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새해의 결단/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자! (엡 4:1-6)

성령충만땅에천국 2012. 1. 8.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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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의 결단/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자! (엡 4:1-6)

 

  미국의 어느 마을에 큰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큰 파티를 배설하고서 주변에 있는 모든 이웃들을 초청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에 마지막으로 그 집에는 호수처럼 엄청나게 큰 수영장이 있었는데 수영대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집주인이 손님들에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수영장의 이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 일등으로 헤엄쳐 온 사람에게는 큰상을 주겠습니다. 세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택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나의 상속자인 무남독녀 외동딸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는 특권을 주겠습니다. 두 번째는 내 재산의 절반을 줄 수도 있습니다. 세 번째는 내가 가지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값진 보석인 다이아몬드 반지를 주겠습니다. 참고로 이것을 팔기만 하면 전 가족이 삼대 째 아무 일을 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는 엄청나게 귀한 보석입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금방이라도 뛰어들 것처럼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집주인은 사람들에게 이런 위협적인 말을 했습니다.
  '지금 이 수영장 안에는 열흘 동안 굶긴 악어 50마리가 들어있습니다. 또 물리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3분내로 죽을 독뱀 100마리를 풀어놓았습니다. 거기다 이 속에는 독 고기도 300마리나 들어있습니다. 피 냄새만 맡으면 공격합니다. 아마 5분을 넘기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수영장에서 한 걸음씩 물러났습니다. 아무도 감히 뛰어들 용기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딱 한 사람이 용맹스럽게 뛰어들었습니다. 모두가 그의 용기를 보면서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는 필사적으로 수영해서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그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나왔습니다. 집주인은 약속한 대로 그에게 상을 주기 위해서 '세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고르라'고 했습니다.
  '내 딸과 결혼하겠습니까? 아니면 내 재산의 절반을 드릴까요? 그렇지 않으면 값진 다이아몬드 반지를 드릴까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내 등뒤에서 나를 밀었는지 나는 그것부터 알고 싶습니다.' 그 분이 자의적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누가 등을 밀어서 들어갔다는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등뒤에서 우리를 밀어서 오늘까지 참 행복한 교회에서 아름다운 신앙의 길을 걸어왔습니까? 뒤를 돌아보니 그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그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할/ ◀제목 소개!▶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의 옥중서신으로서 특별히 교회론을 강조한 그런 서신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가 무엇입니까? 건물을 가리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의 모임, 곧 우리 지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아멘!/
  1-3장은 교리편입니다. 사도 바울은 1장에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창세전에 우리를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선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선포하고 계십니다. /할/
  2장에서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과 이방 사이에 있는 막힌 담을 십자가로 허시고, 죄와 허물로 죽었던 이방인들도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한 지체들이 되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되었다'고 선포하고 계십니다. /할/
  그리고 3장에서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를 우리들이 누리게 될 엄청난 영광과 축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6절에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아멘!/
  4-6장은 실천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있는데 그 첫째가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본문을 같이 상고하면서 부름에 합당한 삶이 무엇인가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할/

 

