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창세기·사도행전강해설교

[스크랩] (제9강) 예수의 이름으로 운명을 바꿔라! (행 3:1-10)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25. 12:19

《제9강》  예수의 이름으로 운명을 바꿔라! (행 3:1-10)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운명이나 팔자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고, 안 되는 것을 되게 만들고, 고난까지 축복으로 바꾸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
  오늘 본문에는 세상 사람들이 운명이라고 체험해 버린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바꾸어 놓은 사건이 나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성전 미문에 앉아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손을 벌려 구걸하면서 하루하루를 운명이라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기도하려고 성전으로 올라가는 하나님의 사람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게 됩니다. 그 날도 한 푼을 얻기 위해 손을 내밀었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하는 말이 "내게 은과 금은 없다. 그러나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어라"고 명하니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일어나서 성전으로 들어가 하나님께 찬양했다고 했습니다.
  "나면서부터" 이 말은 불신자들이 말하는 운명입니다. 이 운명을 무엇으로 바꾸어 놓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 길에 어떤 장애물이 있고, 고난이 있을지라도 팔자나 운명이라는 말을 하지 맙시다.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신 하나님은 오늘도 역사 하십니다. /믿으시면 크게 아멘!/ ◀제목소개!▶

 

  그런데 운명을 바꾸는 기적은 언제 일어납니까? 정해진 시간에 일어났습니다.

