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빌립보서 강해(31) 십자가의 원수들,하늘의 시민권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4:23

" 십자가의 원수들,하늘의 시민권"
빌립보서 3장 7~19절
석원태 목사


 4) 십자가의 원수들에 대한 경고(빌 3:17-19)

  바울이 세운 빌립보 교회 안에는 반 도덕주의자들이나, 아니면 완전주의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은 이제 율법주의적인 엄한 도덕적 의무가 없는 것으로 오해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율법주의적 도덕의식보다 보은적이고, 감은적이고, 자원적인 새 도덕 생활을 중시하는 것이 이른바 기독교의 윤리인 것이다. 말하자면 신앙과 행위에 관한 문제였다.
  신앙의 본질에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그 신앙에 기초하여 나타내는 행위 곧 사랑의 정도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행함을 아예 무시하는 도덕적 방종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고 경고하고 있다. 바울은 이러한 무리들을 ‘십자가의 원수’라고 규정할 정도였다.
  아마 빌립보 교회들 중에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이라는 이신득구(以信得求)를 핑계하여 자기의 부도덕한 생활을 합리화하고 정당화 하였던 이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유의 무리 가운데는 기독교의 자유를 왜곡하는 자들이 있었다. 율법이 폐지되었으니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런 제재 없이 육신의 욕망을 따라 자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무리의 경우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무한한 은총을 왜곡하는 데서 나왔던 것이다. 저들 가운데는 이른바 노스틱파(지혜파)를 위시하여 향락주의였던 에피큐리안파, 자유파, 은혜파 등이 당시에 유행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7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고 했다.
  바울의 이러한 권면은 결코 자기 자신을 자랑하려 함이 아니고, 자신이 주의 은혜로 모든 신뢰할 만한 육신을 배설물처럼 내버리고, 주를 좇고 있다는 구체적인 모델로 자신을 제시한 것 뿐이다. 이러한 일은 고린도 교회를 향한 서신에도 있었다(고전 11:1).
  또 ‘우리로 본을 삼아 그대로 행하라’ 함은 바울 자신을 위시하여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염두에 둔 말이다.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했다(빌 2:5). 이제 자기와 전도자들을 본받으라고 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8절에서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고 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간 눈물로 목회했다(행 20:31). 고린도서를 쓰면서도 눈물로 썼다(고후 2:4). 다시 빌립보서를 쓰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 큰 이유는 저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빌립보서 3정 19절에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했다. 여기 ‘저희의 신이 배’라고 함은 인간 욕망의 극치를 말함이다.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다’고 함은 그 결과가 극치에 이른 수치이기 때문이다.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란 하늘의 일과 반대되는 금세 제일주의를 이름이다.
  바울이 눈물을 흘리면서 권면한 이유는 명백하다. 빌립보 교회 안에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 가운데 인간적인 도덕적 의무가 필요 없다고 오해하고 십자가의 원수로 전락하고 만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율법주의자들은 예수 십자가 공로를 배척하기 때문에 원수가 되었고, 도덕적 방종주의자들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에 자유롭게 되었으니 이 세상에서 자신의 욕망대로 아무런 제재 없이 마음대로 살자고 함으로 땅의 일만 생각하는 금세 제일주의로 전락했기 때문에 결국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은 이 세상에 천국 낙원을 건설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들 가운데는 기독교 복음을 지성화하는 노스틱주의가 있었다. 자기 경험을 최고로 여기는 경험제일주의도 있었고, 자유와 은혜를 자기 욕망 충족으로 잘못되게 해석하는 자들도 있었다. 결국 구원에 이르는 신앙이 아니었다. 저들은, 교인은 되었을지 몰라도 신자는 아니었다. 그래서 여기 지상 전투 교회는 완전할 수가 없다. 완전(영화)을 향하여 나아가는 성화 교회일 뿐이다.

