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11강) 애통하는 자! (마 5:4)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6:11

(제11강)            애통하는 자! (마 5:4)

 

  우리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을 살 때에 애통하며, 슬퍼하며, 탄식하며 살면 안됩니다. 빌립보서의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신 말씀대로 늘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다. 또 데살로니가 전서의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대로 항상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아무리 절망 속에 있더라고,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를 기다리며, 소망으로 눈이 반짝여야 합니다. 피할 길을 주시고, 이길 힘으로 주시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소망 가운데 기뻐해야 합니다. 애통하고, 슬퍼하고, 탄식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애통함은 세상 속에서 늘 탄식하며 슬퍼하며 살라는 말씀이 아니라 '죄에 대하여 슬퍼하고, 죄에 대하여 탄식하라'는 말씀입니다. /할/ ◀제목소개!▶

 

  오늘 우리는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황금률인 팔 복 그 두 번째 복 앞에 우리들이 섰습니다. 어떤 사람이 본문의 팔 복을 비유하기를 야곱이 벧엘 광야를 지나다가 돌 베개 베고 잠잘 때, 꿈에 하늘 문이 열리고 사닥다리 하나가 내려와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하늘과 땅의 연결 사다리가 된 것처럼 오늘 본문의 여덟 가지 복의 사다리를 하나, 둘, 셋,.. 여덟까지 올라가면 하늘에 오늘 수 있다고 비유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본문의 팔 복을 여덟까지 음계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로 비유합니다. 그만큼 중요함을 설명한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첫 번째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가난은 물질의 가난을 말하지 않습니다. 또 지식이 가난, 또 마음이 연약함으로 흔들리는 가난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팔 복의 가난은 자신의 무능력을 발견하고 부족함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도움 없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음을 고백하는 '마음이 낮아짐의 가난, 즉 영적인 가난' 즉 은혜의 갈급함과 말씀의 갈급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상고하고 있는 이 팔 복의 말씀은 우리 신앙의 단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자마자 단번에 천사처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 조금씩 자랍니다. 마치 계단을 한 단계 한 단계 밟아 올라감으로 높은 곳에 이르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은 조금씩, 조금씩 성장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첫 단계가 마음이 가난함입니다. 마음이 가난해야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로 맞아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그러니까 팔 복의 첫째 복이 굉장히 귀합니다. 이 마음의 가난이 없으면 다음 복들이 임하지 않습니다. 아니 산상보훈의 황금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이 마음의 가난이 임할 때 산상보훈의 황금률의 주인공이 될 줄 믿습니다. /아멘!/
  오늘 두 번째 복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 즉 애통하는 자의 복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세상은 '소문만복래' 웃으면 복이 있다고 했고, 한 번 웃으면 한 번 젊어진다고 했는데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야 합니까? 그렇지 않아도 인생을 울음으로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인생은 울면서 이 땅에 태어나서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이 세상을 떠나고 마는 존재입니다.
  인생을 되돌아보면 웃는 순간보다 고통스럽고 눈물겨운 일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인생을 정의하기를 '인생은 없고, 없고, 없다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정의를 했습니다. 즉 어릴 때는 철이 없고, 젊어서는 정신이 없고, 중년이 되어서는 틈이 없고 늙어지면 형편이 없다가 마지막에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없어지고 마는 것이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인생살이가 허무하고 눈물겨운 일들이 연속되고 있는데 어찌하여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기뻐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했으면 이해가 가겠지만 슬퍼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얼른 납득이 안 되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 교통사고로 다쳐 울고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 '당신은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다면 십중팔구 뺨을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애통히 어떻게 축복이 된다는 말입니까? 궁금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잠깐 뒤로 미루고 그 다음 하반 절을 보겠습니다.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 부분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 애통하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지만 '위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친구의 위로도 위안이 됩니다. 부모의 위로는 자신감을 갖게 합니다. 남편의 위로, 아내의 위로는 사랑으로 다져집니다. 그렇습니다. 위로는 귀한 것입니다.
