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53강) 선택받은 열두 제자! ② (마 10:1-4)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7:05

(제53강)     선택받은 열두 제자! ② (마 10:1-4)

 

  선택받은 열두 제자들에게 주님은 큰 권능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악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으로 하신 말씀을 한 번 보겠습니다. 마28:18-20절에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하늘과 땅에 권세를 주셨다.'고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권세입니까? 그리고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또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니라'는 약속도 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신나는 약속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한번쯤 연구해 보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수석제자 베드로는 지난 시간에 알아보았습니다. 오늘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까지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①안드레, 그는 어떤 제자인가?
  안드레는 '강인함, 남자답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했던 제자였습니다. 그의 고향은 갈릴리 벳세다 지방에서 태어났지만 성장은 가버나움에서 자랐습니다. 베드로와 친형제이며 그도 또한 어부였습니다.
  성경은 누가 형인지에 대하여 밝히지 않았지만 학자들은 베드로의 통솔력을 보아 베드로가 형이 아니가 생각됩니다. 안드레는 세례요한의 제자입니다. 베드로와는 달리 상당히 종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안드레의 생애를 보면 베드로처럼 극적인 삶을 살았거나 어떤 감동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큰일을 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조용히 적은 일에 충성했던 제자 중에 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큰일을 맡으면 열심히 하고 작은 일을 맡으면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안드레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를 앞에 세우든지 않든지 간에 항상 뒤에선 조용히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안드레가 언제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요1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 예수님께서 나아오심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
  이때 요한의 제자로써 안드레가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안드레는 예수가 세상 죄를 담당하시고 그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구제주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을 쫓았다고 요1:37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그렇습니다. 제자의 첫 단계는 그분을 쫓는데 있습니다. /아멘!/

 

  ▶성경 사복음서에 보면 안드레가 한 일이 세 번 등장합니다.
  ⑴안드레는 베드로를 예수님께 소개한 장본인입니다(요1:40-42).
  전도 중에 가장 어려운 전도가 가족 전도입니다. 특히 형제전도입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자기의 형인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한 사람입니다.
  안드레의 직업은 육체적으로 몹시 고달프고 힘이 드는 어부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피곤한 생활 중에서도 진리를 찾는 일에 누구보다도 열심이었습니다. 안드레는 당시 혜성처럼 광야에 나타나서 회개를 외치며 잠자는 이스라엘 민중의 혼을 깨우치고 있던 세례 요한을 찾아가서 그의 제자가 되었고 그 운동에 적극 가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참 진리에 목말라 하던 그는 스승인 세례 요한의 소개를 받아 다시 진리이신 예수님 을 찾아갔습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까?'라고 예수님의 거처를 물어 예수님 있는 곳에 안내가 되어 첫 대면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무엇을 구하느냐?'고 안드레에게 찾아온 목적을 물으심으로 대화의 실마리를 풀기 시작하셨습니다. 이 날이 안드레의 생애에 있어서는 최고의 날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만나야 변화됩니다.
  ▶인생에서 어떤 사람과 만나는가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한국 최초의 시각 장애인 박사이며 미국 백악관 국가 장애위원회 차관보를 역임했던 강영우 박사는 중1때 학교에서 축구하다 공을 맞아 양쪽 눈을 다 잃고 말았고, 그 충격에 어머니는 쓰러져서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런 소년이 어떻게 세계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이 되었겠습니까? 그것은 좋은 만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명을 한 소년에게 긍정적인 마인드를 심어준 분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그는 아내를 잘 만났습니다. 중1때 시각 장애인이 되었을 때, 자원봉사를 한 대학생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으로 인도하고, 도와주면서 나중에는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는 시각 장애인이 되기 전에는 공부를 잘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시각을 잃고 공부를 했는데, 연세대 수석졸업을 했고, 미국에 가서도 좋은 성적을 내었습니다. 이는 사랑스런 아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또 그는 좋은 목사님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에서도 미국 수정교회 '로버트 슐러' 목사가 강영우 박사를 잘 인도해 주어서 세계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자신이 시각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잘못될 것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만남 중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은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강영우 박사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을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자신이 가진 가능성을 발견하고 하나님 안에서 그 가능성을 키워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인생이 달라진 사람이 또 있습니다. 크리미아 전쟁에서 피아를 불문하고 부상당한 군인을 돌 본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나이팅게일(1820-1910)입니다. 그녀는 의사들도 포기한 부상자들에게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키고 치료해 살려냈습니다.
  최전선에서 부상병들이 하나같이 바라는 것은 나이팅게일이 있는 병원으로 가서 그녀의 돌봄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병사들은 그녀를 '등불을 든 여성'으로 불렀고, 그녀가 가는 곳은 그 어디나 분위기가 성스러워져 병사들은 그녀의 발자국과 그림자에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은 국가적인 환영식까지 준비하여 그녀를 맞이하려고 하였는데 이름을 바꾸어 몰래 귀국할 정도로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겸손했습니다. 당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금강석을 박은 보석 훈장을 보냈고 훗날 영국 국왕 에드워드는 최고의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나이팅게일이 이렇게 된 것은 31세 때 예수를 만난 후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31세에 '이제 더 이상 유치한 일이나 허무한 것은 바라지 않으려고 한다. 오직 주님이 원하시는 것만 할 것이다'고 일기에 적었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예수를 만나야 변화됩니다. 안드레도 예수님을 만나서 그 인격에 접하자마자 큰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삶의 방향이 바뀌어졌습니다. 구원받아야할 인간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만나 삶의 방향이 바꿔지고 진리의 사람이 된 안드레는 자기 홀로 이 감격 과 기쁨을 간직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요1:41절을 보면 그는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전파했습니다. 사실 안드레는 그의 형인 베드로처럼 설교를 통해 한번에 삼 천명씩 회개시키는 대 전도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늘 개개인을 만나서 그리스도를 증거하였고 그 개인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해 왔습니다.
  성경을 보면 안드레의 이름은 언제나 독립되어 있지 않고 '베드로의 형제'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안드레는 베드로의 그늘에 늘 가려진 인물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실 안드레는 주님을 위해서 무슨 일이나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묵묵히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는' 자세를 견지한 사람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선임자였지만 베드로, 요한, 야고보로 묶어지는 핵심 제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한 마디의 불평이나 원망 없이 성실하게 자기가 맡은 일에 최대의 수고를 감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결론을 낼 수 있습니다. 안드레는 큰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큰 인물을 예수님께 소개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별로 큰 인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큰 인물을 예수님께 소개해 주는 다리역할을 할 수는 있습니다. 안드레의 역할이 정말 귀한 역할입니다.

