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강) 바리새인의 유전! (마 15:1-20)
옛날 어느 마을에 한 거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매일 이 집 저 집 밥을 얻으러 다녔습니다. 어느 날 그 거지가 혼자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부자들은 너무 욕심이 많아서 탈이야 그저 돈, 돈 하면서 더욱 돈만 모으려고 한단 말이야. 그러나 나는 조금만 있어도 만족할 터인데...' 이렇게 혼자서 중얼거리는 거지의 말을 하늘 나라에서 내려온 천사가 들었습니다. '아저씨, 지금 돈이 조금만 있어도 만족하겠다고 하셨지요? 제가 돈을 조금 드릴까요?'
그 거지는 너무 기뻤습니다. '그 자루를 벌리세요' 천사는 번쩍 번쩍 빛나는 금돈을 자루에 몇 개 넣어 주었습니다. '이젠 되셨지요?' 그러자 그 거지는 '아니, 조금만 더'라고 말했습니다. '아저씨, 금돈은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자루가 찢어져 금돈이 땅에 떨어지면 흙으로 변하고 맙니다.'
그러나 거지는 '그래도 이건 너무 적지 않습니까?'하면서 거지는 계속 자루를 벌렸고, 천사는 또 금돈을 넣어 주었습니다. '자 이제는 됐습니까?' 그러나 거지는 천사의 손목을 잡고 '조금만 더 주세요'하면서 자꾸만 더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는 순간 자루는 찢어지고 돈은 땅에 와르르 쏟아졌습니다. 땅에 떨어진 금돈은 모두 흙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욕심 때문에 죽을 때까지 허탄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돈, 돈, 돈 하면서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으나 잠은 못 삽니다. 돈으로 밥은 살 수 있으나 밥맛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약은 살 수 있으나 생명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향락은 살 수 있으나 행복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세계일주는 할 수 있으나 천국은 못 갑니다. 천국은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들어가는 영광의 문입니다. /아멘!/ ◀제목 소개!▶
마14장은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거절하지 않고 고쳐주시고,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위기에 처해있는 제자들을 건져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께 찾아왔을 때 그들이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든, 그들이 어떤 동기로 아팠고, 어떤 동기로 위기에 처해 있든 예수님은 무조건적으로 자비와 사랑과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똑같이 우리에게 오셔서 병든 자를 치료하시며 인생의 위기에 빠져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시면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러나 본문 속에 보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민중이 고통 당하고 문제에 빠져서 고민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종교적인 논쟁과 전통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본문은 한마디로 유대 전통에 대한 논쟁입니다. 같이 상고해 보겠습니다.
▶1절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당시에는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유대교에는 ⑴바리새파 ⑵사두개파 ⑶엣센파 ⑷열심당원파로 나누어집니다. 그 중에서 바리새인은 가장 큰 교파입니다. 이들은 굉장히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고, 영적인 존재인 천사의 존재도 믿었고, 인간의 육체의 부활도 믿을 만큼 철저히 성경적인 사람들같이 보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몇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습니다.
⑴종교인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규범들로 하나님과 말씀을 대체시켜 버리고, 또 이를 준수함으로 위안을 찾는 종교인들닙니다. 그들은 성경 그 자체의 법보다도 그것을 근거로 하여 자신들이 세부적으로 정해 놓은 규범들을 더 중시하는 사람들이었으며, 또 그들은 자신이 행하거나 성취한 것을 보고 만족을 찾았습니다.
⑵율법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규범들, 비록 그것이 성경에 근거하여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그 규범들을 준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의와 우위를 평가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외식적인 비교주의자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이 행한 것으로 다른 사람을 자로 재고, 쉬이 판단하는 우월적 비판주의자들이었던 것입니다(마7:1-5).
⑶위선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이나 그 법에 따른 규범들에 대한 외적인 준수는 강조하면서도 그보다 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마음의 태도를 등한시하거나 무시하는 위선주의자들이었습니다(막7:6).
