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창세기·사도행전강해설교

[스크랩] (제8강) 날마다 더해 가는 초대교회! (행 2:37-47)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25. 12:18

《제8강》   날마다 더해 가는 초대교회! (행 2:37-47)

 

  행2장을 가리켜서 초대교회 탄생 장이라고 합니다. 초대교회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120문 도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전도하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은 불같은 성령을 받은 베드로가 유대인들을 향하여 능력 있는 설교를 하다가 그 설교를 듣고 깨닫고 가슴을 치며 회개하며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제목소개!▶

 

  우리들의 삶 속에 날마다 '고통, 절망, 슬픔, 질병, 사고' 같은 따위라면 날마다 감소되고 없어져야 하겠지만, 좋은 것들은 '날마다 더해 가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면 '회사의 사세가 날마다 확장되어 가고, 기력과 건강이 날마다 좋아져 가고, 국력이 날마다 신장되어 가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고 좋은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좋은 것은 날마다 더해 갈수록 좋고, 나쁜 것은 날마다 줄어드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날마다 초대교회가 더해 가는 즉, 부흥해 가는 과정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을 차례대로 알아보겠습니다.

 

  ▶37절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초대교회는 날마다 회개운동이 더해갔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마음이 찔려, '어찌할꼬!' 소리쳤다는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여기 '이 말을 듣고'에서 이 말은 베드로의 설교를 의미합니다. 성도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 자신들도 모르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했다는 말입니다.
  왜? 이런 탄식이 터져 나왔는가? 그의 설교가 너무도 은혜롭고 감격스럽고 감동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우리의 심령이 찔림이 온다는 것은 복 받을 조짐이요 우리 신앙의 인격이 변화되는 즉, 물이 포도주 되는 과정인줄 믿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주 예수를 믿어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 했습니다. 설교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이것이 모든 설교의 주제요, 핵심입니다. 사실 예수 없는 설교는 설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예배 시간이 어떤 시간입니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시간입니다. 
  생각하면 우리의 형편은 니느웨 백성들처럼 잿더미에서 앉아서 회개해야 될 형편입니다. 먼저 정치 지도자들이, 종교 지도자들이, 각 분야 지도자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찔림을 받고 통회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여기에 살길이 있고 여기에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민족이 살길은 오직 회개뿐입니다. 니느웨성이 회개하여 민족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땅의 수많은 지도자들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졸고 있습니다. 저마다 피리를 불어도 슬퍼하지 않고, 소고를 쳐도 춤을 출 줄 모릅니다. 양심이 화인 맞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정말 '어찌할꼬?' 탄식할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질병 때문에 '어찌할꼬?' '가정문제 때문에, 자녀들 문제, 사업문제, 물질문제, 고난문제' 때문에 '어찌할꼬?' 탄식할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더 높은 차원의 탄식은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탄식해야 합니다.
  바로 믿지 못한 것 때문에, 충성하지 못한 것 때문에 '어찌할꼬?' 탄식해야 합니다. 말씀대로 믿지 못하고 살지 못한 것 때문에 이 탄식이 나와야 합니다.
  부정적인 입술, 용서하지 못한 것, 인간의 수단과 방법대로 산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깨어 기도하지 못한 것 때문에 '어찌할꼬?' 탄식해야 합니다. 전도하지 못한 것도, 주일 성수 못한 것도, 감사하지 못한 것도 '어찌할꼬?' 탄식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찔림이 오고 깨달음이 오고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찔려" 영국의 주경학자 '부르스'는 마음이 찔렸다는 것은 '양심에 자극을 받았다'로 해석했습니다. 즉 양심에 가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원어의 뜻은 '찔려 관통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어찌할꼬!'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회개의 공동체입니다. 모이면 그들은 기도했고,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한 것을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을 치며 '어찌할꼬!' 하는 자들이 복 받은 자들입니다. /믿/
  기독교의 축복은 회개로부터 시작됩니다. 회개란 맑은 물이 되기 위해 정수 과정을 거치는 것과 같습니다. 회개를 하면 할수록 영혼이 맑아지고 깨끗해집니다. 회개란 주님을 떠났던 사람이 주께로 돌아오는 것이며 교회를 떠났던 사람이 교회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죄가 날마다 더하면 지옥이 됩니다만 회개가 날마다 더하면 천국이 됩니다. /믿/ '우리가 어찌할꼬!'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질문이 마음이 아파서 터져 나온 것입니다. 양심이 찔려 견딜 수 없어 나온 고통 속의 질문입니다.