  ▶1절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제 구시 기도시간에"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를 드리는 습관이 있습니다. 제3시(9시), 제6시(12시), 제9시(오후3시)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기도시간을 엄숙히 지켰으며 이 기도시간이 되면 가까운 회당을 찾거나 회당이 없으면 적당한 곳에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니엘도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다윗 왕도 그의 시편을 보면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다고 나옵니다. 시55:17절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믿음의 사람들은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바쁜 세상에 살아가면서 항상 삶의 순서를 바로 정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먼저 할 일이 있고, 나중에 할 일이 있습니다. 빨리 해야 할 일이 있고, 천천히 해도 되는 일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기도하는 일입니다. 사업을 하더라도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병원에 가도 먼저 기도하고 가야합니다. 하루를 시작하는 첫 시간에도 기도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성도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아주 귀한 신앙입니다. 우리가 하루에 세 번씩은 못한다 하더라도 하루 한번은 꼭 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 것은 정시기도입니다.
  행10장에 고넬료도 제 9시 기도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 중에 환상이 열리며 주의 천사가 응답을 알려주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할/
  여러분, 기도하는 좋은 습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슬플 때 기도해 보세요, 위로가 옵니다. 외롭고 고독할 때 기도해 보세요, 주님이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절망과 낙심이 생길 때, 기도해 보세요, 소망과 평안을 주십니다. 좋은 조건 좋은 환경에서는 누구나 기도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기도하고 찬양해 보세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축복이 따릅니다. /아멘!/
  ▶성도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한다는 것은 아주 귀한 신앙입니다. 우리가 하루에 세 번씩은 못한다 할지라도 하루 한 번은 꼭 시간을 정해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새벽 기도회가 제일로 귀한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고 막1:35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능력이 어디서 나왔는가 봤더니 기도를 통해서 얻어진 능력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은 기도를 통해서 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기도를 통해 깨닫게 됩니다. 또 기도하는 사람은 믿음의 분량이 장성해집니다.
  1절 '하'반절의 '올라갈 세'라는 말은 '반복적인 습관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들은 하루에 세 번씩 반복해서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능력이요, 기도가 축복입니다.
  ▶정시 기도를 합시다. 그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이라면 삼시 육시 구시에 누구나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바벨론 포로 때부터 일어난 운동입니다. 다니엘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때에도 정한 시간에 어김없이 기도했습니다. 작정한 정시 기도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합심 기도를 합시다. 베드로와 요한은 합심해서 기도했습니다.
  마18:19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한 사람이 천을 좇으면 두 사람이 만을 좇습니다. 이것이 합심 기도의 위력입니다.
  ▶성전 기도에 힘씁시다. 구시 기도 시간은 하루 중에 가장 어중간은 시간입니다. 우리의 시간으로 하면 오후 세시입니다. 이 시간은 하루 일과를 마치기도 다시 시작하기도 어중간은 시간입니다. 어려운 시간에 성전을 찾았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사건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세" 베드로와 요한은 연합을 이루는 동역 자들입니다. 운명을 바꾸는 기적의 역사는 베드로와 요한이 연합을 이룬 공동 작품입니다. 여기 '와'는 화목을 말합니다. 합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일치함을 말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더불어 화목을 이루었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와'의 진리가 중요합니다. 베드로와 요한,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녀, 형제와 형제, '와'는 화목의 고리입니다. 일치의 연결고리입니다. 이 '와'의 고리가 잘 연결될 때 행복이 오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어떤 가정은 부모와 자식 사이가, 형제와 형제 사이가 '와'의 고리를 빠져서 싸움과 갈등 속에서 불평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도는 너와 내가 더불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화목 하는 곳에 하나가 되고, 합심하는 곳에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납니다.
  사실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와 요한은 본래 하나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선 나이가 차이가 많습니다. 또 성격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가 되어 잘 어울립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셔야 합니다. 항상 그리스도가 중심이 될 때, 교회도, 가정도, 사업도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연합을 이룰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 다음 1절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운명을 바꾸는 기적의 요소는 성전으로 올라가는 길에 일어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세상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많습니다. 그러나 어느 곳으로 가느냐에 따라 목적지가 달라집니다. 바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가는 길에 운명을 바꾸는 기적의 현장이 된 것입니다.
  ▶왜 성전이 이토록 중요합니까?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날마다 성전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성전은 다른 건물과는 본질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들어오면 거룩한 이름으로 바뀝니다. 성전에 모든 것은 '성물'이라고 부릅니다. 심지어 사람들도 성도라고 부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무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자리가 기적의 자리입니다. 왜?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왜 성전중심이 이토록 중요합니까? 성전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전중심으로 살아야 복을 받습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취임을 한 후 첫 주일에 가족과 보좌관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갔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TV와 신문 등 모든 매스컴은 대통령의 주일예배 드리는 모습을 세계뉴스로 내보냈습니다.
  이것은 미국적인 하나의 신앙고백입니다. 단순히 개인이 예배를 드렸다는 차원이 아니라 미국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나라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나라라는 신앙고백을 온 세계 만방에 보여준 일입니다.
  대통령이 주일에 예배드리는 모습을 세계뉴스로 다루는 나라가 거의 없습니다. 미국은 크리스천 대통령이 취임을 하고 나면 첫 주일 예배 드리는 것을 뉴스의 초점으로 삼고 그것을 온 세계 앞에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통치자가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아름답고 감동적인 일입니다. 그만큼 예배행위는 우리에게 큰 의미를 주는 것입니다.
  시29:1절 "너희 권능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우리는 행복한 예배자로 살아야 됩니다. 또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시인은 히브리 시적으로 '여호와께 영광과 능력을 돌리고 돌릴지어다'라고 했는데 이 표현은 예배는 지속적이고 반복적이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영광을 돌리고 돌릴지어다'를 우리말로 적용을 하면 '예배하고 또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단회적 사건이 아닙니다. 한번만 예배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한을 정해놓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지속적입니다. 계속 예배하는 것입니다.
  시29:2절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행복한 예배자입니다. 합당한 예배는 미리 준비하고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하여 은혜를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축복을 주십니다. 예배는 생명 걸고 지키는 것입니다.

 