  여러분! 위로를 아끼지 마십시오! '여보 오늘 너무 수고가 많았소! 당신이니까 그일 해냈어요. 당신 정말 훌륭해, 멋있어' /할/ 이 위로의 소리에 새 힘을 얻습니다. 자녀들에게도 위로해 주십시오, '너는 할 수 있어, 나는 너를 믿어'
  그런데 오늘 본문의 위로는 인간의 위로보다 더 큰 위로가 그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원어의 뜻은 '곁으로 부르다.'는 말과 '힘을 얻는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곁으로 오셔서 힘을 주시는 위로입니다.
  ▶눅2:25절을 보면 이 위로란 말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명사로 쓰여졌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여기서 이스라엘의 위로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해서 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마11: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인가? 현대인들은 살아가는 데 참 고민도 많고 짐도 많습니다. 옛날에 비하면 생활 환경도 좋아졌고, 풍요로워졌고, 문화도 많이 발달되어서 살아가기가 훨씬 좋아졌는데도 그 옛날에 비하면 고민은 오히려 더 많아졌고, 짐도 더 무거워졌습니다. 시대는 더 좋아졌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살아가는 것은 더 어렵고 힘들어졌습니다.
  학생들을 보면 입시 때문에 참 고생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또 직장인들은 이 승진하는 일이 무거운 짐입니다. 직장에서 상사들로부터 인정도 받아야 하고, 승진도 해야 하고,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고민을 많이 합니까?
  그런가 하면 요즘에는 건강에 대한 고민 또한 많은 때입니다. 그런가 하면 늙은 것이 고민인 시대입니다. 머리가 조금만 희어져도 그것을 감추느라고 야단들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이래저래 고달픈 것입니다. 고민이 많습니다. 짐이 무겁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겉에서 볼 때는 별일 없는 것같이 보이지만 좀 깊이 들여다보면 누구나 다 이 짐이 있습니다. 고민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보면 거기에 탄식이 있고, 비명 소리가 있고, 눈물이 있고, 신음 소리가 있습니다.
  이렇게 고민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말씀이 얼마나 위로가 됩니까? '다 내게로 오라' 얼마나 다정한 초청의 말씀입니까? 이 말씀은 '너희가 정말 나를 믿느냐? 그러면 그 짐을 다 내게 맡기라'는 뜻입니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진정한 쉼은 예수께 가야 얻을 수 있습니다. 육신의 쉼은 가정에 가야 얻을 수 있고, 영의 안식은 주님께 가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참 안식처이고 쉼터입니다. 영혼의 안식처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있어야 할 자리는 바로 성전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품입니다. 성도들은 거기에 있을 때가 가장 힘이 있을 때고 가장 행복할 때입니다.  /아멘!/
  고후1:3-4절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할/
  ▶요14:16절에 보면 성령의 대명사로 쓰여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대신하여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보혜사는 곧 '위로자'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위로를 받는 사람처럼 복된 사람이 없습니다.
  친구의 위로도 귀하고, 부모의 위로도 귀하고 남편의 위로도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 본문의 위로는 창조주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이 위로는 부모의 위로, 친구의 위로, 부부간의 위로보다 훨씬 품격 높은 위로입니다.
  요14: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6:33절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여러분! 이런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할/
  ▶그러면 누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애통하는 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애통은 보통의 애통이 아닙니다. 아주 절망적인 애통을 말합니다.
  창37:34절에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이 죽였다는 말을 듣고 애통하였다는 그런 애통입니다.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이것이 애통입니다. 자식의 죽음 앞에 애통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죽음의 애통은 이 세상의 어떤 애통보다 더 큰 애통입니다. 이런 절망적인 애통을 하는 자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애통을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애통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세상 적이고 육신 적인 애통히 있는가하면 차원 높은 애통 즉 두 번째 신령한 문제를 위한 신령한 애통히 있습니다.
  세상 적인 애통, 육신 적인 애통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⑴병들어 애통하는 애통히 있습니다.
  ⑵물질의 손해로 인한 애통히 있습니다.
  ⑶자존심이 상하여 일어나는 애통히 있습니다.
  ⑷정든 사람과 이별의 애통히 있습니다.
  ⑸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망신을 당해서 우는 애통히 있습니다.
