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살전 5:16-22)

성령충만땅에천국 2012. 1. 28.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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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살전 5:16-22)

 

  데살로니가는 살로니가만(Gulf of Salonica)의 윗 부분에 위치한 온천지대로써 빌립보 성을 건설한 마게도냐의 왕 빌립 2세의 양자된 '카산더'에 의해 B.C. 315년에 건축된 곳으로 이 도시의 이름은 카산더의 아내인 데살로니가의 이름을 따라 붙여지게 되었답니다. 그 당시 이곳 인구는 20만 명에 이르렀고, 교통과 무역의 중심지로써 마게도냐 최대의 도시요,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가 된 곳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의 제 2차 선교여행 중 빌립보를 떠나 실라와 디모데를 데리고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도착한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행17:1-10).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바울은 먼저 회당에 들어가 3주간 이상을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습니다(행17:2). 안식일뿐만 아니라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살전2:9). 그 결과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성도가 되어 바울과 실라를 좇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그곳에서도 시기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박해함으로써 베뢰아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베뢰아에서도 박해를 당하자 바울은 아덴으로 피했습니다.
  그 후 디모데는 아덴에서 바울과 합류하고 다시 데살로니가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 후 바울 사도가 고린도까지 선교여행을 하고 있을 때 디모데가 바울에게 와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편을 말함으로 데살로니가전서를 써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를 기록한 목적은 박해 속에 있는 성도를 격려하고(3:3-5), 경건한 삶에 대한 교훈을 주고(4:1-8), 특히 주님의 재림에 대한 신앙에 확신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4:16-17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할/
  5장으로 넘어와 바울 사도는 성도들을 '빛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5절에서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빛의 아들'이란 예수께 속한 사람이요, 이는 곧 하나님의 사람이요, 예수께 소속된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할/
  그렇다면 성도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의 의미가 있겠습니다 만은 역시 우리는 자기 뜻대로 사는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들'이라는 것이 특징입니다. 사실 이게 늘 제대로 되지 않아서 아쉬움도 크고 하나님께 송구스럽지만, 원칙은 우리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존재입니다.
  기도도 내 뜻을 관철하자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오히려 내 뜻을 접자는 것이 기도입니다. 주님의 최후 기도는 '이 쓴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입니다.
  그러면 2012년의 새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새해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 실까요? 본문 19절 하반절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바꾸어 말하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좁혀 놓으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좀 더 설명을 붙이면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깊이 깨닫고 그대로 살아가라는 권면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큰 의미가 있고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한때 바울은 분명히 예수 안에서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즉 예수를 통해서 보여 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다가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제멋대로 믿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핍박자로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서는 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다메섹으로 향하여 가던 길에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가 잘못 믿었고 헛살았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통해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난 다음부터 바로 믿게 되었고 바로 살게 되었습니다. /할/
  바울이 실라와 함께 두 번째 전도여행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아시아로 가려는 뜻을 정하고 열심히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는데, 어느 날 뜻밖의 환상을 봅니다. 계획했던 아시아가 아닌 '마게도냐'에서 한 사람이 손짓하며 말합니다.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입니다.
  바울은 그 동안 아시아로 가는 모든 계획을 세웠으나 자기의 뜻을 접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실라와 함께 마게도냐 지역으로 들어가 그 첫 성인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여 첫 열매로 루디아와 그 가족들을 구원하면서 빌립보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생활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하라'고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떤 설교 가는 삼 행의 신앙이고 삼 불의 신앙이라고 정의를 했습니다.
  먼저 삼 행의 신앙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기본이고, 본질이고, 원리입니다. 이를테면 이 삼 행의 신앙은 '하라'는 적극적인 신앙의 형태를 제시해 준 것입니다.
  이 말씀은 간단한 말씀 같지만 깊이 음미해 보면 굉장히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냥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라고 했으면 경우에 따라서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면 될 것인데, 말씀 앞에 한결같이 어려운 조건을 붙여 놓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뻐하되 '항상' 기뻐하라는 것과, 기도하되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과, 감사하되 '범사에' 감사하라는 아주 어려운 조건입니다.
  그러고 나서 성경은 삼 불의 신앙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 가지 해서는 안 되는 것 즉, 이번에는 '하지 말라'는 메시지입니다. 그 세 가지는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것은 18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곧잘 민심이니 천심이니 하는 소리를 우리 주위에서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정치인들은 민심이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가를 늘 주시하고 있습니다. 이번 설 정국에도 각 당이 민심에 귀를 기울이고 올해 총선과 대선 에서 '유리한가? 불리한가'를 예이 주시하고 있습니다.
  한 때 삼김 시대에 '김심'이란 말이 한동안 유행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김심도 민심 앞에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치인들은 민초들의 탄식에 귀를 기울일줄 알아야 하며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줄 알아야 합니다. /아멘!/
  그렇다면 예수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은 어디에다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겠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뜻, 즉 천심이 어디에 있느냐를 위하여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효자인가? 부모님의 뜻을 잘 헤아려 받드는 자가 효자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잘 받드는 자가 바른 성도인줄 믿습니다. /아멘!/

