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77강) 병든 자를 고치신 예수님! (마 15:29-39)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7:24

(제77강)    병든 자를 고치신 예수님! (마 15:29-39)

 

  본문은 가나안 여인의 딸을 고쳐주신 사건 뒤의 나오는 기록입니다. 마4:23절을 보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크게 하신 일이 세 가지가 나오는데 그것을 가리켜 3대 사역이라고 했습니다.
  ①가르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가르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진리가 되시는 예수께서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어둠과 거짓 속에서 사는 민중들에게 참 진리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시기 위해서입니다.
  ②복음전파를 위해 오셨습니다. 항상 절망 속에서 살고 있던 무리들에게 '참 생명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③병든 자를 고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에 병든 자를 고치시는 사역을 '삼분의 이'를 할애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 예수님의 기적을 기록한 사건이 37가지가 나오는데 그 중에 28가지는 병든 자를 치유하신 사건입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예수님은 병들어 고통 속에 있는 민중들은 정말 불쌍히 여기시고 치료해 주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육체적인 질병만 치유하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영혼의 질병, 정신적인 질병, 그 모든 것을 총망라해서 치유하신 것입니다.
  본문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누어집니다. 29-31절까지는 '모든 병든 자를 고치신 사건'이 나오고, 32-39절에서는 '사천 명을 먹이시고 일곱 광주리를 남긴 기적'사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제목 소개!▶

 

  ▶29절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경을 떠나서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셨다고 했습니다. 두로와 시돈 지방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도시입니다. 그곳에서 한 가나안 여인의 귀신 들린 딸을 고치신 곳입니다.
  이제 그곳에서 떠나 먼 길을 걸어서 갈릴리 호수가로 다시 오셨습니다. 그런데 막7:31절을 보면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을 지나 이방지역인 데가볼리를 통과하여 갈릴리를 오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 데가볼리에서 많은 환자를 고치셨다고 했습니다. 특히 그곳에서 귀먹고 어눌한 자를 '에바다' 하시니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게 하셨습니다.
  '데가볼리'는 10개의 마을이 합쳐 하나의 군처럼 되어져 있는 지역입니다. 그 지역은 혈통적으로 혼합되어진 사람들과 이방인들과 여러 종족들이 살고 있는 그런 지역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도 생명을 살리는 전도를 하시고 가르치시며 치유의 사역을 하신 것입니다. 이제 구원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도 본격적으로 전파되었고 그를 믿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음을 알리기 위한 목적에서 그곳에 가신 것입니다. /할/
  그리고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산에 오신 것입니다. 이 산을 예수님이 즐겨 가신 산으로써 산상보훈을 가르치신 곳입니다. 또 예수님이 부활하여 제자들을 만나고 지상명령을 분부하신 곳입니다.
  마28:16-20절에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무엇을 연상케 합니까? 산상수훈의 장면(5:1)을 연상케 하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께서 산에 가셨을까요? 휴식을 취하기 위함이요, 기도하기 위함입니다. 아마 예수께서 선교 여행 중에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잠시 휴식하시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조용히 기도하시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신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잘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바라 볼 소망이시며 만인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믿/
  또한 예수께서 앉으신 것은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은혜롭게 맞아 주시기 위하여 모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안정되게 자리를 잡으심을 의미합니다.

 

