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34강) 남을 판단하지 말라 (마 7:1-6)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6:50

(제34강)       남을 판단하지 말라 (마 7:1-6)

 

  본문은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교훈해 주신 산상보훈의 황금률입니다. 앞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참된 신앙을 위해서 바른 물질 관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물질의 유혹에서 벗어나 그 물질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데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또 세상 염려에서 해방을 받으라는 교훈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바른 신앙인들에게 주는 권면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들만 하나님이 선택해준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이 매우 강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타민족과는 달리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율법과 계명이 있고, 성경이 있고, 성전이 있고,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있고, 하나님의 보호와 능력, 기적의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선민의식이 너무 고조되어 자기들의 교만으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키면 이미 구원 얻고 심판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을 죄악시했고, 심판의 대상자로 보았습니다. 자기들만 구원받고 자기들만 주어지는 축복인 줄 알고 이방인들을 개 취급했습니다(수로보니게 여인).
  그러나 롬3:9-10절에 보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하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남을 판단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죄인이 죄인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오직 판단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만이 인간보다 뛰어난 통찰력과 능력을 가지시고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자기 자신을 판단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바로 행하고 있는가? 바로 가고 있는가? 바로 믿고 있는가? /할/ ◀제목 소개!▶

 

  ▶1절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는 분명히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 적인 신앙생활을 염두에 두신 말씀이고, 오늘날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누구입니까? 누구보다도 하나님은 잘 믿는다고 착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제일 잘 믿는다고 착각하고 자기와 같지 못한 사람들은 비판하고 깔보고 무시하는 독선적인 태도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판단 기준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들의 가치관으로, 전통으로, 유전으로, 문화적 배격으로 비판의 칼을 휘둘렸습니다.
  성경에서 그들의 비판하는 모습을 찾아보겠습니다. 바로 눅18:10-14절의 말씀입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11절에 보면 바리새인은 성전에 가서 따로 서서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을 너무나 신앙이나 인격이 훌륭하고 완벽해서 감히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기도할 수 없음으로 따로 서서 홀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또 12절의 그의 고백을 들어보면 아주 오만하고 다른 사람을 깔보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이 얼마나 가증한 기도입니까?
  그런데 13절의 세리의 기도는 어떤 기도입니까? 그는 성전 가까이도 가지 못하고 차마 눈을 들지도 못한 채 다만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 나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자격도 없는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나는 정말 죄인입니다.' 얼마나 겸손한 기도인가? 이런 기도가 응답을 받습니다.
  14절에서 예수님은 세리를 바리새인보다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 인정함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하고 했습니다. /할/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태도는 자신을 의롭다고 믿는 착각해서 오는 행동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허물과 실수와 잘못을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허점이나 실수만을 꼬집어 비판합니다.
  성도가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렇게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만 바로 하면 된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여기 비판한다는 말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비방하는 것'을 의미입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말은 '남을 비난하지 말라, 남을 정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비판하지 말라'는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 몇 가지 잘못된 해석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①'비판하지 말라'
이 말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고도 모른 채 눈감아 주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잘못된 점이 있으면 바로 가르쳐 주어야 할 책임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습니다. /믿/ 본문은 불의를 못 본체 하거나 잘못을 덮어두라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②그렇다고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자기의 의견을 제시하고 문제점을 지적하는 일들을 하지 말라는 뜻도 아닙니다.
  ③윗사람의 바른 충고나 조언을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비판하지 말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취미나 기호에 따라 비판하거나 자기의 명예 때문에 교만과 시기와 질투 그리고 당파에 의한 비판을 말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다른 사람은 무시하고 깔보고 깎아 내리기 위해서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을 모함하고 헐뜯고, 정죄하기 위한 비판을 말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무심코 하는 버릇에 의한 비판도 말라는 것입니다. /할/

 

