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창세기·사도행전강해설교

[스크랩] (제10강) 베드로의 설교! (행 3:11-26)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25. 12:19

(제10강)         베드로의 설교! (행 3:11-26)

 

  지난 시간에는 행3:1-10절까지의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의 이름으로 일으킨 사건을 상고했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그 날 하루하루 이 땅에서 목숨을 유지할 수 있는 돈이나 빵 한 조각을 구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날도 성전 앞에서 구걸을 하고 있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제9시 기도시간이 되어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이 앉은뱅이를 만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손을 내밀어 구걸을 요청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하자 걷고 뛰는 역사가 있어난 것입니다. /할/
  ▶여기서 잠깐 베드로를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가진 것이 없다고 해서 없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내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을 줄 것인지'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베드로에게 무엇이 있었습니까?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이 보배로운 이름이 우리에게도 주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재산 목록 제1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믿/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줍시다. 그런데 그 이름을 아무나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체험하고, 아는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가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날 때부터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 뒤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청중을 향해 복음을 전합니다.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는 행2:14-36절의 말씀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크게 두 가지를 전했습니다. '성령을 증거 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입니다. 그래서 제목도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먼저 베드로의 설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①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설교를 통해 시사평론이나 교양이나 정보를 얻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큰 착각에 빠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TV나 신문, 잡지, 주간지, 월간지, 교양 대학'에서 찾아야 합니다. 설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의 구속과 복음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언제나 '예수님이 주제였고, 중심이었고, 결론'이었습니다.
  ②설교 자체가 바로 능력이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설교를 들은 후에 3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고, 옷을 찢고 가슴을 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도 큰 이적이지만 베드로의 설교는 더 큰 이적을 일으켰습니다.
  왜냐하면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신앙(생명)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앉은뱅이에 대한 이적은 한 사람을 치료하는 이적이었지만, 베드로의 설교는 많은 심령을 치료하는 이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멘!/
  우리는 한국의 초대교회사에서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을 가진 손양원 목사님을 잘 압니다. 두 아들을 죽인 공산당을 용서하고 양자로 삼는 등, 사랑을 몸소 실천했던 목사님이 바로 손양원 목사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손양원 목사님이 부흥회를 가면 목사님을 초청한 교회에서 세 번 놀란다고 합니다. 먼저 키가 작은데 놀란답니다. 그 당시는 교통편이 기차였습니다. 초청한 교회에서 강사 님을 역으로 마중 나갔는데 교인들이 목사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너무 키가 작아서 눈에 잘 띄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눈에 띄었다 해도 설마 저렇게 작은 사람이 강사는 아니겠지? 싶어 누구도 아는 척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날 밤 강단에 서면 목소리가 큰데 놀라고, 세 번째는 그의 설교의 능력에 놀란다고 합니다. /할/ 


  ▶'설교의 바른 정의'는 무엇인가?
  눅24:13-49절을 보면 '성경이 무엇인가?'를, 그리고 '설교가 무엇인가?'를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배경은 주님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부활을 증거하고, 그 밤에 예루살렘의 열 한 사도 앞에 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고 자신의 부활을 증거한 말씀입니다.
  눅24:27절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여기의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는 '철저하게 설명하다'는 뜻으로, '번역하고 해석해서 철저하게 설명하는 설교'를 말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하고, 해석하여 철저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 바로 설교'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에 대하여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 말씀에서 자세히 설명해 주신 것을 해석해 주셨습니다. 곧 설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벗어난 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⑴성경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눅24:32절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여기 '풀어주다'는 말은 성경 말씀을 열어 해석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⑵영안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눅24:31절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엠마오로 내려왔던 두 제자의 눈이 밝아져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의 '눈이 밝아져'는 앞에 '풀어 주다'와 같은 단어로 눅24:45절에서 마음을 '열다'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여기서 눈은 육신의 눈이 아닌 영안의 눈을 말합니다. 두 제자의 영안이 밝아져 부활의 주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행9:18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여기 '다시 보게 된지라'가 영안입니다. ▶설교는 영안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⑶마음을 열어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눅24:45절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여기 마음을 '열어'는 앞에서 살펴본 '풀어 주다', '눈이 밝아지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성경을 풀어 주시니 눈이 밝아졌습니다. 곧 영안이 열리고, 마음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바로 설교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이루는 핵심적인 단어입니다.
  ⑷설교의 결론은 증인되게 하는 것입니다. 눅24:48절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 이 일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 부름 받은 줄로 믿습니다. 사명은 크게 두 가지인데 '예배와 선교(전도)'입니다.
  예배드리는 일이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명이라면, 전도는 인간이 세상을 향한 두 번 째 사명입니다. ▶본문을 차례대로 상고해 보겠습니다.

