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107강)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마 23:25-39)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7:46

(제107강)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마 23:25-39)

 

  오늘 본문은 지난 시간에 이어 5-7화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37-39절은 멸망당할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주님께서 탄식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그래서 제목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입니다.

  그리고 25절부터 제5화가 이어집니다. '화 있을진저'는 외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을 향하여 저주하신 말씀입니다. 본문의 저주는 이중적인 저주로써 '현재적이며 또 종말론적인 저주'입니다. /할/

 

  ▶25-26절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제 5화입니다. 요즈음 현대인들은 자신들의 몸단장을 참으로 아름답고 멋지게 꾸미고 다닙니다. 특히 여성들은 서로 다투어 가면서 아름답게 꾸미고 멋지게 하려고 합니다.
  며칠 전 건대 전철역에서 본 처녀는 머리 염색을 아주 총천연색인 '빨, 주, 노, 초, 파, 남, 보'로 일곱 가지 색으로 물들은 처녀를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겉포장을 잘 하려고 합니다. 최고급의 옷에, 다이아반지, 금시계, 금목걸이 등으로, 혹은 지식이나 권력, 명예, 돈 등으로 말입니다.
  요즈음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는 한 강도가 졸도했다는 기사가 나왔는데, 내용인즉 은행에서 금고를 털어 집에 와서 돈을 세는데 글쎄 돈 다발의 맨 앞과 맨 뒤만 진짜 돈이고 중간은 모두 가짜 종이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강도는 너무 기가 막혀 졸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 하시고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할/
  ▶매우 총명하다는 소리는 듣지만 얼굴만은 못생긴 어떤 랍비가 어느 날 로마 황제의 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황제의 딸은 랍비를 보더니 '그토록 총명한 지혜가 이런 못생긴 그릇 속에 담겨져 있군'하면서 비웃었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황제의 딸에게 '궁중 안에도 술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물론 공주는 '술이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못생긴 랍비가 물었습니다.
  '공주님, 궁중에 있는 술은 무슨 그릇에 담아 둡니까?' '항아리나 술병 같은데 담아 두지요' 그러자 랍비는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기를 '대 로마의 공주같이 높고 훌륭하신 분께서 금이나 은이나 만든 그릇도 많을 텐데 그런 싸구려 그릇을 쓰십니까?' 그러자 공주는 과연 랍비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쓰던 보통 그릇들을 모두 금과 은그릇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술도 금과 은그릇 속에다 옮겨 담았습니다. 그러고 나자 술맛이 옛날과는 달리 아주 이상하게 바뀌었습니다. '누가 술맛을 이렇게 만들었느냐?'
  로마 황제가 크게 화를 내자 공주가 대답했습니다. '싸구려 그릇보다 귀한 그릇 속에 술을 담아두는 게 낫다고 해서' 공주는 황제에게 꾸중을 듣고는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당신은 어째서 나에게 잘못된 일을 하라고 했소?' 그러자 랍비는 '나는 다만 공주님에게 아주 값지고 귀한 것이라 해도 보잘 것 없이 헐한 그릇에 두는 것이 더 좋을 때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할/
  언젠가 신문에 '얼굴만 화장하지 말고 가슴을 화장하라'는 전면 광고를 본 일이 기억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겉모습을 뜯어고치고 단장하느라고 별별 짓을 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겉 사람을 보시지 않고 속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보이는 외모만 아름답고 마음속은 아름답지 못하다면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외모가 아름다운 것만큼 속도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겉보다는 마음의 중심을 더 보시는 분이십니다. /믿/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겉 다르고 속 다른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책망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경건하고 신앙의 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들 속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표리부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좋을 때 쓰는 말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처럼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성경은 '위선적인 사람, 외식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 주님은 외식하는 사람을 아주 싫어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표리부동한 사람을 몰라서 사귀기도 하고 그러한 사람을 등용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보릿고개를 없애고 경제적인 나라를 발전시킨 전 박정희 대통령이 누구한테 총 맞아 죽었습니까? 