  ▶왜 비판을 하지 말라야 되는가?
  ①인간의 눈은 전부를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비판이란 언제나 부분적으로 보고 그 보이는 대로 비판합니다. 부분적인 것을 보고 전부를 평가합니다. 얼마나 위험스런 일입니까?
  ②사람들은 들은 대로 평가합니다. 보고 평가해도 전부를 볼 수 없는데 남의 말을 듣고 평가한다면 그 평가를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듣고 비판하는 것은 정확한 비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③인간은 능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④중요한 것은 인간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남을 평가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오만과 편견이 있고, 이기적인 동기와 욕심이 도사리고 있으며 그것을 우리가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죄인이 죄인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습니까?
  ⑤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자라온 환경과 부모와 친구의 영향력을 받기 때문에 사람의 가치 기준과 판단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개인의 성격과 기질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자기와 동향이거나 선후배와 친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잘못이 있어도 잘 봐주고 비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허물을 감싸주려고 하며 오히려 누가 그 사람을 욕하면 도리어 변명해줍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기가 평소에 미워하고 감정이 있는 사랑인 경우에는 잘하는 것도 코방귀를 낍니다. 조금만 틈이 보이면 여지없이 깎아 내립니다. 잘못된 비판의 태도입니다.
  사람들은 겉으로는 옳고 그름을 말하고 정의감을 말하지만 정의감 뒤에는 인간의 죄의 본성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너무나 잘 아셨기에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비판이 아니라 용서로, 정죄가 아니라 은혜로, 미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감싸주어야 합니다. /아멘입니까?/할/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모든 것을 환하게 다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판단하시는 일에 매우 신중하셨습니다. 예컨대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을 심판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먼저 어떻게 하셨습니까?
  창11:5절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하나님이 친히 내려오셔서 자신의 두 눈으로 성과 대를 쌓는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기 전에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창18:21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무엇을 판단하시기 전에는 매우 신중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그들은 그 여인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을 향해 요8:11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할/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셨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면서 그들을 사랑으로 품어주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까지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위한 죄사함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이 비판하지 말아야할 큰 이유를 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2절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비판을 금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남을 비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비판하는 자는 비판을 받기 때문입니다. 비판하는 자는 누구에게서 비판을 받습니까? 하나님에게서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비판'이라고 조금 약하게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헬라어의 원어는 매우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충고나 책망의 차원이 아니고, '심판하며 정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심판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 누구도 판단할 권리가 없습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우리 모두는 심판을 받아야 할 대상들입니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감히 비판하겠습니까?
  ①남을 비판하면 그 비판이 자기에게 온다고 했습니다. 산울림의 법칙은 더 큰소리로 메아리쳐 옵니다. 남을 비판하면 자신은 더 큰 비판을 받습니다.
  평소에 거짓말을 기술적으로 아주 잘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거짓말하려고 하면 제일 빨리 눈치를 챈답니다. 또 평소에 도둑질을 잘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움직이는 것만 보고도 도둑질을 할 것인지 안 할 것인지를 눈치 챈답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안에 실수와 허점이 많은 사람들은 남을 모질게 비판하고 몰아세워 자신의 약점을 감춘다고 심리학자들이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은 언제나 남을 용서하고 관용하며 상대방의 실수와 허점에 대해 이해가 깊답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는 심정으로 죄인들, 세리들, 창기들 그리고 버려진 사람들은 만났고 그들을 위로하고 싸매 주셨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에서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까지도 정죄하거나 비판하지 않으셨답니다.
