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랜스 라킨-4
D. 4부
22. 일곱 교회
23. 대환난
24. 큰 바빌론
25. 땅이 불타버럼
26. 언약들
27. 신비들
28. 예표와 실상
29.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세나무
30. 주님의 명절들
31. 제사들
32. 피라밋의 경륜적 가르침
33. 성경의 숫자들
34. 시대의 표적들
22. 일곱 교회
계시록은 A.D 96년에 쓰여졌다. 기록자는 사도 요한이다. 그는 그가 "본 것"과 "들은 것"을 기록하였다고 말했다. 따라서 이 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요한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계1:1)이다. 성경의 예언서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 "마지막 날들"에 관한 예언들은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 곳곳에 산재해 있다. 계시록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
과 순서를 계시하여 준다. 계시록은 산재해 있던 모든 예언들의 최종판이며 결론에 해당하므로 성경의 마지막에 있는 것은 가장 정확한 위치인 것이다.
이 책은 "사건"들이 가득하다. 땅과 하늘이 거의 동시에 출현하며 구름은 말려 버리고 보좌들 장로들과 천사들의 모습을 볼수 있으며, 하프, 나팔, 몸이 없는 혼들과 합창을 들을 수 있다. 땅이 하늘에 접하듯이, 또한 슬프게도 지옥도 접한다. 여기에는 강하게 반대하는 선과 악이 있다. 선과 악이 만나며, 여기에는 오직 날카로운 대립 뿐 타협이 없으며, 이 길게 이어지는 전쟁의 최후는 선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이 성경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편지하는 것이다. 이 아시아는 아시아 대륙이나, 소아시아 전체를 의미하지 않으며 단지 서쪽 끝 부분을 의미한다. 이 일곱 교회의 이름들은 지상의 모든 교회들의 이름이 아닌데, 적어도 다른 세 교회가 더 있기 때문이다. 골로새(골1:2) 히에라폴리(골4:13)은 트로아(행20:6,7) 그렇다면 이 일곱 교회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교회를 위해 다시 오실때까지 교회 역사안에서 분명하게 밝혀진
일곱 교회 기간의 교회들
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1세기 말렵에 있던 교회들들을 선택하여 표현하거나 "상징"이어야만 한다.
요한은 메시지를 받았을 때는 팟모섬에 있는 감옥에 있었다. 그는 그의 뒤에서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다. 보려고 돌아섰을 때에는 일곱 금촛대가 보았으며 이곱 촛대 사이에는 오른손에는 일곱 별을 가진 인자 같은 이가 서 있었다. 그는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이며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를 나타낸다고 말했다. 이 촛대는 등잔이다. 촛대는 자신 스스로 불을 밝히는 반면에 "등잔"의 빛은 기름통에서 성령을 상징하는 기름을 "등잔대"에 공급해 주어야 한다. 이것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들을 빛이 아닌 단지 "등잔대"로 여기신다. 오직 밤에만 사용하는 "등잔"과 "별들"이란 묘사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밤"임을 가리키고 있다(계1:19).
계시록을 해석하는데 핵심적인 열쇠는 하나님께서 해놓으신 "세 갈래의 구분"이다.
I. 과거의 것
"네가 본 것들과"
등잔 사이에서 본 그리스도의 환상 제1장
II. 현재의 것
"현재 있는 일들과"
분명한 일곱 교회 제2장과 제3장 요한은 백살은 훨씬 넘지 않았으며, 살아남은 오직 한 사도였다. 예루살렘 도성과 성전은 이미 멸망당하였으며 유대인들은 26년전에 이미 흩어졌으며, 요한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일곱 상태를 나타내는 아시아 교회였다.
III. 미래의 것
"이후에 일어날 일들"
4장의 처음부터 계시록 마지막까지이다(계4:1).
"일곱 교회들의 메시지"가 두 환상, 1장의 "일곱 촛대" 사이의 "그리스도의 환상"과 4장의 "네생물과 보좌 주위의 스물네 장로의 환상" 사이에 삽입되어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4장은 하늘로 올라간 후에(살전4:13-17) "영광스럽게된 교회"의 환상이다. 즉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눌수 있다. 2장과 3장은
"현재 있는 일들"
과 이후에 일어날 일과 "일곱교회의 멧세지"의 해석은 초대 교회들에게는 감추어져 있었는데, 이는 일곱 교회가 시간의 추이에 따라 일어나 교회사의 성격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일곱 교회가 나타내는 시기"가 이들에게 완벽하게 계시되었다면, 초돼 교회사람들은 주님의 재림이 아직 멀었다는 생각 때문에 신앙을 유지하기 어렸웠을 것이다. 반면에 이 일곱 교회의 성격은 교회사의 일곱 기간의 역사를 묘사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계시록에 기록된 이러한 일곱교회의 상태는 요한이 있던 그당시에 있었던 교회들의 정확한 상태였다는 점이다. 우리는 교회사를 통해 1세기가 끝나갈 무렵에 초대 교회들 안에 "거짓 교리"의 누룩이 만연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각 교회의 특징에 따라 적합한 이름이 주어졌는데, 이는 이름에 맞는 교회들의 특징에 따라 역사에 적용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교회사를 통해 볼 때 잊지 말아야할 또다른 중요한 사항이 있다면, 시간이 경과할수록 교회는 강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타락하고 종말은 배교로 끝난다는 점이다. 물론 눈에 보이는 "교회 건물의 증가와 교인수의 증가"는 다음에 나오는 도표에서 보는 바와같이 모두 배도로 끝나고 말 것이다.
우리는 각각의 교회의 특징과 그 시기를 자세히 살펴봄으로써 주어진 말씀을 신중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
1. 에베소서 교회의 멧세지(계2:1-7)
그리스도께서 이 교회에 대해 책망하시는 부분은 "첫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이 교회의 성격은 이 교회의 이름에서 알 수 있는데, 에베소는 "가게하다(let go", "느슨해지다(to lex)"라는 뜻이다. 실족하는 교회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을 알았던 바울은 일부 내용에서 앞으로 일어날 것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또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들이 너희 가운데로 들어와서 양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이며 또한 너희 가운데서도 사람들이 일어나서 왜곡된 것을 말하여 제자들을 끌어내어 자기들을 좇게 할 것이라.}(행20:29,30)
이 경고의 의미는 6절에서 다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네게 이것이 있으니, 즉 네가 니콜라파의 행위를 미워하는 것이라. 나 역시 그것을 미워하노라." 여기서 바울이 말한 "이리들"이란 "니콜라파"를 말한다. 그들은 분파가 아니라, "제사장 직분"을 정착시키려는 교회 안의 한 무리들이다. 아마도 구약의 레위지파와 유사한 제사장 직분을 따르는 교회를 이루려고 시도하였을 것이다. "니콜라파"란 그 단어가 의미하는대로 "지배한다"라는 "니코(Niko)"와 "평민" 혹은 "평신도"라는 "라오스(Laos)"로 이루어진 단어의 의미에서 알 수 있다. 이 목적은 "성직자 제도"를 정착시키려는 것이다. 그들을 평신도 위에 놓는데, 이것은 신약의 계획과는 전혀 관계 없는 것이다. 그들을 목자들(Pastors)이라고 부르지 않고, 성직자들(clergy), 주교(Bishops), 대주교(Archbishops), 추기경(Cardinals) 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우리는 "사도직 계승"의 교리의 기원을 알게 되며, 평신도로부터 성직자를 분리시키는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 에베소 교회는 속지 않았으며, 그들이 거짓말쟁이이며, 거짓 사도라는 것을 찾아내었다. 에베소 교회의 특징은 교회사 A.D 70년에서 A.D 140년이에 있었던 초대교회의 일반적인 특징을 잘 담고 있다.
2. 스머나 교회의 멧세지 계2:8-11
"에베소 교회"기간에서 주님께서는 책망하신 것은 "첫 사랑"을 저버린 것이었으며, 이것이 그분을 돌아서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스머나의 어원은 "쓴맛"이며, "몰약"을 의미한며, 이 약은 죽음과 관계 되어있다. 이것으로 우리는 교회 성도들에게 닥칠 박해와 죽음을 예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던 점이 고난을 겪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until death)가 아니라 죽기까지(unto death) 신실하였다." 그들은 자연적으로 죽을 때까지가 아니라 박해의 가중함으로 죽음의 고통이 필요했을 때 기꺼이 순교자들의 대열에 참여했던 것이다. 그들은 "생명의 면류관"을 상으로 받을 것이다. 이것이 순교자의 면류관이다.
그들은 그들 박해의 주동자가 마귀이며, "10일"동안 고난이 지속된다는 점을 알았다. 10일은 의심할 여지 없이 로마제국 통치 기간인 네로A.D 64년에서 시작하여 이오클레디안 A.D 310년 까지 진행된 "10번의 큰 박해"을 예언한 설명일 것이다. 교회사에서 일곱번의 "큰 박해"가 이 "스머나 기간" 중에 일어났다. 혹 아마도 가장 극악하게 박해했던 도미티안 통치시대 마지막 10년을 의미할 것이다. 이 기간은 A.D 170년에서 A.D. 312까지이다.
III. 퍼가머 교회의 멧세지
퍼가며 교회의 메세지에서 "사탄의 회당"이 언급되고 있다. 칼데아의 대제사장이며 왕이었던 아탈루스 3세는 페르시아를 정복하기 전에 퍼가모로 가서 거기에 정착했다. 따라서 사탄은 그의 수도를 바빌론에서 퍼가며로 옳겼다. 처음으로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박해했는데, 안티파스도 그 순교자들 중에 한명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전술을 바꾸어 교회를 높이기 시작했으며 세상 사람들을 교회로 이끌기 위한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콘스탄틴은 의도는 종교적이기 보다는 정치적이었다. 그는 한백성으로써 통치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과 이교도를 융합시키를 원했으며, 그의 의도대로 그의 제국은 융합되었다. 이 연합의 결과 두가지 거짓되고 잔악한 교리가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첫 번째는 "발라암의 교리"이며 두 번째는 "니콜라파의 교리"이다. 이 두 번째 것은 이미 에베소 교회의 멧세지에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A.D 325년에 니케아에서 열렸던 첫번째 가장 큰 교회 회의(공회)는 교회 안에 이러한 교리가 확고히 되는 발판이 되었을 볼 수 있다.
*이 회의는 약 1500명의 종교지도자들이 참석했다. 여기에서 주된 의결과제는 성직자 계급이 평신도를 지배하며, 정치적 통합과 종교체제를 이루는 교리를 정립하는 것이었다. 결국 여기에서 이들은 "니콜라파의 교리"를 교회의 정통교리로 확고하게 정착시켜 버렸다."
"발람의 교리"는 민수기 22장 25장에서 발람의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이스라엘 자녀들이 카나안으로 가던 길에 있던 모압 땅에 이르렀다. 모압의 왕이었던 발락은 프올의 아들 발라암을 불러서 그들을 저주하게 했다. 발라암은 유프라테 강의 프돌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주님은 발라암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는 발락에게 "바알 프올"의 음탕한 제사에 그들을 초청하도록 제안했으며, 이로써 이스라엘을 주님께서 분노하실 올무에 빠뜨렸다. 그분 스스로 이들을 멸망시키도록 하는 것이다. 발락은 그대로 하였으며, 그 결과 이스라엘 남자들은 그들의 음탕한 축제에 갔으며, "모압의 딸들"을 보고 그들과 함께 음행을 저질렀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불붙어 그들에게 역병을 보내었고, 그들 중 42000명이 멸망당하였다.
여기서 "퍼가모"라는 단어의 의미는 "숱한 결혼"이며, 교회가 국가와 함께 연합하는 "영적인 음행" 즉,"발람주의"의 죄를 말하는 것이다. 콘스탄틴대제는 이교도들을 교회로 개종하도록 하기 위해 이교도들의 제사장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때 "바실리카스"(Basilicas)라는 웅장한 건물들을 지어주었으며, 교회를 장식할 수 있도록 많은 돈을 지원해 주었다. 그는 또한 이들에게 최상의 제의를 입도록 해 주었다. 주교들은 값비싼 제의를 입고 바실리카의 높은 강단 위의 대리석 제단 옆에 만들어 놓은높은 보좌에 앉게 했다. 그의 앞에는 낮은 계급이 앉았으며, 금과 보석으로 장식으로 광채를 더했으며, 경배에서 감각적인 형태가 도입되었으며, 설교의 성격도 바뀌어졌다.
교회에 들어온 이교도들의 구미를 맞추기 위해 "이교도 의식"이 교회에 그대로 채택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가지 예로 크리스마스를 들수 있다. 태양을 숭배하던 이교도들은 12월 21일이 동지로 12월25일이 되면 낮이 서서히 길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 날이 태양신의 아들이 탄생한 날로 생각했다. 이들은 이 날을 거대한 축일로 삼았으며, 로마에서도 각종 써커스를 하며 대대적인 행사를 벌였다. 주님은 의의 태양이시다. 그래서, 교회는 이 둘을 융합하여 12월 25일을 주님이 탄생하신 날로 정하고 이교도의 태양신(Sun-God)과 일치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때부터 전천년주의는 모두
"후천년주의"
로 바뀌기 시작했다. 교회는 점점 강성해지고 부유해졌다. 교회와 국가의 정교일치는 주님의 재림없이 이 땅에 인간의 힘으로 천년왕국을 건설하겠다는 주장으로 발전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지지해 줄 성경 구절을 얻기위해서 유대인은 영원히 버림받았으며, 유대인에게 약속된 모든 예언은 교회에게로 넘어왔다는 주장을 내 놓았다. 이 기간은 콘스탄틴 대제의 즉위가 시작된 A.D.312년에서 A.D. 606년 보니파스 3세가 우주적인 감독(Universial Bishop)의 자리에 오를 때
까지이다.
IV. 두아티라 교회에 보낸 메시지 계2:18-29
두아티라 교회에 주어진 칭찬은 그들의 행위이다. 그들은 상을 받을 만큼 충분한 수고를 했다. 하지만 이 교회에게도 책망할 것이 몇가지 있었다. 그들이 잘못한 것은 "자칭 여선지자라고 하는 이세벨"이란 여자를 교회에서 용납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음행을 "가르치도록" 그냥 두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람들을 유혹하여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게 했다.
이 여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이 여자는 선지자가 아니면서 자신을 선지자로 가장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고상한 혈통을 타고 태어났는지 모른다. 그녀는 아마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녀의 실명이 이세벨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구약에 나오는 아합의 부인인 이세벨이란 여자와 유사한 인물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여자의 이름을 이세벨이라고 불렀다면 달리 설명이 필요치 않는 것이다. 그녀는 아브라함의 딸이 아니었다. 그녀는 투로의 딸이었으며 왕가의 자녀였다. 그녀는 잔인한 성품과 바알과 아스타롯에 대한 열렬한 신앙으로 유명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드바알(Eth-baal)로써 당시 통치자였던 팔레스왕을 살해하고 왕이 되었다. 아합은 이스라엘 왕이었는데, 자신의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정략적으로 이세벨과 결혼했다. 이세벨은 이스라엘에 바알을 숭배할 수있도록 했으며,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주의 선지자들을 살해했다. 그녀의 영향력은 남편 아합이 살아있는 동안뿐만 아니라 그녀의 두아들인 아하시아와 여호람의 통치기간 중에도 지속되었다. 더욱이 그녀는 자신의 딸 아탈리야를 유다의 왕이었던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과 결혼시켜서 우상숭배를 유다땅으로 까지 전파시켰다. 이로인해 예루살렘에도 바알의 산당이 지어졌고 온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숭배의 죄를 짓도록 만들었던 것이다(왕상 16:29-33).
계시록에 나오는 이세벨이란 여자가 진짜 사람인지 그렇지 않는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녀는 "종교제도"를 예표하고 있으며, 그 종교제도는 두말할 필요도 없는 "로마 캐토릭 제도"인 것이다. "성모 교회"(교황 교회)가 등장했을 때 거기에 가는 모든 사람들은 저절로 우상숭배자가 되어 버렸다. 거기에는 "교회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월한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사람이 하나님의 대리자를 자임하고 선지자인양 속이고 있기 때문이다. A.D. 606년부터 종교개혁이 일어나 1520년까지 캐톨릭을 자세히 공부해보면, "피의 미사", "우상 숭배", "이교도 의식"이 난무한 "이세벨주의"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기간은 또한 "십자군 전쟁"과 같은 이세벨식 박해도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도 이 진리를 잘 배울 수 있는데 두아티라 교회의 한 여자 "이세벨"과 복음의 빵덩이 속에 침투한 "누룩"은 똑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기간은 A.D. 606년에서부터 종교개혁이 일어난 1520년까지이다.
V. 사데교회에 보낸 메시지. 계3:1-6.
사데 교회는 살았으나 죽은 교회라고 부른다. 이 교회는 형식과 의식만이 존재할 뿐 생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생명이 없는 교회는 의식과 형식적인 예배만이 존재할 뿐이다. 사데란 뜻은 "모면하는 사람", 또는 "나오는 사람"이다. 이것은
종교 개혁
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캐톨릭에서 나온 것을 잘 나타내 주는 말이다.
종교개혁을 통해 마틴 루터와 수많은 개혁자들이 캐톨릭의 잘못된 교리와 거짓 가르침, 교권정치의 학정에 항거했다. 이 시기는 1517년부터 시작되었다. 마틴 루터는 독일의 위텐베르그의 수도원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써 붙임으로써 교황의 독점적 고유 권한을 침범한 항거1자가 되었다. 1517년 10월 31일이 종교개혁의 시발점이다. 하지만 이것은 순수한 기독교의 종교개혁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정치 개혁에 가까웠다. 성령께서 도우셔서 이 반박문이 널리 유포되었고, 또 인쇄술로 인해 성경이 많이 발행되었다. 이 때까지 캐톨릭에 의해 갇혀져 있던 "이신득의"(믿음으로 의롭게 됨)의 교리가 빛을 보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훨씬 많은 빛을 주었다. 이때까지 로마 캐톨릭 교회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영적으로 완전히 죽어 있었다.
반면에 종교 개혁자들은 그동안 자행되어 왔던 수많은 종교적 의식과 쓰레기 같은 교리들을 말끔히 제거했지만 주님의 재림에 관한 약속을 회복시키지 못했다. 그들은 우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켰지만, "하늘들로부터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지 않았다. 사데 교회는 A.D.1520년부터 1750년까지 지속되었다.
VI. 필라델피아 교회에 보낸 메시지. 계3:7-13.
필라델피아란 단어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문자그대로 "형제사랑"이란 뜻이다. 이 교회는 사데 기간에 있었던 것과 같은 날카로운 교리 논쟁이나 상호간의 적대감대신 형제들간의 친교와 사랑을 강조하는 교회이다. 그래서, 지난 150년간 복음 전도와 선교 사역을 감당했다.
이 교회에 관해서는 3가지가 언급되어 있다.
첫째, "적은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살아 있으나 영적으로 "죽은" 사데 교회가 영적으로 부활하듯이 부흥을 이루었다. 영적부흥은 필라델피아교회 시대의 특징이다. 이러한 부흥은 A.D. 1739년에 죠지 휫필드에 의해 시작되어졌으녀, 요한 웨슬레와 찰스 피니, 디엘 무디가 뒤를 따랐다.
둘째, 그들 앞에는 "열린문"을 두었으며 아무도 그것을 닫을 수 없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 열면 아무도 닫을 수 없고 또 닫으면 아무도 열 수 없는 분에 의해 맺어진 언약을 주목하라. 1793년 윌리암 케리는 배를 타고 인도롤 갔고 거기에 문을 열었다. 곧이어 주님은 중국, 일본, 한국, 아프리카와 여러 작은 섬들로까지 계속해서 문을 열어 나가셨다. 이제는 지구상에 선교사가 갈 수 없는 나라가 거의 없다.
셋째, "시험의 때"로부터 지켜 질 것이다. 이 시험은 온 세계에 닥칠 환난을 말한다. 필라델피아 교회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일곱교회중 유일하게 살아남는 교회이다. 스머나 기간에 닥쳤던 10번의 시험에 비하면 시험이라고 할만한 어떤 시험도 받지 않았던 교회이다. "시험의 때"란 미래에 있을 "대환난"(Great Tribulation)을 의미한다는 점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며, 이것은 주님이 그분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오시기 전에 있을 것이다. 필라델피아 교회는 이 환난을 통과하지 않을 것이란 약속이 분명히 주어져 있다. 이 말씀은 교회가 환난을 통과하기 전에 들림받을 것이란 또 하나의 분명한 증거가 되지 않는가?
필라델피아 교회 기간은 1750년에서 1900년까지이다. 우리는 모든 교회들이 결국은 쇠퇴해지고 타락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부흥운동과 선교운동이 필라델피아 교회기간 동안 융성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영적인 능력대신에 일종의 선교사업으로, 기계적인 방법으로 전락하였다.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이 현상은 지속될 것이다.
VII. 라오디케아 교회에 보낸 메시지 계3:14-22
이 교회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아무런 칭찬도 받지 못하고 책망만 들은 교회이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도다. 나는 네가 차든지 덥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그처럼 미지근하여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내 입에서 토해 내겠노라.}
"미지근한 물"은 혐오감을 일으키거나 구역질을 일으키는 것과 다를 바없다. 그래서 "미지근한" 교회 만큼 그리스도께서 더 싫어하시는 것이 없다. 그분은 차라리 차거나 덥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쟌 웨슬리가 야외 설교를 하러 온 영국을 순회하러 다니기 전까지 영국 교회의 냉담한 영적인 상태를 잘 묘사한 말이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들 이 "미적지근한 상태"에 있다. 아주 극소수만이 영적으로 덥고 뜨겁다. 교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니지만 대부분은 사업상이거나 사교적인 장소로 다니기 때문에며 위원회, 사교 모임, 클럽처럼 양적 증가는 있으나, "영적인 뜨거움"은 전혀 없다. 부흥 집회가 열리지만, 주님꼐로부터 오는 능력을 기다리는 대신, 돈을 주고 불러온 부흥사들과 복음 가수들을 고용해서 분위기만을 띄운다. 이제 구령도 하나의 사업이 되어 버린 것이다.
"미지근"하게 된 원인은 라오디케아 교회의 특징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이다. 라오디케아 교회는 "자기 기만"에 빠져 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이며, 부요하고,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지만 네가 비참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들은 외적으로 매우 부유했지만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보신다. 오늘날은 이러한 교회들이 도처에 너무나 많이 있다. 교회사에서 라오디케아만큼 부요한 교회는 일찍이 없었다. 많은 교회들은 성곽같은 웅장한 교회건물을 지었고, 오색찬란한 유리창, 웅장한 강단, 아름다운 성가대, 엄청나게 많은 교인들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벌거벗은 상태이다. 교회들은 부동산을 사들이기도 하고 은행에 넣어서 이자놀이도 한다. 물론 모든 교인들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대부분은 술을 먹고, 도박을 하며, 춤을 추러 다니고 극장을 들락거리는 아주 세상적인 사람들이다. 가난하고 영적인 사람들은 그런 교회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출석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눈총거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교회들이야말로 비참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은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런 교회에 초청을 받는다면, 그들은 우리들에게 자기들이 지어놓은 교회의 웅장한 외관을 보여주며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또한 웅장한 강대상과 수많은 성가대를 자랑하며, 교인수를 자랑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영적인 생활에 관한 질문"이나 "잃어버린 영혼에 관한 구령"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되며 그들은 "오!.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모임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족한 것이 없어요."라고 말한다. 라오디케아 교회는 잃어버린 자에 대한 빚진 자의 심정으로 눌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거두어 들인 부에 눌려 있다.
오늘날 교회가 갖는 가장 큰 문제는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없다"는 사고방식이다. 만약 우리가 돈만 갖고 있다면 세상 사람들을 돌이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돈을 사람을 회심시키지 못한다. 사람을 회심시키는 것은 돈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다.
오늘날 라오디케아 교회가 안고 있는 또다른 문제는 "정의롭지 못한 돈"이다. 그래서 주님은 "불로써 단련된 금"을 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금은 어떤 종류의 금인가? 불로써 단련된 금은 깨끗한 돈이다. "녹이 슬지않는 금"은 사기로 얻은 금이나 추수한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지 않는 그런 금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라오디케아 교회의 모습이 얼마나 잘 묘사되어 있는가?(약5:1-4).
라오디케아 교회는 가난하면서도, 눈이 멀었다.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근시안"이다. 그들은 현세의 재물만 탐할 줄 알지 하늘의 영적인 보화를 탐할 줄모른다. 그래서, 주님은 안약을 사서 바르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들은 기름과 박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안약은 사서 바르지 않는다.
이 교회는 또한 벌거벗은 교회이다. 그들의 외양은 가장 화려하고 최고급 소재들로 장식되어 있지만, 그런 것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흰 옷"을 사 입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하지만 라오디케아 교회 성직자들은 까마귀같은 검은 제의를 입고 있다.
라오디케아 교회에 주어진 가장 놀라운 계시는
"보라 내가 문앞에 서서 두드리노니"이다.
이 말씀은 일반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죄인들에게 인용하는 구절이지만 본래는 그런 뜻이 아니다. 주님은 지금 문밖에 서계신다. 이 문은 라오디케아 교회의 문이다. 지금 주님은 라오디케아 교회 문밖에 서있다는 것은 교회에서 배척을 받고 있다는 의미이며, 다시 들어갈 수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뜻이다.
이것은 신약 성경에 기록된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외적으로 그렇게 부요해 보이는 교회가 그 안에는 그리스도가 없으면서도 그 사실을 의식하지도 못한다는 말인가?
오 주님은 지금 배척받고 있다.
그분의 백성으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배척했기 때문이다. 세상으로부터 배척받았다. 세상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다. 교회로부터 배척받았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들어가기 위해서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교회밖에 있을 수 있는가? 주님께서 일단 교회안으로 들어가시면 영원히 거기에 거하시던가 아니면 아예 들어가시지 않던가 둘중의 하나일텐데 말이다. 어떻게 주님이 교회를 떠날 수 있단 말인가? 교회가 주님을 밖으로 나가도록 밀어 내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자기들안에 주님이 계신지 알지도 못했고, 주님이 떠나신 것을 깨닫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그분께 예배를 드렸고, 그 분을 찬양했고 온갖 종류의 의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님은 물러나셨다. 이유가 무엇인가? 이유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있다. "세속화"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그의 교회로 돌아올 수있는가? 회원들의 투표나 초청으로 되는 일인가? 그렇지 않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그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으며 그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 미지근한 물이 되어 버린 라오디케아 교회를 부흥시키는 길은 바로 각 개인이 자신의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다시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바로 라오디케아 교회의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라오디케아 교회는 주님이 다시 오셔서 "거듭난 교회"들을 데리고 가실 그날까지 계속 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어떠한 큰 변확도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23. 대환난
성경은 이 땅위에 "대환난"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인 화요일에 올리브산 위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는 그 때에 대환난이 있으리니, 그와 같은 것은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지금까지 없었으며, 또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 만일 그 날들이 단축되지 아니하면 어떤 육체도 구원받지 못하리라. 그러나 택함 받은 사람들(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날들이 단축될 것이라}(마24:21,22).
이 환난은 A.D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 할 때의 유대 민족에게 닥쳤던 끔찍한 고난이 아님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이 멸망이 대환난이라면, 대환난 이전과 이후에 일어나야 할 많은 일들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I. 환난의 "사실성"
대환난은 주님께서만 예언한 것은 아니다. 구약과 신약의 다른 성경 기자들도 이 부분에 관해 많이 예언해 놓았다. 구약의 예레미야30:4-7에서는 "야곱의 고난의 때"라고 하여 여자가 "산고"로 고통당하는 것으로 비유했다. 에스겔20:34-38절에서는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게 할 것이요"라고 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에스겔22:19-22절에서 이스라엘을 그분의 "용광로" 안으로 던지실 것이며, 그들은 "금을 정련 시키는 것"같이 정련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말3:1-3, 스가랴 13:9).
다니엘도 그의 백성 유대인들의 "고난의 때"라고 말하고 있다(단12:1). 관련 구절들을 통하여 "대환난"은 유대 민족과 관계 있는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들은 다시 하나님의 선민이 되기 위하여 그들에게 알맞은 "정련 과정"을 통과하는 심판이다.
이것은 간접적으로 이방인에게 영향을 줄 것이지만. 교회는 "주의 날인 대환난"이 시작되기 전에 "들림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아무 관련이 없다. 신약에서 이것에 관하여 두 번 언급하였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올리브산 설교에서(마24:9-22) 말씀하셨고, 두 번째는 요한이 계시록6:1-19:21절까지 환난기간 동안에 일어나게 될 "봉인"이 떼어지고 "나팔"이 울리며 "호리병"이 쏟아지는 환상에서 상세하게 묘사해 놓았다.
II. 환난의 "때"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 때를 "이 날", "마지막 날들"로, 요엘은 "주의 날"(엘1:15;2:1;3:14)이라고 불렀다. 성경은 "네 가지 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1. "인간의 날"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시대의 경륜이다.
2. "그리스도의 날" 이 날은 주 예수님께서 오셔 세상으로부터 그의 교회를 데려가신, "휴거"와 "환난" 사이의 기간을 말한다. 지상 위에서는 "적그리스도의 날"이다.
3. "주의 날" 이 날은 우리 주님의 "복수의 날"이며, "대환난"과 이후의 천년 왕국기간까지를 말한다.
4. "하나님의 날" 이 기간은 "이 땅이 불로 녹아짐"으로 시작하여, 영원까지 확장된다. "성경의 날들"이라는 장을 참조하라.
환난의 때는 교회가 "들림"을 받은 "이후"이며, 적그리스도가 이 땅을 통치하는 기간이다.
선지자 다니엘의 "70주"에 관한 환상(단9:20-27)에서 "예루살렘을 복원하고 건축하라는 명령이 나오는 때부터 메시야 통치자"까지 69주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예언적 연대기에서 한 주는 7년을 가리킨다. 이것들은 역사에서 모두 문자적으로 이미 성취되었다. 69주는 360일 체계로 483년이다. 이것은 B.C. 445년에 있었던 4번째 칙령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신 A.D. 30년까지이다. 그리고, 약속된 다윗의 아들로써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예언적 연대기"란 도표를 참조하시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을 때, 하나님의 시계는 멈추었다. 여기까지가 69주이고 이제 남은 것은 한 주밖에 없다. 이 한 주는 아직 성취되지 않는 미래의 사건이요, 예언이다. 69주와 70주 사이에는 커다란 시간적 간격이 있다. 이 기간 동안 성령께서는 교회를 세우셨다. 때가 되어 이 교회가 들림 받으면 하나님의 시계는 다시 작동하여 70주가 시작될 것이다. 왜냐하면 70주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인 유대인을 다루셔야 하기 때문이다.
다니엘이 예언한 70주에서 70주는 마지막 주인 동시에 "대환난"이 일어날 시기이다. 이미 일어난 69주는 역사적으로 매 주가 7년이었으므로, 남은 한 주도 7년이란 사실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환난의 기간" 또한 7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22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이 단축될 것이다." 여기서 택함 받은 자란 교회가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미 들림 받아 올라갔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택함 받은 자"란 계시록 7:1-8에 나오는 144,000명의 "인장으로 표시를 받은 자"들을 말한다.
III. 환난의 성격
환난기간이 7년간 지속된다면, 이 시기는 3년 반씩 두 때로 나누어진다. 아마 뒤에 있을 3년 반은 앞에 있을 3년 반의 시기보다 훨씬 더 심한 환난이 있을 것이다. 이 시기를
" 대 환 란 "
이라고 부른다. 다니엘의 70주에 관한 내용은 정작 다니엘 자신에게는 계시되지 않았다. 다니엘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실을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받았을 뿐이다. 그래서 다니엘은 "마지막 때가 올 때까지 그 책을 봉인하라"는 명을 받게 된다(단12:4.8.9). 다니엘이 알고 있었던 내용은 단지 마지막 날에 살 사람들이 큰 환난을 당한다는 정도였을 것이다. 마지막 날이란 "마지막 때(time of End)"이지 "시간의 끝(end of Time)"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니엘에 의해 봉인된 책은 이제는 더 이상 봉인된 책이 아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요한에게 봉인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계시록에 나오는 봉인된 일곱 권의 책은 다니엘에게 봉인하라고 했던 바로 그 책이다.