 

1. 주님의 기쁘신 뜻이 무엇인가? 먼저 '하라'고 하신 '삼 행'부터 알아봅시다!


  ①항상 기뻐하는 삶입니다.

  여기 보면 '항상'이라는 부사에 악센트가 주어져 있습니다. 기쁨을 '카이로'라고 하는데, 그 뜻은 '유쾌하다, 은은히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폭죽 터지듯 잠깐 기쁘다가 불꽃 사라지듯 꺼져버리는 기쁨은 참 기쁨이 아닙니다. 은은하게 항상, 오랫동안 계속되는 것이 참 기쁨입니다.
  그런데 기뻐하되 '항상, 언제나'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즉 기쁠 때만 기뻐하지 말고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도 기뻐하는 마음을 잃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그리 쉬운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은 종교적인 언어입니다. 신앙을 떠나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할/
  기분이 좋을 때 기뻐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은 아이들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의미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그런 환경일 때도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예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기 전날 밤에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나눕니다. 내일 새벽이면 예수님은 체포됩니다. 그리고 내일 오후에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을 미리 알고 계십니다. 자기를 팔 제자 가롯 유다가 그곳에 와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감정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유다에게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좋을 뻔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그 당시의 심정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만찬을 마치고는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로 올라가십니다. 그 길은 결코 유쾌한 길이 아닙니다. 기분이 좋은 그런 등산도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 마26:30절에 보면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고 했습니다. 기분이 좋아서 찬미한 것이 아닙니다. 그 찬미와 그 기뻐함이 바로 종교적인 힘이고, 신비한 능력입니다. /아멘!/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받으면서도 찬미했고, 박해를 받으면서도 기도했고, 스데반 같은 이는 순교를 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종교적인 삶의 표현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분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할/
  ▶그렇다면 기쁨의 원천은 어디인가? 빌4:4절에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여기서 '주안에서'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 밖에도 기쁨이 있습니다. 출세한 기쁨, 성공한 기쁨, 인기 누리는 기쁨, 돈 벌고 잘 사는 기쁨 등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365일이 기쁩니다. 일생이 기쁨으로 가득 찹니다. 성공해도 불행한 사람이 있고 실패해도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건강하고 잘 살아도 불행한 사람이 있고 병들고 못살아도 행복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예수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로 결정됩니다. 항상 기뻐하는 사람,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믿/아멘!/


  ▶그렇다면 성도가 누리는 기쁨의 출처는 어디입니까?
 ⑴구원받은 것에 대한 기쁨입니다. 눅10:20절에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고, 합3:18절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⑵성령님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롬14:17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⑶말씀 속에서 위로와 기쁨이 큽니다. 렘15:16절에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라고 했고, 고전13:6절에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멘!/
  ⑷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에 기쁘고 즐겁습니다. 시63:7절에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또한 시46:1절에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우리는 근심 중에서라도 기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적인 것들 때문에 영적인 기쁨을 상실해서는 안됩니다.
  기쁨으로 살아도 우리의 인생은 짧기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자기 혼자 세상 짐을 다 지고 가는 것처럼 근심과 염려의 얼굴을 가지며 살아야 합니까?
  바울은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올 한해도 기뻐하며 신앙생활을 합시다. /할/


