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강) 위선자들을 책망하신 예수님! (마 23:1-12)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7절까지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외식과 위선에 대하여, 8-12절은 성도의 바른 자세에 대하여 입니다.
이 세상에는 남을 지배하고 또 섬김을 받는 자가 위대한 자 같고, 또 높은 자 같이 보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큰 자와 같이 여겼고, 더 큰 자로 인정받으려고 자기를 과시하는 외식에 빠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참된 신앙과 거짓된 신앙에 대하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비유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대게 보면, 사람들은 처음에는 순수하게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한참 지나다보면 어느새 우리의 신앙이 변질되어 '타협주의로 빠지고, 편리주의로 빠지고, 자기 합리주의로 빠지는 경우'를 보게됩니다.
그런 위선에 빠져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는 예수님은 새로운 참된 신앙의 표준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할/ ◀제목 소개!▶
오늘 본문에 배경은 예수님께서 고난주간인 화요일에 많은 교훈을 하시는 중,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외식에 대해 경고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외식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외식은 자기를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가장 어리석은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위 종교인들이 범하기 쉬운 죄가 바로 외식과 교만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이 되어야지 종교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종교인이 아닙니다. 종교인은 자기들의 노력으로 도를 닦는 자들입니다. 불교는 석가모니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말하는 바로는 '석가모니는 첫 부처이고, 불자들은 앞으로 석가모니처럼 되어질 부처'라고 말을 합니다.
종교인은 '자기의 노력으로 하나님이 되고자 수양을 기울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은 '자기의 무능을 알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사람들이지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어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멘!/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일종의 종교인으로써 여러 계율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잘 지키면 된다고 하는 형식 논리에 빠진 자들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무엇을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종교인이 아니라 신앙 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할/
▶1절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여기 '이에'는 시간에 대한 상관적 부사입니다. '그때, 그 후, 그 다음, 그리고'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 다음' 또는 '그리고'의 뜻으로 해석하면 큰 무리가 되지 않습니다.
앞에서 배운 대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여러 가지를 변론했습니다. '세금에 대한 논쟁, 부활에 대한 논쟁, 큰 계명에 대한 논쟁'을 가지고 나왔지만 그때마다 예수님의 바른 진리로 그들을 가르쳐주자,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누구의 후손으로 온다고 했느냐?'고 질문하자, '다윗의 후손'이라고 대답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구약의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여 육신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지만 그의 본체는 신성을 가지신 3위1체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시면서 그분이 바로 자신임을 암시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아무소리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그 사건 뒤에 오늘 본문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무리와 제자들' 성경에 보면 무리와 제자들로 나누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 '무리'는 누구인가?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이나, 또는 무엇을 얻어먹으려고, 또 치료를 받으려고 따라 다니는 자'들이고, '제자'는 예수님께서 '택하여 세운 자들과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아멘!/
▶2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본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직분을 맡은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의 말씀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풀어 해석하여 가르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도록 인도할 책임이 있는 그런 위치에 있는 그런 자들입니다.
이런 전통은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낭독한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부터 이어져 오던 것으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바로 이런 전통을 이어갈 책임을 간직한 그런 자들이었습니다. /할/
그러니까 여기 '모세의 자리'는 지도자의 자리이며, 율법의 자리입니다. 이 말은 더 쉽게 하면 그들이 마치 '신앙과 생활의 기준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바로 가르치고 바로 행해야 되는데 말과 행동이 따로따로 입니다.
가르치는 자를 우리는 지도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도자는 바로 가르쳐야 합니다.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에 가서 흑인들을 위하여 일생을 희생한 사람으로 성자라고 부릅니다. 그는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사람이었으나 그가 가르친 것은 정통 보수 신학이 아닌 신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아무리 성자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가르치면 사탄에 종이 됩니다. 그래서 신학 면에서는 보수 신학과 충돌을 합니다.
