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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재판장님” 사법농단, 법정의 기록](36)“윗선 요구, 재판 독립에 반하는지 스스로 따져야” 사법행정 판사의 의무

성령충만땅에천국 2021. 4. 20. 11:05

[“존경하는 재판장님” 사법농단, 법정의 기록](36)“윗선 요구, 재판 독립에 반하는지 스스로 따져야” 사법행정 판사의 의무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입력 : 2021.04.19 21:46 수정 : 2021.04.20 09:45

 

‘영혼 있는 공무원’으로

 

대법원 직원들이 2018년 8월2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신임 대법관들의 취임식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초상화 아래에서 취임사를 듣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사법행정에 재판 경험 활용 취지
법원행정처 심의관 제도 만들어

재판 독립 침해 검토 의무 주어져
‘일선 법원 사법행정 담당’도 준수

 

지난달 23일 사법농단 연루 법관에게 처음으로 유죄를 선고한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32부(윤종섭·김용신·송인석)의 판결은 재판에 개입한 사법행정권자를 형법상 직권남용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판단 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바로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 간부들의 지시 또는 요청을 받아 재판 개입의 손발·중간자 역할을 한 판사들이 ‘영혼 없는 공무원’이어서는 안 된다고 확인한 것이다. 재판 개입 관련 문건을 작성하고, 법원행정처 의사를 재판부에 전달하고, 재판부의 심증을 빼내 법원행정처에 보고한 이들이다. 법원행정처 심의관이, 일선 법원의 수석부장과 기획법관이 그런 역할을 했다.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과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 사건을 심리한 이번 재판부는 법원행정처 심의관과 일선 법원의 사법행정 담당자에게는 업무를 할 때 재판 독립의 원칙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심의관과 수석부장 등은 사법행정권자 말이라고 무조건적으로 따를 게 아니라 과연 그 말이 재판 독립을 침해하는지 여부를 스스로 검토하고 업무에 적용하는 존재라고 했다. 이번 판결은 이미 발생한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행정권 남용에 책임을 묻는 게 1차 목적이지만, 앞으로 사법행정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뜻하는 규범의 의미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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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사 심의관 단순 보조자 아니다

이들은 상급자 따르는 ‘보조’ 아냐
재판사무 판사, 지시 등과 멀어야

자신의 고유한 권한·의무 어기고
재판 개입 드러났다면 처벌 마땅

 

직권남용죄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사람에게 의무 없는 일을 시켰을 때 성립하는데, 과연 법원행정처 간부의 지시를 수행한 게 심의관의 ‘의무 없는 일’인지가 문제였다. 재판 막바지까지 검찰과 피고인들이 가장 치열하게 다툰 쟁점이다.

심의관이 의무 없는 일을 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일단 심의관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따져봐야 한다. 국정농단부터 사법농단까지 직권남용죄로 기소된 피고인들은 상명하복이 철저한 행정조직에서 상급자 지시에 따르는 것은 하급자의 의무이기 때문에, 상급자가 ‘명백히’ 위법한 지시를 한 게 아니라면 하급자의 지시 수행이 의무 없는 일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급자는 상급자를 단순히 보조했을 뿐이라 무죄라는 이른바 ‘보조자’ 논리가 여기서 나왔다.

대법원은 직권남용죄 법리를 세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판결에서 상급자가 자신의 직무를 하급자에게 단순히 보조하게 했더라도 하급자가 지켜야 할 직무집행의 ‘원칙·기준·절차’가 법령에 명시돼 있고, 이를 위반하게 시켰을 때는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것이라고 했다. 피고인들은 ‘법원행정처 심의관의 업무에 무슨 원칙·기준·절차가 있느냐’고 따졌다. 심의관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 일할 뿐 고유의 권한도, 업무를 할 때 지켜야 할 기준도 딱히 없다는 주장이다.

이 전 상임위원과 이 전 실장 사건의 재판부는 법원행정처 심의관이 ‘판사’라는 데 주목했다. 사법행정이 순수한 행정업무라면 판사 심의관이 없어도 되지만 굳이 판사 심의관을 두도록 제도가 만들어진 것은 판사의 재판업무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사법행정에 활용하려는 취지였고, 이는 모두 재판 독립 원칙을 지킨다는 전제에서 허용됐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사법행정권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고, 재판사무가 공정하고 신속하게 수행되도록 지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서 판사 심의관도 이에 맞춰야 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판사 심의관이 지켜야 할 기준으로 재판부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해 심판한다”는 헌법 제103조, “사건의 심판 외의 직에 보하거나 그 직을 겸임하는 법관은 사건의 심판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법원조직법 제52조2항을 들었다. 법관윤리강령도 있다. “법관은 모든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사법권의 독립을 지켜 나간다”(제1조), “법관은 다른 법관의 재판에 영향을 미치는 행동을 하지 아니한다”(제5조2항).

재판부는 이런 기준에 따라 심의관은 상급자로부터 받은 지시에 관해 재판 독립을 위협하지 않도록 그 이행 여부·시기·방법·구체적인 내용을 적절하게 선택할 수 있는 고유의 권한과 역할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심의관은 상급자 지시를 기계적으로 따르는 단순한 보조자가 아니고, 이 기준에서 벗어난 일을 시키는 사법행정권자는 직권남용죄로 처벌될 수 있다는 것이다.

