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강) 소원을 이룬 큰 믿음! (마 15:21-28)
사람들은 저마다 소원이 있습니다. 자신의 문제, 부모형제, 자녀들의 문제, 또한 사업의 문제, 건강의 문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문제에 부딪쳐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있지만, 도무지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실존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인간의 한계상황, 또는 극한 상황'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절대 위기, 절대절망의 사건입니다.
이 한계 상황에 처하면 인간은 절대자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계 상황에 처한 인간, 바로 그 구체적인 모습을 오늘의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한 가나안 여인이 있었습니다. 막7장에 이 여인은 수로보니게 여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녀는 과부이며, 가난하고, 천한 삶을 살면서도 딸 하나를 자기의 생명처럼 알고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려 미쳐버리고 말았습니다. 딸은 어머니도 알아보지 못하고 괴성을 지르며 머리가 산발된 채 다 찢어진 옷을 입고도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딸의 병을 고치려고 여러 병원, 좋다는 약을 다 써 보았으나 딸의 병세는 날로 심해져만 갔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현대인들에게는 이 여인처럼 절박한 문제 한계상황에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딸의 문제로 밤잠을 못 이루면서 괴로워하고 있을 때 한 기쁜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그 소식이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시방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듣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능치 못할 일이 없으며 오병이어는 수만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신 분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물 위를 걸으실 수 있을 뿐 아니라 병든 자를 고치시며 귀신도 능히 쫓아내시는 능력자라는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만이 자기의 딸을 구원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복음을 듣는 것이 귀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자가의 딸을 고침 받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란 확신과 믿음과 소망이 있었습니다. 히브리 기자는 이런 마음가짐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히11: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아멘!/
성도는 누구나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행위를 살피시고 우리의 말을 들으시며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의 사정을 헤아리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의 실존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139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은 나를 감찰하시고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며 나의 가는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며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신 분'이라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 마음 중심으로 예배드리고 온전히 맡기고 기도하는 자에게 반드시 '응답의 상, 축복의 상, 소원성취의 상, 문제해결의 상, 좋은 결과의 상'을 주십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들어가셔서 가나안 여자 하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여자는 자기 딸의 고통스러운 병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러 온 여인입니다. 그 여인의 딸은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생하는 딸을 보는 어머니의 심정은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을 것입니다. 얼마나 가련하고 불쌍한 일입니까?
그래서 주님께 부탁을 드리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 한 일은 그 여인이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그래도 예수님이 모른 척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상대적으로 더 큰 소리로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래도 모른 척하십니다. 그 때 제자들이 시끄럽고 귀찮게 생각했던지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예수님, 너무나 시끄럽습니다. 어떻게 해서 좀 보내십시오'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여인이 계속해서 간청 할 때에 다시 하시는 말씀이 '자녀들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냐?'고 하십니다.
사실 이쯤 되면 이 여인이 맥이 빠져 돌아 갈 만도 합니다. 개 취급을 당하는 인격적인 모욕을 받으면서까지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여인은 그 순간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합니다. 오늘 이 부분을 우리가 마음 판에 새겨야 합니다. '주여 옳소이다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할/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할/
성경은 태어나서부터 배울 수 있지만, 믿음은 배워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한 번도 설교는 들은 적이 없는데도 이 여인에게는 놀라운 믿음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가르쳐서 '큰 믿음, 소원을 이른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제목 소개!▶
본문을 자세히 상고해보겠습니다.
▶21절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거기서 나가사' 가버나움에서 떠나 이방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막7장에서는 이곳을 '수로보니게' 땅입니다. 두로와 시돈 지역은 이스라엘의 최북단에 있습니다. 오른편으로는 레바논 산이 있고, 왼편으로는 지중해가 있는 항구도시입니다. 특히 두로는 원래 페니키아 사람들이 살았고, 상업적으로 아주 번영하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332년에 알렉산더 대왕에게 공격을 받아서 완전히 멸망해 버렸는데, 그 뒤로부터는 페니키아 사람들보다는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이 두로에 더 많이 이주해서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한 마디로 이 지역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유대인들의 피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이방인들이 살아가고 있던 지역입니다.