  ①왜 우리를 하나님이 불러 주셨는가? '주의 일을 하라'고 불러주셨습니다(1).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4절에도 반복하여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바울은 여기에서 '부르심, 즉 소명'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두 가지의 큰 범위가 있는데, 하나는 구원으로의 부르심이요, 다른 하나는 사명으로의 부르심입니다. 구원으로의 부르심은 모두가 동일하지만, 사명으로의 부르심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하나님은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다양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 다양한 사명과 은사의 부르심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바울은 11절에서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있고, 장로가 있습니다. 가르치는 자가 있고, 봉사하는 자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철저한 소명의식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교회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필요할 때 필요한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모세를 부르셨고,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부르셨습니다.
  왜 불렀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은 내 마음대로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할/
  왜 불렸습니까?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부르셨고, 우리를 필요하기 때문에 부르셨습니다. 왜 불렸습니까? 주의 일을 하라고 부르셨습니다. /아멘!/ 여기 부름은 '소명'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일'의 의미도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주의 일을 열심히 하는 새해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샘터의 편집자였던 정채봉씨의 '참 맑고 좋은 생각'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미 소가 두 마리의 송아지를 낳았습니다. 자라난 송아지들에게 고삐를 매기 위해 코뚜레 할 때가 되었습니다. 맏 송아지가 농부에게 사정을 합니다.
  '제발 저에게 코뚜레를 하지 말아 주세요' 농부가 대답합니다. '코뚜레를 하지 않으면 망아지처럼 되고 말텐데' '아닙니다. 그것은 옛날 생각입니다. 두고 보세요. 코뚜레를 하지 않아도 곱절이나 일을 잘 할 테니까요' 그래서 농부는 동생 송아지에게만 코뚜레를 했습니다.
  맏 송아지는 약속대로 코뚜레 없이도 스스로 멍에를 메고 쟁기도 끌었습니다. 코뚜레를 한 동생 송아지가 지쳐 쉴 때도 힘을 내어 달구지를 끌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차츰 꾀가 나기 시작한 맏 송아지는 일을 피해 달아나기도 하고 자신을 잡으러 오는 농부에게 뒷발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맏 송아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행방을 묻는 동생 송아지에게 주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일도 하지 않고 꾀만 부려서 도살장으로 보냈지'
  일할 때 전심전력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왜? 우리는 주님께 코가 꿴 일꾼들이기 때문입니다. 일하는 소에게는 그 입에 망을 씌우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다 주십니다. /믿/
  우리는 주의 일을 하라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찍 부르셨고 어떤 사람은 늦게 부름을 받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름의 시기가 아니라 얼마나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의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 해도 교회생활입니다. 사도는 본문에서 지금 교회에 일치됨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연합되고 일치됨 그리고 하나를 이루어 살아가는 모습은 참 아름답습니다. 마음이 하나 되고 뜻이 하나 되고 의견이 하나 되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에 참 좋은 모습입니까? 거기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아멘!/
  장작불이 활활 타고 있을 때에 아무리 큰 불 가운데 있는 나무 한 조각이라도 그 타는 나무하나를 따로 떼어놓으면 그 나무는 타다가 맙니다. 우리가 아무리 자신이 신앙생활을 바로 하고, 열심히 잘한다고 해도 자기의 노력이나 열심히만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함께 한 성도들의 기도와 교제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합니다. 성도들의 교제는 이렇게 중요합니다. 건축 공사중인 주변에 가면 먼지 날고 지저분하듯이 지상교회에는 여전히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교회생활 자체가 시험되고 갈등되는 일이 많습니다.
  형제 많은 가정이 형제 없는 가정보다 시끄럽고, 어지럽히는 일도 많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 인격이 만들어지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배우는 것 같이 우리가 다 부족하지만,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도 함께 할 수 있고, 교회를 통해서 내 신앙도 붙들린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할/


  ▶소명의식을 가진 자는 몇 가지 정신 자세가 필요합니다.
  ⑴소명의식을 가진 자는 우월의식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또 비교의식을 가져서도 안 됩니다. 맞습니다. 성령으로 하나 되기 위해서는 소명의식이 강해야 합니다.
  ⑵소명의식을 가진 자는 오직 목표의식만 가져야 합니다. /아멘!/
  ⑶인격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신앙은 곧 인격입니다. 주님을 닮는다는 것은 곧 주님의 마음, 성품, 인격을 닮는 것입니다. 주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하고 인내하고 용서하는 인격적인 삶을 통해 우리 신앙은 온전해져 갑니다. /할/


  ▶사명에 충성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덤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⑴하나님께서는 사명을 주실 때 꿈부터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쓰시지 않고 꿈을 쓰시는 분이십니다. 그 꿈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꿈입니다. 그 꿈이 바로 하나님의 소원이요, 그 꿈을 받은 사람이 바로 사명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쓰실 때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꿈을 보여주셨습니다. 양을 치고 있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꿈부터 주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바울은 말했습니다. 빌2:13절에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할/
  ⑵하나님께서는 사명을 주실 때 사람도 붙여 주십니다. 일에는 반드시 동역자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빌립보로 무조건 전도하러 떠났습니다. 그 곳에서 루디아를 만났습니다. 그 집에서 빌립보 교회가 개척이 되었습니다. /아멘!/
  ⑶하나님께서는 사명을 주실 때 능력도 주십니다. 모세는 양이나 치던 목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못 하겠다는 모세에게 지팡이를 던지라고 하니 뱀이 되었습니다. 뱀을 잡으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손을 품속에 넣었다가 빼니 문둥병 손이 되었습니다. 다시 품속에 넣었다가 빼니 성한 손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그 지팡이를 통하여 기적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그 지팡이로 그 후 14가지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려고 하는 자에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아멘!/
  ⑷가장 귀한 축복은 하나님은 사명을 주실 때 동행의 복도 주십니다. /할/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할/
 
