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강) 맹세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 (마 5:33-37)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대화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말, 언어를 주셨습니다. 대화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을, 또 우리가 느끼는 것을 그대로 솔직하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대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입니다. 듣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여기서부터 대화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누구나 말만하고 싶어하는데 있습니다.
간혹 들을 때가 있는데 그때는 그가 말한 것을 반박하려고 듣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는 것 보다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들어야 합니다. 사람의 말도 들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바로 들어야 합니다.
▶듣는 데는 몇 가지 인격적인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⑴귀로 들어야 합니다. 아주 단순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귀로 듣지 않고 흘려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의 말을 날려보내면 그 사람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건성으로 듣는다고 하지요, 더더군다나 하나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들으면 말씀하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처사가 됩니다.
⑵눈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말하는 표정과 눈짓, 그리고 얼굴의 표정까지도 보아야 합니다.
⑶머리로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또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배경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생각해 보면서 들어야 합니다.
⑷입으로 들어야 합니다. 어떻게 입으로 들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들으면서 대답해 주는 것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셨군요!' /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도 '아멘! 아멘!'으로 화답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하는 사람의 뜻을 정확히 파악해서 입으로 들어야 합니다.
⑸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귀로만, 눈으로만, 머리로만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의 느낌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말속에 들어 있는 숨어 있는 감정을 들어야 합니다. 즉 그 사람의 입장에 들어가서 들어야 합니다. 이런 대화가 이뤄질 때 인격적인 관계로 발전되는 것입니다. /할/ ◀제목 소개!▶
늦은 저녁이었습니다. 어떤 아주머니가 닭고기를 사기 위해서 정육점에 들렀습니다. 때마침 정육점 주인은 하루 일과를 다 마치고 문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주머니는 정육점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만 닭고기가 조금 필요해서 그런데 살 수 있을까요?' 그 말을 듣고 정육점 주인은 냉장고로 갔습니다. 문을 열었습니다. 다행스럽게 다 팔고 딱 한 마리의 닭이 남아 있었습니다.
주인은 아주머니가 보는 앞에서 그 닭을 저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3kg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그것보다도 조금 더 큰 것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주인은 알겠다는 듯이 그 닭을 들고서 다시금 냉장고로 돌아갔습니다.
주인은 냉장고 문을 열고서 그 닭을 집어넣고 다른 닭을 끄집어내는 듯 하면서 똑같은 닭을 다시금 끄집어내었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닭은 딱 한 마리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똑같은 닭을 다시금 저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똑같은 닭인데도 4kg이 나왔습니다. 주인이 자기의 손가락으로 살짝 누르면서 무게를 달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모르고서 아주머니는 그것이 좋겠다고 하면서 싸달라고 했습니다. 아주머니는 돈을 지불하고 가게문을 나서더니 갑자기 뒤돌아서면서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아무래도 이것 가지고는 조금 부족할 것 같은데 조금 전에 달았던 것도 마저 싸 주세요.' 그러니 그 말을 들은 주인은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여러분, 거짓말 해 본 경험이 있으시지요! 세상에서 제일 큰 거짓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는 한 번도 거짓말 안 해 봤다.'고 하는 사람이랍니다. 거짓말도 하얀 거짓말이 있고, 검은 거짓말이 있다고 합니다. 하얀 거짓말은 지혜로운 거짓말이요, 검은 거짓말은 남을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크든, 적든 거짓말을 하고 살아왔습니다. 전문적으로 혹은 본의 아니게 또는 기술적으로 안 들키게 거짓말을 해왔습니다. 오늘 주제는 바로 이 부분에 대한 말씀입니다. 맹세와 거짓말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하시겠지만 사실은 아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산상보훈을 배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사람들의 의롭게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살인에 대한 올바른 교훈을 주셨고, 두 번째는 간음, 이혼에 대한 교훈을 말씀하셨고, 오늘 본문은 맹세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실을 주장하기 위해 곧잘 맹세를 합니다. '하늘에 두고 맹세한다, 땅에 두고 맹세한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어린아이들을 가리키면서 맹세를 합니다. 왜 사람들이 열심히 맹세를 합니까? 한마디로 자기 말에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이 자기 말을 잘 믿어 준 것 같지 않으니까 어떤 절대 권위를 빌려서 맹세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을 많이 하고 삽니다. 말을 잃어버린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이미 삶을 포기한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말을 한다는 것은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생각하고 행동하기보다는 말하기를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말의 실수가 있고, 말로 인한 변을 당하기도 합니다. 약3:2절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으며, 또 7-8절에서는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의 인격의 표준은 그 사람의 언어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어 순화'는 우리 믿는 사람이 꼭 해야 할 덕목입니다. /아멘!/
▶본문의 배경입니다.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맹세나 정직에 대하여 의도적으로 잘못 해석하고 오용했습니다. 살인, 간음, 이혼의 문제는 당사자에게만 국한되는 문제이지만 맹세나 정직의 문제는 그 사회를 불법을 자행하는 사회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에 더 큰 문제입니다.