  ⑵벳세다 광야에서 일어난 오병이어의 기적을 제공한 제자입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밧세다 광야에서 말씀을 전하시는데 모인 숫자가 오 천명이상입니다. 이 숫자는 어린아이와 노인과 여자를 뺀 장정들만 센 숫자입니다. 그러니까 약 1만 이상이 모인 집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어찌나 달고 오묘한지 청중들이 밥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해가 서산에 질 때까지 움직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너희들이 가서 먹을 것을 사다 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빌립을 시험해 보십니다. 그러나 빌립은 상식적인 계산 방법으로 도저히 할 수 없음을 고백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상식을 봅니다. 근거를 중요시 여깁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기적은 상식을 뛰어 넘습니다. 과학을 초월합니다. /믿/
  빌립은 여기는 광야인데 어떻게 오천 명 이상 먹일 수 있습니까? 돈이 이백 데나리온 이상 필요한데 어떻게 준비할 수 있습니까? 설령 돈이 있다 하더라도 떡집도, 밥집도 없고, 해가 이미 저 버렸는데 어찌 먹일 수 있습니까?
  결론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 안드레가 그 많은 청중 중에서 어린 아이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 어린아이는 점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보리떡 다섯,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안드레는 이것만 있으면 주님이 역사하실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예수님께 이 어린아이를 소개합니다. 형을 예수님께 소개해 주더니 이제는 어린아이를 예수님께 소개합니다. 안드레는 훌륭한 소개쟁이입니다. 그는 많이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숫자의 개념에 약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도 아주 적극적인 그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포기하지 않고 어린 아이 한 명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위대한 축복의 역사는 가만히 앉아서 실망이나 하고 원망이나 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 하심을 믿고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기적을 베푸십니다. /믿/
  여러분! 기도하고 찾으십시오. 기도하고 구상하고 사람들을 만나십시오. 하나님의 축복은 기도만 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에게는 허락지 않으십니다. 안드레처럼 적극적으로 찾아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찾아 나설 때,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시고 조건과 여건과 환경을 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도 빌립처럼 계산적이고 타산적으로 하면 안 됩니다. 안드레처럼 적극적으로 행동으로 옮기면서 부딪쳐야 합니다. 전도도 부딪치십시오. 모든 문제는 그 문제 속에서 해결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창조적인 능력을 주셨습니다. 까치는 수 백 년이 지나도 집을 짓는 방법이 똑같습니다. 왜? 창조적인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주택문화는 얼마나 발달했습니까? 안드레처럼 찾으면 길이 보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할/ 우리도 안드레와 같은 축복의 자료를 제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⑶요12:20절 이하에 보면 종료주일에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리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날이 저물고 그 이튿날 축제를 구경하러 왔던 헬라인 몇 사람이 빌립에게 예수님을 뵙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빌립은 그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가지 않고 안드레에게 옵니다. 안드레가 그들을 예수님께 소개합니다. 그러니까 안드레의 사역은 사람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사역입니다. 가장 큰 전도자의 사역을 잘 감당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같은 성격의 제자도, 안드레와 같은 제자도 절대 필요한 줄 믿습니다.

