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51강) 추수할 일꾼을 찾습니다! (마 9:35-38)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7:03

(제51강)        추수할 일꾼을 찾습니다! (마 9:35-38)

 

  마4:23절을 보면 예수님의 사역을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러니까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사역,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사역'입니다. 마태는 이렇게 기록하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산상설교를 하신 것을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오셔서 문둥병과 중풍 병을 고치시고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시고, 바다와 파도를 잠잠케 하시고 귀신을 내어쫓아 주시고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12년 동안 혈루 병으로 고통 받는 여인을 치료해 주시기도 하셨고, 심지어 열두 살 어린 소녀가 죽었을 때 '달리다쿰'하시니 그 소녀가 죽음에서 일어나신 사건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리의 귀가 열리고 벙어리가 말을 하는 이 엄청난 구원의 사건들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본문의 35절에서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사역을 정리합니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한 마디로 예수님의 3대 사역은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치시는 사역'입니다.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3대 사역을 근거로 하여 교회의 사역 세 가지를 '교육, 선교, 봉사'라고 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자를 고치시기 위해 갈릴리 온 지방을 두루 다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불교는 정적인 종교라고 한다면 기독교는 동적인 종교입니다. 이유는 주님 자신이 가만히 앉아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그들을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갈릴리 지방의 온 동네를 두루 찾아다니면서 손수 '가르치시고 전하시고 고쳐주신 것'입니다.
  본래 불교는 사색과 명상과 수도를 주된 신앙 행위로 삼기 때문에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거리에서 도시에서 가르치며 치료하고 복음을 전파해야 했기 때문에 마을과 도시에 자리 잡았습니다. /할/ ◀제목 소개!▶

 

  ▶35절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교회의 사명은 교육의 사명입니다.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르치셨다는 말씀은 '교육'을 했다는 뜻입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천국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전파하는 것만으로는 만족스런 결과를 거둘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교육입니다. 예수님은 가시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하셨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가르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셨을까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방법을 가르치셨고, 인간이 신앙을 지키며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신령한 지혜와 지식을 가르치셨습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지만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교육의 목적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인간을 만드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교육의 목적이며 신앙교육의 목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4:6절에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인간이 복의 근원이시며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도 없다'고 했습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없는 교육은 약삭빠른 마귀만 만들어 낸다'고 말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할/ 
  여기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이 중요한 사역을 위해서 택하신 장소가 있습니다. 어디입니까? 바로 회당입니다. 회당이라는 말은 '함께'라는 말과 '모인다'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이 회당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 성전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자, 마을 중심에 회당을 짓고, 율법의 말씀을 가르치고, 자라나는 자녀들을 교육시켰던 장소입니다.
  그 후로 회당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중요한 삶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성전은 예루살렘 한 곳 뿐이지만 회당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곳이면 어디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회당을 마을 광장 중심이나 성읍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다 세웠는데 그 방향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으로 두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회당은 예배의 처소요, 학교요, 문화의 광장이요, 친교의 터전이었습니다. 사실 초대교회의 전통은 성전보다는 회당적인 기능을 더 많이 이어받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만민의 선생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고 제사를 드리는 성전을 예루살렘 한 군데에만 있었지만 모여서 율법을 공부하는 회당은 동네마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여기서 성이란 성곽으로 둘러싸인 비교적 큰 성읍들을 말하고, 촌은 성곽이 없는 시골마을을 의미합니다. 당시 갈릴리 지방은 크고 작은 마을이 무려 250개나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많은 마을을 쉬지 않고 찾아다니시며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위대한 교사이셨던 주님 자신의 삶이 교과서였고, 교육의 모범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가르치는 목적은 모르는 것을 알려주고 깨닫게 하여 실용하고 실천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할 것은 사람이 개나 고양이나 돌고래나 물개를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것은 쉬우나 사람이 사람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것을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개나 고양이, 돌고래는 길들인 대로 되고 그래서 시키는 대로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가르치고, 가르쳐도 사람이 사람답게 되지 못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가르치는 교육자의 잘못이고, 또 하나는 교육을 받는 피교육자의 잘못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르치는 사람이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배우는 사람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주님 자신의 삶이 교과서였고, 그분의 삶이 인생들의 모범이셨습니다. 주님의 가르치는 사역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산상설교입니다. 너무나도 심오한 가르침입니다. 8복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응용합니다.
