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74강) 물 속에 빠진 베드로! (마 14:22-36)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7:22

(제74강)       물 속에 빠진 베드로! (마 14:22-36)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먼저 바다 건너로 보내시고, 따로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건너가다가 큰 풍랑을 만나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밤 사경에 그들의 어려움을 아시고 물 위로 걸어오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어려움을 아십니다. 그리고 찾아오십니다. 제자들의 어려움을 아시고 찾아오신 주님은 오늘 우리들의 삶의 고난 속에도 찾아오십니다. /아멘!/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면 가까운 친구도 믿었던 친구도 사랑하는 사람들도 떠나갑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어려우면 믿었던 사람들도 떠나갑니다. 어려울 때에는 사람이 사람을 배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주십니다. 어떠한 풍랑이 닥쳐와도 주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본문에 제자들 중에 주님의 음성을 모두 다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라!'고 명하시니 베드로가 주님을 바라보고 배에서 내려 물위를 걸어서 바다 위를 걸어갑니다.
  아마 세상 처음으로 베드로는 물 위를 걷는 기적의 사나이가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가 바람을 보고 풍랑을 보고 그냥 무서움이 들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물 속에 빠져들어 갑니다. 베드로는 소리를 질러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외치자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아 건져내시고 하신 말씀이 '믿음이 적은 자야, 왜 의심하느냐?'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제목 소개!▶

 

  본문의 배경은 오병이어의 기적 뒤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22절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여기에 보면 어떤 특별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남자만 오천 명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급히 보내십니까? 왜 모여 있는 궁중들은 순식간에 흩어버리십니까? 위기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이려는 세력들이 갑자기 나타난 그런 위기가 아니라,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는 위기가 온 것입니다.
  군중들뿐만 아니라 제자들은 그들과 합류해서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 사건은 요6:15절에서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여러분 예수님이 이스라엘 정치적인 왕으로 오셨습니까? 아닙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전 인류의 죄를 속량하시고 구원해 주실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아멘!/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벳세다 광야에서 건너편은 가버나움입니다(요6:17).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버나움으로 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23절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기도하러 산에 혼자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기도의 생애입니다. 청중을 흩으시고, 인기를 지적하시고, 민중혁명을 거부하시고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위기 때마다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도 기도하셨습니다. 마26:39절에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위기가 와도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바쁘고 일이 많을수록 더 기도해야 합니다. 쫓길수록 조용한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을 떠나고 장소를 떠나서 한적한 곳에 가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자식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우리의 삶의 모든 범사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생애에 중요한 어떤 결정을 하려는 분이 있습니까? 흥분하지 마시고 사람을 쫓아다니지 마시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밤이 맞도록 철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 기도를 하셨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해가 저물도록 아니 한밤이 지나고 새벽에 제자들이 바다 위에서 풍랑을 만나게 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 습관은 사복음서에서 너무나도 잘 나타나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광야에서, 산에서, 다락방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새벽에, 저녁에, 철야로' 정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항상 쉬지 않고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우리는 여러 번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자주 열심히 기도하셨다는 사실은 어쩌면 좀 의아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예수님은 기도하지 않아도 될 만한 분이십니다. 왜 그런지 아시지요? 당신 자신이 바로 성자 하나님이시니 정말 기도하지 않아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 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다 통하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인데도, 그런 예수님조차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이처럼 간절하고도 부지런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셨던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당신의 제자들을 위하여 중보 기도해 주시기 위함이십니다. 베드로가 시험에 들지 않게 하기 위하여 기도하셨던 주님은 오늘 본문의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아멘!/
  목사가 어떤 성도의 어려운 형편을 기억하고 기도해 준다면 누구나 다 크게 위로를 받고 감사할 것입니다. 다른 성도들이 여러분의 개인적인 사정을 위해 함께 기도해 준다면 큰 힘이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해 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신다면 그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할/

 

