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창세기·사도행전강해설교

[스크랩] (제7강) 예수를 증거하는 베드로! (행 2:22-36)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25. 12:18

《제7강》   예수를 증거 하는 베드로! (행 2:22-36)

 

  세계를 제패하였던 알렉산더 대왕의 이야기입니다. 지혜로운 신하에게 대왕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정치를 잘 할 수 있겠는가?" 그 신하는 죽은 해골을 가지고 와서 말을 합니다. "이 해골을 책상 위에 놓고 정치를 하십시오"
  그 후 알렉산더는 해골을 책상 위에 놓고 정치를 했습니다. 그는 그 해골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다짐을 했습니다. '나도 이렇게 될 것이니 다 버리고 오직 정치만 잘 하자'고 다짐한 것입니다. 그래서 해골이 될 몸이니 전리품은 하나도 갖지 말고 다 싸운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깨끗한 정치를 했습니다. 모두를 버리고 오직 한 가지에만 전념했습니다.
  그는 마지막 죽음 앞에서 '빈손 들고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라면서 관에서 양손을 내놓게 했다고 합니다. 위인다운 삶의 철학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삶의 철학이 있습니다. 골3:2절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했습니다. '위를 보라'고 했습니다. '위엣 것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귀한 것은 모두 위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믿/
  여러분, 세상에서 참되고, 신령하고, 값이 있는 것은 모두 썩어질 세상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저 높은 곳으로부터 오고, 위로부터 내려옵니다.
  '위엣 것을 찾으라'는 말은 '삶의 초점을 저 높은 곳에 두고 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귀하고, 신령한 것들은 모두 저 높은 곳으로부터 주어지기 때문' 입니다.
  만나가 거기로부터 내려 왔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모두 거기로부터 왔습니다. 헐몬산의 이슬이 모두 거기로부터 내려옵니다. 이 다음 주님도 그곳으로부터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래서 '존슨 오트만'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하고 노래했습니다. 시121:1-2절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부터 온다" 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위를 보고 사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안드로포스'로 '위를 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할/ ◀제목소개!▶
 
  베드로의 제 일 대지의 설교는 성령을 증거 했습니다. 사도들의 방언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저들이 대낮부터 술에 취했다고 몰아세웠습니다. 베드로는 냉정하게 그러면서도 확고하게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로는 제자들이 제3시부터 술에 취했다고는 볼 수 없고, 둘째는 제자들에게 구약 요엘2:28-32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오순절에 나타난 역사는 바로 구약 성경의 예언 성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에서는 베드로의 설교 제 이 대지로 넘어갑니다. 본문의 베드로의 설교는 세계에서 최초로 행한 복음 적인 기독교 설교입니다. 즉 베드로의 첫 전도설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전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베드로의 설교의 주제는 한 마디로 '예수'입니다. 그의 설교의 본문은 구약 시편의 말씀을 본문으로 삼고 예수님의 생애와 그 구약의 예언의 말씀을 비교함으로써, 이 예수님이야말로 '주와 그리스도'되신 분이라고 증거한 것이 바로 신약교회의 최초의 공식 전도설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단순한 설교가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심령을 감동시킴으로써, 예루살렘 교회는 그 날 하루에 삼천 명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할/


