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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이름이야 아무러면 어떤가…영화 자체가 이미 성취인 것을

성령충만땅에천국 2021. 3. 6. 02:35

상 이름이야 아무러면 어떤가…영화 자체가 이미 성취인 것을

등록 :2021-03-05 17:21수정 :2021-03-06 02:01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미나리>

정이삭 감독 어린 시절 실제 경험 바탕
1980년대 이민자들 삶 생생하게 그려
찬사 속 윤여정에 한예리, 스티븐 연 등
실감 나는 가족 모습 생생하고 구체적

한 가정의 고난과 극복의 서사 넘어
폴(바울), 제이콥(야곱), 데이빗(다윗)…
아칸소 공간에 담긴 기독교적 세계관
한국 이민 특수성 넘어 보편성 획득

 

아칸소 벌판을 바라보는 제이콥(스티븐 연)과 모니카(한예리), 그리고 뛰노는 아이들. 미국 이민자 가정의 구체적인 일상 속에서 눅진한 보편성을 이끌어내는 솜씨는 천의무봉이다. 판씨네마㈜ 제공

 

큰 상들이 대개 그렇게 만들듯 <미나리>는 선댄스영화제 최고상(극영화 부문 심사위원 대상) 수상에 이어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노미네이트로 인해 영화보다는 뉴스로 먼저 왔다. 특히나 다들 아시다시피 골든글로브가 이 영화를 작품상이 아닌 외국어영화상 부문에 올린 것, 그리고 윤여정 배우를 후보 지명하지 않은 것이 꽤 거론되면서 <미나리>에 대한 이야기는 인종 관련 이슈로 다뤄지려는 양상까지 보였더랬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얘기하도록 하고, 일단 이 칼럼 본연의 소임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미나리>는 1980년대, 농장을 일궈 가족을 먹여 살리려는 아빠를 따라 미국 아칸소의 허허벌판으로 이사를 가게 된 한 한국인 가족이 겪는 일들에 대한 이야기다. 잘 알고 계시듯 이 영화는 정이삭 감독(겸 각본)의 어린 시절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덕분에 이 영화에 그려지는 가족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생생하고 구체적이다. 특히나 한국인인 우리들에게는 한국인이 아니라면 정확하게 느낄 수 없는 뉘앙스들까지 절절히 와닿는지라, 이 가족에 대한 감정이입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예컨대 할머니 순자(윤여정)가 감독의 분신인 듯 보이는 가족의 막내아들 데이빗(앨런 김)을 그냥 ‘데이빗’ 대신 ‘데이빗아’라고 부르는 호칭에 묻어 있는 그 구수함은 한국인이 아니면 좀처럼 알아채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이 영화의 주제를 응축한 작물인 미나리의 향기와 쓰임새는 물론이려니와, 한국에서 날아온 친정엄마 순자가 풀어놓는 고춧가루와 멸치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엄마 모니카(한예리)에게 순자가 날리는 “멸치 땜에 울어?”라는 ‘모르는 척’에 담긴 마음 같은 것 또한.

 

