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강) 세례요한의 죽음! (마 14:1-12)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갑자기 세례요한의 기사가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마5장에서부터 13장까지 계속 예수님의 사역이 소개되어 오다가 본문에서 세례 요한의 이야기가 튀어나오는 모습입니다.
1-12절까지만 요한에 대한 기사이고 또 다시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기록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오신 선구자로서 이 세상에 와서 그에게 맡겨진 모든 사명을 잘 감당하고 마침내는 순교의 제물이 되었던 그런 사람입니다.
마3장을 보면 그는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나타난 광야의 사자입니다. 그의 복음은 '회개의 복음'입니다. 예수님도 요단강가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마4:12절에서 갑자기 세례요한이 체포당하는 기사가 간단하게 한 절로 기록되어 있고, 왜 세례요한이 감옥에 들어갔는가에 대하여는 설명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오늘 본문에서 세례요한의 그 뒤 사건을 자세하게 말해줍니다. 마태는 본문을 기록할 때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영화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식의 장면과 같은데 이런 것을 영화 용어로 '플래시 백'이라고 하여 과거 장면으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제목 소개!▶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 당시 사회 지배층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기사와 이적을 행하는 것도 두려운 일인데 지도층에 있는 자들에게 저주에 말씀을 서슴없이 하며 그들에게 책망하고 회개의 복음을 전하셨기 때문입니다.
1절에 보면 예수님의 소문이 왕궁에까지 퍼졌는데 분봉 왕 헤롯을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몹시 불안하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가 자기가 죽인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사람이 죄짓고는 못산다.'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의 선구자의 목을 밴 헤롯이 예수님의 소문만 듣고도 행여 그 세례요한이 '살아 나온 것이 아닌 가?'하고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먼저 세례요한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①세례요한은 어떤 사람입니까? 성경에 세례요한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가하면 말3;1절에 예언하기를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시는데, 그 구주가 오시기 전에 반드시 주의 길을 예비할 사람을 보낸다'고 하셨는데, 그 예언된 자로 세례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으로 이 땅에 온 것입니다. /할/
이 사명이 얼마나 큰 사명인가 하면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고 했습니다. 마11:11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이렇게 세례요한은 구약의 어떤 선지자보다 나은 자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세례 요한은 구약을 마무리하고 복음시대를 여는 시점에서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세례요한 때까지 모든 사람들은 천국과 메시아를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공생애를 출발하면서 천국에 복음의 일성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입니다. 이 말씀은 '이제는 천국은 대망 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회개하면 천국은 너희에게 임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가 빼앗느니라'(마11:12)고 하셨습니다. /할/
우리는 세례 요한을 통해 '천국이 우리에게 왔고 천국의 주인이신 메시아가 우리에게 오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②세례요한의 탄생을 알아보자! 세례 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아들로 나이가 많도록 아이가 없었던 이들 부부에게 천사의 계시를 받고 태어났습니다. 눅1:13절에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이렇게 세례 요한의 탄생은 아무 가정에서나 일어날 수 없는 특별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눅1:15-16절에 그의 탄생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가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할/
③헤롯과 세례요한의 두 가문을 알아보자! 헤롯은 분봉왕입니다. 분봉왕이란 유대 땅을 몇으로 나누어 그 한 지역을 통치하는 왕입니다. 여기 나오는 헤롯의 경우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을 통치한 그런 분봉왕입니다.
헤롯의 가문은 왕가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2장에 나오는 헤롯대왕으로 예수님의 탄생 당시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을 살해한 장본인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헤롯(안티바스)은 세례 요한을 살해했습니다. 또 행12장의 헤롯(아그립바 1세)은 헤롯대왕의 아들 아리스토블루스의 아들로서 주님의 제자 야고보를 살해한 사람입니다. 악한 가문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눅1장에 보면 제사장의 가문입니다. 늙은 제사장 사가랴와 엘리사벳 사이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태어났습니다. 제사장의 가문에서 태어난 요한은 평생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선지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헤롯 가문과는 전혀 다른 가치를 보이는 가문입니다.
