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23강) 복수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 (마 5:38-42)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6:42

(제23강)     복수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 (마 5:38-42)

 

  '워치만 리'의 간증 문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그가 젊은 시절 농사를 지으면서 살 때. 어느 해 날이 몹시도 가물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물을 퍼서 자기 논에 채워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그가 아침 일찍 자기 논에 가보니까 물이 많이 줄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웃 논임자가 논둑을 터놓아서 소리 없이 자기 논으로 물을 빼내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몹시도 화가 났지만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이번에는 모른 척 하고 참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논에 물을 가득 채워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 논에 나가보았더니 또 물을 빼갔습니다. 그래서 그 이튿날 그 사람에게 따졌습니다. '왜 남의 논에 고여 있는 물을 당신이 빼 갔습니까?' 권리를 주장해서 이겼습니다. 그리고 그 물은 다시 자기 논에 채워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튿날도 다시 물은 빼가고 말았습니다. 또 가서 따져서 빼오고, 그 이튿날도 그런 일이 계속 반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기주장을 펴고 물을 뺏어 왔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속에는 도무지 평안이 없고 기쁨도 없고 오히려 불안하고 불편한 마음만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조용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 이래서 되겠는가?'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가 정당한 일을 했는데 왜 마음이 이렇게 불안합니까?' 그때 주님께서 내 마음 속에 '너는 그렇게 정당한 일만 하려하느냐? 정당한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할 수는 없겠느냐?'고 속삭여 주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정당한 일보다 그 이상 더 위대한 일을 할 수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내가 너에게 베풀어 준 것처럼 그 사람에게 베풀어주어라'는 음성을 듣고 이 사람은 깊이 깨닫고 이튿날 새벽 일찍 그 이웃집 사람이 물을 빼내기 전에 먼저 그 이웃집 사람의 논에 물을 대주고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그 마음에 놀라운 기쁨과 평안이 샘솟기 시작했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웃집 사람도 크게 감동을 받고 자기 잘못을 빌고 화목을 누리게 되었고 그가 믿는 예수를 영접했다는 간증입니다. /할/ ◀제목 소개!▶

 

  지금 예수님은 산상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이 지켜 행해야할 황금률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맹세에 이어서 복수에 대한 교훈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피해를 받았을 때 그것이 정당하거나 정당하지 않거나 보복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또한 복수의 문제와 아울러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특권과 권리를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소유해야 할 특권과 권리는 참으로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만은 주장함으로서 생기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복수는 죄인된 인간의 본능입니다. 복수하며 사는 사회는 무섭고 잔인한 사회입니다.
  또 우리가 우리의 특권과 권리만을 주장하며 산다면 이 세상은 살벌하고 무자비한 사회로 변해버릴 것입니다. 요즘 툭하면 어떤 보복살인사건을 우리는 자주 보았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연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말씀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인간의 죄와 본능과 죄악성'을 숨겨 놓았습니다. 그것을 아신 예수님께서 지적해 주신 말씀이 본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세 가지의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먼저 '성경에 나타난 보상법의 정신'과 그 다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의 바른 가르치심'이 나오고 있습니다.

 

