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강)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자여! (마 23:13-24)
지난 시간에 예수님은 형식적이고, 의식적이며, 위선에 빠져 종교놀이를 하고 있는 당시 최고의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본문에서는 더 한층 저주를 강화해서 꾸짖고 계십니다.
흔히들 본문을 '화 있을진저'가 일곱 번 나온다고 해서 '칠화'라고도 부릅니다. 예수님은 크리스천의 지침으로 산상수훈을 가르칠 때 8복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거기에는 '복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을 가지고 시작했습니다만 여기서는 '화가 있을 지어다'라는 말씀을 가지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 안에는 특별한 숫자들이 두드러지는 데, 그 중 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화 선언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 열거되어 있는 잘못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모든 잘못은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몇 가지를 뽑은 것입니다.
몇 가지를 뽑을 때 일곱의 수를 취한 이유는 그것이 완전수이기 때문입니다. 일곱 가지의 잘못들을 열거함으로 그들의 잘못이 꽉 차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할/
본문은 마5장의 8복과 이 '칠화'가 서로 대조가 됩니다. 원본에는 14절에서 '화 있을진저'가 나옴으로 '팔화'라고도 부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14절이 생략되어 있으나 영어성경에는 14절이 나와 있습니다. 14절이 빠진 이유를 성경을 옮겨 쓴 사람들의 실수로 보았습니다.
성경은 성경의 저자가 쓴 원본이 있고, 그 원본을 베껴서 쓴 사본들이 많이 있습니다. 중요한 사본들이 약 6천 개가 있는데 그 6천 개의 사본들을 비교해 보면 똑같은 것이 별로 없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이 이것을 가지고 원본을 찾아내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그 원본이라고 생각되는 헬라어로 된 성경으로부터 번역된 것이 오늘날 성경입니다. 그런데 그 사본 중에는 3, 4세기에 기록된 '시내산 사본, 바티칸 사본, 알렉산드리아 사본' 등이 아주 오래된 사본들이 있고, 또 그것보다는 조금 늦게 쓴 사본들이 많이 있는데, 가장 많이 사용되는 사본이 바로 '시내산 사본, 바티칸 사본, 알렉산드라 사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본문 14절 같은 구절은 이 고대 사본에 없기 때문에 우리말로 번역할 때 이것은 원본에 없다고 보아야 하지 않느냐고 해서 14절을 번역하지 않고 그냥 '14절 없음'으로 표기하고 잇습니다.
아무튼 우리말 성경에는 일곱 번에 걸쳐 '화 있을진저'라는 말이 나옵니다 만은 KJV(킹 제임스 버전) 등의 영어 성경에는 팔 번에 걸친 '화 있을진져'가 나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5장의 8복과 마23장의 8화가 짝을 이루어 대조되는 말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저주를 하셨을까요? 보통 사람이 이런 말을 해도 기분이 나쁜데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으니 이것은 예삿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일곱 번씩이나 되풀이하신 것을 보면서 우리는 여기서 외식하는 위선적인 신앙에 대해 예수님이 얼마나 크게 분노하고 계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멘!/
사실 인생을 향한 예수님의 관심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요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러분,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것은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생의 축복을 주려함'이라고 했습니다. 자식을 저주하는 부모가 있습니까? 아무리 악한 부모라도 자식을 축복하기를 원합니다. 또 자식이 비록 잘못되었을지라도 축복하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축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스스로 축복을 거부해버린 경우에는 '화 있을진저'라는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들은 천국의 축복을 의도적으로 거부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할/ ◀제목 소개!▶
▶13절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먼저 '서기관'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서기관'은 모세의 율법에 있어서 연구 전문가들입니다. 본래 이 직업은 제사장들에게 해당된 것입니다. 에스라는 제사장 겸 서기관입니다(느8:9). 서기관들의 주된 활동은 율법 연구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회당예배를 만든 장본인들이기도 합니다. 이들 중 어떤 이들은 산헤드린의 회원이기도 했습니다. 산헤드린은 유대인들의 사법기관을 말합니다.
서기관의 기능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⑴율법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을 생활에 적용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구전 법들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은 율법에 기록된 것보다도 그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 구전에 의한 것들을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막7:5).
⑵서기관들은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⑶산헤드린 공회로부터 율법의 집행을 의뢰 받았기 때문에 '율법사'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할/
'바리새인'은 '분리 자'란 의미로 '하나님의 충성스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요한 히르카누스가 통치하던 BC 134-104년, 약30년 간 백성들의 지지를 얻으며 크게 성장했습니다.
