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00530 사랑받는 자와 사랑하는 자(요 21:15-18)[아가페>필레오]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1. 16:19

 

100530 사랑받는 자와 사랑하는 자 (21:15-18)

성경본문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미국에 마이크 비클이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IHOP(International House Of Prayer)’, ‘세계중보기도의 집대표이시고 세계적으로 중보기도운동을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신앙의 열정이 있고 관심이 많은 분들이 IHOP에 많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책에서 자기의 경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아주 능력 있는 부흥사 목사님과 유럽에 집회를 갔습니다. 그분의 집회에 참여해보니 그분의 능력이 얼마나 놀라운지 말씀을 선포하는데 병자들이 일어나요. 그 모습을 보고 너무 놀라고 흥분이 됐어요. 집회를 마친 다음에 호텔로 돌아오면서 자기가 받았던 감동을 이야기합니다. “목사님, 제가 오늘 정말 놀랐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그렇게 놀랍게 역사하실까요? 그러한 일이 일어날 때 목사님은 그것을 어떻게 느끼십니까?” 이렇게 물어봤어요. 그런데 뜻밖에도 나는 별 다른 느낌이 없습니다.” “아니, 그렇게 병자가 일어나고 그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도요?” “내게는 늘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 일은 그 일이고 내게는 때로는 따분하고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아까 병자가 일어날 때 받았던 감동과 놀라움보다 더 크게 놀랐어요. 아니 어떻게 병자가 그렇게 질병에서 고침받고 이적을 체험하는데 정작 그 일을 행하고 있는 본인은 지루하다고 얘기하는가. 그러고 보니 자기의 신앙경험을 되돌아볼 때, 주님의 은혜를 체험했을 때는 마음이 뜨거워지고 성령으로 충만해서 이 상태가 영원히 나를 떠나가지 않으리라 기대했지만 뜨겁다가도 때로는 냉랭해지는 것이 자기의 현실이었음을 깨닫게 돼요.

자신도 중보기도 사역을 할 때 막 교회가 부흥하고 사람들이 모이고 중보기도 사역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이 전세계로부터 몰려와서 그 집회가 다 끝날 때까지 뜨거웠지만 집회가 끝난 후 그들이 다 돌아가고 홀로 남았을 때 몸도 지치고 마음도 식어지고 불만족스러웠던 것을 기억하게 된 거예요. 그분이 오랫동안 고민했어요. 왜 내 사역은 남들이 볼 때에는 놀랍게 성장하고 부흥하고 발전하건만  정작 그 한복판에 서 있는 내 마음은 이렇게 안정되지 못하고 심지어는 지쳐있고 지루해하고 불만족스러운가? 그러다가 말씀을 읽는 가운데 구약의 아가(雅歌)’, 아름다운 노래라는 말씀이 있어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이야기를 읽다가 아가 7 10절에 보면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랑하는구나이건 여인의 고백이에요. ‘솔로몬 왕 같이 지체 높은 왕이 나같이 천한 여인을 사랑할 리가 없어. 아마도 왕의 권력을 가지고 많은 여인을 잠깐 사랑하고 내버리듯이 그렇게 사랑하는 것일는지 몰라.’ 의심했어요. 그러나 왕이 진심으로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발견한 여인의 고백이에요.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역의 크기와 관계없이 마이크 비클이라고 하는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됐어요.

여러분, 오늘 굉장히 중요한 말씀을 드린 거예요. 여러분이 잘나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 아니에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으셨기에 이유를 묻지 않고 사랑하는 거예요. ‘영적으로 깨어난다’, 영적 각성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을 믿으면서 그 안에서 지극한 행복을 누리는 거예요. 그러려면 첫째, 나를 보기 전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깊이 생각해야 돼요. 이런 유머가 있어요. 주제가 남자의 마음이에요. 아주 큰 마트에서 카트를 끌고 가던 두 남자가 부딪혔어요. 한 사람은 나이 든 늙은 남자고 한 사람은 젊은 남자에요. “아이고, 미안합니다. 아내가 어디 갔는지 찾느라 한눈 팔다 부딪혔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랬더니 맞은편의 늙은 남자도 말하기를 어쩌면 나하고 똑같습니까. 나도 지금 억지로 마트에 끌려 왔다가 아내를 잃어버려가지고 찾는 중인데. 아내가 어떻게 생겼습니까?” 젊은 남자가 얘기합니다. “우리 집사람은 잘생겼죠. 시원시원하게 키도 170cm이 넘고 금발에다가 몸매도 좋습니다. 아 참, 선생님 사모님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그랬더니 늙은 남자가 말합니다. “그건 신경 끄고 당신 아내나 찾으러 갑시다.” 이것이 남자의 마음이란 말이에요. 그저 예쁜 여자 찾는다는 얘기죠.