외형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율법을 누구보다도 잘 지켰던 것으로 보여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실제로는 하나님과 가장 동떨어진 자리에서 하나님을 제일 잘 섬긴다고 착각합니다.
오늘날 신앙인 중에서도 자기 생각에는 예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33절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구약의 율법은 맹세한 것을 절대로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타난 맹세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켜야 합니다. /아멘!/
▶성경에 나타난 맹세의 원칙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하나님에게는 전혀 거짓이 없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한 마디라도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으십니다. 언제나 그대로 다 이루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도 이따금씩 맹세를 하셨습니다.
예컨대 창22장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고 난 뒤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하나님은 스스로를 가리켜서 맹세하셨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위의 존재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맹세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창22:17절의 보세요!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하나님은 신실하신 데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냥 말씀하지 않으시고 맹세를 하셨겠습니까?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을 더욱 북돋워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맹세까지 하시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이와 같이 약속은 본시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친히 맹세를 하실 뿐만 아니고 우리에게 맹세하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컨대 신6:13절을 읽어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여러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모든 경우들을 종합해서 생각해 볼 때 적어도 세 가지의 중요한 맹세의 원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맹세는 제한적입니다. 맹세는 언제 하는 것입니까? 꼭 필요한 때, 중요한 경우에만 맹세를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출22:10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출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자기가 기르는 가축을 옆집 사람에게 잠시 맡겨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출타한 사이에 짐승들이 와서 가축들 몇 마리를 물어가 버렸습니다. 또는 몇 마리의 가축들이 병들어 갑자기 죽었습니다.
나중에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그럴 경우에 주인의 가축을 잠시 맡았던 이웃 사람은 자기가 가축을 훔치지 않았고, 또 자기가 가축에 손대지 않았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입증할 수 있겠습니까? 증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뚜렷한 흔적이 증거로 남아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경우에 자신의 결백을 입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용되는 것이 바로 맹세입니다.
이웃 사람은 자기가 가축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인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인은 무조건 그 맹세를 믿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주인은 이웃 사람에게 손해 배상을 청구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히6:16절에 보면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맹세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고 꼭 필요한 경우에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둘째, 맹세는 지극히 엄숙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맹세는 반드시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창14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소돔 왕에게 맹세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14:22절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습니다. 또 창24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의 종 엘리에셀에게 맹세를 시킬 때도 역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도록 했습니다. 또 성경에 보면 나와 너 사이에 언약을 맺을 경우가 많습니다. 서로 간에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도 반드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창31장을 보면 야곱과 라반이 미스바에서 돌무더기를 세워놓고 하나님을 증인으로 해서 서로간에 언약을 맺었습니다. 또 삼상20장을 보면 다윗과 요나단이 서로 언약을 맺을 때도 역시 하나님을 증인으로 해서 서로 간에 맹세했습니다. 이와 같이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엄숙합니다.