그 때 그들은 성경 앞에서 순수했으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열정에 불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후 잠시 세력이 약화되었습니다. 심지어 그들 중 지도급 인사 800명은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다스릴 때,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핍박하던 알렉산더가 임종시(BC70년 경)에 그의 아내에게 이후의 행정을 바리새인들에게 맡기라고 유언하면서 예수님 시대까지 바리새인들은 유대의 산헤드린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정치적인 권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타락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할/
이제 본문의 첫 번째 화를 보겠습니다. 여기 '화 있을진저'라는 헬라어원은 '우아이'인데, '오 슬프다', '아이고'라는 탄식어로 사용하기도 하고, '저주가 있을지어다'라는 저주를 선언하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본문에서는 저주를 내린 선언문입니다. 그런데 이 저주는 이중적 심판의 선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현재적이며(마24:1-2), 또한 종말적(계20:7-15)입니다.
여기 외식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알아보았습니다. '위선자'라는 말은 배우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고 '연기하는 자, 본심을 숨기기 위하여 가면을 쓰는 자'를 의미합니다. /할/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이 말씀은 8복의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말과 대조되는 말입니다.
축복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는 자'들을 저주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그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 해석 자들로 여기 저기에 율법적인 울타리를 많이 만들어 놓고 체계적으로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방해를 했습니다.
그들은 아무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613개의 율법을 만들고 거기다가 울타리 율법을 더 만들어 놓고는 자기들도 다 지키지 못하면서 교인들에게 지키도록 강요를 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그들은 천국 문을 닫았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은 너무 교만했습니다. 마5:3절을 보면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 다시 말하면 겸손한 사람이 유업으로 받는다고 했고, 본문 13절은 바로 교만한 사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교만한 사람들이 천국 문을 닫고, 자기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못 들어가도록 막고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천국 문을 열어 놓으신 분입니다. 요14:6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천국으로 들어가는 길(문)입니다. /할/
그런데 바리세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천국 문에 들어가기를 거부했습니다. 천국은 무엇을 행한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멘!/
▶14절은 (없음)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신성종 박사는 영어 성경을 직접 번역해서 소개했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여, 너희는 경건한 척하고 길게 기도하면서 과부의 집을 삼키는 도다 너희들에게 더 큰 심판이 있을 것이다'라고 소개를 했습니다.
마5:4절과 대조되는 말씀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할/ 여기 애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지키지 못하고 행하지 못한 것 때문에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아멘!/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경건한 척 하면서 속으로는 힘없는 과부를 못살게 하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이제 본문의 두 번째 화를 보겠습니다.
▶15절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유대 교회가 그 때 외국인 전도에 열심을 내어 지중해 연안 각지에 개종자를 만들어 나가고 있었던 사실은 사도행전에서 엿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전도하는 것은 천국백성을 만들기 위하여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파 당을 만들기 위하여 전도했습니다. 즉 어렵사리 전도해 놓고서 자기들보다 더 악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첫 번째 사람보다 한층 더 악한 사람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천국열쇠를 가지고 문을 잠가 두고 들어오려는 사람을 막고 있는 사람인데 반해, 여기 두 번째 사람은 산을 건너 육지를 건너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교인으로 만들어 놓고는 자기보다 배나 더 지옥자식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이 되기 전에 사울이라는 청년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는 정열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남자고, 여자고, 예수 믿는 자들은 다 잡아다가 감옥에 쳐 넣으려고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의 잘못된 열정을 보는 것입니다. 이단들을 보십시오, 가정이 파괴되고, 인격이 파괴될 정도로 그들은 몸과 마음과 돈과 인생을 다 바쳐서 헌신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바다를 건너고 육지를 건너는 열정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도 받은 사람들은 자기들보다 배나 더 지옥자식이 되도록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같이 보는 것 같지만 자기 교리에 맞는 구절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 외의 원리강론이나 몰몬경이나 기타 다른 이론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잘못된 신앙이 어떤 것입니까? 성경을 잘못 가르쳐주고 이단에 빠지게 함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지옥으로 보내는 자들입니다. 또 누가 지옥으로 갑니까? 성경을 믿지 안는 자도 지옥으로 가지만, 성경을 잘못 믿는 자도 지옥에 갑니다. /믿/
학자들은 15절의 화가 마5:5절과 대조된다고 했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기 온유하다는 말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표현으로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신뢰하며 순종하는 사람,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길들여진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길들여진 자들이 아닙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사실 예수님이 옳은 줄 알면서도 시기가 나서 반대하고 비방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틀렸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그 제자들을 전적으로 예수님이 잘못된 줄로만 알게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전적으로 잘못된 분으로 알아 더 악하게 예수님을 반대했습니다. 여러분, 더 악하게 예수님을 반대하면 할수록 지옥문에 더 가까워집니다. /믿/ 이제 세 번째 화는 16-22절까지입니다.