 

  ▶38절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유대인들의 '우리가 어찌할꼬!'에 대한 질문에 베드로의 대답은 확고합니다. 본문엔 3가지의 명령이 나옵니다.

  ①너희가 회개하라! 회개란 방향을 완전히 전환하는 것입니다. '마음, 생각, 행동'의 변화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우는 것만이 회개가 아닙니다. 참 회개는 뉘우침이 아니라 돌아서는 것입니다. 뉘우침은 아무리 해봐야 변화가 없습니다. 뉘우치고 돌아서야 변화가 생깁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⑴하나님께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요일1:9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⑵다시는 그 죄를 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8:1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주님의 은총으로 용서를 받았는데, 돌아가서 계속 간음을 행하면 참 회개가 아닙니다.
  ⑶죄와 멀리할 뿐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선한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세리장 삭개오의 경우 "내 소유의 절반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나이다" 삭개오가 남의 것을 토색한 것은 4배로 갚고, 다시는 토색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하였을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⑷진정한 회개는 손을 깨끗이 씻는 것입니다.
  약4:8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정결케 하라" 손을 깨끗이 한다는 말은 우리의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을 바로 하라는 말입니다. 손의 행실 곧 우리의 삶입니다. 불결한 마음은 두 마음을 말합니다. 마음이 나누어지는 것이 더러운 마음입니다.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말씀도 손이 깨끗한 것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영향권은 우리 마음과 손으로 하는 일속에 옵니다.
  약4:9절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회개를 바로 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②세례를 받으라! 세례의 영적인 의미는 옛사람의 죽음이요, 새롭게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라는 것입니다. 세례란 말은 '씻어 정결케 한다.'는 뜻인데, 믿음으로 죄 씻음 받는 자에게 그 증표로 세례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례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⑴죄를 씻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죄를 사함 받는 비결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오늘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음으로 순종하며 사는 길 밖에 없습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이제 믿음으로 죄 사함 받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살겠다는 서약입니다.
  ⑵새롭게 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물 속에 잠기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다시 새롭게 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 받은 다음부터는 천국백성답게 살기 위해서 죄에 대해선 날마다 죽는 생활을 하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육신의 혈기, 교만, 욕심, 불의한 모든 자신의 정욕은 날마다 죽는 생활에 힘쓰고 이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시 새롭게 산다는 의미입니다.
  바울 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육신의 사람이 죽으면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뜻입니다.
  ⑶온전히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세례는 '인친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례를 통하여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백성, 내 자녀다'라고 인 치신 것입니다.
  사41:10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③성령을 받으라! 깨끗한 심령 속에 성령이 임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셋으로 나누어집니다.
  ⑴자연적인 인간(육체적 인간) 걷고, 뛰고, 먹고, 배설하고, 잠자고, 자식 낳고 하는 자연 법칙과 생리 원리를 따라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인간을 말합니다.
  ⑵정신적 인간 뭔가를 깊이 사색하고 무엇을 만들고, 사상이나 학문을 연구하고 이상을 실현하려는 꿈을 갖고 노력하는 인간을 말합니다.
  ⑶영의 인간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실 때 부여하신 영혼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영혼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교통하고 교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영혼이 죄로 오염되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마치 안경이 더러워서 사물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으면 성령의 능력이 우리의 속 사람을 건강하게 치료하여 하나님과 만날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엡3:16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여기서 속 사람은 영혼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은 속 사람을 강건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내 속 사람이 바로 서야 예배를 바로 드릴 수가 있고, 기도도 바로 할 수 있고, 헌신이나 봉사도 바로 할 수가 있습니다. 영혼은 건강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은 내 속 사람을 치료하고, 나의 정신과 영혼을 통일시킵니다. 나의 육체가 제멋대로 동작하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지배합니다.
  그 다음 성령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롬15:13절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소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어려움이 올 때 그 차이가 납니다. 성령의 사람은 사업이 무너지고, 어떤 큰 어려움이 와도 다시 한 번 하나님을 바라보고 달려가게 됩니다. 그러나 소망이 없는 사람은 수건으로 머리를 동인 채 절망하고 포기해 버립니다. 성령의 능력은 나에게 소망과 위로와 용기를 주십니다. 믿/
  왜 성령을 받으라고 합니까? 성령은 우리에게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행1: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본문의 베드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의 출신은 갈릴리였고, 직업은 어부였습니다. 성격은 직선적이고 급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 다녔지만 구원의 확신도 그다지 없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인 것도 잘 몰랐습니다.
  그뿐입니까? 빌라도의 법정 뜰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오순절의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능력을 체험한 뒤로부터 무서운 것이 없어졌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기독교 안의 최대의 쟁점은 겁이 없다는 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의 능력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당시 사도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강하고 담대해졌습니까? 사도바울 역시 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환난도, 위험도, 적신도, 죽음도, 칼도, 겁나지 않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이 그와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양심에 찔림을 받아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우리가 어찌할꼬' 가슴을 칠 때, 베드로는 서슴없이 "너희는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죄 사함을 얻고 성령의 능력을 받으라"고 외칩니다. 자신이 성령을 받고 보니까 살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이 가는 곳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스웨덴이나 노르웨이는 A.D. 1050년에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 300년 동안 지속 되어온 바이킹 시대의 종지부를 찍고 기독교 국가가 되어 오늘날 선진국 대열에서 앞장 선 나라가 되었습니다.
  17세기 말, 영국과 미국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사회가 극도로 혼란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퇴폐 향락주의가 판을 쳤고, 대낮부터 술 취한 사람들은 거리를 매웠고, 범죄가 심해져 감옥은 초만원이었습니다.
  그때 이래서는 영국이 망한다고 생각한 '존 웨슬러'와 '찰스 웨슬러' 형제가 일어나 젊은이들, 대학생들에게 일대 영적 각성 운동을 일으켜 결국 그들이 죽어 가는 영국을 살렸습니다.
  미국은 1865년 남북전쟁의 여파로 사회가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을 때 '휘트필드', '무디' 목사 같은 영적 지도자가 일어나서 미국은 복음으로 살려냈습니다. 그들 모두 다 성령 충만한 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다는 것과 성령 받았다는 것과는 다룹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이 땅에 40일간 계시면서 11번이나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런데 단 한번도 예수 안 믿는 사람을 찾으신 적이 없습니다. 꼭 예수를 영접한 여인들에게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성령을 받아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안 믿는 사람에게 '성령을 받아라!'고 하신 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꼭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에게 오셔서 성령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내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체험이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주님께 붙잡히는 강도가 높습니다.
  손으로 땅을 파는 것보다는 호미로 파는 것이 쉽고, 호미로 파는 것 보다 삽으로 파는 것이 더 쉽습니다. 그러나 포크레인으로 찍어버리면 게임이 끝나버리고 맙니다. 성령의 은사 받으면 게임이 끝나버립니다.
  엡5:18절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성경은 성령 충만과 술 취함과 대조시켜 말하고 있습니다.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술 취하게 되면, 소극적인 사람이 적극적인 사람으로 변합니다. 담대해집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겁이 없어집니다. 간덩이가 커진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도 소극적인 사람이 적극적인 사람으로 변합니다.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술 취한 사람은 술에 힘이고,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힘입니다.

