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13강)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 5:6)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6:09

(제13강)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 5:6)

 

  적극적인 사고가 로버트 슐러 목사님은 '불가능한 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존재한다.'고 말하면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 때문에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그러나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할 수 없다는 그 생각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어느 구두회사에서 두 명의 세일즈맨은 시장 조사차 아프리카로 보냈습니다. 한참 후 전보가 두 통이 왔습니다. 한 전보에는 '아프리카에 와서 보니 구두를 신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음, 그들은 구두가 무엇인지 몰라서 구두를 팔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음' 이 전보 앞에 사장을 비롯한 모든 사원들이 실망의 한숨만 품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전보에는 '아프리카에 와서 보니 구두를 신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음, 그러므로 구두를 팔 수 있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함' 이 전보 앞에 모두가 만세를 불렀습니다.
  여러분! '누가 할 수 있다'의 사람이고, 성공적인 사람입니까? 적극적인 말 한마디가 좌를 우로 바꾸고 땅을 하늘로 끌어올리며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며 절망을 기적으로 낙심한 자를 소망으로 실패를 성공으로 뒤바뀌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아멘!/
  오래 전에 줄리어스 시저가 한 군대를 이끌고 아프리카 정복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계속 강행군의 전쟁은 모든 사람을 지치게 했고 기진맥진하게 만들었습니다. 더더욱 실망한 것은 시저 장군이 넘어지고 엎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때 모든 병사들은 '이제 전쟁은 패하고 말았구나!'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습니다. 이때 시저가 외쳤습니다. '보아라. 아프리카가 내 품안에 안겨 있다.' 이 말 한마디가 전쟁의 역사를 바꾸어 놓고 말았답니다. /할/ 믿음의 사람들이여! 우리 모두 믿음의 소리를 합시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할/ ◀제목 소개!▶

 

  오늘 우리는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황금률인 팔 복 그 네 번째 복 앞에 섰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주님의 팔 복을 자세히 음미해보면 점점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처음 천국 문에 설 때에는 심령이 가난해야 하고, 즉 겸손한 마음이어야 하고, 천국 문이 열리면 그 일보로 자기 죄를 회개하는 애통함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 단계는 마음이 온유해야 되고, 그 후 방향을 의로 향하라고 가리키고 있습니다.
  성경은 의에 대한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님은 마6: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고, 마5:20절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의란 무엇입니까? 보통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는 의란 옳은 것, 올바른 것, 사람이 행하여야 할 바른 도리, 또는 잘못이 전혀 없는 것을 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의란 세상 적인 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입니다.

 