  ▶2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여기에 보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와 미문이 나옵니다. 앉은뱅이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①그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입니다. 행4:22를 보면 그 사람의 나이가 40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40이 되도록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그것이 운명이려니, 팔자려니 하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났습니다. 걷고 뛰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운명도 팔자도 새롭게 만듭니다. /믿/
  ②사람들이 메어다가 내려놓고 다시 메어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한발작도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가고 싶을 때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갈 수 있다는 것은 축복 중에서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건강 주신 것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힐/
  ③이 사람의 생계는 구걸이었습니다. 남의 것을 구걸해서 산다는 것은 비참한 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IMF 때 보다 더 어렵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구걸하는 성도는 없습니다. 이것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아 멘!/
  ④이 앉은뱅이는 구걸하지만 장소 선택을 참 잘했습니다. 그가 앉아 구걸하던 미문은 고린도 산 구리도 만들고 그 위에 금과 은으로 덮어 씌었기 때문에 일명 '황금 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가 장소를 잘 선택했다는 것은 황금문 곁을 선택했기 때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성전 문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장소 선택을 잘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본문의 앉은뱅이는 빌어먹어도 성전 문에서 빌어먹다가 예상 밖에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⑤이 사람은 때를 잘 맞추었습니다.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날마다 미문에 앉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는 병 낫기를 기대하고 날마다 미문 곁에 앉아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먹고살기 위해 그곳에 앉아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어느 날은 나오고 어느 날은 나오지 않았다든지, 어느 날은 오전에만 나오고, 어느 날은 오후에만 나왔다면 그는 이 엄청난 축복을 받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의 앉은뱅이처럼 날마다 사모하는 열심과 정열을 가지고 구해야 합니다. 교회출석도 그렇고, 기도생활도 그렇고, 교회봉사도 '날마다'라는 자세로 해야 합니다.
  만일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으로 들어가던 시간 즉 제9시에 그 시간에 앉은뱅이가 거기 없었더라면 그는 고침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때 거기 있었기 때문에 그는 고침을 받게 된 것입니다.
  ⑥사람을 잘 만났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숱한 사람이 그 문을 드나들었습니다. 유대인은 제3시, 제6시, 9시 등 세 시간 간격으로 기도시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 시간대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앉은뱅이에게 경우에 따라 동정하는 마음으로  몇 푼의 돈을 주었을 뿐, 그 이상의 것은 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그는 제 9시 기도시간에 기도하러 성전으로 들어가는 베드로와 요한을 만난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인가? 예수의 능력이 있는 자들입니다. /할/

 

  ▶3절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그 날 그 만남이 그의 운명과 인생을 뒤바꾸어 버렸습니다. ▶만남에는 여러 가지 형태와 의미가 있습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면 훌륭한 인격을 배울 수 있고, 사기꾼을 만나면 인격이 파괴됩니다. 산다는 것은 만나는 것입니다. 만남이 없이는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한 가정도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종교도 만남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진리와 절대자를 만나려고 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이와 같이 본문의 앉은뱅이도 베드로와 요한을 만남으로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사람을 잘 만나는 것 복입니다. 여자 잘 만나 성공한 남자가 있는가 하면 남자 잘 만나 호강하는 여자도 있습니다. 여자 잘못 만나 인생을 망친 남자도 있는가 하면 남자 잘 못 만나 한평생을 좌절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여자도 있습니다. 이렇게 누구를 만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앉은뱅이가 만난 베드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초대교회 최고지도자입니다. 그는 기도의 종이었고, 능력의 사도였습니다. 그의 한번 설교에 3천명이 가슴을 치며 '어찌할 꼬!' 통곡하며 회개했으며, 그의 그림자만 덮어도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런 능력의 종을 만났기 때문에 40년의 한을 풀고 걷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 잘 만나는 복을 받으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다음 ▶하나님의 능력은 주의 종을 주목하여 바라볼 때 일어납니다.

 

  ▶4-5절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베드로와 요한은 이 불쌍한 거지를 주목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주목'이란 원어를 보면 '아주 강한 시선으로 똑바로 응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먼저 주목하는 강한 시선이 있어야 합니다. 인격과 인격의 참다운 접촉은 서로의 시선이 맞추어 직시하는 곳에서 이루어집니다. 눈으로 말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눈과 눈은 정이 통하고 인격이 통합니다. 눈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신비해서 눈과 눈이 서로 마주칠 때 서로 사랑의 감정이 통하게 됩니다. /할/
  여러분! 눈동자를 보면 압니다. 사랑하는 눈동자가 다르고, 미워하는 눈동자가 다르고, 의심하는 눈동자가 다릅니다.
  "우리를 보라" ⑴'소망을 가지라'는 뜻이며 '우리가 좋은 것을 너에게 줄 것이니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간절히 사모하고 원하는 자에게 임합니다.
  ⑵'나를 주목하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눈을 맞추라는 이야기입니다. 영적인 원리는 하나님의 종의 눈과 성도의 눈이 마주칠 때 능력이 나가고 축복이 떨어집니다. /믿/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시간에 강대 상에 있는 주의 종과 눈을 마주치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베드로가 앉은뱅이에게 소리를 쳤습니다. '우리를 보라! 기대를 가지라, 소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베드로를 쳐다볼 때, 베드로의 눈에서 튀어나오는 신앙의 힘, 하나님의 능력이 그 눈 속으로 들어갈 줄 믿습니다. /할/ 눈과 눈이 마주친 순간 기적이 싹트는 것입니다.
  ▶앉은뱅이에게 기대감을 잔뜩 불어 일으켜 놓고 베드로가 그에게 무엇을 했습니까? 금을 준 것도 아니요, 은을 준 것도 아닙니다.