①서기관은 율법학자들은 말합니다.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해석하여 사람들에게 잘 가르쳐 줄 수 있게 하는 해석전문가입니다. 서기관의 기원은 에스라서에 저자인 에스라입니다.
그는 제사장으로써 율법에 능한 학자였으며, 그가 바벨론 제 2차 귀환 시 5천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와서 성전을 재건하고 신앙의 재건도 같이 했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연구하여 가르쳤는데 그때부터 서기관 혹은 율법학자라고 불렀습니다.
②바리새인들은 서기관들이 해석한 율법의 모든 규칙과 규례를 그대로 지키려고 평생을 노력하는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입니까? 그러나 이렇게 좋은 위치와 권위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실제로 거짓신앙을 대표하는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행위를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했습니다. 금식하는 것을 자랑했고, 기도할 때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 어귀에서 큰 소리로 기도했고,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표인 경문도 크게 달고 다녔고, 성경구절은 옷에다 주렁주렁 달고 다녔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어떤 만찬회식에서는 상석을 차지하기를 좋아했고, 회당에서도 제일 상좌에 앉아서 경건의 자태를 과시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또 바리새인들은 랍비라 칭함 받기를 좋아했습니다. 한마디로 대단히 존경받고 싶어했습니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었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기독교의 최대의 위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경건의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했을 때 엄청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돈이 없었습니다. 권력도 없었고, 집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할/
신앙이란 겉으로 보이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내면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중요합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거룩한 종교의 옷, 거룩한 율법의 옷, 하나님의 옷을 입었지만 내면에는 인간적인 명예심과 체면 그리고 더러운 욕망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은 상실한 자'였습니다. 3절을 보면 거짓된 신앙을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3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하고 행치 아니하며"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인격이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그들이 가르치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면 그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말씀과 일치하지 아니하므로 그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주의 종의 행위가 잘못된 것이 일을 지라도 그 가르치는 성경말씀을 받아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교역자의 못된 행위는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저희는 말만하고 행치 아니하며' 흔히 우리는 농담할 때 무엇을 준다고 해 놓고는 '그래 말로만 줄께'합니다. 신앙은 말과 행함을 일치로 봅니다. 그래서 약 장로님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음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첫 번째 그들을 책망하신 항목이 바로 외식주의였습니다. 가르치기는 잘 가르쳤는데 그들의 행동은 엉망이었습니다. 이들을 가리켜 외식주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위선자라는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위선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이 말은 연극배우라는 말입니다. 연극배우는 자기 마음 속에 아무리 슬픔이 있어도 시나리오대로 웃어야 합니다. 또 반대로 아무리 기쁘고 좋은 일이 있어도 그 시나리오대로 울라고 하면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눈물이 안나오면 하다 못 해 안약을 넣어서라도 울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연극배우입니다.
이렇게 자기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마음의 중심과 겉이 불일치할 때에 그것이 바로 위선인 것입니다. 위선은 자기는 그렇게 살지도 못하면서 진실하게 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은데 우리는 위선자라고 합니다.
국민을 위해 봉사한다고 큰소리치고는 부정축제를 일삼는 정치가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위선자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가장 첫 번째로 지적한 것이 말만하고 행치 않는 위선에 대하여 지적했습니다.
4절에서는 사랑의 부족에 대하여 예수님이 지적하고 계십니다.
▶4절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바리새인들은 자신에게는 관대하면서도 남에게는 엄격했습니다. 무거운 율법의 짐을 남에게 지우며 순종하라고 명령만 하면서도 자기는 그것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지도자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주의 종들이 잘못하면 이러한 자리에 빠지기 쉽습니다. 성도들에게는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하면서도 자기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바리새인의 죄 가운데 빠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11: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지도자입니까? 여기 '또 무거운 짐'은 율법의 무거운 짐을 말합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울타리 율법'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613개의 율법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분석해서 '하라는 율법과 하지 말라는 율법'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몸의 구조가 코, 눈, 입, 손가락, 발가락 등등 전부 248개의 구조로 되어 있다고 해서 248개의 '하라'고 하는 적극적인 율법을 찾아냈습니다. 또 '하지 말라'는 율법은 365개입니다.