 

  ▶39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이 약속은 예수께서 친히 하신 약속입니다. 행1:4-5절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또한 요엘 선지자들 통하여 예언해 놓은 약속입니다. 욜2:28-29절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그러면 성령 강림의 약속은 누구에게 주신 말씀입니까?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⑴'너희'즉 당시의 유대인들입니다. ⑵'너희 자녀' 유대인들의 후손입니다. ⑶'모든 먼데 사람' 즉 이방인들에게 준다고 말씀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 님의 구원의 역사는 초월적인 성격을 가집니다. 민족을 초월하고, 인종을 초월하고, 신앙을 초월하고, 언어를 초월해서 이 약속을 주셨습니다. 행13:48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0절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베드로의 전도는 완벽했습니다. 성경 여러 곳을 들어 증거하고는 권면을 했는데 이 권면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는 권면입니다. 그리고 '지난날의 죄를 끊어 버리고 성결하게 살 것을 권'했습니다.
  전도는 한 번에 당장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노력하고 끈질기게 인내로 매달려야 합니다. "너희는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누가 패역한 자입니까? 하나님을 거슬리는 세대가 패역한 세대입니다. 은밀히 보면 하나님을 거슬리는 패역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위로와 평안과 생명이 없고 저주와 심판을 받게 됩니다.
  본문의 '이 패역한 세대'란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패역한 행동을 하여 모든 사람으로 생명의 길을 걸어가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세대에서 너희가 용기를 내어 스스로 구원의 길을 걸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대를 바로 알아야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롬12: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러분 오늘날도 그 당시와 같이 패역하고 위급한 세대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힘써 신앙의 길을 가야 합니다. 이 길만이 우리가 살길입니다. /믿/

 

