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강) 원수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 (마 5:43-48)
우리는 지금 마5장의 마지막 절을 펴놓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한마디로 '의롭게 살아야 한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의로운 세상에서 의롭게 산다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악한 세상에서 의롭게 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의에 대해서 20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의에 대한 여섯 가지 교훈을 우리들에게 차례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①살인의 문제입니다. 형제를 미워하거나 그에게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 곧 살인행위와 같다고 하시면서 '미워하지 말고 분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②간음의 문제입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그 마음이 간음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③이혼의 문제입니다. 간음한 연고 없이 이혼한 자는 범죄한 자라고 했습니다.
④맹세의 문제입니다. 오직 '예와 아니오!' 이상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⑤복수의 문제입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 뺨을 돌려대고 속옷을 달라하면 겉옷까지 주고, 오리를 가지고 하면 십리를 기쁘게 가주며 구하는 자에게는 주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여섯 번째로 원수에 대한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제목 소개!▶
오늘 본문은 의에 대한 가르침으로 그리스도인의 의의 최고의 영역이요, 절정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산상설교의 핵심이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43-44절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만일 우리 가운데 이렇게 살아간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은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신약에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레19:17-18절에 보면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율법의 전문가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 말씀을 자기들이 편리한 대로 왜곡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웃이란 자기 민족과 자기 종교에 속한 사람들 만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들은 원수라고 단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말씀을 확대해석해서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지만 이방인들은 원수와 같기 때문에 미워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말씀이 43절에 있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여기 '너희가 들었으나' 이것은 예수님이 긍정적인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부정적인 차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까지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이러한 가르침을 받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이런 말씀을 어디에서 들었을까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율법사들에게 들었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이 말씀은 성경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 말은 성경에서 나온 말씀이 아닙니다.
구약성경 어디에서 찾아봐도 이런 말씀은 없습니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구약 어디에서도 안 나옵니다. 그러니까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율법사들이 구약성경을 해석하면서 첨가했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구약 성경은 이렇게 가리킵니다. 레19:18절을 보세요!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가장 중요한 실수 가운데 하나는 성경을 자기를 편리한대로 뜯어 맞추는 자의적인 해석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하면서 이웃은 이스라엘 내 동족이요, 이방인은 우리의 적이요, 원수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인 자기 동족은 사랑해야 하지만 원수인 이방인은 미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리세인들은 성경을 안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곡해하는 부분이 더 무서운 죄입니다. /아멘!/
이단들의 특색이 무엇입니까? 성경도 믿습니다. 성경공부도 하고 설교도 듣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원 뜻대로 해석하지 않고 자기 편리한대로 적당하게 '리더스 다이제스트'처럼 뺄 것은 빼고 보탤 것은 보태어서 적당히 믿는 사람들이 이단입니다.
▶우리는 위에서 상고한 레19:18절의 말씀을 통해서 이웃 사랑에 대한 중요한 성경 적인 원리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랑의 대상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물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미워하는 원수도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레19:18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에게는 사사로이 원수를 갚을 권한이 있지 않습니다. 동포를 원망할 권리도 우리에게는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든지 사랑할 책임만 주어졌습니다. 친구는 친구니까 사랑해 주어야 되고, 우리를 미워하는 원수는 우리를 미워하니까 더욱더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신22:1-4절에 '네 형제의 우양의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 체 하지말고 너는 반드시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 네 형제가 네게서 멀거나 네가 혹 그를 알지 못하거든 그 짐승을 네 집으로 끌고 와서 네 형제가 찾기까지 네게 두었다가 그에게 돌릴찌니 나귀라도 그리하고 의복이라도 그리하고 무릇 형제의 잃은 아무 것이든지 네가 얻거든 다 그리하고 못 본 체하지 말 것이며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서 그것을 일으킬찌니라'
또 출23:4-5절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찌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 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찌니라'
여기 두 곳에서 차이점이 있습니다. 신명기에서는 사랑해야 할 대상이 우리의 형제였습니다. 반면에 출애굽기에서는 똑같은 내용이지만 단지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원수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에게도 사랑을 베풀어야 하지만, 우리를 원수같이 취급하는 사람에게도 역시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랑은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나 느낌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사랑은 언제나 구체적으로 실천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말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레19:18절에서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우리는 우리 몸에 대한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합니다.
예컨대 우리의 몸이 주리고 목말라 할 때는 먹이고 마시웁니다. 또 우리의 몸이 추워할 때는 옷을 입힙니다. 우리의 몸이 피곤함을 느낄 때는 재우거나 쉬게 합니다.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도 이처럼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25:21절에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받은 유전에 따라서 백성들에게 가르친 것은 레19:18절에 나타난 성경적인 원리와 서로 비교해 볼 때, 그들은 두 가지 원리를 모두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레19:18절에 없는 말씀을 임의대로 집어넣었습니다. 또 그들은 자기들의 편의를 위해서 중요한 말씀을 빼버렸습니다.