이 여인을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수리아 지방의 페니키아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다른 데서 온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지역에 살던 원주민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아주 멀리 여행을 하셔서 이방인의 지역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이곳은 우상숭배지역으로 아주 유명한 곳입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은 선택된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고 천국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이방인의 땅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버림받고, 저주받은 백성이라고 일컬어졌던 이방인들을 위하여 전도에 길을 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할 때부터 유대 땅에서 이스라엘에게 천국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정작 믿어야 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부터 이스라엘은 자기들만 선택받은 선민이며, 구원은 우리의 전유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만 믿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 땅을 거룩한 땅이고 이방인의 땅은 저주받은 땅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저주받은 이방인의 땅에 가셨는데 그곳에서 놀라운 믿음의 사람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가나안 여인입니다.
▶22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가나안여자가 그 지경에 나와서' 가나안 땅은 원래 7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신7:1절에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족속과 여부스'족속 등 일곱 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의 대표적인 종교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고 있던 족속이 가나안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여자는 잡다한 우상을 섬기고 있던 자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잡다한 우상을 섬깁니다. 돌멩이 앞에 절을 하고 불 떠놓고 절하고 굿을 하고 부적도 붙입니다. 불안하기 때문에 잡다한 신들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 여자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사랑하는 딸이 흉악한 귀신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의학으로도 풀 수 없는 고급스러운 문제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딸이 귀신 들어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지고 미쳐 날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부모의 심정은 어떠하겠습니까? 갈기갈기 찢어지는 심정일 것입니다. 요즘 자식이 대학만 떨어져도 심장이 갈기, 갈기 찢어진다고 합니다.
사실 이 어머니에 비하면 대학에 떨어진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본문은 '아주 흉악한 귀신이 그 딸을 사로잡았다'고 했습니다. 부모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기막힌 고통입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어떻게 했겠습니까? 분명히 자기가 믿는 신에게 하소연을 했을 것입니다. 제물도 바쳤을 것입니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사랑하는 딸을 고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신에게 아무리 하소연하고 제사를 드리고 굿을 해도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귀신들린 딸을 어찌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이 여인에게 갈등이 온 것입니다. 그동안 믿고 신뢰했던 우상의 종교는 더 이상 아무런 능력이 없는 종교임을 이 여자는 깨달았습니다.
이때부터 이 여인은 고민하고 다니다가 새롭게 하나님에 대해서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주님을 만나자마자 소리를 질렀습니다.
'소리 질러 가로되' 몇 가지로 생각해 봐야 합니다.
①부르짖는 믿음이 이 여인에게 있었습니다. 여기서 '소리질러'란 말은 적극적으로 주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모습입니다. 즉,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여리고 성의 소경 바디매오도 주님을 향하여 소리지르며 부르짖을 때 주님이 그를 만나 주셨고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여러분도 부르짖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이 여인은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55:6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②기회를 놓치지 않은 믿음이 귀합니다. 성공 자와 실패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성공 자는 기회를 잘 잡는 사람이고, 실패자는 기회를 놓친 사람입니다. 주님이 오늘 나에게 오셨습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내일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순간 주님이 오신 이 순간 부르짖어 만나고 기필코 내 딸을 고치고야 말겠다는 그 믿음이 얼마나 돋보입니까?
여러분, 우리에게는 지금 이 시간이 기회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후6:2절에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③이 여인에게 악착같은 끈기가 있는 믿음이 귀합니다. 여기 '소리지르다'는 악착같이 큰소리로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그녀의 외침은 절규요 목숨을 내건 인내의 하소연입니다. /할/
생명같이 귀한 딸의 고생을 곧 자신의 고생으로 여기고 예수님께 호소한 것입니다. 우리가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은 생명을 건 기도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어떤 기도도 못 들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속으로 생각만 해도 다 알아들으십니다.
