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빌립보서 강해(32) 주 안에 있는 위대한 삶①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4:23

" Ⅲ. 아름다운 덕목들에 대한 권면(빌 4:1-9)"
빌립보서 3장 7~19절
석원태 목사


  Ⅲ. 아름다운 덕목들에 대한 권면(빌 4:1-9) -주 안에 있는 위대한 삶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구라파 선교 사역에서 얻은 선교의 첫 열매였다. 첫사랑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어떤 서신에서도 볼 수 없는 빌립보 교회를 향한 그의 따듯하고, 애정이 넘치는 마음의 정서를 토로하고 있다.
  먼저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이라고 불렀다(빌 4:1)
  여기 ‘사랑’, ‘아가페토이’(avgaphtoi)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희생의 사랑을 뜻한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 언제나 이렇게 희생적인 차원의 사랑을 보내고 있다. 그것은 십자가로 맺어진 구속의 은총에 기초한 것이었다.
  「나의 사모하는 형제들」이라고 했다.
  이 말은 전도자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만나보고 싶은 그리움의 정에서 나온 자기 마음의 표시이다. 이렇게도 빌립보 교회는 영적으로 사도에게 있어 열렬한 연인 같이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끊으려 해야 끊을 수 없는 혈통 관계를 넘어선 영통 관계의 형제애를 나타내고 있는 말이 된다.
  「나의 기쁨이요」라고 했다.
  이 말은 빌립보 교회가 받고 있는 복음의 진보, 믿음의 진보, 사랑과 봉사의 진보에 대한 사도 바울의 만족함과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의 정서를 표현한 말이다. 자식들의 성장이 부모에게 기쁨이 되듯이 영통 자녀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기쁨이 그러했다는 의미이다.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자기의 면류관이라고 했다.
  당시 헬라어에 사용된 면류관은 두 가지 다른 배경을 가지고 씌어졌다. 그 하나는 ‘왕관’을 의미하는 ‘디아데마’(diadhma)가 있다. 또 하나는 경기에서 승리한 자에게 주어진 ‘스테파노스’(ste,fano,j)가 있다.
  본문의 경우는 경기 승자에게 씌워 주는 면류관을 뜻한다. 녹색 파슬리(parsley)와 월계수의 잎, 야생 올리브(olive) 잎으로 만든 면류관이다.
  또 이것은 만찬이나 식사 때, 경우에 따라서는 큰 기쁨의 축제 시에 식탁에 초대받은 손님들에게 씌워주는 관이기도 했다.
  지금 바울은 자신을 복음 전선에서 달리는 그리스도의 선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빌립보 교인들은 자신의 면류관이라고 생각했다. 바울은 자신이 최후의 날에 하나님 앞에 설 때, 그 날 그 장소에서 빌립보 교인들은 그 축제의 면류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드로아에서 환상을 본 후, 그 다음 날 즉시 유럽을 향하는 배 위에 몸을 싣고 빌립보에 도착한 후 빌립보 강가의 언덕에서부터 시작된 전도의 첫 열매로 세워진 교회가 바로 빌립보 교회였다.
  거기에서 루디아의 집을 중심하고 가족적 회개와 세례가 베풀어지고, 점치던 귀신들린 여자를 고쳐준 것이 죄목이 되어 감옥에 갇힌 바울이 옥사장에게 전도함으로 그와 그 집이 그 날 밤에 예수를 믿어 세례를 받게 됨으로 시작된 빌립보 교회였다.
  지금 감옥에 있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가 에바브로디도 편으로 보내 준 사랑의 연보를 받고 생활하면서 빌립보 교회를 향한 절실한 애정을 표시할 때,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한 것이다.
  마이어(Meyer)는 ‘바울은 그의 다른 어떤 서신에도 이와 같은 사랑과 예찬의 표현을 집중시키지는 않았다.’라고 했다.
  바울은 그의 수많은 선교 격전지들에서 정말 수많은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에게로 인도한 복음의 사자였다. 그 중에도 특별히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 자신의 이러한 기쁨의 정서적 발로는 실로 감격적인 자랑이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는 자식이 훌륭하게 성장했을 때 ‘그 사람은 나의 아들이요.’라고 하는 부모의 자랑이 있다. 세상에 훌륭한 일을 남긴 인물을 보고, ‘그 사람은 나의 제자였소.’라고 하는 스승의 자랑이 있다.
  바울은 전 세계 교회를 향하여 빌립보 교회는 ‘나의 사랑하는 형제요’, ‘사모하는 형제요’,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이요’, ‘나의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애칭하며 거침없는 애정을 토하고 있다. 이것이 교회를 향한 전도자의 기쁨이어야 한다.
  바울은 그의 서신 마지막 부분에 종합적 권면을 하는 서두에 이렇게 고백적으로 빌립보 교회를 향한 진실한 예찬을 하고 있다. 그 후에 권면의 본론을 시작하고 있다.

