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902 달리다굼(막 5:35~43)
성경본문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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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에 우리 교단의 신문을 받아보니 신학 공부를 같이 했던 동기이면서 동갑인 목사의 이름이 부고란에 실렸더라고요. 세상 떠난 것이죠.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풍채 좋고 아주 마음이 넉넉한 좋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세상을 떠났더라고요. 경기도 일산에서 교회를 개척해서 열심히 수고하고 땀 흘려서 성전도 건축하고 목회를 펼쳐나가는 와중에 암이 발견되었고 1년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은 그 생각이 떠나질 않더라고요. 어떻든 그 인생이 매듭을 지은 것이지요.
성경에 보면 이적이 많이 있습니다만 죽은 자가 살아나는 사건은 이적 중에 이적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적에는 특징이 있어요. 때로 예수님이 베푸시는 이적을 보면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 이렇게 환자의 믿음을 보고 고치시는 사건이 종종 있습니다만 오늘은 그런 말씀이 없어요. 열두 살 난 딸은 이미 죽었어요. 응답할 수 없는 것이지요. 죽었으니 신앙고백 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 아버지도 찢어지고 갈급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왔습니다만 그가 믿음이 있다는 이야기는 없어요. 누군가의 믿음을 보고 고쳐주신 것이 아니에요. 부활을 믿을 수 있는 자가 없기에 그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이적을 베푸시는 거예요.
사실 우리가 믿음을 많이 이야기 합니다만 이 모든 일들이 다 우리의 믿음에 응답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훨씬 많은 부분이 우리가 미처 알지도 못하고 믿음을 보이지도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돼요. 부활의 사건은 하나님이 오늘도 살아계셔서 우리 가운데 함께하신다는 것을 하나님 스스로 드러내어 보이시는 사건이요, 사람들이 기대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펼치시는 창조적인 계시죠. 정작 우리는 이런 걸 잘 몰라요. 육신에 매어있고 현실에 매여있고 자기성취에 매여있기 때문이지요.
오늘 야이로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회당장이라 했습니다. 이스라엘 마을마다 회당이 있었고 그 회당의 책임자니까 교회로 얘기하면 장로라 얘기할 수 있겠죠. 보통은 부자요 율법을 열심히 배우고 익히는 지식인이죠. 자 그러니 회당장 야이로 같은 인물이 어찌 나사렛 젊은이에게 무릎을 꿇겠습니까? 절대로 그런 일은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은 예수님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어요. 사랑하는 딸이 병들었고 그를 고칠 방법이 없기에 예수님께 나와 무릎을 꿇은 것이죠. 딸이 감기 들었다고 하면 나와서 무릎 꿇겠습니까? 그런 일은 없지요. 죽어가고 있기에 나온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정말 견디기 어려운 고통 속에 있는 것은 참 축복이에요. 예수님을 만날 바에야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만날 때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인정하게 되고 은혜로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감기 걸렸다가 낫는 거나 죽는 자가 살아나는 거나 어차피 능력으로 행하시는 그분에게는 똑 같은 일이에요. 우리에게는 엄청나게 달라 보일 뿐이지요. 우리가 스스로 속는 것이지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죽음은 필연이에요. 100년 후를 생각해보세요. 이 자리에 누가 남아있겠어요? 아무도 없어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결코 잊지 마세요. 100년은커녕 20년만 지나가도 교회의 얼굴이 많이 바뀔 것이에요. 죽음은 필연이에요. 그러므로 가족이 죽었다고 울며 떠드는 것, 감정의 자연적인 발산이지만 거기에 머물러선 안 되잖아요. 믿음으로 살았던 분들을 보면 ‘내 장례식 때 울지 말아라. 내가 하늘나라 가는데 울게 뭐냐? 나 혼자만 가는 것이 아니라 너도 갈 텐데 뭐 그렇게 우느냐? 우리 거기서 다시 만나자.’ 우는 게 능사가 아니에요. 죽음이 필연이라면 준비해야 해요. 시퍼렇게 젊은 사람도 한 순간에 쓰러져요. 그 동기 목사도 얼굴도 잘 생기고 몸도 크고 건장한 사람이었어요. 그렇게 한 순간에 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여러분, 준비해야 해요.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활을 약속해주신 것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믿는다 말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죽었다가 눈을 뜨는 순간 틀림없이 무릎을 칠 것이다. 마치 뱃속에 있던 아기가 엄마 몸 밖으로 나와서 세상을 볼 때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으앙’ 하고 울 뿐이지만 엄마 뱃속과 이 넓은 세상을 어떻게 비교하겠습니까? 육신으로 살던 세상과 이 육신을 벗고 하나님의 영광 속에 살아갈 세계와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이죠. 아마 깜짝 놀랄 것이라고 생각해요. 죽었다가 눈을 딱 뜨는 순간 여러분과 다 같이 만나리라고 생각해요. 이 세상에서는 시간을 얘기하지만 이건 육신에 매여있는 사람의 얘기예요. 영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2000년 전에 역사하셨듯이 지금도 역사하시고 이곳에서도 역사하시고 동시에 다른 곳에서도 역사하시는 거예요. 시공을 초월해서 새로 변화된 몸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눈을 뜨게 될 때 아마 우리가 다 같이 만나게 될 거다.