우리가 환난 기간동안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우리는 부지런히 성경을 읽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계시록 6:1-19:21절까지 공부해 보라.
계시록 12장에서 용이 하늘에서 쫓겨나 땅으로 내려온다. 이 때가 3년 반이 지난 환난의 중간 시점이다. 계시록 6-11장은 전 3년 반이고 12장에서 19장까지는 후3년 반을 다루고 있다. "계시록"과 "다니엘의 70주"란 도표를 참조하시오.
우리는 지금부터 3년 반씩을 각각 나누어서 공부하기로 하자(단9:27).
1. 전 3년 반
봉인이 열리면서 환난은 시작된다.
첫 번째 봉인 (계6:1,2).
"흰말 한 마리"가 나타나고, 그위에 탄자는 활을 가지고 있다. 그는 본래 면류관이 없었는데 곧 면류관을 받는다. 그리고 나가서 정복하고 정복하기를 계속한다. 말탄자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지금 양으로써 그 책의 봉인을 떼고 계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계시록 19장에서 흰말 탄 자로 등장하실 때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말탄자는 적그리스도이다. 말탄 자는 부활한 로마 제국의 열왕국 연합체를 지배하는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는 다가올 세계 단일 정부의 우두머리가 되어서 유대인과 한 주간간의 언약을 체결할 것이다(단9:26,27). 이 말씀은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적그리스도가 70주의 중간부터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등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봉인 (계6:3,4)
"붉은 말"을 탄자가 땅으로부터 평화를 제거할 권세를 얻는다. 이것이 상징하는 의미는 분명하다. 말의 색깔이 붉은 것은 "피"를 상징하는 것이며, 큰 칼은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시기에 대해서 주님은 더욱 분명하게 예언해 놓으셨다. (마24:6,7을 읽으시오). 이 전쟁의 결과로 적그리스도는 유럽연합체의 확고한 통치자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세 번째 봉인 (계6:5,6)
"검은 말"이 나오고, 그 위에 탄자가 손에 저울을 가지고 있는데 한 음성이 말하기를 "밀한되가 한 데나리온이요, 보리 석되가 한 데나리온이라" "너는 기름과 포도주는 손상시키지 말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 말씀의 뜻을 아는 것도 어렵지 않다.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은 전쟁에 동원되기 때문에 들판은 아무도 경작하지 못할 것이다. 필연적으로 기근이 따라올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셨던 그대로이다. 마태복음24:7을 보라. 올리브와 포도나무는 경작하지 않아도 열매를 맺는다.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네 번째 봉인 (계6:7,8)
"창백한 말"이 나오고, 그위에 탄자는 "사망"이라 불린다. 앞에서 나온 말탄자들은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이 나타날 때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지옥이 지금까지 전쟁과 기근과 사망으로 죽어버린 모든 사람들을 삼켜버리기 위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다섯 번째 봉인 (계6:9-11)
다섯 번째 봉인이 열릴 때 요한은 제단 아래에서 "순교자들의 혼"을 보았다. 요한이 여기서 본 순교자들의 혼은 이미 지나간 옛날에 교회시대에 죽었던 순교자들의 혼이 아니다. 이들은 환난 기간동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 때문에 죽은 자들이다. 교회가 들림받고 나면 "왕국 복음"은 다시 증거될 것이다(마24:14). 그리스도께서 이 지상에 "왕국"을 건설하겠다는 선포는 마귀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너무나 싫은 말이기 때문에, "왕국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을 심하게 박해한다(마24:9-13). 요한이 제단 아래서 본 "순교자들의 혼"은 이 기간 동안 박해로 죽은 혼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죽음에 대한 피의 보복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동료 종과 형제도 그들처럼 죽임을 당하여 수가 찰 때까지" 잠시 쉬라는 명을 받는다. 이 예언은 계시록 20:4에서 성취될 것이다.
여섯 번째 봉인 (계6:12-17)
여섯 번째 봉인이 열릴 때는 이 지구상에 엄청난 물리적인 변화가 발생한다. 요엘2:30,31, 마태복음24:29, 이사야13:9-11을 보라. 이때 일어나는 천재지변은 너무나 끔찍해서 사람들은 어린양의 진노로부터 피하기 위해 산들과 바위에게 자신들 위로 숨겨 달라고 외칠 것이다. 마태복음 24장과 계시록 6:1-7을 잘 비교해 보라.
여섯 번째 봉인과 일곱 번째 봉인이 열리는 사이에 약간의 시간적 간격이 있다. 이 사이에 이스라엘의 12지파로부터 각 지파별로 12,000명씩, 총 144,000명이 인침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아합때 바알에게 절하지 않은 700명을 남겨 두었듯이 적그리스도에게 절하지 않은 144,000명이 남아 있음을 말해 준다. 그들은 천사로부터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된 인장을 받는다(계14:1; 22:4). 이 때 요한은 한 "피로 씻긴 큰 무리"(계7:9-17)을 본다. 이것은 우리에게 "마지막때" 구원받는 다른 무리들이 있음을 알려준다. 그들은 대환난에서 나왔기 때문에 교회가 아니며 그들은 교회가 올라간 후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이방인일 것이다. 그들은 구원받고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길 것이며 다시는 굶주리거나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교회의 성도가 아니기 때문에 땅이 축복받는 천년동안은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일곱번째 봉인 (계8:1)
일곱번째 봉인이 열리자 잠시동안 "하늘에는 정적"이 있다. 이것은 더욱 큰 재앙이 오는 동안을 예비하는 시기이다. 정적 후에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불려고 준비한다.
첫째 나팔 (계8:7)
"첫째 나팔"의 소리는 "피가 섞인 불과 우박"을 땅에다 쏟아 "나무의 삼분의 일"이 타버리고 "모든 푸른 풀"도 타버린다. 이것으로 요엘2:30,31이 성취될 것이다. 이것은 "이집트에서 행해진 7번째 재앙"의 반복이다(출9:22-26).
이것은 결코 비유나 상징이 아닌 "문자적인 재앙"이다. 문자적이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둘째 나팔"(계8:8,9)을 불자 산이 불에 타는데 아마도 유성이 바다에 떨어져 바다에 생명을 가진 피조물의 삼분의 일과 "배들의 삼분의 일"이 파괴되는 것일 것이다. 추측컨데 상당수의 해군 함대가 모일것이며, 죽은 자들의 "피"는 바다를 변색시킬 것이다.
세째 나팔 (계8:10,11)
"세째 나팔"의 소리는 나자, 쑥이라 불리는 "커다란 타는 별"이 하늘에서 강들의 삼분의 일과 물들의 원천에 떨어져 독이 된다. 이것은 아마도 다른 폭발한 독까스 성분을 함유한 유성이 물의 원천과 강들에 떨어져 오염되어 물을 먹는 모든 사람들은 죽음의 저주를 받게 되는 것일 것이다. 쑥은 "독한 술"을 만드는 원료로, 프랑스에서는 마취제로서, 독약으로서 많이 사용되었다. 선지자 예레미야도 이 때를 예언했다(렘9:13-15).
네째 나팔 (계8:12)
"네째 나팔"의 소리가 난 후, 해와 달과 별의 삼분의 일이 강타 당하여 그것들의 빛이 삼분의 일로 어두워진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신 것 중에 하나이다(눅21:25,26). 한 천사가 하늘 한 가운데로 날며 외치기며 "남은 세가지 화"를 알리고 이어서 세 나팔을 불것이다(계8:13).
다섯째 나팔 (계9:1-12)
"첫째화"
"메뚜기의 고통"
"다섯째 나팔"이 불리자 한 별이 하늘에서 땅에 떨어져 "끝없는 구렁"의 "열쇠"를 받는다.
이것은 실제 별이 아니라 별 같이 보이는 천사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열쇠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끝없이 깊은 구렁의 열쇠를 주실리가 없기 때문에 타락한 천사나 사탄이 아니라, 1000년 동안 사탄을 묶어 끝없는 구렁에 던질 계시록20:1-3의 천사일 것이다. 끝없이 깊은 구렁이 열려 연기와 메뚜기들이 온 땅을 덮을 것이다. 그들은 말과 사람과 여자와 사자와 전갈의 합성으로 그들의 날개 소리는 전쟁에 나가는 많은 말들이 끄는 병거 소리 같다.
그들의 크기는 정확하게 주어지지 않았지만 보통 메뚜기보다는 클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보통의 메뚜기는 풀을 먹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메뚜기들은 풀이나 어떤 푸른 것이나 어떤 나무도 해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인장"으로 그들의 이마에 표시를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죽이지" 말고 오직 "고통"만 주도록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전갈메뚜기" 재앙의 의미는 많은 마귀 군사들이 끝없는 구렁에서부터 해방되어 인간의 몸을 소유하거나 들어가서 고통만 주어 사람들은 죽기를 원하여도 마귀들이 그들을 죽을 수 없도록 방해 할 것이다.
이들 "전갈 메뚜기"는 왕이 있지만 보통 메뚜기는 왕이 없다(잠30:27). 이 왕의 이름은 히브리어로는 "아바돈"이며 헬라어로는 "아폴루온"이며, 이 단어의 뜻은 "파괴자"이다. 이 왕은 사탄이 아니다. 사탄은 자유롭지만 "끝없는 구렁의 왕"은 가두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여섯째 나팔 (계9:13-21)
"두 번째 화"
"말탄자의 재앙"
"세 번째 나팔"을 불 때 금제단 아래에서 유프라테스 강에 결박해 놓은 네 천사를 풀어 주라는 음성을 듣는다. 그들은 묶여져 있었다 사실로써 타락한 천사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지옥의 2억의 "기마병" 군대의 지휘자들이다.
이 기마병은 보통사람들이나 보통 말들이 아니다. 이 말은 말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 머리는 사자이고 꼬리는 뱀과 같고 머리가 달렸으며 그들의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고 사람들의 삼분의 일을 죽이고 그들의 꼬리에 달린 머리로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준다. 말탄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된 흉배를 입고 있다.
이 초자연적인 군대들은 성경에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다(왕하6:13-17). 예수님께서 오실 때 하늘의 천사들이 뒤따를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들은 사람들을 회개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공격하려는 것이다.
15절에 보면 이 천사들은 연, 월, 일, 시를 위해 예비해 놓은 자들이며 이것으로 네 천사는 지금 유프라테스에 묶여 있으며 언젠가는 정확한 연,월,일,시에 풀려서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다. 이 두 군대, 즉 "전갈 메뚜기"와 "지옥의 기마병"들의 침략은 우리에게 교회가 들림 받고 난 후의 날들이 얼마나 무서운 가에 대한 엄중한 경고를 주고 있다. 사탄과 그의 마귀의 군대들은 더욱 기승을 부리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류를 파괴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간 격
여섯째와 일곱째 나팔이 불리는 사이에 여섯째, 일곱째 봉인이 열어지는 사이에 간격이 있었던 것처럼 "간격"이 생긴다. 이 간격동안 힘센 천사가 그의 손에 작은 책을 가지고 내려온다. 이 힘센 천사는 그리스도 자신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모습은 계시록1:12-15절과 일치하며 그리고 그의 "음성"은 사자와 같다고 한다. 계시록5:5절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유다 지파의 사자"이다.
그리고 계시록11:3절에 보면 그분은 "나의 증인"으로서 "두 증인"에게 말한다. 그의 오른손에는 작은 책이 있고 오른쪽 발은 바다를, 왼쪽 발은 땅을 밟고 더 이상 지체하지 않을 것임을 맹세한다. 환난의 끝무렵에 주님께서 올리브산 위에 다시 서시면, 이 땅은 합법적으로 주님의 실제적인 소유가 되어 아무도 자기 땅이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된다.
두 증인
계시록11:1-14절에서 우리는 "두 증인"이라고 기록된 두 사람이 후 삼년 반 동안 예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누구인지는 쉽게 알 수 있다. 한 사람은 "하늘을 닫고 예언하는 동안 비를 오지 못하게 하는 권세"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주의 크고 무서운 날"에 오기로 된 엘리야 외에 없다(말4:5-6). 그리고 그는 42개월, 즉 3년 반 동안 하늘을 닫는 권세를 가질 것이다. 이것은 아합 때 그가 했던 사역과 정확히 일치한다. 또 한 증인은 "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권세가 있어 원하는 때면 언제든지 온갖 재앙으로 땅을 칠 권세를 지니고 있다. 이것으로 그는 모세임을 알 수 있는데, 왜냐하면 성경에서 이러한 권세를 가진 사람은 모세 한 사람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세가 죽음에서 일어난 이유가 설명되기 때문이다(유9).
모세와 엘리야는 변화산에서 천사처럼 흰옷을 입고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났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 곁에 있었던 두 사람도 모세와 엘리야였을 것이다(행1:10,11).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이 땅에 먼저 와서 그분의 오심을 전파하는 증인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이 "증거하는" 기간 동안에 그들의 적들을 입에서 나오는 "불"로 멸망시킬 수 있다. 하지만 1260일이 끝나는 날 그들은 죽임일 당하여 삼일 반동안 예루살렘의 도시의 거리에 그들의 시체가 나뒹굴게 될 것이다. 3일반이 지난 후에 다시 살아나서 하늘로 올라간다. 그들을 바라보던 자들은 모두 크게 놀랄 것이다. 그들이 올라간 후 땅에는 큰 지진이 일어면서 둘째 화가 끝난다.
일곱 번째 나팔 (계11:15-19)
"셋째 화"
이 "일곱번째 나팔"은 다음 19장의 끝에 이루어질 내용에 포함된다. 우리는 계시록을 공부하면서 잊지 말 것이 있는데 "일곱 봉인"은 "일곱 나팔"과 "일곱 호리병"을 포함하고, "일곱 나팔"은 "일곱 호리병"을 포함하는데, 그 이유는 모두 끝에 "음성"과 "천둥"과 "지진"이 있기 때문이다(계8:5;11:19;16:18).
2. 주(week)의 중간(계12:17)
"주의 중간"에서 하늘에서는 두 가지 놀랄만한 이적이 나타난다. 이적은 어떤 것의 상징이란 의미이다.
"해로 옷입은 여인"
이 "여인"은 동정녀 마리아나 교회가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우리는 요셉의 꿈에서 11개의 별과 달과 해를 볼 수 있다(창37:9). "해로 옷입은 여인"은 달은 발밑에 있으며 그녀의 머리에는 "12개의 별"로 된 면류관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유대인을 상징한다. 요셉은 12번째 별이였다. 이스라엘은 여러 번 구약에서 결혼한 여인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교회는 오직 "한 순결한 처녀"이다(고후11:2). 이 "여인"은 아이를 배고 있으며 산고로 울부짖는다. 교회가 이런한 상태에 있었던 적이 있는가? 바울은 이스라엘이 말하기를 "육신으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나셨으며"(롬9:4,5), "우리에게 한 아이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으니"(사9:6,7) 라는 예언이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게 심한 고통과 심판을 거친 뒤에 일어날 것이다. 이것들이 그녀의 "산고의 때"이다. 그녀의 산고의 결과로써 "사내 아이"를 낳는데 그는 철장으로 나라들을 다스릴 것이다. 시편 2편에 있는 대로 그는 그리스도이다. 그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들려 올라갈 것이다. 그녀의 아이를 낳은 후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장소인 "광야로 도망"하여 부양 받는다. 그곳에서 1260일 동안 피한다. 여기서 많은 주석가들이 실수를 하는데 그들은 다섯때와 여섯때 사이에 교회 시대가 있다고 잘못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간격은 다니엘의 69주와 70주 사이로 요한은 지금 그리스도가 들려 올라간 이후 사탄이 던져지기까지의 간격을 보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환난에서 이스라엘을 다룰 뿐이지 결코 교회를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여인이 마리아가 아니라는 증거는 더욱 많다. 왜냐하면 이 여인이 도망간 곳은 이집트가 아니라 광야이며, 그녀의 아이와 함께 도망간 것이 아니라 혼자 도망갔다. 아이는 이미 하나님과 그의 보좌 앞으로 들려 올라갔기 때문이다. 이 여인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도망한 것이다.
"용"
두 번째 나타날 이적은 하늘에 "커다란 붉은 용" 한 마리가 나타나는 것이다. 9절에 따르면 이 용은 "옛뱀", "마귀", "사탄"이라고 불리는 존재이다. 그의 색깔은 붉은 색인데 이는 피의 색깔과 같다. 왜냐하면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기 때문이다(요8:44). 그는 자신의 꼬리로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진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가 천사들을 이끌던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별"은 주로 "천사"를 나타냈다(욥38:7). 천사들은 그와 함께 땅으로 쫓겨난다. 용이 쫓겨나는 경위는 12:7-12에 잘 나와 있다. 그는 하늘에서 미카엘과 전쟁을 하지만 패하고 땅으로 쫓겨나는 것이다.
지금은 그 용이 하늘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기 2000년 전 욥의 때에 그는 하나님께 가까이 갔었다(욥1:1-2:8).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을 때 헤롯의 손으로 그를 죽이려고 애썼다(마2:16-18). 그는 광야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했으며, 베드로를 밀까불 듯이 까불었다. 그는 오늘날 "공중 권세 잡은 자"이며(엡2:2), "이 세상의 신"(고후4:4)이다. "용"이 하늘에서 쫓겨날 때 하늘에는 큰 기쁨이 있을 것이다. 왜냐햐면 밤낮 없이 그리스도의 형제(유대인)들을 고소하던 자가 쫓겨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땅에는 큰 재앙이 있을 것이다. 용은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분노하고 있기 때문이다. 용은 사슬에 묶여서 끝없이 깊은 구렁으로 던져지기 전에 땅에 사는 거민들에게 모든 분노를 쏟아 부을 것이다.
용이 땅으로 쫓겨왔다는 것은 땅의 사람들이 그 만큼 더 힘을 얻는다는 뜻이다. 그들은 모두 힘을 합하여 사내 아이를 낳은 여인(이스라엘)을 향해 모든 악의와 저주를 퍼부으며 공격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인에게 "큰 독수리 날개"를 주셔서 광야로 피하게 하신다. 여인은 거기에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삼년 반)"를 피해 있다가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온다. "너희는 내가 이집트인들에게 어떻게 하였으며,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를 실어 내게로 데려왔는지를 보았느니라."(출19:4). "여자"와 "용"이 상징인 것처럼 "독수리 날개", 또한 상징이다. 이스라엘은 광야로 급히 도망가서 거기에서 삼년 반 동안 안전하게 거하다가 용이 묶여 갇히게 되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 피 난 처 "
구약시대의 도피처는 환난 때 이스라엘 자손들이 피할 "광야의 처소"를 예표한다. 살인자가 피의 보복을 피해 안전하게 거할 수 있도록 요단강 양 옆에 각 각 3개씩 도피 성읍이 만들어져 있었다. 재판 후에 이 사람이 고의적으로 살인을 한 것으로 증명되면 그는 다시 피의 보복자의 손에 넘겨지고, 과실로 인한 살인이었다면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야 했다. 만약 "살인자"가 없다면 "피의 보복자"도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도피성읍 또한 필요치 않을 것이다.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그들의 생명을 보호받기 위해서 도망가는 어떤 특수한 사람들을 보게 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피의 보복자가 그들을 뒤따르기 때문일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살인"한 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도망하는 것이다.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유대민족일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게 하였는데, 비록 그들이 직접 못박아 죽이지는 않았더라도 그리스도께 유죄를 선고케하여 로마인의 손에 넘겨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의 자손에게 돌리라"(마27:25)하고 외쳤다. 사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고의적으로 죽인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자세히 살펴볼 때 과실이었음이 알 수 있다. "아버지시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는 이 말씀을 통해 볼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고의적으로 죽이려고 하였던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격분으로 인한 무지로 죽였음이 알 수 있다. 바울도 말하기를 "만일 그들이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처형하지는 아니하였으리라."(고전2:8)고 말하였다.
살인죄를 지닌 유일한 민족은 유대 민족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인 죄로 인해 그때부터 지금까지 1800년간 도피처를 찾아 다녔지만 여전히 그곳에 도달하지 못했다. 피의 보복자가 지금도 그들의 뒤를 맹렬하게 따라 다니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유대민족은 적들에게 민족의 생존권이 달린 위협 속에서 살고 있다. 수세기 동안 유대인들을 일컫는 말은 "유랑하는 유대인"이었다. 이는 모세의 "네 발바닥이 쉼을 얻지 못할 것이요"(신28:64-67)라는 예언이 정확하게 성취되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살인자라면 피의 보복자는 누구일까? 우리는 피의 보복자는 살해당한 사람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어야 함을 알고 있다. 이 말은 곧 살해당한 사람과 보복자는 같은 종족임은 물론이요, 같은 식구이거나 친족일 수밖에 없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이었을 뿐 아니라 육신의 형제들과 자매들이 많이 있었다. 마리아와 요셉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란 네 형제를 두었다. 그리고 딸들도 있었다. 이들 중 둘은 초대교회의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였고 유다는 유다서를 쓴 사람이다. 예수님의 친족들은 최소한 서기 324년까지는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오늘날 이 세상 어딘가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친척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예수 그리스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추적한다해도 정확하게 알아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누구인지 아실 것이다. 피의 보복자는 유대인이며, 예수님의 육신적 텻통의 후손일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때면 이 사실을 감히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용이 육화된 적그리스도는 "피의 보복자"로써 이스라엘을 추적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마련해 놓으신 도피처로 숨어야 한다. 우리는 이사야 26:20에서 이 말씀을 볼 수 있다.
{내 백성아, 오라, 네 방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그 "분노가 지나갈 때"까지 "잠깐 동안" 숨으라}.
이 말씀은 피의 보복자인 적그리스도가 유대 민족을 멸망시키려고 부단히 애쓰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24:15-22에서 말씀하신 바로 그 때에 일어날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데려 오실 때 그들은 홍해를 건넜으며,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고 성막을 지었다. 그들이 이집트를 떠난 후 1년이 채 못되어 카데스바네아에 도착했다. 거기서 그들은 카나안 땅을 정탐하였는데, 먼저 겁을 먹고 그 땅에 올라가서 땅을 소유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에서 40년간을 방황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들은 40년간 돌보시고 먹이셨다. 앞으로 다가올 환난 시대에서도 적그리스도의 보복을 피해 유대인들이 이 광야로 도망하게 될 때, 하나님은 이들을 동일한 방법으로 보호하시고 먹이실 것이다.
선지자 다니엘은 적그리스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또한 영광스러운 땅에 들어갈 것이요 많은 나라들이 전복될 것이라. 그러나 이들 곧 에돔과 모압, 그리고 암몬 자손의 우두머리는 그의 손에서 피하리라}(단11:41).
지금 에돔은 이스라엘이 40년간 방황하던 그 광야에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마련해 놓으신 도피처가 있는 곳이요, 오늘날 반석(Petra)이라고 알려져 있는 곳으로써 에돔 땅이다. 에돔은 솔로몬 왕때에 무역의 중심지였다. 서기 105년경 로마는 이곳을 정복해서 아라비아 페트라(Arabia Petra)라고 불렀다. 로마의 힘이 약해지자 페트라는 아랍의 손으로 넘어가서 1812년 버크하드(Burckhardt)에 의해 재발견될 때까지 문명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채로 남아 있었다.
페트라는 화산의 분화구처럼 산지들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12내지 14피트의 너비의 좁은 협곡으로 길이 나있기 때문에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빠져 나오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완전히 막혀있는 천혜의 요새이다. 좁은 길 양옆으로는 낮게는 200피트 높게는 1000피트가 넘는 기암 절벽이 2마일이나 뻗어 있다. 이 세상 어떤 도시도 이런 입구를 가진 곳은 없을 것이다. 협곡의 양 벽면에는 신전과 많은 대리석 무늬가 즐비하게 조각되어 있다. 일단 바위로 둘러싸인 그 도시에 들어가 보기만 한다면 우리는 웅장한 건물들과 비석, 신전들의 유물이 파편 조각처럼 많이 남아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절벽들과 수많은 기암괴석들은 매우 아름다우며, 특히 고도 300피트 정도에 있는 벌집 모양의 바위 조각에는 갖가지 색깔로 새겨진 조각들을 본다면 너무나 아름다워서 아무도 그 모습을 묘사할 수 없을 것이다.
일단 "피의 보복자"(적그리스도)가 나타나면 살인자(이스라엘)는 페트라로 알려져 있는 바위로 둘러싸인 이곳이 그들의 도피처가 될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여인(이스라엘)을 쫓던 용이 그의 입으로부터 홍수를 보내어 여인을 삼키려 하지만, 땅이 그 물을 마신다는 기사를 읽을 수 있다. 적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을 쫓기 위해 그의 군사들을 보내겠지만 그들은 사막의 모래바람에 모두 삼켜지고 말 것이다. 이스라엘은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가 아니라 "대제사장이 하늘로부터 돌아오실 때까지" 도피처에서 안전하게 거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과 제사장으로써" 하늘의 군대를 보내어 그녀(이스라엘)를 도피성읍으로 부터 데려올 것이다.
3. 마지막 3년 반
"해로 옷입은 여인"이 광야로 도망가고 나면, 분노로 가득찬 용은 적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계획을 수행할 것이다. 용은 "그녀의 남은 자"들을 죽일 것이다. 용은 짐승(적그리스도)에게 자기의 능력과 자리와 큰 권세를 준다(계13:2). 적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악한자로 존재한다. 그는 처음에 "화평의 언약"을 맺은 후 환난 중간에 그 언약을 파기할 것이다. 사탄이 육화되어 그 짐승 안에 거하기 때문에 그의 통치방법은 매우 잔악해지고 끔찍할 것이다. 계시록 13장에 적그리스도가 다스릴 통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요한은 두 짐승을 보았다고 말한다. 첫 번째 짐승은 바다에서 나왔다. 이 짐승은 용이 육화된 적그리스도를 예표한다. 두 번째 짐승은 땅에서 나오는데 "거짓 선지자"로 불린다.
이 부분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자 하시는 분은 "적그리스도와 사탄의 삼위일체"란 장을 읽어 보라. 환난의 중반기를 넘어서면 "지옥의 표"나 "짐승의 표"를 오른 손이나 이마에 받지 않고는 물건을 사거나 팔 수도 없다.
이 때 "세 천사"가 보내질 것이다. 첫 번째 천사는 "복음"을 전파하는 천사이다. 천사가 복음을 전하도록 위임받는 것은 여기에서 처음 나온다. 그러나 이 복음은 "하나님의 복음"(행20:24)이 아니며, "왕국 복음"(마24:14)도 아니다. 천사가 전하는 복음은 "영원한 복음"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복음"이다. 이 복음은 구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같은 환난의 시험을 겪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임에 틀림없다. 악을 행한 모든 사람들에게 임할 "심판의 때"를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천사는 "바빌론의 멸망"을 전파한다. 이것은 곧 성취될 일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바빌론은 하나님의 분노가 완전히 쏟아 부어진 후에야 멸망당할 것이다.
세 번째 천사는 짐승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한 자들이 받게될 무서운 형벌에 대해 선포한다. 그들이 짐승에게 경배했다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이며, 불과 유황으로 영원무궁토록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이 때 하늘에서는 추수할 준비를 할 것이다. 그들은 땅에서 포도송이를 거둘 것이다. 이것은 교회를 수확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이미 70주가 시작되기 전에 들림 받았다. 여기서 수확은 이방 민족들을 거둬들이는 것이다. 수확은 진노를 쏟아 붓는 것으로 시작해서 아마겟돈의 전쟁으로 끝날 것이다.
첫 번째 호리병(계16:1,2)
첫째 호리병은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그의 형상에 경배한 자들 위에 "악취가 나는 심한 헌데"가 생기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세가 이집트 땅에서 여섯 번째 행한 "역병"의 재앙과 비슷하다(출9:8-12). 그때 역사적으로 발생한 문자 그대로의 사건이었다면 미래에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호리병의 문자적인 해석 방법은 모든 계시록을 문자적으로 푸는 열쇠이다.
두 번째 호리병(16:3)
둘째 호리병을 바다(지중해)에 쏟으니 바닷가 죽은 자의 피같이 되어 모든 살아 있는 혼들이 바다에서 죽더라. 이와 유사한 사건은 계시록 8:8,9절에 있지만 이 사건이 훨씬 더 광범위하다.
세 번째 호리병(계16:4-7)
셋째 호리병이 강들과 물의 원천들에 쏟아 졌을때 물은 "피"로 변했다. 이 사건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첫 번째 이적의 재현이다(출7:19-24). "피"를 제외하고는 어떤 다른 것도 순교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없는 것이다.
네 번째 호리병(16:10,11)
넷째 호리병은 해에게 떨어지는데, 해가 강한 열기로 사람들을 태운다. 이 재앙만이 유일하게 이집트에서 행해지지 않았던 재앙이다. 이 재앙도 다른 재앙들과 마찬가지로 문자적인 것이다. 선지자 말라키는 이미 여기에 대해서 언급했다(말4:1). 이 재앙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다.
다섯 번째 호리병(계16:10,11)
다섯번째 호리병은 짐승의 자리에 쏟는다. 이로 인해 짐승의 왕국은 흑암에 싸이며 그들이 고통으로 인하여 자기 혀를 깨물고 자신들의 고통과 헌데로 인하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모독하기 시작한다. 이 재앙도 이집트에서 행해진 아홉번째 재앙의 재현이다(출10:21-23). 이 역병은 해의 열기로 그들이 감당할 수없을 만큼 고통을 받고 난 뒤에 일어난 재앙이라는 점에 유의하라. 하나님은 태양을 숨겨 버리신 것이다. 이 역병 또한 다른 역병들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재앙들은 이제 약간씩 중첩되기 시작한다.
여섯 번째 호리병(계16:12)
여섯 번째 호리병이 큰 강 유프라테스에 떨어지니 강물이 말라버려서 동방의 왕들(인도, 중국, 일본)의 길이 예비되었다. 이들은 군대를 이끌고 이 강을 건너서 아마겟돈으로 모여들 것이다. 이것 역시 홍해와 요단 강이 열린 이적의 재현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했다.
{주께서 이집트 바다(홍해)의 방언을 완전히 멸하실 것이요, 그의 손을 (유프라테스)강 위에 흔드시어 그의 막강한 바람을 일으키시고 그것을 쳐 일곱 갈래로 나뉘게 하시리니, 사람들이 신을 적시지 않고 건너가리라. 남게 될 그의 백성의 남은 자들을 위해 시리아로부터 대로가 있게 하시리니, 이스라엘이 이집트 땅에서 나왔던 그 날에 이스라엘에 있었던 것과 같게 하시리라}(이사야 11:15,16).
물론 이 나라들은 개구리 같은 불결한 세 영의 영향을 받아서이다. 이 영들은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입으로부터 나온다(계16:3-6). 그들은 "마귀들의 영"이요, "미혹하는 영들"이다(딤전4:1). 아합 왕을 속여서 그를 죽게 만들었던 바로 그런 "거짓 영"이다(왕상22:20-38).
일곱 번째 호리병(계16:17-21)
일곱 번째 호리병이 쏟아졌을 때, 하늘의 성전에서 큰 음성이 보좌로부터 나와 말하기를 "다 이루었다"고 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하고 말씀하신 그분이 이제 다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때 땅에는 큰 지진이 일어나서 큰 도성이 세부분으로 갈라졌다. 큰 도성을 이루는 여러 도시들도 다 갈라진다. "큰 바빌론"이 무너질 것이라는 예언은 계시록 18장에 있다. 땅에 큰 지진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은 스카랴에 의해 예언되어 있다(꽺14:4,5).