  ▶24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예수님을 떠난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기본적으로 바다는 친숙하지 않는 장소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바다는 혼돈과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는 장소였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 바다가 갈라지고 그 곳으로 지났습니다. 그들이 다 건넌 다음에 갈라진 바다 물이 합쳐져 뒤따라오던 애굽 군병들이 모두 익사했습니다. 아수라장이 되어 그 속에서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하나님이 일으킨 역사이지만 그들은 바다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역사적 관념이 있는 그들에게 당시 신화적 관념이 더했습니다. 그들은 바다에 '얌'(Yam) 신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자연신을 믿었습니다. 바다를 다스리는 신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바다에 괴물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신을 메소포타아(바벨론) 사람들은 '티아맛'(Tiamat)이라고 했고, 역사를 따라 근동지역으로 퍼지면서 그리이스(헬라)에서는 '포세이돈'(Poseidon)이라고 했고, 이스라엘(히브리) 사람들은 '얌'(Yam)이라고 했습니다.
  그 신들은 바다를 주관하는 신으로서 자기에게 잘해 주는 사람이 배를 타고나오면 고기를 몰아서 많이 잡을 수 있도록 해 주고 자기에게 잘못하는 사람이 배를 타고나오면 광풍을 일으키고 배를 뒤집어 죽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런 환경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오고 가도 못하는 진퇴양란의 위기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상하게도 오도 가도 못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야만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게 됩니다.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인간으로써는 불가항력인 파도에 시달리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절을 보면 '밤 사경'이라고 했습니다. 밤 사경은 새벽 4시 무렵을 말합니다. 제자들이 떠난 무렵은 초저녁, 그런데 밤 사경 때까지 고생했다는 것을 보면 이 제자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마 그들은 지치고 기진 했을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가 그들을 엄습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무엇을 느낍니까? 인생은 바다 위로 향해하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똑같다는 교훈입니다.
  처음에는 순풍이 붑니다. 모든 것이 잘 됩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것이 광풍으로 변할 때가 많습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그들은 5천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순간 죽게 된 것입니다. 축복과 고난이 대비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의 불 세례를 받고 기적을 체험하고 병이 났고, 죽었다가 살아가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죽음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은혜 받고 기뻐하다가 다음 순간 정반대의 경험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겪는 축복과 고난의 두 주제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단면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되고 모든 것이 평안하고 축복이었는데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풍랑과 파도에 덮여 꼼짝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솔로몬은 전7:14절에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축복이 오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고난이 오면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 주님이 제자들만 따로 보내셨습니까? 한마디로 제자들을 훈련시키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도 끝없이 파도가 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25-26절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시간을 보면 밤 사경이라 했습니다. 밤 사경은 새벽 12시부터 6시까지입니다. 캄캄한 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대부분은 어부출신입니다. 바다에 익숙합니다. 노를 젓는데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풍랑 앞에 제자들은 그 어부의 기술도, 어부의 경력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풍랑과 인간은 상대가 안됩니다. 비교가 안됩니다. 지진, 홍수, 태풍 이런 재난 앞에 인간은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찾아오는 죽음은 우리가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각종 사고소식 또 죽음의 사실 앞에 인간은 불가항력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는 것이 당연한데도 죽음의 공포 앞에 우리는 벌벌 떨고 있습니다.
  그 날 제자들도 밤 사경에 폭풍 속에서 절망하고 지치고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캄캄한 때에 능력의 주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피할 길을 주십니다. 고전10: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어떠한 고난이 온다할지라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고난을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교회 이 어려움을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렵다고 떠나지만 우리 주님은 밤 사경에 찾아오십니다. /할/ 만약에 우리가 어떤 시험도 이길 수가 없다면 하나님이 반드시 피할 길을 주실 것입니다.