너나없이 “우리 할머니”를 외치게 만드는 윤여정 배우의 연기, 그의 전성기는 이제 시작이다. 판씨네마㈜ 제공

트럼프 시대, 잊었던 것

더구나 이 생생한 기억에 아빠 제이콥 역의 스티븐 연, 엄마 모니카 역의 한예리, 아들 데이빗 역의 앨런 김, 그리고 할머니 역의 윤여정의 연기를 비롯한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는 부족함 없는 실물감을 불어넣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당연하게도 이 영화를 한국계 미국 이민뿐 아니라 한국인 자체의 고난-생존-적응에 대한 이야기로까지 받아들이고, 그것에 웃고 울고 연민하고 공감한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화제의 대사들 중 하나인 제이콥의 “한국 사람은 머리를 써”라는 대사는 외국인들에겐 일종의 허세나 오만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은 꽤 절박한 생존 전략에 대한 대사라는 것을 우리 한국인들은 잘 안다.그런데 우리가 <미나리>의 한국인들과 그들의 고군분투 쪽에 집중하는 동안 자칫 흘려보내기 쉬운 중요한 요소가 하나 있다. 바로 영화 초반, 제이콥이 농사를 시작하기 전부터 마지막까지 꾸준히 등장하는 아칸소 현지 농부 폴(윌 패튼)이라는 인물의 존재다.폴은 제이콥이 아칸소에서 본격적으로 농사를 시작하려고 사들인 중고 트랙터와 함께 등장하는데, 도수 높은 커다란 안경에 남루한 차림새를 하고 있는 이 농부는 제이콥에게 “나, 일 잘해”라며 농장에서 잠도 안 자고 일해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제이콥의 가족들을 위한 상당히 거창하다면 거창한 기도를 올린다. 제이콥은 가뜩이나 자신을 ‘수맥 찾기 전문가’라고 소개한 미국인의 미신적 “난센스”(제이콥의 대사)를 겪은 뒤인지라, 폴의 뜬금없는 호의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 뒤의 장면에서, 제이콥과 함께 작물을 심고 있던 폴은(그가 고용된 것인지, 아니면 그냥 일을 돕는 것인지는 끝까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갑자기 엑소시즘에 대한 얘기를 불쑥 꺼낸다. 그리고 ‘이 땅에서 있었던 좋지 않은 일’에 대해 얘기한 뒤 “예수의 이름으로 여기서 나가!”라며 실제로 엑소시즘 또는 그 비슷한 것을 행한다.대체 이 인물은 뭔가. “당신 좀 미쳤어”라는 제이콥의 말처럼, 이 인물은 그저 제이콥 가족의 가족사에 끼어든 독특하고 재미있는 일화일 뿐일까. 하지만 이 인물이야말로 실질적으로 <미나리>의 테마를 한 몸에 함축하고 있는 인물이다. 이는 아칸소에 오면서 교회에 가지 않기로 결심했던 제이콥 가족이, 결국 고립과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교회에 다시 나가기 시작한 어느 일요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주친 폴의 모습을 통해 극적으로 드러난다. 폴은 아무도 없는 시골길에서 거대한 나무 십자가를 끌며 걷는 고행을 하고 있는데, 차에 태워주겠다는 제이콥의 권유에도 “이것이 나의 교회야”라며 고행을 계속한다. 땀에 전 러닝셔츠만 걸친 그의 모습은, 예배 참석을 위해 오랜만에 깔끔한 셔츠에 넥타이까지 한 제이콥의 모습과 더욱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폴=바울’이라는 이름으로도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폴은 감독이 생각하는 교회의 진정한 모습을 구현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제도화되고 세속화된 교회 대신 그것이 마땅히 지켜나가야 할 정신(!)을 자신의 교회로 삼고, 사도 바울처럼 몸을 움직이는 노동을 통해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그것을 실천한다. 고행 중인 폴과 마주치기 직전에 제이콥 부부가 ‘지나치게 많은 헌금’(100달러)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을 배치한 것에는 다분히 이러한 폴을 부각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그리고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본다면, 상당히 뜬금없어 보이던 폴의 엑소시즘 역시도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다. 사도 바울이 악령을 물리치는 능력이 탁월했다고 알려진 점을 생각하면 말이다.

 

<미나리>에는 윤여정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예리 배우와 스티븐 연의 연기 또한 놓쳐서는 안 된다. 판씨네마㈜ 제공

