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21강) 간음과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 (마 5:27-32)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6:40

(제21강)  간음과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 (마 5:27-32)

 

  러시아에는 이렇게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있습니다. 착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아름다운 궁전에 열쇠가 주어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 소녀가 매일 아침마다 길거리에 나가 할머니와 거지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나 열쇠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포기해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덫에 걸려 죽어 가는 강아지를 보고 진심으로 정성껏 간호해 주었습니다. 그때서야 궁전의 문지기가 나타나 그 소녀에게 열쇠를 주었답니다. 바로 그 열쇠는 형식적인 선행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 남을 돕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할/ ◀제목 소개!▶

 

  17절의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심에 대한 둘째 보기로 오늘 본문에서 제7계명을 들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 6계명은 이웃에 생명에 대한 것이고 제 7계명은 이웃에 정조에 대한 것입니다. 간음에 대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 주는 부분입니다.

 

  ▶27-28절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어떤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지극히 사랑하는 부부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아내가 병들어서 죽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죽기 전에 남편에게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여보, 나는 지금까지 세 남자를 사랑했습니다. 나는 그 세 남자 모두를 내 생명보다도 더 소중히 여기면서 사랑했습니다.'
  아내로부터 뜻밖의 고백을 듣게 된 남편은 다소 놀란 표정이었습니다. 아내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첫 번째로 사랑했던 남자는 내가 어릴 적에 옆집에 살던 오빠였습니다. 내가 두 번째로 사랑했던 남자는 대학 다닐 때 같은 과에서 공부하던 선배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세 번째로 사랑한 남자는 지금의 내 남편이 된 바로 당신입니다. 나는 이 세 남자 모두를 지극히 사랑했고, 그 사랑으로 인해서 나는 비록 짧은 삶을 살다가지만 누구 못지 않게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아내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말을 듣고서 한없이 서럽게 울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내가 사랑했던 세 남자는 모두가 남편인 자기를 가리키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일 평생토록 한 남자인 자기만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인해서 그의 아내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고백하고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얼마나 멋있는 사랑입니까?/할/
  ▶하루는 영국의 유명한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이 기자들과 함께 회견을 갖게 되었습니다. 기자 가운데 한 사람이 불쑥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만일 수상께서 다시 태어나신다면 그때는 어떠한 일을 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은 '만일 수상께서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이렇게 골치 아픈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또 사시겠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처칠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일 내가 다시 태어난다고 할지라도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할 것입니다. 또다시 나는 내 아내의 남편이 될 것입니다.' /할/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처칠의 아내는 무척이나 행복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나의 아내, 나의 남편을 사랑하고 또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간음하지 말라'는 제7계명을 주신 것은 '다른 사람에게 눈 돌리지 말고 남자는 자기의 아내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또 '아내는 자기의 남편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여기 '간음하지 말지니라'는 제7계명입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하신 말씀은 백성들에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 말씀의 본질을 왜곡하여 가르친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여자를 보고 마음속에 더러운 음욕을 품든지 또는 남의 아내를 탐내든지 간에 겉으로 간음행위 자체를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제 7계명을 범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축소시켜서 적용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하나님 앞에 죄가 없는 것처럼 위장하고 거룩하게 성전에 나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쩌다가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실수하고 간음한 사람들을 보면 혹독하게 그들을 정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이러한 행위와 위선을 무섭도록 정확하게 지적하시고 간음에 대한 바른 정의와 해석을 내리셨습니다. 즉 외적으로 간음의 행위를 한 것 뿐 아니라 내적으로 여자를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은 자까지도 모두 간음죄를 저질렀다고 했습니다.
  간음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말 사전에는 '간음이란 부부가 아닌 다른 남녀가 서로 성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원래 제 7계명은 제정한 목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정의 신선과 건전한 성 윤리를 확립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을 범하는 자에게는 참으로 엄격한 형벌이 무섭게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말씀하시기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하고 선언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품은 음욕 자체를 간음이라고 보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여자 보기를 아예 돌같이 하라는 뜻입니까? 여자 앞에서는 눈꺼풀을 땅에 내려 깔고서 땅만 보며 지나가라는 뜻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말씀을 통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깨뜨리고 계십니다. 마23:25절에서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