"하늘에서 무게가 무려 100파운드(45kg)나 되는 거대한 우박이 떨어진다." 이 우박 재앙도 이집트에서 행해진 일곱번째 재앙의 재현이다(출9:13-35). 우박은 하나님의 전쟁에서 쓰이는 도구중의 하나이다. 주님은 여호수아 때에 벧호른에서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무찌를 때 우박을 사용하셨다(수10:11). 율법에 따르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는 돌로 쳐서 죽이도록 되어 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하늘로부터의 돌을 보내셔서 그들을 죽이신다.
계시록에서 호리병의 재앙과 환난이 끝나는 아마겟돈 전쟁 사이에
"신비라 큰 바빌론이라"
불리는 바빌론 도성의 파멸이 나온다.
성경에서 큰 바빌론이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것은 바빌론이 지금까지 없었다가 나타났기 때문이 아니라 옛부터 존재해 왔던 바빌론이 여기서 완전히 파멸하기 때문이다.
아마겟돈 전쟁(계19:11-21)
"환난 기간"은 아마겟돈 전쟁으로 막을 내리게 될 것이다. 사탄의 삼위일체에서 나온 "마귀의 영들"에 의해 온 땅의 왕들이 거룩한 땅을 치기 위해 모이는 것을 볼 수 있다(계17:13). 전쟁터는 팔레스타인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므깃도의 꼴짜기"이며, 구약에서도 큰 전쟁을 많이 치룬 곳이다. 이 전쟁은 적그리스도의 "연합군"과 그리스도의 "천상의 군대"의 대결이다. 이 "시기" 는 "땅의 곡식이 무르익을 때"로써(계14:15), 적그리스도의 "연합군"이 예루살렘 도성을 빼앗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순간"이다.
스카랴는 말하기를
{보라, "주의 날"이 오나니(주의 날은 천년의 날이다). . . "내가 모든 민족들을 모아 예루살렘을 대적하여 싸우게 하리라. . . 그 때에 주께서 나가 그 민족들을 대적하여 싸우시리니, 전쟁의 날에 싸우셨을 때처럼 하시리라}"(스가랴14:1-3)
이 전쟁에 출전하는 광경은 계시록19:11-21절에서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 분께서 처음 왕으로써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 그분은 어린 수나귀 새끼를 타고 오셨다(마21:1-11). 하지만 이 때는 "흰 말"을 타고 오신다. 그분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머리 위에는 "많은 왕관들"이 있으며 "피에 젖은" 옷을 입을 입고 오실 것이다. 이 피는 예수님 자신의 피가 아니라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의 피이다,
이사야는 이 날에 관하여 예언하기를
{보스라에서 물들인 옷을 입고 에돔에서 오는 이가 누구인가? 그의 의복이 화려하고 그의 능력의 위엄으로 거니는 이가 누구인가? 의로 말하는 나니, 구원하기에 능력이 있도다.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틀을 밟는 자 같은가?. 나는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고 백성 중에 나와 함께한 자가 아무도 없었도다. 나의 분함으로 그들을 밟고 나의 진노함 속에서 그들을 짓밟으리니, 그러면 그들의 피가 내 옷에 튀어서 내가 내 의복을 모두 얼룩지게 할 것이라. 이는 복수의 날이 내 마음 속에 있고, 내 구속의 해가 오기 때문이라. 내가 보았으나 도와주는 자가 아무도 없었으니, 붙들어 주는 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겼도다. 그리하여 나 자신의 팔이 내게 구원을 가져왔고 내 분노가 나를 붙들었도다. 내가 나의 분함으로 백성들을 밟을 것이요, 나의 분노로 그들에게 마시게 하리라. 또 내가 그들의 기력을 땅으로 끌어내리겠노라}(사63:1-6).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신 십자가를 언급한 것이 아님을 다음 구절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는 "복수의 날"이 내 마음 속에 있고, 내 구속의 해가 오기 때문이라}(4).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은 "복수"로 가득차 있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시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라고 중보하셨다. 이사야 선지자가 "복수의 날"이라고 예언한 것은 "주님께서 자신의 택하신 백성 유대인"을 적그리스도로부터 구원하러 오실 때를 말하고 있다. 이 때가 바로 주님께서
"분노와 진노함으로
포도즙틀을 밟으실 때이다."
사도 요한은 "포도즙 틀"에 관한 환상을 이미 계시록14:14-20에서 보았다. 호리병의 재앙이 내리기 전에 이미 예언적인 견지로 19장에서 있을 사건들을 보았던 것이다. 사도 요한은 14장과 20장에서 이 "포도즙틀"을 보았다. 계시록14:18절-20절에서 "예리한 낫"을 가진 천사가 말하기를
{너의 예리한 낫을 대어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이는 그 포도들이 '다 익었음'이라."고 하더라. 그러므로 그 천사가 낫을 땅에 대어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어서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즙틀에 던져 넣으니라. 그 포도즙틀이 도성 밖에서 짓밟히니 그 틀에서 피(포도즙이 아님)가 흘러나와 말고삐까지 닿고 일천육백 스타디온까지 퍼지더라.}(18-20)
여기서부터 우리는 적그리스도의 "연합군"들이 팔레스타인 전역을 덮고 있음을 볼 수 있으며, 그때에 팔레스타인 전역의 골짜기와 분지안에 대살육이 있을 것이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팔레스타인 남쪽의 보스라는 1600펄롱(3200km)이 기병대들의 피로 가득 찰 것이다.
이 때를 가리켜 이사야는 "산들은 그들의 피로 녹아질 것이라"고 예언했다(사34:1-8).
살육이 너무나 엄청나서 주님께서는 미리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에 서 있는데 그가 큰 음성으로 외쳐 하늘 한가운데로 날아가는 모든 새들(말동가리, 수리, 독수리등등)에게 말하기를 "와서 위대하신
하나님의 잔치
에 모여 왕들의 살과 장군들의 살과 용사들의 살과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일반 군인들)의 살과 자유인이나 종이나 작은 자나 큰 자나 할 것 없이 모든 자의 살을 먹으라."고 하니라}(계19:17,18).
이 "잔치"는 구약에도 에언되어 있다.
{너 인자야,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너는 모든 깃달린 새와 들의 모든 짐승들에게 이르라. 모여 오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베푸는 나의 제물, 즉 이스라엘의 산들 위에서 베푸는 큰 제물 사면에 모여서 너희는 살을 먹고 피를 마실지어다. 너희가 용사의 고기를 먹고 땅의 왕들과 숫양과 어린 양의 피와 바산의 모든 살진 짐승인 숫양과 수송아지의 피를 마실지니라. 너희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베푼 내 제물에서 배가 부를 때까지 기름을 먹고, 취할 때까지 피를 마실지니라. 그리하여 너희는 "나의 식탁"에서 말들과 병거들과 함께 용사들과 모든 병사들로 배부를지니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겔39:1-22).
우리는 에스겔 39장에서 이스라엘이 "그 날에" 팔레스타인 땅을 점령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죽은 자들의 뼈들을 묻는데 몇 달이 걸릴 것이며, 하늘의 새들과 들의 짐승들이 죽은 자들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며, 숲에서 나무를 하지 않아도 몇 년간 뗄 수 있는 나무들과 병기들이 충분히 있다는 말씀을 읽을 수 있다.
계시록 19:21에는 "모든 새들이 그들의 살로 배를 채우더라" 라고 말씀한다. "초대받은 새들"은 죽은 시체들로 포식할 것이다.
이 때 비로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디든지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함께 모이리라."(마24:28)하신 말씀이 성취될 것이다. 독수리는 육식을 하는 대표적인 새이다. 히브리인들은 독수리를 약탈자와 같은 무자비한 새로 인식하고 있다.
최후의 전쟁에 모인 엄청나게 많은 군사들은 하늘의 군대를 이끌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칼에 의해 일거에 멸망당하고 말 것이다. "흰말을 타신 분"의 입에서 나오는 칼은 "구원"을 낳는 "성령의 칼"이 아니라 "파멸"을 낳는 칼이다. 여기서 "칼"이란 주님께서 적들을 파멸시키는데 사용하실 "초자연적인 전쟁 도구"를 나타낸다. 아마 그것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큰 우박"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벧호른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의 적들을 무찌를 때 우박을 사용하셨기 때문이다(수10:1-11).
"아마겟돈의 전쟁"의 결과는 너무나 자명하다.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새들과 독수리들이 배부르게 먹는다는 사실이 결과가 어떠한지 증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적그리스도의 군대가 완전히 파멸되기 전에 "거짓 선지자"는 산채로 불못에 던져 질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해 볼 때, 거짓 선지자는 어떤 제도가 아니라 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에녹과 엘리야가 죽지 않고 하늘에 올라 갔듯이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는 죽지 않고 "불못"에 던져진다. 이들은 사탄이 1000년 후에 그곳에 다시 던져질 때까지 거기서 살게 된다.
사탄은 적그리스도가 사로잡혀 불못에 던져지기 직전에 육화된 사람의 모습을 그만둘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사탄은 결박되어 "끝없이 깊은 구렁"에 1000년동안 갇힌다. 이것들이 환난 기간 동안에 있을 사건들의 개요이다.
NOTE - "다니엘의 70주와 환난"에 대해서 더 자세한 내용은 저자가 쓴 "요한 계시록"을 읽어 볼 것을 권한다.
24. 큰 바빌론
1. 바빌론 종교
"신비의" 큰 바빌론
계17:1-18
고대의 도시 바빌론이 회복되어 이 세대의 마지막 날들에 일어날 놀라운 사건들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계시록17장, 18장에 나오는 "신비의 바빌론"에 대한 말씀을 통해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얼핏 보기에 두장은(17장,18장) 같은 내용을 담고 있어서 조화를 꾀하기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말씀을 푸는 "열쇠"를 찾기만 하면 매우 쉽게 풀 수있다.
17장에서는 한 "여자"를 말하고 있고, 이 "여자"는
"신비라,"
큰 바빌론이라
땅의 창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고 불리운다.
18장에서는 도성을 말하고 있는데, 이 "도성"은 "문자적인 도성"으로써 "큰 바빌론"이라고 불린다. "여자"와 "도성"이 상징하는 것은 같지않다. 그 이유는 "여자"라고 불리는 곳에 도성이란 말을 넣으면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도성"이란 말 대신 "여자"란 말을 대입해보면 뜻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는 "열왕"에 의해 멸망되는 반면에, "도성"은 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큰 지진과 불에 의해서 멸망당한다. 그리고, 열왕은 18장에서 도성의 멸망을 보고 크게 슬퍼하며 운다. 또 다른 한가지 이유는 "여자"는 도성이 파멸당하는 시기보다 3년반이나 앞서고 있기 때문이다. 18장 1절은 "이 일들 후에"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도성에 일어났던 일은 여자의 파멸뒤에 있을 일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로써 "여자"와 "도성"은 각각 다른 것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있다. 여자의 이름은
"신비라 큰 바빌론이라."
"신비라!" 우리는 이미 앞에서 "신비"란 단어가 갖는 의미를 살펴 보았다. 바울은 교히를 일컬어 "신비"라고 했는데, 이는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족장들에게 이 사실이 계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에게 처음으로 "신부"에 대한 계시를 주신 것이다(엡5:23-32). 적그리스가 신부를 가질 것이란 사실은 사도요한에게 처음으로 계시되었기 때문에 신비이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신부를 가지는데. 이 신부가 바로 "큰 바빌론"이다. 어떤 사람은 "왜 신부의 이름에 도성"이란 말이 들어가는가? 하고 의아해한다. 성경을 읽어보면 이에 대한 해답은 쉽게 얻을 수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이리오라, 내가 너에게 신부인 '어린양의 아내'를 보여 주리라." 하고 "도성"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어린 양의 신부는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가는 "큰 도성 거룩한 예루살렘"이었던 것이다(계21:9-11). 도성을 신부라고 부르는 이유는 도성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성 안에 사는 사람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비라 큰 바빌론이라" 할 때 큰 바빌론은 글자 그대로의 어떤 도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빌론과 같은 제도"를 가진 배교한 종교집단을 말한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거듭난 사람들의 모임이라면 마찬가지로 "적그리스도의 신부"인 "큰바빌론"에는 모든 거짓 종교를 추종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모임인 것이다.
바빌론 도성이 세워진 유프라테스강은 에덴 동산으로부터 갈라진 네 개의 강의 지류들 중 하나였고 사탄은 의심할 여지없이 바빌론 지역을 아담과 이브를 유혹하기 시작할 본거지로 선택했을 것이다.
바로 여기가 노아 홍수 이전에 배교의 근원지로써 홍수를 촉발했던 무리들의 근원지였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홍수 후에 "마귀의 세력들"이 이곳 중심지로 집중했고 그 결과로 바벨탑을 건축했던 것이다. 이것이 민족들의 기원이었지만 사탄은 현재 세상이 알고 있는 모든 거짓 종교의 교리의 근원이 되왔던 거짓교리의 "바이러스"를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방에 흩으시기 이전에 이미 모두 감염시켜 놓았던 것이다. "바벨", 혹은 바빌론은 님롯에 의하여 건설되었다(창10:8-10). 이곳은 모든 배교의 제일원인을 제공해주는 곳이었다. 여기서 "바빌론 이단"이 조직되었고 고차원적인 지혜를 다루고 가장 신성한 비밀을 밝힌다고 주장하는 하나의 체제가 만들어졌다. 살인이 시작되기 전부터 사제에게 "고백"을 해야 했다. 그때의 사제는 사람들에게 막강한 세력을 과시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로마 캐톨릭 교회 사제들의 세력의 비밀인 것이다.
일단 이 조직안으로 들어가면 그 사람은 더 이상 바빌론인도, 앗시리아인도, 혹은 이집트인도 아니면 오직
신비적인 성직자단
의 일원이 되어 교황, 또는 "대사제"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고, 그들의 말이 법이되어 버린다. 바빌론 도성은 요한이 살았던 소아시의 퍼가모로 사탄의 본거지가 옮겨질때, 즉 바빌론과 메디아와 페르시아왕이 멸망 당할때까지 계속 사탄의 처소가 되어왔다(계2:12-13).
B.C133년 퍼가머의 왕이자 대사제인 아틀라우스가 죽을때 그는 "바빌론 사제회"의 지배권을 로마에 위임했다. 에투루리아인들이 리디아(퍼가머지역)로부터 로마로 왔을때, 그들은 바빌론의 종교와 의식들을 함께 가지고 왔다. 그들은 사제회의 우두머리인 교황을 세웠다. 그후 로마인들은 이 대사제를 그들 도시의 지도자로 받아들였다. B.C 74년에 줄리어스 시저는 에투루리라 종교의식의 대사제가 되었다. 이렇듯이 "바빌론 사제회"의 우두머리가 첫 로마황제가 되었고, 로마는 바빌론의 전승자가 되었다. A.D366년 대주교가 된 이후 12년간 계속 대주교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A.D378년에 바빌론 조직의 우두머리는 "로마 교회"의 통치자가 되었다. 이렇게 사탄은
로마와 바빌론을
하나의 종교체제 안으로
로 연합시켜던 것이다.
곧 다마수스(Damasus)는 "최고 대사제"가 되었고 바빌론의 "종교 의식"을 드러나게 하였다. 처녀 마리아에 대한 숭배는 A.D 381년에 마련되었다. 모든 로마 교회의 특별한 축제들은 바빌론이 그 기원이다. "이스터(Easter)"는 그리스도교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에 의해 숭배되어진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했던 바빌론의 하늘의 여왕의 이름 중에 하나인 "이스타르"(Ishtar)를 뜻한다. 이스터와 사순절의 준수에 대한 법령은 A.D 519년에 주어졌다. "묵주"(Rosary)의 기원은 이교도적이다. "십자가 상징"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 어디서도 근거를 찾아 볼수 없다. 십자가 상징에 대한 기원은 칼데아인들과 이집트인들의 신비의 "타우(Tau)"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탐무스"(Tammuz)의 첫 머릿글자인 "T"로부터 왔고 "바빌론의 신비 의식"에 사용되었고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현재 로마 교회도 그것을 사용하고 있다. 독신주의, 삭발, 그리고 사제와 수녀제도, 이 모두는 성경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수녀 제도는 이교 로마의 "베스타 처녀"의 모방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신비"라는 단어에서 보듯이 로마 교황의 교회는 자신을 신비속에 감취 왔던 것이다. "침례(세례)의 의한 중생"의 신비, 주의 만찬을 단순히 기념하는 대신에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몸과 피가 된다는 "화체"라는 신비스러운 단어에서 볼 수 있는 "기적과 마법"의 신비, "성수"의 신비, "제단위의 촛불"의 신비, 신비한 행사들, 그리고 다른 미신적인 장소나 행사에서 그 의미가 바빌론에서 유래된 신비스럽고 혼란스런 단어들의 중얼거림 등이 있다.
이 모든 것이 요한이 본 "신비"이다. "불법의 신비"가 이미 활동하고 있었으나(살후2:7), "로마 교황의 교회"는 아직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신비"가 아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로마 교황 교회"로 묘사했던 -"신비라, 큰 바빌이라."고 했던 그 "여자"가 누구인지 지금은 쉽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시록17:4절에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또 그 '여자'는 자주색과 주홍색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장식하고 손에는 '금잔'을 가졌는데 그 잔은 가증스런 것들과 그녀가 행한 음행의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찼더라."
지금은 자주색과 주홍색이 교황의 색이라는 것을 어느 누가 모른단 말인가? 교황이 직무에 들어갈때 입는 세세하게 규칙이 정해진 다른 목록의 다섯가지 의복은 모두 자주색이다. 진주들로 덮혀있는 의복과 금과 값진 보석들로 장식된 관을 착용한다. 자주색의 짐승 위에 앉은 여자의 옷에 대한 묘사가 얼마나 완벽한지 보라.
우리는 또한 그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순교자들의 피로 취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 언급은 적그리스도 시대의 순교자들에 대한 특별한 것이기는 하지만, 지난 19세기 동안 실제적인 로마 교회가 이러한 일을 자행해 왔다는 것을 교회사를 공부한 학생이라면 누가 모르겠는가?
로마 교황의 교회가 성도들의 피에 "취해 왔다"는 사실을 살펴보려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를 살펴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만, 로마 교회의 땅에서 자행된 종교재판이라는 특별한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더욱 잘 알게 될 것이다.
여자가 주홍빛 짐승위에 앉았다는 사실은 그 시대에 그 짐승(적그리스도)이 그의 교회 범위 내에서 그녀를 지원한다는 사실을 계시한다. 또 한편으로는 "교회 국가"(State Church)로서 그녀가 국가를 통치하고 다스리는 그녀의 오랜 꿈이였던 범세계적인 교회 지배를 실현하게 된다. 그 이유는 요한이 "네가 본 그 '창녀'가 앉아 있는 물은 백성들과 무리들과 민족들과 언어들"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참된 교회"(그리스도의 신부)가 세상으로부터 사라지고 난 후, 거짓 교회, 즉 로마 교황의 교회(적그리스도의 신부)가 남게 될 것이고, 뒤에 남은 말로만 그리스도인인(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 사람들)은 로마 교황의 교회에 대규모로 참여하게 될 것이며 이것은 전세계적인 교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교회는 짧은 기간동안만 유지될 것이다. 그 이유는 "로마 교황 조직"으로부터 빼았겼던 권력을 되찾은 "연합된 왕국"의 "열왕"이 "그 창녀를 증오하며" 그녀를 패망시키고 벌거벗기며 그녀의 부를 몰수하고(살을 먹고), 그 교회와 그의 권좌를 태울 것이기 때문이다(계17:16).
이러한 일들이 짐승에 대한 경배가 완성되는 시기에 일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질투와 증오 안에 있는 적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지 않는 어떠한 경배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위에 탄 그 짐승은 참교회가 "밝혀진" 후에 권력과 지지를 얻게 된 그 여자(로마 교황 교회)로부터 소개된다. 또한 그 짐승(적그리스도)과 그 여자(로마 교황의 교회)는 하나가 아니라 분리되어 있다. 그러므로 교황권은 적그리스도가 아니다. "주홍빛의 짐승"에 대한 설명은 적그리스도에 관한 장을 살펴보기 바란다.
이러한 교황권에 대한 미래의 고찰로부터 우리는 로마 교황의 교회는 죽어가는 "조직"이 아님을 볼수 있다. 그녀는 되살아나고 "전세계적인 교회"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그녀는 지구상의 왕들과 음행하게 될 것이고 또 다시 환난 시대의 순교자들의 "피에 취하게" 될 것이다. 계시록17장의 의미는 더 이상 신비가 아니다. 그 여자에 대한 묘사는 로마 교황의 교회의 역사와 너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간단히 말해 같다고 할 수 있겠다.
2. 상업의 도시 바빌론
계18:1-24
이장은 "이 일들 후에"라는 단어로 시작된다. 무슨 일인가? 그 일은 앞장에 기록된 "신비의 바빌론"의 패망이다.
"신비의 바빌론"이 앞 장에서 파괴되었다면 그녀는 이 장에서 나타날 수 없다. 그리고 여기서 묘사된 "도성"은 바빌론이라고 불리는 문자적인 도시임이 틀림없고, 오늘날 지구상에 이러한 이름을 가진 도시가 없으며, 고대 도시인 바빌론은 이렇게 파괴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미래의 바빌론 도시임이 분명하다. 이 두장이 다른 것을 설명하고 있음을 각기 다른 천사들이 언급하고 있는 사실로 더욱 분명해진다. 17장은 "호리병" 천사에 의해 언급된다. 그에 반하여 18장은 "다른" 천사에 의해 언급된다. 아마도 "두번째 메시지를 전하는 천사"는 14장8절에서 "큰 도성" 바빌론의 멸망을 예언했던 천사였을 것이다.
님롯의 시대로부터(창10:10) 고대의 바빌론 도시는 B.C604-562년 느브캇네살의 통치의 위대한 영광에 이르기 까지 규모와 중요성에 있어서 계속 성장했다. 헤로투스가 묘사한 것처럼 그 도시는 한 변의 길이가 15마일인 사각형 형태였거나 원의 둘레가 60마일이었으며 두께가 87피트치고 높이가 350피트인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것은 잘못 측정한 것이겠지만 높이가 100피트에 육박했던 것이다. 벽 위에는 250개의 탑이 있었고 탑 위에는 6대의 전차가 나란히 달릴 만큼 넓었다. 이 담 바깥 쪽으로는 유프라테스강으로부터 유입된 물로 이루어진 수로가 벽을 두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담 안쪽으로는 바깥 담보다 그렇게 허술하지 않은 좁은 담이 도시까지 뻗어있었다. 폭이 150피트인 25개의 거대한 가로수 길이 북쪽으로부터 남쪽까지 도시를 가로질러 뻗어있었고 다리가 이 도시의 안쪽으로 흐르는 유프라테스강에 걸쳐 있었으며 이 다리의 각 끝에는 궁전이 있었다. 가장 큰 통로의 각 끝에는 도시의 사방으로 이어지는 문들이 있다. 이 문들은 태양이 뜨면 열리고, 태양이 지면 닫히었다.
성안으로 흐르는 유프라테스 강물위로는 다리들을 놓았고, 물밑으로 통로를 만들어 그곳을 통과하면 황동으로 만들어진 연회장이 나온다. 이 궁전 큰처에
"벨의 탑"
또는 바벨이라고 불리는 건축물이 있었다. "벨의 탑"은 8개의 성루로 되었있으며 각각의 높이가 75피트이다. 그중에 가장 높은 탑과 나머지 탑과는 서로 왕래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놓았고, 외부에는 나선형 계단을 만들어서 올라갈 수있게 했다. 가장 꼭대기에 있는 방은 바닥에서 높이가 660피트였다. 이 방안에는 세상에서 사용되는 가장 값비싼 가구들이 즐비했다. 45피트 크기의 금 신상하나만해도 그 가격은 무려 17,500,000 $ 이며 다른 장식물들까지 합한다면 200,000,000 $는 족히 넘을 것이다. 바빌론은 또한 "세계 7대 불가사의"들 중에 하나인, "공중 정원"이 있는 곳이다.
이 정원은 4만 평방미터이며, 가장 높은 테라스는 350피트의 공중에 너비 10피트의 길이 나 있다. 테라스마다 대리석으로 덮여서 마치 침대석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물이 새지 않을 만큼 정교하게 연결시켜 놓았다. 하지만 전체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 돌위에 흙을 덮어 놓고 나무와 관목을 가꾸어 놓았다. 그래서, 언뜻 보면 유프라테스 강과 외관이 잘 어울린 술이 우거진 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모습은 유프라테스의 낮은 평원에서 보면 정말 볼만한 광경이었다. 이 정원은 느브캇네살이 메디아의 산이 많은 지역에서 온 그의 아내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만들었으며 이 정원에 그녀는 매우 흡족해 했다고 한다. 이 도시의 나머지 부분들도 매우 정교하여 아름답게 지 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이곳의 거주민들과 관료자들의 생활의 특징은 "벨사살의 잔치"의 묘사에서 잘 나타나 있다(단5:1-31). 바빌론은 아마도 여지껏 보아왔던 세상의 도시 중에서 가장 웅장하였으며, 위엄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직접 나타나 심판의 메시지를 벽에 기록했던 것이다. 또한 바벨론은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의 역사와 너무나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은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이곳에 관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다니엘과 예레미야의 예언과 많은 부분이 이곳과 관련되어 있으며, 구약에서는 11번, 신약에서는 4번 언급하고 있다. 다니엘의 예언을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는 계시록에서 다시 한번 "바벨론"이란 도시가 나오는 것을 통해 우리는 이 도시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계시록에서는 바벨론이 "마지막 때"에 이 세상에서 일어날 사건과 연관된 도시임을 말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바베론은 결국 파멸을 맞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해 준다.
고대 바빌론 도시는 이미 파괴되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우리가 "바벨론"이 다시 재건되었다가 파괴된다고 주장할 때 다음과 같은 두가지 반론에 부딪힌다.
1. 이곳의 파멸을 언급한 구약의 모든 예언들은 이미 문자적으로 성취되었으며 이곳은 다시 재건 될 수 없다.
2. 지금 존재하는 계시록에 언급하는 바빌론 도시는 없으므로 바벨론이 파멸되기 위해서는 바벨론이 문자적인 도시가 아닌 상징적인 도시이어야 한다.
우선 첫 번째 반론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바빌론의 모습과 그곳의 파괴에 관해서는 이사야서 13,14장과 예레미야서 50,51장에 나와있다. 이 두 예언에서 우리는 바빌론 도시에 관해서 아직 많은 부분이 성취되지 않았음을 발견 할 수 있다.
바빌론은 B.C.541년 코레스에 의해 함락당했다 하지만 코레스가 태어나기 125전에 이미 "코레스"란 이름이 예언되어 있다(사44:28-45). B.C.712년 너무나 조용하고도 감쪽같이 군사들이 그 도시를 침입했다. 바빌론 경비병은 그날 문을 잠그는 것을 잊고 있었던지, 강물을 따라 벨사살왕이 연회하는 그곳으로 군사들이 들어와 그를 죽였던 것이다. 하지만 3일이 지나도록 바벨론에 살는 거주민들은 왕이 살해된 것이나, 자신들의 도시가 빼앗긴 사실조차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 때, 왕은 죽었지만 바벨론이란 도시는 조금도 파괴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몇 년이 지난 후에 다리우스 히스테스피스(Darius Hystaspis)에게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이 있었지만 20개월이나 투쟁한 끝에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고 모두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때가 B.C.516년이었다. B.C. 478년경 크세르크세스(Xerxes)가 그리스를 침공하고 돌아오던 길에 "벨의 탑"을 완전히 파괴하지 않았다해도 약탈하고 훼손시켰을 것이다.
B.C. 331년경 알렉산더 대왕이 거기에 도착했을 때, 알렉산더는 바벨론의 장엄함에 놀라 군사들에게 즉각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반격을 예상했으나 바벨론 거민들은 성문을 활짝 열고 대왕을 맞이하였다. 알렉산더는 "벨"(고대 바빌론과 앗시리아의 땅의 신)에게 제물을 바친 후에 이 신의 거대한 신전을 재건하기 위하여 몰두 했으며, 매주 약 10,000명의 남자들을 동원해서 기초석에 남아 있는 파편들을 제거하였다. 그의 계획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곳을 그의 수도로 정하여 바빌론의 영광을 부활시키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그의 나이 33세에 습지의 열병과 과로로 갑작스런 죽음으로 좌절되었다. 그의 장군들에 의해 이어지는 많은 전쟁으로 바빌론은 많은 고초를 겪었으며 마침내는 세렉쿠스의 권세하에 들어갔다. 자신을 위하여 수도를 세울 야심에 고무되었던 그는 약 B.C. 293년에 바빌론에 근접한 세레우시아(Seleucia)를 발견했다. 이 부활한 도시는 바빌론 거주민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켰다. A.D 25년에 죽은 스트라보(Strabo)는 이 도시를 전의 바벨론과 비교했을 때 "불모의 땅"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포로에서 풀려난후에도 엄청나게 많은 수가 그곳에 남아서 살고 있었다. A.D.60년에 베드로가 보낸 서신에서(벧전5:13) "바빌론의 교회에서" 마르코아 사역하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있다.
데오도르(Theodort)는 5세기 중엽에는 바빌론에 유대인만이 살고 있었다고 말한다. 거기에 유대인들이 대학을 세워서 "바벨론 탈무드"를 만들었는데 아직도 내려 오고 있다. 이 사실은 전세계의 유대인들에 의해 권위 있는 경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서기 917년에 헨켈(Ibu Hankel)은 바빌론은 매우 중요한 도시로 언급하며 아직도 여전히 존재하는 도시라고 했다. 1100년경 바빌론은 "두개의 모슬렘 사원" 때문에 약간 중요한 도시로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얼마후 이 도시는 "힐라"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어서 요새화되기 시작했다. 서기 1898년에 "힐라"는 약 10,000명의 시민이 살게 되었고, 비옥한 토양과 유프라테스 강둑을 따라 심은 유실수로인해 점점 부유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사실은 이사야 13:20에 나오는 예언과는 확실히 어긋난다. "그곳에 사람이 살지 못할 것이며 대대로 거하지도 못하리니, 이는 아라비아인도 거기에 장막을 치지 않을 것이며 목자들도 거기에 양우리를 만들지 아니하리라."(사13:20). "그녀의 성읍들은 폐허이고 마른 땅과 광야이며, 땅에는 사람이 살지 않고 거기로 지나는 사람의 아들은 아무도 없도다."(렘51:43). "그리하면 사람들이 네게서 모퉁이 돌이나 기초를 놓을 돌을 취하지 아니할 것이며 너는 영원히 황페하게 되리라 주가 말하노라."(렘51:26) 이 예언들도 맞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사야는 그의 예언이 성취되어질 "때"에 관하여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는 이때를 "주의 날"이라고 불렀다(사13:9). 이 날은 천년기간이다. 그리고 그는 이 날의 위치를 천년의 시작에, 천년으로 들어가는 사건의 위치에 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하늘의 별들과 그 별무리들이 그들의 빛을 내지 않을 것이요, 해가 솟아나와도 어두워지겠고, 달은 그 빛을 비추지 아니하리라} 사13:10. (눅21:25-27).
분명히 사이러스(Cyrus)에 의해 바빌론이 점령 당했을 때 이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계시록 18장의 바발론 도성의 멸명에 대한 묘사에서 우리는 그녀의 심판이 한 순간에 일어날 일임을 알 수 있으며(10절), 순식간에 그녀는 황폐하게 될 것이다(19절). 그녀의 갑작스러운 완전한 멸망에 관한 비유로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바다에 던지면 "큰 도성 바빌론이 이처럼 세차게 던져져서 결코 다시는 보이지 아니하리라."(계18:21)라고 말한다.