  ②쉬지 말고 기도하는 삶입니다.
  그냥 기도하라고만 했으면 부담이 덜 가는데 '쉬지 말고'라는 말 때문에 지키기 어려운 말씀 같습니다. 눅18장에는 '항상 기도하라'고 했고, 엡6장에는 '무시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기도가 영적인 호흡이기 때문입니다. 호흡은 숨쉬는 것입니다.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멈출 수 없는 것이 바로 호흡입니다. 기도가 바로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아멘!/ 육신의 생명이 산소를 들여 마셔야만 살 수 있듯이 영적 생명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았기에 하나님을 들여 마셔야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안 하면 죄가 됩니다. 이 죄가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를 알았던 사무엘은 삼상12:23절에서 '결단코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노라'고 결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그 말씀이 우리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그럼 밤낮 예배당에서 기도만 하며 살란 말입니까? 그럼 언제 가정생활하며 언제 사회생활을 합니까? 이런 의미의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불가능한 것 느껴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기도에는 몇 가지가 종류가 있습니다. '부르짖는 기도'와 '마음속으로 묵상하는 기도'와 '생활 속에 기도'와 '삶 자체의 기도'가 있습니다.
  여기서 '쉬지 말고'는 24시간을 입으로 기도하라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부단히 의지하라는 것이요, 항상 기도하는 마음가짐으로 생활하라는 의미요, 기도하는 정신으로 살라는 의미입니다. /아멘!/
  여러분, 기도는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신앙의 행위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기도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기도에 대한 약속들이 참 많습니다. 몇 가지만 보십시다!
  ⑴믿음으로 기도한 자는 다 받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마21:22절에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⑵하나님은 기도를 통하여 성도들을 만나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사55:6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⑶하나님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만나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7:7-8절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⑷주안에 있는 자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요15: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⑸기도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지름길이요 통로입니다. /아멘!/
  아브라함의 기도는 소돔성의 멸망의 계시를 받았고, 모세의 기도는 애굽의 학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였고, 여호수아의 기도는 태양을 멈추게 하므로 아모리 사람을 대파하였고, 한나의 기도는 사무엘을 얻는 기쁨을 맛보았고, 다윗의 기도는 모든 위기를 모면케 해 주신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또 엘리야의 갈멜산상에서의 기도는 하나님만이 참 신임을 나타내었고, 다니엘의 기도는 사자의 입을 봉함으로 구원을 체험했으며, 히스기야의 기도는 18만 5천명의 앗수르 군대를 멸절시키는 승리의 기쁨을 누리게 하였고, 바울의 기도는 빌립보 옥문을 열게 함으로써 간수장이 예수를 믿는 생명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는 탕자를 성자로 변화시켰고, 루터는 하루 세시간씩 기도하였기에 종교개혁의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야말로 위대하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지름길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멘!/
  기도는 어떤 특정한 시간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새벽에만 하는 것이 아니고, 산에 가서만 하는 것도 아니며, 어떤 정해진 시간에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삶 속에서 쉬지 말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긴장을 풀지 말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어느 순간 긴장이 풀리면 그 순간 방심하게 되고 허점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면 사탄이 틈을 타게 됩니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항상 영적으로 긴장하고 살라'는 말입니다. 엡6:18절에서 바울은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할/


