저 합니다. 결여, 결핍, 부족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의 제한된 범위가 생겨요.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 나아가 환경을 이용하는 법을 찾아요. 일례로 통증이 너무 심해 침대에 누워만 있던 때가 있었어요. ‘이런 자세로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A4용지를 접어서 백지 견본 책을 만들고 그 위에 연필로 끼적일 순 있겠더라고요. 그때 약 50권의 견본 책을 구상했는데, 거동이 나아진 후 나온 책 대부분이 이때 구상한 작품이에요. 제가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좋아해요. 아버지 때문에 출셋길이 막혔다고 아들이 한탄하자 선생이 이렇게 말하죠. ‘이제 진짜 공부가 시작된 거다. 벼슬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네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거라.’ 이 말이 저에게 깊게 다가왔어요. 어차피 데뷔도 늦었고, 몸도 아프고, 많이 배운 사람들처럼 세련되지 못할 바에는 촌스럽더라도 진짜 내 이야기를 하자 마음먹었어요. ‘어차피 이렇게 된 거’라고 생각하면 의외로 홀가분해지면서 다시 해볼 힘이 생겨요.”

 

살면서 단념 혹은 체념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노력 여부와 관계없이 가질 수 없는 것, 이룰 수 없는 것이 있다. 하지만 온 세상이 불가능은 없다고 떠드는 통에 ‘할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에는 패배자가 된 기분에 시달리고 속이 꼬인다. 건강한 단념, 산뜻한 체념을 배울 순 없을까.어떤 종류의 웃음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훗 웃어버리면 부정적 감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소가 쉭 빠져나간다. 끓다가 터져버리지 않게 적정 압력을 지켜준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고 웃어서 행복하다’라는 빛바랜 경구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이런 웃음은 행복의 원인도 결과도 아니다.

태도다. 방향성에 대한 선택이다. 조건 없이 삶을 사랑하고, 단서를 달지 않고 생을 붙들기로 결심한 사람의 의지다.

 

고정순 작품 목록 2013년, <최고 멋진 날>, 웅진주니어2014년, <솜바지 아저씨의 솜바지>, 낮은산2016년, <슈퍼 고양이>, 웅진주니어 2016년, <안녕하다>, 제철소 2017년, <점복이 깜정이>, 웅진주니어2017년, <가드를 올리고>, 만만한 책방2018년, <오월 광주는, 다시 희망입니다>, 봄나무2018년, <엄마 왜 안 와>, 웅진주니어2018년, <철사 코끼리>, 만만한 책방2019년, <아빠는 내가 지켜줄게>, 웅진주니어2019년, <코끼리 아저씨는 코가 손이래>, 노란상상2020년, <시소: 나, 너 그리고 우리>, 길벗어린이2020년, <나는 귀신>, 불광출판사2020년, <어느 늙은 산양 이야기>, 만만한 책방 대표작<가드를 올리고> 작가 소개 야간 전문대학에서 공예를 공부하고 진로를 모색하던 20대 어느 날, 그림책 <백만 번 산 고양이>와 <새벽>을 읽고 머릿속에서 종이 울렸다. 지망생으로 12년을 보냈다. 오래 쌓아둔 이야기를 몽땅 풀어놓듯 거침없는 속도로 신작을 낸다. 연필, 오일 파스텔, 유화 물감, 콜라주, 판화 등 작품마다 재료를 달리 쓰는데, 화풍을 결정하는 건 체력이다. 아픈 몸을 살지만, 입담과 유머감각은 누구보다 살아 있다.

▶ 최혜진. 사람을 인터뷰하는 에디터이자 미술과 문답한 과정을 글로 쓰는 작가. <그림책에 마음을 묻다> <우리 각자의 미술관>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등을 썼다. 삶에 위로를 받고 싶을 때면 늘 그림책이 곁에 있던 것을 생각하며,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과 ‘세상을 돌파하는 힘’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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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토요판] 그림책 작가들의 ‘돌파하는 힘’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972915.html#csidx03dc269f2ce6738842f4ffcd731a9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