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20819 세월을 아끼라(엡 5:15~21)[TV드라마도 3번만 연속으로 보면 다 빠져듬]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2. 10. 10. 11:21

120819 세월을 아끼라 ( 5:15~21)       

성경본문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2.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3.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4.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5. 범사에 우리 주 예수 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2012년 올해의 화두는 ‘Healing’, 치유입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무한경쟁 사회이고 많은 사람들이 지쳤다는 것이죠. 도시 생활에 지친 사람들이 쉼을 얻으려고 전통 사찰에 가서 명상하는 템플스테이를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볼 때 올해 10년째인데, 첫 해에는 2,500명이 참여했지만 올해는 약 20만 명이 참여하리라고 예상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쉼을 갈망한다는 것이죠. 미국의 경제학자 이스털린의 이론이 있습니다. ‘이스털린의 역설이라고 하는데 경제성장이 낮은 수준에서는 소득이 높을수록 삶의 만족도가 높아지지만 소득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소득이 증가해도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미 그런 사회가 됐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은 제가 제시하는 1번과 2번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1번은 여러분의 연봉이 2억이고 다른 사람들의 연봉은 1억일 경우와, 2번은 여러분의 연봉이 5억이고 다른 사람들의 연봉이 여러분보다 더 많아서 10억이라고 한다면 몇 번을 택하겠습니까? 그랬더니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1번 즉 남들이 1억 벌 때 나는 2억 버는 것을 택하겠다고 했다는 것이죠.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가 해결된 사회에서는 행복은 상대적인 비교의 문제라는 것이에요.

<레저 경제학>을 쓴 린다 나자레스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20세기의 시대정신은 근면과 성실이었지만 21세기의 시대정신은 행복과 재미다.” 지난 세기에는 어떻게 하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까?’ 했다면 지금은 어떻게 하면 행복하고 즐겁게 살까?’를 궁리한다고 하는 거예요. 이게 시대변화의 물결이지요. 이 물결을 피해갈 방법은 없지요. 쉼은 아주 중요합니다. 지금 르바란 연휴 아닙니까? 많은 분들이 여행을 가셨고요. 또 많은 분들이 방콕을 가셨어요. 저도 방에 콕 박혀있었어요. 모처럼 잠깐 무거워진 머리를 내려놓고 쉬니 너무나 좋아요. 쉼이 꼭 필요하지요. 다음에 다가올 일을 준비하기 위해서 쉼을 갖는 것은 필요하지요. 마가복음 6 31절을 보니까 둘씩 짝지어 전도여행을 떠났던 제자들이 돌아와서 주님께 보고를 합니다. 가슴 뛰는 놀라운 사건과 경험들이 있었다고 보고를 했는데 주님께서 다 들으시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많이 수고했다. 피곤할 터이니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도록 하라.” 쉼이 필요해요.

그러나 성경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더 원초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천지 창조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지으신 다음에 안식하시면서 하나하나 바라보시며 좋구나히브리어로 토브라고 말해요. 마지막 제 7일에는 참 좋구나” “토브 토브이렇게 두번 반복하면 강조하는 것이죠. 안식이란 그저 잠깐 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의 완성을 얘기해요. 거기에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고, 예배가 되는 것이죠. 그런 쉼이야말로 진정 안식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죠.

신약 히브리서에 보면 우리가 예수를 믿고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모습을 안식에 들어간다.’고 표현을 해요. 장례식에서, 죽은 사람을 하나님 품 안에 안겨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쉬는 것은 우리 삶에 마지막이 왔을 때 안식에 들어가는 것을 먼저 경험하는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잘 쉬어야 되지요. 그러나 이렇게 온전한 안식을 위한 전제가 있지요.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최선을 다해 땀 흘리며 열심히 하고 나서 쉴 때만 진정한 쉼이 되겠죠. 일이 없는 노숙자에게 쉼이란 고통이죠. 일이 없으면 쉼도 없는 것이죠.

경기도 파주에 장애인들을 위한 회사가 있더라고요. 그 회사에 고용된 사람들 대다수가 장애인들이에요. 그리고 꼭 필요한 자리에만 비장애인이 있더라고요. 그 공장 건물에 이렇게 로고를 붙였는데 ‘1030’이에요. ‘일이 없으면 삶이 없다그런 말이에요. 거기서 일하는 장애인들이 한결같이 말해요. 자기에게 일이 주어진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요즘 그야말로 멀쩡한 사람도 일이 없는 세상인데 나에게 이런 일이 주어진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거긴 지체 장애인도 있지만 정신지체 장애인도 있어요. 그 정도를 따라서 일의 난이도가 달라요. 고루고루 배치해서 일해요. 물론 속도는 느리죠. 그 회사를 시작하신 분도 장애인이에요. 원래는 유도 선수였는데 20대 젊은 나이에 유도 연습을 하다가 한번 실수에 목이 부러진 거지요. 절망을 딛고 일어서서 장애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서 장애인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려고 몸부림친 끝에 그 기업을 이루어서 다양한 장애인들과 공동체를 이루면서 일하고 있어요. 어떤 장애인은 일을 안 하면 나라에서 기초수급대상자라고 최소한의 생활비를 주지만 나는 내 손으로 떳떳하게 일해가지고 받는 월급으로 세금도 내고 비록 작지만 집 한 칸 마련하고 처자식과 더불어 살겠다. 이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다라고 말해요.