  여러분! 남을 정죄하지 맙시다. 정죄하면 자신이 그 정죄를 받게 되고 비판하면 그 비판을 받게 됩니다. '바로우' 박사는 '다른 사람을 비판함으로 그들도 똑같이 우리를 보복하도록 북돋아 주는 셈이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 속담에 '오늘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서양 속담에도 '돌을 던지면 뱀이 되어 날아온다.'는 말도 있습니다. /할/ 예수님은 마5:7절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 때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하심을 받게 됩니다. /아멘!/
  ②'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여기 '헤아린다.'는 말은 '달아본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의 인격과 심사를 달아보고 헤아려 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언행심사는 세상 사람들이 헤아립니다. 즉 달아봅니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람들이 우리를 헤아리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더 헤아리고 계십니다. /믿/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을 달아보십니다. 우리의 신앙을 달아보고 우리의 양심도 달아보시고 우리의 충성심도 달아보십니다. 단5:22-31절을 보면 바벨론 제국의 벨사살 왕이 왕족들과 귀족들 1천명을 초청하여 파티를 했습니다.
  한참파티가 흥이 났을 때 벨사살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큰소리로 '여러분, 오늘의 이 축제를 한껏 빛내고 취흥을 돋우기 위해 우리 아버지 느부갓네살 대왕이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때, 빼앗아 온 성전 그릇들로 술을 마셔봅시다. 아마 그렇게 되면 유대인들의 콧대가 남작해질 것'이라고 의기양양했습니다.
  왕의 이 소리가 끝내기도 무섭게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쓰는 그릇들을 가지고 와 술을 부어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연회장 중앙 촛대를 세워둔 맞은편 벽에 손가락 하나가 나타나더니 글씨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장내는 장내를 찬물로 끼얹은 듯이 조용했습니다.
  그 당시 상황을 단5:5-6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이에 왕의 즐기던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힌지라' 얼마나 놀라고 무서웠으면 그렇게 벌벌 떨고 있겠습니까?
  무엇이라 쓰여 있었습니까?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벨사살 왕이 이 놀라운 사건에 어떤 불행의 전조일 것으로 판단하고 즉시 술객, 술사, 점쟁이, 박사들을 불러모아 그 뜻을 해석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사람도 해석하는 자가 없습니다. 왕은 그 말을 해석하는 자에게 많은 상급을 주고 나라의 셋째 치리 자로 세우겠다고 했습니다. 그 때 황후의 소개를 받은 다니엘을 불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해석합니다.
  '메네 메네'는 '세어보고 세어보니 끝났다.'는 뜻이고, 데겔은 '저울에 달아보니 모자란다.'는 뜻이고, '우바르신'은 나라가 두 조각으로 나눠진다는 뜻입니다. 쉽게 풀어보면 하나님이 벨사살 왕을 아무리 달아보고 달아보아도 함량 미달이 되어 왕의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바벨론 왕국을 멸망시키고 왕의 사치와 향락과 부귀영화의 종지부를 찍겠다는 계시입니다.
  다니엘이 글씨를 해석하자 벨사살은 약속대로 다니엘을 셋째 치리자로 삼고 그를 높였습니다. 그러나 단5:30절에 그 날 밤에 나라는 메데와 파사연합군에 의해 멸망되었고 왕은 그 밤에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왕을 세어보고 달아보십니다. 하나님은 한 개인, 개인을 달아보고 세어보십니다. 그리하여 기준에 맞지 않으면 심판하십니다.
  민20장에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멀리 바라보면서 느보산에서 죽고 마는 이유가 나오고 있습니다. 물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한 이스라엘을 향해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소망 없는 백성이라고 저주했기 때문이다.
  오늘 날 목사도, 장로도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백성을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약4:11-12절에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신자는 각각 하나님 앞에서 최종판단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에 서로를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롬14:10-12절에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여기 '업신여기다'라는 말은 '내려다보다'라는 뜻입니다. 형제 즉 같은 교회의 성도를 깔보는 행위는 마치 자기가 상대방을 판단하는 재판장의 자리에서 앉아서 피고를 내려다보는 자세로 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은 '네가 어찌하여, 네가 어찌하여' 그런 교만한 행위를 할 수 있느냐고 두 번 반복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처럼 형제를 판단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믿/
  본문은 '너희의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헤아림'은 '달아본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십시다. 하나님의 계산에 맞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십시다. /할/