셋째, 맹세는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맹세는 반듯이 책임을 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증인이신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고 만일 지키지 못할 경우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욕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레19:12절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할/
만일 맹세를 지키지 아니하면 증인되신 하나님이 친히 벌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맹세는 해로울 지라도 변치 않고 반드시 지키도록 되어 있습니다.
마14장에 보면 헤롯 임금이 생일을 맞이했습니다.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때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면서 헤롯의 마음을 즐겁게 했습니다. 헤롯은 그 딸에게 맹세했습니다. '네가 원하는 무엇이든지 내가 다 주겠노라'
그때 헤로디아의 딸이 무엇을 요구했습니까? 세례 요한의 머리를 요구했습니다. 헤롯은 자기가 한 맹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서 소반에 담아 헤로디아의 딸에게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맹세는 일단 발하면 반드시 지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나타난 맹세의 세 가지 원칙을 모두 무시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본문 33절의 말씀은 구약에서는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 대표적으로 세 가지만 찾아보겠습니다.
①레19:12절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②민30:2절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③신23:22-23절 '네가 서원치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니라마는 네 입에서 낸 것은 그대로 실행하기를 주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
이 모든 말씀을 종합해 보면 구약의 가르침은 헛맹세를 하지말고 맹세한 것을 그대로 지키라는 것입니다.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한 것이니 그대로 실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함부로 맹세하고 또 함부로 그 맹세를 저버린 답니다.
유대인들은 상술이 좋아서 장사를 잘하는데 외상거래를 하면서 내일, 모래, 꼭 준다고 해놓고 주지 않고 도망가기가 일수랍니다. 유대인들 중에는 중대한 발언을 할 때는 맹세하는 습관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유대인 두 사람이 문제를 안고 랍비에게 왔습니다. 그들의 사정은 한 친구가 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돈을 꾸어 주었는데 갚을 날이 오니까 꾸어준 쪽은 5백만 원 꾸어주었다고 하고, 꾼 쪽은 200만원 밖에 꾸지 않았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판단하는 데는 증거물이 없으니 그 양심 가지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랍비가 꾸어간 사람을 불렀습니다. '정말 2백만 원 밖에 꾸지 않았느냐? 너 율법 위에 손을 얹고 맹세할 수 있느냐?'라고 했더니 '죄송합니다. 사실은 5백만 원입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맹세를 하나님 이름으로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하늘로도 맹세하고 땅으로도 맹세하고 예루살렘을 걸어서도 맹세하여서 자기들이 짓고 싶은 죄를 합법적으로 그리고 율법에 틀리지 않도록 적용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23:22절에서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십계명 중 제 3계명인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였으나 지키지 못한 경우, 하나님이 욕을 먹게 됩니다.
여러분, 교회가 잘못되고 성도 한 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할 때 하나님이 욕을 먹게 된다는 것입니다.
민30:2절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우리가 마음에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있다면 사람에게 말을 하지 않았을지라도 꼭 지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삿11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사사들의 통치하던 시절 제 10대 사사로 활약한 사람은 '입다'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암몬 자손에게 18년 간 학대를 받고 있던 때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지도자가 없어 입다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입다는 큰 용사였으나 기생의 아들로 태어나 상속권을 얻지 못했고, 쫓겨나 돕 땅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그를 청하여 사사로 세웠습니다. 그런 입다가 암몬과 싸우려고 미스바로 모였을 때 하나님 앞에 서원기도를 이렇게 했습니다.
