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26강) 기도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 (마 6:5-8)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6:44

(제26강)     기도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 (마 6:5-8)

 

  본문은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의 귀중한 말씀을 하시는 중에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1절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참된 신앙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무엇을 하든지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전의식! 요셉이 이렇게 살았습니다. 또한 진정한 보상도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복의 출처자이십니다. 그분만이 인간들에게 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마6장을 분류해 보면 1-4절은 구제생활에 대하여, 5-15절은 기도생활에 대하여, 16-18절은 금식기도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의 강조점이 모두 다릅니다.
  이 강조 점을 쉽게 말하면 구제생활은 이웃을 위하여 창을 여는 생활입니다. 특별히 구제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즉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착한 일을 했기 때문에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가 구원받았기 때문에 착한 일,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믿/
  그 다음에 기도생활은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창을 여는 것이 기도생활이고, 금식생활은 자기 자신을 향하여 창을 여는 생활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잘 믿느냐 못 믿느냐?' 하는 것은 그가 '오랜 신앙생활을 했느냐? 안 했느냐? 그에게 기적과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그가 환상을 보았느냐? 안 보았느냐? 그가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은 외적인 모습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내적인데서 찾아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기도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게 됩니다, 그것을 통하여 영적인 자양분을 공급받습니다. 기도가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공기나 물이나 태양의 공급이 없어 그대로 말라죽어 버리는 식물처럼 우리의 영혼도 그렇게 말라죽어 버릴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참된 신앙의 원리를 기도라는 신앙의 행위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목 소개!▶

 

  돈이 있는데도 돈을 쓸 줄 모르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또 자신의 신분이 왕자의 신분, 공주의 신분인데도 깨닫지 못하고 거지처럼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또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우리에게 주신 기도하는 특권을 사용하지 못하거나 포기하는 사람은 대단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 말씀에 깨달음이 있기를 기도합니다!/할/
  하나님은 하늘창고에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넣어두시고 우리에게 열쇠하나씩 주셨습니다. 열쇠를 주시면서 '너희들이 필요한 것이 있느냐?' 그러면 이 열쇠를 사용하라고 하십니다. 그 열쇠가 바로 기도입니다. /아멘!/
  기도! 신앙인이 가장 많이 투자해야 할 부분이 바로 기도입니다. 또 가장 많이 개발해야할 부분이 기도입니다. 신앙인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기도생활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 대화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과의 가장 중요한 교제가 무엇입니까? 대화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는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에 항상 영적인 대화가 필요합니다.
  또 기도는 호흡과 같습니다. 보통 7분 동안 호흡을 안 하면 우리의 뇌가 썩고 만답니다. 연탄가스에 중독이 됐거나 중환자가 되면 호흡은 잘못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산소마스크를 씌워서 뇌가 썩지 않도록 해줍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7분 아니라, 7시간 혹은 7일 동안 한 마디의 기도 없이도 잘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적입니다. 이런 사람은 육신적으로는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영적으로는 죽어 있는 사람입니다. /믿/
  근본적으로 모든 크리스천은 기도라는 통로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자양분을 공급받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기도가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마치 공기나 물이나 태양의 공급이 없이 그대로 말라 죽어버리는 식물처럼 되어버립니다. 우리의 신앙은 생각하는 것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함으로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아멘!/
  구제는 이웃을 향하여 우리의 마음의 창을 여는 것이라면 기도는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마음의 창을 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할 때 '누구에게 기도하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분명히 기도란 자기 자신에게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보다는 기도하고 있는 우리들 자신이나 옆에 있는 사람들을 의식하고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예수님은 위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본문에서 잘못된 신앙에 태도를 가지고 기도하는 두 그룹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의 기도요, 둘째는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의 기도입니다. 먼저 의식하는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기도를 살펴보겠습니다.