우리는 또한 같은 장에서 그녀는 불에 의해 멸망당한다는 것을 들을 수 있다(계18:8,9,18). 이것은 이사야서13:19의 말씀과 정확히 일치한다.
{주가 말하노라.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성읍들을 멸망시킨 것같이 그곳에는 아무도 거하지 아니할 것이요 어떤 사람의 아들도 그곳에 거하지 아니하리라.}
선지자 예레미야도 같은 동일한 언급을 했다(렘.50:4).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오랜 기간이 걸리지 않았으며, 그들의 멸망은 몇 시간 만에 사라져 버렸다(창19:24-28).
계시록16:17-19에서 바벨론은 지진과 천둥과 끔직한 번개로 멸망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는 처음에 불에 의해 멸망되었으며, 그 후에 지진에의해 땅으로 삼켜졌다. 마찬가지로, 미래의 바빌론은 고대 바빌론이 서서히 멸망했던 것 같지 않을 것이다. 미래의 바빌론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되기 전까지는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예언은 여전히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처음에는 불이 떨어졌고, 지진에 의해 삼켜진 것처럼 재건된 바빌론도 불이 떨어지며, 고대 바빌론 아래에 역청(아스팔트)가 있는데, 지진은 땅의 지각을 갈라 불타는 도시를 "불못"으로 떨어지도록 촉진시킬것이가. 이 도시는 "맷돌"이(계.18:21) 바다에 던져지는 것처럼 지각 밑으로 가라 앉을 것이며, 이로써 그곳의 돌들을 사용하여 다시 재건하는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이 지역은 사람들이 거주할 수 없는 광야가 될 것이란 예언은 이 때 정확하게 성취되는 것이다.
우리는 고대 바빌론 도시를 재건될 가능성으로 보이는 일이 역사 가운에 여러번 있었음을 볼 수있다. 프랑스 전쟁 중 파리에서 나폴레옹 1세의 명령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아주 귀중한 조사서들과 지도들이 발견되었다. 이것들은 모두 바빌론과 바빌론의 새도시에 관한 것으로써, 나폴레옹의 웅대했던 야심을 보여 준다. 나폴레옹은 고대 바빌론을 재건하여 수도를 이곳으로 정하여 전 유럽과 아시아를 정복하고 마지막에는 행정과 상업의 중심지로써 고대 바빌론을 전략상 가장 중요한 위치로 설정한 것이었다.
사실 메소포타미아 전 지역과 바빌론과 앗시리아가 다시 세상에서 가장 비옥한 땅이 되기 위해서는 관개 수로 시설을 필요로했다. 그래서, 계단식 수로 시설을 만들었던 것이다..
1950년 영국 정부는 15,000달러의 비용을 들여 군인들을 유프라테스강을 조사하고 탐험하도록 명령했으며, 유럽 전쟁이 일어나자 이집트의 아소암 땜을 건설했던 뛰어난 영국 기술자들을 관개 수로 시설을 만들기 위해 유프라테스 골짜기를 조사하도록 고용했는데, 이것은 한 때 엄청난 곡물 생산 지였던 이 지역을 다시 복구 시키기 위해서였다. 이 결과로 마을과 도시들이 세워졌고 철길이 건설되었다. 세계의 일부에서 요구하는 것은 유럽과 아시아, 인도를 연결하는 항공노선인데 이것은 유럽과 인도와 중국을 연결해 줄 것이다. 이러한 항공노선은 독일의 제상 윌리엄(William)의 꿈이 었었다. 이러한 꿈 때문에 그는 터키의 압둘 하미드(Abdul Hamid)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압둘 하미드로 하여금 아시아의 보스포러스에서 알렙포를 경유하여 티그리스 강에 도달하는 철로를 놓도록 했으며, 거기에서 다시 바그다드까지, 바그다드에서 바빌론을 경유하여 페르시아의 쿠웨이트까지 철로를 세우도록 정치적 이권을 주었다.
바빌론을 중심으로 이런 도시만 재건된다면, 역사에서 가장 큰 제국을 다시 건설할 수있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몇몇 사람은 이런 질문을 할 것이다.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주님이 "어느 때"라도 올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오시기 전에 반드시 바벨론이 재건되어야 한다면 바벨론이 재건될 때까지 주님은 오시지 못할 것 아닙니까? 성경에는 바빌론이 재건되기까지 에수님이 오셔서 그분의 교회를 데리고 가시기 위해 오실 수 없다는 말씀이 없다. 아마도 이런 일이 있기 전 25년, 심지어 50년 전에 그의 교회를 취하여 데려 가실 것이다.
큰 바빌론은 세상에서 일찍이 볼수 없었던 모든 면에서 가장 위대한 거대 도시가 될 것이다. 이 날에는 런던, 파리, 베를린, 뉴욕, 시카고 등의 대표적인 도시가 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상없의 도시가 될 것이며, 이 곳의 상품은 금, 은, 값진 보석과 진주, 세마포, 자주색 옷감, 비단, 주홍색의 값진 옷감이 될 것이다. 이 유행의 사회는 가장 비싼 의류와 가장 값진 진주들로 장식할 것이며, 그들의 집에는 값비싼 직물과 양탄자와 융단과 함께 고급 목재와 동, 철, 대리석의 비싼 가구들로 가득할 것이다. 이들은 가장 값비싼 향료와 계피, 향기로운 향수, 연고, 유향을 사용할 것이며 그들의 연회는 가장 달콤한 포도주와 고급 케익과 아주 맛있는 음식으로 채워 질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노에를 소유하고 있는데, 그들의 "사람의 혼들"을 매매 할 것이다. 즉, 여자들은 그들의 몸들, 남자들은 자신들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들의 혼을 팔 것이다.
시장에는 소와 양과 말들이 떼를 지어 있을 것이며, 부두에는 모든 나라에서 온 상품들이 쌓여 있을 것이다. 공장에서는 값비싼 직물을 생산해내고 천재들은 인간의 편리함과 안락함을 위해 발명한 여러 가지 상품들이 시장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도시는 즐거움과 사업에 몰두 할 것이다, 사업가들과 그 설립자들은 돈을 약삭빠르게 빨리 버는 방법을 찾기 위해 밤과 낮을 보낼 것이다.
그곳에는 떠들썩한 기쁨과 끊임없는 연회가 있을 것이다. 노아와 롯의 날처럼 그들은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며, 집짓고, 심을 것이다. 피가 그들의 혈관으로 뜨겁게 돌 것이다. 돈은 그들의 신이 될 것이며, 괘락은 그들의 제사장, 절제하지 못하는 욕정은 그들의 예배의식이 될 것이다.
그곳은 음악의 도시가 될 것이며, 흥겨운 음악소리가 어느 거리에서나 울려 퍼질 것이며, 극장은 늘 사람들로 붐빌 것이다. 그곳에는 "하프 타는 자와 음악하는 자와 피리 부는 자와 나팔 부는 자들의 소리가 들릴 것이다(계18:22).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가수들과 연주자들이 그곳에 있을 것이며, 사실 그곳에는 도시의 전기 조명으로 밤을 낮과 같은 밝기로 그림자를 없게 만들어 밤이 없을 것이다. 그곳의 점포와 상업지역은 밤이건 낮이건 일요일이건 결코 닫지 않을 것인데 괘락에 열광적으로 사로잡히고 부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장사의 수레바퀴를 쉼없이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손쉽게 일어날 것인데, "이 세상의 신"인 사탄 때문이다. 그는 마음과 인간의 몸을 사로잡을 것인데, 왜냐면 2절에서 우리는 바빌론은 이 때에 "마귀들의 거처가 되었고 온갖 더러운 영의 소굴이요, 모든 더럽고 가증한 새의 소굴"이 될 것이다. 이 도시에서 가장 이목을 끄는 것은 "신비주의"(Occultism),와 영매(Mediums), 그리고 그 사람들은 세상과 교제하를 갈망할 것이다. 이들은 현재 남녀들이 패션과 감각적인 즐거움을 위해 파리로 가듯이 이들은 바빌론으로 갈 것이다. 이때, 마귀들, 몸이 없는 혼들, 더러운 영들은 바빌론에서 인간의 몸에 들어가 그들의 거처로 삼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귀에 들려서 사탄에 이해 통제받게 될 것이다. 대기권 밖에 있는 하늘에서, 심연의 밑으로부터 셀수 없는 군대들이 바빌론이 완전히 멸망하기 전에 그들의 영광을 자랑하며 사탄이 육화된 적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며 살 것이다.
그러나 그곳이 멸망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신의 백성을 자비로우심으로 구출하실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하늘에서 음성이 외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백성들아, 그녀에게서 나오라. 그리하여 그녀의 죄들에 동참자가 되지 말고 그녀의 재앙들도 받지 말라}(4절).
소돔과 고모라는 의로운 롯이 피하기 전까지는 멸망되지 않았던 것처럼 바빌론도 그와 같이 의로운 사람들이 도망하기 전까지는 멸망되지 않을 것이다.
이 도시의 멸망은 경고없이 갑자기 일아날 것이다무서운 폭풍이 이 도시를 횝쓸어 버릴 것이며, 번개와 천둥은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다. 이 도시 위에 불과 엄청난 지진이 중심부에서 그 주변까지 요동칠 것이다. 높은 사무실 건물, "공중 정원", 그리고 엄청난 탑들은 비틀거리며 넘어질 것이며, 땅의 겉 표면은 갈라지고 열려 전체 도시가 그곳의 거주민들과 함께 "맷돌"(21절)처럼 역청으로 불타는 못으로 가라앉을 것이며, 그 연기는 불타오르는 용광로처럼 올라갈 것이며, 이 공포의 장면은 유프라테스강의 물이 역청 불못에 부어져 발생한 엄청난 증기 구름에 의해 한층 더하여 질 것이며, 이러한 증기 구름이 밤에 올라왔을 때는 도시의 타는 빛이 반사되어 낮은 지역에 있는 모든 방향에서 상당히 먼 거리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왕들과 상인들과 선장과 선원들은 그녀와 장사해서 수익을 올렸던 모든 사람들은 그녀의 파멸로 인하여 멀리서서 울며 통곡할 것이다. 하지만 하늘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녀의 행위에 대하여 배로 그녀에게 갚아주신 것에 대해 기뻐할 것이며, 바빌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25. 땅이 불타버럼 (Renovation of earth)
요한은 사탄과 그의 군대의 멸망이 있은 후, 즉시 땅이 불타버릴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또 내가 "큰 백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니, 그의 면전에서 땅과 하늘(지구의 대기)이 사라졌고 그들의 설 자리도 보이지 않더라}(계20:11).
요한은 "백보좌"심판을 설명하고 거기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인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이상 있지 아니하더라}(계21:1).
우리는 이처럼 땅이 사라지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한은 우리에게 땅이 어떻게 사라져 버리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이것은 사도 베드로를 통해 알수 있다.
{그러나 현재 있는 하늘들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보존되어 있으되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백보좌 심판석)에 불사르려고 간수되어진 것이니라...그러나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들이 굉장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우주의 구성 요소들이 맹렬한 불로 녹아내리며 땅과 그 안에 있는 일들이 타버릴 것이라}.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이사야65:17; 66:22) 의가 거하는 새 하늘들과 새 땅을 기다리도다}(벧후3:7-13).
베드로와 요한은 분명히 같은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그 이유는 "경건치 아니한 자의 심판과 멸망의 날"은 바로 죽은 악한자가 심판 받는 "백보좌 심판석"에 앞에 서는 날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다 보면 별들이 있는 하늘들과 행성 지구가 불에 멸망당하고 완전히 없어져 버리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성경을 유심히 공부해보면 그렇지 않음을 볼수 있다. 불로써 "불타버리는 것(Renovation)"은 눈에 보이는 땅이며, 이곳을 둘러싸고 있는 대기이다. 불로써 땅 외부의 표면이 완전히 바뀌어지며, 죄로 인해 발생한 모든 것들, 즉 엉거퀴, 병균, 벌레, 독충등 이 완전히 사라져 버릴것이다. 그리고 악한 영들과 해를 끼치는 모든 영향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롭게 되며, 환경은 정결케 될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후서5:6로부터 분명히 증명된다.
{이는 그들이 이것을 고의로 잊으려 함이라.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하늘들이 옛적부터 있었다는 것과, 땅도 물에서 나왔고 물 안에 있었다는 것이니 이로써 이전에 있던 세상은 물이 범람해서 멸망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여기서 언급한 세상은 "홍수"에 의해 바뀐 "노아홍수 이전의 세상"이 아니다. 즉 여기서의 "이전에 있던 세상"은 창세기1:1절의 세상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며, 홍수에 의해 완전히 잠겨 혼돈하고 공허하게 되었던 세상이다(창1:2). "올바로 말씀을 나누어"장을 참조.
사도 베드로는 땅의 역사를 크게 3시대로 나누고 있다. "형체가 없고 공허해지기 이전의 땅", 즉 "이전에 있던 세상"이라고 하는 "태초의 땅", 그리고 땅이 불타버린 이후 창세기1:3-2:1절에서 회복된 이후 지금까지 큰 변화없이 보존된 "현재 있는" "하늘들과 땅", 그리고 아직은 미래의 "새 하늘들과 새 땅"이 있다(벧후3:5-7,13).
"태초의 땅"의 기본 구성은 "물에 잠김으로써" 소멸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현재의 땅"의 기본 구성도 "불침례"에 의해서 소멸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가 쓴 그리스 단어인 "우주"(Cosmos)라는 단어는 "땅의 표면", 즉 "땅의 거주하는 곳"이지, 지구 행성 전체가 아니다. 땅의 겉 표면이 "맹렬한 불로 녹아 내리며", "일들이 타버릴 것이다". 맹렬한 불의 원인은 대기 가스의 폭발일 것이며, 사도는 이것을 "하늘들(대기)이 굉장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기록하고 있다. 이 결과 모든 동물들과 식물들은 멸망될 것이며 지구의 표면은 바뀌어질 것이다.
그리스 단어인 "Parerchomai"를 "사라지고"(Pass away)라고 번역되었지만, 이 단어는 "존재물의 종료"나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단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꾸어 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디도서3:5절의 "중생"(Regeneration)이란 단어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19:28에서 말씀하신 단어인 "새세대"(Rgeneration)란 단어와 동일한데, 예수님께서는 "새세대"에 그의 제자들에게 "새세대", 즉 "새 땅"에서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를 심판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또 현재 사람의 "중생"의 목적은 그의 존재의 전멸(全滅)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다시 새롭게 되는 과정이란 인간의 영적인 상태를 타락하기 전처럼 되돌리는 것을 말한다. 이 단어는 사도행전3:21의 "회복"(Restitution)과 의미가 같다. 베드로가 말한 "녹아 내리며"(벧후3:11)라는 단어는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말씀하신 "그를 풀어 주어(Loose) 다니게 하라"(요11:44)와 같은 단어이며, 성경은 "창조물"이 죄로부터 기인한 "속박된 상태"로부터 "해방되어 풀려날 것"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가르친다(롬8:19-21).
요한이 말한 {하늘이 "두루마리 같이 말려서" 쓸려가고 모든 산과 섬도 "제자리에서 옮겨졌으니"}(계6:14)는 모든 물질적인 모든 세상이 사라져 버렸다는 생각은 틀린 생각이다. 왜냐면 요한은 즉시 그가 본 다음의 내용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마치 신부가 자기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같이 예비되었더라. 그리하여 구원받은 자들의 민족들이 그 빛 가운데서 걷겠으며 땅의 왕들도 그들의 영광과 존귀를 그 곳으로 가져오리라}(계21:2,24).
또한 성령께서도 솔로몬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한 세대가 지나가고 또 다른 세대가 오나 땅은 영원히 남아 있으며}(전1:4)
{온유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에서 이것은 특별한 약속이인데,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이 땅에서 영원히 거할 것이다(사60:21; 66:22),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원히 땅에서 거주하기 위해서는 땅은 반드시 영원히 존재해야 한다. 이것으로 지구 행성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음이 분명하다. 이 지구는 불에 의해 깨끗케 되고 정결하게 될 것이며 백성들과 민족들이 거주하기 적합하게 다시 만들어져 이들이 차지할 것이다.
이 땅은 하나님의 아들의 임재로부터 정화될 것이며, 갈보리에서 인류를 구속하기 위하여 전 우주에서가장 값진 희생이 치루어진 곳이다. 하나님께서 원대한 미래를 두신 곳으로써 그분의 모든 위대한 창조 중에서도 하나님의 마음속에 가장 소중히 여기시는 것이므로 폭발하거나, 멸절하기에는 너무도 신성한 곳이다.
새 하늘과 새 땅
"땅이 불타버림"으로 시간이 끝나지 않고 영원이 시작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완전한 왕국"
을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만물안에 모든 것(All in All)"이 되시기 때문이다(고전15:24-28).
이 왕국은 다음과 같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있는 한 이름을 그에게 주사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이나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혀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
이 왕국에서는 하늘과 지상과 지옥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인자에게 복종할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이 "완전한 왕국"은 "천년 왕국"이 아닌데, 그 이유는 천년왕국의 마지막에는 배도와 반란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완전한 왕국은 천년왕국과는 다른 어떤 왕국을 의미하며 "천년 왕국" 이후 "불로써 회복"된 후에는 다른 왕국이 없기 때문에 "불로서 회복" 이후에 뒤따르는 왕국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이 왕국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루어진 왕국인데, 이것은 우리가 "올바로 말씀을 나누어"란 장에서 살펴보았던 "완전한 왕국"이다.
어떤 이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만일 "창조 주간"의 "일곱째 날"이 천년왕국과 일치한다면 "안식일 다음날"은 "땅이 불타버린" 이후에 따르는 시대를 예언한 것임을 알 수 있다(레23:36).
창세기의 일곱째 날은 완전하지 못했던 "옛 창조"와 관련이 있으나, "여덟째 날"은 완전한 "새 창조"와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여덟째 날", 혹은 "주의 첫날"은 우리의 주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으며, 50일 후, "여덟째 날"인 오순절날에는 성령을 주셨기 때문이다. 천년 왕국은 일곱째 날을 지시하고 있으므로 "여덟째 날"은 천년왕국을 가리킬 수 없으며, 또한 이 날은 시간의 일정한 기간인 반면에 영원은 시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일곱째 날은 영원을 가리킬 수 없다. 즉 "여덟째 날"은 "회복된 땅"과 "영원" 사이의 "일정한 기간" 가리키거나 "완전한 시대"라 불리우는 기간을 만족시켜야만 한다.
이 시대의 경륜을 에베소서1:10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때가 찬 경륜"
즉, "때가 찬 경륜"은 죄 때문에 그들을 심판하셔야만 했던 모든 이전의 경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때가 찬" 경륜은 지속되는 것으로써, 우리는 암흑 안에 있지는 않다. 이스라엘이 이 경륜에 커다란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주가 말하노라. 내가 만들 새 하늘들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같이 너희 씨와 너희 이름도 남아 있으리라}(사66:22).
그리고 이스라엘과 맺었던 하나님의 약속의 기간으로써 신명기7:9에서 "천대", 약 33000년 동안 베풀어질 것이다.즉 우리는 "때가 찬 경륜"이 상당히 긴 시간 동안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세대적 특징을 몇가지 살펴보자
이 곳에는 죄가 없을 것이다.
모든 악한 권세자들은 땅에서 쫏겨나 "불못"에 영원히 갇혀 있기 때문이다.
새 땅의 환경은 병균이 숨어 있을 만한 장소 조차 없을 것이며, 그 곳에는 병이나 죽음이 더 이상 없인데 건강은 "생명의 나무"의 잎들로 사용하여 유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에는 더이상 성난 폭퐁우나, 폭설과 음산한 암흑이나, 하나님의 진노의 천둥과 벼락이 없을 것이며, 또한 땅에서는 해일이나 천재에 의한 엄청난 홍수와 같은 파괴적인 재앙은 없을 것이다. 그 날에는 에덴에서 처럼 "안개가 땅에서 나오고 물이 온 땅의 표면을 덥을 것"인데, 우리가 알듯이 거기에는 "더 이상 바다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큰 물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고 큰 대양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면 새도성의 거리를 흐르는 강물이 배출되어야 할 곳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지구는 에덴의 아름다움과 영광 가운데로 놓이게 될 것이다. 그곳에는 더 이상 가시나무와 엉겅퀴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해충이나 독충도 없고, 일은 즐거움이 될 것이다. 꽃들 사이에서 숨어서 기다리는 뱀들과 수풀 속에서 덮쳐 잡아 먹으려는 사나운 짐승들이 없을 것이다. 새 무덤을 파고 잔디를 심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흙은 슬픔과 부끄러움의 눈물로, 형제들을 죽인 사람의 피로 젖지 않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들이 이 땅을 유업으로 받으며 북쪽에서부터 남쪽까지 동쪽에서 서쪽까지 장미가 피듯이 활짝 필 것이며 회복된 낙원은 초록으로 뒤덥일 것이다.
또한 그곳에는 새 하늘과 새땅 뿐만 아니라, 새 도성이 있다. 이 도성은 예수님께서 그분이 하늘로 돌아가서 그분의 신부인 교회를 위하여 준비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처소이다. 하나님의 건축술로 설계되고 건축되어진 우리가 소망하던 처소이다. 그곳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곳이다. 하늘을 기원으로 하며, "하늘에서" 내려오기 때문에 하늘 그 자체는 아니다. 이 건축물을 축조할 수 있는 인간의 손은 없다.
이것은 새 땅위에 놓일 것인데, 이것으로 우리는 왜 더 이상 바다가 존재하지 않으며, 이 현재의 땅이 불에 의해 회복되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새도성의 크기는 12000펄롱이며 (한변의 길이가 약 2414km) 이 길이는 마이에나에서 플로리다까지 이르는 길이이며, 미국 국토 절반을 넘는 길이이다.
우리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모두 같다는 음성을 듣게 된다. 정육면체는 이 조건을 맞지 않다. 이 조건을 만족하는 다른 기하학적인 모양은 피라밋 형태 뿐이다. 이곳은 각 벽이 144규빗(약74m)(계21:19)으로는 2414km 높이를 지탱할 수 없으므로, 위에 있는 벽은 도시의 피라밋 형태를 지니게 될 것이다. 이 성벽에는 각면에 3개씩, 12개의 대문이 있고, 각각의 문은 진주로 이루어져있다. 그리고 이 문들은 결코 닫히지 않는다. 이 벽은 벽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초석은 각양의 값진 보석으로 장식되어져 있다. 기초석 가운데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들이 있으며 정문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있다. 그런 도성이 멀리서 바라본다면 그 피라밋의 끝이
"하나님의 영광"
의 빛으로 빛나고 있다면 얼마나 장엄한 광경이겠는가?
{그 도성은 해나 달이 그 안에서 비칠 필요가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 곳을 비추고 어린 양이 그 곳의 빛이 됨이라}(계21:23).
{또 그 곳의 성문들을 낮에는 전혀 닫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 곳에 밤이 없음이라}(계21:25).
윗글은 단지 도성만을 언급했을 뿐이지 새 땅 전체를 언급한 것이 아니다. 왜냐면 도성의 빛이 닿지 않는 어떤 지역은 밤과 낮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피라밋 모양은 분명히 도성의 중앙에 위치할 것이며, 아마도 면적의 절반 이상은 넘지 않을 것이다. 거주민들이 사는 지역은 대로로 나누어지며 가장 자리에는 가로수길이 있고 그곳 옆에는 살기에 알맞게 구획된 주택들이 있으며, 많은 공원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도성 자체가 "순금으로 맑은 유리 같고"라는 말을 듣게 된다(계21:18,21). 만일 이 언급이 거주자들의 집들과 방에 대한 언급이라면 구속받은 사람들은 맑게 비치는 금으로 이루어진 처소에서 살게 될 것이며, 도저히 이러한 주거지의 거리가 더러워지거나 추해지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거리들을 따라 아름다운 강뚝과 나무들이 있다. 이 나무들은 단지 그늘이나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매달 12가지의 다른 종류의 과실을 내는 "생명 나무"라 부르는 아름다운 과실수이다. 이 나무들의 열매들은 이기는 자들 만을 위한 것이다.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 가운데 있는 "생명 나무"를 주어서 먹게 하리라.}(계2:7).
이 나무들의 잎은 새 땅을 차지하는 민족들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어떤 병을 고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만일 아담이 에덴 동산에 있던 생명 나무를 먹었을 경우, 이처럼 건강을 유지하가 위한 것이다(창3:22-24).
또 이 아름다운 강은 "생명수의 강"이라고 부르는데, "생명을 주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곳의 지상의 강들은 산의 어떤 솟는 샘물의 원천을 지니고 있다(계22:1).
추측해보면 도성의 중앙의 "피라밋 모양의 산" 위의 꼭대기 어딘가에
"하나님의 보좌"
가 놓일 것이다. 이 보좌 밑으로 수정과 같은 냇물이 계단 아래로 폭포처럼 흘러내려 아름다운 "생명의 강"을 이룰 것이다.
또한 새 예루살렘의 놀라운 점은 그곳에는 성전이 없다는 것이다. 이교도건 기독교건 경배할 장소가 없는 도시는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새 예루살렘은 놀랍게도 성전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전능하신 주 하나님과 그 어린양이 그 곳의 성전"이기 때문이다. 사실 도성 전체가 성전이 될 것이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큰 음성이 나서 말하기를 "보라, 하나님의 성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어 그 분께서 그들과 함께 거하시리니, 그들은 그 분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리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내시며 다시는 사망이나 슬픔이나 울부짖음이 없고 고통 또한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은 다 사라져 버렸음이라."고 하더라}(계21:3,4).
이것으로 하늘에 있던 성막이 땅으로 내려와 이 땅은 하나님의 처소가 되는 것이다.
이 아름다운 도성 성벽 바깥에는 여러 민족들이 살고 있는 "새 땅"이 펼쳐져 있으며, 그들의 왕들은 자신들의 영광과 존귀를 그곳으로 가져 올 것이다. 새 땅에는 죄가 없기 때문에, 더럽게 하는 것이나 가증한 일은 "진주"문으로 들어 올 수 없다(계21:24-27).
누가 새 땅의 복된 거주자가 될 것인가?
그 해답의 예표로 "홍수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디에 살고 있었는가?"를 알면 쉽게 풀릴 것이다. 이 사람들은 노아의 후손들었으며,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방주로써 구원을 받아 살아남았다(창6:13-16). 즉 하나님께서는 "땅이 불타는" 동안에 잘은 모르겠지만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천년왕국의 백성들 중 의로운 자들은 구원하실 것이며, 땅이 다시 사람이 거하기에 적합하게 되면 새땅에 그들을 살게 하실 것이며, 그들은 증가하고 번성하여 아담(창1:27,28)과, 노아(창9:1)에게 명령하셨던 땅에 번성하고 다시 채우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들은 이곳을 다시 채울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데려가신 목적이 그를 주님의 재림을 알릴 사자(使者)로써 다시 보내시기 위한 것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민족들로부터 상속받을 사람들을 취하여, 다시 거주시키기 위하여 새 땅에 다시 그들을 살게 하실 것이다. 만일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라면, 성경의 한 예표에 대한 실상이 없게 되는데, 예표로서의 노아의 방주에 대한 실상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새 땅을 위하여 새로운 종족을 창조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아님을 성경으로부터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스라엘에 관한 그분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천대", 약 33,000년 동안 이 땅을 상속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의 땅이 새 땅으로 바꾸어지기 전까지는 불가능하다.
{주가 말하노라. 내가 만들 새 하늘들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같이 너희 "씨"와 너희 "이름"도 남아 있으리라}(사66:22).
이것으로 실제로 에덴 동산에 생명 나무가 존재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동산에 생명 나무가 있었다는 점을 볼 때 하나님은 인간이 영원히 살면서 땅을 정복하고 생육하고 번성하기를 바라셨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인류가 빠른 속도로 번성해서 지구가 비좁게 되면, 우주를 개척했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태양계는 아직 유년기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까지는 지구만이 인간이 살기에 가장 적합한 행성이긴 하지만 다른 행성을 개척해서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태양이 단지 지구만을 위해서 빛나고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근시적으로 우주를 창조하시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실 때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 천사보다는 우월한 존재이다. 인간은 창의적인 지혜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거주지를 무한대로 확장시키셨을 것이다. 이것은 또한 구속의 계획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갈보리에서 죽은 것이 겨우 몇 백만 혹은 몇 천만의 인간들 만을 구속하기 위함이겠는가? 사탄은 하나님의 계획을 비웃으며 인간을 타락시켰다. 하나님의 계획은 다시 한 번 무너지는 뜻 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땅위의 죄가 없는 인류를 거하게 하시려는 계획을 사탄이 깨뜨리도록 묵과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순히 몇 백만의 사람들을 구속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땅과 죄의 저주를 받았던 인류와, 그리고 사탄의 지배에서 구속하시려는 것이다.
사도 야고보는 우리에게 우리는 단지 그의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들" 말했다(약1:18). 그렇다면 수확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우주는 아직 유년기다.
우리는 이제 단지 시작에 서 있을 뿐이다.
{그의 정부와 화평의 증가함이 다윗의 보좌와 그의 왕국 위에 바르게 세워지고, 지금부터 영원까지 공의와 정의로 그것을 굳게 세우는데 영원하리라}(사9:7).
이 지구는 "불침례"를 통과하며 이곳을 차지하기에 적합한 인류가 나타나야 한다. "구원받은 민족들"(계21:24)이라고 불리우는 죄로 더럽혀지지 않은 남자와 여자가 남아 있어야 한다. 이들은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짓지 않고 낳은 자손들을 낳았다면 이들과 같을 것이다. 이것은 구속의 온전한 목적을 보여주며 인류 창조에 있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높인다.
위대한 퇴위식
"천년 시대"의 마지막 땅이 불로써 회복된 이후부터 "완전한 시대", 즉 "인자의 왕국"이라 불리우는 "시대들의 시대"라는 기간이 생긴다.
이 "시대들의 시대"가 끝나갈때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폐하신다. 그분께서는 "모든 원수를 자기 발 아래 두실 때까지 통치"하실 것이며, 인자이신 그리스도깨서는 하나님께 순종하신다. 이것으로 하나님께서는 만물 안에 모든 것이 되신다(고전15:24-28). 이것이 위대한 퇴위식이다.
세계사에서 보좌에서 퇴위하는 일은 많이 있었지만, 이것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 여지껏 다양한 이유로 보좌에서 퇴위하였다. 어떤 이들은 강제적으로, 혹은 자발적으로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육체적인 질병으로, 혹은 자신의 특별한 계승자에게 물려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분은 인자로서 그분에게 주어진 일들을 다 이루셨기 때문에 퇴위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그분의 인성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인자"라는 칭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돌아갈 것이며, 이것으로써 하나님의 신격(Divine Godhead)이 이후로는 다시 하나(unity)가 되셔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안에 모든 것"(ALL IN ALL)이 되실 것이다. 그 이후부터는 영원이 시작되는 것인데, 이것은 "시대들의 시대들"로 구분된다. 이후의 끝에 관하여는 어떠한 암시도 없다.
26. 언약들 (Covenents)
언약은 사람과 사람 사이 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합의 내지는 계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언약은 확실한 이해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언약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다.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그 약속의 확실한 성취에 바탕을 두었다. 하나님은 사람과 여덟 번의 언약을 체결하셨는데, 그 언약들은 모두 땅과 관련된 것이었고 각각의 언약 때마다 그것은 새로운 세대를 만들어냈다. 여덟 번의 언약 가운데 여섯 번은 아담, 노아, 아브라함과 같은 전형적인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주어졌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성취되는 다윗에게 준 언약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들이 살아있던 당대에 성취되었다. 그 언약들은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확실했으며 그 언약들 가운데 네 번은 표적으로 구별되었다.