  ⑷그의 죽음은 언제인가?
  유대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안드레가 선교의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안드레 개인의 삶에 대한 자서전과 비슷한 '안드레 행전'이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이 기록에 보면 그가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러시아의 남부지방에까지 내려가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위기를 몇 번이나 당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희랍으로 옵니다. 그리스의 아가야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곳 주시사의 부인과 동생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지사가 그 사실을 알게 되자 그를 설득하기 위해 주시자를 만나 이야기하다가 안드레의 자상함, 깨끗함, 성실함에 주지사가 반해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상황은 주지사도 그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부에서 불화 같은 성화에 안드레는 처형하기 위해 X자형의 십자가를 만들어 처형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X형을 십자가는 안드레 십자가라고 했습니다. 안드레가 처형되어 전에 주지사는 안드레를 살리기 위해서 '지금이라도 예수님을 부인해야 그대 목숨을 내가 책임지겠다.'고 하자 '주지사님, 당신의 영혼도 주님께 맡겨야 한다.'고 하면서 끝까지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는 마지막 기도로 '주님! 나를 받아주소서, 당신의 영원한 나라에 평안 가운데 나의 영혼을 받아주소서' 기도를 마친 후 장엄하게 순교 당했다고 합니다.
  그 뒤 당시 유명한 화가인 '머릴로'가 그림을 그렸는데 X형 십자가에 안드레가 매달려 죽어 가는 그 곁에 어린 소년 하나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이 그림에서 눈물을 흘린 소년은 다름이 아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었던 소년이라고 합니다. 이 그림은 '성 안드레의 순교'라는 제목으로 지금도 베드로 성당에 걸려 있답니다.
  우리는 안드레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우리 모두가 강단에서 설교하는 설교자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예수님 앞으로 인도하는 안드레 같은 전도자는 될 수 있습니다. /아멘!/ 안드레를 통하여 전도한 베드로는 삼천 명, 오천 명을 회개시킨 능력의 종이 되었습니다.
  '에드워드 킴볼'이라는 사람이 어느 날 구두 수선 집에 들어가서 구두 수선을 하던 청년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했습니다. 이 청년이 마침내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영접하기 전에 구두 수선공이었던 그가 영접 후에는 미국 교회사에 위대한 부흥을 가져온 'D.L 무디'입니다. /할/

 