  인도의 무저항주의자 간디는 예수님의 팔 복의 영향을 받아 인도를 이끌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구구절절이 보배로운 교훈이 됩니다. 그러면서도 어렵지 않게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가르치셨습니다.
  공중에 새를 보시면서 비유를 가르치셨습니다. 들에 백합화보고 가르치셨습니다. 들판에 씨 뿌리는 농부들을 보시고 씨 뿌리는 비유를 하셨습니다. 때로는 어른들에게 어린이를 보이고 가르치셨습니다. 가정문제, 인간문제, 의식주문제, 물질문제, 지위문제,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도, 금식, 구제, 구원, 천국, 영생 등을 친히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⑴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마7:29절에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주님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따랐습니다.
  말에는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같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땅으로부터 받은 권세가 아닙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권세입니다.
  ⑵대개 권위 있는 사람은 가서 가르치지 않고 와서 배우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가셨습니다. 얼마나 겸손하신 모습입니까? 봉사란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내 방법대로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기 방법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상대방이 자기에게 오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찾아가 주셨습니다. 성이나 도시나 촌이나 예수님은 찾아가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직접 가르치시고 전파하신 것을 부활 승천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육이 정말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을 배우지 않고서는 할 수 없습니다. 잘 배워서 배운 대로해야 합니다. 배운 것은 또 지켜 행하여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배운 것을 그래도 행하는 것입니다.
  ⑶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이것은 가르치는 사역과 개념이 조금 다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복음 선포란 쉽게 말해 선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셨을 때 그는 입을 열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처음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이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다른 번역에 의하면 '설교하시며'로 되어 있습니다.
  가르치는 것, 배우는 것과 설교는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성경을 공부한다. 배운다, 가르친다고 할 때는 내 상식이나 지식이나 생각을 바탕으로 조명하고 사색하고 그리고 적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의 설교이기 때문에 타협이 있을 수 없고, 거역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개개인의 신앙 상태에 따라 아멘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 자체는 막거나 방해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전하신 복음은 당시 사람들이 들거나 말거나 믿거나 말거나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복음을 믿으면 구원받고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포된 말씀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만 믿지 않은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요3:18절에서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 설교는 일방적인 선포입니다. '당신은 죄인입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구원을 받습니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나갑니다. 이것이 가르치는 사역과 다른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태양이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은 이론이 따로 없습니다. 그것은 타협할 필요가 없습니다. 태양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믿든지 안 믿든지 그 사람의 자유입니다. 그 사람이 태양을 안 믿는다고 해서 태양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믿든지 안 믿는지 하나님은 계십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이 선포입니다. 우리는 선포해야 합니다. 복음 선포는 절대 타협이 있을 수 없고, 거역이 있을 수 없습니다. /믿/
  ⑷예수님은 치료자로 오셨습니다. 여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이라는 말은 지금 백성들의 앓고 있는 병, 인간의 무지, 한계, 그래서 모두 질병에서 속수무책이고 가난에서 속수무책으로 살고 있고 귀신들이 매달려서 불구덩이로 끌고 들어가도 속수무책으로 살아가는 이 인간의 무지와 무력을 말합니다.
  주경학자 바클레이는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모든 고통과 질병을 격파하러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공생애 ⅔를 고치시고 치료하는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그 당시 갈릴리 여러 동네에 다니시면서 가르치시고 전파하실 때 그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졌고, 그 소문을 듣게 된 병자들이 예수님께로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곧 각색 병든 자였고, 고통에 걸린 자들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일일이 고치셨습니다. 마4:24절 이하에 보면 '저희를 고치시더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손을 대면 귀신이 소리 지르고 나갔습니다. 주님이 소경의 눈을 만지시면 눈이 밝아졌습니다.
  지금은 우리 현대인들은 질병과 고통과 고민을 안고 살아갑니다. 남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고민이 있는가 하면,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마11:28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시며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사복음서에 보면 고침 받은 사람들의 과정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자가 치료받을 수 있습니까?
  ⑴예수님을 만난 자만이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병자가 예수님께로 왔든지 예수님께서 병자에게로 가셨든지 만남을 통하여 치료함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병원에 가야 진찰을 받고 약을 먹든지 수술을 하든지에 여부가 결정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을 만나야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⑵자신이 병든 자임을 인정하고 고쳐 달라고 간청했기 때문입니다. 병자 자신이 그렇게 한 경우도 있었고, 병자의 보호자가 그렇게 할 경우도 있었습니다.