 

  ▶3절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는 목수 일을 하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이 비유적인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망치질이나 톱질을 하다보면 이따금씩 눈 속에 티가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또 집을 지을 때는 통나무를 들보로 사용합니다. 들보에 비하면 티는 아주 작은 것입니다. 티에 비하면 들보는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도는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큰 허물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작은 허물을 가진 사람을 탓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큰 허물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어찌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우리가 탓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그런 인간의 무지를 책망하고 계십니다. 여기 '티'는 원어에 보면 '톱밥의 한 알갱이'를 말하는데 즉 '겨 한 조각'이라는 뜻이고, '들보'란 '서가래 또는 통나무'를 뜻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내가 형제의 눈에서 발견한 티'는 내 눈 속에 있는 서까래나 통나무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티와 들보는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에게 관대합니다. 남이 하면 스캔들이고, 저기가 하면 로맨스라고 착각합니다.
  여기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형제가 행동으로 잘못한 것을 가리키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자기 속에 들어있는 죄의 부패성을 가리킵니다.
  우리말에도 같은 의미의 속담이 많이 있습니다. '가랑잎이 솔잎보고 바스락거린다고 책망한다.' 솔잎이 더 시끄럽습니까? 가랑잎이 더 시끄럽습니까? 좀 더 저속한 표현도 있습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무엇이 더 더러운 것입니까? 우리에게는 원칙적으로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나름대로 큰 허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 사이에 있었던 대화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은 서로 간에 흉허물없이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하루는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좀 놀리고 싶어서 무학대사에게 넌지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사, 이제 보니까 대사의 얼굴은 돼지 상이군요.' 그러자 무학대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렇게 응수했습니다. '폐하, 폐하의 얼굴은 부처님 상이시군요.' 그 소리를 듣고 이성계는 의아스럽게 여기면서 물었습니다. '아니, 대사. 나는 대사를 돼지같이 생겼다고 말했는데, 어떻게 대사는 나를 부처처럼 생겼다고 말하시오?'
  그때 무학대사가 껄껄 웃으면서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그야 뻔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가 생긴 대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돼지처럼 생겼으니까 다른 사람도 돼지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부처같이 생겼으면 다른 사람도 부처같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는데, 인간이 무지해도 한참 무지해서 남의 허물과 실수를 잘 보지만 정작 자기의 죄와 허물과 실수는 발견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본문은 자신의 들보를 먼저 깨달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상대방의 눈에는 티가 들어 있지만 나의 눈 속에는 들보가 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남을 비판하지 않게 된다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아멘!/
  ▶헬라인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은 두 개의 자루를 매고 다닌다고 합니다. 하나는 앞에 달고 다니는 자루이고, 또 하나는 뒤에 달고 다니는 자루입니다.
  앞에 있는 자루에는 남의 허물을 담고, 뒤에 있는 자루에는 자기 자신의 허물을 집어넣는다고 합니다. 뒤에 있는 자루는 우리 눈에 보입니까? 안보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허물이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 있는 자루에는 남의 허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정말 채워져 있어야 할 자루는 자기 허물인 뒤 자루인데 그것이 안보이니 남의 허물만 책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3절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자기의 들보를 깨달을 때 남을 비판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자기의 들보를 깨닫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4절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하라 하겠느냐"
  주님은 한마디로 인간의 무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지 못하고, 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라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의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가 병사 몇을 거느리고 한 동네를 내려가고 있는데, 농부 한 사람이 짐을 잔뜩 지고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 농부는 나폴레옹 일행이 지나가도 길을 비킬 줄 몰랐습니다. 화가 난 병사들이 그 농부를 꾸짖자 나폴레옹 황제가 병사들을 만류하며 말하기를 '그대들은 저 농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는가?'라고 꾸짖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항상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는 의식과 훈련이 절대 필요합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입장에서 자꾸 생각하다보면 이해가 되고 용납이 됩니다. 그러다 보면 남을 비판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바다의 철학을 배워야 합니다. 바다 속을 보면 거기에는 찬물도 흘러가고, 뜨거운 물도 흘러갑니다. 그런데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그곳에 큰 고기들이 모인답니다. 또 바닷물은 전라도에서 내려오는 물이든 충청도에서 내려오는 물이든 경상도에서 내려오는 물이든 배척하지 않습니다. 다 받아들입니다.
  사람들이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편을 가르고 판단합니다. 우리는 바다와 같이 넓은 마음으로 상대방을 용납하고 포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다는 어떤 물도 용납하고 정화시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대속의 종교입니다. 대속이란 말이 이해가 안 되면 대신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기독교는 대신의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고,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내가 받은 정죄의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들어가셨고 우리가 써야할 가시관과 대못은 주님이 대신 지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눈 속에 들보를 깨닫고 남의 눈 속에 티를 보지 마십시다.