  ③범사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여기서도 '범사'란 말이 묘한 말씀입니다. 범사라는 말은 '모든 경우에, 어떤 경우든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유익이 주어졌을 때는 물론이고, 손해를 보았을 때도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도 종교적인 언어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구원받은 백성으로 믿음의 감사를 할 수 있는 경지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받고 나서 감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깨달음과 자족하는 감사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믿음에서 나오는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감사는 감사 중의 감사이고, 최고의 성숙한 신앙 의식에서 주어지는 감사입니다.
  믿음의 감사는 받아서 하는 감사가 아니고 빼앗기고도 하는 감사입니다. 또 믿음의 감사는 건강해서 하는 감사가 아니고 병들고 나서도 하는 감사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감사는 오래 살고 장수해서 하는 감사가 아니고 일찍 죽으면서도 하는 감사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감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그런 감사가 아닙니다. 감사의 격이 다릅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이것이 믿음의 감사입니다. /할/
  욥이 하루아침에 10남매를 잃었습니다. 집이 무너져서 한꺼번에 10남매가 죽은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에는 전 재산을 잃어버립니다. 동방의 부자였던 욥이 소유하고 있던 많은 양과 소와 약대들을 갈대아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모두 빼앗아 갔습니다. 그는 또 아내까지 잃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몸에 병까지 들었습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부스럼이 돋아서 기왓장으로 긁어야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기적일 뿐입니다.
  그런 가운데도 그는 욥1:21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이것이 환난 중에 나오는 믿음의 감사입니다. 그래서 이 감사를 믿음의 감사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명령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말씀은 어떠한 경우든지,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평안하든지 고난스럽든지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범사의 생활 속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감사할 만한 조건을 찾아내어 감사하는 사람만이 신앙 인답게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옛날 어떤 구두를 수선하는 노인이 지금 돈으로 1억 원이나 되는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신이 났겠습니까? 그래서 그 복권을 들고 입을 맞추고, 자랑을 하고, 감사를 하고, 또 감사를 하고 그랬다고 합니다.
  이 노인이 이제는 가난을 청산하자 하고는 땟물이 밴 구두수선 하는 궤짝을 짊어지고 강으로 갔습니다. 가서는 그 궤짝을 깊은 물 속에 집어던지면서 말하기를 '가난아 이제 물러가라' 하고 던져 버렸습니다. 그 지겨운 가난이 지금 노인 앞에서 멀리 멀리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노인은 가벼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 왔는데 그런데 와서 보니까 그 복권이 궤짝 속에 넣어 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때 충격으로 이 노인이 그만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적인 감사는 찰나적인 것이요, 순간적인 것이요,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믿음의 사람들의 감사는 차원이 높은 그런 감사입니다. /믿/
  ⑴감사하는 자는 태양과 같습니다. 태양은 어두움을 물리치고 밝게 하고 온화하게 합니다. 가정에도 교회에도 감사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곳은 햇볕처럼 따뜻하고 온화합니다. 그러나 감사가 없고 불평만 있는 집안은 찬바람이 불고 냉랭합니다.
  ⑵감사하는 자는 단비와 같습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농작물은 다 말라죽습니다. 때를 따라 비가 와야 곡식에도 과일에도 윤기가 흐릅니다. 비가 오면 뿌려놓은 씨앗이 싹을 틔우게 되고 자라서 줄기가 나고 꽃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가정에도 교회에도 감사하는 자가 있어야 그곳에 메마르지 않고 새 생명의 축제가 넘쳐나게 됩니다. /아멘!/
  ⑶감사하는 자는 향기와 같습니다. 감사하는 집안, 감사하는 교회에는 향기가 납니다. 영적인 향기가 풍겨납니다. 그러나 감사가 없는 가정은 우울합니다. 고후2:15절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항상 감사하여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향기가 나기를 바랍니다. /할/
  ⑷감사하는 자는 양약과 같습니다. 잠3:7-8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되리라' 감사는 양약입니다. 양약은 병을 치료할 뿐 아니라 몸을 보호해 줍니다. 감사하는 것은 보약 같고 양약 같습니다. /아멘!/