 

  ▶6절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베드로가 이 앉은뱅이에게 준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마음속에는 놀라운 확신의 샘이 솟아올랐습니다. '내게 금과 은은 없어도 십자가가 있지 않은가?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며, 문둥병자를 깨끗케 치료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능력의 주님이 내게 있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그 당시 베드로에게 주님의 능력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그 능력 주심을 믿습니다. /믿/
  베드로와 요한은 '그렇다. 예수의 능력의 이름을 주자! 주님의 권능을 주자! 주님의 권능으로 저를 일으켜 세우자!' 이런 불같은 믿음이 마음속에서 충만해 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 하나를 붙잡아야 합니다. 운명을 바꾸는 기적의 요소는 베드로와 요한의 능력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나면서부터 생긴 비참한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운명을 바꾸어 놓는 문제의 해답'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속에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있습니다. 요14:6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옵니다. 빌4: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근본적 운명을 바꾸는 열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뿐입니다. 여러분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까? 누구의 이름을 부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계속 부르면 해답이 나옵니다. 성도의 최고의 자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응답의 통로가 됩니다.
  요14:14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할/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이런 앉은뱅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를 모르고 죽어 가는 이 땅에 많은 앉은뱅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름을 줍시다.
  ⑴받은 은혜를 나누어줍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준다는 것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준다는 것이요, 은혜로 받았으니 은혜로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공기도 공짜요, 태양도 공짜요, 생명도 공짜입니다. 비와 이슬도 공짜입니다. 이런 은혜를 보편적인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시어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습니다. 이 은혜는 특별한 은혜라고 합니다. 엡2:8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웃에게 전도해서 그 은혜를 주어야 합니다.
  ⑵예수의 이름으로 주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자기 것을 주면서 사는 부자가 있고, 남의 것을 얻어먹고 사는 거지도 있습니다. 또 자신의 것을 아무에게도 주지 않으려는 부자가 있고,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강도도 있습니다.
  물질을 많이 가졌다고 부자는 아닙니다. 또 가진 것이 없다고 가난한 것이 아닙니다. 가진 것이 많은데 일생동안 남에게 베푼 것이 없는 가난한 자가 있는가 하면, 가난하게 살면서도 많은 것을 주고 간 부자도 있습니다. 누가 부자입니까? 주는 자입니다. 우리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전에도 드리며 삽시다. 하나님 앞에 드릴 때, 자신의 이름으로 드리면 생색은 나겠지만 하나님의 축복은 없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드리십시오, 예수님은 눅6:38절에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⑶예수의 이름으로 주면 받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사람은 받기를 좋아하지만 받다가 망한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서울대, 치대 교수들이 받다가 망했습니다. 의정부 지청 판사들이 받다가 망했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주고받는 곳에는 부정이 없습니다. 사랑과 자비 만 있을 뿐입니다.

 