 

  ▶5절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본문에서는 적극적으로 '내 눈 속에 들보를 빼내라'고 했습니다. 먼저 '외식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 '외식'은 '겉치레'를 말합니다. 주님은 6:5절에서 바리새인들이 남에게 보이기 위한 '구제, 금식, 기도'를 외식으로 평가했습니다.
  본문에서는 자기의 잘못을 덮어주고 형제의 잘못만을 지적하고 판단하는 것이 외식 또는 위선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먼저 네 눈 속에 들보를 빼라고 했습니다. 너 속에 있는 죄를 다스리고 허물과 외식을 먼저 빼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형제의 티도 빠지리라고 했습니다.
  본 절에서 '먼저'와 '그 후에야'라는 두 단어가 대조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해야될 일이 있습니다.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성찰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내가 바르게 서지 않고서 어떻게 다른 사람을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쉽게 표현하면 내가 먼저 반성하면 상대방이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로 나 자신입니다. 남편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아내가 문제가 아니라 문제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어떤 집사가 문제가 아니라 내 자신이 문제입니다. 이 사실만 깨달아지면 화목의 강물이 넘쳐나게 될 줄 믿습니다. /할/
  예수님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바로 이러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들의 눈 속에는 들보가 박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들의 의는 세리보다도 못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기들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함부로 비판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5:20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는 결단코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어떠합니까?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깔고 뭉개는 의입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죽이는 의입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어 형제를 살려주는 의가 아니라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보고 형제의 눈을 찔러 그를 죽이는 의입니다. 그러니 그런 의를 가지고 어찌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6절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본문은 1-5절과의 무관한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남을 판단하기보다 자신이 존귀함을 깨닫고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하는 적극적인 권면입니다.
  '거룩한 것과 진주'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먼저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레위기에서 하나님은 종종 우리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은 다 거룩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을 거룩할 성(聖)자를 써서 성전(聖殿)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성도(聖徒)라고 부릅니다.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성직자(聖職者)라고 부릅니다.
  그 다음 진주는 마13:45절에서 예수님이 천국을 하나의 값진 진주에 비유를 하셨습니다. 어떤 진주장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좋은 진주를 만나기 위해서 이곳 저곳을 열심히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정말로 극히 값진 진주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진주를 샀습니다. 그는 너무나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이 그만큼 값지고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주시기 위해서, 천국을 하나의 값진 진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개와 돼지를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상징한 것이라면, 거룩한 것과 진주는 믿는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거룩한 것은 성도의 마음과 몸과 인격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자요, 하나님께 쓰임 받는 존귀한 자입니다. 성도는 주님이 피 값을 주고 산 것이 되었으며 성령이 내주하시는 성령의 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마음과 몸은 거룩한 것이며, 개에게 주지 말아야 합니다.
  '개와 돼지'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여기 개는 몰고 찢는 것이 특징입니다. 싸우고 다투며 시기와 분쟁, 남을 판단하는 것 개와 같은 행동입니다. 돼지의 특징은 먹자 주의 욕심과 탐심입니다.
  벧후2:22절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이처럼 성경에서 나타나는 개와 돼지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불결하고 혐오감을 주는 부정한 짐승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한 백성들이고, 자기들 이외에 이방인들은 개와 돼지처럼 영적으로 부정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만이 의로운 사람들이고, 자기들의 유전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마치 개나 돼지처럼 부정한 죄인이라고 경멸하고 깔보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문제가 더 많았습니다. 실상은 그들이 개요, 돼지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들만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은 개와 돼지처럼 부정한 사람들이라고 멸시하고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이 개의 특징을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개의 특징은 물고늘어지는 것입니다. 그 옛날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집요하게 예수님을 비판했습니까? 한 두 번 실수로 잘못을 했으면 그것은 얼마든지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비판은 병적인 것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돼지의 특징을 '발로 밟고'라고 했습니다. 그 옛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의를 과시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깔고, 뭉개고, 밟고, 경멸했습니다. 그들이 개와 돼지와 같은 행동을 하면서 자기들은 그저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들이고, 다른 사람들은 개와 돼지와 같다고 멸시했던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우리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하반절에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진주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개와 돼지에게는 진주를 던져 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개와 돼지는 본질적으로 진주의 가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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