  ▶38절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말씀이 구약에서 세 번 언급되었습니다. 율법의 참된 의미와 정신을 알기 위해서는 세 곳의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레24:19-20절에 '사람이 만일 그 이웃을 상하였으면 그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파상은 파상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지라' 그리고 신19:21절에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라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니라' 그리고 출21:22-25절에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낼 것이니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우리는 여기서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몇 가지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을 본시 누구에게 주셨습니까?
위에 출21:22절 끝 부분에 보면,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 낼 것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보상법은 우리 개개인이 이 원리를 적용하도록 주신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본시는 재판장의 판결 원리로 주신 말씀입니다. 재판장이 공정한 판결을 내리기 위한 원리로 주신 것이 바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 개개인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 권한이 없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우리는 창4:23-24절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뽐내면서 했던 말입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라멕이 무슨 뜻으로 이 말을 했습니까? 누구든지 자기를 해하면 자기는 그에게 칠십 칠 배로 되 갚아 주겠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복수심이 바로 그렇습니다. 예컨대 내가 다른 사람에게서 한 마디 욕을 먹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 마디만 해주면 직성이 풀립니까? 두 마디, 세 마디 해야지 갚은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본심입니다.
  만일 내가 실수로 다른 사람에게 어떤 피해를 주었는데, 그 사람이 내게 두 배, 세 배로 보복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따라서 하나님은 나를 보호하시기 위해서 개인적으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도록 허용치 않으셨습니다. 반드시 재판장의 공정한 판결을 통해서만 보상이 가능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둘째, 재판장은 판결을 내릴 때 어떻게 판결을 내려야 합니까? 반드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판결을 내려야 합니다. 그 이상도 안 되고 그 이하도 안 됩니다.
  예컨대 내가 가해자라고 생각해 보십시다. 내가 실수로 다른 사람의 이를 부러뜨렸습니다. 그러면 재판장은 어떻게 판결을 내려야 되겠습니까? '이는 이로 갚으라'고 판결을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재판장이 '이는 눈으로 갚으라'고 판결을 내리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너무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해 보십시다. 다른 사람이 내 눈을 상하게 했습니다. 그러면 재판장은 '눈은 눈으로 갚으라'고 판결을 내려야 내가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판장이 '눈은 이로 갚으라'고 판결을 내린다면, 내가 얼마나 큰 손해를 보겠습니까? 이처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기 위해서 이 법을 주신 것입니다.
  셋째, 이 법을 통해서 우리는 이웃 사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컨대 내가 다른 사람의 눈을 상하게 했습니다. 그러면 그 즉시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내 눈도 저렇게 상하게 되겠구나!' 이러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눈은 눈으로 갚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할/ 또 내가 다른 사람의 이를 부러뜨렸습니다. 그러면 무슨 생각이 들겠습니까? '내 이도 저렇게 부러지겠구나!' 그러한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이로 갚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법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몸을 내 몸처럼 귀히 여기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의 원리입니다. /아멘!/
  이와 같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재판장의 판결 원리로 주셨고, 또 재판장은 반드시 이 원리에 따라서 판결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이웃의 몸을 내 몸처럼 귀히 여기면서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처럼 보상법은 곧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의 근본정신은 한 마디로 '사랑'입니다. /할/
  ⑴더 이상 보복과 복수의 비극이 번지지 않도록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방법입니다. 즉 보복의 법이 아니라 자비의 법입니다.
  ▶어떤 사랑이 피해를 받았습니다. 물질에 손해, 육체에 상처까지 손상을 받은 그 사람은 억울하고 분해서 자기가 받은 그 이상의 보복을 하게 됩니다. 욕을 해도 한마디 더하고 때리려고 할 때 더 때려야 직성이 풀리고 마음이 풀립니다. 복수란 언제나 피를 부르는 잔인한 행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은 '네가 당한 것만큼 복수하라'고 제한을 둔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의 문제가 집단의 문제로 번짐으로 '애 싸움이 어른 싸움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집안 식구 한 사람이 맞고 들어오면 그 집안 형제가 다 나섭니다. 그래서 씨족싸움, 부족싸움, 국가 간의 싸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개인에게 당한 그대로 보복할 수 있게 함으로 더 이상 큰 불법이 일어나지 않도록 제한한 것입니다.
  ⑵하나님의 율법은 재판의 공의의 기준을 세워준 것입니다. 사사로이 개인이 쓰도록 만든 법이 아니라 법이 공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어떤 개인의 권력과 이익에 사용된다면 그 나라 기강은 무너지고 맙니다.
  고대의 법은 일종의 '보복 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은 '사랑과 자비로운 법'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법은 '더 큰 죄를 짓지 않도록 제한하기 위해 만든 법'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인간이 복수하고 싶을 때 복수하도록 합법적인 법으로 사용하게 해버렸습니다. 그리고 더 큰 것은 '공적으로 사용해야 할 법을 사사롭게 각자가 편리하게 사용'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면 누구든지 가질 수 있는 복수하고 싶은 마음, 자기 권리를 주장하고 싶은 마음에 대하여 39절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39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에 근거해서 그 당시 사람들에게 어떻게 가르쳤겠습니까? 그들은 '악한 자를 대적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명백하게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그들은 보상법의 적용을 잘못했습니다. 아울러 그들은 보상법의 정신도 완전히 무시해 버렸습니다.
  우선 그들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보상법의 적용을 잘못했습니다. 본시 보상법은 재판장의 판결의 원리로 주신 말씀입니다. 개인은 사사로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을 권한이 없습니다. 반드시 정당한 재판을 통해서만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을 개인에게 적용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에게 악한 자를 사사로이 대적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의 가장 큰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 당시의 '열심 당'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유대인들은 얼마나 원통하게 생각했겠습니까? 그런데 로마는 유대인들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 헤롯을 그들의 왕으로 세웠습니다. 헤롯은 유대인이 아닙니다. 헤롯은 에돔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인 헤롯이 자신들을 다스리는 왕이 되었으니까 유대인들이 얼마나 분개했겠습니까?