  ▶30절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두매 고쳐 주시니"
  같은 배경을 설명하고 있는 막7:31-37절에는 귀먹고 어울한 자를 고치시는 장면만을, 즉 여러 치유 기사 중 극적 장면만이 선택하여 기록되어 있으나, 본문에서는 각종 질병을 치유하시는 종합적인 장면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사설 그 당시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의학의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했던 소외된 지역의 주민들에게는 만성적이고 고질적인 각종 질병들이 많았습니다. 그중 본문의 '불구자'는 신체 중 일부가 손상되었거나 기능이 마비된 자를 가리킵니다. 아무튼 저자 마태는 예수님이 위대한 의사로서 영. 육의 질병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심을 계속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곳에 '큰 무리'가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곳마다 이렇게 인산인해의 무리들이 모였습니다. 다음 구절에 나옵니다만 여기에 모인 회중이 무려 4천명이나 됩니다.
  성경에서 숫자는 장정의 수만 기록한 것으로 여자, 어린아이, 노인들을 제외한 숫자이기에 실제로는 몇 천 명에서 기만명일 수도 있습니다.
  이 무리들이 어디서 왔습니까? 물론 갈릴리 지역에서도 왔을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의 견해를 보면 '데가볼리' 땅과 두로와 시돈 땅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무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모인 큰 무리들을 이방인들로 보는 견해입니다.
  여기에 모인 큰 무리들의 목적이 저마다 다 다를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보배로운 설교를 들으려고 온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그 분이 베푸신 기적을 구경하려고 온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기적을 통해 만들어지는 빵과 물고기를 먹으려고 온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본문에서처럼 육신의 질병을 고치려고 나온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어떤 군중심리에 이끌려 나온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무리 속에는 예수님의 높은 인기와 명성을 시기하여 무엇인가 트집을 잡기 위해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목적을 가지고 나왔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구원의 확신을 얻고 기쁜 마음으로 예배드리기 위해서 나왔고, 어떤 사람들은 교양을 쌓고 수양을 하기 위해서 나온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큰 교회에 가보면 인간관계 때문에 출세나 장사의 이익 때문에 교회에 온 자들도 많습니다.
  또는 맹목적으로 덩달아 나온 이들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도둑질과 사기를 치려고 나온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귀한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구원을 체험하여 인생의 참 목적을 깨우치기 위해 나온 사람이라면 참 귀한 성도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목적으로 나왔을지라도 우리 하나님께서 새롭게 변화시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본문을 보면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왜 이 땅에 질병이 있는지를 성경적으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①죄 때문에 오는 질병이 있습니다. 특히 성병은 죄로 인한 병입니다.
  ②욥2:7절을 보면 시험으로 인하여 질병이 오는 수도 있습니다.
  ③과로로 인하여 오는 질병도 있습니다.
  빌2장을 보면 에바브로 디도라는 사람은 너무나 주의 일을 열심히 하다가 과로해서 그만 병에 걸렸습니다. 목사님들 가운데서도 너무 주의 일을 열심히 하다가 과로로 쓰러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은 많은 사람들이 사업을 열심히 하다가 과로로 인하여 병에 걸리는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밤낮도 없이 주일도 없이 뜁니다. 그러다가 쓰러집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오직 그분이 우리 육신을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6일을 열심히 일하고 7일은 쉬면서 하나님을 만나는 날로 정했습니다.
  ④나이가 많아지면 질병에 잘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창48:1절에 보면 야곱이 나이 많아 병들어 누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⑤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교만하거나 장고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주신 병도 잇습니다. 고후12:7절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⑥요9: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질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태어나면서 소경된 자, 제자들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예수님께 따집니다. 예수님 대답은 부모의 죄로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하시는 일을 나타나시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질병에 걸리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습니다. 물론 그밖에 또 다른 이유도 있을 수 있습니다. 질병을 치유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병원에 갈 병도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 나와서 고치는 방법도 있습니다.

 

  ▶본문은 병고침을 받는 단계를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①병들고 불구된 사람들을 먼저 예수님께 데리고 와야 합니다. 본문에도 '데리고 와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데리고 온다고 해서 다 치료받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자가 데리고 와야 합니다. 사실 예수께서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는 그 믿음을 가진 자만이 병든 사람을 주님께 데리고 올 수 있습니다.
  막2:5절에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할/
  놀라운 것은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가족에게 전도하기를 원하십니까? 친구에게,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②예수님의 발 앞에 두어야 합니다. 본문에 '예수님의 발 앞에 두매' 고쳐주셨다고 했습니다. 원어를 보면 '사람이나 무거운 물건을 마치 경쟁하듯이 서둘러 내려놓는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병자들을 예수 앞으로 데리고 와서 진지한 열성으로 그의 발 앞에 내려놓고 그분의 뜨거운 사랑을 호소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더구나 여기 '두다'는 미 완료형으로 병든 사람을 예수의 발 앞에 내려놓는 행위가 한 번에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 반복해서 진행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말은 무수히 많은 병자와 불구자들이 이곳 저곳에서 모여 예수 앞에 앉아 그의 만져주심과 고쳐주심을 사모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발 앞에 둔다'는 말은 환자들이 병을 고치려면 의사에게 가서 의사에게 완전히 내어 맡겨야 하듯이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에 완전히 주님께 내 맡겨야 됨을 의미합니다. /아멘!/
  ③기도해야 합니다. 왕하20:1-7절을 보면 히스기야 왕은 눈물의 기도로 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약5:15절에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아멘!/

 