  ▶22절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성령사건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요 연속된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가 없는 성령 사건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교회들마다 성령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성령 운동과 성령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데 있고, 영화롭게 하는데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말을 들으라!" 4절에서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했습니다. 설교는 듣는 것입니다. 들어야 이해가 되고 들어야 은혜가 되고, 들어야 믿음이 생기고 결단이 생깁니다. 듣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4가지 유형의 설교가 있습니다.
  ⑴케리그마: 실제로 본 것을 선포하는 설교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행하신 기사와 표적들이 많았습니다. 이 사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⑵디다케: 가르침입니다. 선포된 사실의 뜻과 의미와 내용을 설명하고 질문을 하고 답변을 하는 문답식 설교를 말합니다. 부흥회 때나 세미나 때 이런 설교를 많이 사용합니다.
  ⑶파라 클레시스: 권고, 근면입니다. 성도의 의무와 책임과 사명을 다하도록 권고, 권면하는 설교입니다.
  ⑷호밀리야: 인생의 모든 분야를 성경 본문을 통해서, 기독교 입장에서 다루는 설교입니다.
  완전한 설교는 이 4가지가 다 내포된 설교라야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이 4가지가 잘 배열된 설교입니다.
  베드로는 누구에게 설교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사람에게'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그 당시 유월절 행사에 15개국으로부터 찾아온 동족들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릅니다.
  이 존칭은 무엇입니까? '너희 모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들으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를 통하여 큰 권능과 이사와 표적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증거한 것입니다. 즉 '나사렛 예수'라는 명칭 자체가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예수님의 생애는 그저 평범한 것이 아닙니다.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으로 가득 채워진 생애입니다.
  사복음서에 기록이 모두 예수님의 '큰 권능과 기가와 표적' 사건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그것을 두고 베드로는 '너희도 아는 바'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행하신 기적들은 '너희 가운데서 베푸신'것, 즉 그들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것들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기사와 표적을 부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사와 표적은 인정을 하면서도 다만 '바알세불'에 힘입어 행하였다고 비난했습니다(마9:34).
  베드로는 예수님의 기사와 표적을 근거하여 설교한 것은 예수님의 메시아 성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그분은 메시야이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는 바'라고 한 것은 그들이 알기는 알면서도 믿지는 않는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으로 끝나야 합니다.
  본문 22절은 '공동 성경 번역'에서는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내 말을 들으시오. 나사렛 예수께서는"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설교 서두의 말은 한마디로 예수님이십니다.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예수님이십니다. '복음, 복된 소식, 기쁜 소식, 예수 소식' /할/
  행8:26절 이하에 보면 에디오피아 국고 장관인 내시가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고 돌아가는 길에 병거에서 이사야 53장을 읽으면서 갑니다. 그때 빌립집사가 그 병거로 가까이 가서 물었습니다.
  "당신이 읽고 있는 말씀 중 주인공이 누군지 아시오?"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어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이때 빌립은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빌립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예수님의 좋은 소식을 전해준 것입니다.
  바울은 롬1:1-4절에서 "이 기쁜 소식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에 관하여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22절에 다시 한 번 정리합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는 '이는 내가 보낸 그리스도니라!' 그 증거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행하심으로 증거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이로 5천명을 먹이시고 열 두 광주리를 남기는 큰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또 기사를 행하셨는데, '기사'란 주로 자연계에 일어나는 이적을 말하는 것으로 "바람아! 잠잠 하라! 풍랑아 멈춰라!"고 명하실 때 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 다음 '표적'은 주로 사람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문둥병이 낫고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소경이 눈을 뜨고, 죽었던 사람을 살리는 표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나사렛 예수를 통하여 행하셨던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은 예수님의 사역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메시아이심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23절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정하신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하고 싶어했습니다. '아버지여, 이 십자가를 피할 길은 없습니까?'