자기가 가장 신임하는 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죽었습니다.
  옛날 줄리어스 시어져 같은 사람도 가장 사랑하고 믿었던 심복에게 당하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겉 다르고 속 다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다섯 번째 저주 인 '화 있을진저'로 본문을 시작하고 계십니다. /할/
  여기 '외식'은 '위선자라는 말로 꾸민다, 또는 배우노릇을 한다'는 뜻입니다. 각본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배우처럼 속과 겉이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 하는 도다' 여기서 잔과 대접을 먹고 마시는 그릇을 통칭한 말로 잔과 대접을 깨끗하게 하는 이유는 음식을 깨끗하게 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안팎을 모두 깨끗이 해야 되지만 우선적으로 깨끗하게 할 부분은 그릇 안쪽입니다. 그릇 안쪽이 깨끗하지 못하면 그 그릇에다 맛있는 음식을 담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비유로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겉으로는 위엄이 있고, 거룩하게 보이고 근엄한 표정으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겉으로 보기에는 참 신앙인 같았고, 바른 지도자 같았고, 애국자 같았습니다. 그런데 속마음은 영 그게 아니었습니다. 탐욕으로 방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신앙의 의식을 잘 지켰습니다. 기도를 유창하게 잘 합니다. 금식도 잘 합니다. 십일조도 잘 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 속 깊은 곳에는 그런 신앙인의 모습은 하나도 없고 탐욕으로 방탕으로 가득 차 있음을 지적하시면서 책망하고 있습니다.
  여기 '탐욕'은 헬라어원인 '하르파계'로써, '강탈, 약탈, 도둑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 전에 예배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헌금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중이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이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또 '방탕'은 헬라어원인 '아크라시아'로써, '자제력을 상실하다, 무절제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는 주로 윤리적인 측면에서 범죄 함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주님은 일찍이 마7:15절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그들을 경계시켰습니다. /할/
  본문 5화를 비유해서 마5:8절의 8복에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그렇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과 동행하여 영광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정반대였습니다. 겉은 깨끗하나, 마음은 부정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잔과 대접은 깨끗하나 그 안에 담겨진 음식은 부정한 수단으로 벌어들인 물질이었습니다.
  어떤 성경 주석 가는 현대교회 성도들이 외형적으로 보기에는 성도 같고, 교회 같은데 노아의 시대같이 탐욕과 방탕에서 먹고 마시며 먹자 주의, 시집가고, 장가가고, 음란 방탕주의, 사고 팔며 물질주의로 완전히 세속화되어 가고 있다고 한탄했습니다.
  주님의 책망을 보겠습니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여기 '소경된 바리새인들아!'라고 하셨습니다. 진리의 바른 길을 떠나서 잘못된 길을 걸어가면 소경입니다. 너희는 한마디로 지도자가 될 수 없고 인도자가 될 수 없다는 책망입니다.
  여러분, 소경이 길을 어떻게 인도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책망은 '겉만 깨끗이 하지 말고 안을 깨끗이 하면 겉은 저절로 깨끗해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변화된 사람은 겉모양도 변화됩니다. 신앙생활은 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이 중요합니다. 다윗은 마음 중심을 하나님께 드린 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윗을 보고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아멘!/ 이제 여섯 번째 화를 보겠습니다.

