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주님의 고난 곁에서! (마 27;38-44/눅 23;39-43)

성령충만땅에천국 2012. 3. 31. 11:23

주님의 고난 곁에서

 

                                                                                          마 27;38-44.

                                                                                          눅 23;39-43.




고난주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는 거룩한 주일입니다.

 

서울 대형 병원에서 일하시는 원목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병원에서 일하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자신이 병원에서 10년 동안 투병생활하면서 입원하여 있었습니다. 10년 동안 입원하였다고 생각하여 보십시오. 돈, 고난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수술을 12번 하였습니다. 한번은 아예 죽었습니다. 그런데 시체를 넣는 냉동실이 가득차 있어서 들어 가지 못 하였습니다. 시체실 바닥에 시신을 놓아 두었습니다. 아침에 직원이 그 날 나가는 시신을 꺼내고 목사님 시신을 넣으려고 보니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전날 냉동실에 넣었으면 죽은 몸이었습니다. 너무나 감사하여서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평생을 주님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병원에 들어가서 자기처럼 고난을 받고 있는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고난받고 있는 환자들에게 늘 위로의 말을 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수술을 앞두고 걱정하는 환자에게는 기도하고 나서 말해줍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시체실까지 갔었어요.”

장기 입원하고 있는 환자가 짜증을 부리면 말합니다.

“나는 10년 입원하였었지요.”

이런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환자들이 위로를 받곤 합니다. 다른 사람의 고난곁에서 위로자가 되는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가장 큰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모든 사람의 결론은 생명입니다.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구원 즉 영생이란 말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갇혔습니다. 바울을 지키던 간수가 바울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행 16;30)

바울이 말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입니다. 천하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없습니다.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 암으로 죽기 직전에 성직자를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죽음 후의 세계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내세를 공부하다가 구원의 확신을 받고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죽음앞에는 명예와 직위가 필요없습니다. 인생의 결론은 구원입니다.

 

우리나라 최고 부자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침대 옆에 의사 세 명이 서있었습니다.

“나를 일년만 더 살게 하여 주면 10억씩 주겠다.”

그러나 의사도 일년을 더 살게 하여 줄 수 없었습니다. 인생의 결론은 생명입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입니다.

무덤속에 있는 정 주영 현대 회장에게 1조원을 주면 살려 주겠다고 하면 즉시 그렇게 하겠다고 할 것입니다.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무덤속에 있는 박 정희 대통령에게 살려 줄 터이니 청와대 청소부할 테냐고 물으면 즉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인생의 결론은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시려고 십자가에 못박혀 지금 죽어가고 계신 현장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에 죽어 가고 계셨습니다. 우리 죄 때문에 죄없으신 예수님이 죽고 있습니다. 가장 큰 고난을 당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난 곁에 세 종류의 사람이 보이고 있습니다.

 

1. 지나가는 사람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하며..”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지나갑니다. 관심도 없습니다. 한 사람은 지금 극심한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십자가 고난은 인생의 고난 중에 최고 고난입니다. 그런데 그 옆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내 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고난은 아무리 아파도 나만 아니면 됩니다. 머리를 흔들며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일본 사람이 그린 <바보 예수>라는 초상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한쪽 눈이 찌그러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고난과 아픔을 보고 눈물을 많이 흘려서 찌그러진 눈입니다. 입술은 쪼글쪼글 말라 있습니다. 가슴은 앙상하게 말라져 있습니다. 제대로 먹지 못 하고 자지 못 하여 그렇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권세가 있으십니다. 능력도 있습니다. 12영이나 되는 천사들을 동원하실 수 있으십니다. 십자가에서 내려 오려고 하면 얼마든지 내려 오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저항 한번 안 하시고 힘없이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모습니다. 바보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바보같습니다. 그런 바보같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초상화입니다.

그런데 그 옆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 교회에 지나가는 사람인가요? 아니면 뿌리를 내린 사람인가요? 지나가는 사람은 뿌리가 없고 뿌리가 없는 사람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은 지나가는 사람일뿐입니다.