I. 에덴의 언약
창세기1:28-30, 2:15-17
이 언약은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에게 주어졌던 언약이다. 우리는 이 시대을 순종 위에 전제되어진 "무죄(無罪)의 경륜"라고 말한다. 에덴에서 체결된 언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땅을 다시 채우는 것(Replenish, 창1:28) - 아담 이전에 영적 존재들이 있었고 심판으로 인해 땅이 "혼돈된 상태"가 되었으며, 그들은 멸망당하였다(창1:2).
2. 땅을 정복하라는 것(창1:28)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지는 않으나 빛, 열, 전기, 중력, 등등의 힘을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일것이다.
3. 동물들에 대한 지배권을 갖는 것 - 길들여진 동물 뿐만 아니라 맹수까지도 지배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시편 8:3-9에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4. 음식물은 식물로 한정함(창1:30) - 창세기 1:30에서부터 타락 이전에는 동물들도 식물을 먹이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5. 하나님께서 주신 동산을 관리하는 것(창2:15) -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의무적인 일이 아닌 유쾌하고 즐거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때 땅에는 저주가 없었고, 타락한 이 후에야 "가시"와 "엉겅퀴"와 "잡초"가 생겨서 땅을 경작하는 일은 수고스럽게 되었다(창3:17-19).
6. 동산 중앙에 있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것은 금지됨(창2:17) -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이 천진난만하게 창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만약에 그가 하나님께 순종했다면 그의 주위 환경은 무죄한 상태로 계속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의 눈을 열게 하는 나무를 먹었고 그 나무를 먹는 순간 언약은 깨져 버렸으며, 인간은 선과 악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
7. 불순종에 대한 댓가는 육체의 죽음이었다(창2:17) - 그리고 이것은 아담과 이브에게 하나님의 은혜 밖에서 "아담과의 언약"으로 알려진 새로운 언약을 맺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Ⅱ. "아담"과의 언약
창세기 3:14-19
이 언약은 아담과 이브가 추방되기 전에 동산에서 하나님과 체결한 것이다. 이 언약에는 조건이 없었고 저주와 약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저 주
저주는 네 대상을 향하여 내려졌다.
A. 뱀과 관련하여
뱀은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이었지만 지금은 가장 메스꺼운 존재인 사탄의 도구이다. 그러나 사탄은 아직까지도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 가장하고 있다. 뱀은 죽을 때까지 배로 기어다니며 흙을 먹는 저주를 받았다(창3:14,15).
B. 여자와 관련하여
그녀의 위치는 두 가지 측면에서 현저하게 변했다(창3:16).
(1) 해산의 고통을 갖게 되었다. - 아이를 낳는 것은 많은 아픔과 심한 고통을 겪게 했다. 만약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아이를 낳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이고 어머니로서의 삶은 기쁘고 즐거운 것이 되었을 것이다.
(2) 남자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 여자는 남자와 동등하게 창조되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타락의 원인이 됨으로 인해 동등권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남자는 여자의 머리가 된 것이다(창3:16).
C. 남자에 관련하여
보기에 즐거웠던 땅이 이제는 그의 타락으로 인해서 저주를 받게 되었다. 동산 이후로 남자는 그의 얼굴에 땀을 흘리고 열심히 일을 해야만 땅으로부터 소득을 얻어 삶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으며,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3:17-19).
D. 땅과 관련하여
저주를 받은 이후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 이것은 지구 상의 모든 경작에 어려움을 주었다(3:17-18).
2. 약 속
약속의 내용은 여자의 씨(그리스도)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고 뱀의 씨는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물 것이라는 것이다.
Ⅲ. "노아"와의 언약
창세기8:20-9:17
양심 시대 아래에서 인간은 그 자신의 악함을 증명하였다. 하나님은 홍수를 보내어 지상에 있는 모든 족속을 멸하셨고 단지 노아와 그의 가족만을 분리시키셨다. 홍수 이후 노아는 하나님을 매우 기쁘게 하는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은 노아와 무조건적인 언약을 맺으셨다. 이 언약은 우리를 "인간 정부 시대"로 인도하며 다음의 내용들을 담고 있다.
1.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땅을 저주하지 않고 생명체들을 물로 멸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낮과 밤과 계절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8:21,22).
2. 노아와 그의 자손에게 다산하고 번성하며 땅을 다시 채우라(Replenish)고 말씀하셨다(9:1).
3. 그들은 이전처럼 동물들을 다스리게 되었다(9:2,3).
4. 이때부터 사람들은 식물만을 먹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피채 먹는 것은 금지되었다(창9:3,4).
5. 사형에 해당하는 법이 제정되었다(창9:6). 이것은 "도피성"만을 제외하고는, 결코 폐지되지 않았다(민35:1-34).
6. 지구는 홍수에 의해서는 결코 다시 멸하지 않을 것이다(9:11-16). 이 언약의 "표적"은 무지개이고 이것은 지구가 불로 소멸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Ⅳ. 아브라함과의 언약
창세기12:1-3
바벨탑 사건은 인간 역사의 하나의 전환점이었다(창11:1-9). 이전의 인간은 한 종족이었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없었다. 그런데 인간들은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고, 이것을 구제하기 위해 하나님은 셈의 씨를 개인적으로 불러 내셔서 한 분리된 백성과 국가를 만드시기로 결정하셨다. 이 때에 선별된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이었다. 이 부르심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본토인 칼대아의 우르에서 나오라는 것이었고 그는 이 부르심에 순종했다. 그와 맺은 언약은 그의 아들 이삭에게서 확정되어졌고 손자 야곱(이스라엘)에게로 계속 이어졌다. 이 언약은 무조건적인 것이었고, 이 언약은 일곱 가지 약속을 담고 있다.
1.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며" - {하늘의 별들과도 같은}이라고 표현된 이 약속은 이삭을 통한 육적인(땅에 속한) 자손들과 믿음을 통한 영적인 자손(갈3:6,7,29)의 두 가지로 성취되어졌다.
2. "너를 축복하고" - 이 약속은 가축들과 식물들과 땅에 있어서 각각 시기적절하게 성취되었다. 또한 아브라함은 영적인 축복도 받았다(창15:6).
3. "네 이름을 위대하게 하리니" - 예수 그리스도 다음으로 성경에서 두드러지게 많이 나오는 이름 중 하나는 아브라함이다.
4. "너는 축복이 되리라." - 아브라함은 당대의 사람들에게 축복이었으며 그를 통하여 선택된 씨가 나왔을 때 그것은 세상의 민족들에게 복의 근원이 되었다(갈3:14).
5.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주고"
6.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리라." - 이 두 약속은 유대민족의 과거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고 미래에도 역시 성취될 것이다. 모든 나라들이 유대인들을 환대했을 때 그들은 복을 받았고 반대로 유대인들을 박해했을 때 고통을 당했다.
7. "네 안에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라." - 이 약속은 영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시기적으로는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방 민족이 축복을 받는 천년 왕국 때 성취될 것이다(사60:3-5,11,16).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일에서 그의 믿음을 시험받은 이후로 이 언약은 재확인되었고 확정되었다(창22:15-18). 이것은 영원한 언약이었다(창17:1-8). 이 언약의 "표적"은 "할례"이다(창17:9-14). 그리고 이 언약은 새 땅이 도래하는 이 세대의 끝까지 계속된다.
우리는 아담, 노아와의 언약이 아브라함과의 언약에 의해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이방인들의 때에 해당되는 기간 동안 히브리 민족에게 제한되는 것이다. 양심 시대나 인간 정부시대는 아직도 이방인들에게 계속되어오고 있다.
Ⅴ. "모세"와의 언약
모세와의 언약은 출애굽한 이후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준 언약이며, "율법시대"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 언약은 순종 위에 전제되어지고 세 가지 즉, 십계명을 포함하고 있다
1, 도덕법 (출20:1-26) 여기에 십계명이 포함된다.
2. 민 법 (출21:1-24:18)
3. 의식법 (출25:1-40:38) 여기에는 성막, 제사장직, 제사의 절차 등으로 나누어진다. 레위기에 관한 장을 참조 하라. 이 언약의 "표적"은 안식일이다(출31:12-18).
A.D.70년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유대인들이 각처에 흩어지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 언약은 유대인들이 회심하여 그들의 땅으로 모일 때 다시 회복될 것이고 팔레스타인의 언약이라고 알려진 이것은 하늘과 땅이 불로 소멸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Ⅵ. "다윗"과의 언약
삼하7:4-17
이 언약은 예루살렘에서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왕에게 준 언약이다. 이 언약은 "은혜의 시대"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러나 이 언약은 하나님께 대해 불순종하는 하나의 상황을 안고 있었고 이것은 징벌과 약속의 연기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이것이 약속의 파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 다윗의 집(13절). 이것은 자손을 가리키며 이들은 결코 멸망당하지 않을 것이다.
2. 다윗의 보좌(13절). 다윗의 왕국은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3. 다윗의 왕국. 다윗의 아들은 이 세상의 "천체의 법"을 지니시고 계신다. 그일은 천년 왕국 위에서 있을 것이다. {그가 또한 바다의 끝에서 끝까지 다스릴 것이요, 강에서부터 땅의 끝까지 다스리리이다}(시72:1-20).
4. 끝이 없을 것이다.
{네 집과 네 왕국이 네 앞에서 영원히 서리라. 네 보좌가 영원히 서리라}(16절).
이 언약의 "표적"은 아들이다(눅1:30-33). 그리고 이 언약은 "시대의 끝"까지 연장될 것이다.
Ⅶ. 팔레스타인의 언약
신명기30:1-10
이 언약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어졌고 이스라엘의 회심 위에 전제되어진다. 이것은 그들이 회심하여 팔레스타인 땅에 되돌아온 이후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이 언약은 우리들을 "천년 왕국 시대"로 인도한다.
Ⅷ. 새로운 언약
히브리서8:7-13
이 언약을 아직 맺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그들의 고토로 되돌아간 이후 만들어질 것이다. 이 내용은 예레미야 31:31-37에 약속되어 있다. 이 언약은 무조건적인 것으로 천년왕국, 새 하늘과 새 땅을 포함할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끝나는 것 위에 기초를 두고 있다(마21:28). 이것은 교회와 아무런 상관이 없고 교회는 이 세대에 속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여덟번째 언약이며 이것은 부활과 영원한 완성의 외침이다.
27. 신비들(The Misteries)
바울은 .고린도전서4:1에서 "그러므로 사람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며 '하나님의 신비들'을 맡은 청지기로 여기게 하라."고 기록하고 있다
로마서16:25,26에서도 바울은 "신비의 계시"라고 부르는 "나의 복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세상이 시작된 이후 "비밀"로서 감추어져 오다가 지금 "계시"되어 알려지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바울과의 대화에서 "나타날 일"을 약속하셨으며(행26:16-18), 여기에 "하나님의 신비"가 포함되어 있다.
"신비들"은 11개가 있는데 그중 8개는 바울이 말하였으며 나머지 3개는 그리스도께서, 2개는 사도 요한이 말하였다.
신약에서의 "신비"라는 의미는 이전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신 그분의 목적과 계획이며, 이것은 그분께서 계시하는 때가 오기전까지는 인간의 지식에서 보류하셨던 것이다. 이 "신비들"을 알려진 순서대로 알아 보자.
I. "성육신"(Incarnation)의 신비
{"경건(godliness)의 신비"는
논쟁의 여지없이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나셨고 성령으로 의롭게 되셨으며, 천사들에게 보이셨고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셨으며, 세상에서 믿은 바 되셨고 영광 가운데로 들려올라 가셨음이라.} (딤전3:16)
하나님을 자신을 시내산에서 처럼 하늘로부터 자신의 음성을 나타내신 것은 신비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인간의 모습"에 "성막"을 취하는 것은 위대한 신비이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이룩하셨다(요1:1-14)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14:9)"라고 말씀하셨다.
II. "하나님의 내주"(Divinee Indwelling)의 신비
골로새서1:26-28절에서 바울은 "시대들"와 "세대들"에 감추어져 왔던 다른 "신비"를 말하고 있는데, 드디어 성도들에게 나타났다. 바울은 이 신비를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고 말했다. 이것은 큰 신비였는데 왜냐하면 "새로운 탄생"의 신비이기 때문이다. 이 신비는 니고데모의 다음의 질문을 생각나게 한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나이까?"(요3:4). 이 신비는 경이로우며 놀라운 사실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우리들과의 연합이다. 예수님께서 인성을 취하심으로 우리와 같이 하나가 되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성품을 취함으로 그분과 같이 하나가 되었다. 이 연합의 신비는 "완전한 일치"의 연합이다. 우리는 몸의 지체들이 몸의 일부분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한 지체들이다(고전12:12)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살기 위해서이다(갈2:20).
III.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교회 안에서
한 몸이 되는 신비
그리스도께서 사역하시던 당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존재하던 "민족적 증오심"을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 사이에는 "장벽"과 "차별"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들"이라고 취급했으며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경멸했다. 이것은 인도의 카스트 제도 보다 더 심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에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취하여서 교회라 불리는 "새로운 몸"으로 그들을 형성하시고 계신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민족"과 "계층"의 구분이 없으며, 오직 교회 안에서만 "거룩한 형제애"를 세상에서 볼 수 있다.
IV. "일곱 별"과 "일곱 촛대"의 신비
사도 요한에 의해 "일곱 별"과 "일곱 촛대"의 신비가 계시되어졌다(계1:12-20) 그는 "일곱 별"은 천사 혹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전달자이며,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 자체를 나타낸다. 사실 일곱 촛대는 교회사를 나타나기 위해 언급된 교회이다. 이것의 역사는 1900년간의 그리스도인의 교회의 역사를 나타내며, 이 신비는 근래에까지, 즉 이러한 교회들의 특징과 나타난 교회의 역사가 일치가 되어지기 전까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더 자세한 설명은 22장의 "일곱 교회"의 내용을 참고하라.
V. "천국"의 신비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 인해 왕국이 세워지지 못하자, 왕국은 다른 형태, 즉 "신비의 형태"로 취해졌다. 예수님께서는 이 왕국의 "신비로운 형태"를 알려주시기 위해 비유를 의지하셨다. 이 비유는 12개가 있으며, 오직 마태복음에서만 나온다. 더 자세한 설명은 13장의 "왕국"에 있는 "왕국의 신비"를 참조하라.
VI. "살아있는 성도들이 변화"되는 신비
고리도전서15:51-55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가 모두 변화될 것이니 마지막 나팔에 눈깜짝하는 순간에 그러하리라.}
이것은 신비들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며 아무도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상식으로서 사람들은 죽는 것은 당연한 법칙이지만, 그러나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고 변화되어 이 땅을 떠나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계시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더 자세한 설명은 11장의 "교회"장을 참조하라.
VII. 이스라엘의 눈이 어두워지게 된 신비
로마서11:25절에서 바울은 기록하기를. . . .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현명하다고 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차기까지 이스라엘의 눈멀게게 된 것이라.}
그들은 영적으로 완고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 민족적으로 눈멀었으며, 이것은 국가적이지 개인적이 아니다. 왜냐면, 사도들이 있었던 당시 믿은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은 유대인이었으며 꽤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던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울에게 계시된 이 신비를 통하여 여러 나라들 사이에 흩어져서도 유대인들이 살아남아 민족적으로서 존속되어지는 이유가 설명할 수 있다.
VII. 불법의 신비
데살로니가후서2:1-12에서 바울은 "죄의 사람"이나 적그리스도를 말하고, 바울의 때에 이미 활동하고 있었던
"불법의 신비"
에 대해 말하고 가르쳤다.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났던 것을 "경건의 신비"라고 말했듯이 사탄이 육신으로 나타나는 것을 "불법의 신비"라고 부른다. 이 신비는 "적그리스도"에 관한 장에 자세히 언급되었다.
IX. "큰 바빌론"의 신비
이 신비는 계시록 17장에 나오며 "큰 바빌론"장에 상세히 언급되었다.
X.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신비
이것은 엡베소서5:22-23절에서 바울이 말한 것인데, 그는 "이것은 위대한 신비라.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그 교회에 관하여 말하노라." 라고 말하며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임을 신비라고 말하고 설명하고 있다. 처음 아담은 이브를 아내로서 얻었다. 그러나 두 번째 아담, 즉 마지막 아담은 교회를 신부로 얻을 것이다. 이것은 "위대한 신비"인데 왜냐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삽입된 시대"가 생김으로써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에 관한 장을 참조하라.
28. 예표와 실상 (Type and Antitype)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1-52절까지의 "천국" 비유에 관한 내용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요약하셨다.
{그러므로(우리는 성경에서 "그러므로"라는 단어를 주의해야 한다.), 천국에 관한 교훈을 받은 모든 서기관들(성경 교사)은 마치 가기 창고에서 새보물과 옛보물을 꺼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옛(Old)"것은 구약 성경의 "예표"이고, "새(New)"것은 신약 성경에서 기록된 내용을 나타낸다. 신약은 구약 안에 "싸여있고" 구약은 신약에서 "펼쳐진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새로운 것"은 "옛것"에 포함되며}
{"옛것"은 "새것"으로 풀어진다}.
히브리서가 없이는 레위기를, 요한계시록이 없이는 다니엘서를, 십자가에 못박힌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 복음서 없이는 유월절 또는 이사야53장을 이해할 길이 없다, "예표들(Types)"과 "실상들(Antitypes)"을 대조해 가며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고 나면, 성경을 기록한 분은 오직 한 분 성령이심을 명백히 알 수 있다.
구약의 "예표론(Typology)"은 신약의 교리들을 미리 증거한 "그림으로 된 말씀"이다. 이러한 예로서 장대에 달린 "놋뱀"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설명한 것이다(요3:14-15). 그러므로 어떤 설교자나 성경교사도 그들이 구약의 "예표"에 관하여 잘 모르면 신약을 가르칠 자격이 없다.
그러면 "예표"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10:1-11에서 이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이제 그들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이 "본보기(Ensamples)"가 되고 또 세상의 끝날들을 당한 우리에게 "훈계"로 기록되었느니라}(고전10:11)
바울이 말하고 있는 "그들"은 누구이며 모든 "일"은 무엇인가? 물론 이스라엘 자손과 그 역사를 말한다. 그러나 그 역사상의 사건들은 단순한 사건 그 이상임을 알 수 있다. 그 사건들은 신약에 나타난 "구원 계획"의 "예표"를 설명하는 것으로 결코 "신화적(Mythical)"이거나 "은유적(Allegorical)"인 것이 아니다. 실제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일어났던 사실이었으며, 우리의 훈계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예표"는 장차 "다가올 선한 것들의 그림자는 있으나 그 자체가 그것들의 형상은 아니므로"(히10:1)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구약의 "예표들"은 단지 "그림자"라는 것이다. "그림자"는 "실상"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그림자"는 그 "실상의 불완전한 모습"이다. 따라서 구약의 예표들은 "실제 형상"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림자"이며, "실상"의 불완전한 표현에 불과하다.
"예표"는 어떤 경우에는 "인물"로, "사건" 또는 "의식"들로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미래에 나타날 "인물", "사건", 또는 "의식"을 미리 보여 주고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예표적 인물 : 아담. 카인, 아벨, 멜기세덱, 아브라함, 이삭, 요셉, 모세, 여호수아, 다윗, 요나,
2. 예표적 사건 : 노아의 홍수, 이집트의 재앙, 유월절, 놋뱀, 요단강을 건넘, 도피성
3. 예표적 의식 : 희생을 드리는 일, 문둥병자를 깨끗게 하는 의식, 일곱절기 희년, 50년 만에 돌아오는 대속죄일
"에표적 건축물"에는 "노아의 방주", "성막", "성전"등이 있으며 "예표적 기구"에는 "번제단", "놋대야", "일곱촛대", "차려놓은 빵", "식탁", "향단", "속제소",가 있는 "언약궤" 등이 있다. "예표적 색깔"로는 "청색", "홍색", "백색", "자주색", "주황색", "녹색"등이 있고 "예표적 숫자"로는 "하나", "셋", "넷", "일곱", "열둘", "사십"과 같은 것들이 있다.
다음 "그처럼(So)"과 "같이(As)"은 아주 뚜렸하게 대조된 좋은 예이다. 따라서 성경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그 의미를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처럼(So)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As)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을 살게 하려 함이라}(고전15:22).
{그러나 노아의 때와 같이(As) 그처럼(So) 인자의 오는 것도 그러하리라} (마24:37).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올린 것 같이(As) 인자도 그처럼(So) 들려져야만 하리니}(요3:14).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고래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As) 인자도 그처럼(So) 사흘 낮과 밤을 땅의 심장 속에 있을 것이라}(마12:40).
그러나 구약에 나타난 "예표" 중에서 그 "실상"이 겉으로 잘 나타나 있지 않아 성경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 들에게는 그 의미가 전혀 눈에 띄지 않는 것도 있다. 예로 "이삭과 리브가"의 예표가 그 중의 하나이다.
이삭과 리브가
창세기 24:1-67
I.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예표
II. "이삭"은 "그리스도"의 예표
1. 이삭과 그리스도는 약속의 씨였다(창15:4,사7:14).
2. 두 사람의 탄생은 미리 알려졌다(창18:10,눅1:30-31).
3. 두 사람 모두 태어나기 전에 이름이 있었다.
이삭- (창17:19). 예수-(눅1:31).
4. 두 사람의 탄생은 초자연적 출생이었다.
사라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였다(창11:30)
마리아는 처녀였다(마1:18-20).
5. 두 사람 모두 "독자(Only Son)"로 불리워졌다.
(창22:2; 히11:17; 요3:16)
6. 두 사람 자신의 친족에게 조롱와 박해를 받았다.
(창21:9-10; 갈2:28-29; 마27:29)
7. 이삭과 그리스도는 둘다 그들은 드려져야 한다는 법을 깨지 않았다.
(창22:2; 마27:24)
8. 이삭이 자신을 태울 나무를 지고 갔듯이 그리스도도 자신의 나무 십자가를 지셨다. (창22:6; 요19:17)
9. 이삭이 기꺼이 제단으로 갔던 것처럼 그리스도도 기꺼이 십자가로 나아갔다. (창22:9; 요10:17)
10.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아버지께 버림 받았다.
(창22:12; 마27:46)
11. 두 사람 모두 죽음에서 부활했다
(히11:17-19; 마28:6)
두 사람 모두 하나님께서 관여 하셨다.
III. 엘리에셀은 성령의 예표
1. 엘리에셀이 아브라함의 종이였던 것처럼 성령은 "하나님의 종"이다.
2. 엘리에셀이 하란에 가서 이삭을 위해 신부를 데려오는 사명을 받았듯이 성령께서도 그리스도를 위해 신부를 데려오도록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
3. 엘리에셀이 이삭의 신부를 데려오도록 보냄을 받은 때는 하나님께 이삭이 제물로 드려진 후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죽고 부활하신 후에 성령은 그리스도의 신부를 데려오도록 보내심을 받았다.
4. 엘리에셀은 자신에 관하여 말하지 않고 그 주인의 아들에 관하여 증거했다. 성령게서도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하여 증거하고 계신다.
5. 엘리에셀이 리브가를 재촉했던 것처럼 성령도 재촉하고 계신다.
(창24:53-56. 고후6:2)
6. 엘리에셀이 리브가에게 귀중한 선물을 주어 그 주인 이삭의 부요함을 나타냈듯이 성령께서도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어 그리스도의 신부, 곧 교회를 위하여 예비신 것을 미리 맛보게 하신다.
7. 엘리에셀이 리브가로부터 이삭의 아내가 되겠다는 승락을 받아낸 후, 자신이 직접 그녀를 데리고 왔듯이 그리스도의 신부, 곧 교회가 준비를 갖추면 성령은 그 신부를 데리고 하늘로 돌아갈 것이다.
IV. 리브가 "그리스도의 신부"의 예표
1. 리브가가 엘리에셀의 말을 믿고 그의 요구에 자신을 맡겼듯이 교회도 성령을 의뢰하고 또 그의 요구에 자신을 맡긴다.
2. 리브가가 기꺼이 이삭을 위하여 그녀의 친족을 떠났듯이 성도도 역시 예수님을 위하여 기꺼이 친족을 떠난다.
3.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엘리에셀이 리브가에게 그의 주인 이삭에 관한 모든 것과 그녀를 위하여 예비된 모든 것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었듯이 성령께서도 우리가 이 지상의 순례를 계속해 나가는 동안 우리가 우리의 이삭 곧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까지 우리가 받게 될 것들을 설명해 주고 계신다.
4. 리브가가 이방의 신부 였듯이 그리스도의 교회도 이방의 신부이다.
리브가는 이삭의 친척이었지만 이방인이었다. 히브리인의 시조는 아브라함의 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친척들도 이방인들인데, 왜냐면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증손자 야곱의 후손들이기 때문이다.
5. 리브가는 어떤 환난(Tribulation)도 겪지 않고 집을 떠나 이삭에게로 갔다. 이와 같이 교회도 대환난을 겪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뵙게 될 것이다.
6. 이삭이 집을 나와 들판에서 리브가를 맞이한 것처럼 예수께서도 하늘로부터 내려오셔 공중에서 신부, 곧 교회를 맞이하실 것이다.
7. 이삭이 리브라를 만난 것이 저녁 때였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그의 교회를 만나시는 때도 바로 이 시대의 저녁 직전이 될 것이다.
어떤 "예표들"은 두가지 의미를 지닌 것도 있다. 선지자 요나의 예가 그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요나가 "큰 물고기"에게 삼키워 그 뱃속에서 밤낮 사흘을 있은 사실은 자신이 밤낮 사흘을 무덤에 있는 것에 대한 "예표"라고 말씀하셨다(마12:40). 그러나 한편 요나는 "유대 민족의 예표"가 되기도 한다.
V. "요나"는 유대 민족의 예표
1. 요나가 부름받아 니느웨라는 이방인 도시에 메세지를 전하도록 보냄을 받은 것처럼 유대인들도 이방 나라에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선택되었다.
2. 요나가 순종친 않고 다시스로 도망했듯이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신들의 사명을 다하지 않았다.
3. 불순종으로 인하여 요나가 배 밖으로 내던져진 것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은 자기 나라 밖 민족들 가운데로 흩어지게 되었다.
3. 요나가 물고기의 뱃속에서 기적적으로 보호함을 입었듯이 유대인들도 민족들 가운데 완전히 삼킨 바 되지 않고 여전히 남아있다
4. 요나가 지옥의 뱃속에서 회개하여 부활한 것처럼 유대인들은 회개할 것이다.
5. 요나가 육지로 다시 돌아온 것과 같이 유대인들도 그들의 고토로 돌아갈 것이다.
6. 요나는 두 번째 부름을 받았고 이에 순종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도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할 두 번째 기회가 다시 주어질 것이고 이에 유대인들은 순종할 것이다.
"예표적 인물"로서 요셉을 예로 들어보면
VI. 그리스도의 예표인 "요셉"
1. 요셉은 그의 아버지 야곱의 "사랑하는 아들"이었듯이 예수님도 그러하다.
2.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보내졌듯이 예수님도 그러했다.
3.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듯이 예수님도 배척당했다.
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은에 팔렸던 것처럼 예수님도 은에 팔렸다.
5. 요셉처럼 예수님도 죄 없이 고소당하고 정죄당하셨다.
6. 요셉은 감옥에 갇혔고, 예수님은 아리마대 부자 요셉의 무덤에 묻혔다.
7. 요셉은 감옥에 풀려나와 높이 올려져 파라오왕의 우편에 앉게 되었듯이 예수님도 부활하시어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셨다.
8. 보좌에 오른 요셉은 이집트인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예수님은 멸망해가는 세상을 위한 "생명의 빵"이시다.
9. 요셉은 보좌에 오른후 이방인인 신부를 아내로 취했다. 예수님께서도 이방의 신부, 교회를 아내로 취할 것이다.
10. 요셉은 그 아내를 얻은 후, 그의 형제들에게 기근이 닥쳤다. 그러나 그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요셉을 찾아왔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그 신부를 데려가신 후, 대환난 즉 야곱의 환난이 닥칠 것이다. 그때 그 형제들, 즉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돌이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11. 요셉은 그 형제들이 두 번째 왔을 때, 자신이 요셉임을 알려주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두 번째 오실 때, 유대인은 그 분을 참으로 알아보게 될 것이다.
13. 요셉이 자신을 형제들에게 알리자, 그들은 밖으로 나아가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면, 그들은 세상을 향해 그분이 살아계시다는 것과 인류의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외칠 것이다.
14. 당시, 요셉은 그 형제들과 가족들을 "고센 땅"으로 정착시켰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유대인들이 다시 "팔레스타인 땅"에서 살도록 해주실 것이다.
만일 "예표"와 "실상"이 "장대 위해 매달린 놋뱀"과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와 같은 경우(요3:14;민21:8)는 둘 다 실제로 나타나, 그 "예표"는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아직까지 그 "실상"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것은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다. 예를 들면 "노아의 홍수"는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이 아니라, "천년 왕국"에서 민족들을 구원하여 "새땅"으로 옳기는 "예표"이다. "이집트에 내린 재앙들"은 대환난 중 세상에 내릴 재앙들의 예표이며, "도피성"은 "대환난"때 남은 유대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피난처"의 예표이다. 그리고 느브캇살 왕이 투라 평원에 세웠던 "금형상"의 "실상"은 거짓 선지자가 세울 "짐승의 형상"인 것이다(계13:14-15). "주의 절기"와 "제사"가 지닌 예표의 의미를 알고자 한다면 그것에 관하여 설명한 장과 도표를 참고하라.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 본 것을 통하여, 구약에 나타난 여러가지 에표들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들"에서 나타난 참된 의미를 깨달을 수 없을 것이다.
29.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세나무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올리브나무"
이 세 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데에 적합하다. 그 이유는 팔레스타인의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올리브나무는 이 곳에서 풍부하게 나기 때문이다. 또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각 사람이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밑에서 쉬게 될 천년 왕국 시절을 나타내고 있다(미카4:3-4). 야곱(이스라엘)은 죽기 직전에 그 아들들을 모아 놓고 그들의 장래를 예언했다. 유다에 대하여 말하기를, 카나안에 그가 차지하는 땅에서는 포도나무가 무성하여 나귀들을 포도나무에 매여, 그옷을 포도주에 빨게 될 것이라고 했다(창49:9-12).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의 영적 특권을 상징하고
올리브나무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특권을 상징하고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특권을 상징한다.
시편80:8-11절에서 . . .
{주께서는 '이집트에서 포도나무 한 그루를 가져오셔서' 이방을(카나안 족속들) 내어쫓으시고 그 포도나무를 심으셨나이다. 주께서 그 앞에 자리를 마련하시고 뿌리를 깊이 내리게 하시니, 그것이 땅을 메웠으며. 산들이 그 나무의 그림자에 덮였고, 그 나무의 줄기들은 훌륭한 백향목들 같았으며. 그 나무의 줄기들은 바다(지중해)까지 뻗쳤고 가지들은 강(유프라테스)까지 뻗쳤나이다.}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거친 땅에서 취하여 카나안 땅에 심은 사실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그 일을 행하신 분은 "넓게 편 팔"을 지니신 전능하신 분인데, 그분이 돕지 않으셨다면 이스라엘은 결코 파라오의 땅, 이집트에서 탈출할 수 없었다. 그분이 바로 이스라엘을 옮겨 심으신 "선한 농부"셨다. 또한 이것은 전적로 은혜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이집트에 살던 이스라엘 민족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타락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스라엘을 옮겨심기 위하여 카나안의 모든 이방족속들을 몰아내어 "그 땅을 깨끗하게 하신"분도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셨다. 왜냐면 그 카나안 땅의 성읍은 매우 견고하고 그 족속들은 거인들이었기 때문이었다(민13:26-33).