  ▶주는 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몇 가지 믿음의 기본이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복음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확신, 구원의 확신, 응답의 확신, 기적의 확신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사명에 대한 확신입니다. 엡4:12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것이 직분의 목표입니다.
  세 번째는 고난의 가치에 대한 확신입니다. 골1:4절 "내가 이제 너희를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성령의 역사에는 은사가 있고, 열매가 있습니다. 은사는 받은 것이요, 열매는 주는 것입니다. 은사는 노력으로 받습니다. 기도로 받습니다. 그러나 열매는 인격적인 것입니다. 아무에게나 열매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는 성숙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능력입니다. 우리 모두 은사를 받고 열매를 맺읍시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언제 능력이 왔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줄 때'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 이때 발과 발목에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명하면 귀신이 떠나고,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병든 자가 났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을 명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놀라운 응답이 나타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앉은뱅이를 고친 것은 바로 예수의 이름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 이름을 선포했을 뿐입니다.
   요16:24절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않았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15:16절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천국에 가서 예수님의 이름을 대면 누구든지 환영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은, 금이 해결 못하는 수많은 일들을 해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모든 죄를 사하는 능력도 이 이름에 있습니다. 죄를 정복하는 능력도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중독된 죄라 할지라도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면 떨어져 나갑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십시오!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하십시오!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하십시오! ▶예수의 이름으로 죄의 사슬을 끊어버리십시오! 그리하면  자유함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예수의 이름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7-8절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7절 이하에서는 그가 고침 받은 후에 일어난 현상입니다. 7절을 보면 왜 그가 앉은뱅이가 되었는가 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발과 발목에 힘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발과 발목이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서 걸고 뛰기 시작했습니다.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베드로는 자신이 준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가 그를 일으킬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의심 없이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기도한 자가 확신이 없으면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 앉은뱅이 편에서 보면 베드로의 명령에 대한 그의 믿음과 순종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앉은뱅이는 순종했습니다. 순종하는 자는 복을 받습니다. 드디어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일어서게 됩니다. 여러분! 발과 발목이 힘을 얻는 다는 것은 믿음의 성장을 의미합니다.
  히12:12-13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이 기적은 ⑴즉시 일어난 기적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뜸을 들이고 약을 쓴 것이 아닙니다. '걸어라'는 말씀 한마디로 즉시 일어나 걸었습니다.
  ⑵그 기적은 완전한 것이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명백하고 완전하고 확실한 기적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는 어떠한 방법이라도 어떠한 길이라도 통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잡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그 사람이 앉은뱅이가 되어 일어서 걷지 못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행여나 오늘 이 자리에 걷지 못한 자가 있다면 오늘 예수님의 이름으로 걸으시기 바랍니다.
  넘어지는 것을 겁내는 어린이는 절대로 서서 걸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어다니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번 걸음마를 시작하면 아무리 넘어져도 절대로 기어다니려고 하지 않습니다.
  '서는 기쁨! 걷는 기쁨! 달리는 기쁨!' 정정한 사람은 절대로 기어다니지 않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로 서서 걸어 다니는 신앙! 놀라운 역사들이 나타납니다. 우리 모두 오늘 앉은뱅이처럼 일어나십시오. /할/
  8절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앉은뱅이가 일어나 자신의 집으로 가지 않고 성전으로 갔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라면 자랄수록 좀더 깊은 지성소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제 그는 구걸하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앉은뱅이가 낫고 걷게 된 것은 인생은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전폭적인 은혜입니다. 발목과 발에 힘을 얻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완전한 구원이며 육체의 완전한 치유입니다.
  40년 간의 수모와 능욕 속에서 슬픔과 탄식 속에서 그는 큰 소망의 빛을 얻었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너무 감격하여 성전에 들어가 걷고 뛰며 하나님께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로 이 시간에 일어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실패에서 일어납니다. 질병에서 일어납니다. 먼저 우리가 신앙에서 일어서기만 하면 오늘도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 하나님은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하셨습니다. /할/
  치료받은 앉은뱅이는 사도와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의 앉은뱅이가 일어난 다음에는 영적인 성전생활을 좀 더 깊은 지성소로 향하는 생활로 이어야 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전에는 이렇게 기쁘고 즐거운 생활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삶이 기쁜 삶입니다. 앉은뱅이가 나은 다음에 육신과 세상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고 신앙 중심생활을 했다는 것이 복입니다. /아멘!/

 

  ▶9-10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성전에서 그 사람이 그렇게 뛰며 기쁨에 넘쳐 찬송하는 것을 모든 백성이 보고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습니다. 이 사람이 아침까지 업혀 다녔으나 이제 걸고 뛰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을 보고 심히 기이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지금도 세상 사람들은 기이히 여깁니다. 이제 그는 구걸하는 입술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미하는 입술로 변했습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속에는 하나님의 기적은 살아있습니다. 히13: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신앙에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불신자들이 운명이라고 말하는 것을 신앙은 바꿔 놓습니다. 이제부터 팔자니, 운명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불 신앙의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면서 생긴 운명도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기도합시다. 시간을 정하고 기도하면 더욱 좋습니다. 더불어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십시오, 성전을 향해 더 가까이 나가는 신앙인이 되어 보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인생의 자본으로 삼고 무기로 삼고 나갈 때 힘을 얻고 일어서며 운명을 바꿔 놓는 엄청난 축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믿/ 우리 모두 운명이니 팔자니 탓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개척해 나가는 성림의 위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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