  여기서 밤 사경에 나타났다는 말속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①놀라운 주님의 사랑이 들어있습니다. 두려움과 무서움에 쫓겨 잠을 잘 수가 없이 밤 4시까지 고민하며 고통 중에 있을 때 예수님이 나타나신다면 얼마나 큰 충격입니까? 밤 4시경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불의에 고난 가운데 벌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밤 4경에 오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방법을 초월해서 고난 당하는 성도들에게 사랑으로 오신다는 진리입니다.
  ②인간의 절망의 때에 하나님은 정확하게 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 '바다 위로 걸어서' 오신 예수님은 끊임없이 우리가 보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놀랬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유령으로 오해한 이유는 물 위로 걸어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신다는 것은 예수님다운 행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본체가 세상천지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천지의 운행법칙을 정하시고 오늘도 그 천지우주 만물을 운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불 신앙자들은 예수님이 물 위에 걸었다는 사건을 믿지 않습니다. 이성의 경험으로 상식으로 생각해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성도 지식도 상식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심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
  우리 주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잇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신 것은'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⑴예수님께서 바람과 파도를 정복하셨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는 바람과 파도를 꾸짖어 잠잠케 하셨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거센 바람을 뚫고 성난 파도를 발로 밟고 걸어오신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가 없으면 살아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고민이 있고, 괴로움이 있고, 질병이 있고, 아픔이 있고 부딪쳐야 할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문제를 머리에 이고 있느냐? 발아래 깔고 있느냐? 그 차이입니다. 어떤 사람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계속 이고 삽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문제를 피할 생각은 하지말고 문제를 발 밑에 두고 그것을 밟아 버려야 합니다.
  파도는 정복하신 예수님, 그 성난 파도를 발로 밟으신 예수님, 환경을 지배하신 예수님, 우리 주님은 모둔 문제를 지배하시고 정복하신 분이므로 그분께 맡기시면 됩니다. /아멘!/
  ⑵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오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마치 물 위를 걷는 것처럼 불가능한 삶을 사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죄를 이기고 극복하는 것, 인간의 죄로 물든 본능대로 살지 않고 놀라운 성령의 세계 속에서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가능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할/
  하나님은 물위로 걸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풍랑의 현장에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에디슨의 신조는 매우 성경 적이었답니다. 에디슨만큼 좌절과 실망을 많이 겪은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명한 발명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신조는 '어려울 때 요나를 생각하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요나는 풍랑이 일 때 바다에 던져진 사람입니다. 보통 풍랑이 아니라 큰배가 요동치는 파선직전에 있는 풍랑에 던져진 요나입니다.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요나는 바다에 던져졌고 그것도 물고기가 그를 삼켜 버렸습니다. 바다에 던져진 사람은 살수도 없고 물고기에 삼켜진 사람은 살수도 없습니다. 인간 편에서 보면 요나는 죽었습니다. 확실히 죽었습니다. 아무도 요나처럼 던져져 삼키어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편에서 요나는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편에서는 요나를 살렸습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우리편에서 볼 때는 죽었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기 때문에 나사로는 장례식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 편에서는 그 죽은 나사로를 살릴 수 있습니다. 풍랑에 던져진 요나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살렸습니다. 물고기가 삼켰지만 우리 인간 편에서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렸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우리편에서는 절망입니다. 우리편에서는 끝났습니다. 우리편에서는 살 가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얼마든지 기회가 있고 소망이 있고 얼마든지 구원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 풍랑을 만난 제자들은 자기들 힘으로는 풍랑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구원해 주시려고 물위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이 무엇인가? '유령이라'고 무서워하며 소리를 지릅니다. 고난보다 더 무서운 것은 불 신앙입니다. 여기 또 그들이 예수님을 몰라보았다는 것이 큰 불행의 원인이었습니다.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다녔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믿음의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눈이 닫히면 함께 다니던 예수님도 유령으로 보입니다. 믿음의 눈이 닫히면 함께 자란 친구도 적으로 보이는 수가 있습니다. 믿음의 눈이 닫히면 함께 사는 부부도 원수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믿음의 눈이 닫히면 존경하던 스승이나 선배도 무시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고난 자체보다 더 무서운 것은 불 신앙입니다. /믿/