죽음은 필연이에요. 그렇다면 준비해야 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활을 주셨어요, 사람이 부활을 이해할 수 없어요. 이해할 수 없기에 믿기도 어려워요. 그러기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거예요. 부활을 믿는 자에게 죽음은 그저 잠자는 거예요. 잠깐 깊은 잠을 자는 거예요. 내일 아침에 일어날 게 틀림없어요. 오늘 주님이 말씀하시잖아요.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누군들 이 말을 듣고 비웃지 않겠습니까? 이해할 수 없는데. 하나님의 신비요, 은총이에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의 영이 깨어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이것을 성경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 말했어요. 사람으로는 알 길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므로 받아들이는 걸로 충분해요. 부활도 우리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하나님의 사건이에요. 믿는 거예요. 선물로 받으면 되는 거예요. 이제는 예전과 달리 연금이 있지 않습니까? 연금이나 여러 가지 보험이 있지 않습니까? 이게 뭡니까? 우리의 미래를 사는 거잖아요.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 지금 준비하는 것이잖아요. 나중에 퇴직하면 이 연금으로 노후를 살아가리라. 미래를 사는 것이에요. 그렇게 미래를 준비해놓으면 오늘의 어려움도 넉넉히 이길 수 있어요. 고난을 견딜 수 있어요. 또한 오늘을 사는 것이지요. 주님의 부활을 믿을 때 우리는 오늘을 힘 있게 살아갈 수 있어요.
자,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때로 우리의 현실도 답답하고 안타까워요. 야이로의 딸이 죽어가는 상황과 다를 바 없어요. 인간의 한계지요. 돈으로도 명예로도 지위로도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한계예요.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셔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이게 오늘 죽음 같은 절망 속에 살아가는 믿는 자들의 방법이에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한 20여 년 전에 10년 위의 선배 목사님과 함께 한 주일에 한 번씩 새벽에 모여 헬라어 히브리어 원어 성경을 공부한 적이 있었어요. 6~7명이 모여서 공부했는데 마침 가을이 되었어요. 창 밖으로 내다보니 가을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요. ‘야! 설악산 단풍이 참 멋있겠다.’ 그랬더니만 선배 목사님이 ‘여러분 거기 한번 가고 싶어요? 자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하고는 몇 월 며칠 몇 시에 서울역 광장 시계탑 앞으로 모이라는 거예요.
그날 밤 9시에 갔더니 승합차를 딱 준비해놓으셨어요. 자기 교회 청년 몇 사람이 이미 타고 있었어요. 그 차를 타고는 내리 달려 오색약수에 새벽 3시쯤 내렸어요. 그러더니만 우리에게 인절미를 썰어가지고 비닐봉지에 담아 나눠주면서 옆구리에 하나씩 차고 배고프면 꺼내 먹으라고 하면서 따라오라고 했어요. 경험이 많으신 분답게 설악산 대청봉을 보름달이 뜨는 날을 택해 오르는데 처음에는 숨도 차고 힘들었지만 조금 적응되니까 달빛 아래 산을 타는 게 기가 막히더라고요. 꿈꾸는 거 같아요. 그날 단숨에 덩달아 대청봉을 올라갔어요.