<미나리>는 대체적으로 두드러지지 않은 시각적 어법을 취하고 있지만, 한 장면에서 자신의 정신적 틀을 시각적으로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데이빗이 할머니에게 그냥 웃어넘기기엔 너무 심한 테러급 장난을 친 뒤 아빠 엄마에게 야단맞는 대목에서다. 무릎을 꿇고 팔을 든 채 벌을 서는 데이빗 맞은편의 엄마 아빠. 엄격한 수평적 좌우대칭 구도로 짜인 화면의 가장 앞쪽(근경) 한가운데에는 아빠가 있고, 그 뒤(중경)에는 소파에 약간 비껴 앉은 엄마가 있다. 그리고 맨 뒤(원경)인 벽에는 양 떼를 모는 예수를 그린 성화가 걸려 있다. 아빠는 가장 크고 가깝지만 가장 낮고, 성화는 가장 멀고 작지만 가장 높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사실 폴=바울뿐 아니라 제이콥=야곱, 데이빗=다윗 등, 중심인물들의 네이밍에서부터 <미나리>가 기독교적 주제를 밑바탕에 깔고 들어가고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충분히 짐작 가능한 것이다.하여 이 영화는 단순히 한국인 가족의 미국 이민사에 대한 회고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앞서 언급한 폴은 한국 방식으로 작물을 심는 제이콥에게 “아칸소에서는 아칸소 방법으로 키워야 돼”라고 충고한다. 제이콥은 폴의 조언을 무시하지만, 결국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폴의 말을 따라야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았던 제이콥은 결국 폴과 미국, 나아가 신의 방식을 따르게 된다.요컨대 영화의 주요 인물들 중 유일한 미국인(그리고 백인)인 폴은 이민으로 세워진 미국이라는 나라에 정착하기 위해 인생을 건 사투를 벌이는 이민자에게 손을 내밀고, 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새로운 땅에 (제이콥이 심은 한국 채소들처럼) 뿌리를 내리고 생육해갈 수 있도록 보듬어주는 것이야말로 미국의 정신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인물이다. 그렇다. <미나리>는 트럼프 시대(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2018년에 쓰였다)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이민의 나라 미국이 기억하고 환기해야 할 미국의 정신, 나아가 이 분노와 증오와 장벽 쌓기의 시대에 우리가 잊고 있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한 가족이 겪는 고난과 절망,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생명력 외에도, 바로 이 점 또한 <미나리>가 ‘한국 이민’이라는 특수성을 넘어 보편성을 얻어낸 지점이겠다. 그리고 골든글로브상이 이 영화를 ‘외국어’ 영화라는 좁은 카테고리로 분류해버린 처사가 특히나 안타깝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상이야 아무러면 어떤가

물론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나 마크 포스터의 <연을 쫓는 아이>처럼, 미국에서 제작된 영화가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에 노미네이트되고 수상을 한 사례는 이미 있다. ‘대사의 51% 이상이 영어 아닌 외국어’라는 요건에 의해 이 영화를 외국어영화상 부문에 올린 것에도 절차적 문제는 없다.하지만 구체적이고 지엽적인 부분으로부터 국경과 언어를 초월한 보편성을 끌어내는 것이야말로 예술 작품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런 예술 작품을 부각하고 경의를 표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상이 할 수 있고, 또 해야 마땅한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번 골든글로브의 처사는 다른 누구보다도 골든글로브가 가장 많은 것을 잃은 결정이 아닌가 싶다.하긴 상이야 어떠면 어떤가. 체호프나 카프카가 노벨 문학상을 타지 못했다고 해서 그들의 작품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 반대이면 반대이지.<미나리>의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수상을 축하한다. 작품 그 자체의 성취는 더더욱.

 

화투에 집중한 할머니, 그를 바라보는 데이빗(앨런 김)의 눈빛, 이 한 장면만으로도 영화 내내 웃음 짓게 될 듯. 판씨네마㈜ 제공

▶ 한동원 영화평론가. 병아리감별사 업무의 핵심이 병아리 암수의 엄정한 구분에 있듯, 영화감별사(평론가도 비평가도 아닌 감별사) 업무의 핵심은 그래서 영화를 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에 대한 엄정한 판별 기준을 독자들께 제공함에 있다는 것이 이 코너의 애초 취지입니다. 뭐, 제목이나 취지나 호칭 같은 것이야 어찌 되었든, 독자 여러분의 즐거운 영화보기에 극미량이나마 보탬이 되자는 생각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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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한동원의 영화감별사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985636.html?_fr=mt1#csidx937fbe1c995f303b253fc0493f48a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