여기서 '위선'이라는 단어는 '휘포크리테스'인데, 무대 위에서 어떤 인물의 역할을 하는 배우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던 용어였습니다. 왜냐하면 배우는 자신의 삶에서의 사실이 아닌 것을 무대 위에서 연기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진실은 가리고 자신의 삶을 예쁘게 포장하고 꾸미는 데 능숙합니다. 주님께서는 마6: 1, 5, 16절에서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위선에 대해 잘 정의해 주고 계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구제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또 너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되지 말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거리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또한 너희는 금식할 때에 위선자들과 같이 슬픈 표정을 짓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자기들의 얼굴을 흉하게 하느리라'
위선은 마음에 있는 것들은 가리우고 겉만 치장하고 내세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위선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했습니다. '위선은 혼자 있을 때는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다른 사람이 들어올 때 나타난다' 공감이 갑니다. /할/
또 서기관은 당시 성경이 인쇄되지 않을 때라 사본을 보고 옮겨 쓰는 일을 하는데 그들이 사본을 보고 연구도 하고 성경에 대한 해석도 합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신학자들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님께 나왔다'고 한 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70인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로부터 파송되어 나온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당시 예수라는 젊은 사람이 와서 가르치고 행한 자인데 유대교의 전통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자자하게 퍼져있는데 이것을 조사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처벌하려고 이들이 왔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들은 공회에서 파송한 공권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2절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여기서 유전이란 말은 전통이란 말입니다. 장로들의 전통이라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장로들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장로교회의 장로와는 다릅니다. 이 장로들은 주로 '랍비'들인데 나이가 많은 지도급에 있는 사람들, 즉 원로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장로들의 유전이란, 한 마디로 말하면 모세 때부터 원로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온 것을 유전이라 하는데 주후 200년경에 랍비 유다라는 사람에 의해서 완전히 편집이 되고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구약성경, 미쉬나, 탈무드를 경선으로 삼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미쉬나가 제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탈무드는 우리가 생각할 때 시중에 나와 있는 동화같이 재미있는 이야기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탈무드는 성경과 미쉬나를 해석한 책으로 굉장히 방대한 책입니다. 당시 유대교에서는 구약성경보다도 미쉬나를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손 씻는 문제로 시비했습니다. 떡을 먹을 때에 손을 씻는 것을 결례 식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음식 먹을 때에 손을 씻지만 그것은 위생적인 측면에서 씻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위생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하나의 의식입니다. 손을 씻을 때 물 한 그릇으로 두 손을 다 씻는 것이 아닙니다.
물 한 그릇으로 두 손을 씻으면 그것은 부정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한 그릇에 한 손씩을 씻습니다. 유대인들이 이처럼 손 씻는 것을 강조한데에는 이유가 있는데 그들은 마귀가 인간에게 들어갈 때에 입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혹시나 손이 더러우면 이 손에 있던 마귀가 떡을 먹을 때에 입으로 들어가서 사람을 유혹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손을 씻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손을 씻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볼 때는 도무지 교양도 없고, 신앙도 없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왜 당신의 제자들은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습니까? 왜 결례 식을 행하지 않습니까?' 항의했습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유전입니다.
▶3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하나님은 사랑하기에 유전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보전하기 위하여 전통이 필요한 것인데 어찌 너희는 거꾸로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인간의 유전과 하나님의 계명을 범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인간의 유전을 철저히 다른 것으로 보신 것입니다. 우리도 까딱 잘못하면 이런 유를 범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잘 섬긴다고 하면서 우리의 전통과 제도를 열심히 섬기는 잘못을 범하기 쉽습니다.
인간의 유전을 하나님이 말씀이 아닙니다. 제도일 뿐입니다. 처음 장로들의 유전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해석하고 지키기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이 말씀은 어떻게 지킬 것인가? 간음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해야 합니다. 살인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해야 한다면서 해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해석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본문보다 더 중요하게 된 것입니다. 나중에는 장로들의 유전이 하나님의 말씀과 똑같은 권위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신앙의 위기가 있고 타락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나 칼뱅은 참으로 위대한 신앙의 사람입니다. 장로교는 칼뱅의 교리를 따라 세워진 종파입니다. 그런데 잘못하다가는 우리가 칼뱅주의로 빠지면 큰일입니다. 교파에 교리 속에 갇히면 오른 본문의 바리새인들처럼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처음부터 하나님을 무시하려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은 구별된 사람이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완전히 헌신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것이 결국은 예수님과 정반대에 서고 말았습니다.