  ▶31절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①'벙어리가 말하고' 여기 말 못하는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의사표시를 못하는 벙어리가 의사를 표시하고 뜻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육신의 벙어리가 치료된 것은 중요하지만 영적 벙어리가 치료되어야 합니다. 기도의 문이 열리고 찬송의 문이 열리고 전도의 문이 열리고 /할/ 아멘의 문이 활짝 열려야 합니다. /아멘!/
  ②불구자가 건강해졌다고 했습니다. 몸을 자기 뜻대로 혼자서 못하는 병신이 고침 받았다는 것입니다.
  ③절뚝발이가 걸었습니다. 육신의 절뚝발이도 고침을 받을 뿐 아니라 영적인 절뚝발이도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영적인 절뚝발이입니까?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 불규칙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 또 온전한 십일조를 못하는 신앙도, 영적 절뚝발이 신앙입니다.
  ④소경이 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물을 보지 못하는 눈뿐만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보지 못하는 눈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육적인 눈도 귀합니다. 지식의 눈도 귀합니다. 그러나 신령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영안도 정말 귀합니다.
  여기서 저자 마태는 이사야 선지자가 언급했던(사35:5-6) 병의 종류들 즉 절뚝발이, 불구자, 소경, 벙어리와 그 완치(完治)를 그대로 언급함으로써 이방에서의 예수님의 병 치료도 역시 이사야 예언의 성취이며 따라서 '이방의 땅 갈릴리의 흑암에 앉은 백성들이 큰 빛을 볼 것'(사9:1-2)이라고 한 또 하나의 예언도 역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여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들이 이방인들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들이 '야! 정말 듣던 데로의 능력이구나. 하나님께서 저런 선지자를 보내셨구나, 저런 메시아를 보내셨구나'하고 감탄하는 그런 모습입니다.
  한편 이방인들이 예수의 기적을 보고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한 이 고백을 통하여 유대인들로 하여금 '놀라게 하는 요인'이 되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알세불의 힘에 의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됩시다. /할/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의 모든 것을 일으켜 세우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질병뿐만 아니라 무너졌던 사업, 잃었던 인생살이도 다 풀어주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고후1:20절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아멘!/
  하나님 앞에서 은혜 받고 능력 받고 신앙의 산 체험을 할 수 있는 비결은 오직 겸손히 하나님께 낮아져야 합니다. 병든 자를 예수님의 발 앞에 두었다는 것은 그들이 겸손히 낮아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덴마크의 코펜하겐 박물관에 가면 세계에서 제일 잘 그려진 예수님의 초상화가 있다고 합니다. 이 초상화를 보는 자는 누구든지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은혜를 받고 자기의 친한 친구에게 소개를 해 그 친구가 예수님의 초상화를 보고 왔는데 별로 은혜 받지 못한 표정입니다. 물어보니 항상 예술 작품을 보는 식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예수님 초상화 앞에 마음을 정리하고 겸손히 무릎을 꿇고 다시 한 번 보고 보라'고 했습니다. 그 뒤 그 사람은 예수님의 초상화를 보고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눈이 부었다고 말하더랍니다. /할/

 