  ▶'의'라는 말은 '디카이 오수네'라는 말로 이 말에는 세 가지의 성격이 있습니다.
  ①인간 편에서는 할 수 없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아담의 범죄를 인간에게 완전부패성을 안겨 주었다고 했습니다. 롬3:10-12절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사람의 의란 걸레조각 같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3:7-9절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 로서 난 의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의가 없습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처음에는 살아보려고 발버둥치지만 나중에는 물을 잔뜩 먹고 기진맥진하여 완전 포기하고 물에 빠져 버리고 맙니다. 누군가가 건져주지 아니하면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살기가 불가능합니다.
  바로 이런 상태가 타락한 인간의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시켜 주시지 아니하시면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도저히 의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편에서는 도저히 하나님의 의를 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미국의 오사마 대통령을 물러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대통령에게 '정치 좀 잘 하세요' 라고 말한다면 '웃기지 마라'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의는 하나님의 영역이지 우리가 무어라 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기준이요, 표준'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잣대와 같습니다. 즉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우리의 판단과 우리의 잣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잣대를 보아야 합니다. /할/
  ②인간은 의를 행할 수도 없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기는 흠이 없는 자'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다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새로운 사람이 되고 자신을 보니 모두 다 허물투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전4:4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 위대한 고백을 했습니다.
  사실 인간은 의롭게 보이고 선하게 보이지만 깊은 곳에는 불의로 가득했습니다. 두 가지 불의입니다. 불의 하게 보려는 불의요, 의롭게 보이는 불의가 있습니다. 불의 하게 보이는 불의란 누가 보아도 충분히 죄로 판명될 수 있는 불의 시기, 질투, 음란, 호색, 도둑, 우상숭배 같은 것들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의롭게 보이는 불의란 겉으로는 불의로 보이지 않고 의롭게 보입니다. 그런데 진실할 것 같지만 가식이 들어있고, 정직한 것 같지만 교만이 들어있습니다. 또 충성하는 것 같지만 이기심이 잔뜩 들어있고, 사랑하는 것 같으나 이용하려고 하는 동기가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 성이 망한 이유를 잘 압니다. 왜 망했습니까? 의인 열 사람이 없어서 망했습니다. 창18장에 보면, 어느 날 아브라함이 천사들을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떠나기 전에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 비밀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생길 것이고, 또 하나는 소돔과 고모라가 곧 멸망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고모라 땅에 조카 롯이 생각나서 하나님 앞에 '그 성에 의인 50명만 있어도 그 땅을 용서해 주시겠습니까?'하고 묻자, 하나님이 '좋다! 의인 50만 찾아서 나에게 보여주신 내가 이성을 용서하겠다.'고 하십니다.
  이 말을 듣고 난 아브라함이 걱정이 됐습니다. 왜 걱정이 됩니까? 의인 50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죄송합니다. 사십은, 삼십은, 이십은 십 인'까지 내려갔지만 그렇게 의인 열 사람이 없었기에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의를 말해야 의가 통합니다. 의롭지 못한 사람이 아무리 의를 말한 다해도 본인 자신이 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그 주장하는 것 자체가 불의한 것입니다. 의로운 정보, 의로운 정당이 국민에게 의를 요구해야 정의사회가 구현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점점 세상이 잘못 가고 있습니다. 매스컴을 보세요! 온통 윤리와 도덕이 땅바닥에 떨어진 사건들만 가득합니다. 인간의 생명의 존엄성은 온데간데없고 생명을 죽이는 그 잔흑함이 치를 떨게 합니다.
  렘5:1절을 보면 예루살렘이 망한 이유는 예레미아가 한 사람의 의인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모두 다 위선자요, 저울은 속이고, 가격을 속이고, 사기꾼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결국 예루살렘은 수치를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의로운 사람, 의로운 교회, 의로운 사회와 국가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를 누가 이룰 수 있습니까?
  ③하나님만이 의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진정한 '의'이시기 때문입니다. 롬10:4절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여러분! 율법을 완성하시고 의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의로워지는 길입니다. /믿/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자들입니다. 사실 인간 스스로는 의를 논할 수 없었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이는 전가된 의입니다. 달빛은 해로부터 받은 전가된 빛입니다.
  ▶오래 전에 브라질에서 한 사람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미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으로서 영국에 가서 큰공을 세웠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영국과 미국 대사들은 그의 생명을 구하려고 노력을 했으나 브라질에서는 그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고 사형을 집행하려고 했습니다.
  사형 집행하는 날 아침 갑자기 영국대사가 나오더니 그 사람의 몸에 영국 국기를 둘둘 말아줍니다. 조금 있더니 미국 대사가 나와서 성조기를 싸줍니다. 그리고 두 대사는 돌아서서 말하기를 '자 쏠 테면 쏘시오! 이 국기의 배후에는 이 세상 최대의 육군과 해군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브라질도 할 수 없이 그 사형수를 살려주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약합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믿는 순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입혀져서 마귀는 결코 우리를 해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 있게 외치기를 '하나님이 의롭다하신 자를 누가 송사 하리요!' 라고 외쳤습니다.

 