 

  ▶27절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인간이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을 때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주님을 유령처럼 오셔서 상황을 반전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마지막에 이기십니다. 최후에 웃는 자가 승자입니다.
  여기 '안심하라'는 말을 한자말로 보면 '마음을 놓으라'는 뜻이지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는 말을 영어로 보면, '용기를 내라, 용기를 가지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용기를 잃어버리면 두려워합니다. 그러니까 '안심하라'는 말은 '용기를 내라'는 말이고, '내니 두려워 말라'는 말은 주님의 음성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을 유심히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신 이 대목은 갑자기 일어난 우연의 행동이 아닙니다.
  막6:48절에 보면 똑같은 대목을 마가는 이렇게 묘사를 했습니다. 밤에 산에 기도하러 가신 예수님이 괴로이 노 젓고 있는 제자들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사경을 헤매는 그 고통의 광경을 산에서 기도하시던 주님이 보고 계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현장에 찾아오셨습니다. 이 대목이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의 현장을 다른 사람은 다 잊어버려도 주님은 보고 계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그리고 내가 감당을 못하고 있을 때 주님은 찾아와 주십니다. 이 두 가지 모습의 주님은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끈을 가지고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는 잊어버리지만 주님은 잊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등지고 마음대로 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 당할 때 그 현장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찾아와 주십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아가페의 손길을 믿어야 합니다. /아멘!/ 본문에서 제일 중요한 말씀은 '내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원문은 '에고 에이미'라는 말로 영어로는 'I am'입니다. 출3:14절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를 헬라어로 번역하면 역시 '에고 에이미' 즉 'I am'과 같은 뜻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신 것은 그냥 단순한 '나다'라는 뜻이 아니라 '나는 스스로 있는 자'고 하신 신성을 가지신 분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니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인간의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12: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님만 바라보면 안심이 되고 두려움이 없습니다. 시127:2절에서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여기서 잠을 주신다는 것은 불안과 두려움이 없는 평안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믿/

 