 

  ▶11절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사람들은 앉은뱅이가 나은 것을 보고 놀랐고, 나은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고는 이분들이야말로 '능력이 굉장하신 분'들이라고, 자기가 낫게 된 것이 이 사람들 때문임을 알리고 싶어했습니다.
  여기 '붙잡으니'란 말의 원어의 뜻은 '어깨에 매달리다.'는 뜻으로, ⑴많은 사람들에게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이런 기적이 일어났음을 알리기 위한 것이고, ⑵베드로와 요한에 대한 애착과 고마움을 표시한 것이고, ⑶베드로와 요한이 자기를 그냥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솔로몬의 행각"은 '요세푸스'에 의하면 성전 뜰, 동편에 있는데 거대하고 아름다운 기둥이 162개나 되고, 그 위에 지붕이 있으며 내부에는 3개의 통로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곳을 거룩한 곳으로 생각해 왔는데, 그것은 그들의 존경의 대상인 솔로몬 왕이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이곳에서는 많은 종교 집회가 열렸다고 합니다.
  요10:23절을 보면 우리 예수님께서도 이곳에서 강론을 하셨습니다. 이 행각에 사람들이 모인 것은 종교적인 모임으로서 벌써 베드로는 여러 무리들 가운데 하나의 종교 지도자로 공인된 것입니다.
  솔로몬의 행각에 모인 무리들 중에는 그 당시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와 요한이 이런 능력을 행한 것에 놀라고 큰 충격을 받고, 그 일을 자세히 알아본 뒤, 그들의 활동을 막을 대책을 세우기 위해 모인 자들도 있었고, 그 이외는 호기심으로 많은 무리가 이 행각에 모인 것입니다.

 

  ▶12절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그곳에 모인 무리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신격화하여 기이히 여겼습니다. 만일 베드로와 요한이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은 가리어지고 자신들이 우상화 될 위험성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이 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로 되어 진 것을 증거 해야만 했습니다. 한마디로 복음을 전할 가장 좋은 기회였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외쳤습니다. 여기 '이스라엘 사람들아' 한 것은 설교를 듣는 대상을 호칭하는 표현으로 '그들이 율법과 약속을 받은 선민임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기이히 여기느냐" 이 말은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을 보고 감정적인 면에서 느끼게 되는 탄복이나 충격적인 놀라움 또는 거룩한 두려움의 표시'입니다.
  정말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되어 40년 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한번도 일어서 본적이 없었던 불쌍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발과 발목에 힘을 얻어 일어나서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의 성전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놀란 것은 이 앉은뱅이만이 아니었습니다. 9절에 보면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고 했습니다. 이 놀라운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랐다고 했습니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라고 한 것은 '사람들의 잘못된 관심을 책망하면서 설교의 서론으로 주의를 환기시키는 질문'입니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란 말은,
  ⑴'자신들이 어떤 특별한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고친 것이 아니라는 선언'이며, 그러므로 '자기들을 눈여겨보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⑵과거에 하나님의 수많은 능력을 체험한 이스라엘 사람들로서 '왜 이 일을 기이히 여기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이 기적의 원동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상기시키는 말입니다.
  결국 사람들의 관심과 주의는 오직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리는 표현입니다. 한마디로 자신들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심부름꾼이요, 도구임을 나타낸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에게 큰 감명을 받습니다.
  ⑴베드로는 자신의 권능이나 경건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절대 자기의 비하요 겸손입니다.
  ⑵사람은 아무도 앉은뱅이를 일으킬 수 있는 권능이 없다는 선언입니다.
  ⑶'어찌하여 참으로 주목하고 바라보아야 할 대상을 바라보지 못하느냐?'는 책망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참으로 주목하고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누구입니까? 그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믿/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아멘!/
  베드로는 겸손한 사도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를 낮출 때, 하나님은 높아지고 영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낮아질 때,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는 계속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에게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13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우리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호칭하고 있습니다. 곧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병을 고쳤다는 증언입니다.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을 상징한 것으로 '언약의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병을 고쳐 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유대 군중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못 박으소서!' 외쳤습니다. 그때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해보니 그에게는 어떤 죄명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예수님을 놓아주자고 하였으나 유대 민중은 빌라도의 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14-15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재차 빌라도가 '이 사람은 죄를 찾을 수가 없다. 사형 받을 만한 죄명이 없다'고 하자 민중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바라바를 내 놓으라!'고 외쳤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론 정치가 무섭습니다. 빌라도는 군중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폭동이 일어날까 봐 두려워 어쩔 수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판결하고는 손을 물로 씻고 '나는 이 일에 대하여 상관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때 유대인들이 '이 예수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외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살인자 바라바를 살려주기를 외쳤습니다.
  당시 유대 풍습으로 유월절 축제 때는 죄인 하나를 풀어 주는 전례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광복절 특사나 마찬가지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기를 원했지만 그들은 바라바를 원했습니다. 베드로가 지금 이 사실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생명의 주를 죽였다"고 외쳤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회중의 심령을 찌르는 설교였습니다. '너희들이 생명의 주님을 죽인 죄인들'이라고 책망했습니다. '생명의 주'란 '생명을 주관하는 자, 생명의 근원, 생명의 원천이란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없지만 특히 원어에는 '너희들이'라는 말로 그들의 죄를 정면으로 지적하면서 공격하고 있습니다. 즉 '너희들이 예수를 죽인 죄인들이요, 살인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의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역사적으로는 유대인들이 죽인 것 같지만, 사실은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강하게 주는 메시지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내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소라를 들으면 무식하다고 손가락질 할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이 없으면 '예수님과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고 구원의 은총'도 없습니다. /이해가 됩니까?/ 내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나를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믿/ 
  오순절 전까지만 해도 두려워 숨어 지내던 비겁했던 사도들이 이 담대한 증거를 보십시오, 우리도 성령 충만 받으면 담대해집니다.
  "그러나" 이 접속사가 항상 천국과 지옥을 가르고, 저주와 축복을 가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믿/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니라" 여기 증인이란 법정 용어로서 '사실에 근거하여 진술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본 그대로 전했습니다. ▶15절은 베드로의 설교의 핵심입니다.