두 번째는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어떤 눈으로 보시는가 하는 것을 확인해야 돼요. 우리 인생의 결정적인 문제는 먹고 사는 문제인 것 같지만 아니에요. 우리 마음의 그늘이에요. 정죄감이라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아휴, 나는 그저 반쪽 짜리 신자야.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고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데 나는 늘 헌신하지도 못하고 뭐 하나 제대로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리지도 못하고 몸을 드리지도 못하고 헌신하지도 못하고.’ 이게 정죄감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그거 어떻게 해결해야 되는지 아세요? 하나님이 뭘 찾으시는가 하는 것을 먼저 봐야 돼요. 성경에는 하나님을 이렇게 표현했어요. ‘놀라우신 하나님, Wonderful God.’ 그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해야 돼요.

목사에게 한 주간은 얼마나 빨리 가는지 모릅니다. 주일예배에 이렇게 여러분하고 만나서 설교하고 돌아서서 주일 저녁에 잠깐 쉬고 월요일이 시작되면 무슨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것 같아요. 얼마나 빨리 돌아오는지 몰라요. 정말 정신 없어요. 그런데 지난 주간은 이상하게 시간이 멈춘 것 같았어요. 분명히 똑 같은 일들을 하는데도 시간이 멈춘 것 같았어요. 왜 그러냐? 가족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제 큰 딸이 어제 왔거든요. 직장생활을 하니까 올 수가 없잖아요. 4년 만에 휴직을 하고 잠깐 들어오게 됐어요. 총알같이 달리던 시간이 지난 한 주간은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였어요. 째깍째깍 하는 게 삼 년 지나가는 것 같았어요. ‘, 별 수 없구나. 이게 아버지의 마음이구나.’ 사람도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겠어요. 꼭 그 딸이 예뻐서가 아니에요. 나중에 보시면 알겠습니다만 예뻐서가 아니에요. 뭐 공부를 잘해서가 아니에요. 내 딸이니까. 이유는 그거 하나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잘하고 못하고는 두 번째 문제에요. 헌신하는 것도 두 번째 문제에요. 본능적인 사랑이에요. 내가 지었고 내가 낳았기 때문이에요. 원초적 사랑이에요. 하나님도 그러신 거예요. 그 불붙는 사랑을 알아야 돼요. 어제 밤 늦게까지 얘기했어요. 오랜만에 만나니까 별의별 이야기가 많았어요. 거 이상하죠. 왜 그렇게 딸이라면 사족을 못쓰고 한 마디 더 듣고 싶어하고 실없는 소리라도 더 하고 싶어하고, 이게 아빠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오늘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를 찾아오셨어요. 죽었다가 부활하셨다는 사건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입니까? 그러나 오히려 베드로에게는 그 사건 까닭에 자신이 더 부끄러운 거예요. 그것을 믿지 못했기에 부끄러웠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주님의 고통에 참여하지 못하고 주님을 부인하고 심지어는 저주했던 일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견딜 수 없어요. 그래서 멀리 도망가버렸어요. 부활의 소식이 들리지 않는 저 갈릴리 바닷가로, 주님이 자기를 부르시기 전에 아무런 소망 없이 살던 그 바닷가로 다시 돌아갔는데 주님이 거기까지 찾아오셨어요. 그리고 묻는 거예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사실 베드로는 주님이 붙여주신 별명이고 원래 이름은 시몬이잖아요. 요한의 아들이잖아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첫 번째 물음이에요. 왜 주님이 이렇게 물었냐 하면 이런 일이 있었죠. 유월절 만찬식사를 하시면서 오늘 이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랬더니 베드로가 뭐라고 얘기합니까? 단호하게 일어나서 다른 사람들은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결단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과연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말하죠.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우리 성경에는 다 같이 사랑한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만 헬라어를 찾아보면 조금 달라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물음에서는 우리가 흔히 아는 아가페, 동사로 아가파스이런 말을 썼어요.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에요. 목숨을 내놓는 사랑이에요. 그렇게 사랑하느냐 그랬더니 베드로가 뭐라고 답했느냐 하면 아니오, 나는 사람들끼리 나누는 필레오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라고 얘기했어요.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가룟 유다의 배신을 아시고 그날 식사를 할 때에 너희가 다 깨끗하지만 한 사람은 아니다그랬어요. 가룟 유다 같이 반역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주님을 이미 거부한 사람, 그 사람은 깨끗하지 않아요. 그러나 베드로 같이 내가 결단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분수를 모르고 장담했지만 주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주님이 아셔요. 그것은 깨끗한 마음이라고 인정해주셨어요.