  5) 하늘의 시민권(빌 3:20-21)

  바울은 앞 절에서 땅의 일만 생각하는 이런 자들 곧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들’을 언급했다.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다고 했다. 이들은 십자가의 은혜를 현세주의로, 자기 욕망주의로, 기복주의로 잘못 왜곡한 자들이었다.

  (1)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시민권자이다.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에 대조되는 말로, 빌립보서 3장 20절은 구원받은 신자들을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고 했다.
  여기 시민권 ‘폴리튜마’(poli,teuma)는 국가 또는 나라라고 하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통치권 차원에서 보는 의미로는 ‘바실레이아’(basilei,a)가 있다. 통치권, 백성(국민), 영토를 갖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다.
  시민권은 국민의 집단에서 보는 의미로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소속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그리스도의 소속이라는 의미에서 사용되었다.
  당시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로서 로마의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당시 로마의 시민권이 부여되는 식민지는 예외 없이 로마의 세계 통치를 위한 수단으로 로마의 군대가 진군할 수 있는 간선도로를 만들고, 로마의 군대가 주둔할 수 있는 요새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대개의 식민 도시인들은 21년 이상 로마의 군대 생활을 끝마친 자들에게 그 보상으로 로마의 시민권이 주어졌다.
  그때 저들은 로마인의 옷을 입게 되고, 로마의 언어인 라틴어를 쓰게 되고 로마의 통치법 아래 들어가고, 로마 풍의 도덕을 지키게 되고, 로마의 행정관이 그 도시를 완전 장악하여 통치하게 되었다. 아무리 멀고 먼 땅 끝에 있을지라도 이들은 변함없는 로마의 식민이었다. 이런 경우 저들은 일등 국민의 자부심을 갖게 되어 그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로마 황제를 위하여 살게 된다. 그래서 저들은 로마를 향한 식민 포로와 도시를 잊을 수 없었다.
  바울은 이러한 시민권 개념이 풍부했다.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함으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소속과 통치 개념을 구별시키고 있다. 베드로와 야고보는 이런 개념에서 그리스도인을 ‘흩어진 나그네’, ‘디아스포라’(diaspora,)(벧전 1:1, 약 1:1)로 표현했다. 유명한 주석가 ‘마펫’은 ‘우리는 하늘의 식민지’라고 번역했다.

  (2)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자라고 했다.

  빌립보서 3장 20절 중에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했다.
  ‘거기’는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여 좌정하여 계신 곳을 의미한다. ‘구원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고 했다. 여기 ‘기다리다’라는 말 ‘아페크데코마이’(avpekde,comai)는 간절하게, 애절하게, 학수고대한다는 의미이다. 마태복음 25장에 처녀가 신랑을 기다림 같은 것이다. 로마서 8장 19절에 피조물의 학수고대와 같은 것이다. 로마서 8장 23절에 성도들의 학수고대와 같은 것이다.
  왜 기다리는가?
  그리스도인의 최후 영화 때문이다. 영광의 몸을 받는 일 때문이다.
  빌립보서 3장 21절에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했다.
  그가 오시면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신다’고 했다. 이것이 우리 대망의 내용이다.
  ‘우리 낮은 몸’은 지금 갖고 있는 죽을 몸을 가리킨다. 변하는 몸, 쇠하는 몸, 약한 몸, 썩을 몸, 욕된 몸, 괴로움의 몸이다. 육의 몸이다.
  ‘영광의 몸’은 주의 영광의 몸의 형체이다. 썩지 아니할 몸, 강한 몸, 영광의 몸, 신령한 몸, 하늘의 몸, 불사의 몸, 영생의 몸이다. 부활의 몸이다. 예수 재림으로 말미암아 받을 몸이다(살전 4:16-17, 고전 15:42-63).
  그것은 예수 자신의 초자연적 능력으로 변화시킨다고 했다. 그는 만물, ‘판타’(pa,nta)를 자기에게 복종시킬 수 있는 만유의 권세자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처럼 부활, 변화시킬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최후 소망이다. 영원한 불사의 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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