  ⑶고쳐주신 것은 믿었던 사람만이 고침 받고 치료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한 마디로 믿은 사람은 고침을 받았고, 믿지 못한 사람은 고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고치셨던 그 사역을 예수를 믿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물려주셨습니다. 눅9:1-2절에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
  고전12:9절에서는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행19:12절에 보면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고 했고, 약5:14절에서는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고 했습니다. /할/
  이제 36-38절은 추수할 일군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36절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여기 민망히 여기셨다는 말은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로 그 당시 인간의 굴레에 씌워 꼼짝도 못하는 삶을 보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은 그런 것이 아닌데, 아주 귀한 존재인데, 그런데 그 고귀한 사람들이 지금 저렇게 무지해서 살아가고 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그래서 불쌍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정치는 로마에 예속되어서 사회적으로는 계층 간의 갈등이 극심하고 극단적인 행동주의자들이 판을 치는 시대였습니다. 한마디로 정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자립경제가 불가능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경직된 전통 유대종교와 많은 이단 사상과 신비주의의 종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혼돈과 방황의 시기입니다.
  이러한 세상은 예수님이 어떤 눈으로 보셨다고 했습니까?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무리를 보시고 마음이 괴로웠다고 했습니다.
  왜 마음이 괴로우셨는가 하면 그 무리들을 보니 전부 우왕좌왕 목자 없는 양 같았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이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는데도 올바르게 가르치지 않고 주로 인간 자기 생각대로 가르치시고 율법주의에 빠져 구원의 길을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그 백성들은 지금 '고생하며 기진'해 있습니다. 여기 고생이라는 말은 '에크레뤼메노이'이라는 말로 즉 '가죽을 벗기다, 칼로 썰다'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이나 약탈 그리고 탈진 상태를 의미하고 있으며, '기진 했다.'는 말은 회복이 불가능한 절망상태란 뜻입니다.
  그런 백성들의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표현하기를 성경 개역개정판에서는 '불쌍히 여기시니'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 '민망히 여기시니'는 '창자 속에서 동정심이 우러나와 마음을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이 한없이 울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인류애와 동포애와 영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슴이 뜨거웠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병자들을 고치셨을 것이고, 더 열심히 그 우매한 백성들을 가르치려 했을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의 가슴속에 이런 심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인류애와 동포애 그리고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가슴을 지녀야 합니다. 그러면 사사로운 증오심이나 편견 그리고 이해관계나 이웃과 불화하는 요소들, 탐욕, 이기심들이 모두 극복될 수 있습니다.
  그 동포애와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가슴이 내 마음속에 있으면 나의 한계, 나의 고집, 인색함 등의 요소들을 밀어내 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3년 동안 공생애 기간을 중보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들이 신앙인으로 세상을 살면서 이런 주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아멘!/
  주님이 불쌍히 보신 이유는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은 그 종국에는 불행하게 되고 맙니다. 동물 중에서 양은 반드시 목자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양은 사자나 이리나 늑대 등의 맹수들에게 가장 많이 희생을 당하는데 양은 자기를 방어하는 무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소는 뿔이 있고, 여우는 날카로운 이빨이 있고, 호랑이는 날카로운 발톱이 있습니다. 그러나 양은 그러한 무기가 없기 때문에 반드시 양은 인도하는 목자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무리들을 당신의 양으로 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목자 장이십니다. 그 목자장 되신 주님만 따르면 우리의 삶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시23: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할/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양으로 비유했습니다. 예수님은 요10장에서 목자 되신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7절에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또 9절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또한 3절에서는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도 우리를 양으로 비유했습니다. 벧전2:25절에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주님은 지금도 길을 잃고 유리하며 방황하는 목자 없는 양들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십니다. 목자 없는 양이란 지도자 없는 백성을 뜻합니다. 좋은 지도자를 만나지 못한 백성들은 고생하고 유리하며 방황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빈곤이 무엇입니까? 물질의 빈곤입니까? 사랑의 빈곤입니까? 아닙니다. 지도력의 빈곤입니다. 지도자다운 지도자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폭력을 쓰고 지배하는 지도자, 힘을 가진 지도자가 아니라 섬기는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당시 바리새인도 있고, 서기관도 있었고, 종교지도자 정치지도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는 그들이 바른 지도자로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백성들의 모습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들이 유리방황하며 제대로 얻어먹지도 못하며 거지같이 보여 마음이 괴로우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지도자가 필요합니까? 섬길 줄 아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 땅에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헬라시대의 '자리우키스'라는 임금이 나라를 다스릴 때 나라가 너무나 죄악이 심해 음행이 극치를 이루었습니다. 왕은 이대로 가다간 나라가 무너질 것을 알고 곧 법을 만들어 공포했습니다.
