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강)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마 6:25-34)
어떤 어부가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죽었습니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장례가 끝나자 아버지가 타던 배를 몰고 다시 바다로 나갔습니다. 이때 친구들이 염려해서 '아버지가 바다에서 죽었고, 할아버지도 바다에서 죽었는데 너 마저 고기잡이를 하느냐?'고 걱정을 했습니다. 이때 그 아들은 친구들에게 묻기를 '너희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어디서 죽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침대에서 죽었다.'고 하자 '그래? 자네는 어디서 자나? 여전히 침대에서 자겠지?'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무엇을 염려하고 계십니까? 우리들의 염려가 다 이런 것들이 아닙니까? 본문은 염려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제목 소개!▶
염려하는 것 자체가 좋아서 일부러 염려하거나 근심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많은 경우에 있어서 필요 이상으로 염려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본문에 보면 염려라는 단어가 무려 6번이 등장합니다. 그만큼 염려라는 말은 우리와 관계가 밀접한 것 같습니다. 정말 그 누구라도 염려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은 인생은 없습니다. 현대인은 저마다 염려가 내 뿜는 독소에 시달리면서 세상을 바삐 살고 있습니다.
시인 오우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가리켜서 불안의 시대, 염려의 시대, 공포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할/
▶먼저 염려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염려는 헬라어원으로는 '메림나오'인데, '걱정한다, 근심한다, 마음이 찢어진다, 마음이 나누어지다. 분열되다.'라는 의미입니다. 영어로는 '워리'라는 단어를 썼는데 '물어뜯는다.'는 무서운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염려는 사람의 목을 꽉 물어 숨을 틀어막는 것(질식케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염려는 사람을 죽음의 골짜기로 밀어 넣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사실 염려는 우리에게 매우 해롭습니다. 그 옛날 지혜 자가 뭐라고 했습니까? 잠15:13절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어떤 사람에게 딸이 둘 있었습니다. 그 딸들이 장성하여 시집을 갔습니다. 큰딸은 야채 장사에게 시집을 갔고 작은 딸은 옹기 굽는 사람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큰 딸 집에 갔습니다. '장사가 잘 되느냐?'고 물었더니 큰딸은 '그런 대로 잘 되지만 한 가지 걱정이 있는데 비가 오지 않아서 채소가 시드는 것이 걱정'이라고 했습니다. 큰딸은 아버지에게 비가 오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후 아버지는 작은 딸 집에도 갔습니다. 작은 딸에게도 '잘 지내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작은 딸도 그런 대로 잘 지내고 있지만 '비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비가 오면 옹기를 굽는 데 지장이 많다는 것입니다. 작은 딸은 아버지에게 비가 오지 않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후 아버지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근심과 걱정으로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 아버지가 차라리 비가 오지 않으면 작은 딸네 사업이 잘 될 것이니까 좋다고 생각하고 비가 오면 큰 딸네 채소 농사가 잘 될 것이니까 좋다고 생각하면 염려할 것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할/
▶어느 시골 교회에 한 권사님이 있었는데 이 권사님은 밤낮으로 걱정이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해에 풍년이 들어 권사님의 밭에서는 여러 농산물이 많이 수확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 목사님이 생각하기를 '이번에는 걱정이 없겠지'하고 그 권사님을 길에서 만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밭농사가 잘 되었다니, 이제 한 숨 놓으셨겠습니다.' 그러자 권사님은 인상을 잔뜩 쓰면서 '올해 농사는 잘 되었습니다만, 작년에는 농사가 잘 안되어 썩은 것으로 돼지를 먹였는데 올해는 그런 것이 없으니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정도면 아주 병적입니다.
▶'어니 J 젤린스키'의 '느리게 사는 즐거움'이란 책에 보면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에 대한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이고, 22%는 사소한 사건들이며, 4%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것들이다. 겨우 나머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진짜 문제이다. 즉, 96%의 걱정거리가 쓸데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염려하는 것들의 96%가 불필요한 것들이랍니다. 하지 않아도 될 것들이란 말씀입니다. 괜한 염려로 마음 상하지 마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기우'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 열자(列子)에 보면 기 나라에 '만약 하늘이 무너지면 죽을 것이니 어디로 피해야 한단 말인가?' 하며 침식을 잊고 염려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무익한 염려를 '기 나라 사람의 근심'이라는 의미로 '기우(杞憂)'라고 했다고 합니다. 쓸데없는 염려를 가리킨 말입니다.