  ▶32-39절은 '칠병이어'의 기적의 사건입니다.
  본문은 마14:13-21절의 오병이어의 기적과 흡사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같은 기적을 기록해 둔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전혀 다른 상황에서 일어난 또 한 번의 기적입니다. 그 이유를 보면,
  ①그 시기가 다릅니다. 마14장은 봄인데 반해 본문은 여름입니다.
  ②장소가 다릅니다. 마14장은 벳세다 광야인데 반해 본문은 갈릴리 해변가 산입니다.
  ③대상이 다릅니다. 마14장은 유대인들이고 본문은 대다수가 이방인들입니다.
  ④숫자가 다릅니다. 마14장은 오병이어로 5천명이 먹고, 12광주리를 남겼는데 본문은 7병이어로 4천명이 먹고 7광주리를 남겼습니다.
  강해설교의 일인자인 '캠벨 몰간' 목사님은 12바구니와 7광주리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구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 쓰는 시장바구니이고, '광주리'는 이방인들이 장사에 쓰는 바구니 보다 좀 더 큰그릇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것을 분명히 하나는 이스라엘을 위한 기적이었고 본문은 이방인을 위한 기적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도 사랑하셨고, 유대인과 똑같이 이방인에게도 구원과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⑤예수님이 다른 사건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6:9-10절에서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치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2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 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오병이어 때는 제자들이 먼저 나아와 무리들의 먹을 것에 대해 언급했는데 반해서 여기서는 예수님이 먼저 나서서 그들을 먹이기 위해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여기서 보니 당시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사람들이 그냥 한나절에 왔다가 돌아가는 그런 게 아니라 예수님과 3-4일 동안 함께 하는 공동체가 되어 영육 간에 문제를 해결 받은 것입니다.
  '이미 사흘이매' 이는 예수님의 병 고치는 사역이 그 각각의 병자들에게 계속 진행되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 무리들이 가져왔던 음식이 모두 바닥났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한편 팔레스틴 주민들은 보통 두터운 겉옷을 걸치고 다니면서 싸늘한 밤 기후에도 길가에서 노숙할 만큼 먼 여행에 익숙해 있었던 사람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이들의 배고픔을 아셨다'는 것은 예수님은 인간의 육신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과 아픔에도 관심이 있지마는 일상적인 삶에도 결코 무관심하지 않으심을 알게 됩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이것이 우리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보시고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저들의 굶주린 채 보내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자비의 마음입니다. 육신 적으로도 그렇고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시간에 영적으로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살찐 꼴을 먹기를 원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믿/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지금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주님의 간절한 음성을 들이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예수께서 '혹시 그들이 길에서 지쳐 쓰러지지나 않을까'하는 염려 때문에 그들을 집으로 보내지 못하고 있음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느낍니까? 예수님의 사랑이 마치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 같은 것임을 나타내 주는 표현입니다. /할/

 

  ▶33절 "제자들이 가로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참 답답한 제자들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체험한 그들이 벌써 얼마나 되었다고 주님의 큰 능력을 잃어버렸는가? 그때나 지금이나 온전한 믿음을 찾아보거나 힘든 세상인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이유를 답니다. '여기가 광야인데' 오병이어의 기적도 광야에서 일어난 기적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벌써 잃어버렸습니다. 제자들의 광야라는 조건을 단 것은 한마디로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는 대답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할 수 있습니다. 하면 되는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기뻐하십니다. 나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신앙이 귀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상식을 초월한 일이 많습니다. 모세가 혼자서 이스라엘을 구하려고 할 때는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로 끝났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그는 온 이스라엘을 구원해낸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절대 조건을 붙이지 마시고 따지지 마시고 아멘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어려운데, 내 사정이 어려운데'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할/

 

  ▶3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주님의 마음은 항상 자비롭습니다. 그런 불 신앙의 제자들은 그래도 책망하지 않으시고 지금 축복하시는 근거를 찾으시며 질문하십니다.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불 신앙적인 태도를 책망치 아니하시고 대신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권능을 기대하도록 하시려는 의도에서 이 같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향하여 물으십니다. '너희에게 가진 재능이 무엇이냐?' 그 재능을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모두에게 한 가지 이상의 재능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 가지가 있나이다.' 이것이 축복의 근거가 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무조건 축복하시지 않았습니다. 반듯이 축복할 근거를 찾아서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신 것은 그의 순종의 믿음을 보시고 '갈대아 우르 우상의 도시를 떠나라'고 하셨을 때 아멘,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버리라고 할 때도 '하나님! 어떻게 버린대요'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멘 순종했습니다. 또 100세에 얻은 이삭까지도 바치라고 했을 때 무조건 아멘 순종했습니다.
  그런 축복의 조건을 보시고 '복의 근원'이란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근원'은 '샘 줄기의 복'입니다. 퍼주고, 퍼주어도 나눠주고 나눠주어도 고갈이 없는 그런 복이 아브라함이 받은 복입니다.
  왕상 17장의 사르밧 과부도 그냥 축복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밀가루로 빵 하나 만들어서 마지막으로 자식과 함께 먹으려고 하는 밀가루 한 움큼과 기름 한 방울을 받으시고 3년 6개월 동안 책임져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축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축복을 받을만한 믿음을 보이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서처럼 정말 볼품 없고 적은 양이지만 일단 주님께 드리면 기적의 조건이 됩니다. /할/

 

  ▶35절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축복의 비결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땅에 앉게 하십니다. 이것이 첫 번째 비결입니다.
  땅에 앉아야 합니다. 이 말은 그냥 앉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신 것을 믿고 앉는 행위입니다. 광야에 무리들은 이 믿음이 있었기에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주실 줄 확실히 믿는 믿음, 이것이 기적의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은혜를 받는데 어떤 사람은 받지를 못합니다. 은혜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받으려고 하는 자세가 절대 필요합니다. 설교를 채점이나 하면 은혜는 물 건너갑니다.
  또 여기 앉는다는 말은 기도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겸손한 자세일 뿐만 아니라 기도할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아멘!/