  ⑹소망이 끊어져 절망하는 애통히 있고,
  ⑺그밖에 우울한 성경 탓으로, 일시적인 불행으로 그리고 자기의 성질에 못 이겨 애통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런 애통은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위로와 축복이 있는 애통히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애통을 통하여 '천부여 의지 없어 손들고 왔나이다'하며 주님 앞에 나오면 이것도 복입니다.
  다시 본문의 애통은 영웅 나폴레옹이 센테리나의 고독한 유배지에서 '자기 사전에 불가능이 있음'을 아는 그런 애통히 아닙니다. 삼하13:2절에 암논이란 사람의 애통히 소개됩니다. '저는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암논이 그 누이 다말을 인하여 심화로 병이 되니라' 정복해서는 안 될 여인에 대한 애타는 욕정으로 애통해하는 그런 애통도 본문에서 말하는 애통히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애통의 원 뜻은 대단히 의미심장합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애통이란 말은 '우리 안에 있어야 할 어떤 중요한 것이 없음을 인하여 그리고 없어야 할 것이 우리 안에 있음으로 아파하는' 그런 의미의 애통입니다.
  부흥회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소리 높여 웁니다. 어떤 이들은 정말 성령의 역사에 의한 진정한 애통히 있습니다. 이런 애통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애통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분위기 덩달아 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 노인이 부흥회에 참석해서 강사 님을 바라보고 연상 눈물을 찍어냅니다. 강사님은 속으로 '아 저 할머니가 말씀에 은혜를 받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끝나고 내려와 할머니에게 '오늘 은혜가 충만하시군요?' 그러자  그 노인이 말하기를 '예 목사님의 얼굴을 보니 일 년 전에 교통사고로 죽은 우리 아들이 생각나서 울었습니다.' 이런 세상 적인 애통과는 다릅니다.
  또 본문의 애통은 죄의 고백과는 다른 애통입니다. 창4:13절에서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자기 아우를 죽인 가인이 죄의 결과를 생각하여 두려워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잘못된 것을 깨닫고 죄를 인정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통회하고 가슴을 치며 애통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죄의 고백과 애통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와 가롯유다는 똑같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저주하고 모른다고 부인했으며 가롯유다는 대제사장에게 돈을 갖다 주면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고 하자 그들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고 합니다.
  가롯유다는 은 30을 성소에 던지고 죄에 두려움에 목매어 자살을 했습니다. 그는 죄로 인하여 두려워는 했지만 애통해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위로를 갈망하지 않았으며 예수님 앞으로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한 후 닭 우는 소리가 들려 왔을 때 '닭이 울 기전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 밖으로 나가 애통하며 심히 통곡을 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애통과 회개는 일맥상통하는 관계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애통과 회개는 '아파하면서 주님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마26:75절에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애통함으로 복을 받은 한 사람의 이야기가 우리 초대교회에 있었습니다. 
  1874년 황해도 안악에서 양반집 아들로 태어난 김익두는 공부를 곧 잘해서 과거시험에 몇 차례 응시를 하였으나 불행히도 낙방했습니다. 그런데 친구의 보증을 서준 것이 잘못 되어서 살던 집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화가 난 그는 술에 빠지게 되었고, 나중에는 깡패두목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오죽했으면 장날 고개를 넘는 사람들이 서낭당에 돌을 던지며 '오늘 김익두를 만나지 않게 해 주십시오' 하고 빌었다고 합니다. 
  1900년 어느 날, 몹시 술에 취하여 공중변소에서 일을 보다가 미끄러져서 그만 똥통 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소리쳤지만, 누구 하나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건져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머리 위에 오줌을 누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후에 그 부인이 와서 겨우 건져내었는데 술이 깬 뒤에 부인이 그 날에 있었던 일들을 다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김익두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때까지 안악 골에서는 자기가 최고인줄 알고 주먹하나 믿고 천하를 휘 젖고 다니며 살았는데 내가 얼마나 악하게 살았으면, 내가 얼마나 미웠으면, 죽을 지경에 빠진 내 머리 위에 오줌까지 누었겠는가?