  ▶41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초대교회는 구원받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더해갔습니다. 이 날에 세례를 받은 사람이 무려 삼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두 가지 경로를 통해서 선교가 급증했습니다. ⑴베드로의 능력 있는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회개하고 성도가 되었습니다. ⑵사도들과 120성도들이 열심히 전도했기 때문입니다.
  하루에 삼천 명이나 회개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큰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교인의 수가 삼천 명이 아닙니다.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된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어 선생의 사명을 계승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교인은 많아도 제자는 없다고 말합니다. 누구나 교인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되고 제자가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진정한 성도가 되고, 제자가 됩시다. /할/
  요즘 교회 성장 학이 인기를 모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장학 교수들 간에는 교회의 참된 성장이 질이냐 양이냐를 놓고 논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양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제시하고, 질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엡4:13절과 15절의 '그리스도의 장정한 분량'까지의 성장을 말하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어째든 교회는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부흥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42절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초대교회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갔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범하기 쉬운 잘못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관계에서의 잘못입니다. 잘못하면 아집에 사로잡히기 쉽고, 독선에 빠지기 쉽고, 자기 합리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나만 잘 믿고, 나만 거룩하고, 나만 열심이고, 나만 성령 받았다는 독선에 빠지게 되면 이웃과의 관계는 깨지게 됩니다.
  ▶초대교회는 '성도의 교재, 사랑의 교재'가 깊었습니다.
  ①사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사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말씀을 가르쳐 주는 사도의 위치도 중요합니다. 당시 사도들은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보고 듣고, 배우고, 체험하여, 확실히 깨달은 진리'를 성령의 능력으로 가르쳤습니다.
  말씀을 받는 자는 그 말씀이 자신의 생명이 되고, 힘이 되고, 그 말씀에 붙잡혀 끌려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말씀을 따라 좇아갔습니다.
  ②서로 교제했다고 말합니다. 이 교제는 '코이노니아'라는 말인데 진정한 사랑의 교제이며 영에 있어서 일치하고 마음이 일치하는 교제입니다.
  교회에서 서로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도와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초대교회는 참으로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기독교 신앙생활에 핵심입니다. 초대교부들은 교회를 성도의 교제라고 불렀습니다.
  이 교제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나타납니다. ㉡사람과의 교제입니다. '참여, 협력하는 것'입니다. ㉢물질적 관계에서의 교제입니다. 헌금을 교제로 번역합니다.
  교제를 정리합니다. 하나님과 예배를 통하여 교제합니다. 기독교는 예배의 종교입니다. 첫째도 예배요, 둘째도 예배요, 셋째도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제하시려고 그렇습니다. 교제란 사귐이고, 협력이며, 참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참여하고, 봉사에 협력하는 것, 교회는 독불장군이 없습니다. 모두 같이 해야 합니다. 봉사도, 전도도, 말씀공부도 같이 해야 신이 납니다. 초대교회가 부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성도간의 교제의 힘이었습니다. /할/
  ③'떡을 떼며' 떡을 뗐다고 한 것은 성찬예식을 의미하는 말로서 당시엔 성찬을 행하면서 식사를 했습니다. 떡이라고 해서 우리나라의 시루떡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식사를 빵으로 하기 때문에 큰 식빵을 뚝 떼어서 나누어 먹었습니다.
 

  ▶성찬식에는 세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첫째, 과거와 연결시켜 줍니다. 우리를 마가의 다락방까지 인도하여 제자들과 떡을 떼었던 그 예수님과 연결시켜줍니다.
  둘째, 현재적으로 주어지는 은혜의 상징이요, 보증이 됩니다.
  셋째, 예수님의 언약의 표시요, 앞으로 천국잔치에서 갖게 될 '코이노이아'의 징표가 됩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두 가지 형태의 성찬이 있는데 하나는 애찬이라는 것입니다. '아가페 잔치'라고 해서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저녁을 같이 나누어 먹는 풍습입니다.
  처음에는 매일 저녁에 모여 애찬을 가졌답니다. 그러다가 매일 저녁 모일 수가 없게 되자 한 주일에 한 번씩 모이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 초대교회는 이렇게 애찬을 나누어 먹고 주님의 피와 살을 대하는 성찬을 자주 함으로 주님의 사랑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교제 중 가장 좋은 교제가 음식을 나누어 먹는 교제입니다. 그런데 음식 끝에 시험이 있습니다.
  ④초대교회는 기도에 힘쓰는 교회였습니다. "기도하기를 전혀 힘 쓰니라." 말씀을 배우고 교제하고 떡을 떼고 기도했습니다. 아무리 성경공부를 많이 해도, 아무리 성도의 교제를 많이 해도, 아무리 성찬식을 잘 행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어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계속 주시지 않으면 소용이 없으니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기를 바라며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여기 '기도하기를'이란 말은 복수로서 개인적 기도가 아니라 교회 적으로 함께 모여서 많은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행한 중보기도를 말합니다.
  ▶19세기의 러시아의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루빈슈타인'은 여행할 때에도 언제나 연습용 피아노를 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는 기자들의 질문에 "내가 만일 피아노 연습을 하루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먼저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내 친구들이 알게 되고,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마침내 청중들이 알게 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를 기도하지 않으면 나 자신이 먼저 알고, 이틀을 기도하지 않으면 친구가 알고, 3일을 기도하지 않으면 교인들이 다 알고 사단이 알게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힘을 받는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아멘!/