1년 365일과 똑같습니다. 이렇게 하라고 하는 율법과 하지 말라고 하는 율법을 전부 합치니까 613인데 그것도 부족해서 마치 우리가 짐을 보호하기 위하여 울타리를 쳐 놓듯이 율법마다 전부 울타리를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안식일 율법에 따라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39가지의 규정을 또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이 몇 개인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렇게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잔뜩 만들어 놓고 저희들을 손가락하나 까닥 안하고 즉 저희들은 하나도 행하지 아니하면서 성도들만 달달 볶습니다. 이것이 그 당시 소위 종교지도자들이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율법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하게 깨닫도록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죄를 범했을 때에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율법의 기능이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깨달은 죄인이 죄 사함의 은총을 경험하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다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은혜의 통로가 바로 율법입니다.
하지만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이런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율법의 조문을 '문자 적으로 지키느냐 또는 그렇지 않느냐'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율법을 통한 죄 사함의 은혜를 경험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조항들을 가지고 백성들을 정죄하고 그들에게 죄책감의 짐만 더한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에 의도한 것과는 거리가 먼 장로들의 유전과 자신들의 선배들이 남겨준 여러 부수적인 조항들을 첨가하여 사람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윤리적인 책임의 짐을 사람들에게 지웠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율법의 해석자요 율법을 맡은 자라고 자처하면서 자신의 의로움과 거룩함을 자랑하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예수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많은 율법을 누구 한 사람은 온전히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 율법을 다 완성하셨습니다.
롬10:4절에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의 율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으면 그 율법을 지키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믿/
여기서 예수님은 소위 종교지도자들이라고 자처하는 그들의 겸손의 부족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겸손의 반대는 교만인 것을 잘 알고 있지요, 지금 예수님은 그들에게 진실성이 없는 위선자인 것과 동정심이나 사랑이 없는 것을 지적하셨고, 5-7까지 에서는 그들의 교만을 꾸짖고 계십니다.
여러분, 사탄마귀가 사용하는 가장 무서운 무기가 바로 교만입니다. 그 당시 최고의 종교 지도자들이라고 자처하는 그들에게서 전혀 겸손함을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할/ 우리 모두 5-7절을 읽겠습니다.
▶5-7절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예수님은 그들의 신앙의 잘못된 부분을 여섯 가지로 지적해 주셨습니다.
①5절을 보면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고자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경문'이라고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종이를 작은 상자에 넣어 이마와 손목에 거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종교적인 전통이었습니다.
이 전통은 신6:4-9절에 나오는 소위 '쉐마'라고 부르는 가르침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그러니까 이 경문은 조그마한 상자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해서 넣은 것인데, 그것을 이마에 차기도 하고 손목에 붙이기도 합니다. 이 유례는 출13:9절에 하나님의 명령에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으라'는 말씀에 유래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는 표시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바리새인들은 이 상자를 크게 만들어 자기들만 하나님의 말씀을 굉장히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외식적인 행동을 한 것입니다.