  1. 주 안에 있는 위대한 생활(빌 4:1-9)

  그것은 ‘주 안에 있는 삶’이라고 했다(빌 4:1, 2, 4).

  1) 주 안에 굳게 서는 것이라고 했다.

  빌립보서 4장 1절 하반절에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고 했다.
  「주 안에」라고 하는 말은 사실상 바울 신학의 열쇠(key)이다. 이른바 바울의 ‘엔 퀴리오’(evn kuri,w|)론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가 나오고,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이 나오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이 나오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충만이 나오고,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충만이 나오고 있다고 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이 나오고, 신령한 연합이 나온다고 했다. 그러므로 ‘주 안’, ‘예수 안’, ‘그리스도 안’은 교회의 교회 된 기원이요, 진행이요, 완성인 것이다. 그리스도 안은 나의 나 된 전부이다. 그 주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위대한 삶이 이루어진다. 지금 사도는 빌립보 교회를 향해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고 했다.
  이 말은 ‘빌립보 교회가 이때까지 잘해왔으니 그대로 계속하라’는 내용의 권면이다.
  특별히 ‘굳게 서라’는 말은 군사용의 명령이다. 이 말 곧 ‘스테케테’(sth,kete)는 ‘서다’라는 의미를 가진 ‘스테코’(sth,kw)에서 온 현재 능동명령형으로 ‘굳게 서라’는 뜻이다.
  사령관이 전쟁에 임하는 병사들에게 내리는 준엄한 명령이다.
  그 중심 내용의 뜻은 전쟁 중에 적군들이 물밀듯이 공격을 가해올 때, 끄떡도 않고, 대담하고, 늠름하게 자기의 초소에 굳게 서 있는 병사를 뜻함이다. 적과의 싸움에 임하는 응전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영감의 중심은 빌립보 교회가 교회 내외로부터 침투하는 그 어떠한 사탄의 공격에도 흔들릴 줄 모르는 견고한 신앙의 자세를 취할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빌립보 교회의 경우 개들과 행악자들, 손할례당의 공격이 바로 그것이다. 다른 말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이다(빌 3:1, 18-19). 우리는 교회 생활 중에 자주자주 ‘주 안에 굳게 서지 못하는 시험에 빠질 때’가 많다. 그래서 불의에 동조할 뿐 아니라 선한 일에 뺑소니를 칠 때가 있다. 특별히 진리의 교리 앞에 굳게 서야 하고, 새 계명을 파수하는 일에 굳게 서야 한다.
  때로 가장이 없는 가정이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을 당하여 흔들릴 때, ‘아! 이때 너희 아버지가 우리에게 있어 주었으면 결코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인데…’라고 할 때가 있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를 향한, 아니 우리를 향한 사도 바울의 권면은 확실히 소망스럽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서 굳게 서라.’고 하였다. 교회가 살아남을 길은 주 안에 굳게 서는 길밖에 없다. 이것은 실로 그리스도인의 위대한 삶의 아름다운 덕목이다.


  Ⅲ. 아름다운 덕목들에 대한 권면(빌 4:1-9) -주 안에 있는 위대한 삶
  1. 주 안에 있는 위대한 생활(빌 4:1-9)
  1) 주 안에 굳게 서는 것이라고 했다(빌 4:1).