  그는 며칠 동안 두문불출하고 자기를 돌아보았습니다. 마침 동네의 교회에서 열린 부흥회에 참여하였다가 미국 선교사 W. L. Swallen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죄악된 자신을 돌아보며 깊이 뉘우치며 가슴을 치고 통회 자복하며 엄청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습니다.
  그 이듬해인 1901년에 세례를 받고, 1910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한국교회의 큰 획을 긋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할/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애통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①자신의 죄로 인해 참회하는 애통입니다.
  2천년 전 예루살렘 성문 밖 골고다 언덕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힘겹게 오르고 있었습니다. 무자비한 채찍에 맞아 갈기갈기 찢어진 몸에서 흐르는 피로 온몸을 물들었습니다. 짓눌러 씌워진 가시관의 가시가 박힌 머리에서는 형용할 수 없는 아픔과 함께 흘러내리는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고통으로 짓누르는 십자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쓰러지고 또 쓰러지는 예수님을 채찍으로 내려치는 로마병정의 무자비함! 그 쓰라린 채찍질에도 쉽게 일어서지 못하는 예수를 위하여 로마병사는 그 곁에서 함께 따르던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십자가를 함께 지도록 했습니다.
  이 처절한 십자가의 길에는 백성들과 여인들이 함께 따르고 있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많은 여인들이 가슴을 치며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이때였습니다. 그 무거운 고통의 십자가를 지시고 가시던 예수님께서 여인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눅23:28)'
  이 한마디 주님의 음성은 울던 여인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슬피 울고 있었을까요? 
  첫째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예수님이 그토록 처참한 지경에 빠진 것이 불쌍해서 울었습니다. 고통스러워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한없는 동정의 눈물이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께 사정없이 잔인하게 채찍질하는 로마군병들 때문에 원망하며 울었습니다.
  셋째는 주님을 위해서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던 제자들이 한 사람도 보이진 않음을 안타까워하며 울었습니다. 그러니까 용기 없는 제자들의 야속함을 아쉬워하며 울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고통을 당하시는 예수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들이 한심해서 울었습니다. 이렇게 슬피 울며 따르던 여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딸들을 위하여 울어라'고 하십니다.  
  고난 받는 나의 아픔을 애처롭게 생각하며 나를 바라보지 말고, 아직도 죄 가운데서 방황하고 있는 너와 네 자녀들의 죄를 인하여 애통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약에 태초에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먹는 배반이 없었다면 십자가는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계속되는 죄악이 없었다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 고난의 주님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늘도 죄 중에 빠져 허덕이는 저와 여러분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긍휼이며 자비입니다. /믿/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오늘도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를 계속 짓고 있는 나 자신과 우리들의 자녀들을 위해 가슴을 치며 슬피 울어야' 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현대교인들이 죄의식의 결핍과 피상적인 즐거움을 참 기쁨으로 아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또 로이드 목사님은 '현대인들은 죄에 대하여 거부감을 갖는다. 회개를 설교하면 고개를 돌리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독약을 사탕이라고 속일 수는 없다. 회개 없이 기쁨이 없고, 회개 없이 소망도 없으며, 회개 없이 축복도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을 믿고 거듭난 영의 눈을 뜨게 되면 끊임없이 죄와 짝하며 산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연약함으로 죄를 짓고 맙니다. 우리는 이 죄를 바라보고 통곡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죄의 문제를 가볍게 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의 문제를 무섭게 다릅니다. 아담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은 아담을 버리셨습니다. 사울이 범죄 했을 때도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은 여지없이 이스라엘을 열방에 붙이셔서 종살이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무섭게 다루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를 고백하고 통회해서 회개하는 자에게는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긍휼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받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51:3절에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아파하고 주께로 돌아가기를 열망했습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말하는 애통입니다.
  시34:18절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또 시51:17절에서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아멘!/
  우리가 애통 그 자체를 축복이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애통히 우리로 하여금 위대한 삶과 축복된 삶으로 인도해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랍인들에게는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태양 빛이 언제나 계속 비친다면 사막을 만들고, 때때로 비가 오므로 옥토를 만듭니다.' 가끔 비가 내려야 식물이 자랄 수가 있고, 결실을 맺을 수가 있습니다.