교파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교파가 하나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권위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권위주위는 좋지 않습니다. 또 교리는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교리로 사람을 묶어 버리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결국 교리 논쟁에 말려들게 되고 논쟁이 심하면 예수 믿는 서로 원수가 되는 수도 있습니다. 교리, 교파, 제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는 역할로만 끝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하여 4-6절까지 예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4-6절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출20:12절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또 출21:17절에서는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지니라'
그런데 유대인의 유전에는 이런 것을 하나 더 붙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공양한 재물이 있는데 부모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 헌금을 했다면 부모에게는 재물을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막7:11절에 고르반이라고 했습니다.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여기서 '고르반'은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5절에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당시의 법 가운데 고르반 법이 있었습니다. 무엇을 하나님께 바치기를 원하면 고르반 법에 의해서 '이것은 고르반이다'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 집, 우리 땅, 우리 산을 고르반했다 그러면 하나님께 바쳤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우리 재산 다 하나님께 바쳤습니다'고 하면 고르반 법이 그때부터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르반 법이 적용되면 부모에게 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구약의 법 가운데 부모를 공양하는 법이 큽니다. 본문에서도 '부모에게 거역을 한다든지 훼방을 한다든지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든지 봉양하지 아니하면 죽였습니다.' 무서운 법입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부모자식 간에도 불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식들 가운데 부모가 싫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는 나이도 많고 재산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부모는 봉양해야 됩니다. 그럴 때 고르반 법을 적용했습니다.
고르반을 하면 부모를 공양을 안 해도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정말 하나님께 다 바치고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보이는 부모님을 섬기지 못하는 자들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잘 섬기겠습니까?
한마디로 속임수로 고르반 법을 유용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지적하시면서 '너희들의 전통, 풍토, 좋습니다. 그러나 너희들은 어떻게 하고 있느냐?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것이 아니냐? 그런데 너희들은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장로들의 유전을 가지고 하나님의 법을 대치하려고 하느냐?'
▶여기서 다시 한 번 고르반에 대하여 생각해 봐야 합니다. 고르반이란 무엇입니까?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구별된 재산을 교회 앞에서 선언하여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는 제도입니다. 이것을 현대 교회에 적용을 한다면 십일조가 고르반에 속한 것이고, 감사헌금도 또 다른 면으로 본다면 주의 종들을 섬기는 그런 일들도 이 고르반에 속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르반을 악용하는 세태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질 예물들'이란 의미의 이 고르반을 부모를 섬기지 않는 악한 일에 그릇 적용하였습니다. 부모를 섬기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으로 자신의 재산을 제사장 앞에서 '고르반'으로 드렸다 하고, 고르반으로 드려진 재산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부모를 섬기지 않아도 된다고 억지 해석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의 유대교는 자신들의 제정과 유관한 것이기에 이 고르반의 악용을 인정해주고 있었으며 유대의 부모들은 하나님께 드렸다는데 그것으로 자신을 봉양하지 않음에 대하여 불평조차도 할 수 없게 하는 악한 제도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주님은 십계명에서도 사람들의 도리에 대한 교훈 중 가장 먼저 부모 섬김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는데, 이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쫓아 하나님의 법을 왜곡하고 주님의 뜻에 도전하고 있었습니다.
제사장들 앞에서 공증을 하듯이 인정을 받고 나면, 이 모든 재산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쓸 것이므로 부모를 섬기는 일까지도 하지 않도록 면책을 받는 일로 여겼고, 유대교도 이를 자연스럽게 인정하여 이 악한 일을 거들었습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들이 고르반으로 구별한 재물을 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 중의 일부분을 유대교 제사장에게 드리면 이 모든 것을 드린 것과 같은 효과로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모시고, 섬기지 않는 악한 일에 이 고르반이 악용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일은 중세의 카톨릭이 면죄부를 팔아 얻은 수익금으로 베드로 사원을 지은 것과 별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진정 고르반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진정 하나님께 온전히 믿음으로 드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이지만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악용했습니다. 그리고 세태와 타협했던 것입니다. 많은 자녀들에게 부모님을 섬기지 않는 정당한 빌미를 주었고, 이 제도는 하나님이 부모를 섬길 수 없도록 한 악한 하나님을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잘못된 사실을 우리 주님이 날카롭게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참으로 너희들이 악한 자들이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구나'하고 책망하십니다. 이 변질된 고르반을 하나님 섬김의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있음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섬김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가족으로서의 의무, 자녀로서의 도리,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몫을 회피하고, 책무를 다하지 않는 무리들에 대하여 주님은 분노하셨습니다.