 

겨울철에 보리가 파릇파릇 나옵니다.

그러면 보리밭에 들어가서 사정없이 발로 짓밟아 줍니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고 농사를 망치는 것인가 보다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겨울철에 보리를 밞아 주지 않으면 뿌리가 들떠서 말라 죽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돋아난 줄기와 뿌리를 사정없이 밟아 주어서 땅에 뿌리가 내리도록 하여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줄기가 강해집니다. 그리고 뿌리가 단단히 내려집니다. 그래서 보리 한 이삭에 보리알이 450알이 열리는 데 줄기가 그 무거운 알들을 능히 지탱할 정도로 강해지고 뿌리가 튼튼하여 진다는 것입니다.

지나가면 안 됩니다.

지나가는 사람의 자세를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하며..”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려고 고난받으시는 예수님을 모욕하였습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모욕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자기를 구원하셨다면 우리를 구원시키지 못 합니다. 이들은 엄청난 실수를 하면서도 자기가 무슨 실수를 하는 지 모르고 있습니다.

단순히 지나가면서 모욕이나 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었습니다. 어느 모임이나, 어느 단체나, 어느 교회나 지나가면서 모욕이나 하는 사람을 좋아 하지 않습니다. 뿌리를 그 곳에 내리고 헌신하고 봉사하고 일하는 사람을 좋아 합니다.

고난당하시는 예수님 곁에는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생명되신 예수님 옆을 지나가면서 모욕하던 이들은 지금 지옥에 가있습니다. 펄펄 끓는 지옥불속에서 땅을 치며 울부짖을 것입니다.

“‘내가 그 분 옆을 지나갔었어. 그 때 그 분을 믿었어야 했는 데. 그 좋은 기회를 내가 놓지고 뜨거운 불속에서 고통을 당하는구나!”

혹시 여러분도 생명되신 예수님을 지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가족들도 교회옆을 지나가고만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옆을 지나 지옥으로, 교회 옆을 지나 음부로 가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2. 희롱하는 사람들

고난받으시는 예수님 곁에는 희롱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합심하여 희롱하였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희롱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본래 대제사장은 한 명입니다. 대제사장은 세습제 종신제입니다. 아버지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면 아들이 대제사장직을 물려 받습니다. 세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대제사장입니다. 지금 교황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가 정치적으로 대제사장을 이용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뭉치게 되니까 대제사장을 여러 사람을 임명하였습니다. 물론 돈주고 팔기도 하였습니다. 로마는 꿩먹고 알먹고 였습니다. 그래서 사이비 대제사장이 많았습니다. BC 37-AD 26 63년동안 대제사장이 28번 바뀌었습니다. 63년이면 겨우 두 세명 정도 대제사장이 나타날 기간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는 대제사장이지 대제사장들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당시 대제사장들은 희롱을 받고 있는 이들입니다. 희롱받고 있는 이들이 생명되신 예수님을 희롱하고 있습니다.

서기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연구만 하였지 율법대로 살지 못 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대로 살아가는 바리새인들로부터 희롱을 받고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장로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장로들은 정치 세력에 아부하며 이리 붙고 저리 붙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올바른 지도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공의를 따르지 못 하는 이들이었습니다. 희롱받고 있는 이들이 예수님을 희롱하였습니다.

이들도 생명을 얻지 못 하였습니다.

희롱한다는 말의 원어는 흉내낸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흉내만 내는 사람이 아닌지 나 자신을 들여다 보는 고난 주일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현장에서 예배드리는 흉내만 내고 있지는 않은가요?

기도하는 흉내만 내고 있지는 않은가요?

헌금하는 흉내만 내고 있지는 않은가요?

전도하는 흉내만 내고 있지는 않은가요?

주님의 고난 옆에서 흉내만 내고 있지는 않은가요?