 

  ▶27-28절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이번 여섯 번째 화는 다섯 번째의 화를 더 보충하신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 차 있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아주 크게 '너희들은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책망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우리처럼 땅에다가 시체를 묻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위에 자연적으로 생겨진 동굴이나 혹은 굴을 파서 묘지로 씁니다. 그런데 그들의 묘지는 가족묘지입니다. 할아버지 시체를 놓고 몇 년이 있다가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또 거기에 묻습니다. 굴하나를 가지고 유대인들은 가족묘지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일년에 한번씩 유월절 직전에 거기에 회를 바릅니다. 마치 오래된 APT에 페인트를 칠하면 새집처럼 보이듯이 묘지에 회를 하얗게 칠하면 깨끗해 보입니다. 이렇게 하는 유래가 있습니다. 민19:16절을 보면 '누구든지 죽은 자의 시체나 사람의 뼈나 무덤을 만지면 7일 동안 부정하게 된다'는 율법이 있습니다.
  시체를 만진 사람은 7일이 지난 동안을 제사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유월절이 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키려고 곳곳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는 사람들로 인하여 요동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니 자연히 요즘말로 표현하면 '호텔이다, 민박이다'하면서 다 동원해도 숙박시설이 모자라게 됩니다. 사람들은 수십 만 명이 모였고 갈 곳은 없다 보니 자연히 길거리에서도 자게 되고, 더러는 들이나 산기슭에서 자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에 비가 오거나 날씨가 춥게 되면 동굴로 들어가게 되는데 자칫 잘못 들어가는 날에는 사체가 있는 곳에서 하루 밤을 같이 지내게 됩니다. 이러면 그들은 유월절 행사에 참석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실수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무덤에다 전부 하얗게 회를 칠합니다. 그러면 누구든지 '아! 이건 무덤이구나' 생각하고 옆에 가지 않아서 부정 타지 않도록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하고 지나갈 것은 저들이 시체를 부정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샤머니즘적인 도깨비놀음이나 귀신이 관계된 것들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극히 위생적인 관점에서 부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시체는 썩은 것이고 그 썩은 것이 몸에 닿으면 몸에서 냄새가 나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부정해진 몸으로 성전에 들어갈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할/
  다시 본문의 의미를 조명해 보겠습니다. 묘지에 회를 허옇게 칠하면 깨끗해 보입니다. 그러나 속에는 썩은 시체, 썩은 뼈, 오물 썩은 냄새가 가득한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심령을 바로 이 회칠한 무덤에다가 비유를 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깨끗하고 경건한데 속에는 냄새가 난다는 그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화 있을진저'라고 저주하셨습니다.
  여기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화 속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그릇이란 밥그릇이나 대접 같은 그릇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닌 사람이 인격을 말함이며, 그 안이란 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마음가짐과 뜻과 성품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겉이라는 것은 형식과 밖으로 나타내는 행동이나 행위를 뜻하며 안이라고 하는 것은 그 내면에 가지고 있는 뜻과 성품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할/
  곽선희 목사님은 이 두 비유에서 '칼 막스'와 예수님과의 철학을 대조시켰는데 '칼 막스'는 생각하기를 '사회가 먼저다. 그러므로 사회를 깨끗케 하라, 그래야만 이후에 개인도 개조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이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는 정반대로 '개인이 먼저이며 개인이 먼저 바로 됨으로 사회가 바로 된다는 진리'입니다. /아멘!/
  여기 27절에서 우리는 중요한 단어 하나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즉 보이고자 하는 마음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십니다. 인간 모두는 겉으로 아름답게 보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안에 외식과 불법이 가득한 것'이 문제입니다. /할/
  눅11:39절에서도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꾸짖으시면서 겉과 속은 정반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그들에게만 적용하고 끝나서는 안됩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속이 없을수록 겉을 포장하는 우리를 향해 하신 말씀이십니다.
  ▶어느 마을에 거대한 참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그 나무는 마을 사람들의 자랑거리였습니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있었고, 또한 그들보다 오래 살아 남을 것으로 모두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찬 폭풍이 나무를 반으로 쪼개고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나무의 썩은 속이 훤히 드러났습니다. 겉으로는 힘과 장수의 상징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병들어 죽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한 사람들을 외모로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할/
  ▶1775년에 볼티모어의 한 화려한 대형 호텔에 허름하게 차려입은 시골 농부 같은 사람이 방을 얻으려고 들어섰습니다. 그 호텔의 매니저는 그런 행색의 손님을 받을 경우 호텔품위에 손상을 입을까봐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그 손님은 바로 당시 부통령이었던 '토마스 제퍼슨'이었습니다. 겉만 보고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그가 어떤 집에 사느냐 또는 그의 학벌, 재산, 지위, 용모로 사람을 평가하고 대우해서는 안됩니다. /아멘!/ 이제 마지막 화인 일곱 번째를 보겠습니다.