여러분,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것 하고, 주님을 거부하고 배신하는 것과는 구분해야 돼요. 혼동하면 안 돼요. 이 자리에 나와서 우리가 주님 앞에 나는 반쪽 짜리 신앙인입니다 하는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그렇게라도 고백하는 것은 내 마음 깊은 곳에 비록 겨자씨만큼 작지만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는 고백이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와 예배 드리는 거예요. 주님이  물으시는 것은 베드로를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고 거부하고 심지어는 저주했던 그 뼈 아픈 실패와 자기 절망으로부터 하나씩 벗겨주시려고 정신과 의사 같이 하나씩 치유해주시는 거예요.

두 번째 또 물으셔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제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는 게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셔요. 그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가파스로 묻고 베드로는 필레오로 대답해요. 온전한 사랑으로 사랑하느냐 물었을 때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아니오, 나는 사람의 불완전한 사랑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기도하실 때에 함께 기도해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세 제자가 정신 없이 자고 있었어요. 그런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깨닫지 못하고 자고 있었어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말씀하셨어요.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여기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프뉴마라고 해요. 영이란 말이에요. 우리의 속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셨기에 하나님이 아니면 만족을 얻을 수 없는 영적 갈망이 있어요. 소원이 있어요. 그러나 육신’, 단순한 몸이 아니라 우리의 본능, 자아라고 하는 본능은 하나님을 거부해요. 내 인생은 나의 것, 내가 주도하기를 원해요. 내 맘대로 살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 육신에 휘둘려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해요. 이 육신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일이 잘 되면 교만하고 일이 안 되면 절망해요. 이걸 잘 알아야 돼요. 우리는 교만할 수 있고 또 절망할 수 있어요. 이게 우리의 모습이에요.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지음 받은 우리의 속사람,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있어요. 그것 아니면 우리가 살 수 없기에.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셔요. 우리의 속사람이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사랑을 공급받는 거예요. 그때에만 우리의 눈이 열리는 것이죠.

세 번째 주님이 묻습니다. 이번에는 격을 낮춰서 물으셨어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했을 때, 이제까지는 아가파스로 물으셨던 주님이 베드로와 눈높이를 맞추시고 필레오로 물으셔요. ‘그래, 그러면 좋다. 그러면 인간적인 사랑, 그것으로라도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이 눈높이를 낮춰주시니까 베드로가 움찔했어요. 사람들끼리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도 나는 불완전해요. ‘주님, 부족하지만 그래도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베드로의 세 번 부인의 수치를 벗겨주시려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물으셨어요. 한 없는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시는 거예요.