한때 옮겨진 포도나무는 더욱 자랐나서, 그 땅을 덥기 시작하여, 솔로몬 왕이 통치하던 시대에는 시편의 말씀대로 지중해까지 그 가지를 뻗고 유프라테스강까지 넝쿨을 뻗게 되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포도원"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이제 내가 나의 지극히 사랑하는 자에게 노래하리니, 그의 포도원에 관하여 나의 사랑하는 자의 노래를 부르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는 심히 기름진 산(카나안)에 포도원을 가졌도다. 그가 땅을 파며 거기에서 돌을 주워 내고 최상품 포도나무를 심으며 그 가운데 망대를 세우고 그 안에 포도즙틀도 만들었도다. 그가 포도가 열리기를 바랐더니 야생 포도가 열렸도다.} (사5:1-2)
이스라엘 만큼 풍성한 은혜를 받은 민족은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 포도원에 행했던 것 외에 무엇을 더 했어야 했느냐? 내가 포도 열리기를 바랐는데 야생 포도가 열림은 어쩐 일이냐?}(사5:4)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 때문에 최상품 포도가 맺히기를 기다렸던 하나님께서 "야생 포도"가 맺힌 것을 보셨을 때 그 실망은 매우 크셨던 것이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배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다름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너를 한 '고귀한 포도나무', 즉 온전히 올바른 씨로 심었더니 어찌하여 네가 내게 타국 포도나무인 빗나간 식물이 되었느뇨?}(렘3:21)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실패한 포도원을 어떻게 하시고자 하셨던가? {이제, 내가 가서 내 포도원을 위하여 할 일을 말하리라. 내가 거기에서 울타리를 걷어 내어 먹히게 할 것이며, 거기에서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하리라. 내가 그것(포도원)을 황폐하게 두리니, 그것이 가지를 치거나 갈지도 못하게 되어 찔레와 가시를 내리라. 내가 또 구름에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사5:5,6). 그리고 "포도원"과"포도나무"의 의미하는 것을 실수하지 않게하기 위하여 {만군의 주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집'이요, 유다 사람들(유대인들)은 그의 '기뻐하시는 초목'(포도나무)이라. 그가 공의를 바라셨으나 압제만이 보이며, 의를 바라셨으나 부르짖음만이 보이는도다}(사5:7)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이 징계의 말씀이 얼마나 정확하게 이스라엘에게 이루어져 왔는가는, 오늘날 팔레스타인 땅(포도원)의 상태와 그 땅에서 뽑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포도나무)민족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주님께서는 선지자 에스겔을 통하여 과실을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는 땔감으로 밖에 쓸 수 없다고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다. {인자야, 포도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며 삼림의 나무들 중에 있는 그 가지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거기서 취한 나무로 무엇을 만드는 일을 할 수 있겠으며 사람들이 거기에서 무슨 그릇을 걸 못 한 개를 취할 수 있겠느냐? . . . 내가 삼림의 나무들 가운데서 포도나무를 땔감으로 불에 내어 준 것처럼 내가 예루살렘의 거민들도 그렇게 내어 주리라}(겔15:2-6). 이스라엘은 불이 붙어 있어도 사라지지 않는 가시덤불이다(출3:1-3) 지금 이스라엘은 "박해의 불길"을 통과하고 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 즉 이스라엘은 땔감으로나 적당한 것이다. 하지만 사라진 것은 단지 가지뿐이며 "뿌리"는 여전히 살아있다. 그래서 그 포도나무는 다시 부활할 것이며, 천년왕국 시대가 오면 그 포도원(팔레스타인)도 다시 열매를 맺는 풍요로운 땅으로 변화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포도원에 대한 비유"(마21:33-41)를 읽어보면 포도원의 농부들, 곧 유대인들이 포도원(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나게 된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상속자(예수님)을 잡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들은 포도원에서 쫓겨났고 그 이후로 그 포도원은 다른 농부들, 곧 이방인들에게 맡겨졌다. 따라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적인 특권을 상징하는 것이다.
"무화과나무"는 신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직접 언급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올리브산 위에 앉으셨을 때 제자들이 나아와 세 가지 내용이 담긴 질문을 하였다. "언제 이런 일(성전 파괴이 있겠으며 주께서 오실 표적과, 세상(시대) 끝의 표적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소서."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표적를 언급하셨다.
1. "멸망의 가증한 것"(적그리스도)이 데살로니가후서에서 바울이 예언한 것처럼(살후2:1-4) 선지자 다니엘은 재건된 예루살렘 성전엘 앉을 것이라고 예언했다(단9:27).
2. "인자의 표적"은 "구름"이다. 예수님께서 구름사이로 올라가셨던 것처럼 다시 오실 때도 구름을 타고 오신다(행1:9, 마24:30).
3. "무화과나무의 표적"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땅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 표적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무화과나무'의 한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유연해지고 잎이 나오면 여름이 가까운 줄 너희가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것을 보면 그 일이 가까이, 곧 문들 앞에 이른 줄 알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유대 민족을 의미)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 지리라. 하늘과 땅은 없어져도 내 말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2-35).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예수께서 열매를 얻으려고 무화과나무 가까이 가 보았으나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자 그 나무를 저주하셨다(막11:12-14). 마가는 예수님께서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못하신 이유를 "이는 아직 무화과의 때가 아니기 때문이라"(마21:18-20)고 했다. 그럼 왜 그 나무를 저주했단 말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무화과의 열매는 잎사귀를 자라기 전인 봄부터 그 전 해에 자랐던 가지에서 자라기 시작하여 6월이면 완전히 여물게 된다. 새 가지에서 늦게 맺힌 열매는 그 때부터 계속자라 8월이 넘어가면서부터 여물게 된다. 가을까지도 여물지 못한 열매는 겨울이 지난 후 초목이 소생하는 봄이 오면 다시 여문다. 예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때는 4월경이므로 무화과가 익을 때가 아니었다. 무화과는 빨라도 6월이 되어야 익기 때문이다. 그러나 잎사귀가 겨울을 난 무화과에는 그 전 해에 여문 열매도 남아 있다. 그것을 알고 계신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에 있는 잎사귀를 보시고 거기서 그 전 해의 열매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자 그 위선 때문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이다.
이 사건을 이스라엘에게 적용하는 것은 간단하다. 예수께서는 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나무의 "무성한 잎사귀" 가운데에는 당연히 그에 못지 않은 결실이 있으리라 기대하셨지만 아무런 열매도 발견하지 못하자, 그들의 위선에 대하여 저주를 내리신 것이다(마23:1-33).
우리는 "열매 맺지 않은 무화과나무"(눅13:6-9)의 비유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다른 모습을 알 수 있다. "무화과나무"는 유대 나라를 가리킨다.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포도원에 포도나무가 심겼듯이 유대 민족은 팔레스타인에 심겼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님으로써 육신으로 오셔서 유대 나라에서 약3년 동안 복음을 전하셨으나 열매를 얻지 못하셨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그 나무를 찍어 버리기로 결심하시고, 포도원을 헐어 버리셨다.
그러나 그 나무는 즉시 베어지지 않았고 은혜의 기간이 40년간 연장된 후 A.D. 70년에 "도끼를 든" 로마의 타이더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은 점령당하였다. 즉 무화과나무인 이스라엘은 찍혀서 포도원 밖, 이방 세계로 내던져진 것이다.
"무화과나무"(이스라엘)는 도끼에 찍혀 "포도원(팔레스타인)밖에 내던졌으나 뿌리째 뽑힌 것은 아니었다.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을 뿐이지(눅3:7-9), 뿌리까지 잘리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의 비유"(마24:32-34)에서 볼 때 뿌리로부터 새 나무가 돋아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무화과, 곧 이스라엘 나라가 다시 일어나 "잎사귀를 내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멀지 않다는 표적이다. 이 경우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기 전에 잎이 먼저 나온다. 즉 이스라엘은 그들이 회개하기 전에 먼저 국가적으로 부활할 것이다.
지금 "시대의 표적"은 분명히 "무화과나무"의 부활을 가리키고 있다. "시온이즘"과 "반유대주의"에서 "잎사귀를 내는 모습"이 보인다. "시온이즘"이란 유대인들이 그들의 땅으로 다시 돌아가 유대 국가를 재건하고자 하는 염원을 말한다. "시온이즘"에는 "종교적", "경제적", "정치적"인 세 모습이 있다. "종교적인 모습"은 그들의 성전을 재건하여, 구약에 기록된 방법으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유대교 신앙의 부활을 바라는 것이다. "경제적"인 모습은 그들이 박해받고 있는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나라에서 벗어나 그들이 가장 신성시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땅에 완전히 정착하여 자기들이 심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편안히 살고 싶어하는 것이다. "정치적"인 모습은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고 있는 약속된 메시야의 통치 아래 그들의 왕국을 다시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반유대주의"란 유대인의 인구수와 관습이 자국에 위협이 되는 나라들이 유대인들을 몰아내고자 하는 운동을 말한다. 이것은 이집트의 속박이 부활된 것이다. 파라오는 이스라엘을 놓아주지 않으려고 했다. 거대한 토목 공사나 소떼를 치는 일 등 고된 노동에 그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들을 강하게 속박하여 그들의 힘이 커지는 것을 막으려고 심혈을 기울였다(출1:7-22).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겪은 것은 앞으로 일어날 예례미야 선지자가 말한 "야곱의 환난 때"의 그림자이다. 그 때가 되면 하나님은 그들의 목에서 "멍에"를 꺽으시고 그들을 맨 "줄"을 끊어주심으로서 이방인이 다시는 그들을 얽매지 못하게 될 것이다.(렘30:4-8)
이 두 가지 "표적", 시온이즘과 반유대주의는 점점 더 뚜렷해져서 봄에 나무에 싹이 나는 것처럼, 무화과나무에서 잎이 나려 하는데, 이것은 "가까이 온 여름" 즉 주님의 재림이 멀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마24:33-35). 이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특권을 상징한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좋은 열매 맺는 아름다운 "푸른 올리브나무"로 불리었으나 그의 우상 숭배로 인하여 그 가지가 꺾였다고 경고하고 있다(11:16-17).
로마서 11:17-27에는 "두 올리브나무"의 비유가 나온다.
"두 올리브나무"
하나는 참(Good)올리브 나무고, 또 하나는 돌(Wild)올리브 나무이다. 참올리브 나무는 이스라엘을 돌올리브 나무는 이방인을 의미한다. 참올리브나무의 뿌리는 세 갈래이다. 원 뿌리는 아브라함이며, 둘은 이삭과 야곱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또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말할기를 '너희 조상의 주 하나님, 즉,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느니라.' 하라. 이것이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이것이 모든 세대에게 줄 나의 기념이 되리라.}(출3:15) 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이와 같이 "삼중"으로 말씀하셨을까? 그것은 "삼위일쳬"이심을 알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게서는 아버지 하나님을, 이삭에세서는 그 아들 예수님을, 야곱을 인도한 것에서는 성령를 볼 수 있다.
참올리브 나무의 "세 갈래의 뿌리"는 거룩했다. 구별되어 있었으며, "뿌리"가 거룩하므로 "가지"도 그러했다. 그 다음 구절에는 가지 전체가 아니라, "얼마가" 꺾였다고 했다. 그 가지들은 이방인들이 접붙임을 받기 위하여 꺽인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믿지 아니함"으로 꺾였고, 이방인들이 접붙임을 받은 것은 꺾인 가지를 대신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원래 "돌올리브나무"의 가지였는데, 참올리브나무의 "뿌리"와 "기름진 진액"에 참여하기 위해서 접붙여진 것이다. 이것으로 "참올리브 나무"가 뿌리가 뽑혀 소멸된 것이 아니라, 단지 돌올리브 나무가지가 참올리브 나무가지 대신 접붙여진 것으로 참 올리브나무는 아직 살아 있어서 "참올리브 나무가지"와 "돌올리브 나무가지"에 모두 생명력을 공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접붙임을 받은 "돌올리브 나무가지"인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본래가지가 다시 접붙임을 받으려면 "돌올리브 나무가지"는 참올리브 나무에 계속 붙여 있지 못하고 꺽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은 함께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으로서 참올리브 나무 "뿌리"와 "기름진 진액"을 함께 받고 있다. 그리스도를 거부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을 저버린 유대인들은 믿음 없음으로 꺽인 가지들이다.
접붙이는 목적으로 살펴보면 "참올리브 나무"를 "돌올리브 나무"에 접붙여야 "돌올리브나무"의 열매가 좋아질 수 있다. 만약 "돌올리브 나무"를 "참올리브 나무"에 접붙이면 아무런 이득이 없다. 그리고 좋은 참올리브 나무마저 거칠어진다. 이것을 알고 있던 바울은 "참올리브 나무"에 "돌올리브 나무"를 접붙이는 것은 "본성을 거슬러"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볼 때 이방인을 유대교에 끌어들임은 유대교에 어울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방인보다 유대인이 더 순수한 가지이므로 유대교의 순수성을 위해서는 이방인, 즉 "돌올리브 나무가지"를 "참올리브 나무가지"에서 제하여 버리고 그 자리에 다시 "본래가지"를 접붙여야 한다(롬11:24) "이방인"이란 마태복음 13장의 천국 비유에 나온 것들은 현재의 "기독교계", 즉 입로만 교회라고 주장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 입에서 토해 내겠노라"하신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 뿐이었다(계3:16). 하나님은 "참올리브 나무"에서 "돌올리브 나무가지"를 제하여 버리듯이 그 교회를 제해 버리실 것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몸"이며 참된 교회인 "영적인 이스라엘"은 꺾여지지 않을 것이다.
"두 올리브나무"의 비유는 3가지로서 매우 중요한데 다음과 같은 순서대로 일어날것을 가리키고 있다.
1. {이는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차기까지는 이스라엘의 일부가 완고하게 된 것이라.}
"이방인의 충만함"까지는 "이방인들의 때"를 의미하지 않으며 단지 복음으로 구원받은 이방인들이 다 충만한 수가 되어 마지막 이방인들이 구원받아 이방인들을 향한 구원이 완성되는 때이다.
2. "접붙임을 받은 돌올리브나무 가지"가 꺽인 본래의 가지를 대신하지는 않는다. 돌올리브나무 가지는 "하나님의 선하심 안"에 계속 거하지 못할 것이므로 다시 꺾여 버릴 것이다.
3.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아주 잘라 버리시지"는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꺾인 가지를 다시 일으켜 접붙이실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입으로만 교회라고 하는 "돌올리브 나무가지"의 배교를 보고 있다. 곧 그들이 "잘려 버리면" 눈멀었던 이스라엘이 "본래 가지"로써 다시 접붙여질 것이다.
이 비유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불 속에 던져 버릴 마른 가지로 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들의 버려짐과 눈이 먼 것은 잠시뿐이고, 그들은 다시 이 땅의 나라들 사이에 그들의 지위를 얻게 될 것이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버림 받아 말라버린 채로 불에 타는 나무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잠시 동안 그들이 "눈먼 것"으로 인해 "잘려 던져진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이 땅의 민족들 가운데서 그들의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올리브나무"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특권을 상징한다. 또 주의할 만한 사실은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나무들로 상징되었는데 그들의 압제자인 이방 국가들은 "들짐승"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7:1-28).
30. 주님의 명절들 (THE FEAST OF THE LORD)
레위기 23장에는 주님의 "일곱가지 명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것들은 예언이며 미래에 대한 예표인데 어떤 부분은 이미 이루어졌으며 어떤 부분은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명절은 "다가올 것들의 그림자"이고 그리스도의 "몸"이 실체이다.(골 2:16,17) 그것은 주님께서 정하신 것이며,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하여 할 말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만일 사람들이 정해진 때에 예루살렘에 와서 이러한 명절들을 지키면 그들을 돌보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이 형식적이고 무관심하게 되자, 하나님은 "너희의 새 달들과 정한 명절들을 내 혼이 싫어하노라. 그것들은 내게 짐이요, 내가 지기에 피곤하노라."(사1:14)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것을 "주의 명절"라기 보다는 "유대인의 명절"라고 부르셨던 것이다.
주의 명절은 일곱 명절인데 안식일까지 포함하면 여덟 명절이 된다. 그러나 다른 명절들은 한해에 한 번씩 있는데 비해 안식일은 매주 있으므로 따로 두는 게 좋을 것이다. 또 안식일은 가정에서 지키나 다른 명절들은 예루살렘에서 지킨다.
"일곱 명절"는 4개와 3개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처음 부분은 "유월절", "무교절", "초곡절", "오순절"이며, 네 달이 지난 후 "나팔절", "속죄일", "장막절"이 있다. 가장 큰 세 명절은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인데 이는 첫째 달 14일부터 일곱째 달 22일까지에 걸쳐 있다.
처음의 네 명절은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현재의 시대와 "하늘에 속한" 주님의 백성인 교회와 연관되는 진리의 그림자이고 다음 세 명절은 "땅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에 대한 축복을 예표해 주고 있다.
1. 유 월 절 (Passover Feast)
유월절의 기원은 이집트에 있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구원받아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명절이다. 유월절은 그들에게 "달의 시작"과 국가의 탄생을 의미한다(출2:2). 그 달 10일에 흠 없는 일년된 어린 수양을 가족의 수만큼 취하여 그 달의 14일까지 간직하였다가 그 날 해질 무렵에 잡아 그 피를 우슬초에 적셔서 문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뿌렸다. 그리하여 그 날 밤 하나님이 이집트를 두루 다니시면서 사람이나 짐승이나 이집트의 첫 태생을 다 죽이실 때 문설주에 피가 발려 있는 집은 그 피를 보시고 그 집안에 있는 모든 첫 태생의 목숨을 살려 주셨다. 어린양의 고기는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고 어느 것도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아야 했다. 그리고 그 음식은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든 채 먹어야 했었다(출12:1-14).
이 유월절은 그들이 대대로 기념하고 지켜야 할 영원한 구례였다(출12:14). 유월절 양은
"하나님의 어린양"
인 예수님을 의미했다.
이집트에서 문설주 위에 뿌려진 어린양의 피가 그 집안에 거하는 사람들을 안전하게 한 것과 같이 우리도 갈보리에서 예수님의 피를 흘리진 것을 진심으로 마음에 믿으면 그 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다. 그 날밤에 그들에게 달의 시작이었듯이 한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그 순간은 거듭나는 순간이며 새 생명이 시작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되셨기 때문이다(고전5:7).
이스라엘 자손이 맨 처음 유월절을 지낸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 이집트에 전염병이 퍼졌던 때였다. 그 후로 매년 지키게 되었던 유월절은 이집트로부터 그들이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기쁨 명절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유월절을 지키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유월절을 대신하여 세우신 주의 만찬식으로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고 있다.
2. 무 교 절 (The Feast of Unleavened Bread)
무교절은 유월절 바로 다음날 시작되며 칠일간 계속되었다(레23:6-8). 양은 14일에 마지막인 해질 무렵에 잡아 유월절이 되고 무교절은 15일이 시작되는 일몰직후부터 시작된다. 이 유월절과 무교절은 간격이 없이 바로 시작된다. 유월절이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면 무교절은 신자의 생활을 의미한다. 그래서 구원과 신자의 거룩한 생활 사이에는 간격이 없이 시작된다. 무교절 기간인 칠일은 거듭난 이후 신자로서 살아야할 생활의 전 과정을 가리킨다.
성경에서 누룩은 죄의 상징이다. 그래서 누룩을 넣지 않은 빵으로 지켜야 했다(출13:7). 바울은 누룩이 "악"과 "가증함"을 나타낸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묵은 누룩은 떼어내 버리라. 그래야 너희가 누룩을 넣지 않은 새 반죽이 되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되셨으므로 우리가 그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이나 또 악하고 가증한 누룩으로도 말며, 오직 누룩 없는 성실과 진리의 빵을 가지고 지키자."(고전 5:7,8).
누룩 넣지 않은 빵을 먹는 명절의 상징적 교훈은 유월절 양인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을 이미 받았으므로 이전 세상의 누룩과 구원을 얻기 위한 종교 행위를 버리고 새로운 생활을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3. 초 곡 절 (The feast of Fist-Fruits)
유월절은 그 달의 14일이고 무교절은 그 다음날인데 초곡절은 그 주에 안식일 다음날이다. 하지만 초곡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야 지켜질 수 있었기 때문에 광야 시절에는 지켜지지 않았다. 초곡절의 제물은 추수한 곡물에 첫 이삭 한단이었다. 이를 제사장에게 가져가면 그는 주님 앞에 열납되도록 마구 흔든 다음에 번제와 소제와 전제 번제는 1년된 흠없는 어린 수양을 드렸다.
초곡절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예표였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다음날 아침"에 일으켜지셨는데 그분의 부활은 모든 죽은 자의 부활의 "첫 열매"라고 말했다. "밀알"로써(요12:34) 그분은 요셉의 무덤에 묻히셨고 부활함으로써 "첫 열매"가 되셨으며 그분께서 재림하실 때는,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 다음 열매가 된다(고전15:23).
제사장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에도 성전의 찢어진 휘장 앞에서 첫 곡식단을 흔들었지만 그것은 이미 무의미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실체가 왔기 때문에 그림자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비어있는 요셉의 무덤은 "첫 곡식단" (예수님)이 이미 수확되어 하늘의 성전 안에서 흔들어졌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성취하셨기 때문에 천년 왕국에서는 초곡절이 없을 것이다.
4. 오 순 절 (The Feast Of Pentecost)
초곡절 50일이 지나면 오순절이다. 두 명절 사이에 있는 일곱개의 안식을 포함하므로 이날은 "칠칠절"이라 불리었다. 이는 보리수확기인 초곡절에서 시작하여 밀을 거둬들임으로 끝났다. 첫날은 초곡절이며 마지막 날이 오순절이였는데 첫날과 마지막 날만이 지켜졌다. 주의 명절 도표를 보라
오순절에는 "새(New)곡식제물"을 하나님 앞에 드렸다. "새(New)"라고 말한 이유는 처음으로 수확한 곡식이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초곡절에는 곡식단을 흔들었으나 오순절에는 낟알을 갈아 밀가루로 만들어 거기에 누룩을 넣어 구운 두개의 빵을 드렸다. 두 덩이의 빵은 교회를 형성하는 두 부류의 사람인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타내며 누룩은 비록 구원은 받았다 해도 불완전한 신자의 결점과 죄를 상징한다.
일년되고 흠없는 어린양 일곱과 어린 수소 하나와 수양 둘의 번제물을 빵과 함께 드리고 소제와 번제를 함께 드리며 이것은 화제로서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었다. 또 수염소 하나로 속죄제를 드리며 일년된 어린 수양 둘을 화목제의 희생으로 드렸다. 제사장은 그 빵을 하나님 앞에 흔들었다. 이것은 곡식단이 아닌 빵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빵은 교회의 동질성을 나타낸다.
성령 침례의 상징이었던 오순절 명절은 주님의 제자들이 성령의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됨으로 역사 속에 실현되었다(고전12:13).
오순절과 나팔절의 사이
오순절과 나팔절 사이에 낀 4개월 동안에는 곡물과 포도의 수확물을 모았다. 그러므로 바쁜 이 기간에는 함께 모이지 않았다. 이 긴 기간은 성령이 교회를 이루는 구성원을 모으시는 "현재의 시대"를 상징하며 이 기간동안 이스라엘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것이다. 현재도 이 시기에 속한다. 머지 않아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와 이 "은혜의 시대"는 끝이 나고(롬11:25) 이스라엘 중에서 "은혜의 선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들"이(롬11:5) 예루살렘에서 나팔절을 지키기 위해 지구의 사방에서 돌아오게 될 것이다(마24:31).
5. 나팔절
나팔절은 7월달의 첫날에 지켜지며 7명절 가운데서 2번째 부분이 "시작"되는 명절이다. 나팔절은 안식일이며 새달이며 유대의 새해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이 달 10일에는 "속죄일"이 오고 "장막절"은 이 달 15일에 시작하며 역시 안식일인 22일에 끝난다. 나팔절은 나팔절을 부는 것으로 선포된다. 광야를 방황하는 동안 속죄금으로 만든 두개의 은 나팔은 "회중을 소집"하거나 "진지를 진행할 때" 불었다(신10:1-10).
오순절후 4개월이 지나는 즉시 나팔절이 온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두 그 "간격"이 지금의 "은혜 시대"를 상징하며, 우리는 이 은혜가 끝날 무렵 두 가지 일이 발생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교회가 휴거된다는 것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의 본토로 돌아가 모이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가 휴거될 때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친히 내려오시리니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4:16).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가 모두 변화될 것이니
마지막 나팔에
눈깜짝하는 순간에 그러하리라.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일으켜지며,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15:51-52).
이 "마지막 나팔"은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개의 나팔" 중에 마지막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마지막 주"가 시작되기 "전에" 휴거되기 때문이다. 마지막 나팔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사용하던 두 나팔 중의 마지막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회중을 불러모았던 첫 나팔은 성도들을 그들의 무덤에서 "불러모으는" 신호가 될 것이며 진을 진행시켰던 두번째 또는 "마지막" 나팔은 "진을 떠나기 위한 것"으로 공중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무덤에서 일어나 성도들과 땅에 살고 있던 살던 성도들이 변화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신호가 될 것이다.
우리가 마태복음24:31절을 읽어보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실 때 그는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며 천사들은 하늘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그 택하신 자들을 이스라엘(교회가 아님)을 사방에서 모은다 여기서 우리는 "나팔절"이 교회의 휴거와 그리스도의 재림시 이스라엘을 불러모으는 것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유월절에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오순절에 성령이 오셨으며 예수님이 공중에 오시는 나팔절에 "휴거"가 일어나고 7년후 역시 같은 명절에 예수님이 "재림"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6. 속 죄 일 (Day of Atonement)
"속죄일"은 해마다 이스라엘의 죄를 깨끗이 용서하는 날이었다. 그날 지켜야하는 의식은 레위기16:1-34절에 나타나 있다. 이 날의 예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되었다. 그는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을 위한 "속죄제물"이 아닌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속죄물"로 드렸다.(히19:12-14) 그러나 속죄일이 그리스도의 재림이 성취되는 나팔절과 천년왕국의 상징인 "장막절" 사이에 있다는 사실은 그 두 사건에 어떤 상징적 의미가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즉 이것은 "그 날에
다윗의 집
과 예루살렘의 거민들에게 죄와 불결을 씻는 샘이 열리리라."(스가랴 13:1)에서의 그 날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회개하지 않은 체 그들의 땅으로 돌아오며, 그후에는 회개하고 하나님께 마음을 돌이키는 민족적인 속죄의 날이 있을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스가랴 12:10-14).
7. 장 막 절 (The Feast of Tabernacles)
이 명절은 7명절 중 마지막 것이다. 이는 수확이 끝날 때 지키는 추수 감사제로서 7일 동안 계속된다(신16:13). 이 기간 동안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나 시냇가의 버드나무로 초막을 지어 거주했다., 이것은 엘림의 종려나무와 바빌론의 버드나무를 상기시키는 것이다(시137:1-9). 변화산에서 그리스도가 변화하실 때 베드로는 기뻐하면서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원하시면 여기에 장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겠나이다."(마17:4) 라고 말했지만 이 명절의 원래의 의미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베드로의 바램은 하늘에 있던 성도들과 땅위의 사람들이 함께 이 땅에서 거하는 천년왕국 때에 이루질 것이다. 장막절은 이스라엘이 "천년동안 안식하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안식일은 "일주일"의 "일곱번째 날"로서 하루동안 쉬는데, 이는 "육천년"의 역사가 지난 후에
"천년의 안식"
이 있올 것을 나타낸다 주님의 만찬식이 주님의 십자가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념하는 것이듯이 장막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로부터 빠져나온 것과 앞으로 다가올 천년안식 세계를 기념하는 것이다.
장막절은 안식일에 시작하여 칠일동안 계속되며 다음 안식일이 이어진다(레23:39). 이 "팔일"째의 안식일은 천년왕국 이후에 펼쳐질 새하늘과 새땅을 가리키며,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장을 보면 "팔일째의 시대"는 "충만한 때"가 될 것이다.
31. 제사들 (THE OFFERINGS)
레위기는 레위 자손, 곧 제사장의 의무에 관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레위기라 부른다.
이것은 희생제에 관한 책이다.
가장 중요한 단어는 "속죄(Atonement)"이다(레16:34). 이 책은 B.C 1490년 새로 세워진 성막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모세가 받아 쓴 것인데, 마지막 세 장은 시내산에서 받은 것이다. 말씀을 주시는데 약 30일이 걸렸으며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레위기 전반에 걸쳐 50번 이상 강조되어 있다.
오늘날 어떤 비평가들은 레위기는 모세가 쓴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천년 후 바빌론 포로생활 이후에 제사장들이 쓴 위조로서, 그들은 자기들의 직책을 확대 강조하고 자기들도 모세에게 주어졌던 것과 같은 권위를 받고 싶어한 나머지 레위기를 편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다. 포로 시대의 제사장들은 자신들이 방금 쓴 책을 어떻게 일 천년 전부터 있었던 책이라고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도 레위기가 모세에 의하여 쓰여졌다고 증거하신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모세가 쓰기 않았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실수하셨고 거짓말하신 죄가 있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렇게 믿을 수 없다. 오직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절대 무오하다는 것을 믿는다.
오늘날 레위기는 거의 읽히지 않으며, 많은 사람들은 레위기가 시대에 떨어진 것으로서 종교 고서 수집가의 책꽂이에나 어울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설명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레위기를 공부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의 직분이나 사역을 이해할 수 없다. 또한 레위기의 중요성은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본토로 다시 돌아와 에스겔이 본 성전을 다시 세우고 모세의 예배 의식을 다시 이해할 때 제사장들의 준수 사항들이 기록되어 있다는 데에도 있다. 레위기는 그 외에도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 하실 일에 대하여 밝혀 주고 있다. 그리고 종교적인 의식뿐 아니라.
민법적인 규례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결혼과 이혼, 부자와 종, 사회악, 부의 축적, 사형, 안식일 준수, 전염병에 대한 격리법 등이 그것이다.
만약 오늘날의 정치가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적합한 공중위생법이나 사회복지법을 만들고 싶어한다면 레위기에 나타난 "민법"을 공부하면 된다.
레위기는 아래와 같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희생제에 의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1장-16장)
2. 성화와 성별에 의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
(레위기17장-27장)
이책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 . .
"어떻게 죄를 없애는가" 이다.
레위기의 가장 큰 두 계명은 "거룩"과 "정결"이다. 그리고 "피"라는 말은 87번이나 나온다.
제 사
성경에서 제사는 5가지가 나온다.
1. 번제희생
2. 음식제사
3. 화목제
4. 속죄제
5. 속건제
이들 희생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처음 셋은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제사"
마지막 두 가지는
"속죄하기 위한 제사."
I. 번제희생
(레위기1:1-17)
"번제"희생을 드리는 자의 능력에 따라 세 등급이 있다. 예물을 드리는 자가 부유하면 소를, 보통이면 양이나 염소를, 가난할 경우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를 희생으로 가져왔다.
오직 깨끗한 동물이나 새만 예물로 드려졌다. 다른 것을 잡아먹거나, 썩거나 죽은 고기를 먹고 자란 것은, 거룩한 희생(그리스도)을 나타내는 예물로서 부적당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먹지 못하도록 금지된 것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려서는 안되었다.
그리고 깨끗한 동물 중에서도 집에서 기르는 동물만이 희생물이 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집에서 기르는 동물은 길들여져서 쉽게 따라오며 이는 도살장으로 끌려갔던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내 주기 때문이다(사53:7).
소나 양처럼 집에서 기르는 동물이어야 할 뿐 아니라. 거의 힘없는 수컷이어야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것 중 가장 훌륭한 것을 드려야 한다고 배웠는데 이는 개인적 욕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흠없는 동물만이 흠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상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라키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의 죄는 그들이 상처나고 절고 병든 것을 하나님 앞에 가져왔다는 것이다(말1:8).