 

  ▶15절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즉 '너희가 예수를 죽였지만 그는 무덤에 갇힌 것이 아니라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입니다. '너희가 예수를 죽였지만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셨고 우리가 그 일을 목격했다'는 것입니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이 말씀은 '내가 생명을 걸고 이것을 분명하게 선포할 수 있다. 이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고백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확신 있게 전하고 있습니다. 

 

  ▶16절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계속해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시고, 성령은 베드로의 마음속에 믿음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믿음을 가지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하였을 때 앉은뱅이는 일어났습니다.
  지금까지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한 후에 이제 결론적으로 앉은뱅이가 고침 받게 된 그 능력의 근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권세가 믿는 자에게 역사 하여 앉은뱅이를 낫게 했다고 선포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출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난 믿음의 역사가 이 앉은뱅이를 완전히 낫게 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멘!/
  우리는 본문 16절을 통하여 이렇게 의역해 볼 수도 있습니다. '너희들 중에도 이 사람처럼 이런 저런 문제가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문제라도 예수를 바라보고 문제 해결을 받으라!'고 의역해 볼 수 있습니다.
  앉은뱅이가 예수의 권능으로 벌떡 일어나게 된 것처럼 너희들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예수를 바르게 믿으면 해결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믿/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 그 이름의 권세! 오늘도 역사가 일어납니다. /할/
  바울 사도는 '그 이름'을 전파하기 위해 모든 학문을 분토로 여기며, 자기의 과거를 땅에 묻고 자기의 전 생애를 선교사로 헌신해서 유럽을 전도했던 것입니다. 그 이름을 위하여, 그 분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위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행4: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17절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 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 한줄 아노라"
  베드로는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관원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이유는 '알지 못하여' 즉, 무지로 돌리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무지를 '죄와 동일시'하였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무지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성경의 무지입니다.
  베드로는 17절부터 유대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무지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그분은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오늘도 역사를 일으키고 있다고 선포합니다.
  이제 너희가 무지에서 벗어나 예수를 바로 알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주'임을 바로 알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12절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아'라고 부르면서 그들의 죄를 날카롭고도 준엄하게 꾸짖던 베드로가 이제 '형제들아'라고 부드럽고도 따뜻하게 부르면서 설교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18절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무슨 말인가 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것처럼 보이나 그것은 우연히 되어 진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의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예언해 놓은 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은 예수님이 이 땅에 어떤 모습으로 오셔서 어떻게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미리 예언해 놓은 사건입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여 생명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나 사실은 성경대로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물론 모든 사도적 설교의 중심은 '항상 구약에 예언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역사 하셨으니 이제 회개하고 주님 앞으로 돌아오면 된다는 것입니다.