  ▶마케도니아(데살로니가) 교회의 감사를 알아보자!(고후8:1-5)
  ⑴시련 중에 드린 감사입니다(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바울이 마케도니아 교회에서 보낸 헌금을 받아 들고 눈물로 기도하며 한 말씀이 바로 고후8:2절의 말씀입니다. 마케도니아 교회는 환란 중에 진짜 감사를 했던 교회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어려워지면 뒤로 물러나는 습성이 있습니다. 사업도 그렇고, 살아가는 것도 그렇고, 신앙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마케도니아 교회는 오히려 환란과 시련 때문에 더 풍성한 감사를 했던 교회입니다.
  ⑵힘껏 들이는 감사입니다(3).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였다'고 했습니다. 감사는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억지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자원해서, 또 마음을 다 해서 해야 그것이 감사입니다. 마케도니아 교회는 '힘에 지나도록' 감사했다고 했습니다. 고후9:6-7절에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아멘!/
  ⑶자신을 들이는 감사입니다(5).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렸다'고 했습니다. 무엇 보다 좋은 봉헌은 '자신을 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선의 봉헌입니다. 우리가 감사해서 손해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것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믿/
  ▶모르고 사는 감사도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면 그처럼 괴롭고, 슬프고, 답답하고, 불안스러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⑴우선 내가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언제 몇 월 며칠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⑵또 우리는 내일을 모르고 삽니다. 이것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내일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살기에 오늘을 즐기며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할/
  ⑶그리고 내 몸에 무슨 병이 있는지 모르고 살기에 지금도 잘 먹고 잘 지냅니다. 알고 보면 불안해서 살 수 없습니다. 모르고 사는 즐거움! 참으로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⑷또 역사의 종말이 언제 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감사요 행복입니다. 만일 그 날과 그 시를 알고 있다면 지금 사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완전히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⑸또 주님이 언제 오실 지 모르고 있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그래야 항상 긴장하고 깨어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⑹그러기에 믿는 우리들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빌4:6-7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할/
  철학자 '힐티'는 그의 '행복 론'에서 '감사하라! 그리하면 젊어진다. 감사하라 그리하면 발전한다, 감사하라 그리하면 기쁨이 샘솟는다.'고 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명령이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 감사하십시오,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이웃에게 감사하십시오, 우리가 감사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세상에 올 때 빈손으로 온 것을 알아야 하며, 죄인임을 기억해야 하며, 용서받음과 구원받은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 불평과 불만이 있는 곳에 어두움의 그림자가 짙게 깔리며 그 어두움 속에서 마귀가 집을 짓는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나 반대로 감사하는 마음은 성령이 오십니다. 감사의 최고의 표현은 예배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기도도, 찬양도, 헌금도 모두 감사의 표현입니다.
  신앙은 순풍 중에도 감사하고 역경 중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마음속에 끊임없이 갈등, 실망과 불평과 원망과 좌절이 심겨져 있고, 미움과 분냄도 도사리고 있지만, 그러나 감사하라고 하십니다. 감사하면 감사의 마음이 열리고 감사의 조건이 임하게 됩니다. /믿/

 

2. 이제 '하지 말라'는 삼 불의 신앙을 알아보자!


  ①성령을 소멸치 말아야 합니다!(19)
  여기 '소멸'이라는 말은 '불을 끈다'는 뜻으로,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말은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는 말입니다. /할/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지나치게 과민하게 접근을 했습니다. 아주 무절제했고, 혼잡했고, 은사 중심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광신적인 교회였고, 영적으로 교만해서 결국에는 영적 타락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도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너무 성령의 활동을 배제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신앙이 냉랭했고, 이론적이었고, 매우 논리적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이 뿌리는 있고, 뼈대는 있어서 좋은데, 대신 그 신앙은 힘이 없고, 용기가 없습니다. 알기는 많이 아는데 용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형태에서 이 두 가지는 극과 극입니다. 이것은 둘 다 좋지 않은 형태입니다. 지나친 은사 중심 신앙도 좋은 것이 아니고, 지나치게 이론적인 신앙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이성적이어야 하고 논리적이어야 하지만 동시에 성령의 역사에 민감해야 합니다. /할/