  그들 마음 속에는 음욕이 불일 듯 일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자기들은 간음죄를 저지르지도 않고,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잘 지키고 있다고 스스로를 의롭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간음을 행하는 행동이 없으면 제 7계명을 지킨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서기관 바리새인 해석은 '육체적인 행위를 해야 율법을 어긴 것이며 죄가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속에 가지는 내적 음욕도 이미 간음을 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죄는 행동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인과 동기 속에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름답게 생긴 여자를 보고 '아름답다, 예쁘다.'고 하는 생각이 잘못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쁜 여자,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예쁘다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다만 여인을 볼 때, 의도적이고, 고의적으로 음욕을 품고 보면 그것이 간음한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죄만 죄로 보신 것이 아니라 마음의 죄를 중요시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①율법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덕 표준입니다. 바울은 롬7:12절에서 '거룩하고 선하고 의로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거룩이나 의로움이나 선은 하나님 자신의 절대적인 도덕적인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계명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무엇이 거룩하고 무엇이 의이고 무엇이 선인 줄을 몰라서 도덕적인 혼란 속에서 영원히 방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덕 표준을 알게 된 것입니다.
  ②율법은 하나님 자신의 거룩하신 성품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③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롬3:20절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④율법이 주어진 또 하나의 목적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아까 율법이 주어진 목적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닫는 순간 그러면 '이 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애통하다가 인간이 울어도 힘써도 애써도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닫고 주님의 대속의 십자가를 의지하게 됩니다. /아멘!/ 
  여러분, 인간의 힘과 능력과 방법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나의 죄를 대신 져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총을 힘입으시기 바랍니다. /할/ 그런 의미에서 바울 사도는 갈3:24절에서 율법을 가리켜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본문 27-28절은 상고해 보겠습니다. 간음은 하나님께서 인간 세상에 세우신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가장 먼저 세우시고 가정의 모든 행복의 조건들을 주셨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이 계명은 한 마디로 가정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아담을 지으신 후에 다시 하와를 지으신 것을 '돕는 배필'로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는 서로 성적인 대상으로서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어렵고, 험난한 세상에서 서로 돕고, 의지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지어진 존재입니다. /믿/
  그러나 간음은 이러한 남자와 여자가 서로 돕는 인격적 관계로서가 아니라 서로를 육체적인 성적욕구를 만족시키는 대상으로만 보게 됩니다. 이것은 명백한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위반이 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이혼을 아주 쉽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혼을 하면서도 전혀 마음 속에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이런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아내가 아들을 낳지 못할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람들 앞에서 남편에게 무안을 주었을 경우도 이혼의 사유가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아내가 요리를 하다가 음식을 태웠을 경우나, 음식에 소금을 너무 많이 넣어 짜게 만든 경우도 이혼의 사유가 되었습니다.
  하여튼 남자들은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별의별 사유를 붙여서 아내를 내버렸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이혼증서 한 장만 써주면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런 뒤에 남자는 자기 마음에 드는 다른 여자와 합법적으로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 사회가 얼마나 성적으로 문란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했겠습니까?
  마19:9절에 우리 주님이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간음은 인간의 육체를 영적인 것과는 별개의 것으로 보는데서 시작합니다. 오래 전부터 인간세계에는 '인간의 육체는 하나님과 무관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 계시던 유대사회에도 그런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런 영향을 받은 인간들은 '자신의 육체를 스스로 아무렇게나 행동'하게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육체를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우리의 육체를 범죄의 도구로 내어주어서는 아니 됩니다. /할/
  또 어떤 학자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한자'라고 해석했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게 되는 것은 그전이 이미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나 세속을 바라봤기에 이미 영적 간음한 자가 되어 음욕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요셉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이기에 보디발의 부인이 그렇게 끈질기게 유혹을 해도 이겼다고 했습니다. 신앙 인에게 이런 결단도 있어야 합니다. /아멘!/