 

  ▶5절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건한 삶을 위해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 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시간으로는 3시, 6시, 9시입니다. 이것을 우리 시각으로 환산하면 오전 9시, 낮 12시, 그리고 오후 3시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물론 그들은 가급적이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본시 성전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기 때문입니다. ▶행3장을 보면 하루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성전의 미문에서 앉은뱅이가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그러면서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앉은뱅이의 발과 발목에 힘이 생겼습니다. 그는 그 즉시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리고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왜 성전에 올라갔습니까? 제9시, 곧 오후 3시의 기도 시간이 되어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할/
  이와 같이 성전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은 가급적이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면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들은 가까이에 있는 회당을 찾아가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못해서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시간을 맞추어서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 기도하기에 힘을 썼습니다.
  물론 그들이 하루에 세 번씩 기도 시간을 정하고서 기도하는 일에 힘쓰는 자체는 아주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도할 때 반드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고 당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의 기도는 ⑴외식하는 기도요, ⑵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거짓된 기도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이런 기도는 한마디로 기도의 응답이 없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기도의 응답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외식이란 말은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배우처럼 한다는 것입니다. 악하면서도 선을 가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남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기도의 특징을 알아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우리나라 시간으로 9시, 12시, 3시에 성전에 올라가 기도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게 된 유래는 '바벨론 포로시절에 뜻을 정하여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한 히브리 청년 다니엘의 신앙을 본 딴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답시고 가만히 집에 있다가도 괜히 아침 9시와 정오, 그리고 오후 3시에 밖으로 나가서는 길모퉁이에서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하는 척합니다.
  그들은 손을 들고 하늘을 향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여! 이 백성은 불쌍히 여기소서!' 아주 오랫동안 기도의 공연을 합니다. 그 모습을 본 백성들은 '아! 참으로 경건한 분이구나, 저렇게 애국심이 있고, 믿음이 훌륭한 것을 보니 역시 바리새인은 뭐가 달라도 달라!'하고 감탄을 한답니다. 바리세인들이 노린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자신의 경건함을 나타내 보이려는 그의 연출은 훌륭한 효과를 얻어서 사람들로부터 즉각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반응이 옵니다. 배우들이 공연할 때 군중들이 많은 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공연하듯이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네거리, 모퉁이 길, 시장 바닥에서 다니면서 기도의 순회공연을 합니다.
  그들이 기도하는 목적은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기를 바라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들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심과 경건성을 여러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 그들은 은밀한 기도에는 관심도 흥미도 없고, 오직 사람들에게 보이고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주님은 그런 기도가 바로 위선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거짓된 기도요, 외식하는 기도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인데 인간들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이라면 그 자체가 아주 가증한 것입니다. ▶눅18:10-13절에 보면,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가 나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그들의 기도를 분석해 보자!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여러분, 이 기도가 누구 들으라고 한 기도입니까? 하나님 들으라고 한 기도입니까? 사람 들으라고 한 기도입니까? 바리새인은 지금 세리 앞에서 자기를 과시하며 들으라고 큰 소리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리의 기도는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겸손한 기도인가?
  여러분,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솔직한 기도를 드립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그 마음의 동기를 보십니다. 다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5절의 주님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외식하는 기도하지 말고, 사람들 들으라고 하지말고,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께 자기의 구할 것을 겸손히 구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바리새인의 기도는 응답이 없습니다.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사람들은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을 칭찬했을 것입니다. '그 사람 기도 잘하는구나! 참 믿음이 좋은 사람이구나!' 그러나 그것으로 그들이 받을 상은 다 끝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그들에게는 화가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 듣는 그 순간이 그들의 상입니다. 기도의 상은 바로 응답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외식 적인 기도이기에 응답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겉으로는 어떤 모습으로 찬양했던 어떤 모습으로 기도하든, 우리 안에 품은 생각이 무엇인가를 보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경건하게 무릎을 꿇고 금식하며 기도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거룩한 사람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추하고, 더럽고, 살인하고 강도 짓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죄인의 괴수라고 정죄해서도 안 됩니다.
