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빌립보서 강해(42) 인사와 축도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4:36

"인사와 축도"

빌립보서 4장 20~22절
 
석원태 목사

  2. 인사와 축도(빌 4: 20-22)

  빌립보서의 마지막 부분을 만나고 있다. 그것은 인사와 축도로 끝맺고 있다. 바울서신의 모든 부분에 인사와 축도는 빠지지 않고 있다. 바울의 영감은 언제나 신령한 일에 관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편지의 시작이나 마지막에 인사를 빼놓지 않고, 그가 보내는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삼위 하나님의 축복을 기원하고 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높이는 종교인 동시에 언제나 사람을 중시하고, 존경하고, 사랑한다. 그 이유는 구원의 복음을 받은 자들은 천하와 비교가 안되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1) 먼저 송별인사를 보내고 있다.

  (1) 누구에게 보내는 인사인가?
  빌립보서 4장 21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라고 했다. 이미 우리는 바울의 여러 서신에서 ‘그리스도 안’, ‘주 안’, ‘예수 안’, ‘그의 사랑 안’이라는 말을 수없이 보았다. ‘주 안’, ‘예수 안’, ‘그리스도 안’은 사실상 바울 신학의 열쇠 중에 하나이다. 그 사람들이 누구인가? ‘성도’(빌 4:21)라고 하였다. ‘성도’란, ‘형제’와는 또 다른 크리스천의 이름이다.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입어 성별된 자들을 뜻한다. 저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이른바 크리스천들을 뜻한다. 그리스도에게 소속된 자, 그리스도 당원들을 의미했다. 저들은 정죄에서 해방을 받은(롬 8:1),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이다(롬 8:14-16).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유업)으로 받은(마 25:34) 하늘의 시민권자(빌 3:19)들을 뜻한다.

  (2) 각인들이었다.
  빌립보서 4장 21절에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고 했다.
  그는 이 편지를 빌립보 교회의 감독이나 지도자들에게 보내고, 저들이 성도 개인 개인들에게 이 서신을 전달하도록 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인사에서 중요한 진리를 붙잡게 된다. 빌립보서 뿐 아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인데, 이것은 예수 믿고, 구원받은 특별한 사람들을 상대한 것이다. 뿐 아니라 개인 개인에게 보내어진 말씀이라고 함으로 개인 구원의 중대성을 알려 주고 있다. 기독교의 구원은 결코 집단적이 아니요, 사회적 구원도 아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 개인 구원이다(요 3:16). 그러한 개체 개체가 성령 안에서 연합하여 교회라고 하는 기독교 특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기독교가 개인 구원이라고 말할 때 주의해야 되는 것은 기독교가 개인 개인을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개인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이다. 이기주의는 신본주의가 아니고, 인본주의이다.
  그러므로 ‘개인 개인의 믿음’이라 함은 ‘개인화’를 뜻한다. 지음받은 독립적 인격체를 그리스도에게 접붙이는 개인의 변화를 말한다. 천지창조(인간)가 개인적이었다. 인간 타락이 개인적이었다. 따라서 인간 구원도 개인적이다. 성화도, 영화도 개인적이다. 그래서 ‘각인’들이 모두 예수의 구원 계시를 받을 독자들인 것이다.

  2) 누가 문안 인사를 했는가?

  (1) 바울 뿐 아니라 바울과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했다(빌 4:21b).

 그리고 빌립보서 4장 22절에는 「모든 성도들이 문안한다」고 했다. 이 사람들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로 바울과 영적 접촉을 가진 사람들이다. 저들은 바울을 통하여 빌립보 교회의 소식을 익히 듣고, 함께 은혜를 받은 자들인 것 같다.

  (2) 특별히 ‘가이사의 집 사람 중 몇 사람’이 문안을 하고 있다고 했다.