헤롯 왕은 물론 궁중에서 붉은 고급 옷을 입고 왕관을 쓰고 살았습니다. 아울러 본문에도 잔치가 나오지만 온갖 좋은 것들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반면 요한은 광야에서 약대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누가 천국을 누렸습니까? 화려한 왕궁에서 호의호식하며 사는 헤롯에게서 천국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어두움과 피비린내를 봅니다. 그곳에는 탐욕과 음모만이 있습니다. 번민과 갈등만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빈들에서 살았던 요한에게서 우리는 천국을 봅니다. 그는 천국을 외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앞길을 예비하러 나온 사람입니다. /할/ 롬14:17절에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오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아멘!/
④세례요한의 사명이 무엇인가? 말4:5절에 보면 메시아인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반드시 엘리야가 먼저 오도록 되어있습니다. 엘리야는 아합 시대의 최고의 선지자로 이 세상에서 죽음을 보지 않고 불병거 속에 승천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엘리야가 먼저 오리라고 예언되어 있는데 이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심령으로 먼저 온 사람'(마11:14)이라고 성경에 말씀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가 하면 말라기에서 예언된 그 사람이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온 사람입니다. 또 마3장에 보면 유대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치는 요한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는 이렇게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 주의 길을 예비하며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러 온 사람입니다. /아멘!/
⑤세례요한의 순교를 이제 우리는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순교를 당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당시 헤롯왕이 자기 이복동생인 빌립의 아내를 빼앗자 이를 책망하고 옥에 갇힙니다. 그리고 헤롯의 생일날 춤을 추어서 헤롯의 마음을 기쁘게 한 헤로디아의 딸의 요청에 따라 순교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을 차례대로 상고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2절 "그 때에 분봉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도다 하더라"
분봉 왕은 로마 황제의 임명을 받아 일정한 지역을 통치하는 왕이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헤롯왕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성경을 보면 헤롯이라는 이름이 많이 반복되어 나오기 때문에 혼돈을 일으키기 쉽습니다. 헤롯이 죽었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 다음에 보면 헤롯이 또 등장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성경에 나오는 헤롯 중에는 먼저 예수님이 태어날 때에 예수님께 경배하겠다고 거짓으로 동방박사에게 얘기한 헤롯이 있습니다.
그 헤롯을 헤롯대왕이라고 부릅니다. 왜 그에게 대왕이라고 했는가 하면 당시에 다른 어떤 왕도 하지 못했던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치적이 큰 세종은 세종대왕으로 불렀습니다.
헤롯대왕은 당시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어주었고(헤롯성전), 또 유대나라의 평화를 가져왔고 경제도 굉장히 부흥시킨 장본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 헤롯을 굉장히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나 세상 적으로 보면 그렇게 훌륭할 수가 없는데 예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동방박사가 '유대의 왕'이 나셨다고 하니까 깜짝 놀라 그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장본인입니다.
그 헤롯에게 아내가 10명이 있습니다. 그는 10명의 부인을 통해서 많은 아들들을 낳았는데, 그 중에서 유명한 아들 셋을 꼽으라면, '안티바스, 빌립, 아켈라오'가 바로 그들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헤롯은 안티바스입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성경에 기록할 때에 안티바스라는 이름을 생략하고 그냥 헤롯으로 불립니다. 당시 왕의 고유명사가 헤롯이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왕을 '바로'로 부르듯이, 안티바스는 갈릴리 지방을 담당하고 있었던 분봉 왕입니다.
그의 아버지 헤롯 대왕은 갈릴리 베뢰아 유대지역 전체를 총괄해서 전부 다 통치했던 왕입니다. 본문에 헤롯 안티바스는 세례요한을 죽인 사람입니다. 왜 세례요한을 죽였습니까? 4절에서 나옵니다만 헤롯을 책망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세례요한은 굉장히 인기가 좋았습니다. 유대 광야에서 그가 설교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세상 죄악과 불의를 여지없이 꾸짖고 책망했습니다.
높은 사람이라고 해서 비위나 맞추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왕이라도 잘못되었으면 그를 책망하고 꾸짖었습니다. 세례요한이 헤롯 안티바스를 책망한 이유가 3-4절에서 자세히 나옵니다.
