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말썽 많은 며느리 - 단편 [오승재]

성령충만땅에천국 2021. 1. 29. 12:03

말썽 많은 며느리 - 단편

은혜 추천 0 조회 22 21.01.13 15:02 댓글 0

현재페이지 URL복사 https://cafe.daum.net/seungjaeoh/J74U/115?svc=cafeapiURL복사

 

말썽 많은 며느리

 

 

 

 

삼대째 기독교 가정에 안 믿는 며느리를 드린 것이 말썽이었다. 애초 홍 장로 내외는 불신자를 며느리로 받아들이는 것을 결사반대하였다. 믿지 않은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독자인 아들을 어찌 안 믿는 여자와 짝지어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들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자기는 그 여자 아니면 아무와도 결단코 결혼할 수 없다고 했다. 타협안은 그 여인을 교회로 인도하여 믿게 하고 세례를 받게 한 뒤 결혼을 허락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신붓감이 반대하였다. 결혼하기 위해 예수를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 애 아니면 안 되겠어? 얼굴도 참하고 예쁘지. 성격도 명랑해서 나무랄 것은 없더라만 안 믿는 것이 흠이다.”

“엄마도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러니 아빠 좀 설득해 주세요. 신앙은 자유인데 안 믿는다고 결혼 못 하면 말이 돼요?”

“그래도 우리 집안은 안 된다. 장로, 권사 가정에 안 믿는 며느리가 말이 되니? 이건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는 문제다.”

“제가 얼마 만에 마음을 연 여인인지 아시지요. 체면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사무엘의 어머니 민 권사는 아들이 첫사랑에 실패하고 아예 결혼을 포기하고 있던 처지였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네가 주일마다 그 애를 좀 달래서 같이 교회에 나오면 안 되겠니?”

“어머니, 그 애가 무엇이 아쉬워서 나를 위해 교회를 나온단 말입니까? 외형적으로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영접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은 스스로 깨달음이 와야 하지 않겠어요?”

“그럼 교회에 나올 생각이 나기까지 인내하고 기다려야지.”

“어머니, 제가 늙어 죽는 것을 보고 싶으세요? 성경에도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요?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어요. 함께 살다가 믿음이 오면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되는 게 아니겠어요?”

“나는 그 애가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네가 신앙을 버리고 떠날 것 같아서 그런다. 어떻든 이것은 그 애가 세례라도 받으면 모르지만 절대 안 되는 일이다.”

홍 장로 내외는 사무엘이 그 애와 어울려 다니는 것을 볼 때 빨리 짝지어주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다. 중학교 여선생이라는 김영애는 미모에, 웃는 얼굴에 그 심성도 보통 착해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꼭 며느리로 삼고 싶은데 종교가 문제였다. 부모님은 신앙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불교 신자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자기는 불교 신자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신앙을 갖는 것이 싫은 거요?”

자기는 신앙을 갖는다면 어떤 교리에 얽매이게 되어 그 좁은 공간 안에 사는 것이 싫다고 말했다. 홍 장로는 기독교는 교인을 얽매는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죄에 얽매인 인간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영애는 만일 불교와 기독교 둘 중 하나를 택한다면 자기는 불교를 택하고 싶다고 말했다.

“기독교는 배타적이어서 불교를 말살하고 잡아먹으려 하지만 불교는 너그럽지 않아요? 누구든지 비록 기독교인이라도 절에 숙식할 방이 필요하다면 빌려주고 대접해 주거든요.”

이건 처녀가 너무 당돌하다고 생각했다. 기독교인이 안 되면 며느리도 삼지 않겠다는 홍 장로에게 할 말이 아니었다. 홍 장로는 이런 당돌한 처녀는 도저히 며느리로 받을 수 없겠다고 내심 그녀를 포기하였다. 그러나 외아들인 사무엘의 간절한 청원 때문에 결혼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결혼식은 교회에서 하기로 하였는데 당회장 목사는 신부가 안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교회의식에 따라 기도하고 찬송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의 주례사를 하였다. 교인들은 장로 집안에서 불신자 며느리를 데려왔다고 식장 안에서 소곤거리고 신부 측은 어색한 모습으로 있었지만, 어떻든 압도적인 기독교 분위기 속에서 결혼예식은 치러졌다. 신혼여행을 갔다 온 후 첫 주일을 맞았다. 이날은 목사님과 교인들에게 축하해 주어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교회에 나가야 한다는 시어머니의 말을 따라 교회 출석을 하였고 얼결에 신입 교인 등록을 하였다. 신입 교인은 구원의 확신을 위해 별도로 목사님에게 6주간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에 다음 주부터는 그녀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기독교 가정에 들어와서 혼자서 딴짓하고 다닐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새벽기도만은 반대하였다. 자기는 아침에 실컷 자고 나야 정신이 맑아 하루 활동이 상쾌하다고 말하며 이것은 오랜 습관이라 깰 수가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신부가 시부모 말을 곱게 받아들이는 일이 없었다.