  그 사람도 언젠가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중심을 보십니다. 기도는 나의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믿/ 6절에서는 참된 기도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6절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는 은밀한 골방을 찾아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문을 닫아야 합니다. 세상의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해야 합니다. 세상의 뜬소문에 우리의 마음을 쓰고 세상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의 마음은 헛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산만해지기 쉽습니다.
  우리의 오관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에 쉽게 노출되어 있어 세상의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에 집중했다하더라도 어떤 다른 소리가 들리면 신경이 분산되게 마련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본문은 세 가지의 교훈을 줍니다. ⑴네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 ⑵묻을 닫고 기도하라, ⑶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여기 은밀이란 말이 무슨 뜻입니까? ⑴시끄러운 것이 아닌 고요한 것입니다. ⑵얕은 것이 아닌 깊은 곳입니다. 은밀한 사람은 깊은 내용이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귀속 말로 주고받는 소리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그 안에 깊은 내용이 있습니다.
  ⑶은밀이란 남에게 잘 나타내려 하지 않고 숨어서 하는 것입니다. 은밀하게 교회를 섬기고, 은밀하게 주의 종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께서 은밀하게 축복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은밀하게 보십니다. 세상은 온통 속임 판입니다. 학생이 선생을 속이고, 자식이 부모를 속이고, 친구가 친구를 속이고, 선생을 속일 수도 있고, 부모를 속일 수도 있고, 친구를 속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왜? 그 분은 은밀하게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6절을 한 번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⑴네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
남의 골방이 아니라 나의 골방입니다. 기도하기 위해선 특별한 장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 생각을 고쳐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산에 가야만 기도가 되고, 기도원에 가야만 기도가 된다고 합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밖에 있는 장소를 지정하지 않으시고 '네 골방'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광야에 나가면 이상한 종파들이 많았습니다. 에세네파, 금욕주의자들이 굴속에 자리 잡고 들어가 그곳에서 기도하며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기도하러 광야에 나갔다가 그들에게 감염될까 염려되어 '네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하셨을 것이라는 학자의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골방은 바리새인들이 기도하는 길거리와는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여기서 골방이라는 말은 문자 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골방만 기도하는 장소라고 한다면 골방 아닌 곳에서는 기도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여기서 골방의 의미는 '자기만 알고 하나님만이 아는 은밀한 장소'입니다. /믿/
  그 장소가 교회이든지 서재이든지, 부엌이든지, 직장에 책상이든지, 전철 안이든지 상관은 없습니다. 조용히 자기만 알고, 하나님만 아는 장소의 개념이 바로 골방입니다.
  미국의 포스틱 박사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비밀 회담입니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대화가 성립되려면 기도라는 방법을 통해야 합니다.
  우리는 친구나, 또는 사랑하는 사람과 교제할 때, 소란하고 복잡한 곳은 피하여 조용하고 아늑한 자리를 찾습니다. 특히 소중하고 진지한 고백이 있다면 더욱 조용한 장소가 필요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비밀리에 소중하고 진지한 고백을 하려면 사람의 눈이 닿지 않은 그런 장소가 있어야 하는데 그곳이 바로 골방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과 만나는 골방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골방에 가서 은밀히 계시고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 은밀한 중에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골방은 감람산 숲속 바위틈이었고, 모세의 기도의 골방은 미디안 광야와 호렙산 기슭이었습니다. 욥의 기도의 골방은 발바닥 끝에서부터 정수리 끝까지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재위에 앉아 기왓장으로 몸을 긁는 그 자리가 바로 기도의 골방이었습니다.
  요나의 기도의 골방은 고래뱃속이었습니다. 여러분 문제가 있습니까? 사건이 복잡하게 얽혀 돌아갑니까? 곤고합니까? 질병이 전신을 누르고 있습니까? 사업이 부진합니까? 왠지 마음이 답답하고 불안합니까? 기도의 골방을 찾으십시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얻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면 열린 것이니라.'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가 없느니라' '너희가 네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이루리라!' /할/ 여러분, 다시 한 번 이 시간 다짐하십시다. '나는 오늘부터 기도의 새 일을 시작하리라.' /할/
  ⑵문을 닫고 기도하라! 문을 닫아야지 지나가면서 보는 사람의 시선에서 피할 수가 있습니다. 또 시끄러운 소리에서 차단될 수 있습니다. 모든 방해를 다 차단하고 오로지 하나님께로만 마음을 집중해서 기도할 수 있도록 문을 닫으라는 것입니다.
  즉 이 말은 '외부와 차단하라, 정신 통일하라, 환경과 조건을 바라보지 말라, 1대 1로 하나님과 단판을 지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한다는 것을 소문내지 말고 아무도 모르게 열심히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⑶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바른 기도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 마음의 자세의 문제인 것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아무리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기도한다 할지라도 마음이 하나님께로 집중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가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대표로 기도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이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수직적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기도한다면, 그것은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진실한 기도가 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은밀히 보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생각도 뜻도 아십니다. 우리를 낳아준 육신의 부모보다 우리의 체질을 하나님은 더 잘 아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를 지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앉고 일어서는 것을 아시며, 우리의 고통을 아시며 인간의 머리칼까지도 다 세어 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시는 분에게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다. 약1:5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아멘!/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마다 꾸짖지 아니하시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 지금 우리가 기도할 때입니다. 벧전4:7절에서 베드로는 우리에게 당부하기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또 벧전5:8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이제 7절에서 예수님은 두 번째 잘못된 기도를 지적하고 계십니다.