  본문에서 우리 주님은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보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행위와 동기를 똑같이 보신다는 것입니다. 곧 마음속에 더러운 생각과 나쁜 동기를 갖는 것도 죄이지만 그것을 숨기고 겉으로 의로운 척 위장하는 것은 더 가증스러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요4장에 보면 수가성의 여인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는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었던 여자였으며 지금 현재 살고 있는 남편도 언제 헤어질지 모르는 관계에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는 창녀라고 못된 여자라고 조롱하며 싫어했습니다.
  그러니 이 여자가 얼마나 마음이 복잡하고 상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해가 지고 서늘할 때, 물을 길러가지 못하고 해가 쨍쨍 내려 쬐는 열두시 사람들이 없는 시간에 물을 길러왔습니다.
  요4:2절에 보면 예수님은 그 여자의 모습을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고 가까이 갔습니다. 그리고 '물을 좀 달라'고 말을 건네었습니다. 여인은 깜짝 놀라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그래서 대화가 계속됩니다.
  대화는 어디까지 갑니까? 예배까지 갑니다. 여자가 말합니다. 요4:20절에 보면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23절에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그 여자는 비록 외면적으로는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꿀 수밖에 없는 여자였지만 그의 마음 중심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내면 깊은 곳에서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을 보시고 그곳까지 가셔서 만나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믿음으로 이 자리에 앉아 계십니까? 진정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사모하는 마음으로 오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중심을 보시고 주님께서 반드시 오고 이 자리에 오셔서 여러분들을 만나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우리주님은 인간의 마음은 귀하게 보십니다. 여자를 보고 이에 마음에 음욕을 품은 자는 이미 간음한 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잘 지키고 다스려야 합니다. 요셉처럼 말입니다. 잠4:23절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29-30절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3세기 경 유명한 신학자요, 설교가인 오리겐은 본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생은 성경연구와 복음전파에 바쳤습니다. 당시 로마는 극도로 퇴폐한 성적 타락으로 인하여 몰락 직전에 있었는데 오리겐은 그런 사회에서 학과같이 고귀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그의 삶의 비결을 물으니 '주의 말씀을 따라 사는 생활'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유명한 신학자 오리겐이 오늘 본문 말씀을 지키기 위해 실제로 '거세'를 했다고 합니다.
  시골에 제가 아는 사람은 도박을 너무 심하게 해서 패가망신을 당했습니다. 그가 다시는 놀음을 안 하겠다고 결심하고 자기 손을 작두 속에 넣어 잘라버렸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가 발가락으로 화투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죄의 습관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므로 실지로 눈을 빼어 내버리고 그리고 손을 찍어 내버리라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죄에 대하여 우리가 그만큼 철저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경은 읽고 배울 때, 그 말씀의 본뜻은 바로 깨달은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가령 어느 가정에 학교 성적이 아주 떨어지는 자녀를 둔 그의 부모가 자기 자녀에게 충격을 주어 열심히 공부하라는 의도에서 꾸중을 합니다. '이따위 성적을 갖고 오려거든 썩 집에서 나가라!' 하고 책망을 했습니다.
  그때 그 자녀가 그 말을 그대로 알아듣고 집을 나가버린다면 그것은 부모에 대한 올바른 순종의 태도가 아닙니다. 여기에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는 말은 진짜 빼버리고 잘라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당신이 만약에 죄를 범하여 오른쪽 눈을 빼버렸다면 왼쪽 눈이 또 범죄할 때, 왼쪽 눈도 뺄 것입니까? 오른손을 잘랐는데도 또 죄를 범한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육체를 아무리 짤라 내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손목을 잘랐는데 발목으로 노름을 합니다. 성적인 유혹, 도박, 술, 담배는 육체의 힘으로는 제어가 안 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느 장사도 육체를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바른 뜻은 '눈을 뺄 것처럼, 손을 자를 것처럼 행동하고 살라'는 뜻입니다. /아멘!/ 즉 손과 눈이 없어져서 다시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결단하고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막대한 희생을 지불하고라도 그 죄를 끊어버리라는 결단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결단에서 출발합니다. /믿/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죄를 끊고 바로 살 수 있습니까? 롬13:11-14절을 한 번 찾아서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성자 어거스틴이 이 말씀을 읽고 큰 변화를 받았습니다.
  ①육신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정욕을 위하여 우리의 육신을 사용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롬8:13절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사도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했습니다. 청년의 정욕은 피하는 것이 죄를 범하지 않고 순결한 지킬 수 있기 때문에 피하라고 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요셉입니다. 보디발 부인이 요셉의 겉옷을 부여잡고 늘어졌지만 요셉은 겉옷을 벗어 던지고 피했습니다.
  여러분, 기름에 불을 붙이면 어떻게 됩니까? 잘 붙습니다. 옛날 설교가들은 이 정욕의 문제를 다룰 때마다 '정욕은 불이다, 그러니 기름을 붓지 말라'고 했답니다. 여기서 불은 '퇴폐업소, 음란물 등을 보고 죄 속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②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을 조심합시다. 엡5:3절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③무엇보다도 늘 깨어 기도하면서 말씀 안에서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십시오, 엡5:18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우리의 힘으로는 안 됩니다. 오직 성령의 힘으로 죄를 이기고 성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능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아십니까? 성결한 생활입니다. 죄를 끊고 깨끗하게 살면 능력이 오고 축복이 옵니다. /믿/아멘!/