  2)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했다(빌 4:2-3).
  빌립보 교회는 전도자 바울에게 있어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이요’,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자들’이었다.
  사도는 그러한 빌립보 교회가 주 안에서 가져야 될 아름다운 덕목들이 있다고 하였다.
  그 중에 하나가 ‘주 안에 굳게 서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두 번째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이라고 하였다.
  빌립보서 4장 2절에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하였다.
  여기 ‘권하다’, ‘파라칼레오’(parakale,w)는 명령조가 아닌 호소력과 설득력을 가진 호소를 뜻하는 말이다. 「같은 마음」이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염두에 두고 쓴 말이겠다.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한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가리킨다(빌 2:2-5).
  문제는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여러 학설이 있을 뿐 단정할 수는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저들은 빌립보 교회 안에서 지도자급에 있는 여자들임에 틀림이 없다. 저들은 교회를 섬기는 가운데 약간의 의견 차이로 불화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저들은 ‘복음에 사도와 같이 힘쓰던 부녀들’이라고 했다. 비록 지금은 서로 불화하여 교회와 사도에게 근심꺼리가 되어 있으나 적어도 빌립보 교회 성장에 많은 헌신의 공을 세운 자들이었음이 확실하다.
  초대교회 때에는 부인들이 교회 설립과 부흥에 지도적 역할을 한 사실들이 많이 있다. 헬라계 부인들은 대개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박혀 있었다. 헬라인의 경우 존경받는 부인이란 대개 적게 보고, 적게 듣고, 적게 말하고, 적게 활동하는 자라고 생각했다. 신분이 높은 부인은 결코 혼자 출입하지 않았고, 한 집안에서도 방을 따로 가지고 있었다. 식사 때에도 남자와 혼석하지 않았다. 그래서 헬라계 부인들은 사회적 활동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따라서 부인의 역할은 거의 없었다.
  그런가 하면 유럽지역은 그렇지 않았다. 빌립보는 유럽의 지경이었다. 마게도니아 지방이었다. 마게도니아 부인들은 일상생활에서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자유롭게 활동하고 행사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바울 일행이 안식일에 빌립보 강변에서 처음으로 만난 일단의 무리들이 자주장사 그룹인 여자들이었다(행 16:13). 최초의 강변 집회에 서로 모르는 남녀가 한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그 중에 루디아라는 그 그룹의 지도적 인물이 있었다(행 16:14). 데살로니가에서는 귀부인들이 많이 그리스도교로 귀의했다(17:4). 베뢰아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행 17:12). 사후에는 죽은 유공자 된 부인을 위하여 비문을 세우는 경우들도 많았다.
  이런 경우를 봐서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빌립보 교회에서 지도적, 선도적 활동을 한 여자들임에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불행스러운 일은 저들의 불화, 불일치가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혹설에는 이 두 사람의 집이 모이는 집회 장소가 되었는데, 그로 인하여 일어난 불행스러운 다툼이나 불화가 아니었을까 하고 짐작을 하기도 한다. 사도는 저들에게 꾸중이나 책망을 하지 않고,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라고 함으로 저들을 향한 사도의 예의성을 드러내고 있다. 저들의 불일치에 대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겸손한 마음을 품으라’고 간절히 권하고 있다.
  또 한편 저들의 화목을 위하여 익명의 사람을 지목해서 그 두 여인의 불화를 해결할 것을 말하고 있다.
  빌립보서 4장 3절에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라고 했다.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란, 십자가를 같이 짊어진 자, 십자가를 같이 잡은 자, 같이 생각하고, 같이 말하고, 같이 행동하는 자를 뜻함이다. 바울은 이 사람에게 저 두 부인을 도와주어서 불화를 화목으로 일치시키라고 했다. 그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으나, 빌립보 교회 안에 사도의 이러한 부탁을 받은 자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저 부인들을 도와주어야 할 이유는 저들이 바울과 함께 복음에 힘썼던 여인들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함께 힘썼다’는 말은 복음을 위해 함께 싸우고, 함께 달리던 자란 뜻이다. 바울은 그 두 부인의 단점보다는 장점에 초점을 맞추고 화목케 하는 해결책을 시도했다.
  뿐 아니라 이 익명의 사람에게 「글레멘드와 그 위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고 부탁하고 있다.
  「나의 동역자」란 바울과 함께 일하고, 수고하고, 십자가를 짊어지는 자들을 가리킨다.
  어쨌든 바울은 이 익명의 사람, 바울과 멍에를 같이 한 자에게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불화를 해결하고 또 글레멘드와 바울의 동역자들을 도와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그 큰 이유는 저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빌립보서 4장 3절 하반절에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고 했다.
  참으로 빛나고 멋진 이유이다. 불화하는 사람들이 화목해야 하고, 복음 전선에서 수고하는 자들을 도와주어야 될 결정적인 이유가 저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다.
  여기 ‘생명책’, ‘비블로오 조에스’(bi,blw zwh/j)는 하나님께서 죄인들 가운데서 구원해 주시기로 예정하고, 선택한 사람들의 이름들을 기록해 놓은 책을 가리킨다.
  특별히 요한계시록 20장 12절에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는 심판의 책들이 펼쳐져 있고, 또 생명책이 펼쳐 있다고 했다. 심판의 책들은 불신자의 명단이고, 생명의 책은 구원인의 명단이다. 심판의 책들은 불신자들이 그 행위대로 받은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생명책에는 결코 죄의 행위가 기록되지 아니했다. 이미 어린양 예수의 피로 깨끗한 속죄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0장 27절 마지막에도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열린 성문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이 본문에서 받은 교회론적 교훈은 지상 전투 교회의 불완전성을 볼 수 있다. 바울과 함께 두 여인이 서로 불화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불화는 반드시 해결해야 된다는 사도의 간곡한 권면이다. 그 해결의 방법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곧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라고 했다.
  뿐 아니라 여러 유형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평화의 해결사가 교회 안에 있다고 했다. 그 사람은 ‘사도와 멍에를 같이 하는 자’라고 했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실로 하나님 교회의 충성된 종들이요, 청지기요, 기둥이다. 실로 이런 종류의 사람은 평화의 사자이다.
  더 나아가 교회의 여러 사역자들을 돕고 섬기는 자들이 있어야 된다고 하였다.
  그 커다란 이유는 저들의 이름이 구원의 책, 생명의 책에 기록된 자들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지상교회는 여러 류의 연약들 가운데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다시 일어나서 성화의 전진을 계속하는 진리의 공동체라는 사실이다. 사랑과 소망과 믿음의 공동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주 안에 있는 교회들의 아름다운 덕목이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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