 

  ▶29절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7화입니다. 그들은 선지자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만들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유대교의 전통은 추앙 받은 사람이나 영웅을 위해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 일은 그들의 전통적 관습입니다. 그리하여 성전 금고의 일부분이 그 일에 사용될 만큼 전 국민의 관심사요, 그런 까닭에 유대 사회에는 자연 무덤예술이 발달했습니다.
  특히 예루살렘 주변에는 많은 기념비와 무덤들이 있습니다. 스가랴, 압살롬, 여호사밧, 야고보 등의 흔적이 지금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무덤을 만들고 비석을 세운 근본적인 동기는 그 선열들의 발자취를 좇고 자신들의 그릇된 행위는 고쳐나갈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위선된 자신들의 신앙을 드높이려는 교만에서 비롯된 것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지금 장로교 여러 교회에서 서로 주기철 목사의 추모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서로 자기 파의 주기철 목사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한국 초대교회사에 보면 주기철 목사 생존시에 총회나 노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순종하지 않는다 하여 노회에서 제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서로 추모예배를 하느라고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래야 장로교의 정통 뿌리임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무덤을 쌓는 것입니다. /할/

 

  ▶30-31절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수없이 많은 선지자를 죽였습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은 자기 조상들과 같이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는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 조상들의 과거에 잘못을 인정하면서 현재 자기들이 같은 죄를 범하고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그리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할/

 

  ▶32절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여기에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①조상이 받아야 할 채찍을 너희가 받아야 된다는 저주입니다.
  ②이제까지 조상들의 저질러온 죄악을 이어 받아 더 많은 죄를 저질러 죄의 포화상태까지 채워보라는 말입니다. 저주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그들이 죄의 마지막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일'입니다. /할/

 

  ▶33절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창세기에 보면 가장 간교한 동물로 뱀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보고서에 의하면 지구상에 있는 뱀을 보면 약 15%만이 독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뱀의 특성을 보면, 첫 번째 지혜롭고 신중한 것을 볼 수 있고, 둘째는 간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웃어도 속에 독을 품고 있다면 독사인데, 오늘 주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뱀과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격노하고 계십니다. 아마 본문의 이 구절이 가장 강령하고 자극적인 말로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공격하신 것 같습니다.
  여기 '뱀과 독사'는 타락하고 저주받은 자를 상징합니다. 또 마귀의 하수인으로 취급합니다. 너희들은 지옥 불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저주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저주입니까? /아멘!/

 

  ▶34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난 뒤 일들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앞으로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은 내가 보낼 터인데 너희가 핍박하고 죽일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과거의 조상들도 그렇게 하였고, 현재의 너희들도 의인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음모하고 있고, 또 앞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면 너희들이 핍박하고 죽이고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내 몰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특히 베드로와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야고보, 스데반, 바울과 같은 초대교회의 기둥 같은 산 증인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 '내가...보내매...' 이 말은 현재형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회적인 파송이 아닌 지속적이고도 끈질긴 파송을 암시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끊임없이 당신의 종들을 지상에 파송하고 있습니다. /할/

 