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마26:39)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십자가를 지려고 오신 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요 구원의 계획입니다. 그래서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된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법 없는 사람은 율법을 모르는 로마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 법은 세상의 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놓고도 말씀을 모르는 저들 로마인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주어 죽였습니다.
  다시 정리해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뿐 아니라 그의 죽으심도 역시 예수님이 '재수가 없어서'도 아니며 예수님이 '실패해서'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라는 말은 현실적으로는 유대인들이 로마인들의 손을 빌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그것까지도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원래 정해 놓으신 계획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섭리에 따른 것이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24절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베드로의 설교의 초점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에 있습니다.' 베드로는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음이니라!'고 밝혔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롬1:4절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렇습니다. 마귀는 예수를 사망의 공통 속에 집어 놓고 빗장을 걸었습니다. 죽음이라는 빗장을 예수께 걸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를 죽음의 무덤에서 계속 머물러 있게 하신 것이 아니라 삼일만에 '사망의 고통의 빗장을 열어 주셨기 때문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주께서 부활하신 사건은 그분이 '죄가 없으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설교의 핵심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신' 역사이었고, 부활의 당위성에 대하여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인간을 죽음에서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 되신 그 예수님 본인이 죽음에게 매여 있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활 사건이야말로 예수님이 그 약속하신 메시아였다는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증거 해 주는 '증거 제1호'가 되는 것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23-24절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사람의 계획으로 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바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우연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속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행3:19절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의 죄 값을 청산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인류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독생자 외아들을 아낌없이 주셨습니까? 너무나 감사할 뿐입니다. 죄는 무섭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에 저촉되는 죄를 범하였으면 자기가 사랑하는 소나 양을 가지고 와서 제사장에게 나아가 그 사연을 말한 후에 그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고 흔들어 자신의 죄를 그 짐승에게 돌리고 제물을 죽여 그 피를 제단에 뿌리고 그 뼈와 살을 제단 위에서 태움으로서 속죄를 하였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까지 연날리기를 하는 풍속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깊은 종교적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연을 몇 날 며칠 날리다가 대보름날에 이르러는 그 꼬리에 일 년의 액땜을 기록하여 높은 창공에 날려 연줄을 끊음으로 저 보이지 않는 바다와 깊은 산 속에 떨어지게 해서 일 년의 화를 소멸하는 뜻으로 띄웠다고 합니다.
  이렇게 죄 문제를 두고 온 인류가 각각 나름대로 사죄의 길을 찾았지만 그것은 진정 죄 사함의 효력이 없습니다.
  히10:4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히브리 기자는 이 말씀을 설명하면서 "예수님은 우리의 범죄 함을 인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의 의를 다하심을 위하여 다시 살아 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몇 가지로 생각해 보자!
  ①주께서 '생명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성취하신 사건입니다. 요10:18절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②하나님과 하나로 연합된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③성도의 부활은 구체적으로 확증해 주신 사건입니다. 요14:19절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고전15:20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또 23절에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할/ 그렇습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할/ 