▶먼저 본문에서 결론을 찾는다면 예수님은 염려의 본질을 두 가지로 말합니다.
①염려는 비생산적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27절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②염려는 비 신앙적인 것입니다. 30절에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뜻이 있는 사람마다 철학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철학이라는 말을 굉장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철학이라는 것이 별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것이 바로 철학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세상 사람과 구별되고 성별되고 거룩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생활철학이 되어야 합니다. 생활철학이 없으면 설계도 없이 집을 짓는 것과 같고, 나침반 없이 항해하는 선원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 크리스천의 생활 철학 두 가지를 발견합니다. 하나는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25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여기 '그러므로'는 24절의 말씀과 연결하는 접속사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배운 24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한 여인이 두 남편을 섬길 수가 없듯이 성도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선택의 중요함을 배웠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무엇입니까? 재물보다는 하나님을 선택한 백성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우리 주님은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의식주문제를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먹기 위해 사느냐? 또는 입는 것이 인생의 목표냐고 물으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들 대답은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러한 것들에 관심의 전부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무엇입니까? 잘 먹고 잘 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류 식당을 찾아다니고 메이커 상표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먹고, 잘 입으려고 보니까 따르는 결과하나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자동적으로 물질에 대한 염려입니다. 돈이 있어야 잘 입고, 잘 먹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물질을 추구하다보면 근심과 걱정이 쌓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돈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에 돈 버느라고 교회를 멀리합니다. 이러다 보면 신앙은 한마디로 완전히 불 신앙에 빠지게 되고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착각하며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돈 때문에 영혼이 지옥 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선택한 백성들은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음식은 목숨을 위한 것이고 의복은 몸을 위한 것입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요합니다. 목숨과 몸은 목적이라면 음식과 의복은 수단입니다. 목적을 간과하고 수단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의 눈을 떠야 합니다. 음식보다 목숨이 중요하고 의복보다 몸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중요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 그 몸에 필요한 의복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믿음이 있는 사람은 먹고, 입는 것 때문에 염려하지 않습니다. /믿/
우리가 어떤 문제 때문에 염려하는 것은 바로 불 신앙 때문에 염려하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 적인 요인 때문에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염려의 본질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불 신앙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신앙만 있으면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진다고 할지라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불꽃처럼 지켜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로는 주님이 26절 이하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26절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예수님 당시 갈릴리 지방은 철새들이 아주 많았다고 합니다. 아마 주님께서는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를 바라보시면서 이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하늘에 날아다니는 그 많은 이름 모를 새들조차도 하나님께서 다 먹이시는데 '왜 걱정을 하느냐?'를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또 이 말씀은 하늘에 나는 수만 마리의 새들 중 한 마리의 새에 대해서까지도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지키신다는 말씀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새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위하여 물건을 쌓아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잘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공중에 나는 새들도 주께서 먹이시고 돌보신다면 우리가 공중에 날고 있는 저 새들보다 더 존귀한 존재임을 깨닫지 못하십니까?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입니다. 그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인 쳐주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굉장히 귀한 신분입니다. /믿/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지만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귀하게 보십니다. 그래서 '너희는 이것들 보다 귀하지 아니하냐?'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창공을 나는 새들에게서 배울 점이 많습니다. 새들은 내일의 운명을 모릅니다. 언제 사냥꾼의 총에 죽을지, 사나운 날짐승의 습격 때문에 생명의 종말을 고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오늘 주어진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버리지 않습니다. 저들은 내일 염려 때문에 오늘의 삶을 포기하거나 괴로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들이 공연히 내일 일을 염려하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중에 새들보고 배우라고 하십니다.