 크게 말하면 앞에서 말한 ‘형제들’, ‘성도들’인데, 그 중에도 ‘가이사의 집 사람 몇’을 지목해서 언급했다.
  이들이 누구일까? 가이사는 당시 로마 황제의 직함이었다. 당시 로마의 황제는 ‘네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가의사의 집 사람 몇’이라고 하였는데, 저들은 가이사 궁중에서 일하는 노예들이나, 아니면 어떤 관직을 가진 일반 로마 신자였을 것이다. 이미 가이사 궁중에서 일하고 있는 자들 중에서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바울의 매임 때문에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났다고 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빌 1:13). 그 당시 로마의 시인 루카누스, 철인 에피구데로, 궁녀 악테, 폼페아 등 저명한 인사들이 궁중 깊은 곳을 왕래하면서 복음을 전한 역사적 기록들을 보게 된다. 로마서 16장의 바울의 문안 가운데도 가이사의 집에 속한 사람들이 신자의 명단에 올라와 있다.
  이러한 현상은 복음이 전파되는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일이다. 세계 곳곳에 이른바 ‘가이사의 집 사람들’이 있었다. 궁정 내의 관리, 비서, 국세 세무관, 행정의 여러 관리직 또한 군인의 부대 안, 여러 나라의 교육과 문화 기관 등에 그 시대의 ‘가이사의 집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박해의 권력 안에 침투된 주님의 밀사, 복음의 밀사들이었다.
  사도행전 8장에서 하나님은 빌립을 애굽으로 내려가는 광야로 보내셨다. 그 길에서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내시에게 전도하게 함으로 그가 귀국 길에 크리스천이 되었다. 이런 경우 그는 간다게 집의 사람이 아닌가?
  300년 초기 박해 어간에 기독교가 로마 제국을 정복하고 밀라노 칙령에 의해 마침내 기독교 국가가 된 것은 모두 다 이런 유의 가이사의 집 사람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다.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가이사랴에 주둔했던 백부장교 같은 이도 ‘가이사의 집 사람’에 속한다.
  저들은 여러 모양, 여러 형태로 그리스도 복음의 사신이 되어 가이사(권력) 집의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것이다. 복음의 세계화, 하나님의 세계 선교 작전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국가의 공무원이 된 신분 때문에 예수를 못 믿거나, 교회를 나오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연약한 사람들의 생각이요 마음이다. 저 구약에는 애굽 사람 바로의 집에 요셉과 모세가 있었다. 아하수에로 왕의 집에는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있었다. 바벨론 사람의 집에는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있었다. 하나님은 저들을 구속역사를 성취하는 일꾼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천 공무원, 크리스천 회사원, 크리스천 군인들이야말로 하나님이 보내신 복음의 최전방의 군인들인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 국가가 되는 것은 성경이 용납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국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기독교 국가’란, ‘기독교가 국교’가 되는 것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고 하는 국교분리(國敎分離) 원칙에 어긋난다. 그러나 ‘기독교적 국가’란 ‘그 나라가 지향하는 국시나, 그 나라의 모든 사회적, 교육적, 도덕적 방향이 크리스천 정신으로 움직이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옛날에는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선진했던 국가들이 모두 기독교적 국가들이었다. 지금은 기독교적 국가 형태마저도 점점 퇴색해지고, 혼합적 사고로 흐르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종말론적 징조이다. 그럼에도 아마겟돈 전쟁의 위급한 상황으로 옮겨져 가는 지금도 하나님의 숨겨놓은 오늘의 ‘가이사의 집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저주 받은 아합의 통치시대에도 아합 집의 사람 ‘오바댜’는 궁내 대신의 공직을 가지고도 100명의 선지자들을 50명씩 나우어서 섬기지 않았던가?

  3) 마지막으로 축도로써 빌립보서를 마감하고 있다.

  빌립보서 4장 23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라고 했다. 이러한 표현은 갈라디아 교회(갈 6:18), 빌레몬서(몬 1:25)에 나타난 형식과 동일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모든 세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누리는 구원의 축복을 이름이다. 이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자리 잡아야 된다고 했다. ‘심령’은 인간의 중심 부분으로 심령의 중심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자리를 잡으면 그는 바른 창조관, 구원관이 정립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예외없이 빌립보서의 주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구원’이다. 그리고 그 구원이 성취되는 때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라고 했다(빌 1:6).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그 날에 전도자로 하여금 주님 앞에 자랑할 것이 있게 하라고 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했다(빌 3:20).
  그래서 사도는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 4:5)고 하면서 어떤 일에든지 교회는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고, 주 안에 굳게 서고, 주 안에서 기뻐하고, 또 크게 기뻐하라고 했다(빌 4:1, 2, 10). 교회의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향기로운 제물이 됨에 있다(빌 4:18)고 하였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선교 운동의 가능성’(빌 4:13)을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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