 

  ▶7절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여기서 이방인이란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입니다. 곧 세속적인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방인들의 기도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중언부언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한다고 하신 말씀은 중언부언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서 중언부언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아무런 뜻도 없이 제멋대로 같은 말만을 되풀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똑같은 기도를 반복하더라도 정말 진실한 마음으로 간절하게 하나님 앞에서 기도한다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울도 자기의 육체를 괴롭히는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기도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기간을 정해놓고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똑같은 기도를 반복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을 오로지 하나님을 향해서 전심으로 구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입술 따로, 마음이 따로가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본시 중언부언은 이방인들의 특징이었습니다. 성경에도 그 예가 나타나 있습니다. 왕상18장에 보면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대결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 바알 선지자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똑같은 말만 반복했습니다.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그들은 똑같은 말만 온종일 반복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언부언입니다. 또 사도행전 19장에도 한 예가 나옵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반대하기 위해서 연극장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똑같은 말을 두 시간이나 계속해서 외쳤습니다.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역시 중언부언입니다. 왜 이방인들은 기도할 때 이와 같이 중언부언합니까? 계속해서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7절 하반부에 보니까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방인들은 기도할 때 자기들의 말이 많으면 많을수록, 기도가 길면 길수록, 기도에 더 큰 효과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갈멜산에서 바알을 부를 때, 그들의 중언부언은 네 단계로 이루어졌습니다.
  ⑴그들은 바알을 잠에서 깨워야 했습니다. 그들은 잠자는 바알을 깨우기 위해서 바알의 이름을 큰 소리로 계속해서 불렀습니다.
  ⑵그들은 송아지를 잡아서 제단 위에 올려놓고 주변을 돌면서 뛰어 놀았습니다. 자기들의 춤과 제물로서 자기들의 신인 바알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바알에게 아첨을 떨어서 기도의 응답을 받고자 했습니다.
  ⑶그들은 칼과 창으로 자기들의 몸을 상하게 하면서 피를 흘렸습니다. 아마도 바알을 협박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좋은 말로 할 때 들으라는 것입니다.
  ⑷그들은 그 뒤로도 계속해서 바알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들은 바알을 귀찮게 해서라도 기도의 응답을 받고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기약도 없이 중얼거리는 기도가 있습니다. 바로 불교에서 염불하는 것, 오늘날 우리가 불교의 염불과 비슷한 위험성 있는 기도문하나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외우는 주기도문입니다.
  안 하면 불안하고 하자니 별 의미가 없는 기도라면 바로 우상 숭배하는 이방인들의 중언부언하는 기도에 불과한 것입니다. 특별히 이방인들의 중언부언의 기도는 질보다는 양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염불 외우듯이 의미 없는 기도를 오래하는 것입니다. 아무 의미 없이 생각 없이 확신 없이 하는 기도가 바로 중언부언인 것입니다.
  계속 반복하는 기도를 여기서 중언부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 주님은 기도의 반복 그 자체를 비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기도는 응답될 때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또한 기도할 때 한 가지 문제를 우리는 붙잡고 오랫동안 반복해서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 중언부언은 무의미하고 생명이 없는 기도를 말합니다. 사실 우리의 기도가 바른 기도가 되지 못하고 위선적으로 거짓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기도가 다분히 '형식적'이라고 하는데 있습니다.
  형식적이라는 말은 내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속이 비었다는 말입니다. 깊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형식만 있지 내용이 사라져 버린 껍데기만의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되었으니 하고 예배시간에 기도하니까 따라 하고 정해진 시간에 따라서 기도하는 정도로 모든 기도생활을 다했다고 자위하면서 사는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위선적인 기도요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오래 기도하는 것을 바라십니다. 눅6:12절에 보면 주님은 온 밤을 새우며 철야기도를 하셨습니다. 또한 마26장에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39절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밤새도록 반복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앞에서도 말씀했습니다. 바울도 하나님께 육체의 가시를 해결해 달라고 간절히 세 번씩이나 기도했습니다. 사실 기도는 하나님이 이루어 주실 때까지 반복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중언부언하지 말라, 말을 많이 하지 말라' 이 말씀은 확신이 없는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냥 의미 없는 기도, 중심 없는 기도, 입으로만 움직였지 마음은 딴 곳에 있는 그런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암송하듯이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암송하던 두 개의 기도문이 있었습니다.
  ⑴'쉐마'입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인데, 우리말의 뜻은 '들으라'입니다. 신6:4-9, 11:13-21, 민15:37-41절의 말씀을 발췌해서 그들은 '쉐마'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기도문을 아침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씩 암송했습니다.
  ⑵'쉐모네 에스레'라는 기도문입니다. 이는 히브리어로 18이라는 숫자를 뜻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삶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경우들을 18가지로 압축했습니다. 그리고는 각 경우에 적합한 기도문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그 기도문이 길었겠습니까? 그들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 시간마다 그 장황한 기도문을 암송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은 자기들이 해야할 기도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이러한 기도문을 진실한 마음으로 정말 또박또박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심정으로 암송을 했더라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들은 그저 기계적으로 형식적으로 암송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기도가 아무리 길었다 한들 이방인들의 중언부언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결국 그들의 의는 이방인의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낮은 수준의 의로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확신 있는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구하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붙들고 뜨겁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면 주십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게 됩니다. 또 조건이 환경이 열리게 됩니다. /믿/