 

  ▶31-32절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이번에는 이혼의 대한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살인하는 시대요, 간음하는 시대일 뿐 아니라 이혼하는 시대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이혼에 대한 통계가 시시각각으로 급증하고 있으며 동시에 이혼이 결혼보다 더 쉽고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혼으로 생기는 가정의 파괴, 부부의 파괴, 자녀의 파괴를 심각합니다. 현대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이혼을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혼으로 인하여 생기는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기 싫어합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이러한 이혼 관은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것과 아주 흡사합니다.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어지는 장기려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950년 12월, 6·25 동란 중 평양 의과대학부속병원 2층 수술실에서 밤새워 부상당한 국군장병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곳에 폭탄이 떨어졌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어쩔 수 없이 국군 버스를 타고서 국군 장병들과 함께 황급히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인 김봉숙 여사와 또 다섯 자녀와 생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그는 늘 빛 바랜 가족 사진 한 장을 가슴에 품고 그 사진을 보면서, 사랑하는 아내를 그리워하며 계속 혼자 살았습니다.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재혼을 권유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북에 살고 있습니다. 아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 어찌 그 기다림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사람들이 자꾸 재혼하기를 권유하면 그는 이런 말로 완곡하게 거절했습니다.
  '내가 평양에서 결혼할 때 주례하시던 목사님이 우리 부부를 앞에 세워놓고 백년해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재혼하는 것은 100년 뒤에 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난 밤이면 그는 꿈속에서 사랑하는 아내가 자기를 보고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행복했다고 합니다. /정말 멋있는 분이십니다./할/
  하루는 간호사 가운데 한 사람이 황급히 뛰어 들어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장님, 큰일났습니다! 106호 환자가 간밤에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때 장기려 박사는 껄껄 웃으면서 '내가 도망가라고 문 열어 주었지. 생각해 보시오. 다 나은 사람을 돈이 없다고 해서 붙들고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소? 빨리 가서 땅이라도 파야지. 그래야 그의 가족들이 굶어죽지 않을 것 아니오?' 
  장기려 박사는 자기가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면, 그 누군가도 북쪽에서 자기를 대신해 자기의 가족들을 돌보아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랍니다.
  1990년 초에 그는 미국에 있는 어느 친척을 통해서 북한에 있는 그의 아내와 그의 사랑하는 다섯 자녀들이 무사히 잘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남북의 이산가족들이 상봉하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그는 어느 신문지상을 통해서 북한에 있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이런 애절한 편지를 띄웠습니다. 그 가운데 일부를 인용해 봅니다.
  <여보, 40년이 흘러 여든이 된 지금, 여보라는 호칭이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40년을 남한에 살면서 재혼하라는 권유도 많이 들었다오. 그러나 당신에게 한 스스로의 언약인 '우리 사랑은 영원하다.'라고 한 말을 상기하며 당신을 기다렸소.
  여보, 몇 년 전 남북한의 이산가족들이 몇 명씩 남과 북을 방문하여 해후의 기쁨을 나누고 돌아온 것을 기억하지요? 난들 왜 가보고 싶지 않겠소. 당신과 자식들을 만나고 지금은 돌아가셨을 부모님 산소도 둘러보고 고향집과 평양 신양리의 옛집에도 가보고 싶소. 그러나 일천만 이산가족 모두의 아픔이 나만 못지 않을 텐데, 어찌 나만 가족 재회의 기쁨을 맛보겠다고 북행을 신청할 수 있겠소.
  나는 내 생전 평화통일이 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온 민족이 함께 어울려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그 날 다시 만나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는 끝내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을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늘 빛 바랜 가족사진 한 장을 바라보면서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며 홀로 살았습니다. 그는 이렇듯 육체의 하나됨보다는 마음이 하나되는 것을 더 소중히 여겼던 것입니다.
  끝내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다섯 자녀들을 보지 못하고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아침, 성탄을 알리는 새벽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그 시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참으로 소박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죽거들랑 나의 비문에는〔주를 섬기다 간 사람〕이라고 써 주시오.'
  과연 그는 주를 섬기다 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그에게 허락하신 그의 아내만을 마음을 다해서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아내에 대한 우리 모두의 사랑이, 남편에 대한 우리 모두의 사랑이 이와 같이 아름답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결혼은 신성합니다.