희생제를 드리는 자가 그의 제물을 희막에 가져오면 제사장은 그를 데리고 성막문 맞은 편의 번제단 북쪽으로 제물을 가져갔다. 거기서 희생제를 드리는 자는 그의 손을 번제희생물에 머리에 그의 손을 얹는데 이는 번제물과 그가 동일하다는 것을 상징했다. 또한 그 행동은 번제희생물(동물)이 당하는 죽음은 자신이 받아야 하는 것이라는 고백이기도 했다.
만약 번제희생물이 소나 양이면 제물을 드리는 자가 그 자신의 손으로 번제물을 죽이고 새인 경우는 제사장이 그 머리를 비틀고 꺾었다.
제물을 드리는 자가 소나, 염소 같은 번제물을 죽이면 제사장은 흘러나오는 피를 큰그릇에 받아 번제단 주위에 뿌렸다.
동물의 가죽은 벗겨서 제사장의 일에 대한 댓가로 그에게 주게 되어 있었다. 제물은 몸은 관절이나 조각조각으로 자르고 다리와 내장은 물로 씻어서 그 전부를 단 위에 놓고 완전히 불살랐다. 그러므로 이것을 "온전한 번제희생" 이라고 했다.
제물을 불사르기 전에는 모든 부분이 흠 없이 완전한 가를 알아보기 위해 잘게 잘랐다.
희생제물이 새일 경우는 희생제를 드리는 자는 그것을 제사장에게 가져가기만 하면 되었다. 제사장은 그것을 받아 머리를 비틀어 끊어서 피는 제단 곁에다 짜냈다. 그 다음 날개 사이를 두 부분으로 찢되 완전히 나뉘어지지 않도록 하고 모이 주머니와 내장은 제하여 제단 동편 에 버리는 곳에 버리고 다음 새의 몸통은 불살랐다.
이 번제의 상징적 의미는 무었인가? "속죄제"가 따로 있으니, 이것이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제물이 아니란 것은 분명하다.
그 의미는 간단하다.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는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을 바치는 것
즉 "헌신"을 의미한다. 이 목적은 바울 서신인 로마서에 아름답게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이것이 너희가 드릴 합당한 예배니라}(롬12:1).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람이 예배를 드릴려고 할 때)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기를 원하신다. 그 분은 우리가 봉사하기 적합치 못한 상태이거나, 죽어 있을 때에 우리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힘차게 살아 있고, 활력있는 생명력으로 넘쳐 있을 때 우리를 원하신다.
번제희생은 그리스도의 상징이었다. 이에 대해서 에베소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시어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제물과 희생으로 드린 것같이 너희도 사랑 안에서 행하라}(엡5:2).
이 구절은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을 번제물로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을 보여 준다.
"십자가라는 제단"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번제희생이 되셨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번제희생으로 받아들일 때 그와 동일시되며,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것을 고백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의 뜻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순종한 헌신의 모형이다. 그에 대해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네 안에서 내가 기뻐하노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해서 그분은 번재희생물로서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번제희생이 되셨다.
각각의 사람이 제각기 다른 시간에 자신들의 제물을 하나님께 가져오는 반면 전 이스라엘의 회중을 위해 "날마다" 드리는 번제가 있었다(출29:42).
양 두마리를 드렸는데 한 마리는 아침 희생물로 다른 한마리는 저녁 희생물로 드렸다.
아침에 제사장은 평상복을 벗고 세마포 옷을 입은 후 밤새 단 위에서 탄 불을 검사하고 재를 단 곁에 치워 놓았다. 그 다음 세마포를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후 그 재를 진영 밖의 정결한 곳에 갖다 놓았다. 이것을 오후에도 반복했는데 이는 매일 드리는 제사였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백성을 위하여 계속 드리는 번제의 그림자였다. 이는 또한 믿는 사람이 끊임없이 자신을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II. 음식제사
레위기 2:1-16
음식제사에는 다음 세 종류가 있다.
1. 굽지 않은 고운 가루
2. 철판에 구운 음식
3. 화덕에 구운 음식
음식제사에는 기름을 섞어 소금을 치며 유향을 뿌리지만 누룩이나 꿀을 넣어서는 안된다.
음식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음식제물"을 제사장에게 가져가면 그는 음식제물 "한 줌"을 취하여 번제단 위의 제물 위에 던졌다. 왜냐하면 "음식제물"은 결코 홀로 드려질 수 없으며 항상 번제와 함께 드리기 때문이었다.
음식제사를 드리고 난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었다. 음식제물은 가져온 사람이 그것을 먹어서는 안되었으며 음식제물을 준비할 때 "넣어야 할 것"과 "금지된 것"에 주의해야 했다. "기름"과 "소금", "유향"은 사용되지만 "누룩"과 "꿀"은 넣어서는 안되었다.
올리브 기름은 그 시대 사람의 대부분이 음식에 사용했는데 이 기름이 성경에는 생명의 힘을 주는 성령으로 상징된다.
소금은 썩지 않게 하는 것으로써 부패를 막아주며, 음식을 보관하는데 사용되었다. 유향은 나무에서 스며나온 수지질의 나무진을 말려서 얇게 두르려 불에 던지면 향기로운 냄새를 발산한다. 유향은 번제 희생물과 섞지 않고, 향기가 풍기게 하기 위하여 제단 위의 제물에 한 줌을 뿌려 태웠다.
효소인 누룩은 사용이 금지되었고 꿀은 열에 가하면 제물에서 좋지 않은 냄새가 나므로 금지되어 있었다.
"음식제사"의 의미는 무었인가?
음식제물은 모든 곡식 가운데 가장 귀하게 여기는 밀로써,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으로 드렸다. 밀은 잡초처럼 아무데서나 자라지 않고 힘들여 준비한 땅에서만 자란다. 즉 밀은 사람의 수고와 희생의 결실을 뜻하는 것이다. 밀은 올리브 기름처럼 빈부에 상관없이 누구나 먹는 음식의 대명사였다.
하지만 밀은 낟알로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갈아서 체로 걸러 고운 가루로 드렸다. 그리고 음식제물을 가져온 자는 철판을 가지고 밀로 빵을 만들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했으며, 갈거나 구울 수 없는 경우에는 볶은 형태라도 드려야 했다.
음식제물은 음식은 가장 위대한 음식제물인 그리스도를 얼마나 아름답게 예시해 주고 있는가!
그리스도는 갈보리에서 갈아진 밀로서, 성령의 기름이 부어지고 소금으로 썩지 않게 되었으며 거룩한 생명의 유향이 뿌려진 음식제물이 되셨다. 그에게는 썩거나 누룩이나, 좋지 않은 냄새를 나게 하는 꿀이 없었으며 음식제물로 바쳐질 때 생명의 빵이 되셨다.
III. 화 목 제
레위기 3:1-17
화목제물은 소나 양의 두 종류가 있는데 번제물과 다른 점은 수컷이나 암컷이나 모두 바칠 수 있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흠이 없어야 했다.
제물을 드리려는 사람은 흠없는 소나 양, 염소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성막 안의 번제단으로 가져왔다. 그곳 하나님 앞에서 그가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여 잡으면 제사장은 피를 큰그릇에 받아 제단 사방에 뿌렸다.
그 다음 동물의 뼈를 갈라. 기름과 콩팥, 그리고 옆구리에 붙은 콩팥과 그 위에 있는 기름과 간위의 꺼플을 떼서 제단 위에 불살랐다. 나머지 부분은 제사장과 제물을 바친자와 그의 가족과 친구가 먹었다.
가슴부분은 하나님 앞에서 이리저리 흔든 후 대제사장과 그의 아들들에게 돌아갔으며 오른쪽 어깨 부분은 하나님 앞에서 위 아래로 흔든 후 제사장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제물의 나머지 부분은 바친 자의 것이 되었다.
화목제에는 두 종류가 있었는데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와 서원이나 자원의 희생제가 그것이었다(레7:11-12).
감사함으로 드리는 예물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 먹었으며, 서원의 제물은 다음날까지 보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셋째 날까지 남았으면 태워야 했다.
만약 삼일에 그 고기를 먹으면 그 제사는 열납되지 않았으며 예물을 가져온 자나 그것을 먹은 자는 하나님 앞에 가증한 죄를 범하게 되어 그 죄악의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또 그 고기가 부정한 물건에 닿았으면 먹지 않았는데 어느 누구라도 부정한 제물을 먹으면 그 사람은 그의 백성으로부터 끊어졌다.
예물을 바치는 자는 그 예물을 혼자 먹어서는 안 되었다. 그는 그의 자녀들과 노비와 성안의 레위인을 초대하여 그들과 함께 잔치를 열 특권을 가졌다. 그러나 그 잔치는 다른 곳이 아닌 성막 안 "하나님의 앞"에서만 해야 했다
화목제물은 화해시키기 위한 제물이었다. 그러나 그 제물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만들었으므로 그를 화해시키기 위함이 아니고 그가 하나님과 화해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화목제물이시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가 즐거이 먹을 수 있는 제물이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또 그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안에 생명이 없느니라."(요6:53,마26:26-29,고전11:23-26)
우리는 그의 찢긴 몸과 흘린 피를 먹는 주님의 만찬식에서 화목제물의 실체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완전한 화목을 이루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IV. 속죄제
레위기4:1-35
이제 두번째 종류에 해당되는 제물을 보면, 첫번째 부류의 번제희생물, 음식제물, 화목제물은 모두 자진하여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제물이었다. 그러나 두번째 종류에 속하는 속죄제나 속건제는 "죄" 때문에 드리는 필수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제물은 되지 못하였다.
일년에 한번 있는
"속 죄 일"
(Day of Atonement)
에는 대제사장이 자기 자신의 죄와 모든 백성의 죄를 위해 속죄제를 드렸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려는 속죄제는 1년 동안 무지로 인하여 지은 죄를 용서함 받기 위한 제사이다.
이 제사는 네 부류의 사람들을 위해 드려졌는데 이는 곧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 온 회중, 족장, 그리고 회중의 각 개인이다.
각각의 경우 제물로 바치는 희생물은 흠이 없는 것이어야 했으며, 회중의 성막 문, 즉 주님 앞에서 잡아야 했다.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였으면, 그는 수송아지를 끌어다가 그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잡아야 했다.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범죄하였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끌어왔고 회중의 대표격인 장로들이 그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한 후 잡았다. 만일 백성 중 하나가 범죄하였으면 그는 암 염소를 끌고 와서 머리에 안수한 후 잡았다.
이상 네 종류의 제물이 있었는데, 이들의 차이점은 그 제물의 육체를 처리하는 방법에 있었다.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과 온 회중을 위해 잡은 희생의 피는 제사장이 가지고 성막에 들어가서 손가락에 피를 적셔 성소의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고, 다음에는 회막 안 향단 뿔을 발랐다. 그리고 나머지 피는 모두 가지고 나와 성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았다.
그러나 족장이나 평민 중 하나의 속죄제물의 피는 제사장이 손가락에 적셔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제단 밑에 쏟았다.
이제 그 희생물의 육체를 처리하는 방법을 보자. 제사장과 온 회중의 속죄제물인 경우, 제사장은 그 가죽을 벗기고,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과 엉덩이살은 모두 번제단 위에 불살랐다. 그리고 그 수송아지 고기의 나머지 부분과 가죽, 머리와 다리, 내장은 진영의 바깥에 있는 재 버리는 곳에 가져다가 불살랐다.
그러나 치리자나 백성의 속죄재물인 경우, 기름은 모두 제거하여 단 위에서 불사르고 제물의 고기는 회중의 성막 뜰에서 제사장들이 삶아 먹었다. 그 고기는 거룩하게 여겨졌고 그 피가 어떤 옷이든지 묻으면 묻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빨아야 했으며 그 고기를 질그릇에 삶았으면 그 질그릇을 깨뜨려야 했고, 놋솥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문질러서 닦고 물에 헹구어야 했다(레6:24-29).
속죄제의 두가지 특징은 "피"를 성막 안으로 가져와서 "휘장 앞"에서 뿌리는 것과 그 "고기"를 진영 밖으로 옮긴다는 것이다.
이 두가지 특징에서 우리는 속죄제의 의미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성 밖 갈보리 언덕에서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자신의 피를 흘리신 주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V. 속 건 제
레위기 5:1-6:7
"속죄제"와 "속건제"의 다른 점은 전자가 하나님께 범한 "죄"를 다루는 반면, 후자는 사람이나 거룩한 물건에 대해 범한 죄를 다루는 것이다. 속건제물을 드려야 할 경우는 맹세를 하고 지키지 않았을 경우, 부정한 물건을 만졌을 경우, 무지중에 주님의 거룩한 물건에 죄를 범했을 경우, 남이 잃은 물건을 찾고도 사실을 부인하는 경우 등이다.
속건죄물을 드리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어린 암양이나 암소요. 둘째는 산비둘기 두마리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한 마리는 속죄제물을 삼고 다른 한 마리는 번제물을 삼았다. 세째는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였는데 그것은 속죄제물인 연고로 기름을 붓지 않고 유향도 넣지 않았다.
만일 누구든지 거룩한 물건이나, 남의 재산에 대하여 범죄하였을 때는 그 물건의 5분의 1일 더하여 배상해야 했다. 속건제의 뜻은 다른 누구에게든지 해를 입혔을 경우, 할 수 있는 한 필요한 모든 보상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32. 피라밋의 경륜적 가르침
이집트 나일강의 서쪽편 한가운데, 카이로와 마주보고 있는 고대 맴피스(고대 이집트의 수도)에는 "세계 7대 불가시의" 중에 하나인 "거대한 피라미드"이 있다. 이집트의 여러 피라미드 중에서 "대피라미드"는 다른 것들보다 활씬 크며 다른 것들의 모형이 된다. 대피라미드는 다른 피라미드처럼 무덤으로써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놀라운 수학적, 천문학적인 정보와 성경을 기초로 한 것으로 만들어 진 것이로써, 이것을 만든 건축가들은 특별한 신적 지혜를 부여받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대피라미드는 흰 석회암으로 단단하게 덥혀져 있으며, 겉 표면은 평탄하여 오를 수 없으며,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건물처럼 보인다. 쌓여진 돌들을 한 계단식 정상을 향해 올라가면 꼭대기에 돌이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될것이다. 마치 위가 잘라져 버린 것과 같을 것이다. A.D.825년 이전까지 대피라미드 내부는 비밀이였으며, 이곳의 출입구의 가운데는 출입구의 크기에 치수가 꼭맞는 큰돌로 막혀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위치를 알아 내지 못했다.
그 당시에 칼리프(마호메트의 후계자로서 회교 국가의 교주겸 국왕)였던 알리맘몬은 카이로에 거주하기 위해 왔다. 그는 여기에서 대피라미드에 관해 떠도는 수많은 전설 같은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다. 피라미드안에는 엄청난 보화가 가득할 것이라는 소문 때문에 그는 대피라미드를 발굴하기로 결심했다. 전설에 따르면 대피라미드의 입구는 북쪽면이라고 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북쪽면 중앙에 입구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파들어갔다. 알라마마는 인부들에게 북쪽면 정중앙을 파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입구는 천문학적인 이유로 정중앙이 아닌 동쪽으로 24피트 위에 있었다. 일꾼들은 땅위 30피트 높이에서 100피트 가량을 파들어갔지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낙담해서 발굴을 포기하려는 순간 안에서부터 그리 멀지 않는 곳에 돌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 일이 다시 일꾼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었다. 이 돌은 분명히 위쪽 통로를 막고 있었던 돌로서 위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그 통로의 바닥에서 아름답게 조각된 다양한 돌들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위에서 떨어진 것이 분명한 이 돌이 위로부터 내려오는 통로를 막고 있었다. 거대한 화강암으로 된 이 돌을 제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이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서 일꾼들은 갖은 애를 쓰다가 격자문으로 쓰이는 통로문 곁의 약한 돌을 부수고 일꾼들은 피라미드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피라미드 안에는 온통 보화로 가득차 있다는 메스꺼운 소문은 모두 거짓말임이 드러났다. 그 안에는 빈 관을 제외하고는 어떤 가구도, 보화도 없었으며, 벽화나 이 피랏밋이 누구의 것인지를 나타내는 벽화조차도 없었던 것이다.
약 1000여년 동안 이 대피라미드는 어떻게 축조되었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비밀로 남아있었다. 1865년에 스코틀랜드의 왕실 천문학자 였던 피애즈 스미스(Piazzi Smyth) 박사는 그의 부인과 함꼐 이 대피라미드의 외부와 내부의 크기를 측량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이 대피라미드는 북위 30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삼각형의 끝부분이 향하고 있는 정확하게 4방향을 가르고 있음도 알았다. 피라미드의 건평은 10에이커이며 400평방미터에 해당하며 지구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도 밝혀 냈다.
대피라미드의 모습
대피라미드는 견고한 암반석위에 지어져있다. 그 암반석은 피라미드 둘레선으로 수평으로 뭍혀 있는 거대한 바위층이다. 척도에 사용된 큐빗은 히브리의 도량형인데 25.025인치이다. 피라미드의 바닥의 둘레선은 365.2422큐빗으로 이는 태양력으로 정확하게 일년을 나타낸다. 이 수치는 매 4년마다 생기는 하루의 공백과 윤년까지도 정확하게 포함하는 수학적 계산이다. 경사지게 되어있는 피라미드의 높이는 232.52큐빗이다. 왜 하필이면 이런 높이로 지었을까? 이는 바닥의 둘레선과 축면선을 나누어 보면 원주율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365.242÷232.52=3.141 592). 이것은 피라미드가 고도로 정확한 기하학적 계산에 의해서 지어졌음을 알게 해 준다. 피라미드 평면의 길이는(365.2422×4=14609.68)는 피라미드의 높이의 두배와 원주율(3.1416)을 곱한 것(232.52×2×3.1416=14609.68)과 일치한다. 도표 B를 보면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측면 경사각은 10:9로 되어있다. 즉, 매 10피트를 올라가면 고도는 9피트씩 증가하는 것이다. 피라미드의 고도에 따라서 10피트씩 계속 곱해나가면 91,840,000이란 숫자가 나오는데 이는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miles)이다.
피라미드는 또한 별들의 주기인 항성년(sidereal)과 매년 봄 가을에 있는 춘분과 추분의 주야평분을 정확하게 나타내준다. 별들은 해마다 뜨고 지는 시각이 약간씩 늦춰졌다가 빨라지는데 해마다 50초 정도의 차이가 생긴다. 항성년과 주야펑분선이 일치하는데는 25,827년이 걸리며, 이것이 한 주기이다. 피라미드의 바닥의 둘레를 재어서 합해보면 25,827인치와 일치함을알 수 있다.
1839년 죤 허첼(John Herschell)경은 아주 좁고 길다란 작은 통로 하나를 발견했는데(도표 C에서B), 이 통로의 연장선을 그려보면 북극성과 일치하며, 피라미드의 건축 연도를 나타낸다고 알아내었다. 그 별은 "알파 드래곤(Alpha Draconis)"였음이 밝혀졌는데 B.C 2170년전부터 내려오던 북극성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이것으로써 건축년도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옛날에 사람들은 오랫동안 태양계는 고정되어 있고 다른 행성들은 회전한다고 주기적으로 운행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태양계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태양계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수많은 츤하계중의 일부임도 알고 있다. 중요한 점은 묘성의 중앙 별인 "황소별(Alycyone)"의 둘레를 회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피라미드의 향점이 가리키고 있는 그 별이 바로 B.C 2170년에 피라미드의 정점을 가리키던 이름이다. 이 두별을 연관해서 생각해볼 때 25827년마다 돌아오는, 즉 "춘분점 세차"가 다시 일어날 때까지 같은 이름으로 불려질 수는 없을 것이다.
피라미드를 건축할 당시인 B.C 2170년에 북극성은 피라미드 북면의 동편에 중앙에 떠 있는 작은 별로 비쳤을 것이다. 이 때문에 알리맘몬과 그의 일꾼들이 피라미드의 입구를 찾는데 실패했던 것이다.
피라미드를 내려가는 통로를 발견한 후 그리로 계속해서 내려가보면 바닥의 단단한 암반층을 100피트이상 뚫고 만들어 놓은 방이 있다. (도표 C에서 H를 보시오). 그 방은 완전히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마치 공사를 하다가 중단한 것처럼 벽면이 거칠고, 반대편으로 나아가는 길을 만들려다가 중단한 흔적이 있다.
입구는 높이가 4피트가 채 못되며, 너비는 3-5피트 정도이다.
이 통로를 통해 내려가 보면 바닥 부위에서 올라가는 옆 통로가 같은 크기로 나 있다. 이 통로는 1542인치이며 큰방(Grand Gallery)으로 이어진다. (C 도표에서 D를 참조하라) 이 큰 방은 1882인치의 길이에 28피트의 톺이6피트의 너비를 자랑하며 천정에는 또 작은 통로가 있다.
큰 방으로 들어오는 입구의 서쪽으로는 우물로 인도하는 거친 통로가 나있다(W). 가장 밑바닥에 있는 방(H)에 가기 위해서 곡선으로 된 통로를 만들었다. 이 우물의중앙에는 암반을 부숴만든 땅꿀같은 모양이 있다(S).
이 우물 입구에는 방(Q)으로 인도하는 수평으로 된 통로가 하나 있는데(J) 여왕의 방이라고 불린다. 이 방은 205인치의 너비, 226인치의 길이로 삼각형의 천정으로 되어 있는데 피라미드의 정점에서 한 중앙을 관통하는 바로 그 점에 위치하고 있다.
큰 방의 경사진 위쪽 끝부분에는 3피트 높이의 수직으로 올라간(E) 작은 통로(T)가 있으며 앞쪽으로 또 작은 방이 만들어 져 있다(M). 그리고 옆으로 통로가 계속해서 뻗어 있는데(P), 그 옆에는 왕의 방이라고 불리는 두배정도로 더 큰 방이 하나있다(K). 이 방은 붉은 화강암으로 아주 깨끗하게 만들어져 있다. 이 방의 크기는 길이 412인치, 너비 206인치, 높이 203인치이다. 이 방에는 피라미드에서 유일하게 한점의 가구가 들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돌로된 관이다(C). 이 관은 단단한 화강암으로 만들어 져 있으며 안과 밖이 아주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다. 4각형으로 된 관은 크기로 보아서 피라미드가 만들어 진 이후로 한 차례도 외부로 가지고 나오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왕의 방에는 외부로 통하는 두 개의 환기 통로가 만들어져 있다(VV). 또 한 그방은 일년내내 화씨 68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왕의 방의 천정은 9개의 거대한 바위로 만들어져서 사방의 벽을 지탱하도록 설계되었으며, 그 위에는 5개의 속이 텅빈 공간을 만들어 놓았으며(G), 그 위에는 거대한 돌로 지붕을 만들어 놓았다. 이는 위로부터 오는 거대한 압력을 견딜 수 있도록 무별로 잘 배열해 놓았다. 왕의 방과 여왕의 방은 다른 피라미드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그림을 참조할 것). 왜냐하면 다른 피라미드는 무덤용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 피라미드를 축조한 사람들은 대피라미드 속에 이런 방과 통로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못했기 때문에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대피라미드 속에는 왜 이런 방과 통로가 필요했을까? 보물을 넣은 창고나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는 무덤으로 만든 것이라면 다른 피라미드와 마찬가지로 유물이나 벽화, 장식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전혀 그런 것이 없다. 대피라미드는 이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고학자들은 여러 가지 추측과 가설을 내세우지만 증거나 설득력이 전혀 없다. 대피라미드는 기념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이 피라미드는 외계의 존재들이 와서 이 땅에 지어놓고 가버린 것이다. 이 피라미드는 수학적, 천문학적, 역사적, 성경적 진리를 완벽하게 보여주는 유일한 건축물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 사실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사야서 19:19-20절은 많은 주석가들이 설명하지 못한 구절이다.
{그 날에 이집트 땅 한가운데에 주를 위한 한 제단이 있을 것이요, 그 경계에는 주를 위한 한 기둥이 있으리라. 그것이 이집트 땅에서 만군의 주를 위한 표적과 증거가 되리니, 이는 그들이 압제자로 인하여 주께 부르짖을 것임이라.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한 구주, 곧 위대한 이를 보내리니, 그가 그들을 건져내리라}.
"그 날에"란 말씀을 통해 이 성경 구절은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임을 알 수 있다. "그 날에"란 표현은 21,23,24절에서 3번이나 반복적으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이 날은 곧 "주의 날"을 언급하는 것으로 다가올 미래이다.
이 예언의 말씀은 팔레스타인 땅이 아닌 이집트 땅의 중앙에 "제단"과 "기둥"이 있을 것임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으며, 또한 그것이 경계가 되며, 표적과 증거가 됨을 말씀하고 있다. "제단"과 "기둥"은 다른 물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한 가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제단은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사자(Lion)"란 뜻으로 가깝게는 스핑크스(Sphinx)나 대피라미드의 위용과 거대함이 마치 사자와 같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기둥"의 묘사는 대피라미드의 크기나 오벨리스크와 같은 것을 연상케 해 준다.
대피라미드의 위치는 "제단과 기둥"의 위치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대피라미드는 이집트의 한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거기에서부터 모든 경계가 정해진다. 1868년 미국무부의 조사원이었던 H. Mitchell 교수는 "수에즈 운하의 진행에 관한 보고서"를 쓰기 위해 이집트로 왔다. 그는 나일의 삼각주를 형성하는 해변을 그리다가 특이한 만곡의 모습에 부딪쳤다. 그는 정확한 지도를 가지고 해변의 주요 지점들을 짚어 나갔다. 그러자 그 지형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지점들이 대피라미드를 한 가운데 두고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하였다. 도표 D를 참고하시오. 성경적 지식이 전혀 없다해도 대피라미드는 이집트의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대피라미드는 이집트 상부와 이집트 하부의 경계를 이루는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선지자 이사야가 선포한 "제단과 기둥"은 이 마지막 세대에 주께 표적과 증거가 된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입어 대피라미드가 우리에게 주는 "증거"가 무엇인지를 풀도록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대피라미드와 그리스도
욥기에 보면 지구가 건물에 비유된 특이한 구절이 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물으신 말씀중에
{내가 이 세상의 기초들을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게 명철이 있다면 분명히 밝히라. 누가 그 치수를 재었는지, 네가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척량줄을 띄웠느냐?. 그 기초들은 무엇 위에다 고정시켰으며
"모퉁잇-돌"
은 누가 놓았느냐? 언제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했으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모두 기뻐서 소리쳤느냐?}(욥38:4-7).
우리는 지구의 기초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지구는 욥이 26:7에서 알고 있었듯이 허공에 메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하고 있는 건물은 욥이 이미 잘알고 있던 건물임에 틀림없다. 네 개의 모퉁이 돌이 있고, 머릿돌이 있으며 머릿돌과 모퉁이 돌이 같은 건물이 이 지상에서 피라미드외에 무엇이 있는가? 윗 구절에서 "기초들"이 모퉁이돌임은 너무나 자명하다. "모퉁이돌"과 "머릿돌"이 다 놓여지고 건물이 완성되었을 때 대피라미드의 건축자들이었던 천사들인 "하나님의 아들들"이 기뻐서 소리친 것이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대피라미드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영적인 건물"로써 그리스도께서 "머릿돌"이 되신 건물이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졌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귀중한 모퉁잇돌"(chief corner-stone)
이 되셨고 그 분 안에서 건물 전체가 함께 맞추어져 주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가며 또한 그 분 안에서 너희도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처"
로 함께 지어져 가고 있는 것이니라}(엡2:21-22).
이 세상에 "머릿돌"과 "모퉁이돌"이 같은 건물은 피라미드를 제외하고는 없다. "모든 건물이 함께 지어지는 것" 이것이 바로 교회이다. 이 건물이 완전히 지어질 때까지 필요상 건물을 짓는 건축자는 배척을 당한다. "건축자들이 버린(배척받았다 시118:22)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 실족하게 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고 하였느니라.(벧전2:7-8. 롬9:32-33). 피라미드의 머릿돌은 필요할 때까지 일꾼들에게 "실족하게 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그리스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바울은 말하기를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거치는 것'이 되고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 되지만"(고전1:23).
피라미드는 5면체이며 5개의 점이 있다. 그 중에 맨 위쪽에 있는 각은 늘 고정되어 있다. 거기에 떨어지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부숴지거나" 큰 상처를 입게 된다. 그래서 이 건물은 "갈아서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마21:42-44). 우리가 말했던 것처럼 대피라미드는 그리스도께서 "머릿돌"이신 영적인 건물을 상징하는 것이다.
대피라미드와 경륜적인 진리
우리는 여기서 아무렇게나 세대를 적용해서 아주 수치를 당하지 않기위하여 이 부분을 뛰어 넘어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한 영적인 조명을 받은 사람이 피 라밋의 내부에 나 있는 통로들과 방들에 대한 전체적인 개요와 상징들을 경륜적으로 명쾌하게 푸는 일은 후대의 사람들이 할 일로 남겨두고자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만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영적인 진리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주 매끄럽게 다듬어진 내려가는 통로(BB)는 이 건물이 B.C. 2170년에 만들어 졌음을 가리켜 주며, 그것이 가리키는 별이 "용"(Dragon) 또는 "큰 뱀" 성좌의 "중요한 별"인 "알파 드레곤(Alpha Draconis)"임을 통해 우리는 피라미드가 "마귀"의 존재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미완의 방으로 (H)을 향해 아래로 내려가는 통로를 통해 지옥을 상징함을 알 수 있다. 사탄의 별인 알파 트래곤스와 연관되어 있는 통로, 즉 인류는 그 별을 바라봄으로써 지옥으로 향해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내려가다가 다시 올라가는 통로가 중간에 나있는 것(D)은 출애굽에서 그리스도의 탄생까지 인류의 한 족속이 (유대인) 믿음으로써 위로 향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큰 방"은 그리스도 탄생에서부터 교회의 휴거기간 까지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을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피라미드에서 '큰 방"이 차지하는 길이는 1882인치이다. 만약 인치가 연도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교회기간은 1882년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미 현재는 1900년이 훨씬 넘었다. 우리는 여기서 통로의 길이를 통해 교회시대의 연도를 나타내는 또 다른 측정방법을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만약 "큰 방"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우물"로 난 통로와의 거리는 단지 30피트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거기에서 S자 곡선으로 된 통로는 지옥으로 내려가는 통로이다. 이 우물은 중간에 넓게 S자로 되어 있다.
이 우물은 무덤을 상징한다. 무덤이 열려 있는 것은 주님이 여기에 갔다가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으셨기 때문이다. S자 곡선으로 된 통로는 "지하 세계"를 엿보게 해준다. "영적 세계"란 장을 참고하시오. "큰방"을 형성하고 있는 일곱 개의 기둥은 일곱 교회를 상징한다. 만약 "큰 방"이 현세대를 모형이라면, 위에 있는 두 통로중 아래 수평 통로(T)는 환난의 모형이며, 큰 방에서 몇몇 사람들이 빠져 나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휴거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세히 관찰해보면 "왕의 방"에 있는 천정은 빈 공간으로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R을 보시오) 여기에서는 박쥐가 발견되었는데 "날개있는 생물"만이 출구를 발견할 수 있도록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큰 방"의 끝 벽이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는데 이것은 마치 교회의 휴거가 환난에 앞서 있을 것이라는 점을 잘 나타내 준다. 이 "큰 방"은 무덤이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완전히 뒤엎어 버리고 현 세대의 모형을 잘 나타내주는 비율로 만들어져 있다.
아래 통로(T)는 "대환난"의 모형이며 "앞방"(M)은 "천년왕국"의 모형이다. 아래로 내려가는 통로(P)는 천년왕국 말기에 있을 곡과 마곡의 배교를 나타내며 왕의 방은 새하늘과 새땅 또는 영원한 상태를 나타낸다.