그러나 속에 간절한 마음이 있을 때는 막 터지는 것 같습니다. 그때는 입술을 조용조용히 얘기할 수 없습니다. 가나안 여인이 그랬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이 귀가 먹어서 소리 지르는 것이 아닙니다.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과 자녀에 대한 간절한 사랑이 바로 가나안 여인의 응답 받는 첫 번째 중요한 비결이 된 것입니다. /할/
④이 여인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긴 신학적 설명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주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구약의 예언된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구약에 보면 메시아는 반드시 다윗의 자손에서 나온다고 해서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냥 '다윗의 후손'들이라는 말과는 전혀 다른 '메시아'라는 의미로 사용됐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를 때 어떤 목적으로 따랐다고 했습니까? 병 고치기 위해서만 따랐습니다. 출세하기 위해서만 따랐습니다. 떡을 얻어먹기 위해서만 따랐습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이렇게 따르는 것을 보고 주님께서는 근심하시고 한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놀랍게도 예수님을 주로, 나의 주인으로 알고 '주 다윗의 자손이여' 이렇게 주님이 메시아인 것을 알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단순히 예수를 병만 고치는 의사나 마술사로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구세주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할/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누구로 알고 믿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곳에 있을 때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때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를 누구라 하는 것을 여러 군데서 듣고 있었던지라 대답하기를 '사람들이 예수님을 엘리야라 하나이다 혹은 모세라고 하나이다 혹은 선지자라고 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엘리야나 모세라 하면 당시 이스라엘에서 가장 존경받는 역사적인 인물들입니다. 당연히 얼른 생각하면 그 말을 들고 굉장히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주님은 그 말을 듣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러니까 함께 3년 반 동안이나 함께 자고 먹고 동거동락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그 때 제자들이 아무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있을 때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로소다'
베드로의 신앙의 고백을 들은 주님께서는 아주 기뻐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네가 이것을 알게 한 일은 네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니라.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할/
신앙은 고백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처럼 고백하는 것이 축복 받은 고백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았습니다. 즉 모든 문제의 해결 자요, 만백성을 구원하러 오신 분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 고백 속에는 '내 딸의 병도 주님께서는 고치실 수 있습니다.'라는 확실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해결자이심을 확실히 믿으십니까? /아멘!/ 이 여인은 더 깊게 연구해 보면 모성애의 극치를 다시 한 번 볼 수가 있습니다. '내 딸을 불쌍히 여기소서'가 아닙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입니다.
⑤모성애의 극치를 이 여인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딸은 그 자리에 와 있지도 않습니다. 어디에서 무슨 미치광이 짓을 하고 다니는지 모릅니다. 25절에는 같은 말을 합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이 내용을 가만히 보면 '제 딸이 불쌍합니다. 도와주소서'가 아닙니다. '귀신 들린 딸을 가진 어머니의 이 비참한 모습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이런 마음입니다.
우리는 요 며칠 전에 택시 안에서 두 어린 자식을 살리고 어머니는 세상을 떠난 교통사고의 기사를 접했습니다.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큰 모성애의 사랑 앞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주의해서 보세요! 이 여인이 예수님께 외친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무어라고 합니까? '내 딸이 병들었나이다.' 이렇게 말하고는 '내 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지 않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이 여인은 딸이 병들었습니다. 그러나 병든 딸보다도 자기가 더 아프고 더 고통스럽습니다. 이것이 인간 됨이요, 이것이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복 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복 받아서 나만 잘 입고 잘 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받은 복이 사명이 되지 아니하면 그 복은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복이 다른 사람에게 쓰여지는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물질도, 건강도,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어쩌면 이 여인은 자기 자신의 아픔이라면 이처럼 애타고 간절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딸을 사랑하는 이 마음이 이같이 간절하고 절실해서 절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믿음이 이 여인을 이렇게 만든 것입니다. /할/
사람이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늙어도 빨리 늙고 병도 많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쓸 수 있는 이 사명의 사람을 우리 주님이 찾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이 여인은 딸의 고통이 자기의 고통으로 알고 '그 아픈 가슴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예수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정신병자 딸을 가졌습니다. 이 딸 때문에 나는 화평이 없습니다. 애 때문에 남편과의 사랑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비웃습니다. 나는 지금 이 딸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불쌍한 어머니는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이렇게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위대합니다. 4세기가 낳은 대 성자 어거스틴은 고대 로마 교회가 낳은 4대 박사, 곧 히에로니무스, 암부르시우스, 어거스틴, 그레고리우스 1세 가운데서 중에 제 1인자로 꼽히는 최대 인물이었습니다.