본문에서 헤롯 안티바스는 죄책감으로 인해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2절 말씀을 보면 헤롯이 심각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사역을 하는 것을 보면서 '저건 세례요한이다' 이것은 극도의 정신착란 증세를 보인 것입니다.
자기가 저지른 무서운 죄에 대한 공포감, 깊은 양심의 가책, 그것으로 인한 불안, 초조 두려움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권력이 무슨 소용이고 돈이 무슨 소용입니까? 밤마다 죄책감과 양심의 고통과 악몽에 시달린다면 그 사람은 가장 불쌍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까? 양심의 자유와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시32:1절에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할/ 오늘 우리는 주 예수의 보혈로 씻김 받아 죄에서 사함 받아 진정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아멘!/
▶3-4절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요한은 헤롯에 의해 옥에 갇혔습니다. 헤롯의 죄를 지적하는 요한을 감옥에 가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누가 갇혔고 누가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일까요? 마가복음에서는 헤롯의 심리상태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막6:20절에 보면 헤롯은 요한의 지적을 받고 '크게 번민을 느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른 말을 하는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으나 그렇게 한 것으로 인하여 헤롯은 더욱 양심의 자유를 잃고 말았습니다. 그는 늘 요한의 일로 인하여 고민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정의 편에 선 요한은 비록 감옥에 갇혔으나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 자유가 진리 안에 잇는 양심의 자유입니다. /할/
또 여기서 '헤로디아'를 알아봐야 합니다. 학자들의 견해를 보면 성경에 나오는 5대 악처 가운데 하나로 이 헤로디아를 꼽습니다. 헤로디아는 헤롯 안티바스의 이복동생인 빌립의 부인입니다.
원래 헤롯은 아람왕의 딸인 아제라스 공주와 결혼했습니다. 그런 헤롯이 어느 날 로마를 방문했을 때에 빌립 동생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빌립은 비록 왕은 아니었지만 대단히 부유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 동생 집에 들른 헤롯이 그만 제수 씨를 보는 순간 뽕 가버렸습니다.
헤로디아는 굉장한 미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람기도 있어서 둘이 한 순간에 눈이 맞아 버린 것입니다. 당시 헤로디아에게는 벌써 성장한 살로메라는 큰딸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이 서로 눈이 맞았습니다. 이 헤로디아는 어떤 권력과 정치에도 욕심이 생겨 빌립과 이혼하고, 헤롯에게도 자기 부인과도 이혼을 강요해서 둘이 살게된 것입니다.
헤롯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헤롯은 순간적인 쾌락 때문에 두 가지 잘못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린 것과, 또 하나는 율법에서 금한 살아 있는 동생의 아내를 빼앗은 것입니다.
그는 실로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선택을 했습니다. 헤롯 뿐만 아니라 많은 세상 사람들이 잘못인 줄 알면서도 첩을 얻고 이중생활을 선택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육체적 쾌락을 위해, 어떤 사람은 자식을 낳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요한이 감옥에 들어간 이유를 알게 됩니다. 한 마디로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라고 정의를 부르짖다가 감옥에 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속에서 세례요한의 신앙적인 모습이나 삶의 경건한 모습을 넘어서서 또 한가지 독특한 면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불의에 대한 그의 정의감입니다. 요한은 불의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썩어져 가는 것을 보고, 권력이 부패하는 것을 보고, 또 불의가 득세하는 것을 보고 세례요한은 침묵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세례요한을 가리켜 정의에 사도로써 광야에서 외치는 자였다고 했습니다. 마3장을 보면 당시에 지도층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는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리켜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며 호되게 책망했던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한나라를 다스리는 분봉 왕의 불의를 보고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고 주저 없이 책망한 것입니다.
당시 헤롯은 로마의 권력 밑에서 민족을 배반하고 정치적 야망을 성취한 사람입니다. 그의 권력은 대단했습니다. 사람을 마음대로 체포하고 죽일 수 있는 독재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정치적으로 독재자였고, 도덕적으로는 몹시 파렴치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부인을 쫓아내고 동생의 부인을 강제로 빼앗은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왕이 잘못하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무서워서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5-6공 군사정권 밑에서 입 한번 벙끗 못하고 살았습니다. 왜? 한마디만 잘못해도 안기부에 끌려가 전기방석에서 고문을 받기 때문입니다. 당시 얼마나 많은 대학생들과 정치인들, 지식인들이 그리고 정의에 사람들이 사라져 갔습니까?