  '누구든지 간음하다 붙잡히면 두 눈을 뽑아 버린다.'는 법령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맨 먼저 붙잡힌 사람이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왕자였습니다. 모든 백성의 이목은 왕자에게 쏠렸습니다. '정말 왕이 하나밖에 없는 왕자의 두 눈을 뽑을 것인가?'
  이윽고 집행의 날이 다가왔습니다. 왕은 손을 내밀어 왕자의 한 쪽 눈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눈 한쪽을 뽑아 백성들에게 보이면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이때 백성들은 그 왕의 처신을 감탄하며 그때부터 음행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할/

 

  ▶37절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이 시대를 보신 주님은 추수할 게 많다고 했는데 추수는 농사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수님이 사신 그 시대를 보시면서 '지금은 파종의 때다'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추수의 때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 주님의 역사관, 주님이 보신 이 세상은 '추수의 때'라는 것입니다. /아멘!/
  여러분, 왜 이 말씀이 중요한가 하면 신앙생활과 밀접한 관점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언제나 그 시대를 볼 때, 상황을 볼 때 추수의 개념으로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백성들이 고생하며 마음이 가난해 진자들이 많이 있는데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줄 사람이 그리 없다는 한탄입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이는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영혼들이 많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는 추수가 영혼구원의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마13:49절에서는 추수할 시기를 곧 세상종말과 심판의 날로 해석했습니다.
  ▶어느 성도 한 사람이 사업을 아주 잘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성도는 국내에서도 물론 돈을 벌지만 수시로 해외에 나간다는 것입니다. 안 보여서 물어보면 브라질에 갔다 하고, 또 물어보면 러시아에 갔다 하고, 물어보면 중국에 갔다 하고 이렇게 일년 중 국내에 있는 시간보다 해외에 나가있는 시간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디 갔다고 하는데 보면 별로 가 볼만한 나라가 아니고 경제적으로 어렵고, 경제적으로 혼란이 있고, 인플레가 100%, 200%씩 뛰는 그런 나라에 이 사람이 가서 사업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한번 물어보았습니다.
  '집사님은 사업을 잘 하시는데 러시아에는 왜 그렇게 자주 갑니까? 나도 러시아에 가보니까 그 나라는 형편없는 나라이고 경제적으로 혼란이 많던데요. 어떻게 그런 나라가서 사업을 합니까?'
  그 때 이 분이 하는 말이 '목사님, 목사님은 목회 전문가이고 저는 경제 전문가입니다. 저는 장사 전문가인데 사실은 안정된 나라가서는 돈을 못 법니다. 인플레가 있고 혼란이 있는 그런 나라에 가 보면 돈 버는 길이 굉장히 많이 보입니다. 거기 가서 틈을 타서 사업을 하고 투자를 할 때 돈이 벌리지 안정된 나라에서는 돈을 못 법니다.' 그 분은 그런 지혜를 가지고 사업을 하니 얼마나 멋진 사람입니까?  
  마찬가지로 본문의 예수께서 고생을 하는 그 백성들을 보시고는 '추수할 것이 많다'고 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여기에 눈을 떠야 합니다. 어렵기 때문에, 고생스럽기 때문에, 그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추수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할/
  어렵다고, 고난스럽다고, 고통이 있다고 해서 여기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끝났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들에게 어떤 절망이 있어도 그 절망의 그 자리에서 추수할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할/
  '일꾼이 적으니' 당시 수많은 서기관, 바리새인, 제사장 등 종교지도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영혼구원을 외면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백성들을 구원할 참 목자가 아니라 오히려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만 지우고 착취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일꾼들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일꾼, 추수의 일꾼, 즉 전도의 일꾼이 부족합니다. 또 가르치는 일꾼들이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바로 가르쳐야 되는데 그런 일꾼들이 부족합니다. 바로 가르치지 않으면 이런 상황이 벌어집니다.