  ▶35-36절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 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여기 '의인 아벨'은 아담의 둘째 아들로서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아벨이 하나님께 합당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열납하셨습니다. 그것을 보고 형 가인이 시기가 나서 아벨을 죽였습니다.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는 대하24:20-22절에 나오는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이며, 그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다가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에 맞아 죽은 사람입니다. '최초의 순교자 아벨로부터 성전 제단 앞에서 돌에 맞아 죽은 사가랴의 피까지 이 세대가 담당하여야 한다고 한 것은 죄를 이 세대가 공동으로 담당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할/
  누가 죄를 짓듯이 이 세대가 지은 죄는 이 세대가 담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역대 정권들이 죄를 지어 경제를 이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우리 모두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7화의 결론적인 저주로써 예수님은 일곱 가지 저주를 선언하시면서 그 대상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피 값을 받아야 할 대상이 이 세대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즉 그 시대에 살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가르칩니다. 이것은 죄에 대한 집단적 사회적 책임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할/ 이제 37-39절까지는 심판 받아야 할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이 통곡하시는 모습입니다.

 

  ▶37-38절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이 말씀 속에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 비통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선 '예루살렘아' 한 번 부르지 않고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두 번 부르신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서울을 보실 때 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서울아, 서울아, 서울아, 네가 십자가가 제일 많이 보이는 도시가 되게 하였거늘 제일 혼잡하고 범죄와 타락이 제일 많은 도시가 되었도다'하고 탄식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또 예수께서는 오늘 교회들을 보실 때 더욱 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실 것입니다. '교회여, 교회여, 교회여, 제 사명을 다 하지 못하는 한국의 교회들이여, 네가 너희를 부흥하게 하고 수가 많아지게 하였거늘 너희는 여러 가지 아름답지 못한 일들로 나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도다.'하실 것입니다.
  또한 예수께서 나를 보실 때 어떻게 보실 까요? 이 질문의 답은 우리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바라기는 예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안타까워하시지 않고 '김 집사야! 최 집사야! 나를 잘 믿고 나의 말을 잘 따르는 자여, 병아리가 암탉을 의지하는 것 같이 내 품안에 거하는 자여' 이렇게 칭찬하며 기뻐하실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죽임으로 반역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저주받은 도시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38절의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이 말씀은 주후 70년에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24:1절에 있는 대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고 철저하게 파괴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예수님은 예루살렘 주민들을 복음 아래로, 하나님의 보호 아래로 모으려고 했는데 예루살렘은 모이지를 않았습니다.
  그 결과 로마라는 사나운 독수리에게 채어가서 갈기갈기 찢어짐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죽인 죄로 그 피값을 톡톡히 받았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재판할 때, 아무리 보아도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아야할 죄목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보는 민중들의 폭동이 무서워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리고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이 죗값을 받으라'고 했을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인 죗값은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이 마27:25절에 나옵니다.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할/
  예수님을 죽인 죄 값으로 예루살렘이 무너졌는데 주후 70년 경 로마의 디도 장군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유대인들은 서로 살겠다고 시골에 있는 유대인들까지 다 성안으로 피신을 했습니다. 로마의 디도 대장은 예루살렘을 완전히 포위했습니다.
  이 상태에서 한달, 두 달도 아니고 무려 여섯 달 동안 그들은 성안에 꼼짝못하게 포위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1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 있으니 식량이 떨어졌고, 급기야는 자식을 잡아먹는 비극이 일어났고, 또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합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함락되어 로마 군에 의해 죽은 사람이 무려 100만 명이 넘고 살아 있는 사람 중에 젊은 여자와 남자들 중에 건강하고 그는 잘 생긴 사람들은 노예로 끌고 갔습니다.
  또 디도 장군은 예루살렘 성에 불을 놓고 파괴시켜 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의 비극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후 2천년 동안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고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유리 하는 민족이 되어 멸시를 받아왔으며, 제2차 대전 때에는 독일의 히틀러에게 6백 만 명이 학살당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죽인 죗값이 무섭게 치려졌습니다. /할/