“애야, 기독교인은 하루 생활을 기도로 시작해야 한다. 너도 새벽기도를 나갔으면 좋으련만”

시어머니는 정말 며느리가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는 몸짓과 말투로 권하였다.

“어머니 저도 제때 눈을 뜨면 이불 속에서 오늘 하루 어떻게 지낼 것인지 계획한답니다. 꼭 하나님께 하루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면 집에서 일어나 기도해도 되지 않아요? 하나님은 꼭 교회 안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니까요.”

이렇게 꼬박꼬박 대답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이 다 녹기도 전에 심한 한파가 계속되던 날이었다. 시어머니는 새벽기도에 나가다가 미끄러져 팔이 부러졌다.

“어머니 새벽기도를 안 나간 교인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열심인 어머니를 하나님께서 돌봐 주시지 않고 이렇게 넘어지게 하셨대요?”

그녀는 비아냥거리듯이 말했는데 시어머니는 팔이 부러져도 속상하지 않은지 태연하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공평하시므로 그리하신 거란다.”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는 다 죄인이어서 벌을 받아야 마땅한 존재들인데 아무 일이 없이 살아온 것은 하나님이 오래 참고 있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다친 것이 당연하고 안 다친 것은 감사한 일이라는 말이다.”

영애는 불편한 시어머니를 부축하여 교회에 나가서 곁에 앉아 예배를 드렸는데 그때마다 시어머니가 손을 잡아주는데 그 사랑과 따뜻한 마음이 전해져서 예배가 생소하지 않았다. 목사님의 ‘확신 반 성경공부’가 끝날 무렵부터 해당 여전도회에서 회의에 참석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드디어 교회가 옭아매기 작전에 돌입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귀찮아서 입으로는 “예” 하고 마음으로는 “아니요”라는 대답을 하고 출석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에는 그 여전도회가 노방전도(路傍傳道)를 하는 날이기 때문에 꼭 출석하라는 것이었다. “내가 전도를 받아야 할 처지인데 무슨 전도?”하고 코웃음을 치고 자기는 학교 수업 때문에 낮에는 시간을 비울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동안 전도지를 뿌리며 교회 나오라고 구걸하는 사람을 자기가 얼마니 경멸했던가 하는 것을 생각했다. 그걸 받고 교회에 가겠다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왜 금전 낭비, 시간 낭비를 하며 생활에 바쁜 교인들을 괴롭히는가? 영애는 학교 수업이 없더라도 이런 전도방식을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해당 여전도회가 봉사하러 가는 데 꼭 참석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때는 놀토(노는 토요일)가 되어 무슨 핑계가 없었다. 끌려가다시피 나갔는데 노숙자의 점심 대접을 하는 데서 설거지 도움을 주는 일이었다. 헌신적인 목사님 부부가 이 일을 몇 년째 하고 있다는데 감동이었다. 설거지가 끝나고 그녀는 목사 사모께 물었다.

“사모님은 이렇게 오래 봉사를 해 오면서 싫증 난 일은 없으셨나요?”

“싫으면 이 일을 계속할 수 있겠어요? 즐겁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주께서 어떤 사람을 붙여 주실까 하고 흥분된답니다.”

“거짓말 같아요. 믿을 수 없어요.”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입니다. 신랑이 할 일을 내가 손발이 되어 동역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기쁘답니다. 그분은 나를 사랑하시고 그런 그분과 나는 늘 같이 있고 싶답니다.”

“세상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생각하는 그런 따분하고 협소한 공간만 아니라는 것을 사모님은 아세요?”

“알지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예수 안에 있는 사람과 예수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예수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 안에 들어오면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이 너무 불쌍해진답니다.”