첫째, 그들은 사랑의 대상을 제한시켰습니다. 그들은 사랑의 대상에는 제한이 없다는 원리를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이웃만 사랑하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가르침을 부각시키기 위해 성경에도 없는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을 임의대로 덧붙였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구약성경을 찾아보아도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사랑의 대상을 제한해서 자기의 이웃만 사랑하라고 그릇되게 가르친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와서 시험적으로 질문을 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법사는 서기관의 별명입니다. 서기관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손으로 베끼는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들은 손으로 율법을 베끼다보니까 자동적으로 율법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을 다른 말로 율법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율법사는 예수님에게 이러한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이 질문은 무엇을 의도합니까? 그는 자기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따로 있고, 자기가 미워해야 할 원수가 따로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서 예수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답변으로 주신 것이 바로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아무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웃만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라고 잘못 가르쳤습니다. 그런 잘못된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서 그 당시 사람들은 끼리끼리만 사랑했습니다. 유대인인 자기 동족들만 사랑해야 할 이웃이라고 생각하고,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의 경우에는 무조건 미워해야 할 원수로 취급을 했습니다.
특별히 그들은 자기들을 억압하고 있는 로마 사람들을 지극히 미워했습니다. 또한 본시는 자기들의 동족이었던 사마리아 사람들까지 미워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몸 속에 이방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은 이방인의 편에 서서 일하는 사람, 예컨대 세리와 같은 사람들도 이웃의 개념에서 제외시켜 버렸습니다. 아울러 율법을 고의적으로 범하는 사람들, 예컨대 창기와 같은 여자들도 사랑해야 할 이웃의 개념에서 제외시켰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온통 미움이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사라지고 그들의 마음 속에는 계속해서 증오심만 쌓여 갔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강퍅해졌겠습니까? 악해질 때로 악해지고 말았습니다.
둘째, 그들은 사랑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로만 사랑했습니다. 얼마나 외식적입니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은 말로는 '사랑하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동족인 유대인이 강도를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저 피해서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들은 레19:18절에 없는 말씀을 덧붙였을 뿐만 아니고, 꼭 있어야 할 중요한 말씀을 고의적으로 빼버렸습니다. 레19:18절에서는 분명히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셨는데, 그들은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말씀은 빼버리고 그저 단순히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만 가르쳤습니다.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사람들에게 보이기를 좋아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서 영광 받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잔칫집에 가서도 언제나 상좌에 앉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충분히 자기들은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44절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최고의 능력을 붙잡은 자입니다. 여러분, 능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능력입니다. /아멘!/
⑴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⑵우리를 핍박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44절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①그리스도인에게는 이웃이 있을 뿐이지 원수란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삶을 누가 살았습니까? 예수님이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자기에게 못을 박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채찍으로 치고, 조롱하고 침을 뱉고 뺨을 때리는 사람에게 저주하지 않으시고,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지금 저들이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스데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돌로 치고 저주와 욕설을 퍼붓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빛이 났습니다. /할/
우리나라에서도 스데반처럼 순교하신 귀한 성자 목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1950년대에 돌아가신 손양원목사님이십니다. 그는 일제 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수없이 많은 옥고를 치를 분입니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나병환자들을 위하여 '애양원'이란 곳에서 목회를 하셨습니다. 1948. 10. 21 공산당에 의해 일어났던 여수, 순천, 반란사건 때, 그의 두 아들 동인이와 동신이가 공산당에 동조하지 않고 신앙의 지조를 지키다가 '안재선'이라고 하는 반란군에 의해 잡혀 고문 끝에 총살을 당했습니다.
그 후에 국군 계엄 사령부에 의해 반란은 안정되었습니다. 체포된 반란군 중에는 안재선이가 있었는데 그는 총살을 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위해 손양원 목사님은 앞장서서 구원운동을 하여 그를 사형에서 구출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두 아들을 죽인 그 사람은 자기의 양아들로 삼아 양재선을 손재선으로 고쳐 호적에 입양까지 시켰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2년 후 1950년 6, 25 사변 때, 나환자들을 두고 피난을 갈 수가 없었던 목사님은 나환자들과 '애향원'에 머물다가 그 해 9,13 공산당에 의해 체포되었고, 28일 여수에서 가까운 미평 과수원에서 총살형을 당하셨습니다.