  급기야 유대인들 가운데는 로마인들에게 당연히 복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들에 의해서 조직된 것이 바로 '열심 당원'입니다. 그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의 영향을 받아서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고, 폭력은 폭력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 군인들에 대해서 폭력과 살인을 일삼았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당하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로마 군인들은 즉시 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게 되었습니다. 결국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증오심이 조장되었습니다. 사회는 점차로 질서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을 잘못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은 보상법의 정신을 망각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조금 전에 살펴본 대로 보상법의 근본정신은 한 마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라고 주신 것이 바로 보상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망각해 버리고 사람들에게 '악한 자를 대적하라'고 가르침으로서, 개인이 복수하는 것을 정당화했고, 그들은 복수심을 조장시켰습니다. 그런데 성경 어디를 찾아보아도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없고, '원수를 갚으라'고 하신 말씀도 없습니다. 오히려 레19:18절의 말씀을 보세요!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또 잠25:21절에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고 하셨습니다. /할/
  또 여기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말씀은 '악한 자를 피하라거나 악한 사람은 대적하는 것은 포기하라'는 말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의 뜻입니다. 우리가 만약 악한 세상, 악한 구조, 악한 사람들을 대적하지 않고 그들은 피해 산다면 어디로 가야합니까? 깊은 산 속에서 가서 기도만 하면 됩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서 살아야 합니다.
  여기 '대적하다'라는 헬라어원의 원 뜻은 '강경하게 저항하거나, 반대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악을 도모하는 사탄의 권세는 단호하게 꺾어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약4:7절에서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했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사탄의 정체는 무섭게 대적해 버리고, 사탄의 노예가 된 사람들의 짓은 대적하지 말고 불쌍히 여기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더 쉽게 이해하려면 롬12:17-21절까지를 읽어봐야 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세상 법은 악은 악으로 이기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습니다. ▶하루는 공자가 제자들에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원수를 덕으로 갚음이 어떻습니까?' 그러자 공자가 제자들에게 되묻기를 '그러면 덕을 무엇으로 갚겠는가?'라고 묻고, 다시 제자들이 말하기를 '원수는 원수로 갚고, 덕은 덕으로 갚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양 윤리는 복수의 사상이 지배적입니다. 아버지가 원수를 갚아 달라고 유언을 하면 그 유언을 따라 원수 갚는 것이 효라고 생각하고 평생을 원수 갚는 일에 몸을 바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오히려 원수에게 비참하게 당하고 마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원수를 갚더라도 잔인하게 갚습니다. '내 눈에서 눈물이 나게 하면 네 눈에서는 피눈물이 나오게 하겠다, 씨를 말리겠다. 삼족을 면해버리겠다.' 이런 영향을 받아 요즘도 보복정치가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교훈은 '악은 악으로 갚지 말라,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예수님은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습니까?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주어라'고 하십니다. 참 멋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오해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파렴치한 술주정뱅이나 강도가 따라올 때 그냥 맞아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미친 사람이 때릴 때 '자 여기 있소, 왼쪽도 때려주시오'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럴 때는 빨리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런데 왼쪽 뺨을 돌려대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수와 보복을 하기 위해 악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그 사람을 회개시켜서 새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든지 채찍을 들어 치시든지 둘 중의 하나로 하나님이 원수를 갚아 주실 것입니다. /할/
  ▶어떤 유명한 권투선수가 주님께 돌아와 변화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평소에 미워하고 또 무서워했던 한 사람이 그 힘이 센 권투선수가 예수 믿고 변했다는 말을 듣고 느닷없이 와서 주먹으로 그를 쳤습니다.
  아직까지도 이 권투 선수에게는 기술도 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얻어맞고는 '주님! 내 죄를 용서해 주신 것처럼 나도 저 사람도 용서하겠나이다.'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 후 한방 때렸던 그 사람이 권투선수의 태도를 보고 고민하다가 결국 그도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할/
  ▶유명한 중국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 옷을 입고 전도하기 위해 강을 건너려고 배를 하나 빌렸습니다. 이때 그 자리에 거만한 중국부자 한 사람이 선교사가 배를 타려고 하자 자기가 타야 한다며 선교사를 진흙탕 속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는 웃으면서 진흙 바닥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때 뱃사공이 부자에게 '이 배는 당신이 빌린 것이 아니라 저분이 빌린 배요, 저분은 외국 선교사로 이 땅에 오신 분'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때 허드슨은 오히려 웃으면서 인자하게 그 사람에게 자기 배를 같이 타고 가자고 했습니다. 그 부자는 큰 충격을 받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했고, 가진 돈으로 선교사를 많이 도왔답니다. /할/ 주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성도는 이렇게 생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멘!/
  스펄전은 <세상 사람들이 쇠망치를 들고 때릴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 철 받침이 되어야 하고, 또 돌로 쳐죽일 때,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스데반처럼 천사의 웃음을 웃는 그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말씀은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세인들의 교훈과의 비교를 통하여 예수님 자신의 권세로서 보상법의 참된 의미를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곧 이어서 예수님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보상법의 근본정신이 사랑에 있다는 사실을 39절 이하에서 네 가지 실례를 들어서 우리에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첫째로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예컨대 제 앞에 어떤 사람이 서 있습니다. 제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뺨을 때립니다. 이때 오른편 뺨을 때리는 것이 쉽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왼편 뺨을 때리는 것이 쉽겠습니까?
  내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오른편 뺨을 때리려면 손등으로 때릴 수밖에 없습니다. 불편합니다. 세게 칠 수도 없습니다. 왼편 뺨이 훨씬 쉽게 세게 때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우리의 오른편 뺨을 때리면 맞붙어서 싸우지 말고, 상대방이 더 쉽게 때릴 수 있도록 왼편 뺨도 돌려 대라는 것입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그만큼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라는 뜻입니다.