▶16절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학자들은 이 세 번째 화를 마5:6절과 대조되는 구절로 보고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여기서 의란 도덕적인 의도 포함되지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바른 선택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미지의 세계 가나안을 향하여 갔습니다. 쉬운 결단이 아닙니다.
창12:1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여기 '본토'는 태어나서 자라고 배우고 조상 대대로 살아온 활동의 근거지인 고향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친척'은 어려울 때 도와주고 의논하고 충고도 해주고 격려도 해주고 협력도 해주는 집안관계를 의미합니다. 또 '아비의 집'은 비바람을 막아주고 더위와 추위를 가려주고 편히 쉬도록 피난처를 제공해주는 집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의지하고 보호받는 곳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것을 다 버리고 하나님이 지시한 땅으로 갔습니다. 이 태도가 바로 하나님 앞에 의로운 태도입니다. 그런데 본문 세 번째 화는 하나님의 의와는 정반대로 살아가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의 신앙적 위선, 허위, 돈과 현실적 이해에 얽매인 신앙에 대하여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신앙보다 금이 더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보다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박수를 받고 자기 유익을 얻는데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을 가리켜서 '소경 된 인도자'라고 합니다. 자기들의 행실도 온전치 못하면서 자기를 따르라고 하는 지도자는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지옥으로 빠트립니다. 이런 사람은 '소경 된 인도자'입니다. 소경은 자기 앞도 분별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인도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할/
오늘 본문의 배경은 그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맹세하는 일을 자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맹세하면 그것은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맹세하지 않고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과 성전의 금과 제단의 것을 가지고 맹세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을 속여 물질을 얻기 위하여 맹세를 한 것입니다. 더 쉽게 접근하면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보다 그 위에 재물을 더 좋아했고, 성전보다 성전 안에 있는 금을 더 소중히 여기는 물질주의에 빠진 자들이었습니다. 종교가 타락하면 물질중심이 되고 물질 중심이 되면 정신이 빠져 영적 소경이 되어 버립니다.
오늘 본문에 바리새인들은 '너희가 성전으로 맹세한 것에 대해서는 안 지켜도 되고 금으로 맹세한 것은 꼭 지켜야 한다'고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은 맹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16-22절까지는 무려 맹세가 10번이나 나옵니다. 원래 맹세란 자신의 약속과 주장이 진실하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인식시키기 위한 방법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인격 앞에서 행하여진 것입니다.
이 맹세는 의무규정이 아니기 때문에 자발적인 의사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맹세하였을 경우에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반드시 지켜야 했습니다.
신23:23절에 '네 입에서 낸 것은 그대로 실행하기를 주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 그리고 시15:4절에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또 전5:4절에서는 '네가 하나님께 서원 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 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할/
▶17절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여기 '우맹이요, 소경들이여'는 16절의 '소경 된 인도자'를 '우맹자'로 바꿔 부르고 있습니다. '우맹'이란 말은 헬라어의 '모로이'라는 말로 '지각과 판단력이 결여된 어리석은 자'라는 뜻입니다.
어느 것이 큽니까? 금입니까?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입니까? 바리새인들은 재단보다는 그 위에 있는 재물을 더 귀히 여기고 성전보다는 성전에 있는 금을 더 귀히 여기는 물질주의에 빠져 버렸습니다.
종교가 타락하면 언제나 물질중심으로 빠져나갑니다. 이단들의 최후가 바로 물질적인 사건으로 끝납니다. 우리말 속담에 '제사에는 정성이 없고 젯밥에만 정신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금보다 하나님의 성전이 더 큽니다. /아멘!/
▶18절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 도다"
16절의 반복되는 말입니다. 다만 '소경 된 자'를 '너희'로 바꾸었고, '성전'이 '제단'으로 바꾼 것뿐입니다.
마태는 이런 대칭적 반복형태를 써서 호소력을 높였습니다. 반복되는 것은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여러분, 제물보다는 제단이 중요합니다. 제단이 없으면 제물을 바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할/
▶19절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본문은 17절을 다시 강조한 말씀입니다.