내려올 때는 비선대로 해서 설악동 쪽으로 내려가는데 단풍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연신 감탄하면서 내려왔어요. ‘야, 이렇게 아름답구나. 이걸 모르고 밤낮 수학여행 때 비선대까지만 왔다가 돌아가곤 했구나!’ 그리고는 척산 온천에 가서 목욕하고 차를 타고 서울역에 돌아왔는데 정확하게 24시간 만에 모든 걸 다 끝내고 제자리로 돌아왔어요. ‘아무 걱정하지 말고 나만 따라오라.’ 그렇게 노련하게 잘 아는 분을 따라가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저 같은 사람도 너무 화려한 추억을 가질 수 있었어요.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불신앙이란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무지’예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모르기 때문에 걱정하는 거예요. 알고 경험한 사람은 걱정할 일이 없어요. 더 즐거운 일이에요. 행복한 일이에요. 그것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지를 훤히 알기 때문에.
그런데 여기 야이로를 보십시오. 하인들이 와서 말하기를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더 이상은 선생님을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고민이에요. 갈등이에요. 예수님을 능력 있는 의사 같은 분이라고 여겼었는데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보니 의사도 환자가 살아있을 때 의사지 환자가 죽으면 더 이상 필요 없잖아요. 예수님을 의사로만 이해할 때에 갈등이 있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세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고 나를 따르라.’ 그리고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 비난하는 사람들을 다 물리치고 다 알지 못하지만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 세 사람과 야이로만 데리고 죽은 자 앞에 나아가시는 거죠.
여러분, 우리가 다 알고 나서 신앙생활 하지는 못합니다. 신앙을 부지런히 배우는 것은 꼭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죽을 때까지 다 알지는 못해요. 이제까지 알았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해서 다시 한번 믿음으로 주님께 나를 맡기는 거예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빌립보서 4장 6-7절 말씀을 기억하세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사람의 생각과 판단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염려하고 근심이 오지요? 내가 알지 못하는 일인데 어떻게 태평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어요. 걱정하게 돼요.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두려움이 일어날 때 주님을 부르며 기도하라. 그때 주님께서 다가오세요.
‘달리다굼’ 이거는 예수님 당시 쓰이던 아람어예요. 히브리어와 비슷한 언어예요. ‘달리다’라는 것은 ‘어린 소녀’란 뜻이에요. ‘굼’은 ‘일어나라.’는 명령이에요. 예수님께서 어린 소녀에게 다가와서 이 말을 어떻게 했겠어요? 온 동네방네 사람 다 듣게 ‘달리다 굼’ 소리쳤겠어요? 아니요, 엄마가 아침에 딸을 깨우려고 귓가에 “얘야 일어나” 하듯이. 아마 여러분이 연애할 때 상대방을 그렇게 부드럽게 불렀겠죠. 따뜻한 마음으로 상대의 귓가에 살그머니 속삭이는 거죠. 부드러운 음성으로 부르셔요.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우리는 모두 상황이 새로워지고 바뀌기를 바라는데요. 무엇보다 먼저 내가 예수님을 맞이해야 해요. 예수님이 지금 내게 오셔서 내 귓가에 말씀하시는 거예요. ‘내 사랑하는 자야 일어나라’ 이게 신앙의 비밀이에요. 신앙의 역사를 보면 환난과 핍박과 고난이 너무나 많았어요. 그러나 그들 모두 예수님께서 귓가에 들려주시는 부드러운 음성과 손잡아 이끄시는 손길에 용기를 가지고 죽음 같은 절망을 이기며 살았던 것이지요.
이제 소녀가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세요.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마라.’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소식을 듣는 사람들이 한 순간 놀라고 기뻐하지만 예수님의 실체를 알지 못하고 그저 단순한 이적으로 알고 말로만 떠들어댈 뿐이지 오히려 예수님의 길을 가로막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시간표를 따라 십자가 죽음을 담대히 바라보고 나아가시고 부활의 약속을 믿고 나가셨어요. 세상의 여론과 인기와 관중들의 환호에 도취되지 않으셨어요. 묵묵히 자기의 일을 하신 거죠.