  ▶미국에 있는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목사님이 주일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성경은 어떻게 가르쳤고, 어떻게 배웠는가 하는 궁금히 생겨서 시험을 해 보려고 주일날 주일학교 학생하나를 붙잡고 물었습니다.
  '야! 토미야 넌 여리고 성이 어떻게 무너졌다고 생각하니?' 그 아이는 갑자기 긴장하더니 '목사님 전 절대로 아니에요, 전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일이 없어요, 전 그 곁에 가 본 일도 없어요!' 목사님이 기가 막혔습니다. 도대체 선생이 어떻게 가르쳤기에 그럴까 의심하고 그 담임선생을 불렀습니다.
  '스잔나 선생, 내가 조금 전에 토미에게 여리고 성이 왜 무너졌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여리고 성에 가본 적이 없다며 절대로 무너뜨리지 않았다고 잡아떼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 말을 듣던 스잔나 선생은 '목사님! 그 애 말이 맞을 거예요! 그 애는 절대로 성을 무너뜨릴 애가 아니에요! 그 애가 얼마나 착하고 얌전한 애인데요.'
  목사님이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 날 예배 후 당회가 모인 자리에서 '장로 여러분, 이럴 수가 있습니까? 여리고 성이 왜 무너졌느냐고 하니까 토미는 성 곁에 가지도 않았다고 잡아떼고 스잔나 선생은 그 애는 성은 무너뜨릴 힘도 없고 얌전하다고 하니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재정장로가 '목사님 이미 저질러진 일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누가 무너뜨렸던 교회가 책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 제정으로 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38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여기 '청한다.'는 말은 '간청한다.'는 말이지만, 복음 적인 의미로는 기도를 말하는 것이고, 그리고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기도 합니다. 문맥상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천국 일꾼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 예수께서 제시하신 답은 일군이라는 것입니다. '추수할 것이 많다 주인에게 청하여 일군을 보내달라 해라' 이 일군의 몫이 바로 우리의 몫입니다. 추수는 일군이 있어야 합니다. 일군이 추수합니다. 이 추수를 할 수 있는 일군의 몫이 우리의 몫이고 이것이 교회의 몫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몫입니다. /아멘!/
  예수 그리스도가 일군이라고 한 이 일군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대상입니다. 제자들이요 앞으로 자기 몸을 버려서 세울 이 땅의 주님의 교회를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추수 밭에 부름 받은 일군의 자세로 살아야 됩니다. 일해야 됩니다. 참여해야 됩니다. 일군으로 살아야 됩니다. 일군은 일터로 가야 일군입니다. 일터를 외면하면 일군이 안됩니다. 일을 발견하면 그 일을 집중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일군은 일에 집중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일군을 부릅니다. 이 일군의 영역이 바로 우리의 영역입니다.
  추수는 거두어들이는 것입니다만 내가 다 소유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추수는 주인에게 돌려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인을 의식하고 주인의 뜻대로 추수를 해야 됩니다. 추수의 결과를 가지고 주인을 기쁘게 해야 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추수할 일꾼들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전도특공대를 만들어 영혼구원사업에 모두 동참합시다. /아멘!/ 오늘 주님이 일군들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너희들은 이제 세상으로 나가서 나처럼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료하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할/
  우리는 작은 예수가 되어 가는 곳마다 예수님의 대리자로서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료하는 소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어디를 가든지 작은 예수로서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계승하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아멘!/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일군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일군이 부족한 대도 기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교회에 일군이 부족하다고 실망할 것이 아니라 추수할 일군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진실된 기도가 좋은 일군을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
  여기 '보내어 주소서'라는 말은 '내어 보낸다'는 의미로서 거의 쫓아내듯이 보내 달라는 말입니다. 일군의 긴급한 필요성이 담겨져 있는 말입니다. 일군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고, 일군들을 보내달라고 기도합시다. /아멘!/
  오늘도 하나님은 천국 추수 일군을 찾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이사야 선지자는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했습니다.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어 즉시 지원병(자원병)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롬10:13-14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말씀하셨고, 딤후4:2절에서도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 써라'고 하셨습니다.
  전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누구에게든지 할 수 있는 것,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 어디서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12:3절에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할/ 우리 모두 이런 전도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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