▶20-22절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이 구절들은 맹세에 대한 결론적인 선언입니다. 내용은 '제단 앞에서 맹세를 하는 것이나 예물을 제단 위에 두고 맹세하는 것이나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결국 맹세는 어떻게 하든 무조건 정직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라고 했습니다. 성전에 누가 계십니까? 하나님이 계십니다.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예수님께 맹세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맹세에 관한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 잡아 주고 있습니다. 성전 중심이나 예물 중심 사상은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하듯이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할/ 이제 네 번째 화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23-24절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예수님은 계속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탄식하고 계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그들의 앞에 놓여있는 위선에 대한 심판과 저주를 알지 못한 채 여전히 겉치레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목적은 순수하지 않으며 무언가 진지해 보이기는 하지만 모두 겉치레였습니다. 우리들도 이 외식과 형식주의에 빠지면 안됩니다. /믿/
'십일조를 드리되' 본래 십일조라는 것은 밭과 과수원과 가축이 생산하는 열매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는 제도입니다. 그리고 이 제도는 자기의 전 수입이 모두 하나님께 위탁받은 물건들임을 고백하는 충성의 표시이며 따라서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같은 종교직의 생활비를 제공하며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공평과 긍휼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밭이나 과수원이나 가축이라고 하는 범위를 넘어서 모세의 율법이 정하지도 않은 '박하와 회양과 근채'까지도 포함시켜 십일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뜰에서 나는 적은 초목인데 '박하'는 우리말로 '양생이'라는 풀로서, 강한 향 때문에 약재로 쓰이는 식물입니다. 그리고 '회향'은 흰 참깨 비슷한 식물이고, '근채'는 검정 참깨 비슷한 식물로서 주로 빵이나 과자를 구울 때 향기와 맛을 돋구기 위해서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향과 박하와 근채는 모두 값비싼 귀한 식물들을 가리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면서 율법의 더 중요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십일조를 철저하게 바쳤습니다. 절대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는 유대 종교의 규례 중에 중요한 규례입니다.
신14:22절에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그리고 레27:30절에서는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창28:22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십일조를 서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할/
▶성경에서 십일조에 대하여 많은 언급이 있었습니다.
①레27:30절에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께 십일조를 반듯이 드리라고 했습니다.
②대하31:5-6절을 보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과 밭에 모든 소산의 처음 것'을 드렸고, 소와 양의 생축의 십일조를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③말3:8절에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④말3:10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자에게 쌓은 곳이 없도록 축복해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그들을 책망하셨습니까? 사소한 의무를 지키면서 근본적으로 큰 것을 범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농작물이나 과일의 십일조를 규정(신14:22-29, 26:12-15)하고 있는데 그러나 이들은 그것을 야채까지 확대시켜 금식의 향기를 내는 박하와 희양과 근채까지 십일조를 내면서 율법의 중심인 '의와 인과 신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⑴'의'는 '정의, 공평, 의리'를 뜻하는 말로, 한마디로 '옳은 것을 버렸다'는 책망이십니다. 그들은 지도자입니다. 그들이 의를 세워 나가는데 앞장서야 했습니다.
정의가 무너지고 불공평하고 의리를 배반하여 옳은 것을 세워 나가지 못한다면 십일조를 아무리 잘 바쳤다고 해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수 없습니다.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신앙 안에 하나님의 공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멘!/
기도하고 찬송하고 헌금하는 그런 것말고 내 안에 정말 '정직과 진실이 있는가? 거짓이 없는가? 위선은 없는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도 들여다 볼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보시고 아실 수 있습니다.
⑵'인'은 '자비와 긍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⑶'신'은 '신실함과 진실함'을 말합니다. '신'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기준입니다. 진실한 신앙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아멘!/
어떤 사람이 신앙이 '좋은가? 안 좋은가?'를 보려면 그 사람에게 '변덕이 있는가? 없는가?'를 보면 압니다. 변덕이 많은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진짜인가? 가짜인가?'는 뜨거움이나 능력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처음과 모습과 같은 사람, 한길을 가는 사람, 환경의 고통이 올지라도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몰아 친다해도 변하지 않은 믿음, 이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할/
주님은 십일조도 드리고 의와 인과 신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믿/아멘!/
▶제자들에게 존경을 받는 랍비 한 사람이 있었답니다 그는 언제나 많은 지식을 가르치고자 애쓰는 사람이었답니다. 그런데 하루는 제자 한 사람이 집으로 찾아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마침 저녁 식사시간이 되어서 두 사람이 함께 식탁에 앉았습니다.