  눈물과 슬픔은 우리 삶에서 비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사가 형통할 때보다는 실패할 때 오히려 자신의 내면적인 깊은 삶을 보게 됩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물과 애통은 사람으로 하여금 반성을 촉구하고 인생의 깊은 뜻을 깨달을 수가 있으며 애통함을 통하여 우리의 인격이 성숙합니다.
  그래서 유명한 설교가 '토마스 왓슨'은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지 않고는 낙원에 이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회개의 눈물은 위로의 씨앗입니다. 파우스트를 쓴 괴테는 말하기를 '눈물로 밤을 세워본 적이 없는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대학시절 친구와 함께 길을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고 비바람이 불면서 큰 거목하나가 쓰러졌습니다. 그 순간 사랑하는 친구가 그만 고목에 깔려 죽고 말았습니다. 루터는 친구의 죽음을 보고 밤새워 통곡하다가 '이 세상이 무엇이고 인생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눈물과 슬픔과 고민이 그로 하여금 법관으로 출세하려던 생각을 버리게 했고, 성직자가 되어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종교개혁의 선구자가 된 것입니다.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이 젊어서 군대생활을 할 때입니다. 어느 날 그는 보초를 서고 있었습니다. 잠깐 볼일이 있어서 친구에게 대신 보초를 부탁하고 잠시 후 돌아와 보니 그 친구가 적에게 피살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번연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기를 대신해서 죽은 친구를 생각할 때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이 애통이 그로 하여금 인간의 깊은 뜻을 깨닫게 했고, 하나님을 만나게 됐으며 성경 다음으로 불리는 위대한 역작 천로역정을 쓰게 된 것입니다.
  사실 대 낮에는 밝아서 멀리 있는 별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캄캄한 밤이 되면 우주 저 끝에서 반짝이는 별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될 때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실패하고 고통이 밀려 닥칠 때, 인생은 더 깊이 생각하게 되고 세상을 멀리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별의 세계는 만원경의 렌즈를 통해서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세계는 눈물의 렌즈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시126:5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은 이사야가 하나님의 선지자가 된 배경을 보면 깊은 좌절과 슬픔 가운데 빠져 있을 때였습니다. 사6:1절에 '웃시야 왕이 죽던 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의 통치 40년 동안 웃시야 왕의 총애를 받던 관변 선지자였습니다. 왕의 배경을 가지고 큰 소리 쳤던 이사야에게 왕의 죽음은 그로써는 큰 낭패였습니다. 이런 이사야가 하루는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던 중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 제일 먼저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고백이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입니다.' 깊은 자복과 회개와 애통히 있을 때 천사가 이사야의 입술을 불로 짓고서 말하기를 '네 악이 제하여 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할/
  그때 또 하나님의 음성이 '누구를 보내어 내 일을 감당하게 할 것인가?' 그때 이사야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외치며 하나님의 소명을 찾아 새로운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어 하나님의 공의를 용기 있게 외칠 수가 있었습니다.
  애통히 왜 복이 됩니까? 눈물에는 회개가 있기 때문에 사죄의 복이 있습니다. 죄 사함의 복입니다. 이것이 귀한 축복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매일 닭이 울 때마다 자신도 울면서 전에 예수님을 배신했던 일을 생각하면서 자신을 바로 세웠다고 합니다. 통회의 눈물이 있는 곳에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고 은혜가 임합니다. /할/
  사도바울은 딤전1:15절에 고백하기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했고, 롬7:24절에서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했습니다. 약4:9절에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찌어다' 왜? 애통이 사죄의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②다른 사람의 불행을 애통해 하는 마음입니다. 이웃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애통하는 삶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애통입니다. 우리는 자칫하면 자기로 하나만을 위해 살다가 죽는 부끄러운 인생이 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삶의 주인공은 자기를 벗어난 남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고 소나 돼지처럼 학대를 받는 흑인 노예를 볼 때, 그 마음에 견딜 수 없는 아픔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그 아픔을 키워 마침내 노예 해방을 선언했고, 오늘날 미국 역대 대통령 중 최고로 존경하는 인물이 된 것입니다.