예수님의 고난 옆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흉내만 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3. 욕하는 사람들

그러나 예수님 양쪽 옆에 강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강도처럼 보이게 하려고 일부러 강도 사이에 못박은 것이었습니다. 그 때 상황을 성경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과 강도는 십자가에서 6시간 매달려 있었습니다. 두 강도는 처음에는 예수님에게 같이 욕을 퍼부었습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전혀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한 강도는 끝까지 예수님에게 욕을 퍼부었고 한 강도는 급격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불과 6시간 동안 일어난 변화로는 엄청난 변화였습니다.

 

(1) 다른 강도를 꾸짖었습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같이 욕하다가 욕하는 강도를 욕하는 입장으로 바뀌었습니다. 급격한 변화입니다. 예수님 옆에서 고난받는 행운은 구원으로 이어졌습니다.

 

태풍이 불었습니다.

해변가에 있는 학교였습니다. 교실이 무너졌습니다. 건물이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었습니다. 두 기둥은 그대로 당당히 서있었습니다. 이유를 알아 보았습니다. 그 두 기둥은 바닷가에서 모진 바람과 험한 태풍을 수없이 맞으며 굳굳히 자란 나무였습니다. 이미 그런 태풍을 견디는 훈련을 받고 자란 나무였습니다.

고난을 견디고 나면 반드시 새로운 역사가 전개됩니다. 강도가 그랬습니다.

(2)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강도로 살아 왔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무서워졌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순간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깨끗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똑같이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데 한 강도는 깨닫지 못 하였는 데 한 강도는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고난이 도리어 축복이 되었습니다.

 

나포레옹은 난쟁이라 할만큼 키가 작았습니다. 그가 타고 다니던 말을 박재하여 박물관에 보관하여 두었습니다. 말도 아주 작았습니다. 줄리어스 시저는 간질병 환자였습니다. 헬렌 켈러는 눈멀고 귀멀고 말못하는 벙어리 삼중고로 살았습니다.

모차르트는 폐병환자였습니다. 베토벤은 귀머거리였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소아마비였습니다.

강도는 강도였다는 그 동안의 약점을 멋지게 극복하고 승리하였습니다. 구원의 반열에 우뚝 섰습니다.

 

월남전쟁 때였습니다.

월맹에 포로 되었던 미군들이 포로교환으로 돌아와 기자 회견을 한 적이 있습니다. 미군들은 포로 생활 당시를 회고하면서 배가 너무 고파 쥐까지 잡아먹었다고 말했습니다.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요?”

한 병사가 말했습니다.

“너무 학대가 심하니까 이렇게 억울하게 죽을 수는 없다는 악착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공산당을 미워하고 증오했습니다. 기어코 살아 남아야겠다고 작정하게 되었습니다.”

고난의 조건이 사람을 약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구원받은 강도는 고난 속에서 오히려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3)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강도는 예수님에게 말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나님 나라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죽어도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십자가에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살려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모하는 영을 만족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좀 심한 말로 하면 양심에 털나는 것이 복음입니다.

강도임에도 불구하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지나가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욕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여 달라고 하니까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살려 달라고 하니까 살려 주셨습니다.

이 강도는 기회를 놓지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구원받았습니다.

지금 천국에서 순간 순간 감사드릴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지옥에 간 사람과 천국에 간 사람 사이에는 대화가 가능합니다. 부자와 부자 집 앞에서 구걸하던 거지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음부에 가있는 부자와 아브라함의 품안에 간 나사로와 서로 보면서 대화하였습니다.

지금 지옥에 간 강도와 천국에 간 강도가 서로 보면서 대화를 나눌 것입니다. 같이 강도짓하다가 같이 잡혀 같이 십자가에 못박혀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천국에 하나는 지옥에서 영영 운명이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현장에 수많은 이들이 지나갔고, 수많은 이들이 희롱하였습니다. 그러나 단 한 명이 극적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고난받으시는 현장에 우리는 있습니다.

고난 주일

주님의 고난을 통하여 모두 구원에 현장에서 모두 구원의 확신이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소록도 안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께 칠순이 춸씬 넘은 노인이 찾아와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그의 얼굴과 손가락은 망가지지 않았고 차림새로 보아 육지에서 온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나를 이 소록도에 살게해주십시오.”