  ②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고난도 같이 온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의 고백을 보세요!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지금 사도 바울은 자기가 감옥에 갇혀있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왜 바울이 감옥에 갇혔습니까? 죄를 지어서입니까? 아닙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려고 복음을 전하다가 복음때문에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그래서 '주안에서 내가 갇혔다'고 고백하고 있지요!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늘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수하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 자기가 주를 위해서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침내 주를 위해서 순교의 피까지도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할/
  여러분!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 때로는 힘들 때도 있습니다.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1950년대 말 우리나라에 오셨던 미국의 선교사님 가운데 '존 크레인'이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의 한국 명은 구례인(具禮仁) 선교사님이십니다. 이 분이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강의하시면서 종종 학생들에게 이런 말씀을 했다고 합니다. '조선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선택을 받은 민족입니다. 그래서 이름도 조선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조선을 영어로 쓰면 어떻게 됩니까? 'Chosen people'로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이 민족이 이 만큼 복을 받고 사는 것도 '선택받은 백성'이기에 하나님이 쏟아 부어 부신 축복인줄 믿습니다. /아멘!/
  ▶'존 크레인' 목사님이 안식년을 맞이해서 미국으로 잠시 귀국하셨을 때의 일입니다. 시골에 있는 어떤 교회를 맡아서 돌보고 계셨습니다. 하루는 어떤 남자성도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급히 좀 도와달라는 전갈이었습니다. 목사님은 부랴부랴 뛰어갔습니다. 크레인 목사님이 보니까 참으로 비참한 광경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사건은 이러했습니다. 이 남자가 자기의 두 어린 자녀를 데리고 강에 낚시를 갔습니다. 아버지가 낚시를 하는 동안에 어린 두 자녀가 물놀이를 하다가 물에 빠져 죽고 만 것입니다. 두 어린 아이의 시체를 가지고 집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사이에 집에서는 큰불이 나고 말았습니다. 혼자 집을 지키고 있던 그의 아내는 불길을 잡지 못하고 그만 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불에 타 죽은 아내의 시신과 물에 빠져 죽은 두 아이의 시체를 앞에 놓고서 그는 어쩔 줄 몰라 오열하면서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크레인 목사님도 그 끔찍한 광경을 보고서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동안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던 목사님은 정신을 차리고서 그 성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여, 이제 형제는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형제는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그 동안 가지고 있던 신앙을 저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비참한 사건을 보면서 형제는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고,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더 두려워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가운데서 형제는 무엇을 택하시겠습니까?'
  그는 가만히 생각하더니 입을 열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 저는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겠습니다.' 그는 그 큰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택하셨습니다. /할/
  여러분! 우리들의 삶 속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닥칠 때도 있습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편단심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그런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합니다. /할/ 주님은 당부하시기를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불러주신 그 길이 결코 쉬운 길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 때로는 힘들 때도 있고, 어려울 때도, 속상할 때도 있으며 마음에 상처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앞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겠다는 믿음의 각오와 결단이 오늘 신년 새해 두 번째 주일에 나와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님들에게 새겨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③부름에 합당한 삶의 내용이 무엇인가?(2-3)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여기서 합당한 덕목 다섯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차례대로 생각해 보자!


  ⑴겸손하라!