음식이 다 차려지자 랍비는 제자에게 '자 이제 식사 기도문을 외우고 음식을 들자'라고 말하며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한 목소리로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절반 정도 외웠을 때 제자는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랍비는 눈을 뜨고 그를 보며 말합니다.
'아니 갑자기 왜 그러나? 무슨 일이지?' 그러나 제자는 묵묵부답입니다. 랍비는 제자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다시 물었습니다. '왜 대답이 없는가?' '저, 실은 기도문을 끝까지 외우지 못했습니다.'
제자는 머리를 푹 숙이고서 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슬그머니 화가 나기 시작한 랍비는 그가 이때껏 가르친 교훈들을 하나 둘 씩 물어보기 시작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제자는 시종일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자네는 이제까지 무얼 배웠는가? 집에 가서 책도 읽지 않고 무얼 했단 말인가? 꼴도 보기 싫으니 썩 물러가게' 머리끝까지 화가 난 랍비는 소리를 쳤고, 제자는 얼굴이 땅에 붙을 정도로 고개를 푹 숙인 채 문을 나서고 말았습니다. 즐거워야 할 식사시간이 기도문으로 인하여 산산조각이 난 것입니다.
그런데 일주일 뒤, 랍비는 회당으로 가는 길에서 같은 마을에 사는 상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요즘 장사는 잘 되나요?' '예, 덕분에 별 어려움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요즘 우리 마을에 떠도는 얘기를 들으셨습니까?' '아니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직 모르고 계셨군요, 다름이 아니라 선생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아주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니, 누가 무슨 일을 했다는 말씀입니까?'
'글세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들리는 말에 의하면 성품이 아주 고운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아! 글세 그는 지난번 혼자 살고 있는 대장장이가 팔이 부러져 자리에 누워 있을 때 저녁때마다 그 집에 가서 밥도 지어주고 병간호도 해주었다지 뭡니까? 그 뿐이 아닙니다.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아랫마을에 홀로 아이들 셋을 데리고 사는 부인이 있지 않습니까? 글세 그 부인이 아이들 돌보랴, 돌 벌랴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아주머니 대신 일을 해서 돈을 갖다 주었답니다. 정말 보기 드문 사람이지요.'
상인은 침이 마르도록 랍비의 제자를 칭찬했고, 랍비는 어리벙벙한 상태로 그와 헤어져 회당으로 돌아왔습니다. 때마침 문 앞에서 제자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랍비는 급한 마음으로 '선행을 행한 제자가 누구'인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름 아닌 기도문을 외우지 못했던 바로 그 제자였습니다. 순간 랍비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니 내가 어찌 이런 실수를 저질렀단 말인가? 제자의 사람됨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스승이 어찌 존경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저 지식이나 가르칠 줄 알았지 그 이상은 아무 것도 베풀지 못했지 않은가?'
스스로의 경솔함을 깊이 뉘우친 랍비는 일주일 전 식사도 못하고 쫓겨난 제자를 비롯하여 모든 제자들을 불러 모아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의 생각은 곧 행동으로 드러나는 법이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지식을 쌓는다 하여도 그 모든 것을 혼자만 간직한다면 그것은 죽은 지식일 뿐이다. 그러므로 지식을 쌓는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은 마음을 다스려 실천에 옮기는 것'이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할/
24절에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 도다' 이것은 더러운 동물의 규정에 관계되어 있습니다. 하루살이는 포도주를 만드는 과정에서 달라붙는 모기나 하루살이 같은 적은 곤충의 일인데 이것은 레11:20-23절에서 금하고 있는 더러운 생물이라고 하여 바리새인들은 신경질적으로 이것을 걸러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그 신경과민 적인 바리새인도 더욱 큰 더러운 동물인 낙타는 태연하게 삼키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루살이'는 '작은 죄'를 의미하고, '약대'는 '큰 죄'를 의미합니다. 하루살이가 포도즙에 빠지면 목구멍에 걸릴까봐 체로 바쳐서 걸러냅니다. 이것은 비유로 바리새인들이 작은 죄는 짓지 않으려고 벌벌 떨면서도 자기 이익이 있을 때에는 큰 죄도 거침없이 짓고 있는 것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이권이 있을 때에는 큰 죄를 거침없이 범하면서도 이권이 없는 작은 것은 아주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처럼 위선을 떠는 바리새인들은 책망하고 계십니다. 사실 오늘 본문은 굉장히 어렵고 난해한 그런 문장들입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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