지금 주님이 그들의 이 외식적인 행동을 질타하고 계십니다. 그들의 외식을 질타하신 주님은 오늘 우리들의 외식주의를 무섭게 보게 계시는 분이십니다. /믿/
②'옷 술을 크게 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옷의 술'은 민15장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계명에 나타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그러니까 '옷 술'은 율법을 기억하고 지킨다는 뜻으로 겉옷 귀퉁이에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푸른 실로 장식한 것인데 이것은 율법을 사랑한다는 표시입니다. 그 당시 옷 술에 정해진 규격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 옷 술도 크게 만들어서 자기만 율법을 사랑하는 것처럼 더 생색을 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문을 차고 다니라고 명령하신 것이나 옷단에 술을 달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과 뜻에 두도록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경문을 이마와 손목에 고정시키는 끈을 넓게 만들어서 마치 왕관처럼 쓰거나 화려한 장식처럼 매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옷단에 매는 술을 더 화려하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잘 띄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잘 준행하는 거룩하고 경건한 자임을 자랑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은 경문을 차고 옷단에 술을 달라고 하신 하나님의 본심을 잊어버렸고 경문에 담겨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조차 무시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이처럼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본래의 의미를 왜곡시키고 또 그 율법을 자신들의 권력과 명예를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고 그것으로 자기 자신을 거룩하고 의로운 존재로 포장하는 데에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교만입니다. /할/
③잔치의 상석에 앉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세속적인 영광을 취하는 것입니다. 국가의 행사나 어떤 기관의 행사 때 이 자리배석가지고 신경전을 많이 쓰는 이유가 자리 배치에 따라 그 사람의 파워가 결정되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④회당의 상좌에 앉았다고 했습니다. 회당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곳인데 그곳에서도 그들은 상좌에 앉아야만 했습니다.
⑤시장에서 사람들에게 인사 받은 것을 좋아했다고 했습니다.
⑥랍비라는 말을 듣기를 좋아했습니다. 랍비라는 말은 선생님이란 말인데 지금 선생님들은 그 위치가 땅에 떨어졌지만 그 당시 랍비의 위치는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요즘 한국 목사님이 좋아하는 칭호가 있는데 그것은 박사 칭호를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그러나 박사보다 목사가 더 위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6가지를 지적해 주시고 오늘 우리를 향하여 주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8절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①'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여기 랍비는 선생이라는 말로 선생은 전문가라는 의미로 '너희가 혹 성경을 좀 잘 안다고 지식이 좀 많다고 다른 사람을 깔보지 말라, 자기 전공에 겸손하라는 것, 마음을 낮추라는 것'입니다.
②'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참된 선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고 모든 성도는 다 형제들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선생으로 모시고 그의 가르침을 좇고 그의 인도만 받아야 합니다. 목사와 교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해주는 일꾼들입니다. /아멘!/
▶9절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땅에 있는 자는 신앙의 아버지라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카톨릭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신부라고 할 때 '부'자가 아버지 부자입니다. 그래서 영어로 부를 때는 파더라고 부릅니다. 아버지란 뜻입니다.
아버지란 뜻은 생명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어디서 왔습니까?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믿/ 그러므로 믿음의 아버지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아멘!/
▶10절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지도자는 인도자입니다. 성도의 인도자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누가 우리의 지도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어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할 수 있습니까? 세상은 '지식의 이름으로, 돈의 이름으로, 권력의 이름으로, 지상에는 너무나 많은 계급'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계급이 교회까지 들어왔습니다. 목사가 높고, 장로가 그 다음이고, 안수집사, 권사, 서기집사, 이렇게 계급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직책이란 봉사를 위해 있는 것이지 계급이 아닙니다. 직책이 높으면 지도자는 군림합니다. 이북을 보세요! 김일성을 가리켜서 그들은 '위대한 수령 아버지'라고 하고, 김정일을 가리켜 '위대한 지도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참 지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갑니다. /할/
그러니까 8-10절까지의 이 말씀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제자들에게 세상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관계의 본질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태어난 새 피조물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높은 자도 없고, 앞선 자도 없으며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이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존재들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죄의 용서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의 은총을 덧입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할/
사도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한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자들에게 천국 복음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참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참 스승이 되시어 우리를 친히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안내자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특권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늘 나라의 유업과 영광을 누리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바울과 같이 겸손한 마음으로 나의 나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아멘!/