"왕의 방"이라고 이름붙여진 것은 그것이 틀림없이 왕의 몸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여왕의 방"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여왕의 몸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대피라미드가 단순히 무덤용으로 만들어진 건축물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왕의 방"에 유일하게 가구가 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관"이다. 그 관은 두껑이 없고, 비어있으며, 붉은 화강암의 단단한 벽돌을 깍아서 만들어 졌으며, 안과 밖이 깨끗하게 다듬어져 있으며, 안이나 밖에 어떤 무늬나 장식도 없다. 이 관에서 괄목할 만한 점은 이것이 마치 언약궤의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관을 만드신 분이 언약궤를 만드신 분이라면 성경을 만드신 분이 피라미드를 만든 것이라는 강력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씨에스(Siess)박사는 "만약 피라미드가 영적인 것을 상징하는 건물이라면 우리는 당연히 이 건물의 몇몇 방과 통로는 '새 예루살렘'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아직 피라미드에서 발견하지 못한 방이 몇 개 더 있을 것이라는 증거는 갖고 있지만 찾지 못하고 있다. 만약 그 방이 있다면 그 방은 N 정도에 있을 것이다.
우물의 입구(W)에서 수평으로 가는통로(J)는 "여왕의 방"으로 인도해 준다. 여왕의 방으로부터 1/7정도 나가면 약간 더 낮게 된 미완성의 마루가 있다. 이 수평선의 통로가 유대인을 나타낸다면 "큰 방"으로부터 70인치가 떨어져 있으므로 A.D 70년에 유대인이 완전히 흩어지는 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이 낮은 수평 통로는 "여왕의 방"에서 완전히 끝나는 데 이는 유대인이 다시 회복되어서 가장 위대한 민족, 열방의 우두머리가 될 것이라는 성경적 가르침을 확고히 해 주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11:25에서 이방인의 충만함이 찰 때까지 "이스라엘의 일부가 완고" 하게 되었다고 말해 준다. 피라밋에서 "여왕의 방"은 통풍이 잘 되지 않는 관계로 냄새가 나고 검은 새들이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72년에 피라밋을 방문한 어떤 사람은 "여왕의 방" 남쪽 벽에 조그마한 틈을 이용해서 철사를 집어 넣어 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장애물을 발견하지 못했다. 몇몇 일꾼들이 망치와 정을 가지고 피라밋의 통풍로로 가서 벽을 막고 공기 통로(Y)를 일부러 막았다. 그들은 약 7피트 가량 뒤로 물러나서 위쪽으로 올라갔다. 이 통로의 입구는 방에서부터 약 5피트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가 알 수 없는 몇가지 신비한 것은 이 공기 통로, 즉 환풍구는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으며, 그 맞은 편에도 똑같은 공기 통로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 공기통로는 벽의 표면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어서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했었다.
그렇다면, 숨겨진 공기통로는 영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이는 마치 유대인들이 이 세대에서 세상에 감추어져 있는 것과 같다. 유대인들은 현재 주님의 복음에 눈이 가려져 있다. 이들이 자기들의 본토인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와서 국가를 건설할 때까지 그들의 눈은 열려지지 않을 것이며, 주님께로 온전히 회심하지도 않을 것이다. 여왕의 방으로 연결된 공기 통로 의 입구가 막혀 있다는 것은 이런 영적인 의미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여왕의 방은 곧 유대인의 방이라고 불릴지도 모를 일이다. 여왕의 방은 "큰 방"(Grand gallery)의 끝 부분 바로 아래까지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이 세대의 끝에 유대인들이 함께 모여 회심할 것을 말해 준다. 유대인의 회심시기가 언제인지를 피라밋의 통로의 위치를 통해 우리는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보라. 성경에 기록된 말씀과 피라밋의 내부 구조가 얼마나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누가 대 피라밋을 만들었는가?
"큰피라밋"은 케옵스스(Cheops)의 통치기간 동안에 만들어 졌다.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큰피라밋은 10만명의 사람이 20년간 만들었다고 한다. 큰피라밋이 만들어지는 동안 이집트의 모든 이방신전들은 폐쇄되었다. 이집트의 제사장이었던 마네소(Mathetho)는 그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신은 우리를 기뻐하지 않으셨다. 동방으로부터 야만족들이 우리나라를 침략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쳐들어 왔다. 그들은 힘든 전투 한 번 없이 너무 쉽게 이 나라를 정복하고 말았다. 그들이 우리를 지배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신들의 신전을 모두 폐쇄시켜 버렸다." 케옵스(Cheops)와 그의 추종자들이 나라를 통치할 때는 이 정책이 바뀌지 않았으나, 미세리우스(Mycerius)와 멘케레스(Mencheres)가 통치하면서부터 신전은 다시 열렸고, 신들에 대한 숭배도 허용되었다. 마네소(Mathetho)는 이런 왕들을 "힉소스"(HYKSOS), 즉 "목자 왕들"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아라비아에 널리 알려졌으며, 후에 많은 사람들이 이집트를 떠나 유대로 들어가서 예루살렘이란 도시를 건설했다고 한다.
헤로도투스는 그 당시 그 지역에서 양들을 먹이던 목자였던 "필리션"(PHILITION)의 이름을 따서 '피라밋'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필리션"(PHILITION) 또는 "필리티스"(PHILITIS) 라는 사람이 대 피라밋의 설계자였을 것이라고 한다. 그는 아라비아 사람이었지만 유대 땅 필리스티아로 올라갔으며, 그 당시 사람들에게 "필리션"(PHILITION)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렇다면 필리션이란 사람은 누구인가? 어떤 사람은 그를 셈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그를 멜기세덱이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욥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는 "욥"이라고 믿고 있다. 욥은 동방, 아라비아에서 가장 큰 부자였으며, 위대한 자였다(욥1:3). 그가 250세를 살았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1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아브라함보다 전시대의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욥은 큰피라밋이 건축되던 그 때에 거기에 살고 있었을 것이다. 욥기 38장을 보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욥이 큰피라밋을 지은 사람임을 암시하는 말씀들이 있다. "그 기초들은 무엇위에다가 고정시켰으며, 모퉁이돌은 누가 놓았느냐?" 욥과 그의 친구들이 대화하는 말들 가운데서 우리는 욥이 상당한 천문학적, 수학적 지혜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있다. 하나님은 "눈"에 대해서(22), "비"에 대해(25-28), "얼음"(29-30)과 "하늘의 별들과 성단"(31-32), "일기 예보"(33-34), "번개"에 대해서 욥에게 물으셨다. 이 질문들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부여해 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물을 수 없는 것들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영적인 삶을 영위하던 욥 같은 사람에게나 가능한 질문이었던 것이다.
욥은 온 땅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왕과 같은 사람이었으며, 또한 사람들을 대신해 기도하는 제사장이었다. 욥은 모든 성경적, 예언적 진리를 소화하고 있었으며 큰피라밋의 방과 통로를 설계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리를 함축적으로 묘사해 놓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욥이 모든 경륜적 진리를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다른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이해하지 못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다(벧전1:10-12).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각종 성막의 모형을 보여주신 것과 같이 욥에게 큰피라밋의 설계를 할 수 있는 영감을 주셨을 것이다.
욥의 시대에 이런 건축을 할 수있을 만큼 숙달된 기술과 노동력이 있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다 이 때는 노아의 홍수가 있고 난 뒤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았던 것을 생각해 보라. 그 당시에 세워졌던 이집트의 왕국들과 성전들을 보면 증거는 더욱 분명하다. 그러나, 큰피라밋의 내부구조와 설계는 다른 모든 건축물과 판이하게 다르다. 이런 모양의 건축물은 이전까지 인류역사에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양식이다. 내부 장식이 없는 점이라든가, 조각이나 벽화가 없는 점, 사선의 형식으로 처리된 경사면, 평면으로 처리된 표면등은 당시 이집트의 건축양식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그렇다면, 이 건축에 대한 아이디어는 이집트에서 온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건축물에는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천문학적, 수학적 지식 뿐만 아니라 엄청난 성경적 지식을 요구하는 이 건축물은 하나님께서 이 세대 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에까지라도 많은 불신자들에게 증거와 표적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특이한 외적 모습과 내부의 특징이 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세대가 끝날 때까지 큰피라밋의 모든 비밀이 다 풀릴지 모르겠지만, 불신자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늘 열려 있는 것이다.
33. 성경의 숫자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본 사람은 4. 7. 10. 12. 40. 70과 같은 수들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수들은 구약과 신약에 거의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성경이 이들 숫자들은 상징적 의미에 근거를 둔 "수의 체계"를 갇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수학자"이시며 무슨 일을 하시기 전에 미리 숫자, 무게, 도량형 단위 등으로 계획을 세운 후 그 계획대로 일을 하시는 분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참으로 이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또한 성경의 저자이시라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사역"은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성경은 "성경의 주들(Weeks of Scripture)"로서 알려진 "시간 체계"를 갖추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일곱 종류로 이루어져 있다.
1. "일(Days)"의 주기
2. "주(Weeks)"의 주기
3. "개월(Mounths)"의 주기
4. "년"(Year)의 주기
5. "년의 주기(Weeks of Years)"의 주기
6. "천년(Milenniums)"의 주기
7. "시대(Ages)"의 주기
먼저 "성경주기표" 참조하라. 이러한 "일곱 비율"은 자연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주 동안 알을 낳은 후 암탉은 3주 비둘기는 2주 동안 알을 품는다. 연어의 알은 29주 만에 부화되고 129종의 포유류 중 대부분의 임신기간이 정확한 7의 배수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또한 어떤 질병은 발병 7일째, 14일째 21일 째 가장 심하게 앓는다. 그리고 음악에는 7음계가 있으며 무지개와 프리즘을 통과한 빛도 7가지 색으로 나타나며, 나뭇잎은 대부분 7가지 법칙을 기초로 하여 모양이 만들어진다.
이와 같이 성경과 자연 현상이 일치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자연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것임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하나
"일치"의 수
하나님의 일치성을 상징한다(막12:32,요10:30,엡4:4-6). 성경에서 우리는 일곱가지 "일치성"을 볼 수 있다. "한 몸, 한 성령, 한 소망, 한분 주(主), 한 믿음, 한 침례, 한 하나님인 것이다.
둘
"연합"의 수
결혼을 통한 연합이다.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지기 어머니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결합하리니, 그들이 한 몸이 될 것임이니라(창2:24).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엡5:31,32), 그리스도 안에서 "두 성품의 연합"(눅1:35), "두 마리의 새"(레14:4-7), "두마리의 염소"(레16:5-22)에서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의 속죄로 죽음과 부활이 연합, 예수님이 제자들이 부르시어(마10:2-4) 둘씩 짝을 지어 전도 여행을 떠남(막6:7), 공정한 심판을 위하여 두개의 증언대와 두 증인의 필요함 대환난기에 "두 증인"이 증언하게 되는 것 등이다(계11:3).
셋
"하나님"의 수
셋은 거룩한 것과 관련해서 자주 쓰여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수" 라고 부른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일체와 사람에게는 있어서는 영, 혼, 육의 삼위 일체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의 주요 세절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신것(마28:19), 사도들이 축복할 때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하는 것(고후13:13), 예수님이 세번 시험을 받으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번 기도하셨으며 베드로는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세번 질문하시고 부탁하신 일, 그리고 베드로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보자기를 세 번 본 일 들이다. 셋이란 숫자는 또 이스라엘의 회복(호6:1-2), 큰 물고기 뱃속에 갇혔던 요나의 구원, 예수님의 부활과도 관련이 있다(마12:38-40).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을 세 번 찬양할 때 이 숫자는 절정을 이룬다.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장차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이시여!(계4:8)" 예수 그리스도는 "신실한 증인",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첫 태생"과 "땅을 다스리실 왕 중의 왕"으로 높임을 받고 계신다 네 생물은 전능자에게 "거룩한", "거룩한", "거룩한"이라고 세번 찬송하며 그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드리고 있다. 계시록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재앙을 예고하는 나팔이 세번 울리고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개구리와 같은 세 영이 나온다(계16:13,14).
바벨론에 세 종류의 재앙, 곧 "사망", "애통", "흉년"(계18:8)이 내릴 것이 예언되어 있고 "세 부류의 사람들" 즉 "왕들"과 "선원들"과 "장사꾼들"이 자기들의 몰락을 통곡하고 있다.
위에 열거된 내용들은 성경에서 셋이란 수를 사용한 예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셋이란 숫자는 자연 현상에서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태양 광선의 주요 색상은 파랑, 노랑, 빨강이다. 그리고 태양은 자외선, 가시광선, 적외선의 세가지 요소로 되어있다. 자연계는 동물계, 식물계, 광물계로 나누어지며, 물질은 기체, 액체, 고체로 되어 있고 자연계의 주요한 힘은 중력, 빛, 전기이다 아담의 타락으로부터 지구가 불로 멸망할 때까지의 땅의 역사는 대홍수 이전 시대와 현재 그리고 천년 왕국시대로 나눌 수 있는데 각 시대들은 제각기 현저한 특징을 갖고 있다.
넷
"세상"의 수
우선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계절을 들 수 있다. 나침반에는 동서남북의 네 방위가 있고 물질은 4대 요소는 흙, 공기, 불, 물이다. 에덴 동산에서 흘러나온 강은 네 방향으로 나누어 졌었다. 에스겔은 환상 중에 얼굴과 날개를 각각 넷씩 가진 천사를 보았다. 그 첫째 얼굴은 사람, 둘째는 사자, 세째는 소, 넷쩨의 얼굴은 독수리로서 땅에 속한 생물들이었다. 이상 중에 다니엘이 본 세상의 큰 세력은 바빌로니아, 매디아와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넷이었다. 이 세상 나라들에게 내려질 네 가지 심판은 전쟁, 기근, 질병, 지진이다. 인간은 국가, 혈통, 민족. 언어로 나눌 수 있다. 사복음서에는 예수님의 네가지 특징이 각기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내리실 무서운 심판은 칼, 기근, 독한 짐승, 질병의 네 가지이다. 놋제단은 각기 네 면과 네 뿔이 있었다.
다섯
"분리"의 수
이 숫자는 그다지 자주 나타나지는 않는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어리석은 다섯 처녀의 비유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셨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울 때 시냇가에서 다섯개의 돌을 취했다. 다섯 손가락과 발가락 모세 오경, 오감 등이 있다.
여섯
"인간"의 수
아담은 제6일에 흙으로 만들어졌고, 6일 동안 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히브리인 노예의 봉사 기간은 6년이었고, 땅은 6년 동안 경작한 후 7년째에는 휴경하게 되어 있었다. 이 세상 역사는 6천 년간이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기까지 6일간 기다렸다(출24:15-18).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리코성을 얻기 위해 6일간 여리코성을 돌고 7일째 함락시켰다(수6:1-20). 솔로몬의 보좌에는 여섯개의 계단이 있었다(왕상10:19).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영광 중에 오실 것을 예언한지 6일 후에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 변화하신 형상을 보이셨다(마16:28-17:2).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인간의 모형인 느브갓네살 왕은 자신의 형상을 본떠 금 신상을 만들고, 백성과 이방인들에게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라고 명했다. 만약 그 명령을 지키지 않는 자는 누구나 활활 타는 용광로에 던져 넣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금신상의 높이는 60규빗, 폭은 6규빗이었다. 이것은 장차 짐승(적그리스도)이 나타날 때에 그 앞에서 거짓 선지자가 사람을 명하여 만들게 될 "짐승의 형상"의 모형인 것이다(계13:13-18). 그리고 짐승의 "수"가 "666"이란 사실도 매우 중요하다. 이 날은 사람들이 그의 능력을 얻고 "인자"를 폐위시키며 상업적인 동기로
"신격화된 사람"
을 찾을 때 일어날 것이다(계13:15-17)
일곱
"완전함", "가득찬 경륜"의 수
이 수는 3과 4의 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3+4=7. 이 수는 하나님의 수인 동시에 세상의 수로서 성경에서는 다른 어떤 수보다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하나님은 창조를 마치신 후 마지막 날인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는데 이는 육천년간의 이 세상 역사가 끝나고 이어서 오는 천년의 안식을 상징하기도 한다. 안식일은 마지막 날인 제 칠일이었고, 에녹은 아담의 제 칠대 손이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간 후 칠일간의 은혜 기간이 있었으며,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하여 칠년간 봉사하였다. 이집트에서는 각각 칠년씩의 풍년과 흉년이 들었었고, 이스라엘 자손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 일곱 나팔을 가진 일곱 제사장이 백성들 앞에 서서 행진했으며, 모든 사람들은 그들을 따라서 성을 일곱 바퀴 돌았다. 성막 안에는 일곱가지가 있는 금 촛대가 있었으며 땅은 육년간 경작한 후 칠년 째에는 휴경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데 칠년이 걸렸으며, 건물 완성 후 칠일간 잔치를 열었다. 욥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었으며, 욥을 방문한 친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칠일 일곱밤을 땅에 앉아 있었다. 후에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일곱마리의 수송아지와 일곱마리의 수양을 번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아아만은 요단강에 일곱번을 씻었다. 제물의 피는 속죄소 위에 일곱번 뿌렸고(레16:14), 주 하나님이 명하신 일곱절기 가운데 몇몇 절기는 칠일간 게속되었다. 우리의 구주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일곱마디의 말씀을 하셨다. 초대 교회에서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자 일곱을 택하여 교회의 구제 사업을 맡겼다. 그러나 수 일곱의 깊은 뜻은 계시록을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계시록은 일곱 금 촛대 사이에 계신 주님이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으로부터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쓴 편지로서 일곱 교회의 천사인 일곱 별에 보낸 것이다. 보좌에 않으신 이의 오른손에 있는 일곱인으로 봉하였는데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진 어린양에 의해 떼어졌다.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받았고 또 다른 일곱 천사는 마지막 일곱가지 재앙을 담은 일곱 개의 금 호리병을 땅에 쏟았다. 짐승의 머리는 일곱이고, 용은 일곱 머리와 일곱 뿔을 가졌다. 계시록에는 칠이란 숫자가 도합 50번 이상 나타나고 있다. 계시록은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칠이란 숫자로 계시해 놓고,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으로 인도하는 책이므로 "일곱의 책"이라 할 수 있다.
여덟
"새로운 질서"의 수
제 팔일은 새 주간의 시작이다. 유대 안식일은 일주일의 마지막 날인 제칠일(토요일)이였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다음의 시작되는 새 주의 첫날인 팔일째(일요일)에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그의 부활은 새로운 질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안식과 "새 창조", 즉 영의 거듭남을 가져왔다. 이는 천년 왕국 다음에 오는 여덟 번째 시대, 곧 새 하늘과 새땅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아브라함에게 모든 사내 아기들은 생후 8일째에 "할례"를 명령하셨다(창17:11-14). 할례받지 못한 자는 누구나 백성, 유대민족 중에서 끊어져 버렸다. 그럼 할례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은 할례로 말미암아 옛 아담의 혈통에서 "끊어져" 새로운 민족이 되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상징한다.
노아의 가족 여덟 명은 대홍수 때 구원을 받았으며(벧후2:5), 홍수 후에는 새 땅에 흩어져 살았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째 아들이었으며, 이스라엘에 새로운 질서를 불어넣었다(삼상16:10,11). 문둥병자는 제 팔일에 깨끗함을 얻어 새 사람이 되었다(레14:10,23).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은 제 팔일, 즉 "안식일 후 다음 날"에 흔들었고(레23:11), 50일 후 같은 날(안식일 이튿날)에 오순절을 가졌다. 곧 오순절은 새로운 복음의 시대를 여는 성령이 오신것을 3예표하는 절기이다(레23:26).
장막절은 칠일간 지켰다. 그러나 제 팔일째 되는 날에는 "거룩한 모임"이 있었다(레23:36). 장막절은 3대 절기 중의 마지막 절기로서 추수 끝에 지켰으며, 그 기간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초막에서 지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을 상징하는 것이다.
열
"세상의 완성"의 수
이 숫자는 세상을 나타내는 수 4와 인간의 숫자 6을 합한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열 손가락이나 열 발가락으로 암시되는 십진법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일 것이다. 이 숫자는 완전수로 간주되어 십계명 같은 것에 사용되었다. 사도 요한이 본 "짐승"(계17:3)의 열 뿔은 느브갓네살 왕이 세운 우상의 열 발가락, 그리고 다니엘이 본 네째 짐승의 머리에 돋은 열 뿔은 10개국 연방으로 뭉쳐진 이방의 세력을 나타낸다. 이 10개국은 연방은 이 세상에서의 이방 통치의 완성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돌 왕국"에 의하여 멸망당할 것이다. 또 열 드라크마의 비유라든가(눅15:8), 열 므나를 맡은 열 명의 종과, 주인에게서 열 고을을 맡은 한 명의 종(눅19:13,17). 이집트에 내릴 열가지 재앙등 성경의 곳곳에서 수 "십"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열둘
"영원한 완성의 수"
이 숫자는 하나님의 수 3과 세상의 수 4의 곱으로 되어 있다. 성경에 숫자 "열둘"이 나타난 예를 들면, 우선 이스라엘의 열두지파, 대제사장의 가슴판에 달린 열두 보석, 열두 덩이의 진설병, 엘림에 있는 우물, 가나안 땅에 보낸 열두 정탐꾼, 여호수아가 요단강 바닥에 세운 열두 개의 돌, 선지자 엘리야가 돌로 세운 열두 마리의 소등이 있다. 신약 성경에 숫자 "열둘"이 쓰여진 예를 보면, 예수님께서 열두살 나던 해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신 일, 열두 제자를 택하신 일,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던 여인과 회당장 야이로의 12살난 딸이 병고침을 받은 일 등이 있다.
계시록에는 열두 개의 별이 있는 면류관을 쓴 여인이 기록되어 있다. 새 예루살렘 성에는 열두 진주문과 그 문을 지키는 열두 천사,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문들에는 어린 양의 열두사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생명수의 강 좌우에는 열두 가지 실과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다. 세상이 새롭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열두 사도가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19:28).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모든 일이 성취된 후에 이스라엘과 교회는 이와 같은 새 땅과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지내게 될 것이 분명하다.
사십
"시험"의 수
노아 대 홍수 때 사십 주야 동안 비가 내렸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사십년, 사막에서 사십년, 그리고 이스라엘과 자손과 함께 광야에서 40년을 지냈다. 열 두 정탐군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사십일 동안 정탐했으며,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사십년간 방황하였다. 사울 왕과 다윗 왕, 그리고 솔로몬 왕은 각각 사십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다.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은 사십일 동안 이스라엘에게 조롱했다. 니느웨 성은 사십일간 회개하였다. 엘리야는 사십주야 동안 음식을 먹지 못했고 예수님께서도 사십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다. 또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시기 까지 사십일 동안 이 땅에 계셨다. 채찍질을 가하는 벌은 사십에 하나를 뺀 삼십구대로 제한하였다.
성경에는 이외에도 70, 120, 140등에 대한 숫자를 언급한 곳이 있으나 이미 성경에 나타난 숫자가 상징적인 뜻이 있음을 충분히 알았으므로 더 이상 숫자의 의미를 추구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34. 시대의 표적들
우리는 주님이 재림하시는 정확한 날짜를 알 수는 없으나 시대의 특징을 보고 그때가 가까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 너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그 말씀을 닫고 그 책을 봉하라. 그 때에는 많은 사람이 이리저리 달릴 것이요, 지식이 증가하리라.". . "다니엘아, 네 길을 가라. 이는 그 말씀들이 '마지막 때'까지 닫혀 있고 봉해져 있을 것임이라. 많은 사람들이 정결케 될 것이며, 희게 되고, 연단되리라. 그러나 악인들은 악하게 행하리라. 악한 자들 중 아무도 깨닫지 못할 것이나, 현명한 자들은 깨달으리라"(단12:4,9-10). 이 말씀은 다니엘의 예언이 "마지막 때"까지 "닫혀 있고", "봉해져 있을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의 마지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때"의 "마지막 날들"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봉인된 책이 열리고", "지식이 증가하리라"는 예언이다. 여기서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다니엘서나 성경에 기타 예언서에 기록된 "예언에 대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이 내용은 오직 "현명한 자들"만이 깨달으리라고 기록되었다. 성령께서 깨우쳐 주신 사람들만이 깨달을 것이며 지적인 지식만 가진 자는 깨달을 수 없을 것인데 악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이 말씀은 이 시대에 사실이다.
많은 거짓 신학자들이나 거짓 비평가들은 다니엘서가 허위임을 증명하려 무던히도 애써 왔지만 헛수고였다. 왜냐면 이 책은 "마지막 때"가 다가올수록 더 연구되어지고 있고,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쳐 주신 성도들에 의해 "봉인"은 점차로 열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니엘서의 "봉인"이 때어지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부터 지난 수십 세기 동안 신랑되신 예수님의 재림이 늦어지자 지혜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들은 교회는 성령을 소멸하였으며 "복된 소망"은 식어버렸다. 그러나 현재 전세계에는 복된 소망이 어둠 속에서 다시 소생하였으며 처녀들은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날이 새기 직전의 새벽에 살고 있다. 곧 새벽별(계22:16)이 나타날 것인데 그때 우리는 들림을 받고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1. 후천년주의자들의 조롱
베드로후서3:3-4절에서
{먼저 알 것은 이것이니 '마지막 날들'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그들의 정욕대로 행하며 말하기를 "그가 다시 온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만물은 창조의 시작부터 그대로 있다." 하니}
이 얼마나 지금 시대를 잘 표현한 말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교리는 "조롱거리"가 되고 있으며 그의 재림을 굳게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허황된 가르침에 속고 있는 광신자 취급을 받고 있다. 그리고 더욱 슬픈 것은 오늘날의 유명하다는 기독교 지도자들 중 많은 수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2. 배 교
데살로니가후서2:3절에서
{아무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이는 먼저 "배교하는 일"(Fall Away)이 이르지 않고서는 그 날(주의 날)이 오지 아니함이라. 그리고 나서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리라}.
이 "배교하는 일"은 모든 면들에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3. 거짓 교사들
베드로후서2:1-2에서 "거짓 교사들"이 있을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이들은 크리스챤 사이언스나 럿셀추종자(여호와의 증인)들과 같이 자신들을 사신 주마저도 부인하는 이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악한 길"을 따를 것이며, 소위 정통교회라는 교인들도 이런 자들을 추종하고 있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사도 바울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 정통교회 교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Sound Doctrine)를 견디지 못하고, 그들 자신의 정욕에 따라 가려운 귀를 즐겁게 해 줄 선생들을 많이 두리라. 또한 그들이 그들의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로 돌리리라}(딤후4:3).
이 허탄한 이야기로 "돌리는 일"은 모든 면들에서 나타난다. 바른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교회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일, 교회와 주일 학교에는 나가고 주일을 지킨다지만 "바른 교리"를 돌아서는 일들은 너무나도 흔하다. 많은 교회들은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새로운 탄생, 즉 "거듭남"이 필요하며, 예수님을 개인적인 구주로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문자적인 지옥에서 끊임없는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듣고자 하지 않는다. 이들은 귀를 즐겁게 해주는 이야기, 재미있는 소설, 인기 있는 설교를 해 주는 많은 선생들을 원한다.
4. 강신술
디모데전서4:1절에서 우리에게 믿음으로부터 떠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를 듣는다. 이 "마지막 때"에 어떤 이들은 "믿는 믿음을 버리고", "미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을 따를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버리고 악령의 매개체들을 따르거나 심령 연구를 하는 사람들의 수가 더욱 증가함으로서 성취되고 있다.
5. 어려운 때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때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또 이것을 알라. "마지막 날들"에 아주 어려운 때가 오리라.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고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고 부모에게 불순종하며, 감사하지 아니하고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고, 화해하지 아니하며, 모함하고 절제하지 못하며, 사납고,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반하고 분별이 없으며, 자만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리니,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딤후3:1-5).
우리는 위 내용을 더 깊게 다룰 만한 여유는 없지만, 우리에게 위 말씀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부패한 상황"임을 잘 알 수 있다.
6. 재물을 축적함
야고보서 5:1-6절에서 "마지막 날들"에 "부정한 수단"으로 재물을 모아 "쾌락"과 "사치"를 누리는 "부자들"이 있을 것과 추수하고도 정당한 품삯을 받지 못한 자들의 우는 소리가 주의 귀에 들릴 것과 그 죄악을 심판하실 것을 기록하고 있다. 부정하게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여 몇 년 안에 백만 장자가 되려는 풍조가 만연한 이 시대를 얼마나 잘 묘사하고 있는가! 분명히 지금 우리는 이 시대의 "마지막 날들"에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7. 라오디케아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낸 서신(계3:14-22)에서 우리는 이 땅위의 위선적인 교회(Professing Church)의 마지막 상태를 볼 수 있다. 이 교회는 그 행위가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않아 메스꺼울 정도로 미지근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네 입에서 너를 토해 내겠노라" 라고 말씀하셨다. 이 교회는 스스로 "나는 부자이며, 부요하고,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며 심지어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필요 없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밖에서 들어가기 위해 문을 두드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의 진짜 상태인 비참하고, 가련하며, 눈멀고, 헐벗은 것을 모르고 있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픈일이지만 이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위선적인 교회의 모습이다.
8. 무화과나무의 표적
예수님께서 성전이 무너질 것을 예언하신 후에 제자들이 나아와 질문을 한다.
{언제 이런 일이 있겠으며 주께서 오실 표적과, 세상의 끝의 표적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소서."라고 하니}(마24:1-3).
예수님께서는 재림의 표적으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알려 주셨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며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유연해지고 잎이 나온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국가로 회복된다는 말이다. 또 한 가지 주님의 재림이 가까워졌다는 증거로는 시오니즘의 부활과 팔레스타인 땅을 기독교국인 영국이 장악함으로써 유대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무화과나무의 표적이 성취되어짐을 의미한다. 예루살렘(서예루살렘)이 총 한방 쏘지 않고 항복했다는 것도 중요한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의 때가 찰 때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리라고 말씀하셨는데(눅21:24), 현재 예루살렘의 회복은 "이방인의 때"가 끝나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9. 민족들이 괴롭게 됨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의 때"가 끝날 무렵에
{또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의 때'가 찰 때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리라.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적들이 있을 것이며, 땅에는 민족들이 혼란 중에 괴로워하며 바다와 파도가(땅에 남은 사람들) 포효하리라. 이 땅에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생각하면, 사람들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인하여 실신할 것이라.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악한 정사들과 권세들)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라. 그때 사람들은 인자가 권세와 큰 영광으로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눅21:25-27).
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나라들이 흔들리고" 도처에서 "기상이변"이나 "지진" 일어나고 있는 것은 마지막 환난때에 일어날 하나의 모형으로 이 세상에 완전한 평화를 가져다주실 주 예수님께서 오시기 직전에 일어날 일들이다.
10. 노아의 날들
마지막의 "징조"로써 "노아의 날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한다.
{노아의 날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의 날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그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였으나,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진멸시켰느니라. 그것은 또한 롯의 날에 일어났던 것과 마찬가지라. 그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짓고 살았으나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그들 모두를 진멸시켰느니라. 이와 같이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그러하리라}(눅17:36-30).
그런데 이런 일들이 어떻게 죄가 된다고 할 수 있는가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그런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은 "홍수가 날 때까지" 이러한 일들만 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즉 그들은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창조주를 기억하지도 않았고 경배하지도 않았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즐기기 위해 너무 바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길 시간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자신의 집을 짓기에 정신이 없기 때문에 하늘의 영원한 집을 마련하는 일에 소흘히 하고 있다. 주님과 연합하는 일보다는 자녀들에게 좋은 베필을 얻어주는 데 더욱 열심을 내고 있으며 세상 재판에는 염려하면서도 하나님의 심판석 앞에서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잊고 사는 것이다.
* 관련 자료
1. http://www.ebccnet.com/lcharts/Clarence-Larkin-Album - 경륜적 진리에 삽입된 도표를 보실 수 있습니다.
2. http://www.inchristjesus.net/ - '기독교 교리' 단원에 가면 클라랜스 라킨의 또 다른 저서를 볼 수 있습니다.
3. 라킨의 요한 계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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