“아니 노인장은 정상으로 보이는데···”

이야기는 약40년 전으로 돌아갑니다. 노인은 서울 근교 농촌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10남매 중 막내아이가 11살 때 문둥병에 들었습니다.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가족과 마을에서 그를 격리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소록도로 보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해 늦여름, 차를 타고 또 걷고 하기를 3일, 이제 소록도에 거의 다 왔습니다. 아이는 여름날 뜨거운 여행으로 지쳐 신작로 옆 나무 그늘에 쉬다 잠에 들었습니다.

“차라리 이 돌을 들어 죽일까··· ”

허리 힘을 다해 돌을 들어 아들을 향해 던졌습니다. 바위같은 돌은 아들을 누르지 못했습니다. 놀란 표정을 하고 아이가 깨어났습니다.

소록도행 배를 타기 위해 고흥나루에 도착했습니다. 막상 배를 타기 위해 가까이 이르렀을 때 손이 뭉개지고 얼굴이 일그러진 사람들 속에 아들을 보낼 수 없어 우물쭈물 망설였습니다. 그 사이에 배는 사라졌습니다. 생각을 달리해 신발을 벗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 함께 죽기로 아들과 결정내렸습니다. 어른의 가슴 높이에 11살난 아이는 숨쉬기가 곤란해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런 아들을 껴안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문둥병이 걸린 것은 난데 나나 죽지 왜 아버지가 죽어요! 형과 누나들이 아버지만 믿고 사는 데 아버지가 죽으면 어떻게 살으라고 아버지가 죽어요! 나 혼자 소록도에 갈테니 아버지는 돌아가세요.”

울며 야단치는 아들을 떼어놓고 아버지는 서울 근교로 돌아왔습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아버지는 9남매를 키웠습니다. 죽을 고생으로 9남매를 대학, 결혼까지 다 시켰습니다. 허리를 펼 때가 되었습니다. 이 때 그만 아내가 죽었습니다. 얼마 지나 서울의 큰 아들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아버님, 혼자 계시지 말고 땅 팔아 그 돈으로 저희가 아파트 사는데 보태 함께 사는 게 편할 겁니다. 그렇게 하세요.”

아들의 말을 철썩같이 믿고 아파트 구입하여 함께 살았습니다. 두 달이 지났을까 하였을 때 큰 아들과 며느리가 말했습니다.

“큰 아들만 아들입니까? 왜 우리 집에서만 사시나요?”

아버지는 도저히 눈치가 보여 같이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 날 밤으로 보따리를 꾸려 둘째 아들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비극은 둘째, 셋째···한달 정도되면 어김없이 찾아왔습니다.

울며 울며 옛집에 와서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때 문득 40년전 소록도에 쳐넣은 아들 생각이 났습니다.

“과연 지금까지 살아 있을까···죽기전에 만나나 봐야지.”

물어 물어 아들이 있는 곳에 다다랐을 때, 11살 소년의 아들 모습은 사라지고 아버지 보다 더 머리가 쉬어진 50살의 할아버지가 되 있었습니다. 둘은 얼싸 안고 울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아버지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기도했더니 이제야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나같은 아비를 뭘 그리 그리워하고 있었느냐? 아들을 내다버린 죄인을 뭘 기다렸느냐?”

아버지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소록도에 와서 예수를 믿었어요. 예수의 사랑안에 살면서 매일 감사하면서 살았어요, 내가 문둥이가 된 것도 감사하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아무도 원망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아버지는 면담을 요청한 목사님께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때 비로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내 온 정성 다 쏟아 가꾼 아홉 개의 화초보다 쓸모없다고 내다버린 한 그루의 나무가 더 싱싱하고 푸르게 자라 있었습니다.아들은 완쾌되어 음성 나환자 촌에 살고 있습니다. 아내도 얻어 아이까지 있으며, 손주들은 건강하고 예쁩니다.”

아버지는 문둥이 아들과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시험을 당합니다. 그러나 지나놓고 보면 잠간입니다.

 

고난 주일

주님의 고난과 함께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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