 

  ▶8절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 아시느니라"
  부모는 그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언제나 더 좋은 것을, 그리고 더 많은 것을 주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지각이 부족하기 때문에 때로는 잘못 구할 때도 있습니다. 돌이 떡인 줄 알고 돌을 구할 때도 있고, 뱀이 생선인 줄 알고 뱀을 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떡이 있어야 하고, 생선이 있어야 함을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돌 대신 떡을 공급해 주시고, 뱀 대신에 생선을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언제나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여기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누구를 말합니까?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중언부언하는 이방인들을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구하지 전에'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내세워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다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신앙입니다. 이 말씀은 기도에 앞서 가져야 할 신앙적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심으로 우리 자신보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더 잘 알고 계시는 분이심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본문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참된 기도란 '하나님께서 이미 다 아시고 계신다는 확신이 기초'해야 합니다. 기도란 자기 신앙의 자화상입니다. 기도를 잘 하는 비결은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저희를 본받지 말라'는 말은 곧 '예수님만 본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심으로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존경과 신뢰와 사랑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진실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제일 법칙은 하나님께 거짓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끈질기게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포기하는 일이 많습니다. 또한 우리가 말은 많이 할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유창한 말보다는 경건한 마음의 열정을 가지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기도의 수보다는 그 무게를 다시는 분이십니다. 기도의 길이 보다는 기도의 깊이를 재시는 분이십니다. 기도는 지금도 능력이 나오고 역사가 나타나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할/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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