판사는 권력·서열·지시·복종 같은 것들과 멀어야 독립된 재판을 할 수 있다는 판단이 판결에 담겼다. “원래 판사의 근본 임무는 재판사무를 수행하는 것인데, 재판사무를 담당하는 판사는 다른 사람으로부터는 물론이고 설령 그가 배석판사라고 하더라도 같은 합의부 부장판사로부터 지시를 받아 재판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헌법 제103조가 판사에게 독립하여 재판을 하도록 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판사무를 담당하는 판사는 다른 누군가로부터 지시를 받는 것에 친해져서는 안 된다. (…) 입법자는 판사 심의관이 헌법·법원조직법·법관윤리강령이 정한 기준과 절차에 따라 사법행정사무를 수행하게 된다면 그것이 재판의 독립을 위협하는 것까지는 아닐 수 있다고 판단하고 대법원장에게 판사 심의관을 보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재판 개입이라는 결과가 아니라 재판 개입을 위한 문건 작성이나 검토, 즉 ‘과정 행위’가 처벌 대상이 된다는 문제가 있기는 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판결에서 대법원은 과정 행위도 처벌할 수 있다고 했지만, 안철상·노정희 대법관은 처벌 대상이 무한정 늘어날 수 있다며 이런 방식의 처벌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을 냈다. 이번 재판부도 과정 행위를 처벌할 수는 있다고 봤다. 다만 모든 과정 행위를 다 처벌하면 공무원의 자유로운 활동이 위축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 처벌할 것인지 여부를 신중하게 검토했다고 했다. 법원행정처 간부의 지시가 판사 심의관 보임 취지에 반하는지, 판사 심의관이 한 일을 기초로 재판 개입이 이뤄졌는지 등을 따져 유죄를 판단했다. 심의관을 대상으로 한 5개 행위가 유죄로 인정됐다.

대법원 법원전시관에 법관의 독립성을 규정한 헌법 제103조 조항이 전시돼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수석부장은 재판 개입 막을 의무 있다

 

이 전 상임위원의 혐의 중엔 통합진보당 행정소송을 심리하던 재판부에 ‘각하는 부적절’이라는 취지를 전해달라고 서울행정법원 수석부장이던 조한창 판사에게 요구한 게 있었다. 조 판사는 법정에 나와 ‘각하는 부적절’이 아니라 ‘각하 등은 부적절’이라는 식으로 전했다면서 재판 개입이 아니라고 증언했다. 재판부는 “비록 조한창이 이규진으로부터 전달을 요청받은 내용을 다소 희석해 전달하기는 했으나, 조한창은 그가 전달 요청 받은 내용 중 핵심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지적을 전달하기는 했다”고 판단했다.

이 혐의의 유죄 인정은 대법원장의 사법행정권을 위임받아 일선 법원에서 사법행정을 담당하는 법원장은 물론 수석부장의 역할과 의무를 규정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앞서 수석부장 시절 재판 개입으로 기소된 임성근 판사에게 무죄를 선고한 1심 재판부는 수석부장의 업무와 권한은 법령상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했다.

이번 재판부는 수석부장은 법원장을 보좌해 공정하고 신속한 재판을 위한 지원 업무를 하는 사람으로서, 업무에서 재판 독립 원칙을 지킬 ‘의무’가 있다고 했다. 조 판사는 이 전 상임위원의 요구가 재판 독립 원칙에 부합하는지 따져보고 재판부에 전달할지 말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판결문의 한 대목이다. “행정법원 수석부장판사가 법원행정처로부터 재판사무 담당 판사에게 전달을 요청받은 사항에 관해 그 이행 여부·시기·방법·구체적인 내용을 적절하게 선택할 수 없다면, 굳이 법원조직법이 보임의 근거까지 마련해 행정법원 수석부장판사를 보임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행정법원장의 사법행정사무를 보좌하는 행정법원 수석부장판사로서는 법원행정처가 재판사무 담당 판사에게 전달을 요청한 사항이 국민의 재판청구권 보장과 헌법과 법률 기속성에 부합하는 것인지, 혹시라도 재판의 독립에 반하는 것인지 살펴 그 이행 여부·시기·방법·구체적인 내용을 스스로 판단해 재판사무가 공정하고 신속하게 수행될 수 있도록 사법행정사무를 수행할 법령상 의무가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 법원장과 수석부장을 보좌해 사법행정 업무를 하는 기획법관도 재판 독립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고 본 것은 마찬가지였다.

효율적 운영만큼이나 민주적 운영이 행정조직에서 중요하다는 판결 내용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재판부는 법원행정처가 전문분야 연구회에 중복해 가입한 사람은 탈퇴하도록 법원 내부통신망에 올린 공지글이 국제인권법연구회 와해 의도에서 나왔다고 봤다. 양승태 대법원장 등이 상고법원 설치를 추진할 수는 있지만, 조직의 효율적 운영에만 매달려 이견을 가진 사람들을 막는다면 “민주주의 요청에 반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전 상임위원과 이 전 실장이 법원행정처 심의관이었던 김민수 판사에게 중복 가입 금지조치 공지글을 올리게 한 것은 직권남용죄에 해당한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사법농단 사건에 관여된 법원행정처 심의관이나 일선 법원의 사법행정 담당자는 이 재판에서는 직권남용의 대상이지만, 그 스스로 재판 개입에 가담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검찰은 이들을 기소하지 않았다. 일부는 김명수 대법원장이 징계 청구했는데 경징계를 받았고, 일부는 징계시효가 지나 징계 받지 않았다. 2018년 12월 대법원 법관징계위원회는 징계를 결정하면서 심의관들의 징계 사유를 ‘품위 손상’으로 판단했다. 법관징계법상 징계 사유는 품위 손상 외에 ‘직무상 의무를 위반한 경우’도 있지만 이들이 직무상 의무를 위반하지는 않았다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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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4192146005&code=940301#csidx1d52d679b92610aa1963d9d4ba4b6f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