삿11:31절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이 말은 쉽게 표현해 보면, '하나님, 만일 하나님께서 암몬 족속을 제 손에 붙여 주시면 제가 이기고 돌아올 때 누구든지 저의 집 문 앞에서 제일 먼저 저를 영접한 자를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그 뒤 그는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하나님은 입다에게 승리를 안겨주셨습니다. 가는 곳마다 대승을 거듭니다. 32-33절을 보면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 손에 붙이시매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크게 도륙하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전쟁에서 크게 승리하고 그가 고향에 돌아올 때 누가 먼저 그를 환영했습니까? 무남독녀 외동딸입니다. 이스라엘은 개선장군이 돌아오면 소고를 치고 춤을 추면서 주민들이 환영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런데 자기 외동딸이 가장 먼저 아버지를 환영합니다. 이제 그 딸이 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입다는 어떻게 했겠습니까?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그렇습니다. 입다는 하나님 앞에서 서원한 것을 신실하게 드렸습니다. 자기 외동딸이라도 하나님 앞에 명세한 것이기에 드렸습니다. 신앙은 이런 것입니다. /아멘!/
여기 '헛맹세를 하지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언뜻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에 나타난 맹세의 세 가지 원칙을 모조리 무시해 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선 맹세의 첫째 원칙을 무시했습니다. 맹세는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발해서는 안됩니다. 꼭 필요한 경우에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백성들에게 '헛맹세를 하지말고'라고 가르쳤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자기가 하는 맹세가 헛된 맹세가 되지 않는 한 어떠한 경우에도 맹세해도 괜찮다'는 식으로 가르친 것입니다.
▶우리 한 번 구약의 맹세에 대한 뜻을 한 번 찾아 읽어보겠습니다.
신23:21-23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네가 서원치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니라마는 네 입에서 낸 것은 그대로 실행하기를 주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 /아멘!/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백성들로 하여금 이기적이고 사소한 문제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못하게 하는데 그 뜻이 있으며 또 하나는 함부로 생기는 혼란을 막고 동시에 거짓말 잘하고, 분리하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인간의 거짓된 마음을 제어하기 위해 법으로 제정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34-37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예수님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오해한 그룹들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에세네파는 종교개혁 때의 재 침례파, 그리고 현대의 퀘이커 교도들입니다.
그들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했다고 해서 결혼서약도, 법정서약도, 군대 갈 때 서약할 때는 맹세조차도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찾으려 종을 보낼 때도 맹세를 했고, 야곱도 요셉에게, 요셉도 형제들에게 다윗도 요나단에게 맹세를 했습니다.
예수님도 마26:63-64절을 보면 대제사장이 예수께 '네가 하나님께 맹세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바울은 롬9:1절에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맹세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맹세를 오용하고 악용한 것이 나쁩니다. 아주 중요하고 결정적인 일에는 맹세는 오히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앞에서의 결혼서약은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꼭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 본뜻은 잘못된 맹세, 곧 인간의 이기심을 만족시키는 맹세, 다른 사람은 착취하기 위한 맹세 등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맹세하지 말라는 말은 거짓 맹세로 말합니다.
옳은 것은 그저 옳다고 하고, 아닌 것은 단순히 아니라고 말하면 될텐데 그 당시 사람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의 영향에 따라서 일상적인 말에까지 맹세를 덧붙여서 말하기를 좋아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의 경우를 봅시다. 예수님이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였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바깥뜰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침 어떤 계집종이 베드로를 알아보았습니다. 계집종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그 소리에 베드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일어나서 문 쪽으로 나갔습니다. 여차하면 도망칠 속셈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계집종이 베드로를 알아보았습니다. 먼저 번 계집종과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러자 그 곁에 서 있던 사람들이 합세해서 베드로를 몰아세웠습니다.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왜냐하면 너의 말소리가 너를 표명하고 있지 않느냐?'