영애는 예수에 미치면 ‘예수 안에 있는 세상’,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온종일 교회에서 살고 싶고 무언가 교회에서 일을 안 맡겨 주면 서운하고, 무슨 일을 맡겨 주면 정말 감사하고, 교회 마당에 풀이라도 뽑고 싶고 교회 청소라도 하고 싶고 …… 그러다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천당에 가고 싶다. 이렇게 자기를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살고 싶은 인생이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자기는 그렇게 맹목적인 신앙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시적인 이런 봉사활동은 즐거웠다. 남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래서 다음에도 놀토에 봉사할 사람이 필요하면 전화를 달라고 했다. 한 직장의 동료 선생에게도 말해서 같이 이 즐거움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일 년도 지나서 김영애 선생은 세례를 받았다. 교회가 꼭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교회 생활을 하면서 세례를 안 받을 이유도 없었다. 또 시부모님이 간절히 원했던 것이기도 했다.

“그대는 하나님 앞에 죄인인 줄 알며 마땅히 그의 진노를 받을 만하고 그의 크신 자비하심에서 구원 얻을 것밖에 소망이 없는 자인 줄 압니까?”

그러면서 머리에 찬물을 얹을 때 그 물이 목줄을 타고 내려왔다. 그녀는 몸이 오싹하고 떨리는 것을 느끼며 자기는 ‘죄인’이라고 생각지도 않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자라고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공연히 경건해지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녀가 여러 교인 앞에 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고 선언하는 순간이 되었다. 그녀는 적어도 자기가 강제로 타의에 의해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자기를 택했는지는 모르지만 자기는 ‘예수 안’의 사람이 된 것이다. 여러 모임에 참석하면서부터 좀 바르게 하나님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그런데 이런 의미에서 그녀가 교회 모임 중 가장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 ‘구역예배’였다.

첫째 이것을 예배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교회는 예배라는 말을 너무 남발하고 있었다. 구역예배, 첫돌 감사예배, 칠순 감사예배, 개업 감사예배, 입주예배, 고위직 취임감사예배, 박사학위취득 감사예배, 기공 예배, 완공 예배, 장례식 위로예배, 입관 예배, 발인예배, …… 총회장당선 감사예배, 국회의원 당선 감사예배도 있었다. 이 중 어떤 것이 참 예배인가? 예배라면 적어도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셔야 한다. 불기둥과 구름 기둥은 아니라도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져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는 기도와 찬양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어야 한다. 회중의 응답이 있어야 한다. …… 예배라 할 때 그녀는 적어도 이런 그림을 머리에 그리고 있었다. 칠순까지 무사히 살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하다. 그래서 친구들과 가족들을 연회장에 초청하고 국악 연주단을 부르고 여흥을 위해 노래방 기기를 장치하고 목사를 불러 칠순 감사예배를 드린다. 먼저 간단히 예배를 드린다고 발표한다. 그러면 구순, 백수까지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기도하면 끝날 것을 왜 예배라는 이름으로 여러 사람을 불러 모으고 하나님을 괴롭게 해 드리는가? 하는 것이 영애의 생각이었다.

구역예배도 이와 비슷했다. 구역장이 성경 한 절을 읽고 “이 말씀에서 은혜받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간단히 말하면 되는 것을 뭐라고 자기 나름의 성경 해석을 붙이는데 마뜩잖은 해석이다. 그리고 헌금을 걷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경건히 드리는 예배인가? 말씀은 목사가 아니면 전할 수 없다고 권위를 내세우는 목사가 이런 때는 초신자에 가까운 구역장을 설교자로 세워 듣는 사람을 오도하게 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것은 예배에 대한 모독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구역예배를 위해 금요일 밤 예배 후 구역예배 교육을 하는데 예배 인도 교육도 해야 하는가? 경애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평신도들은 직장에서 고된 일을 해야 한다. 저녁에 오면 쉬고 싶다. 쉰다는 것은 내일을 위해 재충전하는 일이다. 그런데 재충전은 교회나 구역에 가서 하라고 한다.