 

  ▶40절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둘째로,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예수님 당시만 하더라도 옷이 매우 귀할 때였습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겉옷은 밤중에 잠을 잘 때 덮고 자는 담요와 이불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의하면 겉옷을 전당 잡더라도 해지기 전에는 반드시 그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겉옷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누가 재판을 해서 값나가지 않는 속옷을 빼앗고자 하면, 그것 때문에 맞붙어 싸우지 말고 더 값나가는 겉옷까지 주어버리라는 것입니다. 빼앗기는 삶을 살지 말고, 주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관대한 마음, 넓은 마음을 가지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이 경우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억울하게 누명을 씌워서 법정으로까지 끌고 가 우리의 안전과 권리를 착취해 가려는 경우입니다. 이 세상은 순진하고 아무 힘없는 사람들에게 교활한 사람들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법을 악용하며 사람들을 괴롭히고 착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기의 모든 권리를 주장하고 또 권리를 찾기에 혈안이 되고 있습니다. 또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 타인의 권리를 무시하고 짓밟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권리선언이란 기본적 자유를 말하는 헌법 조문입니다.
  우리나라에는 개인의사 표현의 자유가 있습니다. 종교의 자유, 출판, 집회의 자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유도 있습니다.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경제 참여의 자유, 재판 권리와 법 앞에서의 평등의 권리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위를 한번 보십시오, 너도 나도 권리 주장만 내세웁니다. 노사간의 문제, 정부와 국민사이에서도 권리 주장이 난무합니다. 학원 가에서도 교수와 학생사이에 끊임없는 자기 권리 주장뿐입니다. 심지어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이렇게 자기 권리만 주장하는 곳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러한 문제에 대해 우리는 예수님이 해답을 귀 기울여 들어봐야 합니다. '너를 송사하며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이 말씀은 속옷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 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겉옷까지 내어줌으로 문제를 다른 차원에서 해결하시려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랍고 충격을 주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그대로 실천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할/
  ▶우리는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기 위하여 당시 법을 잠깐 알아봐야 합니다. 그 시대의 속옷은 무명옷으로 짠 한 통으로 된 자루와 같은 '키톤'이라고 불리는 옷입니다. 그리고 겉옷은 우리들이 흔히 보는 여러 가지 색깔로 화려하게 만든 것인데 이것이 모포와 같은 것으로서 낮에는 의복으로, 밤에는 이불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법에 보면 속옷은 저당 잡힐 수 있으나 겉옷은 어떤 이유로든지 저당 잡힐 수가 없습니다. 출22:26-27절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 보내라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
  그렇다면 재판을 걸어 속옷을 빼앗아 가려고 할 때, 법적으로 주지 않아도 되는 겉옷마저 주라고 하신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서 몇 가지의 깊은 교훈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⑴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누려야 할 권리가 있지만 결코 그 권리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피를 흘리며 투쟁하고 권모술수를 써가며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된 기독교의 정신을 자기 권리만 주장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오히려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해 주고 더 적극적으로 도와주라는 뜻이 이 속에 당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람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당시 사마리아인은 이방인들이라고 해서 철저하게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당했고,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크게 네 부류로 죄인으로 취급하고 외면해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과 이방인들입니다. 그런 천대를 주고 멸시를 준 유대인이 강도 만나 피 흘려 쓰려져 있을 때, 사마리아 사람은 정성껏 치료해 주고 자기 말에 태워 주막에 맡기면서 치료를 부탁하면서 치료비가 부족하면 돌아오는 길이 다 갚겠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고귀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됩니다. 빌2:5-8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할/
  여러분, 예수님이 자기 권리만 주장했다면 우리는 어찌 되었겠습니까? 그분이 인간 되기를 거부하고 십자가 지시는 일을 거부했다면 우리의 구원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늘에 있는 권세와 땅에 있는 권세를 한 몸에 가지신 몸인데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손해보고 핍박을 받고 권리를 포기했으며, 나이가 적극적으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화해 자가 되셨던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믿/할/
  여러분, 우리 모두 자기 권리만을 주장하는 태도를 버리십시다. 속옷을 달라하면 겉옷까지 주십시다. 오히려 더 사랑하지 못해서 죄송하고, 더 양보하지 못해서 미안하게 생각하는 마음, 저당 잡을 수 없는 겉옷까지 준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사랑과 용서의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아까 말씀한 권투선수처럼, 테일러 선교사처럼, 예수 복음 전도가 되어지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당장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겉옷을 빼앗겨서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세월을 5년이고 10년이고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승리를 우리 하나님이 안겨주실 것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41절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셋째로, 그 당시에는 이러한 법이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로마의 군인들은 군수물자를 운반하기 위해서 피 지배국의 사람들에게 강제부역을 시킬 수 있었습니다. 오리에 해당되는 거리만큼은 임의로 동행케 하고 그 이상을 넘으면 대가를 지불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성경에도 그 예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길을 힘들게 걸어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계속 쓰러지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군병들은 구레네 사람 시몬을 억지로 예수님 대신에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 바로 그 법에 의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들랑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고 기꺼이 십리까지 가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역시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이 경우 사람들이 법을 이용하여 강제로 노동을 시키면서 일을 하게 함으로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박탈하는 경우입니다. 이 말씀은 강제 징용을 뜻하는 말과 같습니다. 당시 로마의 법으로는 백성을 강제 징용하여 약 10리쯤 끌고 가서 다음 부락인과 교대시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법은 로마인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속국으로 있는 백성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명령을 받았을 때 얼마나 억울하고 기분이 나쁘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정신이요,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할/
  어떤 사람은 이 성경을 보고 기독교는 '약자의 도'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약자의 도가 아니고 '강자의 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적은 것을 희생하고, 더 귀하고 크고 영원한 것, 생명과 하늘나라를 보상받기 때문입니다. /할/