그러면서 말합니다. “이 소녀에게 먹을 것을 줘라.” 살아났습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지 않아요. 계속 저에게 양식을 줘야 해요. 오랫동안 병으로 고통 당하고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생명이 일어났다면 저에게 지속적으로 먹을 것을 줘야 해요. 여러분 하나님의 일이 있고 사람의 일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어요. 예수를 믿을 때 새 생명을 주셨어요. 우리가 죽으면 또 놀라운 부활이 일어날 거예요. 하나님의 일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날마다 양식을 먹어야 해요. 하나님의 말씀을 늘 먹어야 해요. 하나님의 말씀 속에 인생을 새롭게 하시는 놀라운 사건들이 가득 들어있어요. 하나님의 창조적인 은총을 늘 노래해야 해요. 신앙은 다른 게 아니에요.
이사야 선지자가 멸망의 위기에 빠진 나라가 너무나 괴롭고 답답해서 성전에 나아갔다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돼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선지자 노릇했던 자기의 불신앙을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들어요.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서 이 복음을 전할까?’ 그때 이사야가 말하지 않습니까? ‘주여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주십시오.’ 먼저는 봐야 해요. 에스겔 선지자가 이야기 하고 있지 않습니까? 에스겔 37장에 보면 골짜기 가득히 마른 뼈들이 있어요. 저주의 골짜기 죽음의 골짜기예요. 그러나 그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성령이 임할 때 뼈에 살과 힘줄이 붙어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호흡이 들어갈 때 무서운 군대가 되었다. 절망적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보는 것, 그게 신앙이에요. 보아야 할 것을 보는 게 신앙이에요.
여러분은 무얼 보고 있습니까? 사람은 별수가 없어요. 집중해서 보는 대로 변하게 되어있어요. 예전에 하버드대학 신학대학원장이 쫓겨났어요. 왜 그랬느냐? 컴퓨터 안에 음란물을 잔뜩 저장해놓은 거예요. 그게 드러나 쫓겨났어요. 뭘 보고 있느냐? 사람은 자기가 보는 것을 말하게 되어 있어요. 보는 것이 그의 인생이에요. 뭘 보느냐? 생명을 살리신 하나님의 창조적인 사건을 주목해 볼 때 인생이 변해요. 우리가 막장드라마라고 욕을 하지만 아무리 시시하고 보잘것없어도 3번만 보면 자꾸 욕하면서 보게 되어 있어요. 욕하면서 봐요. 나중엔 아예 텔레비전 안에 목을 집어넣고 보게 돼요. 그 시간이 되면 자동으로 몸이 그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인생은 그런 거예요. 별 것 아니에요. 하나님을 늘 주목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에요. 그게 신앙이에요.
주파수를 맞춰야 해요. 여기 예수님의 자유를 보세요. 사람이 죽었다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이 뛰었다는 말이 없어요. ‘어휴! 빨리 가야겠구나’ 그러지 않으셨어요. 그렇다고 해야 할 일을 내팽개치고 외면하고 게으르지도 않았어요.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있음을 분명히 알고 하나님의 창조적 은총으로 사로잡혀 있었기에 예수님은 누구보다 자유인이었고 막힘이 없었어요. 두려움이 없었어요. 경쟁심이 없었어요. <Jesus CEO>라는 책을 보면 재미있는 표현이 있어요. ‘예수님은 경쟁심이 없으셨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을 가지고 세상의 인기와 비난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이 가장 멋있는 사람이에요. 이 비밀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달리다굼’ 예수님의 부드러운 음성을 들으세요. 내가 일어나야 해요. 순간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행복해하고 기뻐해요. 다른 사람을 고치려 하지 마세요. 아내를 고치려 하지 마세요. 남편을 고치려 하지 마세요. 부질없는 짓이에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어요. 주님의 음성을 들으세요. 오늘 나에게 주시는 음성을 들으세요. 그것만이 해답이에요. 거기에 자유가 있고 부활이 있고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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