  여기의 '겸손'은 부름 받은 성도들의 내면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소개할 때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같다고 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나는 팔푼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것입니다. 또한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으며, 자신은 모든 사도들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사도 바울은 유대교의 엘리트 중에 엘리트였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뒤 사울이, 바울로 바꿔졌습니다. 큰 자에서 작은 자로 낮아졌습니다. 그는 평생 겸손함으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행20:19절에 보면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겼다'고 자기의 에베소 3년간의 목회사역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에베소 3대 목회철학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겸손과 눈물과 시험을 참고 즉 인내'를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목회자세입니다.
  ▶'모든 겸손'으로 주를 섬겼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겸손한 목회를 한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좋은 일도 겸손하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실망하게 합니다. 왜 사람들이 구제하고 뺨 맞는 줄 하십니까? 겸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열매가 없습니까? 겸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할/
  바울은 인간적인 힘과 지식과 방법으로 목회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겸손으로 목회를 했습니다. 겸손도 '모든 겸손'으로 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모든 겸손을 온전한 겸손을 의미합니다.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많은 뜻이 있겠습니다만 먼저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드러나는 것은 겸손히 아닙니다. 자기가 죽어야합니다. 주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아멘!/
  내 생각, 내 주장, 내 방법으로 믿고 가면 겸손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주님을 위해서 일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일하면서 자기도 갈등이 있고, 남에게도 갈등을 주는 것은 겸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 내 방법들은 자꾸 내세우기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전도학에서 늘 강조하는 중요한 원리하나가 '논쟁에는 지고 전도에는 승리하라'는 말입니다. 논쟁에서 이기려고 마음먹으면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겸손하지 않는 자세로 복음을 전했을 때, 상대방은 '내 말이 맡기는 맞다. 그러나 내가 믿나 봐라'는 식으로 반응합니다. 전도의 열매를 맺으려면 겸손의 덕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 겸손은 주님을 생각할 때 나타납니다. 주님은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묻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각과 주님의 방법을 생각하는 것, 그것이 겸손입니다. 주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는다'(마11:29)고 하셨습니다. 겸손은 주님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주님만을 생각하고,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의 뜻만을 생각하면 그것이 겸손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 스스로를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종입니다. 종은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종은 철저하게 주인을 위해서 살아야 할 사람입니다. 시키는 대로 사는 것이 종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참된 겸손이란 자기의 포기입니다. 그리고 온전히 주님만을 신뢰하는 영적 태도를 의미합니다. /아멘!/
  사도바울은 본문에서도 '모든 면에서 겸손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겸손은 모든 축복의 근원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죄의 근본이 되고, 겸손은 모든 덕의 어머니가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이 낮은 곳으로 모임 같이 하나님의 은혜도 낮아진 자, 즉 겸손한 자에게 임하게 됩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죄인으로 여기는 진정한 태도입니다. 자기의 부족, 결함, 되지 못한 면을 붙들고, 자기를 부인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생활입니다. 
  '모든 겸손'이라고 했으니 전적인 겸손을 행해야 합니다. 부분적인 겸손히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람에 따라서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면 안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를 대해도 겸손한 자세를 취해야 됩니다.
  사람은 강자 앞에서는 약해지고 겸손하며, 약자 앞에서는 강해지고 교만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겸손은 모든 겸손,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아멘!/
  ▶'벤 자민 프랭클린'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청운의 꿈을 안고 도시로 나가려고 뜻을 정하고 목사님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충고를 부탁합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말없이 프랭클린만 쳐다보시고 말씀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안녕히 계세요' 인사를 하고 나오다가 그만 문지방을 들이받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프랭클린은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목사님이 프랭클린에게 말합니다.
  '여보게, 앞으로 어디를 가든지 고개를 숙이고 다니게. 그리고 아무리 언짢은 일을 당해도 인상쓰지 말고 환하고 밝은 표정을 잃지 말게나. 그러면 어디를 가든지 성공할 수 있을 걸세' 그때 프랭클린은 결단합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 항상 먼저 고개를 숙이자. 겸손한 자세를 취하자. 그리고 아무리 언짢은 일을 당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도 기쁜 표정, 밝고 환한 표정을 잃지 말기로 하자' 이것을 좌우명으로 삼았습니다. 그 결과 프랭클린은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이자 미국의 초대 정치인 중의 제일 존경받는 정신적인 지주로 꼽히게 되었습니다. /할/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복 주십니다. 벧전5:6절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또 잠11:2절에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그리고 잠22:4절에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할/
  신년 새해부터 더 겸손해 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⑵온유하라!

  온유란 따듯하고 부드러움입니다. 온유하다고 해서 무능한 것이 아니라 부드러우면서도 힘과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부드러움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외유내강'이란 말을 씁니다. 우리의 겉모습은 따뜻하고 부드러워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문제만은 도저히 양보하지 않는 강한 모습이 보여져야 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우리 엄마는 부드러운 분이셔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예배드리는 일에는 엄격하신 분'이라는 평을 받아야 합니다.
  온유하다고 해서 한없이 양보하고 의로운 진리 앞에서 뒤로 빼는 모습을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내적으로는 강하나 외적으로, 사람들에게는 유하라는 말입니다. /아멘!/
  ▶하루는 갈대와 감람나무가 서로 힘 자랑을 했답니다. 마침 거센 폭풍이 불기 시작하자 갈대는 이리 굽히고 저리 쏠리면서도 어렵지 않게 돌풍을 잘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강하다고 자랑하며 뻣뻣이 버티던 감람나무는 그만 뚝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최후의 승자는 뻣뻣한 사람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믿/
  온유한 사람은 대인 관계에서 친절하고 예의 바르고 성내지 않고 자기주장 자기고집을 세우지 않는 사람입니다. 부당한 대우에도 불평치 않으며 설령 자기의 의견이 관찰되지 않았다고 분을 품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불의에 대해선 엄격하고 진리에 대해서는 용감한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어떠한 고난 앞에서도 그것을 수용하며 감사와 기쁨을 잃지 않는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온유'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뜻합니다. 온유는 잘 길들여진 말이 마부의 명령을 잘 순종하듯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대로 잘 순종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온유와 겸손은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온유한 자는 사람은 '자기를 다스리는 마음'입니다. 잠16:32절에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온유한 사람은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습니다. 시37:11절에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이런 축복이 올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⑶오래 참아라!