 

  ▶42절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보상법의 네 번째 정신입니다.
이 말씀은 누군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할 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더 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사업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빚을 내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말하는 것은 자신의 먹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아사지경에 이르렀을 때 와서 도와 달라고 간청할 때 거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 속에 숨겨진 뜻이 있습니다.
  ⑴인간의 소유란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롬11:36절에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현명한 부모는 자식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고 빨리 포기하는 부모입니다. 제물도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자기 것 인줄 알고 안심하다가 어느 날 부도를 맞고 눈물을 흘립니다.
  ⑵소유는 나누어야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신15:7절 이하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여기서 구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가난한 사람, 억눌린 사람, 힘없는 병든 사람일 것입니다. 즉 자기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 주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남에게 도움을 줄 때, ㉠자기 분수에 맞게 주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도와준다는 교만한 마음을 해서는 안 됩니다.
  건방진 태도로 도와주는 것은 그 사람의 자존심을 건들게 하고 도가 지나치면 화나게 만들어 오히려 마음에 반항을 일으키게 하는 요소가 됩니다.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않는 자는 항상 주는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행20:35절에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할/
  여러분, 우리 모두 주는 성도가 되십시다. 사랑을 주십시오, 물질을 주십시오, 더 중요한 것은 생명을 주십시오, 그리하면 심고 거두는 법칙에 따라 우리가 풍성한 축복의 주인공들이 되고 참 행복한 교회는 차고 넘치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아멘!/

  눅6: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할/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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