 

  ▶19절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그러므로" 이 접속사는 매우 비중이 큽니다. 천국과 지옥을 가릅니다. 저주와 축복을 가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지난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라!'는 촉구입니다.
  19절부터는 이스라엘이 살 수 있는 비결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를 믿고 회개하면 구원을 받으며 유쾌하게 되는 날이 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유쾌하게 되는 날'의 의미는 '새롭게 되는 날'이라는 뜻으로 의역하면 '기분 좋은 날'이라는 뜻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예수 믿는 삶이 기분 좋은 삶이란 의미입니다.
  그런 삶은 ⑴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여기 '회개'란 '메타노이아', '방향전환'이란 뜻입니다. 즉 '너희 마음과 삶을 함께 변화시키라'는 말입니다. ▶회개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마음의 변화란 '예수 중심으로 삶의 방향전환의 변화를 뜻'합니다. 즉 마음의 변화란 땅과 돈과 명예만 바라보면서 본능적으로 살던 사람이 주님만 바라보는 삶을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사람이 '뒤로 돌아가' 180도 방향을 전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돌이켜'란 말은 '회개란 단순히 마음의 변화로만 끝나지 않고 행동의 변화까지를 말'합니다.
  ▶'돌이킨다'는 것은 세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마음을 돌이키고, 둘째, 행동을 돌이키고 셋째, 하나님께로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⑵'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는 '씻어내 버리라'는 뜻과 '싹 지어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불안의 근본 원인은 죄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도 죄 때문입니다. 이런 죄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해주십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기억도 아니 하시고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우리의 죄과를 멀리 옮기십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과거나 허물에 대하여 끈적끈적한 기억을 갖곤 합니다. '옛날에 누구였는데, 뭐하던 사람이었는데, 과거가 있는 사람인데' 그러나 하나님은 한번 용서하시면 기억도 안 하십니다. 본문은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은 결과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유쾌하게 되는 날은 어떤 날입니까? 그 날은 내 영혼이 다시 사는 날이고, 내가 새사람 되는 날입니다. ▶그런데 20-21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 유쾌한 날이 완성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20-21절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두리라"
  "곧 그리스도를 보내시리니" 예수님의 재림은 언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까? 만물을 회복하신 그때에 이루십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고 완벽한 새로운 세계를 주십니다.
  지상에서 얻는 기분 좋은 날은 그리 길지가 못하고 든든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장차 주님과 함께 영원히 누릴 기분 좋은 날은 여기에 있지 않고 저 영원한 세계에 있습니다. ▶여기 '유쾌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의 특성을 표현한 것으로서 '의와 평강과 안식과 희락'을 의미합니다.

 

  ▶22절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베드로의 권면이 이어집니다. "모세가 말하되" 유대인들이 꼼짝 못하는 사람이 바로 모세입니다. 유대인들은 '모세, 다윗, 아브라함, 솔로몬, 요셉,' 이런 사람들을 말하면 그냥 꾸벅합니다.
  베드로는 '모세오경'을 들어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신18:15절을 인용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도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했습니다.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라는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누구는 아무개 같다'는 말은 '서로 닮은 점이 많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는 본문에서 '예수'를 '모세 같은 선지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낸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인물로써 모세가 행한 일들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 많은 부분에서 서로 닮았기 때문입니다.
  ⑴모세가 자신의 형제들을 구원하려고 애굽 땅에 내려간 것처럼, 예수께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⑵모세가 종처럼 형제들을 섬겼던 것처럼, 예수께서 고난의 종(26)으로 우리들을 섬기셨습니다(막10:45).
  ⑶모세가 형제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던 것처럼 예수께서 황금 보석으로 꾸며진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하셨습니다(계21-22장).
  "너희 형제 가운데서"란 유대인 중에서입니다. 지금 베드로의 설교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 모세의 말을 듣는 것이요, 성경을 순종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23절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신18:19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모세가 예언한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가 멸망 받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 선지가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3:18절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10:10절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24절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시대는 족장시대라고 하고 그 다음 왕정시대를 선지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무엘, 엘리야, 엘리사, 예레미아, 이사야 전부가 왕정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들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모든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맞추고 있습니다. 예수의 초림의 예언이 성취된 것처럼 예수의 재림의 예언도 곧 성취될 것입니다.

 

  ▶25절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너희는 선지자의 자손이요" 이스라엘은 선지자의 예언을 들으면서 살아왔습니다. "언약의 자손"은 아브라함과 맺어진 약속입니다. "땅 위에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창12:3절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여기서 '네 씨'는 아브라함의 자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실 것을 언약한 것입니다. 땅 위의 모든 족속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 전 세계의 족속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족속이 구원받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메시지는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약속한 그 약속이 바로 우리의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26절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종을 세워" 여기 종은 사42:1-4절 중에 예언한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너희에게 먼저 보이사"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 먼저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26절은 그리스도를 보내신 목적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그런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아 죽였습니다. 그 죄를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죄로부터 건져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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