지금은 손양원 목사님을 가리켜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미워해도 죄인은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사단은 미워해도 사단에 억압된 사람은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우리가 원수라고 생각했던 그는 결코 우리의 원수가 아니고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왜 우리의 원수가 되었을까? 그는 사랑해야 할 때, 우리가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②또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려면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 사랑은 덧입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에 종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⑴가족관계를 나타내는 사랑은 '스톨케' 사랑입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요, 부모에 대한 자녀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가장 큰 우주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한계가 있습니다.
⑵우리가 잘 아는 '에로스' 사랑입니다. 정열적인 사랑, 성적인 사랑입니다. '소포클레스'는 '에로스를 열렬한 그리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정열이 식어지면 이 사람은 쉽게 파산됐습니다.
성경에는 사랑이라고 하는 말이 그렇게 많이 나오지만 이 에로스라는 단어는 한 번도 쓴 일이 없습니다.
⑶진실한 친구의 우정을 나타내는 '필리아' 사랑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깊은 우정을 가졌습니다. 헬라어 단어 가운데 가장 인간의 사랑은 온유하게 표현한 단어가 바로 필리아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셨을 때, 아가페와 필리아를 썩어서 물으셨습니다.
⑷인간의 사랑을 초월한 신적인 사랑 '아가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추종을 불허하는 무제한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을 때, 바로 이 아가페사랑의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 사랑할 수 있는 조건이 하나도 없는 그런 사람에게 무한정 쏟아 붓는 사랑을 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아가페사랑입니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아름답고 매력이 있으면 사랑하게 됩니다. 또한 그럴만한 가치가 있으면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정말 사랑할 이유를 아무데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대상에게 생명을 바쳐서 끝까지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사랑을 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순교입니다. 기도의 성자 '조지 뮬러'는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간증하기를 '나는 죽었다. 이제 나는 하나님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고자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죽었다'고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는 사람만이 순교할 수 있습니다. 순교는 아무나 못합니다.
우리는 초대교회의 김익두 목사님을 잘 압니다. 목사님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한 다음 부고 장을 보냈습니다. 친구들과 아는 사람들에게 '나 김익두는 죽었다.'고 써서 보냈습니다. 이 부고 장을 본 사람은 굉장히 좋아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못된 짓을 많이 했으면 그의 부고 장을 받고 '그놈 참 잘 죽었다'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죽었다던 김익두 이 사람이 시장에 나타났습니다. 시커먼 책 한 권을 가지고 등장한 것입니다. 그 책이 무슨 책입니까? 바로 성경책입니다.
그때 어떤 부인이 김익두 목사를 시험해 보려고 모른 체하며 물통에 있는 물을 김익두에게 뒤집어 씌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물을 털고 나서 그 여인을 쳐다보며 하는 말이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당신이 받았소!' 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버스 안에서 한 목사님과 스님이 이런 대화를 했습니다. 스님은 '기독교는 우리 불교보다 저차원의 윤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는데 우리 불교에서는 아예 원수가 없거든요, 그러니 기독교가 불교보다 저 차원이 아닙니까?'
그때 목사가 스님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 그러면 스님은 일생동안 살면서 마음속으로 미워하거나 싫어했던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으십니까?'라고 묻자 '그야 있지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그렇습니다. 성경은 그 사람 즉 미워한 사람을 원수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실을 인정하고 거기서부터 우리는 출발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윤리가 저차원입니까?'라고 물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44절 하반 절에 보면,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는 사람만이 원수를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아멘!/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원수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스데반은 돌무더기 속에서 순교할 때에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일본의 성경 주석자 '내촌'선생은 '네 원수가 네게 미움의 독배를 마시우게 하거든 너는 그에게 사랑의 홍수를 대접하라'고 했습니다.
기도의 성자 바운즈는 '기도는 상황을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경우에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상황을 변화시키지만 기도하는 내가 변화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미움은 해결하고 원수라도 사랑할 수 있는 가장 실제적인 능력은 기도에 있습니다. /할/
여러분,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관심은 애정을 낳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기도가 나의 마음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믿/
본문은 원수를 대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 중에 하나가 '그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다루기 힘든 사람, 나에게 많은 상처를 입힌 사람, 나에게 화살을 던진 사람, 나에게 침을 뱉은 사람,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면 기도하는 중에 나에게 변화가 오고, 나중에는 원수를 사랑하는 자리까지 가게 되는 줄 믿습니다. /할/
여러분, 원수를 사랑하고 싶으십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방정식을 배워야 합니다.
▶45절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먼저 사랑하고 기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말은 구원의 조건으로써 '너희가 원수를 사랑하면 아버지의 자녀가 된다'는 의미에서 사용한 말이 아닙니다.