  ②예언을 멸시치 말아야 합니다!(20)
  데살로니가 교회는 성령에 의한 판단보다도 인간적인, 이성적 판단을 우선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연히 예언도 무시하게 되고, 나중에는 멸시하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위기입니다.
  이렇게 예언을 멸시하게 되면 나중에는 예수의 재림 교리까지도 흐려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 신앙은 이미 생명을 상실하고, 내용을 모두 버린 껍데기 신앙밖에는 남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호령과 천자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
  예언은 하나님의 계획을 말합니다. 그 계획 속에는 경고가 들어 있고, 장래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언을 무시하게 되면 결국 손해 보는 것은 인간 자신입니다. 성경 중에서 예언서를 보십시오. 그 예언 속에는 모두 장래에 될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무시하게 되면 미래를 잃게 됩니다. 이렇게 예언을 멸시하고 무시하다가 낭패를 당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탄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제2차 대전 때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 상공에서 비행기로 경고 전단을 뿌렸습니다.
  '1945년 8월6일 낮 12시에 히로시마시에 원자탄을 투하하니 시민들은 모두 50㎞ 밖으로 대피하라'고 일주일 전부터 경고 전단을 살포했습니다. 이것은 경고입니다. 이를테면 이것이 예언이라는 말입니다. 앞으로 될 일을 미리 알리는 선포입니다.
  그 경고의 글 속에는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살길에 대한 안내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무시하면 결국 자신들이 손해를 보게 됩니다. 손해뿐만이 아니고 죽습니다. 이보다 더 절박한 메시지가 어디 있습니까? 사람들은 마땅히 이 메시지를 믿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그보다 더 중요한 예언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단을 받아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예언을 무시했습니다. 비웃었습니다. 그 메시지를 믿지 못하고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그 메시지를 읽고 나사 그대로 믿고 대피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 예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메시지를 믿었던 사람들만 살아남았습니다.
  1945년 8월 6일 정오, 약속대로 예언대로 원자탄이 히로시마시에 떨어졌습니다. 그 순간 뻔쩍 하면서 단 3초 동안에 3천도의 열을 동반한 원자탄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 바람에 히로시마시의 30만 인구 가운데 20만 명이 순간적으로 죽음을 당했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모두 핵방사능 때문에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렇게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예언을 멸시치 마라. 사람들은 예수의 재림이 없다고 하나 보라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이와 함께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라' 언젠가는 예언 그대로 주님은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신앙인은 이 예언의 소리에 민감해야 합니다. 반신반의하거나 비웃거나 무시하면, 어느 날 히로시마시에 원자탄이 터져서 모두가 멸망했듯이 그렇게 될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언을 멸시치 말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아멘!/

  ③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22)
  사람이 선해지는 것보다 악해지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사람이 선해지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고, 수고가 필요하고, 시간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악해지는 데는 수고도 필요 없고, 노력도 필요가 없습니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저절로 악해집니다.
  사람이 악하게 변하는 데는 환경이라는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사느냐'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가 누구와 자주 어울리느냐'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주위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입니다.
  ▶맹모 삼천지교란 말이 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묘지 근처로 이사를 했더니 아이가 날마다 장사지내는 흉내를 내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시장 근처로 이사를 했더니 아이가 매일 장사하는 흉내만 내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서당 근방으로 이사를 했더니 비로소 공부하는 모습으로 돌아가더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악해지는 데는 이 환경이 주는 영향이 굉장히 큽니다.
  또 사람이 악해지는 데는 무감각한 마음이 문제입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으로 마음이 괴롭기도 하고 번뇌스럽기도 하지만 조금 있으면 그것도 무뎌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타락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쩌다 주일에 예배를 한 번 빠져 보십시오. 얼마나 마음이 괴롭습니까? 금방 벌을 받을 것 같고, 불안하고, 미안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두 번 빠지고 세 번 빠져 보십시오. 그런 대로 익숙해집니다.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만 주일 빼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악은 선보다 전염성이 강합니다. 그래서 악한 사람이 선해지기보다는 선한 사람이 악해지기 더 쉬운 것입니다. 아이들을 보십시오. 선한 행동은 배우지 않고 나쁜 버릇은 아주 쉽게, 힘들이지 않고 배웁니다. 왜냐하면 선보다 악이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앵무새를 길렀습니다. 그런데 이 앵무새가 욕을 잘했습니다. 주인이 이 못된 버릇을 고쳐 보려고 애를 많이 썼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윗집의 앵무새는 노래를 잘했습니다. 그래서 이 주인이 욕을 잘하는 앵무새를 가지고 이웃집에 가서 주인에게 노래 잘하는 앵무새와 하루만이라도 함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면 욕하는 앵무새도 노래를 배우게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 욕 잘하는 앵무새가 노래 잘하는 앵무새와 하룻밤을 같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까 그렇게 노래를 잘하던 앵무새도 욕을 하더라고 합니다. 악은 이렇게 전염성이 강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습니다. /아멘!/

 

  3.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⑴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롬8: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⑵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들이 하나님의 가족이 됩니다. 마12:50절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⑶가장 중요한 약속이 주님의 뜻대로 사는 자에게 임하게 됩니다. 마7:21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할/
  ⑷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는 것도 있어야 합니다. 고후7:10절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또 약고보 장로님은 약4:9절에서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할/
  우리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할/  (2012년 1월 29일 대예배 설교)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송수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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