부패한 권력을 꾸짖는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못되어져 가는 것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입니다. 당시 세례요한의 때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침묵을 깨고 왕의 불의를 책망했습니다.
왕의 잘못을 지적하면 분명히 자신에게 손해가 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은 정의를 외쳤습니다. 불의를 지적하고 불의에 항거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고민이 무엇입니까? 잘못인줄 알면서 침묵하고, 불의인줄 알면서 눈감아 버리는 우리의 무력함이 고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양육을 받으면서도 '너희는 빛이라, 소금이 되어라'하는 진리를 받았으면서도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불의와 부정에 대하여 너무나 무력하고 무감각해져 있습니다.
어떤 목사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조찬기도하고 아부를 하는 목사들이 있어서 뜻 있는 목사들의 지탄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5절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민중이 저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민중을 두려워하더니"
헤롯은 자기의 죄를 은폐하려고 요한이 의로운 사람인줄 알면서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민중을 두려워하며 죽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민중을 두려워한 것은 민중을 존중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민중들의 인기를 잃는 것은 권력을 잃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각 지역의 통치자들이 그 맡은 지역을 소요 없이 통치하기를 원했습니다. 헤롯은 진리나 하나님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의 권력을 잃게 되는 것만이 두려울 뿐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두려워 한 것은 무엇일까요? 헤롯의 칼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감옥에 가는 것이나 죽음을 당하는 것 역시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마10:28).
하나님이 주신 양심의 소리를 분명하게 내므로 죽는 것이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고 사는 것보다 낫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헤롯의 죄를 지적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선지자적 삶입니다. /아멘!/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는 여론입니다. '민중이 저를 선지자로 여김으로 민중을 두려워하더니' 정치하는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민심입니다. 정치에 가장 민감한 것이 여론입니다.
민주정치란 어떻게 보면 여론 정치입니다. 전에 Y. S도 국민의 여론 때문에 생떼 같은 둘째 아들을 감옥에 보내고 한숨을 쉰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세례요한의 인기도 굉장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다 광야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왔습니다. 어떤 종교지도자들보다 인기가 하늘에 닿을 정도였습니다. 지금 박근혜씨가 다음 대권주자로 가장 앞선다고 매스컴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정치는 인기 순위입니다.
다윗이 왜 사울에게 쫓겨다녔습니까? 국민들의 인기 순위가 사울 왕을 능가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어린아이들의 노랫소리에 사울 왕이 눈이 뒤집어진 것입니다.
헤롯이 당장 요한을 죽이지 못한 것은 그가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진정한 선지자로 인정했습니다. 똑같은 기사가 막6장에서 다뤘습니다. 거기 막6:20절에 보면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
여기에 보면 헤롯이 요한에 대하여 올바른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기에 함부로 처리하지 못하고 보호하고 있으면서 번민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6절 "마침 헤롯의 생일을 당하여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헤롯왕의 생일이 왔습니다. 당시 왕의 생일날은 호화로운 파티가 열립니다. 오늘 본문 속에 보면, 두 왕의 잔치가 나오고 있습니다. 헤롯 분봉 왕의 잔치와 만 왕의 왕이 되신 주님의 잔치입니다. 마태는 의도적으로 헤롯의 잔치 뒤에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예수님의 잔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헤롯의 잔치는 화려한 왕궁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잔치는 빈들에서 벌어졌습니다(13절). 바로 헤롯의 잔치에서 죽은 세례 요한이 살았던 그런 곳 광야입니다.