구역이 소단위로 모이게 하는 것은 그 주변에 사는 신도들이 친교 하며 각 가정의 기쁜 일과 슬픈 일, 또 기도 제목 등을 알아서 서로 자기들의 삶을 나누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주목적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번은 헌금을 걷지 말자고 제안했다가 혼난 일이 있다. 영애는 교회가 돈 걷는 일이 너무 많아 배금주의로 빠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제안했었다. 십일조, 주일헌금, 감사헌금, 선교헌금, 절기헌금, 일천번제 헌금 …… 등 헌금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헌금을 하지 않으면 구역예배 보고양식에 헌금 난이 있는데 공란이 되어 부끄럽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구역예배’라는 명칭도 아예 없애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구역 친교의 날’을 정하여 구역원들이 음식을 장만하여 모이고 살아온 이야기를 하고 신앙을 지키면서 살기가 어려웠던 일을 털어놓고 이 일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찬송도 발표하여 함께 부르고 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녀가 교회에 나온 지 4년째 되던 해에 부 구역장으로 임명받자 바로 자기의 아이디어를 실천하였다. 한 달에 한 번, 장소는 영애 자기 집으로 하였다. 이 층에 있는 방 하나를 비우고 어린이 놀이방처럼 꾸몄다. TV와 어린이용 비디오와 그림책을 사들이어 비치하고 놀이 기구를 사 넣었다. 이것은 시어머니의 허락과 협조를 받아 한 것이었다. 비용은 그녀가 전액 부담한 것인데 그녀는 억지로 하거나 인색한 마음으로 하지 않았다. 시어머니도 교회 일에 늘 부정적이고 참여하지 않던 말썽꾸러기 며느리가 앞장서기 때문에 기쁘게 응한 것이었다. 그날 저녁은 부부와 어린애들까지 온 구역 식구가 저녁을 먹지 않고 음식을 장만하여 들고 와서 애들은 어린이 놀이방에서 놀고 어른들은 어른끼리 모여 찬양하고 힘들었던 삶을 나누고 기도하곤 했다. 어린이 방에는 담당자를 한 사람 정하여 올려보냈다. 예배가 아니고 친교와 말씀 나눔과 기도회였다. 모두 다 기뻐하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렇게 모이자는 의견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은 구역예배 보고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한 달 중 나머지 3주는 모인 장소도 없고 또 헌금 난은 늘 공란이었기 때문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교회에서는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교회의 명령을 어기고 그렇게 행한 사람은 교회의 권징(勸懲)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려면 교회에 건의하여 당회를 거쳐 허락을 받은 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구역예배’라는 명칭을 없애고 ‘구역 친교의 날’로 정하였다는 것은 교회의 법도를 위배하고 당회의 권위를 손상했기 때문에 근신 또는 제명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영애 선생은 우선 당회장에게 불려가서 꾸중을 들었다. 신참자(新參者)가 왜 교회에서 정한 법도를 마음대로 어기느냐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조목조목 목사에게 따져 물었다.

구역에서 요식행위를 따라 하는 형식적 행동이 예배가 되는가? 교회에서는 목사 외에는 말씀을 전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구역에서는 목사도 아닌 평신도가 말씀을 전해도 되는가? 헌금은 예배 행위 도중 드린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바친 것이며 하나님께 바친 것은 교회에 귀속된다고 가져가는데 그것이 옳은가? 헌금을 안 하면 안 되는가? 사회활동으로 지쳐 있는 평신도들을 매주 밤 모이도록 하는 취지는 무엇인가?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이 취지가 더 살아난다면 그것으로 대체할 수는 없는가? 매주 모이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빼앗아 간다면,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는 범죄가 아닌가?

결국, 교회와 목사에게 불순종한 영애는 시부모에게 맡겨 훈계하기로 하고 앞으로 이런 행동을 하지 않도록 주의를 듣고 훈방되었다. 결과는 그녀가 매주 구역예배에 참석하지 않게 되고 많은 구역원도 기쁨을 잃게 되었다.

김영애 선생은 계속 교회에서 말썽을 부렸으나 출교는 당하지 않았고 세례도 받았으며 10년 뒤에는 교인들 사이에 말썽꾸러기로 이름이 알려져 군사를 뽑는 투표에 오히려 많은 표를 받아 권사가 되었다.