 

  ▶36절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축복의 두 번째 비결은 축사에 있습니다.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주님이 축사해야 합니다. 주님이 축복하시면 우리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기적이 일어납니다. /할/
  기적이 일어나는 장소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가정, 사업장, 직장, 자녀들의 범사 속에서 축복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하나님의 축복은 나눠줄 때 일어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떼어준 것을 받아서 또 떼어주고 또 떼어주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떼어주십니다. 시간도 떼어주시고 능력도 떼어주시고 물질도 떼어주시고 다 떼어주십니다. 이걸 나 혼자 차지하려고 하면 기적은 안 일어납니다. 떼어서 이웃에게 줄 때 떼어서 교회에 바치고 또 데어서 구제하고 봉사할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아멘!/

 

  ▶37-38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자는 여자와 아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여기 '다 배불리 먹고' 이 단어가 마5:6절의 산상수훈에도 나옵니다. 즉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이 동사는 주로 '만족을 채우다'라는 의미로, 각 사람들이 각자 만족한 만큼의 넉넉한 음식을 받았음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위에서 '캠벨 몰간' 목사님이 말씀을 인용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여기 '광주리'는 유대인들이 여행 시에 이방인의 지역을 지나가게 되더라도 이방인들의 음식을 먹지 않기 위해 자신들의 음식을 담아 가지고 다니는 주머니와 같은 바구니(코피노스)와는 달리 광주리(스퓌리스)로 흔히 이방인들이 물고기나 과일을 담는데 사용하기 위하여 갈대로 만든 큰그릇을 가리킵니다.
  '롤린슨'이라는 사람은 최소한 유대인들은 정결한 음식물을 나르기 위해서는 광주리가 아니라 바구니(코피노스)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 '광주리'라고 하는 표현도 이 무리들이 역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임을 입증하는 말입니다.
  본문의 기적도 배불리 먹고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광주리에 거두어 남겼습니다. 이것은 부스러기의 축복입니다.
  가나안의 여인이 우리 예수님께 이 부스러기의 축복을 요구하십니다. '먹은 자는 여자와 아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주님이 축사한 결과 여자와 아이를 뺀 4천명이 다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은 거두어 보니 일곱 광주리였습니다.
  여자와 아이들은 굶었습니까? 인구 숫자에서는 빠졌지만 그를 먼저 배불리 먹인 줄 믿습니다. 이것이 어떤 종교적인 과장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믿/아멘!/
  '사천 명이었더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이적사건이 지닌 탁월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미래에 그분이 베푸실 매시야 잔치의 풍성하고도 충만한 상태를 예시해 주는 숫자입니다.
  여기서 사천 명이라는 수에서 '넷'이라는 숫자는 천지사방을 가리키는 말이며  '천'이라는 숫자는 크고 많다는 뜻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영적으로 '세계성, 보편성, 및 광대성'을 암시하는 숫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결국 전 세계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필요로 하고 주님은 이 세상 모두를 만족케 하고도 남을 만큼의 풍성한 영적 생명력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할/

 

  ▶39절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에 가시니라"
  '예수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예수께서는 자신의 곁에 더 머무르려고 하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강제로 집에 돌려보내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이들을 강제로 돌려보낸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이들은 12제자들과 같이 집이나 전토, 부모, 형제, 처자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라 단순히 예수님의 이적 행위만을 기대하며 좇아 다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고, 또한 이들이 광야에 남아서 예수님을 그들의 임금으로 옹위하려는 정치적 모의를 할 수 없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흩으시고 강제로 집에 가게 하셨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들이 집이나 마을로 돌아가서 이 엄청난 사건을 사람들에게 전함으로써 예수님의 대한 소문을 더욱 더 크게 퍼져나가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흩어 보내야 됩니다. 교회는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 두 종류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모이는 교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항상 모이기만 합니까? 아닙니다. 은혜 받은 다음에는 흩어져야 합니다. 직장으로 흩어지고 가정으로, 사회로 흩어져야 합니다.
  흩어져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복음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그랬습니다. 행8:4절에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 /할/ 한국교회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흩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은혜 받고 자기들끼리만 교제하니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자꾸 흩어져야 합니다. 교회는 흩어진 교회로 변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말입니다. /할/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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