물론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치 처분만 바라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만사 형통할 것이라는 식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주님은 나무에 앉아 있는 새를 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고 하십니다. 공중의 새는 먹이를 찾아 열심히 일하고 있는 새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인 새가 날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먹이나 입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새는 스스로 날아다니며 먹이를 잡아먹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일을 해야 합니다. 바울은 살후3:10절에서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되, 건강, 의욕, 꿈 등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주셔서 그것을 가지고 먹고살게 하셨습니다. 열심히 일을 해야 수고에 대가가 있습니다. /아멘!/
같은 내용을 소개한 눅12:7절에서는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다시 말씀드리면 '너희들의 머리털까지도 낱낱이 다 알고 있으니 제발 염려하지 말라 너희들은 참새들보다 정말로 더 귀한 내 자녀들이 아니냐?' 라는 말씀입니다. /할/
여러분, 사람마다 다르지만 보통 우리 머리카락이 몇 개 정도인지 아십니까? 10만개 정도 됩니다. 그리고 그 수명도 있습니다. 남자 머리카락은 4-5년, 여자는 6-7년 정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매일 50-100개 정도는 빠지고 그 정도 숫자가 새로 납니다. 한 사람에게 이렇게 복잡한데 하나님은 우리들 모두의 머리카락의 숫자를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변화무쌍한 너의 머리카락의 개수도 다 알고, 계시는데 너의 지금 형편과 사정을 내가 모르겠느냐 그러니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염려를 내려놓지를 못하는 우리에게 주님은 다시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 덧붙여 또 말씀하십니다. 이제 27절에서는 '염려가 비생산적'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7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성경 밑에 '주'를 보면 '키'라고 하는 말 대신에 '목숨'이란 뜻이 있습니다. 즉 '염려함으로 키를 한자나 키울 수 있느냐? 또 염려함으로 너희 목숨을 한 시간이라도 더 연장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쉽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너희가 염려한다고 임의로 키를 키울 수가 없고, 염려한다고 임의로 목숨을 연장시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염려한다고 키가 자라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생산성이 없는 염려 속에 빠져 있는 당시 사람들의 처량한 모습을 주께서 바라보셨습니다.
특별히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커다란 열등감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때 그들의 나라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로마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들이 로마 사람들보다 키가 더 작다는 열등감이 유대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인들보다 키가 작은 열등감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키가 클까?' 하고 염려했지만 아무리 염려해도 키는 더 자라지 않습니다. 그처럼 염려는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살다 보면 이미 끝나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 일을 가지고 염려하는 것은 소용도 없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좋은 길과 의미 있는 일을 찾아 행동에 나서는 것입니다. 긍정적 행동을 만들지 못하는 생각은 삶을 파멸시키는 무서운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지나가 버린 문제로 더 이상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문제로 부질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당시 자기 민족에게 이런 해학적인 메시지를 통해서 염려의 비 생산성을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염려란 하나의 사건에 대한 반응일 따름이지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도 아닙니다. 여러분, 긍정적인 행동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염려는 우리 모두의 생존을 위협하는 파괴적인 힘 밖에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할/
미국의 한 설교자는 염려를 가리켜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염려란 마치 흔들의자와 같은 것이다.' 마치 흔들흔들하는 의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 의자에 앉아서 아무리 흔들어 보십시오, 여전히 제 자리에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염려를 해도 한발자국도 진전이 없는 그런 염려를 왜 하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 염려를 내려놓으시기를 바랍니다. 염려 대신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①우리의 염려를 다 주님께 맡겨 버리라! 벧전5:7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할/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처럼 염려가 많았던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염려했습니다. 우리 선생님이 잡혀가시면 어떻게 하나? 우리 선생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면 어떻게 하나? 로마의 군대에게 잡히면 어떻게 하나? 파도에 빠지면 어떻게 하나? 염려 걱정이 태산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자기의 평생을 걸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통해서 염려를 해결하는 위대한 체험들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메시지의 마지막부분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맡기는 것입니다. 내 인생문제를 맡기는 것, 사업은 하나님께 맡기고 자녀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질병도 맡기고 환란도, 핍박도 하나님께 맡기십시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염려를 맡기면 그때부터 우리의 염려는 우리의 염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실패하고 넘어지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인생이 실패한다고 하나님도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하나님은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엘로힘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죽었단 자를 살리는 권세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믿/