  본문의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라는 이 말씀 속에는 한 사람이라도 멸망 받지 않고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곱 번이나 저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저주를 선포하시고 나서 바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신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예루살렘을 사랑하셨고,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셨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외침은 마치 눈물과 사랑의 호소를 그렇게 했건만 듣지 않고 타락하여 살인자가 되어 철창신세를 진 자식을 향해 통곡하며 한탄하는 어머니와 같은 심정을 토로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자식아, 이 자식아' 하고 소리 지르는 것과 똑같습니다.
  여러분, 그런 부모의 마음을 아십니까?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타락한 자식이 결국 매를 맞고 큰 곤경에 빠졌을 때 가슴을 찢듯이 애통하는 어미와 같은 마음이 우리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눅19:41절을 보세요!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는 예수의 모습이 나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죄악으로 인해 무너질 성을 보시고 주님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 눈물이 진정한 눈물입니다.
  제3공화국 초기 수많은 젊은 남녀가 광부와 간호사로 독일에 송출되었습니다. 정부는 이들의 임금을 담보로 차관을 들여올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보여준 근면성은 독일 국민들로부터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독일 정부가 박대통령을 국빈자격으로 초청했는데 당시에는 타고 갈 특별기 조차 없어 독일 정부가 제공하는 비행기를 이용했습니다. 박대통령은 광산촌을 방문했습니다. 조국의 대통령이 왔다는 반가운 소식에 일하던 광부들이 탄가루를 쓴 채 환영 장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이를 본 박대통령은 '조국이 못살고 가난하여'라며 슬픔에 목이 메여 더 이상 연설을 못했습니다. 광산촌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박대통령은 계속 눈물을 쏟았고 옆에 있던 70세의 뤼브케 대통령은 손수건을 꺼내 박대통령의 눈물을 닦아주며 '울지 마세요, 잘 사는 나라를 만드시오'라며 위로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대통령의 눈물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눈물이 절대 필요한 때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눈물은 있어도,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자 하는 거룩한 눈물이 사라진지 오래되었습니다.
  눈물은 가장 진실한 언어입니다. '눈물의 어머니가 있으면 자녀는 망하지 않는다'고 어거스틴의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아일랜드 속담에 '흐르는 눈물은 괴로우나 그 보다 더 괴로운 것은 흐르지 않는 눈물'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무너져 내릴 성을 보고 우신 것처럼 우리도 멸망으로 달려가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래 눈물로 기도해야 될 줄 믿습니다. /아멘!/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 아담이 타락한 이후 계속 자기를 백성에게 선지자들을 보내 구원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유감스럽게도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은 환영하지 않았고, 그들의 말도 듣지 않았으며 오히려 돌로 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보게 됩니다. 닭이 얼마나 병아리를 사랑합니까? 또 '몇 번이냐?'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인내를 보게 됩니다.
  또 37절에서 우리는 또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오셨습니다. 구원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까? 유대인으로부터 시작되어야 옳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제일 먼저 환영하고 받아들이고 기뻐해야 할 유대인들은 그 복된 복음을 거절하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할/

 

  ▶39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본문은 해석하기 어려운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전문가들은 복음운동이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로마, 유럽, 미국, 한국을 거쳐 지금 사회주의 권인 중국에서 왕성한데 다음은 회교권,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유대교권인 팔레스타인에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그 때까지 예루살렘 주민들은 복음에 접하지 못할 것을 뜻한다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역사의 마지막 때에 주님의 재림 때에 이스라엘이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말하게 된다는 예언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너희들은 나를 볼 수 없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가를 쉽게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절대 버리지 않으시겠다는 각오가 서려있는 예언입니다. 롬11:1을 보세요!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할/
  롬10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스라엘이 불순종하므로 구원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로 퍼져나갔음'을 말했습니다. 바울은 선민 이스라엘이 스스로 하나님이 주신 모든 특권을 포기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인에게 넘어갔음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시는 것이 아닌가?'하는 가상의 질문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대해서 답하는 형식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버리셨느뇨?'고 묻자 '그럴 수 없느니라'고 회개를 각성하라는 메시지를 주신 것입니다. 렘5:1절에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절대로 버리지 않으십니다. 시27:10절에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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