홍 장로 내외는 며느리가 권사가 되어 희색이 만면하였다. 안 믿는 여인이라 할지라도 품성이 고우면 이렇게 권사까지 될 수 있다고 말하며 안 믿는 며느리를 데려와서 확실하게 믿는 권사를 얻었다고 자랑하고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김영애 선생은 권사가 교회의 계급도 아닌데 만나는 사람마다 “권사님, 권사님”하고 어른 대접을 해서 퍽 거북하였다. 그들이 자기를 비꼬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따뜻하게 사랑하는 것을 느끼기는 했지만.

권사가 된 지 얼마 안 되어 목사가 갑자기 교회를 떠나겠다고 선언하고 떠나버렸다. 거기다 그 목사를 따라 들어 왔던 사찰 집사도 떠났다. 교회 버스로 교인들을 데려오던 사찰이 떠났을 뿐 아니라 교회 청소를 도맡아 하던 사찰부인까지 떠나니 교회는 큰 혼란에 빠졌다. 양들을 인도하는 목자라는 사람이 적어도 일 년의 유예기간을 주지도 않고 훌쩍 교회를 떠나니 이럴 수가 있느냐고 소곤거렸다. 거기다 사택도 자기 이름으로 등기하고 있었고 차도 개인 이름으로 가지고 있던 것이어서 목사는 몽땅 가지고 떠나니 교회는 재정적으로나 행정적으로 대혼란이었다.

급히 모셔온 목사는 목회를 잘하고 계셨는데 후임자에게 맡기고 조기 은퇴해서 시골에 살고 계시는 분이었다. 교회의 딱한 사정을 알고 사택이 없어도 자기 집에서 차로 다니며 교회를 돕겠다고 해서 모신 분이라고 했다. 그동안 부목사와 전도사들이 강단을 맡고 있었는데 새 목사가 들어와서 차분한 설교를 시작하자 교회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되었다. 거기다 새 목사는 자기가 나서서 사역자들을 동원하여 교회 청소도 하며 급할 때는 부 교역자들을 시켜 버스를 운전하게 하여 교인들의 교회 출석을 도왔다. 그러자 교인들이 버스와 소형 차량 운전을 자원해서 하겠다고 나서기 시작했다. 또 교회 청소도 여전도회가 분담해서 하기로 하였다. 연말 예결산의 틀이 완전히 바뀌었다. 전엔 목사 사례비 인상 때문에 아주 시끄러웠는데 이번에는 목사가 난국을 수습하러 온 사람인데 무슨 사례비냐고 안 받겠다고 해서 실랑이였다. 교회 조직과 행정이 많이 바뀌었다. 구역예배는 없애고 원하는 구역이 있으면 조직해서 당회에 올리면 허락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이것은 김영애 권사가 평소에 원했던 것이었다. 또 성가대 지휘자는 성가대원들이 모시고 싶은 사람을 찾아 자원봉사 하는 사람으로 교회가 임명하기로 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유급으로 일하고 있던 반주자도 자기도 무급으로 봉사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되자 교회가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상부 지시를 따라 움직이는 조직 안에서의 신앙 공동체가 아니라 스스로 모여 예배하고 힘을 얻어 일하는 단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모두 의무적으로 주일을 지키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할 일이 있고 맡은 일이 있어 교회에 나오는 것이었다. 설교를 들으면 그것이 자기가 하는 일에 가치를 부여하며 새 생명이 넘쳐 더욱 소중히 섬기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김영애 권사는 누군가가 자기를 ‘김 권사’라고 부르면 부끄러웠다. 권사는 계급이 아니라고 자신에게 말하며 권사가 된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권사로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이 있으리라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자기는 남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만을 위한 삶이었다. 그러면서 아픈 사람, 어려운 사람, 힘든 사람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점차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하루는 자기는 왜 주일학교 소년부 교사를 할 생각을 안 했는지 그때까지는 진정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소년부 교사가 되어 가르치면서 그들의 가정을 방문하면서 자기는 정말 자기와 다른 많은 사람과 함께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섬김을 받는 교사였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섬기는 교사였다. 지금까지 왜 교회는 사람을 구속하는 곳으로 생각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끌려다니면 그곳은 구속하는 곳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능동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면 그곳은 나를 자유케 하는 곳이다.

자기를 이렇게 변화시키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더 높은 곳에서 오는 힘이었다. 그녀는 이제 이 교회에서 말썽 많은 며느리가 아니었다. 스스로 택한 삶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이 마음의 평안을 이웃 사람들에게도 전하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