베드로는 우리에게 당부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염려해야 할 모든 문제를 하나도 남김없이 다 맡겨 버리라고 당부합니다. 여기 맡긴다는 것은 흘러가는 강물에 보따리를 던져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한번 강가에 던져 떠내려간 보따리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미련 없이 버립시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권고'해 주십니다. 여기 권고란 '돌보다. 관심을 갖다.'라는 말로써 '일으켜 세우리라, 높여 주리라'는 뜻이 있습니다. /할/
②염려대신 기도하십시다. 빌4:6-7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 말씀은 우리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염려되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는 것입니다. 문제를 사람들끼리 이야기하면 염려가 되는 것이지만 하나님께 아뢰면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안에서 주어지는 기쁨으로 염려를 극복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빌4:4절에서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염려를 이기기 위한 기쁨은 우리가 '주안에' 있을 때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바울이 체득했습니다. 끝없는 진정한 기쁨은 '주안에서' 주어집니다. /아멘!/
우리 각자가 육신의 길을 도모하면 재미는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참 기쁨과 영적 담대함은 사라집니다. 사소한 난관에 부딪혀도 우왕좌왕 좌충우돌 흔들려버리고 쉽게 염려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약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안에' 있을 수 있습니까? 한마디로 주님의 뜻을 따르면 주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담대함과 평강이 생겨나기 때문에 염려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할/
기도의 사람 '조지 물려'는 '신앙이 시작되는 곳에 염려 근심 두려움은 사라지고 염려가 시작되는 곳에 신앙이 끝난다.'고 했습니다. 또 '모든 염려는 기도를 통해 제거된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중세에 살던 '부루노'라는 수도사가 깊은 산에서 기도하는데 개구리들이 너무 울었습니다. 견디다 못해서 그는 창문을 열고 '시끄럽다!'고 큰 소리를 치자 잠시 조용했다가 조금 지나니까 이제는 언덕 너머의 잠자던 개구리까지 울어댔습니다. 너무 기도가 방해되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개구리 때문에 기도가 안 됩니다. 저 개구리들을 어떻게 좀 해주세요.'
그때 마음속에 이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부루노야! 지금 개구리도 기도하고 찬양하고 있단다. 같이 기도하고 찬양하라.' 그 음성을 듣고 그 수도사가 신나서 창문을 열고 같이 기도했다고 합니다. 인생은 해석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도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해석하면 얼마든지 기뻐하며 살 수 있습니다. /아멘!/
영국의 대설교가인 스펄전 목사님은 '그대의 염려를 버리고 은혜 깊으신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면초가에 있습니까? 기도의 통로는 열려있습니다. 기도는 지금도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역사가 동반됩니다. /믿/아멘!/
28절에서 염려의 비생산적인 것을 또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28절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만 하시고 그냥 내버려두는 분이 아닙니다. 관리하시고 간섭하십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머리털 하나까지 세시는 섬세한 사랑으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간섭하십니다.
들에 핀 한 송이의 백합화를 보십시오, 누가 그 꽃 하나를 위하여 거름을 주고 길쌈을 맵니까? 하나님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들꽃 하나를 위해서도 사시사철 태양을 주시고 바람을 주셔서 색깔을 입히시고 모양을 만드십니다. /할/
예수님은 아무도 돌보지 않은 들에 핀 한 송이의 백합화의 영광을 이 지상에서 한 인간이 가질 수 있었던 가장 큰 영광을 누렸던 솔로몬의 영광과 비교하고 계십니다. 솔로몬은 세상의 모든 지혜와 부와 명예와 권세를 가졌던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왕이십니다. 그러나 그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백합화 한 송이 보다 못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9-30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이어서 예수님은 30절에서 결론을 내려주고 계십니다. 꽃 한 송이가 '솔로몬의 그 큰 영광보다 더 귀한데 너희가 그 꽃보다 못하겠느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어째서 너희가 염려하느냐? 하나님이 너희 인생을 비극으로 마치게 할 것 같으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송이 들 꽃보다, 한 마리의 새보다 천사보다도 더 귀한 존재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천사도 흠모할 만한 일은 우리에게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롬8: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아멘!/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무엇이든지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약1:5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30절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염려라는 것은 바로 '믿음이 없어서'라는 것입니다. 염려는 불 신앙에서 오는 것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믿음으로 사십시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할/
▶31-32절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1절은 25절의 중복입니다. 선택은 바로 하라는 경고입니다.