  ▶이제 그렇다면 의인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①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한마디로 주님을 모시는 삶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에녹처럼, 요셉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게 한 사람입니다. 요셉도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렸고, 다윗도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믿음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애통하는 회개가 따라야 하며, 주님과의 교제인 기도가 끊이지 않아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행복한 성도님들 우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십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의입니다. /할/
  ②자신과의 올바른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구원에 주신 은혜가 감사하고 이 땅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바라보며 감사해야 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얼마나 감사한 조건들이 많습니까? '나에게 이런 좋은 남편을, 이런 좋은 아내를, 이런 귀여운 자녀들을 주셨다니, 내게 이런 환경을 주시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때로는 마찰도 있고, 불협화음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사는 모습이 다 그렇습니다. 좋은 가정을 주신 것 먼저 감사하십시오, 또 교회 잘 만난 것도 감사해야 합니다. 저는 자부심을 가지고 목회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최선을 다해 좋은 꼴을 먹이려고 노력합니다. 여러분들을 위해 더 열심히 매달려 기도하기를 다짐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을 크게 바로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크게 바라보십시오! 지금 당장 되지 않은 것 가지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옷이 좋으면 어떻고 나쁘면 어떻습니까? 집이 크면 어떻고, 작으면 어떻습니까? 셋방이면 어떻습니까? 대학에 들어가면 어떻고 못 들어가면 어떻습니까? 이런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를 잘 정립하십시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아멘!/
  ③이웃과의 올바른 관계입니다. 이웃을 이해해 줍시다. 또 이웃을 사랑하십시다. 사랑은 용서가 따르는 것이고, 자기의 희생도 따르는 것입니다. 사랑은 손해 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영국에 예쁜 공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임금이 그토록 사랑하던 공주가 죽을병에 결려서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모든 의원을 불러내어 치료를 해도 공주는 더 병색이 깊어갔습니다.
  임금은 성문 앞 게시판에 '나의 딸의 병을 고쳐주는 사람은 사위로 삼을 것이고, 앞으로 나의 뒤를 이어 왕이 되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 어느 조그만 시골 산골에 삼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각기 희한한 재주들을 가졌습니다. 첫째는 천리 밖에 있는 천리안이 있었고, 둘째는 어디든지 빨리 타고 갈 수 있는 요술 양탄자가 있었고, 막내는 어떤 병이라도 나을 수 있는 마술의 사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가 천리안으로 궁정 앞에 게시판을 보았습니다. 둘째는 마술의 양탄자를 이용하여 세 형제를 싣고 재빨리 궁성으로 날아갔습니다. 막내는 마술 사과를 공주에게 먹였습니다. 그러자 거짓말같이 공주가 완쾌되었습니다.
  임금이 너무너무 기뻐서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임금은 삼 형제 중 누구에게 약속을 지켜야 할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삼 형제가 다 공로자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천리안을 보지 못했다면, 내가 나는 양탄자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마술의 사과가 없었다면'이라면서 자기들의 공로만 이야기합니다.
  깊이 생각하던 임금은 셋째를 택하였습니다. 왕은 천리안과 양탄자는 아직 그대로 있기 때문에 앞으로는 사용할 수 있지만 마술의 사과는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는 사랑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아낌없이 바쳐서 없어지는 데에 진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랑은 사과처럼 없어지게 주어야 합니다. 몽땅 주어야 합니다. 사랑의 극치는 우리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물과 피를 남김없이 쏟으시고 생명을 바쳐 우리 죄를 구속해 주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로 우리가 의인된 것입니다. 이 의는 사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웃에게 이 헌신의 사랑을 주십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믿/

 