  ②야고보는 누구인가?
  야고보는 '발꿈치를 잡다'라는 뜻으로 구약의 야곱의 헬라어 표기입니다.
  시대적 배경을 보면, 예수의 공생애 초기인 A.D. 27년경에 12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부름 받아 헤롯 아그립바 1세(A.D.37-44년경)에 의해 A.D.44년경에 순교 당하기까지 활동한 인물입니다.
  당시 로마에 의해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의 통치자로 임명된 아그립바는 유대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유대인들의 율법을 존중하고 기독교를 핍박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이 때에 야고보가 순교 당했으며 베드로도 투옥된 일이 잇습니다(행12:1-5).
  당시 야고보의 이름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야고보를 소개할 때는 언제나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도 요한과 같은 형제입니다. 이 사람의 직업 역시 요한이 어부인 것처럼 어부입니다.
  그가 언제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막1:19-20절에 보면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군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예수님이 야고보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선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배도 있고, 삯군도 고용하는 것을 보면 상당히 부자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야고보와 요한이 늘 함께 다니고 있습니다. 형제의 사이가 굉장히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막3:17절에서 그들에게 별명을 지어 주었습니다. 무엇입니까? '우뢰의 아들'입니다.
  야고보는 별명처럼, 아주 성질이 급하고, 화도 잘 내고 그리고 정의감에 불타는 그런 불같은 성격입니다. 눅9:51-5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방으로 전도여행을 가지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매도합니다.
  이 모습을 보고 야고보, 요한, 형제가 불같은 성질이 나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예수를 괄시하는 사마리아 마을에 불벼락을 내려서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 다 해치워버립시다.'라고 하자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들의 어머니도 보통 여자가 아닙니다. 지금 말로 표현하면 치맛바람은 휘날린 여자였습니다. 마20:20절 이하에 보면 그 어머니가 두 아들,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와서 '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의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지금 말로 표현하면 '우의정, 좌의정'에 앉혀 달라고 청원을 했습니다.
  사실 그 자리는 최고의 요직입니다. 참 욕심도 많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대답은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은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는 받을 만한 사람이 받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이 야고보가 어떻게 죽을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게 될 것이니라'
  그 후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 세 사람을 더 중심적으로 훈련했습니다. 예수님은 수제자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대동하시고 변화 산에도 올라 가셨고, 야이로의 집에도 주님은 그들을 대동하고 '달리다쿰'의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할/
  그러니까 이들은 이 세상에서 장차 초대교회를 이끌고 갈 지도자로 훈련을 받은 것이고, 또 실제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들어가 보면 야고보가 초대교회의 영광스러운 지도자로 부상하게 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죽음이 분명하게 기록된 사람은 야고보 한 사람입니다. 행12:1-2절을 보세요!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헤롯왕의 박해 때 야고보가 칼에 맞아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야고보를 가리켜서 '최초의 순교자'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고보의 귀한 신앙의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한때는 어머니의 욕심으로 권력을 바라보았지만 예수님께 훈련을 맞고 변화되어서 그 권력만 바라보는 눈이 이제 주님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모든 순교자들이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주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아멘!/

 

  ▶그의. 평가 및 교훈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⑴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도 야고보의 마음 한 구석에는 예수를 거부한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분노와 편협한 이기적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과는 달리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저들을 불태워주기를 요구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 역시 주님의 말씀과는 달리 단 한 번이라도 그를 용서하고 싶지 않은 특정인에 대한 원한과 분노를, 혹은 편협한 파벌 의식을 품고 복음을 전하고 있지는 않는가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
  ⑵'우뢰의 아들'이라 칭함 받을 만큼 야고보는 성급하고 다혈적인 성격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그가 예수의 제자가 되어 예수와 동행하게 될 때 점차 온유한 주의 성품을 따르게 되었고, 더욱이 의를 위해서 기꺼이 순교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예수를 영접한 이상 본래의 나의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의와 거룩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아멘!/
  ⑶한때 야고보는 예수로 말미암아 세상 적인 큰 지위를 얻어보려는 헛된 야망을 꿈꾸어 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주로 말미암아 세상적인 이익과 영광을 얻어보려는 잘못을 범하고 있지는 않은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할/

 

  ③요한은 누구인가?
  시대적 배경을 보면, 예수의 공생애 초기부터 로마 황제 도미티안(A.D.81-75년) 통치 이후까지, 즉 A.D.27-95년 이후까지 활약을 했습니다. 이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로부터 초대 교회의 태동기, 과도기, 확장기 및 성숙기에 이르는 때입니다.
  이 기간 동안에 교회는 유대교의 종교적 박해와 로마 제국의 정치적 박해 및 이단의 공격 등 대내외적인 시련을 거치면서 교회의 조직 정비, 정통 교리의 정립 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격동기에 12사도 중 마지막까지 남아서 활약했던 훌륭한 인물입니다.
  요한은 야고보의 동생입니다. 그도 놀랍게 변화가 되어 예수님께 제일 많이 사랑을 받았던 제자입니다. 요13:23절에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누구를 말합니까? 바로 요한 자신을 소개한 것입니다. /할/
  그의 아버지는 '세베대'입니다. 사복음서에 보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의미입니다.
  미국인의 이름 가운데서 가장 많이 쓰는 인기 있는 이름이 무엇인가 통계를 조사해 보았더니 약 60만 명이 이 요한이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아마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했던 모든 어머니들이 자기 자식들에게 이 이름을 불려준 것 같습니다.
  이 요한이 언제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요1:35절 이하에 보면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 때 두 제자가 옆에 있었는데 하나는 아까 배운 안드레이고,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제자가 바로 이 요한을 말합니다.
  요한은 세례요한의 제자입니다. 그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를 영접할 사람입니다.
  요한의 성격도 처음에는 불같은 성격이었습니다. '우뢰의 아들'이라는 말은 '천둥과 번개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눅9:49-50절에 보면, 요한이 보니까 어떤 낯선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화가 나서 그들에게 '우리 선생님이 언제 허락을 하셨기에 무슨 권한으로 우리 선생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당신들이 귀신을 쫓아내고 기적을 행하느냐?'고 따졌습니다.
  요한은 자기편이 아니면 모두가 다 적으로 간주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봅니다. 그러니까 화도 잘 내고, 마음도 좁고, 편협했고, 성질이 불같았습니다.
  이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넓으신 마음과 요한의 좁은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좁쌀 같은 마음을 가진 요한이 넓으신 예수님의 사랑에 큰 변화가 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 붙잡히기만 하면 좁쌀 같은 마음이 큰마음이 되고 작은 그릇이 큰그릇으로 바꿔집니다. /믿/
  학자들이 표현을 빌면 예수님의 12제자 중 요한이 제일 놀랍게 변화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요한복음을 썼고, 요한 서신 1.2.3을 썼습니다. 요한복음은 빛을 많이 강조했고, 사랑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특히 요한 1, 2, 3서는 오직 사랑을 강조한 사랑 학입니다.
  요13:34-35절을 보면 예수님의 설교 중에 정말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그런데 놀랍게도 요한의 설교는 오직 사랑이었습니다.
  그의 서신에 보면 모두 사랑이 주제입니다. 그 유명한 요3:16절도 요한 설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할/
  이 말씀도 유명하지만 요1서 3:16절도 유명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러니까 요3:16절에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다면 요1서 3:16절의 '그 사랑을 형제를 위하여 나타내라'는 메시지입니다. /아멘!/