32절에 '이방인'은 예수를 모르고 사는 세상 사람들을 가르친 말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릅니다. 인생이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모릅니다. 한마디로 불쌍한 존재입니다.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 붙들고 '이제 놀고 먹어도 된다.'고 큰 소리를 쳤다고 합니다. 왜 큰 소리를 쳤겠습니까? '하나님이 다 필요에 따라 주신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믿음이 좋은 사람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하라고 했고, 구하라'고 했습니다. /아멘!/ 여기서 우리가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은, 본문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확신을 가지라는 메시지라는 사실입니다.
염려 문제는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신뢰의 문제요, 신앙의 문제요, 그래서 똑같은 환경에 처했을지라도 어떤 사람은 염려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뜻을 찾습니다. 예컨대 불이 났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이제 나는 망했다.'고 대성통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은 그 화제 속에서도 부인과 자녀들이 머리칼 하나 상하지 않게 해주신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가 있습니다. 누가 신앙인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주실 줄 믿고 구하며 사는 자입니다. /아멘!/
본문에 보면 염려란 이방인의 특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염려 대신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너무도 중요한 구절입니다. 이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많이 들었습니다. 쉽게 이야기 해봅시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생각하라'입니다.
'그의 나라'는 통치의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라'는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천국 인이 될 수 있습니다. 내 가정이, 내 사업장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때, 놀라운 축복이 임합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의 전 영역을 하나님께서 다스려 주시기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의 의는 하나님의 뜻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늘 기뻐하고 깨어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신앙생활 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기쁘시게 보십니다(히11:6). 믿음이 있는 자가 예배 중심의 삶을 사는 자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가 봉사하고 충성합니다. 믿음이 있는 자가 전도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쁘시게 여기는 것은 영혼구원입니다. /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한 말은, 주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생활 철학을 주신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 말과도 일치합니다. 소금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뜻하고 빛은 행실을 통하여 예수님을 나타내 전도의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십시오, 요셉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은 자입니다. 또 하나님의 뜻대로 사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대로 산 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어떤 복을 주십니까?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여기서 '그리하면'이 귀합니다. 다스림을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시리라 /할/
기독교는 플러스 종교입니다. 더해지는 축복이 있습니다. 건강, 믿음, 물질, 모든 것이 포함입니다. 염려하지 말라. 염려대신에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주님은 마7:7절에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믿/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염려하는 사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현재를 향하여, 미래를 향하여 뛰어가고 문을 두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소극적이고 패배적이고 절망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적극적인 소망을 가지고 미래를 향하여 뛰어가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할/
빌4:19절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이 약속의 말씀은 결코 부도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가정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기초를 두고 살아야 합니다. /믿/
▶34절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한마디로 내일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내일은 당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할 것입니다. 내일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내일을 맡기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일 때문에 염려하며 근심걱정하며 사로 잡혀있습니까? 믿음이 없으면 내일은 언제나 절망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내일은 언제나 희망입니다. /할/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염려대신 큰 야망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모든 염려는 진실한 믿음이 그 해결책입니다. /믿/
왕상2:2절에 보면 다윗이 죽으면서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이 있습니다. 그 유언의 첫 번째 당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으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힘써 믿음의 대장부가 되라는 유언입니다. 어떤 사람이 믿음의 대장부일까요?
⑴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대장부입니다. 큰 생각으로 희망이 넘쳐야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상상력이 현실보다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생각의 폭을 넓히는 것이 아파트 평수는 넓히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⑵큰마음을 가진 사람이 대장부입니다. 마음은 생명의 근원입니다(잠4:23). 그런데 잠23:7절에서 보면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큰마음을 가진 자가 큰 위인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⑶큰손을 가진 사람이 대장부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잠시 왔다가 잠시 후에는 떠날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물질보다는 신앙을 더 생각하고, 땅보다는 하늘을 더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마6:20절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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