  ▶'주리고 목마름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주리고 목마르다는 말은 가장 큰 욕망 욕구를 말합니다. 권력을 다하여 열성적으로 구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주리다'는 마4:2절에 주님이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가 이 단어입니다 오직 먹어야겠다는 생각 외에 아무 것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목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했을 때 이 단어가 쓰였습니다. 여러분 며칠 굶어본 적이 있습니까? 여름에 마실 물이 없어 목말라 본 적이 있습니까? 이와 같이 심정으로 의를 사모해야 합니다.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의'입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의에 본체이십니다. 예수님을 갈망하십시오! 예수께 주리고 목말라 하십시다. 시42:1절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할/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갈망해야 합니다. 야곱이 밤중에 얍복강 나루에서 혼자 고민하다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자 축복해 주시기를 심히 갈망하여 환도 뼈가 위골 되어도 결코 손을 놓지 않고 축복을 구하였던 그러한 의에 대한 갈급함을 가져야 합니다. /아멘!/ 여기 '주리고 목마름'은 '먹고 싶고 마시고 싶은 욕망'입니다.
  ▶아프리카는 오랜 가뭄에다, 내전으로 인하여 심각한 식량 부족을 겪고 있습니다. 세계의 구호단체에서 난민 수용소를 설치하고 그들에게 초라한 것이지만 식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한 끼 식사를 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며칠 씩 걸어서 난민 수용소를 찾아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배고프던 시절이 있었고 굶주림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침 인사가 '진지 잡수셨습니까? 식사하셨습니까?'가 되었습니다. 배고픔, 굶주림은 참으로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배고픈 설움이 제일 큽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배고프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의 육신을 위하여 주린 배를 채워 줄 양식과 갈한 목을 축일 시원한 음료가 풍성한 것이 복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배고프고 목마른 것'이 복됩니다. /믿/
  우리는 혀로 맛을 봅니다. 음식의 맛을 모르고 먹는다면 얼마나 심심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맛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아야 합니다. /아멘!/ 그래서 '주님의 말씀이 내 입에 꿀 송이 보다 더 다나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매일 매일 풍성하고 기름진 식탁을 대하는 것이 복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주리고 목말라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의 의를 찾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은 더욱 복이 됩니다. 그리하면 우리 하나님께서 신령한 것으로 채워 주시고, 우리의 영혼 뿐 아니라 육체까지도 채워 주셔서 배부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할/
  ▶육신이 병든 자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먼저 입맛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데 건강한 사람들은 식욕이 절로 납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갔다 집에 돌아와 가방 휙 집어던지며 제일 먼저 하는 소리가 '엄마 밥 줘!'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엄마 밥 줘!' 합니다. 이런 아이는 잘 먹기 때문에 건강하고 쑥쑥 자랍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한 육체를 가진 사람이 배고파서 먹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처럼 건강한 영혼을 가진 사람도 영적으로 배고파하고 목말라합니다. 의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의롭게 살려고 애씁니다.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힘씁니다. 자신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의를 채우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그러나 입맛이 없어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은 사람은 육체가 병든 것같이 의에 주리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고, 정직하게 살고,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하지도 않는 사람은 영적으로 병든 자입니다. /믿/
  여러분, 우리 모두 영적인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날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욕망이 있습니다. 지식에 대한 욕망, 재산에 대한 욕망, 권력에, 명예에, 사랑에 대한 욕망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욕망 보다 먼저 주님에 대한 갈급한 욕망이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서를 보면 하나님을 몹시 진노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명절인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소를 가져오고, 양을 가져오고, 가난한 자들은 비둘기를 가져와서 이를 제물로 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제사는 열심히 드리는 것 같지만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습니다.
  이를 보신 하나님께서 사1:11절에서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들은 헛되이 내 성전의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까? 진정한 목마름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형식과 의식적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자 하나님이 진노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할/
  ▶사실 사람은 누구나 의롭게 살려는 양심이 있습니다. 옳은 사람이 되어야지, 참되게 살아야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누구든지 이런 마음을 다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네로 같은 악한 황제도 황제가 된 뒤 사형을 승인하는 첫 번째 사인을 하면서 마음이 편치 못해서 '차라리 내가 글을 안 배웠으면' 하고 독백했다고 합니다. 독재자 히틀러도 '나는 정치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그림이나 그리면서 살았으면' 하고 독백을 했습니다. 이처럼 역사에서 악하기로 이름난 폭군들은 양심이 있기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성수 전철역, 건대 전철역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수없이 많은 성도들이 예배드리기 위해 섬기는 교회에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진정 의롭게 살려고 하는 욕망이 얼마나 있습니까? 정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얼마나 있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달라져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의를 간구하고 있는데 우리는 더 갈급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굶주린 사람이 먹은 것을 찾을 헤매듯이 목마른 사람이 시냇물을 찾듯이 우리의 심령을 의에 대해 갈급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습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의로운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면 우리는 아무 소망이 없는 자입니다. 왜입니까?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 자신도 죄로 인해 고민한 나머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람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탄식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약함을 이해하신 주님께서 '의로운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시지 아니하시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롬1: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믿음만이 의를 이루게 합니다. 믿음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믿음의 의는 나는 내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내 생활의 올바른 수가 있습니다. 내 삶은 하나님께 의탁할 때,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성령의 권능을 힘입고 바르게 살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는 것은 기차가 천로 위를 달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꼭 붙잡고 믿음의 길로 달려가십시오. 그곳에 배부름이 있고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잘 경외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이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던 의에 주리고 목말랐을 때에는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배불렀습니다. 신28장의 말씀대로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가도 복'을 받았습니다.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고, 가축이 복을 받고, 자녀가 잘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원수가 치러 왔다가는 도망가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숭배하고, 불법과 부정함으로 살았을 때에, 의에 배부르고, 의에 갈증을 느끼지 않을 때에 하나님은 배고프게 하셨습니다. 바벨론에 망하게 하여 왕과 대신들과 백성들이 쇠사슬에 묶여 끌려 간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의에 배부르고, 의에 갈증을 느끼지 않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받을 복은 무엇입니까?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배부르다는 말은 하나님의 의에 충만함이 내게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성령께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축복으로 이 땅에 기름진 것으로 채워주셨습니다. '배부르다.'는 말은 '만족, 평안, 기쁨' 등이 다 포함하는 말씀입니다.
  요6:3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시107:9절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또한 시34:10절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할/
  여러분, 부족함이 없는 상태가 배부름이 아닙니까? 우리가 잘 아는 시23편을 보세요! 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리고 5절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아멘!/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 적극적으로 주님을 사모하십시오, 주리고 목말라 하십시오! 그리하면 주님이 우리의 모든 영육 간을 부족함이 없게 하시고 또 잔이 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아멘!/