자기 동생의 아내를 취하여 사는 악한 헤롯이 벌이는 생일 잔치와 수많은 무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이 그 각각 잔치의 '호스트'였습니다. 헤롯은 조그만 지역을 통치하는 분봉왕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쥔 자처럼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지니신 만 왕의 왕은 초라한 곳에서 잔치를 벌이지만 헤롯은 화려한 곳에서 자기의 위세를 자랑하며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헤롯의 잔치에는 세상 적으로는 모든 것을 가진 자들이 참여했습니다. 막6:21절에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 쌔' 이들은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그런데 세상 잔치가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딤전5:6절에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영적으로 죽었다는 말입니다. /할/
그러나 주님의 잔치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습니다. 헤롯의 화려한 잔치에 참여할 수 없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도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마태는 모인 사람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14). 그 안에는 많은 병든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저녁까지 주님을 따라다니면서도 먹을 음식을 풍성하게 싸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헤롯의 잔치는 춤과 노래가 있고 음식이 넘쳐 났습니다. 그러나 그 생일 파티에는 음모가 있고 의가 죽는 잔치였습니다.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 헤롯을 즐겁게 했습니다.
헤로디아의 딸은 그의 첫 남편 빌립 1세의 딸로써 이름은 살로메입니다. 당시 나이가 17세쯤 되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살로매가 무슨 춤을 추웠습니까? 살사 춤을 추었습니다. 반나체 춤으로써 완전히 사람의 정신을 빼 놓는 춤입니다. 그 춤을 보면서 헤롯이 기분이 좋아졌다고 본문은 소개합니다. 학자들의 견해를 보면 살로매도 저의 엄마 헤로디아와 똑같은 전철을 밟았다고 합니다.
자기 숙부와 결혼했다가 사촌 오빠 뻘 되는 사람과 재혼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도 정당한 남편을 두고도 정치적 야욕과 음탕한 기질 때문에 많은 불륜을 저지른 사람이라고 학자들이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잔치에는 천국의 말씀이 있었고, 병들고 지친 사람들의 몸과 심령이 치유함을 얻는 놀라운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허기진 사람들의 배를 채워주는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이 있었습니다. 생명이 있었고 지친 사람들의 눈에 따뜻한 눈물이 고이고 보이지 않던 천국이 열리는 소망을 경험하는 그런 잔치입니다.
잔치의 결과가 중요합니다. 헤롯의 잔치에는 피와 죽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잔치 끝에 모든 사람들이 만족을 누렸습니다. 20절에 '다 배불리 먹고' /할/
▶7절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대로 주겠다 허락하거늘"
여기서 우리는 헤롯의 허영심과 영웅심을 보게 됩니다. 살로매의 춤에 도취된 헤롯이 너무 기뻐서 무엇이든지 네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를 한 것입니다. 막6:23절에서는 '또 맹세하되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무슨 맹세입니까? 나라의 절반까지도 주겠다는 맹세입니다. 여러분, 한 나라의 왕이 어떻게 이런 약속을 할 수 있습니까? 여자의 춤에 미쳐 이런 약속을 한다는 것은 그의 허영심과 영웅심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괜히 큰소리치고 허풍떠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자 앞에서 큰소리치는 사람들, 돈 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허황한 약속을 많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맹세는 아무 때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헤롯의 잘못을 찾아보면,
⑴맹세한 것이 잘못입니다. 예수님은 맹세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⑵나라의 절반이라도 준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분봉 왕으로써 로마 황제의 허락 없이 나라 절반을 줄 권리가 그에게는 없습니다.
▶8절 "그가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가로되 세례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여기서 헤로디아의 본성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잖아도 세례요한이 몸의 가시였는데 정말 절호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
'세례요한의 머리를 소발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요한의 머리를 잘라 쟁반에 닿아 지금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달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나중에 헤롯이 다시 반복할 가능성을 대비해서 모녀가 그런 요구를 한 것입니다.
정말 헤롯은 세례요한의 목을 요구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전혀 예기치 못한 일들이 벌어지는 곳입니다. /할/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여기 시킴은 '선동하다. 권면하다'라는 뜻으로 헤로디아의 집요하고도 악의에 찬 일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시 살로매는 육체적으로는 뭇 남성의 시선을 집중시킬 만큼 성숙했는지는 모르나 정신적으로는 아직 미숙한 여아였습니다. 여하튼 본문은 세례요한의 죽음이 바로 헤로디아의 간교에 의한 죽임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9절 "왕이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 명하고"
'왕이 근심하나' 헤롯의 근심이 무죄한 자를 죽이는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 때문인지 아니면 요한의 죽음으로 인해서 일어날지도 모른 민란 때문인지를 확실하지 않습니다.