  신앙생활은 오래 참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인내해야 하는가? 천국에 갈 때까지 인내하고 참아야 합니다. 참는다는 것은 부당한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자기를 모함합니다. 누군가가 자기 약을 올립니다. 억울합니다. 얼마든지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견디는 것입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한 번 참을 것을 두 번 참는 것이고, 두 번 참을 것을 세 번 참는 것입니다. 끝까지 참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오해가 풀리고 자기 입장이 바로 세워지게 될 때까지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래 참는 것은 어떠한 환경, 어떠한 상황에 있어서든지 낙심하지 않고 꾸준히 견딘다는 뜻입니다. 어떠한 고통, 고난이 있을지라도 백절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참고 견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인 관계에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을지라도 보복하지 않고 오래 참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악한 무리들에게 무리한 모욕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보복할 수 있는 권세가 있었지만 참으셨습니다. 오래 참고, 끝까지 참으심으로 구속을 성취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오래 참으심과 끝까지 참으심을 배워야 합니다. /믿/


  ⑷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라!

  여기 '용납하고' 이 말의 헬라어 원 뜻은 '담요를 던져준다'는 말입니다. 즉 담요로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동기가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 가운데서 덮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용납이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고, 다른 사람의 약점을 포용하는 관용을 말합니다. 비록 내 의사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바다와 같이 넓은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을 감싸주라는 뜻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용납이 있고, 용서가 있습니다.
  교회서도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실수도 있고, 마음에 안 맞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서로 이해하고 용납하면 교회는 항상 화평하고 사랑이 넘치게 됩니다. 그러나 조그만 실수, 못마땅하다고 따지고 물고늘어지면 화목이 깨지게 되고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먼저 내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살피고, 상대방은 이해해 주고, 사랑가운데 용납하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먼저 내 부족을 발견하고 내가 먼저 책임을 지고, 다른 사람의 실수는 용납하면 은혜로운 교회(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할/
  사람들은 보통 한두 번은 잘 참습니다. 그러나 계속 괴롭히면 '에이 참는 것도 한도가 있지' 라고 화를 버럭 냅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참았던 수고가 헛일이 되고 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우리는 '에이 참는 것도 한도가 있지'가 아니라 '에이 참는 것은 한도가 없어' 라고 되새기며 참으면 결국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처럼 목적을 이루는 축복이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아멘!/
  신앙생활에 승리는 오래 참음에 있습니다. 언제까지 참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참아야 합니다. 히12:1절에서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라고 했습니다. 고전13:7절에서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려면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을 지라도 오래 오래 참으시기 바랍니다. 속이 상할 때도 있고 화가 날 때가 있어도 십자가상에서 끝까지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오래 참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⑸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3-6)
  성령께서 성도들이 하나 되도록 해 놓으셨는데 이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화목하고 다정한 모습입니다. 일치되고 하나 된 모습입니다.
  화목한 가정, 다정한 부부, 일치된 교회, 화목한 삶을 보면 보기에도 참 아름답습니다. 찬양대의 찬양이 화음이 잘될 때 듣기가 얼마나 마음이 편하고 감미롭습니까? 그것이 일치되고 하나 되는데서 오는 멋이고 맛이고 아름다움입니다. /할/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마음이 하나 되고 뜻이 하나 되고 의견이 하나 되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에 아름답습니까? 거기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시133:1절에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할/