 

  ▶25-28절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사도 베드로는 여기서 놀랍고도 절묘하게 구약성경에서 다윗의 부활신앙을 안용하고 있습니다. 시16:8-11절을 인용한 것인데 다윗이 쓴 이 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시편을 인용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구약의 예언의 성취임을 증명하는 게 그 목적이 있으나 유대인들이 베드로에 대한 편견을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다윗 왕의 말을 인용함으로 없애 주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16편에서 다윗 자신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혈통에서 오는 메시아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시16편은 메시아의 대표적인 시입니다.
  25절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다윗은 벌써 영적으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본 사람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날마다 영적으로 '내 앞에 계신 주'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시고 주님과 가까이 하는 성도와 함께 하십니다. /믿/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얼마나 멋있는 신앙의 고백입니까? 다윗은 예수가 십자가에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지금은 우리 주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믿/ 우리가 그분의 보호 속에 있기 때문에 요동치 않습니다.
  26절의 "이러므로"는 주께서 항상 내 우편에 계셔서 요동치 않게 하시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항상 주 앞에 있을 때에 주님은 나로 요동치 않게 하여주시고 또 우편에서 나를 붙들어 주시므로 마음이 기쁘고 입술도 즐거워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육체도 희망에 거하게 됩니다. 잠4:22절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얻은 자에게는 그것이 자신에게 생명이 되고 육체의 건강이 된다는 것입니다. '육체가 희망에 거한다.'는 말씀의 더 큰 의미는 '육체는 썩을 수밖에 없지만 부활이라는 소망이 있기에 기쁨과 희망이 넘친다'는 의미입니다.
  어찌 세상에 기쁜 일만 있겠습니까? 눈물날 일도 있고 고통스러운 일도 있고 여러 가지 실수도 있고 수치스러운 날도 있고 병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을 가진 성도는 '그 마음이 기쁘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부활 신앙 때문에 감옥 안에서도 우리를 향하여 권면하기를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4-5)고 했습니다. 
  27절에서는 성도의 영혼은 절대로 음부에 버려지지 않습니다. /믿/ 그 이유는 예수 부활은 내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한 것입니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을 천 년 전에 예언했습니다. 그 예언이 성취되어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고 베드로는 설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다윗이라면 꾸뻑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다윗의 시편을 들어 그들은 이해시키고 있습니다. 
  28절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다윗은 그 당시도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주께서 부활을 주셔서 영생의 길을 주셨기 때문에 기쁨이 충만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의 길을 발견한 사람은 기쁨이 충만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기쁨의 비결을 압니다. 아무리 오래 산 사람이라도 내일 죽는다면 절망입니다. 그러나 요11:25-26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어도 살겠고' 예수님께서 영원한 세계를 약속해 주셨기 때문에 충만한 기쁨에 거할 수가 있습니다.
  ▶불교는 윤회로부터 해탈을 지향하는 종교입니다. 무엇으로부터의 해탈인가 하면 바로 윤회로부터의 해탈입니다. 즉, 반복해서 죽고 태어나는 생사의 윤회로부터 해탈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윤회설은 다음 '여섯 세상 사이'를 영원한 옛날부터 영원한 미래에 걸쳐 계속해서 '윤회 전생 한다'고 말합니다.
  ⑴지옥: 중생이 자기가 지은 죄 업으로 가는 곳으로 지하의 세계라고 하는데 모두 136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⑵아귀: 파율의 악업을 지어 아귀들에 빠진 이들의 세계는 늘 굶주리는 곳이라고 합니다.
  ⑶축생: 짐승의 세계입니다.
  ⑷수라: 악귀와 괴물의 세계입니다.
  ⑸인간: 인간 세계입니다.
  ⑹천상: 하늘에서 사는 자들의 세계입니다. 즉 신들의 세계를 말합니다.
  이들 가운데 인간계와 축산 계는 우리의 육안으로 직접 보고 있는 세계이지만 그 나머지는 상상의 세계입니다. 윤회설에 따르면 생명이 태어나고 죽는 것은 반복하면서 6개의 세계를 항상 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인간계에 살고 있는 인간도 죽으면 생전의 업, 즉 행위에 따라 여섯 세계 가운데 어느 한 곳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인도인들은 '사는 것은 윤회이며, 윤회는 커다란 고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교는 해탈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해탈이란 '두 번 다시 생명을 부여받지 않고, 두 번 다시 생존하지 않으며 윤회의 '윤'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집착과 욕망과 번뇌의 끝을 자르면 생사윤회로부터 해탈에 열반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열반이란 해탈한 상태를 말합니다. 열반에 대한 불교계의 해석은 '기쁨도 슬픔도 없는 절대적인 정적 즉, 절대적인 무의 상태라고 해석'합니다. 열반이란 말은 '꺼져버린 상태'란 뜻입니다. 기독교의 영생의 기쁨과 불교의 열반의 기쁨은 정반대입니다.