여기 '된다'는 말은 '자격을 갖춘다'는 말입니다. 즉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할 때, 또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할/
그리스도인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 되는 특권을 받았지만 그분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나라 시민권을 받았지만 꼭 지옥의 자식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은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그래서 요일4:7-8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의 모습입니다. 만약 제가 하나님이라면 예수 믿는 사람 집에만 태양 빛이 들어가게 하고, 안 믿는 사람 집에는 못 들어가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 본문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동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의도하신 바대로 행하셔서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똑같이 비취어 주시고 비를 불의한 자와 외로운 자에게 똑같이 내리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우리 행동은 다분히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이렇게 대접했으니 나도 그렇게 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우리의 행동원리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의 방정식에 따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다 예수 믿고 구원받기를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벧후3:9절에 보면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일반은총만을 받은 사람은 이 땅에서 잘 살아도 지옥으로 갈 사람이 있고, 구원의 은총을 받은 사람은 못살아도 천국에 간다는 것이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람이 능력잡니다.
▶46절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가장 악질적인 인간의 대명사를 '산에 가면 사자가 무섭고, 도시에 가면 세리가 무섭다.'고 할 정도로 세리는 혐오의 대상이었습니다. 당시 '죄인, 창녀, 이방인, 세리' 등은 사람 취급을 안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리를 예로 들어서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이라고 하신 것은 '세리들도 그것을 다 할 줄을 안다'고 하신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최고의 이기적인 인간 세리도 자기한테 잘 해주는 사람에게는 잘해 준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에게 친절을 베풀어주는 사람은 사랑합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악을 베풀어주는 사람은 미워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는 사랑해야할 이웃과 미워할 원수가 확연하게 구분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이나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이나 누구든지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에게는 이웃과 원수의 구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우리를 오해해서 우리를 자기의 원수라고 간주하고서 우리에게 악을 행할 수도 있고, 우리를 미워하며 핍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는 우리의 원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도 어디까지나 우리가 사랑해야할 우리의 이웃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도 우리의 전도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할/
▶47절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나한테 잘해주는 그 반응에 따라 나도 같이 잘해주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도 다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기브 앤 테이크' 식의 사랑은 아무 상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반가운 얼굴로 내가 먼저 인사하십시다. 누가 나를 미워한다고 해서 나도 못마땅하게 여기고 못 본척 하면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합니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서 화해의 악수를 청하고, 밝은 얼굴로 먼저 찾아가서 인사하십시다.
또한 자기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세상 사람들과 다름이 없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문명문화는 최첨단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5만원 권 지폐가 나오자마자 컬러복사기로 복사하여 사용한 사람이 잡혔습니다.
이렇게 지금은 첨단 문화시대입니다. 그런데 최첨단을 달리고 있는 첨단과학이 못 만들어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마귀의 능력을 우리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마귀도 기적을 행할 수 있습니다. 병도 고칩니다. 그러나 모방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어떤 성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사람은 죄인이요, 선을 선으로 갚는 사람은 양심 있는 사람이요, 악을 선으로 갚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최후에 기준을 설정해 주셨습니다.
▶48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결코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외식 적이었고, 자기 중심적이었습니다. 또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온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온전한 의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온전해질 수 있습니까? 인간의 의는 아무리 쌓아도 결코 온전해 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부자 청년에게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어렸을 때부터 성경에 나오는 모든 계명을 다 지켜왔다고 자부했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를 향해서 '너에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의는 아무리 쌓아놓는다고 할지라도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는 부족한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온전해 질 수 있습니까? 그 해답은 말씀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의를 붙들어야 합니다. /아멘!/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표준입니다. 자기가 이렇게 못산다고 기준을 허물어뜨리면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이와 같이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모습이 발견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곧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했는가는 몰라도 '40세가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무슨 화장을 했느냐? 무슨 옷을 입었느냐?' 이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얼굴 모습이 누구를 닮았느냐가 중요합니다.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여기서 '온전'이란 말과 '완전'이란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고 이 말이 완벽을 뜻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기 본문의 바른 의미는 '하나님과 같이 너희도 성숙하라' 즉 신앙이 자라야 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온전'은 '성숙'을 말합니다. 미숙한 사람은 항상 자기만 생각하지만 성숙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생각할 줄 압니다.
그리스도인은 미숙아가 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성숙, 성장해야 합니다. 또 여기서 말하는 온전함이란 하나님의 기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타락한 천사의 모습을 가지고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동물처럼 잘 먹고, 쾌락만을 즐기며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때, 우리의 인격이 완성되어집니다.
오늘 48절의 또 다른 의미는 '예수님처럼 생각하라, 예수님처럼 말하라, 예수님처럼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할/ 여러분, 예수님을 닮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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