하늘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은 또한 자기를 낮추고 섬기는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원리를 11-12절에서 결론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11-12절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님께서는 이 원리를 직접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할/
또한 예수께서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 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시면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몸으로 순종을 보이신 예수님의 섬기는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가 하늘의 원리를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묵상하며 그를 푯대로 삼아 삶의 우선순위와 자신의 말과 행동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폴 발레리'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용기를 내어 그대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 않아 그대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할/
우리는 그리스도인이지만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익숙해져버린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들에게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을 것을 요구하고 또 그렇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보다 높은 곳에 올라야 하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 하며 권세와 명예를 차지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소리칩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며 어떤 말을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 혹시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시대의 흐름에 자신을 내어 맡긴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하늘의 원리를 따르는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참 마음을 깨닫고, 겸손하게 이웃과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섬김의 도고를 실천하는 삶입니다. /할/
그렇다면 누가 과연 큰 사람입니까? 자기를 높이는 자가 아니라 자기를 낮추는 자라고 했습니다. 바로 겸손입니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덕도, 두 번째, 세 번째 덕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인간 나름대로 높아지는 방법을 구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친 진정한 위대함은 다른 사람에게 섬김을 받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는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막10:43-45절에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 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평생 섬기는 태도로 사셨고, 십자가를 앞에 놓고 제자들에게 실천에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요13:13-15절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서로 대조되는 노벨 수상자 두 사람이 있습니다. 알베르 꺄뮤와 알버트 슈바이처입니다. 꺄뮤는 무신론자로써 그 탁월한 문필로써 노벨 평화상을 상급으로 파리 교외에 고급 별장을 짓고 최고급 승용차를 뽑아 뽐내고 다니다가 충돌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슈바이처 박사는 그 상급을 가지고 미지의 아프리카에 건너가서 흑인들을 치료해 주었고, 사랑을 실천한 자가 되어 20세기의 성자가 된 것입니다. 슈바이처는 남을 섬기다가 성자가 되었고, 꺄뮤는 자기만 섬기다가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베이컨'은 이 세상에는 세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거미와 같은 사람, 개미와 같은 사람, 꿀벌과 같은 사람'을 예로 들었습니다.
여기 거미와 같은 사람은 세상 사람들에게 독을 줍니다. 개미는 부지런하지만 자기만 위해 일합니다. 그러나 꿀벌은 자기도 먹고 남을 줍니다. 우리는 꿀벌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아멘!/
예수님은 또 본문에서 자기를 낮추는 삶이 높아지는 비결이라고 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의 삶의 철학과는 정 대조적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낮추는 삶을 살았습니다. '죄인의 괴수라고, 만삭되지 못한 자,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중에 작은 자'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작은 자인가? 아닙니다. 큰 자입니다.
벧전5:6절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아멘!/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란 본받을 것을 본받고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을 본받지 않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본받아야 할 것을 본받지 않고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을 본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앵무새를 훈련시켜서 파는 상점이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축복 받으세요' 이렇게 말을 가르쳐 비싼 가격에 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집사 댁은 부부 싸움이 심하여 앵무새가 밤낮 그 소리를 듣고 살았습니다. '이 새끼야, 이 년아'
목사님이 심방을 갔더니 앵무새가 말했습니다. '이 새끼야, 이 년아' 그러자 목사님이 '김 집사! 이 앵무새 없애라. 손님 올 때마다 이럴 터이니 얼마나 창피하냐?' 김 집사가 '정 들었어요' 그러면서 김 집사가 '좋은 수가 있어요. 목사님 앵무새를 일주일만 빌려 주세요'
그래서 목사님이 앵무새를 빌려 주었습니다. 일주일 후에 목사님이 앵무새를 찾으로 갔더니 목사님 앵무새가 목사님을 보자 말했습니다. '이 새끼야, 이 년아' 그럽니다. 얼마나 창피한 일입니까?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을 본 받고, 본받아야 할 것을 본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 지요? '흉보면서 배운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구박받는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흉보면서 자기가 시어머니가 되면 며느리를 구박합니다. 이거 안됩니다.
우리는 외식주의자들인 바라세인과 서기관을 본받아서는 안 됩니다. 사도 베드로를 본받고, 바울을 본 받고,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만 바라보고' 달려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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