마니교를 위시해서 펠라기우스 같은 이단사설(異端斯說)을 물리치는데 4천 권이 넘는 저서를 내면서 신학과 신앙을 확립한 거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인물도 그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의 산물이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할/
이때부터 예수님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가나안 여인의 간절하고 믿음 있는 기도를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전혀 의외의 반응을 나타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래 너 믿음 좋구나, 내가 응답해주마'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23절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하신 줄 압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예수님은 대답을 안 하시고 침묵하십니다.
그렇게 간절하게 눈물을 흘리면서 무릎을 꿇고 울부짖어 기도했는데 새벽시도를 했고, 철야기도를 했고, 금식기도를 했는데도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실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예수님께서 못 들어서 침묵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시험해 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말로만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고백한다고 응답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 중에 예수님이 메시아이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독생자이시고 능력이 많은 분이라는 것을 모든 성도가 모르겠습니까?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마음속에 간절함이 없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처럼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과 다릅니다. 사람들이 대부분 믿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 하나님을 침묵하시며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믿/
아무튼 주님의 그 침묵은 짧은 시간이지만 이 여인에게는 고통스럽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두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는 부정적이요, 하나는 긍정적인 것입니다. 부정적으로 나가게 되면 응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긍정적으로 나가게 되면 침묵 속에서 더 깊은 응답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 여인은 그 무 응답의 고통을 잘 극복하고 끈질기게 따라 오면서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 극복하기 힘들었던 또 하나의 요소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취하는 태도입니다.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이 여자가 귀찮게 자꾸 따라오면서 보채고 있으니 따돌려 버리시라고 아우성입니다. 이 여인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2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침묵을 깨시고 드디어 예수님께서 입을 여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뜻밖에도 거절하는 말씀입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이 여인은 가나안 여인입니다. 이방 여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이것은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든지 거절하지 않고 사랑을 베풀어주신 분입니다. 사랑을 받을 자격에 있거나 없거나 간에 구원에 손길을 베풀어 주셨고, 병든 자를 고쳐주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침묵만 하시다가 제자들이 하도 야단을 하니까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거절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여인의 놀라운 인내와 믿음을 보십시오.
▶25절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예수님의 부정적인 태도와는 상관없이 이 여인은 절대 인내와 절대 믿음을 가지고 주 앞에 더더욱 바짝 가깝게 다가옵니다. 예수님은 거절하시고 여인을 거절 속에서도 적극적인 인내와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긍휼을 구하고 있습니다.
뚝하면 시험에 빠지고 신앙이 넘어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오늘 본문의 이 가나안 여인의 신앙은 분 받아야 합니다.
여자가 '절을 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간절하게 무릎 꿇고 매달린 것을 의미합니다. 이 정도로 했으면 예수님도 좀 봐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26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가서 보면 예수님은 더 한층 강도 높게 거절하고 계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참 기막힌 말씀은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자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요, 떡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개들은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마틴루터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녀의 마음을 그리고 그녀의 믿음은 산산 조각나게 했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사실 얼마나 자존심과 체면을 상하게 하는 말입니까?
이 말씀은 한마디로 '너는 개'라는 말씀입니다. 개 취급을 한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선민임을 의시대면서 이방 사람들 특히 가나안 사람들을 개로 보았습니다. 우상을 섬기고 개같이 음란하고 개같이 무질서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을 대하듯이 우리를 대하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유대인처럼 우리를 멸시하는구나' 생각하면 참 괴롭고 희망이 끊어지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무시하듯 예수님도 나를 무시하는구나, 다른 사람이 나를 버리듯 예수님도 나를 버리는구나'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다 버림받아도 예수님 한데도 버림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이 수모까지도 감당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27절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 여인은 많은 시험을 줄기차게 당하면서도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너는 개다'라고 멸시하는데도 '옳소이다' 즉 옳으신 말씀입니다. 예수 밖에 있는 생명들은 개나 짐승처럼 여긴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참 엄청난 고백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여인의 인내를 본받아야 합니다. '너는 죄인이다' '예 저는 죄인입니다. 물론 더럽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아야 되겠습니다. 불쌍히 여기소서' 이럴 수 있습니까? 여기까지 가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종들을 통해서 때로는 여러분을 책망할 때도 있습니다. 책망은 믿음으로 사랑으로 받는 사람이 신앙의 성숙을 이루고 끝내고 복을 받습니다.