  ▶28-29절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불 신앙을 보게 됩니다.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두 눈으로 보면서도 베드로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보고 유령이 아닐까 두려워하고 소리 질렀다고 했습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했던 그가 물 위로 걸어오시는 새로운 기적 앞에서 그는 다시 불 신앙에 빠져 당황하고 있습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하소서!' 여기서 '만일'이 문제가 됩니다. 믿음이 확실하다면 '만일'을 쓰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적을 본다고 반드시 믿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합니다. 그래도 믿을 사람은 믿고 안 믿을 사람은 안 믿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났다고 다 믿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기적을 보고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기에 기적이 보이고 믿음이 있기에 그것이 기적으로 해석되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하소서' 이 고백을 통하여 베드로는 믿음이 증명되었다고 했습니다. 요14:12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베드로는 주님이 하시는 일로 자기도 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베드로는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이 물위를 걸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위로 뛰어 내렸습니다. 그리고 물 위를 걷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①주님의 말씀의 능력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라!'고 하실 때 걸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것은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시니 나도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물위로 발을 옮겼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난 갈릴리 바다에서는 '내가 밤이 맞도록 수고해도 얻은 것이 없었지만 당신의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던지겠소!' 신앙생활은 내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②베드로가 광풍을 보지 않고 물위에 서 계신 예수님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환경보다 더 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물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환경과 조건 때문에, 낙심하지 마시고 환경보다 조건보다 더 크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높은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본 적이 있습니까? 올라갈 때 밑을 보면 안 됩니다. 밑을 보면 어지럽고 무섭습니다. 그래서 아차 하면 떨어집니다. 위만 보고 가야 합니다. 위만 보고 가면 하나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예수님만 바라보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30절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예수님 바라보고 갈 때는 안전했습니다. 그러나 물결과 바람을 보는 순간 베드로는 물 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본문에서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고난의 파도를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지만 고난을 바라보면 더 깊은 고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고난을 바라보면 고난을 이기지 못합니다. 절망을 바라보면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 저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지요?' '지금 저의 문제를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주님, 이 짐이 제게는 너무 무겁고 감당하기 힘듭니다. 제 이 고달픈 인생의 짐을 주님 맡아 주세요? 감사합니다. 주님 찬양합니다.' /할/
  왜 베드로가 물 속에 빠졌습니까?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대신에 환경을 의식했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환경, 조건, 처지를 보면 금방 망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주님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십시오, 마11: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또 빌4: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또 빌4:19절에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할/
  환경을 바라보면 망할 것 같지만 능력의 주님을 의지하면 새로운 조건이 열립니다. 왜? 주님은 환경도 조건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풍랑도 바람도 잠재우신 예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지금 물 속에 빠지고 있는 베드로가 얼마나 놀랍고 두렵겠습니까?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렸습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이 기도는 생명을 건 기도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생명을 건 기도가 필요합니다. 절대, 절명의 긴급한 외침이 생명을 건 기도입니다. /아멘!/ 베드로로부터 구원의 요청을 받으신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31-33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예수님이 즉시 손을 내미셨습니다. 이때는 조금만 늦어도 안 됩니다. 즉시 손을 내미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잠시도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아 주셨습니다. 건져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을 걸고 기도해 보십시오, 즉시 응답이 있습니다. 여유 있게 기도하면 예수님도 여유 있게 응답하십니다.
  예수님은 먼저 즉시 손을 내밀어 건져주시고 그 다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고 하십니다. 여기 이 '의심'이라는 단어는 문자 적으로는 '두 마음을 갖다'라는 뜻으로서, 예수님만 바라보던 마음이 바람과 물결을 보는 마음으로 대신 바뀌어 버린 것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의심한다'는 말은 '두 줄을 잡아당긴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즉 이쪽에서도 잡아당기고 저쪽에서도 잡아당기고 양쪽으로 잡아당긴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의심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로 통일되어 있어야 합니다.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 이렇게 양쪽으로 갈라져 있으면 안 됩니다. 의심이란 바로 그 갈라진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삼 년 반 동안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는 동안 이들은 온갖 '약한 믿음, 실족하는 믿음, 의심하는 믿음'까지 보여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에도 예수께서는 결코 낙심하거나 포기하거나 방관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면 믿겠습니다.'라고 당돌하게 요구하는 빌립에게는 '나를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보고 낙심하여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에게는 친히 성경 개인 교습을 통하여 메시아가 어떻게 고난 당해야 한다고 예언된 말씀을 가르쳐 그들로 하여금 깨닫고 믿게 해 주셨습니다.
  '만져 봐야 알겠다'는 도마에게는 '정 그렇다면 네 손가락 가지고 직접 다 만져 보고 제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라'고 당신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내 보이시기까지도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믿/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것'을 그리는 미술대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대회에는 정말 평화롭게 보이는 장면들만 그려진 갖가지 그림들이 응모되었습니다. '양떼가 노니는 전원이라든지, 잔잔한 바다 위에 미끄러져 가는 듯한 돛단배의 그림, 혹은 엄마 품에 안겨 잠자는 아기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 등이 그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일등을 차지한 그림은,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바닷가 낭떠러지 절벽의 한 틈바구니에 있는 보금자리 안에서 어미 갈매기 품에 안겨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는 새끼 갈매기들을 그린 그림이었다고 합니다.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찾아와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성도들에게는 결코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할/
  32절에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이것이 바로 승리의 비결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풍랑을 만났을 때 우리의 인생의 배 안에 예수님을 모시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34-36절 "저희가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그곳 사람들이 예수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다만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이제 바다를 다 건너갔다는 말입니다. 여기가 가버나움입니다. 그 땅에 예수님이 가시니 온 마을의 사람들이 예수 신줄 알고 온 동네에 통지하여 병든 자에게 소식을 전하니 많은 병자가 몰려왔음을 의미합니다.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사람을 보내어 소식을 전한다는 뜻으로 가버나움 사람들이 이웃과 주위에 모든 사람들에게 일일이 찾아다니며 주님이 그들의 동네에 오신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도 열심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믿음도 대단합니다. '다만 예수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면 치료받을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38년 혈루증 여인의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예수님과 접촉하는 자는 다 나음을 입었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예수님과 교통하고 접촉할 때에 우리의 영혼이 소생되고 심령의 새로워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멀리서 바라만 보는 성도가 되지 말고 좀 더 가까이 늘 접촉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 나음을 얻었다'는 것은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선언입니다. 학자들은 본문 34-36절을 가리켜 '가버나움의 선언'이라고 합니다. ⑴예수님이 친히 그곳에 찾아가셨고, ⑵사모하며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마다 축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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