어째든 그의 근심은 일말의 양심의 가책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마음속에 양심이라는 재판소를 주셨습니다. 아무리 악한자라도 양심의 가책은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그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죄를 짓고도 죄가 죄인지 모르고 태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입니다. 헤롯이 근심하면서도 세례요한은 죽이기로 작정을 합니다. 그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맹세한 것' 때문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왕의 말이 곧 국법입니다. 한번 왕이 맹세했으면 지켜야 합니다.
다니엘 6장을 보면 메대 나라의 다리오 왕이 간신들의 음모에 말려 들어가 금령을 선포한 뒤 의로운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짐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왕이 허락한 금령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헤롯의 알량한 체면' 때문입니다. '그 함께 앉은 사람들로 인하여 주라 명하여' 많은 신하들 앞에서 나라의 반을 주겠다고 공언했기 때문에 자기의 권위가 손상될까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용기는 자기 실수를 인정하는 사람이요,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믿/
▶10-11절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옥에서 목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그 여아에게 주니 그가 제 어미에게 가져가니라"
세례요한의 순교의 장면입니다. 세례요한은 3년 동안 주의 일을 했는데 1년 반 동안은 광야에 나가 외쳤고, 1년 반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순교를 당했다고 학자들은 주장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죽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같이 말씀을 순종하다가 순교를 당하면 하늘에 상급이 큽니다. 계6장을 보면 순교자는 하늘나라에 순교자의 반열이 따로 있고, 특별한 영광을 누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헤롯이 세례요한을 죽인 후에 결과에 대하여 유대역사가 요세푸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①세례요한의 죽임으로 인하여 헤롯은 유대인들에게 신임을 잃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본래 헤롯은 정통 유대인이 아닙니다. 에돔 족속입니다. 정치자가 국민의 신임을 잃으면 끝장이 납니다.
우리는 가끔 공직자 재산 공개 문제로 인하여 많은 지도자들이 도덕성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국민들의 신임을 잃고 어떤 사람은 사표를 냈고, 관직을 떠난 사람이 있습니다. 헤롯은 그의 도덕성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완전히 신임을 잃었습니다.
②그는 본처인 아람 왕의 공주와 이혼했기 때문에 당시 아람 왕의 진노를 사 군대를 거느리고 갈릴리 지역을 침공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왕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③그도 마침내 주후39년 로마당국의 미음을 받아 그 자리에 추방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의 마지막이 굉장히 비참했답니다. 죄인의 말로는 항상 비참합니다.
▶12절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고하니라"
요한은 그의 제자들의 손으로 장례식이 거행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다 보고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요한은 헤롯에 의해 목 베임을 당해 죽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누가 죽었고 누가 살아 있습니까?' 죽었지만 살아있는 요한, 그리고 살았지만 죽어있는 헤롯의 대비를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할/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한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헤롯의 가슴속에 살아있습니다. 헤롯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혹시 세례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은 아닌지 의심했습니다. 그는 요한을 죽였지만 결코 요한의 그 소리를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평가입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이 요한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하셨나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할/ 이보다 더 좋은 평가가 있을까요?
그러나 헤롯에 대한 평가는 어떻습니까? 눅13:32절에서 주님은 헤롯을 가리켜 '여우'라고 평하셨습니다. 흔하지 않은 표현입니다. 주님이 사람을 이렇게 동물에 비유를 직접 하신 경우가 없습니다. 여우라는 표현에 담긴 헤롯의 모습은 '교활하고 더러운 욕심에 가득 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인간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례요한을 통해서 한 가지 귀한 진리 하나를 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세상에서 보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따라 모든 일을 한다고 해서 세상에서 보상을 바라지 마십시오, 때로는 이 땅에서는 보상해 주시지만 이 땅에서보다는 하나님나라에서 보상이 큽니다. 여러분!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바라보면서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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