  영국 세프츠버리 경은 많은 노동자와 노인들과 어린이들을 위해 영국에서 최고로 공헌한 사람입니다. 그가 그런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날 그에게 단순한 한 사건이 계기가 되면서 부터랍니다.
  그가 어려서 조그마한 한 동네를 지나가는데 한 가난한 가정의 장례식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관은 아주 싸구려 관이었고, 그 관은 실은 수레는 술 취한 네 사람이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시신 앞에서 상스러운 농담을 하는가하면 수레를 이리 밀고 저리 미는 바람에 언덕바지에서 관이 떨어져 그만 다 부셔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보고도 많은 사람들이 못 본 척 외면하고 지나갔습니다.
  이것을 본 세프츠버리는 자기 자신에게 혼자 다짐했습니다. '내가 크면 저런 불행을 없애는 일에 내 일생을 바리치라' /할/
  롬12:15절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그렇습니다.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고 했습니다. 이 사회에 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병들어 우는 사람, 사업이 망해서 우는 사람, 남편을 잃고 아내를 잃은 사람,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억울한 일을 당해서 우는 사람, 큰 사건 속에 우는 사람, 우리는 그 사람 속에 들어가 같이 울어줘야 합니다. 타인의 고통을 위해 동정하는 애통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의 실현입니다.
  그러나 더 값진 울음은 이웃의 영혼을 바라보고 울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을 놓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울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기 동족들의 구원을 놓고 울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자 존 낙스는 '나에게 스코틀랜드를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주십시오' 조국의 구원을 놓고 죽음의 기도를 했습니다.
  성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10년 이상 기도해도 자기의 아들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암브로스 감독에게 물었더니 감독이 대답하기를 '계속해서 기도하십시오, 눈물로 기도하는 어머니의 자식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라고 권고했습니다. 결국 모니카의 기도가 응답되어서 탕자 어거스틴이 회개하고 돌아와 성자가 되었습니다.
  ③그 다음에 우리가 교회가 부흥을 위하여 애통해야 합니다. 교회가 성장하면 여러분이 복을 받습니다. 교회는 애통하는 자들을 통해서 성장합니다. /믿/
  또 우리가 무엇 때문에 애통해야 합니까? 자신의 부족함을 애통해야 합니다. 신앙의 부족함을 놓고 애통해 합시다. 왜 이렇게 내가 신앙이 나약할까? 여러분 다 양보하여도 신앙은 양보하지 마십시오, 신앙은 일대일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축복은 탐내는 자의 것입니다. 욕심을 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욕심내셔야 합니다.
  또 우리가 자기의 인격적인 부족도 애통해야 합니다. 왜 내가 게으르고 나태하고, 방탕하면, 술 취하고, 죄짓는 생활에서 헤매는가? 이 애통히 있어야 합니다. 또 자기의 삶의 궁핍도 가난도 애통해 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가난해서 하나님의 일을 못하겠습니다. 복을 주십시오, 하나님께 많이 드리겠습니다. 이런 애통은 세상 적인 애통히 아닙니다. 신령한 애통입니다.
  ▶'별들의 고향'으로 유명한 작가 최인호씨의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 라는 또 다른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서문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나는 통곡하며 살고싶다. 나는 대충 대충, 생활도 대충 대충, 만남도 대충 대충, 일도 대충 대충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모든 일에 통곡하는 그런 열정을 지니고 살고 싶다. 어찌 사랑뿐이겠는가? 나는 친구도 통곡하고 사귀고 싶다, 꽃 한 송이를 보아도 통곡하며 보고 싶다. 내 아들딸들의 통곡하는 아버지이고 싶다. 아내와도 늙어 죽을 때까지 통곡하며 살고 싶다. 하나님도 통곡하며 믿고싶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간과 사물에 대한 깊은 애정과 정열과 감격이 있는 삶을 살겠다는 작가의 각오입니다. 통곡이 없고 눈물이 없는 것, 눈물이 말라 버린 사람, 감동과 정열이 없기에 진실도 없습니다. 물론 위로도 없습니다. 비인간적이란 말이 무엇입니까? 눈물이 없고 감격과 감동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어떤 위로입니까? 창조주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전능자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시126:5-6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계7:17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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