결국 그들은 율법보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들의 전통을 더 중요시했습니다. 본문 6절하반절에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라고 책망하셨는데, 여기 '폐한다'는 말은 권리를 빼앗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책망한 것입니다.
▶7절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외식하는 자들아' 예수님의 책망입니다. 여기 '외식'은 원어적으로 '배우'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위선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외식이란 말은 두 얼굴을 가진 배우라는 말과 같습니다. 배우는 시나리오와 감독에 따라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합니다. 자기들의 감정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의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아' 책망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이 2천 년 전에 예수님께 바리새인들에게만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를 향하여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지 않으신지 주의해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을 크게 책망했습니다. 마23장에 보면 '외식하는 자여, 화 있을진저, 화 있을 진저'하시며 7번이나 책망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신앙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마23장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정의하셨습니다. 말만하고 행동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남에게 시키기만 하고 자기는 손가락하나 움직이지 않은 사람,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겉치레에만 관심 있는 사람, 높은 자리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을 가리켜 외식하는 신앙인입니다. 외식하는 사람은 천국 문을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믿/
▶8-9절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사29:13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는 후세에 이스라엘백성이 이런 범죄에 빠질 것을 예언했습니다.
▶여기서 세 가지로 외식하는 사람을 정의했습니다.
⑴입술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만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먼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⑵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해서 사람의 교훈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말을 하면 안들을 것 같으니까 하나님은 말씀을 빙자해서 자기 생각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⑶하나님은 헛되이 경배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입술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요, 제도와 의식으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외식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⑴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다시 서는 길 밖에 없습니다.
⑵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죽이는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의 반대는 교만입니다.
⑶예수님을 자꾸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것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할/
▶10절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이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뿐만 아니라 많은 무리들을 불러모아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그런데 먼저 '듣고 깨달으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먼저 '듣고 깨닫는 것'입니다.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런데 깨닫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듣는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듣고 깨달으라고 하시면서 실로 충격적이고 혁명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11절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당연한 말씀 아닙니까? 입에 들어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음식입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말입니다. 여기서 '더럽게 한다'는 말은, '코이노이'라는 말로 '저속하다, 품위를 떨어뜨린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서민적인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품위를 떨어뜨립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은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입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많은 논란을 벌였습니다. 무슨 음식을 먹느냐? 정한 음식, 부정한 음식을 따졌습니다.
미국 유럽 쪽으로 가면 슈퍼마켓에 '코쉘'이라고 써놓은 음식을 볼 수 있답니다. 그리고 다윗을 상징하는 별을 그려 놓습니다. 지금은 유대인들은 레11장에 맞추어 만든 음식만 먹는답니다.
코쉘이란 마크는 바로 유대인의 음식에 관한 규례대로 만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사람의 내면에 들어 있는 생각, 의지, 감정의 표현이므로 죄로 인한 인간의 마음은 악해있습니다. 렘17:9절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할/
▶12절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줄 아시나이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와서 예수님께 보고를 합니다. '예수님 지금 당신의 말씀을 들으면서 바리새인들이 굉장히 기분이 상하고 마음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분노하고 있음을 알고 계십니까?' 이런 보고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충격 받고 분노한 이유는 무엇인가?
①군중들 앞에서 비난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비난받기를 싫어합니다. 왜? 체면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당시 종교적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②그들의 신앙의 근본을 뒤흔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 생명 걸고 구약에 있는 모든 말씀을 잘 지켰습니다. 특히 레11장/신14장에 들어있는 '부정한 음식을 입에 대지도 말라'는 말씀을 목숨처럼 지켰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그들이 그렇게 생명을 걸고 지켰던 규례들은 의미가 없다고 선언해 버리신 것입니다. 어떤 학자는 수십 년 동안 열심히 연구해서 논문을 하나 발표했는데 누가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하면서 휴지조각처럼 찢어 버렸다면 공부한 그 사람은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행11장은 베드로가 기도하던 중 환상 가운데 큰 보자기 같은 것이 내려왔습니다. 그 안에는 구약에서 먹지만 하면 한 부정한 짐승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는 음성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깜짝 놀랐습니다. 왜? 베드로는 이런 부정한 것을 먹을 수 없다고 거역할 정도로 유대인의 전통에 익숙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깨끗케 하신 것은 네가 속되다 말라' 이런 음성이 세 번 반복되었을 때 베드로가 깨달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내었는데 지금 바리새인들은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13-1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가라지 비유와 비슷합니다. 13절의 말씀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심으신 분이십니다.