 

  ▶이제 우리가 더욱 힘쓰고 애써야 할 것이 있습니다.
  ①구원받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 앞에 무릎을 꿇고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고 절규했던 빌립보 감옥의 간수처럼 여러분들은 구원받기를 사모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천하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손에 넣었다 할지라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는 완전한 실패자입니다. 믿음을 가지세요! 하나님 앞에 가려면 누구에게든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는 무엇입니까? 롬3:22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가 있어야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습니다. 다른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빈 손 들고 나오십시오. 명예든지, 부든지, 권력이든지, 그것이 무엇이든지 아무 소용없습니다. 다 비우고 빈 손 들고 주님 앞에 나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믿음으로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요4:14절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할/
  ②은혜 받기를 간절히 사모합시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까? 밥 먹을 때 머리 숙이고 기도하는 것이고, 집에 가면 성경 가끔 읽는 것이고,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쓰는 것이 신앙생활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사람들은 은혜하면 축복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보면 한 차원 높은 신앙의 경지를 보게 됩니다.
  갈2: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속에 푹 쌓여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 분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밤이고 낮이고 그 분을 의지하고 그 분의 이름을 부르며 그 분을 믿고 그 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항상 믿고 의지하는 그 분이 누구십니까?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이것만큼 대단한 말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말만으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참으로 나를 위해 자기 생명을 십자가에서 희생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런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루라도 안 보면 안달이 나 못 견딜 정도로 좋아해서 결혼하여 30년을 함께 산 아내도, 남편도 나를 위해서 피 한 방울 흘려주지 못하는데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창조주 하나님이' 그 분이 나 같은 것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분에 대해서 더 알고 싶은 갈증이 없으십니까? '주님을 알고 싶어하고, 주님을 갈망하고, 그 사랑에 대한 비밀을 좀 더 이해하고 싶어서 마음에 갈증과 배고픔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날마다 나오기를 원하는 사람'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일컬어서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아멘!/
  우리 모두 이런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할/ 이런 간절함을 갖고 있는 분들은 주일이면 누구보다 부지런히 예배에 참석합니다. 적어도 10분전에 나옵니다. 왜냐하면 은혜를 사모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되도록 앞자리에 앉아서 목사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설교를 듣습니다. 이런 사람은 은혜 속에 살게 되어 있습니다.
  ③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면서 삶이 따라오지 않는 병입니다. 예수님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얼마나 신랄하게 비판하고 책망하고 저주했습니까? 그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그들은 말만하고 행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왜 기쁨이 없는지 아십니까? 순종이 따라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④마음을 활짝 여기고 모든 은혜를 사모하세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천사를 시켜서 '사람에게 필요한 행복을 갖다 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자 천사의 마음속에 질투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사람에게 행복을 갖다주기는 하되 좀 찾기 힘든 곳에 감추어 놓고자 했습니다. 천사는 다른 동료들과 상의를 했습니다. 한 천사가 이러한 제안을 했습니다. '사람의 손이 쉽게 미치지 않는 깊은 바다 속에 행복을 감추어 놓으면 어떨까?' 그러자 다른 천사가 고개를 흔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야, 사람은 재주가 많아서 그 정도는 쉽게 찾아내고야 말걸' 또 한 천사가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면 높은 산꼭대기에 사람이 원하는 행복을 올려놓으면 어떨까?' 그 의견에 대해서도 반대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좋지 않아. 사람은 모험심이 많아서 오히려 쉽게 찾아낼 거야'
  천사들은 이 궁리 저 궁리하던 끝에 드디어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람은 그저 자기의 머리와 재주만 믿고 설치기를 좋아한다. 그러니 그에게서 가장 가까운 자신의 마음속에 행복을 묻어두자. 그러면 오히려 쉽게 찾아내지를 못할 것이다.'
  그래서 천사는 '행복을 사람의 마음속에 묻어 두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가 주변의 여건에 따라서 행복이 좌우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환경을 더 낫게 개선하기 위해서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행복은 전적으로 마음가짐의 문제'입니다. 잠4:23절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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