 

  ▶29절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형제들아!" 앞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아 라고 불렀는데 이제 형제로 부름으로 더욱 친밀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여기서 베드로는 조상 다윗에 대하여 말할 때 '이스라엘의 왕통의 선조로서 존경하는 다윗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다'는 겸손의 표현입니다.
  "다윗이 죽어" 무슨 말씀입니까? 27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이 말은 자기 자신(다윗)에게 한 말이라면 다윗은 이미 천 년 전에 무덤 속에 들어가 썩어진 묘가 우리 곁에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도 다윗의 무덤이 실로암 못 남쪽에 있는데 유대인의 성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30절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선지자'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사람을 의미하며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을 예언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사람을 말합니다.
  지금 베드로는 다윗을 가리켜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선지자라면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 왕권을 영원히 계속할 것을 깨달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31절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다윗은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미리 보고 그리스도의 육신이 썩음을 당치 아니하리라는 예언을 했습니다. 여기 '음부'는 '스올'이라는 말로 '무덤, 죽음의 상태' 지옥 등을 가리킵니다.
  요나서에서는 고기 뱃속을 스올로 표기했습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무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빈 무덤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무덤에서 예수님의 뼈가 나왔다면 기독교는 끝나버리고 맙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32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예수께서 살아나신 것은 제자들이 보았는데 다윗이 예언한 그대로 딱 맞아 떨어졌으니 이 예수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메시아이시므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하는 자가 된다고 베드로는 설교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살리신 일'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입니다. 증인은 부활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성도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입니다. /믿/
  가장 힘있는 증거는 내가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믿었을 때, 내 속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그대로 증거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의 증인들은 구원의 확신이 있는 자입니다. /아멘!/

 

  ▶34-35절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는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시110:1절을 인용한 말씀으로 '주께서 내 주께서'에서 '앞의 주는 하나님이시고, 뒤에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신성으로는 다윗의 주가 됩니다.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그리스도께서 모든 원수를 다 정복하게 될 것을 말한 것입니다.
  고전15:24-26절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발등상이 된다는 것은 완전히 정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사망의 권세는 완전히 정복된 것입니다.
  "우편에 앉았으라" 하나님의 우편은 요긴한 자리요, 능력의 자리입니다.

 

  ▶36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구약 성경에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이란 역사성을 분명하게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한' 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부활, 승천시키셔서 만유의 주요, 그리스도요, 메시아로 삼으셨다고 당당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 '주'란 시110:1절에 나오는 '주'와 같은 뜻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또 '주'라는 말은 '주인이요, 주관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며 '히'어로는 '메시아' 곧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극적인 장면을 봅니다. 그 군중들 가운데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데 앞장을 섰던 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아직도 피의 굶주린 이리처럼 서 있었고, 빌라도 앞에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폭도들과 합세했던 사람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이들의 눈에는 공포에 떨고 있던 제자들의 모습이 아직도 선합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도 증거 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공포를 완전히 초월한 담대한 모습이었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할 때, 그들은 벌벌 떨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종말론적이요, 기독론적'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예수가 메시아 됨을 증거 합니다.
  ▶예수께서 공생에 중에 행하신 많은 기사와 표적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에게 일어난 일들이 다 구약의 예성 성취입니다.
  ▶그의 부활을 통하여 예수께서 메시아 됨을 증거 합니다. /아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셨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셨다. 예수님은 장차 심판하실 주님이시다.' 바로 이것이 예수 복음의 원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베드로는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고 결론을 맺었습니다.
  '너희들이 믿지 않고 배척했던 이 예수'는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주님이시오 그리스도'이셨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다른 아무도 이런 예수님이 될 수 없습니다. 다른 그 어떤 존경받는 현자나 성군이나 위인도 결코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는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우리의 주님이시요 우리의 구세주이실 따름입니다.
  행4:12절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예수님의 생애는 곧 하나님의 구속사의 핵심이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메시아이시다, ▶예수님은 장차 원수를 심판하실 주님이시다. /할/ 바로 이것이 원래의 가장 순수한 영원한 '예수 복음의 원판'입니다. 바로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바로 이 예수를 믿으면 영생의 구원을 얻게 됩니다.
  바로 이 예수를 끝까지 거부하면 오직 지옥 영벌에 빠지게 될 뿐입니다. 사도들이 증거한 '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오늘 나가 영접하고 내 이웃을 구원시키는 성림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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