 

  ▶다시 한 번 31-32절을 읽습니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그 당시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은 이혼의 이유가 있을 때에는 언제든지 이혼할 수 있다고 모세의 율법을 잘못 해석했습니다. 성경의 정신은 근본적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서 이혼 증서를 주라는 뜻을 이혼은 하라고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혼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이혼을 다음과 같은 조건일 때 가능한 것이라 했습니다. 신24:1절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바리새인들은 '수치 되는 일'을 빼고 누구든지 이혼 증서만 써주면 아내를 버려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수치 되는 일'은 간음과 같은 부정을 말합니다. 육체적인 결함이 이 이유입니다.

  ▶성경에서 부부 계약이 해약되는 경우를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①롬7:2절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한 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자 가죽으로 남편이 화장실에 가서 웃는 답니다.
  ②고전7:15절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신앙 문제 때문에 쫓겨날 때입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또는 아내가 남편에게 신앙을 버리면 살고, 안 버리면 이혼하라고 강요할 때에는 신앙이 생명이므로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이혼할 수 있습니다.
  ③렘29:4-6절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생산하며 너희 아들로 아내를 취하며 너희 딸로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생산케 하여 너희로 거기서 번성하고 쇠잔하지 않게 하라'
  유대 백성이 하나님 바벨론에서 포로로 70년을 살게 되었을 때 그곳에서 아내를 취하라고 했습니다.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으면서 도저히 다시 합하게 될 수 없을 경우 죽을 것으로 간주 다시 혼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④오늘 본문 32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남편이나 아내가 음행 죄를 범하였을 때 이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주는 교훈은 이혼을 절대로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본문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이혼증서를 써주라고 한 것에만 강조하여 얼마든지 이혼할 수 있다는 정 반대의 해석을 내리고 쉽게 여자를 버리고 남자의 정욕을 만족시켜 주는 결과가 초래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태도에 대해서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이 말씀은 마19:3-9절에서 아주 자세히 기록되었습니다. 읽어보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예수님은 사람들이 이혼을 쉽게 하는 이유를 몇 가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①결혼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결혼이란 남자가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결혼이란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기 때문에 결코 나눌 수 없는 관계입니다.
  ②이혼의 동시는 모세의 율법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완악함 때문이라고 마19:8절에 말씀하십니다. 이기적인 동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더 이상 이익을 취한 것이 없을 때, 헌신짝 버리듯 미련 없이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동기를 한마디로 인간의 완악함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임의로 맺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신성합니다. 그런데 이혼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임의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요, 부부는 하나님이 맺어준 짝입니다. 하나님이 맺어준 짝을 어떻게 인간 맘대로 헤어질 수가 있습니까? 절대로 안 됩니다. 하나님은 짝지어준 부부가 하나님을 바로 믿고 섬기면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믿/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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