마13장은 가라지 비유입니다. 주인이 제 밭에 좋은 씨를 뿌렸는데 싹이 나왔을 때 보니까 알곡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함께 자라고 있었습니다. '주인이여, 가라지를 뽑아 버릴까요?' 종들이 묻자 주인이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가 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여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도 모아 내 곡간에 넣으라 하리라'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은 절대로 심지 않을 것을 거두지 않는다는 놀라운 법칙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이 심지 않은 것은 마지막 날에 다 뽑아 버릴 것입니다. 바리새인 같은 신앙을 인도하면 둘 다 빠져 죽습니다.
여기 소경은 세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⑴육적으로 눈이 먼 소경입니다. ⑵지식으로 눈이 먼 소경입니다. ⑶영안이 멀어 하나님을 볼 수 없는 눈입니다. 가장 큰 소경은 영적인 소경입니다. 여기 바리새인들이 영적인 소경임을 알아야 합니다.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산에 가면 맹수를 잡기 위해 함정을 팝니다. 깊이 구덩이 파고 그 위를 위장을 해서 덮어놓습니다. 이 함정은 맹수들이 잘 다니는 길에다 파 놓습니다. 아무리 사나운 호랑이라도 이 함정에 빠지면 나오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예로 드신 것입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은 육적인 소경이 아닙니다. 문화적 소경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의 세계를 구별하지 못하는 소경입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가면 구덩이에 빠지게 됩니다. 맹수를 잡기 위해 파놓은 그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여러분, 여기 구덩이가 어떤 구덩이인가? '게헨나'라고 합니다. 지옥을 의미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가? 신령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라가지 않고 장로들의 유전이나 전통을 따라 갔다가는 영적 소경이 되어 구덩이에 둘 다 빠집니다.
▶15절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소경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베드로가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해 달라'고 합니다. 베드로의 간청에서 우리는 그의 믿음이 얼마나 올바른가를 알게 됩니다. 그는 진리를 향한 겸손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그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 집에 가셔서 마르다보다 마리아의 자세를 더 기뻐하셨습니다. 왜 그런지 아시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려고 하는 간절한 마음이 마리아에게서 있었습니다. 물론 교회에는 마르다처럼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봉사이전에 배워야 합니다. /할/
▶1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그때에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너희도 아직 깨달음이 없느냐?'고 물으십니다. '바리새인들만 깨달음이 없는 줄 알았더니 너희도 아직 깨달음이 없느냐'는 말씀입니다. 어쩌면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도 그런 책망을 하실 지 모릅니다. 이런 책망을 받기 전에 우리는 열심히 듣고 배우고 깨달아 진리 안에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17-18절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오늘의 가장 핵심문제가 나왔습니다. 본문은 11절 말씀을 다시 해석했습니다. 인간을 더럽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악의 근원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인간을 더럽게 하는 것과 더럽게 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인간을 더럽게 하지 못합니다. 음식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음식을 주신 이유는?
①건강을 위해서, 음식을 먹지 않으면 사람은 죽습니다.
②교제하는 방법입니다. 밥상 공동체가 제일입니다. 먹는 것 때문에 기뻐하고 먹는 것 때문에 시험에도 듭니다.
음식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데 어떻게 하느냐? 고전10:31절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아멘!/ 놀라운 것은 먹는 것은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할/
▶19-20절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인간은 더럽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 '악한 생각'은 '카이'라는 원문입니다. 19절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즉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덕질과 거짓증거와 훼방'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살인은 6계명입니다. 간음과 음란은 제 7계명이고, 도적질은 8계명, 거짓 증거는 9계명입니다. 예수님이 여기까지 말씀하시고 훼방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훼방'이란 '남을 헐뜯어 비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더 큰 의미는 성령을 훼방한다든지 하는 신성모독을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런 것들이 전부 다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안셀롱'이라는 유명한 학자는 '마음이라는 것은 방앗간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마음에 들어가면 빻습니다. 특히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생각을 빻습니다. 그래서 아무거나 들여보내면 안 됩니다.
책한 권 잘못 읽어도 큰일납니다. 인간의 마음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우리인간을 더럽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마음을 언제나 깨끗하게 보전해야 합니다. 잠4:23절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마음의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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