또 이 여인이 '주여 옳소이다'하고 한 것은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자녀가 아니라 짐승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한 말입니다. 그러니 이 여인은 지금 만일 주님께로부터 내가 어떤 은혜를 받게 된다면, 그것은 내가 마땅히 받을만한 내 몫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나는 비록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다. 나는 주님 앞에서는 개와 같은 존재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저 유대인들, 저 주인의 본래의 아들들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흘려 내어버리는 그 아까운 은혜들. 그 은혜들 중에 조금이라도 달라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 은혜 감사히 받아서, 새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이 여인의 고백입니다.
이 얼마나 간절한 심정인가? 얼마나 주님의 은혜를 높이고 사모하고 있는가? 얼마나 자기 자신을 낮춘 것인가? 한없이 낮춘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을 수 만 있다면, 유대인들이 거부하고 내버리는 그 부스러기 은혜라도 받을 수 있다면 이 보다 더 낮출 수도 있다는 것이 바로 이 여인의 심정이었습니다. /할/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인의 이 고백에 예수님도 깜짝 놀랐습니다. 이 여자가 예수님을 놀라게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이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강도 높은 시험을 계속해도 시험을 당하는 여인은 화를 내거나 자존심을 내세우거나 한을 품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옳소이다.'라는 이 여인의 고백 속에 진정한 겸손과 진정한 믿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주여!'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은 '당신은 나의 생명의 주인입니다.' 이런 고백입니다. 그러면서 이 여인은 '부스러기'라도 요구합니다. '개에게 주는 부스러기라도 주시옵소서! 나에게 부스러기라도 주시면 한 말씀이라도 주시면 단 한 번만의 은혜를 주시면 그 한 번의 긍휼로도 내 딸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라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 부스러기를 무시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 칠병이어의 기적을 베풀 때도 부스러기가 더 많았습니다. 그 때 열두 광주리를 남겼고, 일곱 광주리를 남겼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은 그 부스러기 신앙을 축복하고 칭찬하고 복을 주십니다.
▶28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태복음에 예수님으로부터 큰 믿음을 가졌다고 칭찬 받은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 다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입니다. 한 사람은 8장에 나오는 가버나움의 백부장입니다. 그를 향하여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8:10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은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그리고 오늘 본문의 이 여인에게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큰 믿음의 반대는 적은 믿음인데 예수님으로부터 적은 믿음을 가진 자라고 꾸중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마8장에 보면 바다에 큰 지진이 일어나 풍랑에 배가 위험할 때 제자들이 두려워하였고 급기야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8:26)
그러니까 적은 믿음의 소유자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주위 환경을 보고 무서워하는 자입니다. 또 14장에 보면 한 밤중에 예수님이 바다위로 걸어오실 때 베드로가 예수님인 것을 확인하고 물위로 걸어갔는데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에 빠져갔습니다.
그러한 베드로를 구해내시고서 하는 말씀이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이렇듯 적은 믿음을 가진 자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의심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큰 믿음을 가진 자는 무서워하지 않으며 의심하지도 않습니다. 가나안 여인이 무서워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되 무서워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면 이 사람은 큰 믿음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여기 '네 믿음이 크도다' 참 굉장한 말씀입니다. 크다는 개념도 여러 가지입니다. 이를테면 부자도 웬만한 부자면 감당하라고, 더 큰 부자는 거부하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크다는 것에는 조금 큰 것, 더 큰 것, 엄청나게 큰 것이 있는데 여기 '네 믿음이 크도다'란 원어입니다. 네 믿음이 위대하다는 메가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여인이 믿음이 메가 톤급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큰 믿음 적은 믿음이 있습니다. 이왕 우리 믿음 생활을 할 바에는 큰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큰 믿음 있으면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멘!/
▶이 여인의 위대한 믿음이 무엇인가?
①예수님께서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예수님 앞에 가면 병이 나을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②'주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이 믿음이 위대합니다. 나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임을 고백하는 믿음, 어떤 사람은 예수님도 믿으면서도 예수님께 의지하지 않고 자기 수단 방법 배경, 돈을 의지합니다.
③'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부스러기라도 달라'는 그의 태도가 위대합니다. 이런 위대한 믿음은 위대한 축복의 역사와 응답의 역사가 따르게 되어 잇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될지라' '그 시로 그의 딸이 나으니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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