  ▶요1서 4장을 보면 요한의 사랑 학 네 가지를 발견합니다.
  ⑴7-8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4장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말씀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입니다.
  ⑵9절에 그 하나님의 사랑은 성자 하나님이신 '독생자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십자가에서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할/
  ⑶13절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아멘!/
  ⑷20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을 다시 정리해 보면 '성부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성자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으며, 이 사랑은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 마음속에 거하게 하셨으며, 우리 마음속에 거하게 된 이 사랑을 내 곁에 있는 이웃에게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할/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와 함께 쌍벽을 이루며 요한이 활동을 합니다. 행전을 읽어보면 바울이 나타나기 전까지 처음 절반의 역사가 베드로와 요한의 역사입니다.
  요한은 복음을 전하다가 잡히게 되고 그 후 밧모섬에 귀향을 갑니다. 그가 밧모섬에서 깊이 기도하던 어느 날 성령이 그를 감동하시여 하나님의 위해한 계시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러던 중 그는 귀향에서 풀려 나와 다시 에베소에서 마지막 최후에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때는 이미 다른 제자들은 다 순교했습니다. 다만 요한 만이 최후까지 살아남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살아 있는 순교자라고 합니다.
  초대교회사에 보면 요한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혔습니다. 그래서 그도 독사 굴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이 독사의 독을 뽑아 버려 생명이 멀쩡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끄집어내어 꿇은 가마솥에 던졌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놀랍게도 그를 살리셨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들 것에 실려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는 들 것에 실려 회중에게 설교를 했습니다. 이때 설교의 제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소자들아! 너도 사랑하라!'는 제목이었다고 합니다.
  그 때 한 성도가 '선생님, 선생님은 그 설교를 수십 번도 더 하셨습니다. 이제 새 설교가 듣고 싶습니다.' 그래도 요한은 다시 말하기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요한의 최후의 설교모습입니다. 그는 A.D 100년경에 죽었습니다.

 

  ▶요한을 통해서 얻어지는 평가와 교훈은 무엇입니까?
  ⑴성급하고 과격하며 야심으로 가득 찼던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점차 사랑의 사도로 변신해 가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주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으나 아직 과거의 좋지 못한 성격과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우뢰의 아들에서 사랑의 사도로 변모한 사도 요한'처럼 온전히 성령의 열매를 맺는 새로운 모습과 성품으로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멘!/
  ⑵요한은 주님의 부름을 받자 자신의 처지와 환경에 머뭇거리지 않고 다 버리고 즉시 주를 따랐으며, 모든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진 상황에서도 예수의 십자가 형장까지 따라간 용기 있는 제자였습니다(마4:21-22). 이러한 모습을 우리도 배워야 합니다. /할/
  ⑶예수의 사랑 받는 제자로 불려진 요한은 그의 서신을 통해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사랑의 실천의 중요성을 교훈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주님과 깊은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기도를 통하여, 헌신을 통하여 깊은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사랑을 받아 본 자만이 베풀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가를 확인합시다.
  ㈂사랑은 주고 줄수록 더 커집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은 이웃에게 줄 수 없는 가난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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