 

  ▶43절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초대교회는 기사와 표적이 날마다 더해갔습니다. 42절의 기도의 결과는 43절에서 나타납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이 말은 '무서워 벌벌 떤다.'는 말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는가? 어떻게 저렇게 달라질 수 있는가?" 놀랍다는 것입니다. 즉 마음속으로 그들은 두려워하고 존경하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결과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사도들이 행한 여러 가지 기사와 표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장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날 때부터 앉은뱅이된 자를 예수의 이름으로 걷게 했으며, ▶5장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부부가 성령을 속인 죄를 지적하자 그들이 죽은 사건이 나옵니다. ▶역시 5장에 보면 베드로의 그림자만 덮어도 병자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19:11절에 보면 "바울이 희한한 능력을 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20장에는 유두고 사건이 나오고, ▶28장에서는 바울이 독사에 물렸으나 죽지 않은 사건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기사와 표적은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납니다. 기적이 끝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끝나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는 잠잠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기도하는 교회요. 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과 기적이 많이 나타나는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오늘도 기도하면 초대교회의 이 능력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아멘!/할/

 

  ▶44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내가 가진 것 중 형제가 필요로 한다면 나누어 썼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아무리 높은 담장이라도 무너집니다.

 

  ▶45절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어떤 사람은 이때 재산을 모두 팔아서 교회에 쌓아놓고 나누어 썼는가 생각하지만 그들이 밭을 가지고 있다가 팔아서 교회에 바쳤고 사도들은 그것을 가지고 구제하는데 사용한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자발적으로 헌금을 했습니다. 사랑의 구제를 했습니다. 사랑의 손길이 여기저기서 넘쳐 났습니다. 우리도 억지로나 인색함으로 마지못해서 헌금을 할 것이,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물질과 정성, 몸과 마음을 바쳐서 하나님 앞에 충성하고 영광 돌릴 때, 하나님께서 더 크고 풍족하게 심은 대로 거두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마6:19-20절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46절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초대교회는 날마다, 날마다 성전에 모이는 일이 더해갔습니다. 교회는 모이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모이지 않으면 힘이 없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마음이 하나 되었습니다. 교회의 힘은 연합이요, 일치입니다. 한마음 한 뜻으로 모이면 힘이 큽니다.
  모일 때 중요한 것은 ⑴기쁨과 감사와 감격으로 모여야 하고, ⑵정해진 시간에 열심히 모여야 합니다. 시간을 지키는 것 중요합니다.
  모여서 무엇을 했습니까? 하나님 앞에 예배드렸습니다.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초대교회는 모여서 기도하다가 성령을 받았습니다.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이 말씀은 성도들의 개인적인 삶의 기쁨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성전에서는 예배에 함께 하는 공동체적 기쁨이요, 가정에서의 기쁨은 개인적인 기쁨입니다. 복음의 본질은 기쁨입니다. 기쁨으로 삽시다. /할/

 

  ▶47절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①초대교회는 하나님을 찬미하는 교회였습니다. 찬양은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인간의 마음은 기도와 찬양의 열쇠로만 열려집니다. 그러므로 찬양을 많이 하면 회개의 역사, 신유의 역사, 성령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②온 백성에게 칭찬 받는 교회였습니다.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우리 교회가 칭찬 받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의 입장은 욕을 먹든지 칭찬을 받든지 두 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장미꽃이 살아서 향기를 발하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렇습니다. 살아서 향기를 발하면 칭송의 대상이 됩니다. 여러분은 어디 가서 무엇을 하시거나 칭찬과 존경의 대상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 저 사람같이 살아야 해!'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외쳤습니다.
  ③주께서 구원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해주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원이 영생복락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믿/
  결론입니다.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놀라운 축복입니다. 믿는 자의 수가 삼천 명으로, 오천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그 수는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말하자면 초대 교회는 구원의 방주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초대교회를 배워야 합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