베드로는 너무나 다급해진 나머지 이번에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기 위해 저주까지 하면서 맹세했습니다. 물론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한 것도 거짓말입니다. 그것 자체도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더 나쁜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자기의 거짓말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맹세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은 것입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닭 우는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 심히 통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의 영향을 받아서 맹세를 너무나도 쉽게 남발하고 있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맹세의 둘째 원칙도 어겼습니다. 맹세는 본시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지적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의 영향을 받아서 하늘로도 맹세를 하고, 땅으로도 맹세를 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도 맹세를 했습니다. 자기 머리로 맹세를 하기도 했습니다. 또 마23장에 기록된 대로 성전으로 맹세를 하기도 하고, 또는 성전의 제단으로 맹세를 하기도 하고, 제단 위에 있는 예물로도 맹세하기도 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컫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그들의 의도는 좋았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은 맹세의 엄숙성을 완전히 손상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맹세를 하면서도 진지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너무 쉽게 맹세를 하는 지경에 이르러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맹세의 셋째 원칙을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맹세를 하면 해로울지라도 반드시 변치 말고 지켜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맹세하는 것은 지켜야 되고, 그 외에 다른 것으로 맹세하는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도 잘못된 맹세는 하지 맙시다.
⑴내 성을 갈겠다. ⑵내 눈을 빼라! ⑶내 배를 가르겠다. ⑷하늘이 두 쪽이 나도 하겠다. ⑸죽어도 하겠다.
등등 못 지키는 맹세는 하지 맙시다. 베드로와 같은 맹세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37절에서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할/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맹세해 놓은 것 때문에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지 못하거나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면 이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이요, 더 크게는 하나님을 속인 것입니다.
그런데 옳은 것을 옳다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면 단순한 교훈 같으면서도 사실로는 어려운 일입니다. 진실과 더불어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땅 위에 많은 사람들 중에는 압력에 굴복하고 이해타산에 끌려서 양심에 옳다고 느낀 것은 아니라고 하고 양심에 아닌 것은 옳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⑴인간이 연약해서 그렇습니다. ⑵신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⑶손해 볼까 그래서 그렇습니다. ⑷우유부단해서 그렇습니다. ⑸양심을 따라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고 죽일 만한 이유가 없는 것은 알고도 아니라 하지 못하고 군중들이 폭동이 일어날까 봐 '그를 십자가에 못 밖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⑴양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⑵자기의 말에는 반듯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⑶어떤 일에 대해서 확실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알아야 면장도 할 수 있습니다.
⑷그리고 의를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버릴 수 있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의 불의를 지적하여 '아니오, 잘못되었소,'라고 함으로 지혜롭게 용감하게 말하여 다윗으로 하여금 성군이 되게 했습니다. /할/
세례요한은 헤롯왕의 부도덕성을 지적하며 '아니오'라고 분명히 말함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만 요한이야 말로 의로운 사람, 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니오나 예는 목숨을 건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여기서 발등상은 발을 올려놓는 대를 말합니다. 우리가 기차를 탄다든지 비행기를 타면 좌석에 발판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발등상입니다.
35절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여기에 기록된 '큰 임금'은 만 왕의 왕, 곧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맹세를 하든지 간에 모두 하나님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련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36절에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이 말씀을 왜곡하여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요즘은 염색약이 발달해서 흰 머리카락은 얼마든지 검게 물들일 수 있고, 검은 머리카락도 빨갛게 물들일 수 있고, 노랗게 물들일 수도 있는데요.'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하신 의도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흰 터럭은 노인을 상징한 것이고, 검은 터럭은 젊은이를 상징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수명은 자기가 임의로 단축하고 늘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할/
우리가 무엇으로 맹세를 하든지 간에 다 하나님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되고, 그 외에 다른 것들로 맹세한 것은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는 식으로 가르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37절 말씀에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37절의 짧은 본문 속에 몇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⑴그리스도인의 언어는 아주 쉽고 단순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옳다, 아니다.'를 분명히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⑵타협이나 거짓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속을 해 놓고 지키지 않을 때가 많고 약속을 바꾸어 버리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약속은 해로울지라도 꼭 지키라고 잠언에 말합니다.
⑶'옳다, 아니다.'라는 말속에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예, 아니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할/
결론입니다. 맹세하지 말라는 말은 거짓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경박한 맹세들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24:3-4절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할/
거짓 맹세치 않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은 거짓 맹세하는 사람은 천국에 못 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함부로 맹세해서는 안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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