  ⑴하나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주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라' 이 말은 '하나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 되는 일이 가장 선한 일이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나 되는 곳에 조화와 평화 그리고 안정과 평안함이 있습니다. 두세 사람이 모여 한마음으로 기도하면 응답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연합과 하나 됨의 힘이고 능력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하나 되지 못하고 분열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오늘을 분열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보면 모두 분열되고 나누이고 흩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 되는 것인데 사람들이 그 뜻을 거스르고 자꾸만 분열하고 나누이고 흩어집니다. 그러니 그 삶에 평안과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살기 때문입니다. /믿/
  ⑵하나 될 때 힘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하나 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함께 마음을 모으면 힘이 생깁니다. 그런데 분열되면 힘이 약화됩니다. 가정이나 교회 그리고 나라가 나누이고 국론이 갈라지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났습니다. 독일인들은 전쟁에 졌다는 생각 때문에 깊은 절망감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들은 죄책감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쟁에 대한 책임을 서로에게 떠맡기면서 서로가 서로를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계속해서 분열되어 나갔습니다.
  이때에 스위스에 머물고 있던 유명한 신학자인 칼 바르트가 자기 조국 독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분열의 아픔을 겪고 있는 독일인들을 향해서 가는 곳마다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러분, 저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역사의 주인이 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여러분도 그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 분 안에서 한 형제요, 한 자매된 자들입니다. 서로를 정죄하지 마십시다. 좀 더 따뜻하게 서로가 서로의 손을 꼭 쥐어주십시다. 그리고 함께 일어나십시다. 우리는 새로운 조국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반드시 새로운 조국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됨을 외쳤습니다. 모두가 그 말에 동감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정죄하는 것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손에 손을 쥔 힘을 더 쥐었습니다. 따뜻하게 손을 잡고서 함께 일어났습니다. 쓰러진 조국을 건설했습니다. 결국은 '라인강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아멘!/
  ⑶하나 될 때 살아가는 삶도 쉽습니다. 좋은 이웃을 만나서 함께 살면 그 삶이 아주 쉬워집니다. 서로 돕고 도와주고 격려하며 살아가는 삶, 얼마나 즐거움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까?
  ⑷그런데 이 하나 됨은 노력해야 얻어집니다. 분열은 가만히 놔두면 그냥 이루어집니다. 밭을 갈고 그냥 놔두면 잡초가 무성하듯이 모든 질서를 그냥 방치하면 분열, 흩어짐, 나누임이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를 이루고 일치를 이루는 데는 반드시 수고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가정의 하나 됨, 그것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노력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⑸교회도 하나 되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우리 한국인에게 한 가지 은사가 있다면 그것은 싸우는 일입니다. 한국인은 가는 곳마다 불화를 일으키고 분열하고 싸우는 특징이 있습니다. 교회도 한국인들이 모인 교회이기 때문에 이 갈등과 불화와 싸우는 일이 예외가 아닙니다. 한국인이 모인 곳에는 으레 이 다툼이 있습니다.
  언젠가 LA 타임지에서 한국인을 평한 기사가 있었습니다. 신문은 한국인을 네 가지로 평했습니다.
  ㈀한국인은 경제에 아주 열심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인은 경제생활에 아주 지독해서 유대인을 능가한다고 평했습니다.
  ㈁한국인은 교육에도 열심이어서 미국에 와서도 기를 쓰고 좋은 학군으로 몰려다닌다고 평했습니다.
  ㈂한국인은 어디를 가나 반드시 교회를 세운다고 했습니다. 일본인은 상사를 세우고 중국인은 음식점을 세우는데 한국인은 교회를 세운다고 했습니다.
  ㈃한국인은 어디를 가나 싸운다고 평했습니다. 참 창피한 일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도 이 싸우는 일이 우리민족의 특징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렇게 평가하고 이 신문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한국인이 미국에까지 와서 싸워도 미국은 손해 볼 것이 없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은 자기들끼리만 싸우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얼마나 쪽팔립니까?  
  이제는 우리 모두가 연합하는 시대입니다. 국가도 연합해야 하고 통일되어야 합니다. 기업도 연합해야 경쟁에서도 이길 수가 있습니다. 가정도 화평 되어야 그래야 그곳이 가정이고 쉼이 있고 안식이 있고 즐거움이 있는 가정입니다. /아멘!/
  그래서 오늘 성경은 하나 됨의 원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도 하나이요 성령도 하나이시오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으로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너희도 하나 되라는 뜻입니다. 신년새해 우리 모두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할/ (2012년 1월 8일 대예배 설교)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송수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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