여러분, 저는 참 하나님이 공평하시다고 생각해요. 어떤 점에서? 우리에게 조건은 다 달라요. 우리가 IQ를 재면 다 똑같이 150이 나오겠습니까? 다 달라요. 달란트가 다른 거예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다 달라요. 하나님이 하셨어요. 우리가 태어날 때 부모를 선택하지 않았어요. 유전인자가 다 달라요. 생김이 달라요. 성격과 기질이 다 달라요. 모든 게 다 달라요. 그러나 어떤 조건 속에서도 공통점이 하나 있어요.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한 순간은 사랑에 빠질 때에요. 그렇잖아요. 사랑에 빠지면 잘 생긴 사람이나 못 생긴 사람이나 많이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한국사람이나 인도네시아사람이나 모든 조건이 사랑 앞에선 다 허물어져요. 이유가 되지 않아요. 이게 참 은총이잖아요. 사람도 눈이 맞고 사랑에 빠지면 그 순간만큼은 지극한 행복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여러분, 신앙생활의 비밀은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헌신하는 것, 아니오, 그건 다 나중 문제에요. 이런 지극한 사랑,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시는 사랑으로 오늘도 내게 물 붓듯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눈이 열리는 거예요. 귀가 열리는 거예요.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거예요. 오직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게 신앙생활이에요. 그럴 때에만 우리 마음에 감격이 일어나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솔직히 말해서, 저나 여러분이나 가진 게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고 이기적이고 욕심덩어리인 나로 인하여 행복한 사람이 있어요. 나로 인하여 잠 못 이루는 사람이 있어요. 나만 밤낮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거 얼마나 놀라운 일이에요. 한편으로는 이게 얼마나 불합리하고 어처구니 없는 일이에요. 그러나 희한하게도 그 순간만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에요. 나의 허물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유를 묻지 않고 나를 사랑하신다. 이 사랑에 눈 뜰 때에 응답이 일어나는 거예요. 저는 늦게 자고 아침에 못 일어나는 스타일이에요. 그런데 스스로 놀랐던 사건이 하나 있어요. 제가 연애할 때, 지금 아내와 만났을 때 서울에서 늦게 밤에 만나서 극장에 갔다 온 기억이 나요.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첫 차로 자기 사는 데로 가야 된대요. 그리고 헤어졌는데 그 사람을 기쁘게 해주려고 생각하다 보니까, ‘그래, 내일 아침 첫 차를 탈 때 터미널에 나타나서 멋있게 배웅해줘야 되겠다.’ 그래서 시계를 맞췄어요. 집에서 적어도 4시 반에는 일어나야 돼요. 이 시간에 일어나 본 적이 없는데 좌우지간 시계를 맞추고 잤어요. 놀라운 일은 벨이 울리기도 전에 깼어요. 스스로 놀랐어요. 그런 적이 없는데. 이게 사랑의 힘이로구나. 부지런히 준비해서 새벽에 나갔어요. 너무 일찍 나갔어요. 어둠 속에서 한참 기다리고 있으니까 드디어 첫 차가 오고 사람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는데 아내가 드디어 나타났어요. 거기서 인사하고 헤어져야 되는데, 그게 안 되더라고요. 왜 제가 그 버스에 같이 올라탔는지 몰라요. 같이 올라탔어요. 한 시간을 갔어요. 포천까지. 복학생인 제가 빨리 가서 학교공부 해야 되는데 거기까지 간 거예요. 더 이상 갔다가는 안 되겠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내렸어요. 아내는 철원사람이니까 떠나보내고 저는 마음을 추스르고 탔어요. 한참 만났던 일을 생각하다 보니까 방향이 달라요. 정신을 차려야 되는데 잘못 탔어요. 서울로 돌아와야 되는데 철원 가는 방향을 탔어요. 버스기사에게 내려달라고 사정해서 중간에 내렸어요. 바보 같은 짓만 계속했어요. ? 사랑하니까. 그런데 그게 너무 행복했어요.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은 일이 되거나 안 되거나 구름이 끼거나 햇빛이 나거나 영적 정체감은 분명해야 돼요. 이런 우스개가 있어요. 택배 일을 하시는 분이 모처럼 휴일에 가족들과 함께 처가 집에 갔어요. 벨을 눌렀어요. ‘딩동~’ 그러니까 안에서 장모님이 누구세요?” 그러잖아요. 자기도 모르게 , 택배왔습니다그랬다는 거예요. 택배기사의 직업정신이에요. 예수 믿는 사람의 영적 정체감, ‘나는 하나님께 사랑 받는 자, 그리고 이제 그 사랑에 응답하는 자’. 이게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거예요. 헌신은 두 번째 문제에요. 이 고백을 가지고 오늘을 살고 내일을 바라보는 사람, 이게 바로 신앙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