일이 있다는 건 참 행복한 거예요. 일과 쉼이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에요. 행복하게 살려면 일과 쉼과 더불어 지혜가 필요하지요. 오늘 성경말씀을 보니까 지혜자가 되라.” 이렇게 말해요. 지혜로운 사람의 판단은 어떤 것이냐 하면 첫째는 세월을 아끼라이거예요. 여러분, 참 신기해요. 살아있는 게 얼마나 생생합니까? 영원히 살 거 같아요. 살아있는 걸 바라보면 죽음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아요. 죽음이 실감이 납니까? 도저히 실감이 안 나요. 천년만년 살 것 같아요. 그러나 절대로 부인할 수 없는 것은 그러다가도 어느 날 덜컥 하던 일을 내려놓고 떠나야 해요.

그러나 생각해보세요. 목숨이 뭡니까? 생명이 뭡니까? 지금 순간 지나가는 시간의 연속이 생명이잖아요. 목숨을 내놓는다고 하면 두려워하고 떨면서도 정작 시간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요. 물보다 전기보다 더 낭비하고 있어요. 시간이 곧 생명이에요. 무의미한 시간은 죽은 거나 똑같아요. 요한복음 9 4절에 어둔 밤 쉬 되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그러잖아요. 나중에 죽을 것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늘을 의미 있고 뜻 있고 가치 있게 살아야 되겠지요. 이게 지혜로운 사람의 판단이죠.

두 번째, 세월을 아껴야 하는 이유는 때가 악하기 때문이다. 정말 때가 악해요. 여러분도 가끔 뉴스에서 보셨을 거예요. ‘멍텅구리 배라는 게 있잖아요. 젓 새우를 잡아 올리는 배가 멍텅구리 배래요. 왜 멍텅구리 배냐? 그건 무동력선이래요. 자기 맘대로 움직일 수 없는 무동력선이래요. 그 배를 타고 나가서 일하는 것이 고되기 때문에 사람을 구하는 것이 어렵다 보니까 어리숙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배에 붙들어놓고 제대로 돈도 안주면서 일을 시키는 게 발각되어 큰 사회문제가 되지 않았습니까? 때가 악해요. 정신차리지 않으면 코 베가는 세상이에요. 좀 모자라고 바보 같은 사람들만 당하는 게 아니에요. 오늘 무한경쟁 속에 내몰린 젊은이들이 소위 스펙을 쌓겠다고 와! 하고 물고기 떼같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것을 보세요. 그것도 어떻게 보면 세상이 악한 거예요. 우리의 시간과 인생을 빼았는 거예요. 주체적 판단과 결단을 빼앗는 거예요. 또 우리가 중년에 들어서서 이만했으니라고 생각하고 우리의 인생을 물에 떠내려가는 낙엽처럼 그냥 내맡기는 수가 있어요. 우리의 시간을 빼앗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보 같은 드라마도 3번만 연속으로 보면 다 빠져들어가요. 욕하면서 보는 게 드라마예요. 어떤 분은 아예 텔레비전에 목을 집어넣고 있더라고요. 우리 인생을 뺏기는 거예요.

여기 세월을 아끼라라는 단어를 보면 헬라어로 기회를 사라라는 뜻이에요. ‘엑사고라조노마이 카이론’ ‘카이로스라는 말은 기회라는 뜻이에요. ‘엑사고라조마이산다는 뜻이에요. ‘아고라라는 말이 헬라어예요. ‘광장, 시장시장에 모여서 물건을 사고팔잖아요. 이게 동사가 되가지고 엑사고라조마이그러면 너 자신을 위해 물건을 사라필요에 따라 물건을 사는 거예요. 너 자신을 위해 기회를 만들어라. 그런 말이에요. 아주 적극적인 표현이죠. 자신을 위해서 기회를 만드는 게 뭐냐? 바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 주님의 뜻이 뭐냐? 18절에 있죠. “이 세상을 살면서 술 취하지 말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대안이지요. 여행을 떠나는 것도 쉼의 한 방법이지요. 많은 돈을 쓰면서 여행을 가지요. 그러나 삶과 일과 쉼으로 이루어져 있는 우리 삶에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안식의 방법이 있다는 말이에요. 그게 바로 성령충만이다.’

그런데 성령충만을 말할 때 바르게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성령충만을 두 가지로 표현해요. 사도행전에 보면 오순절 마가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셨다. 위로부터 임하시는 성령,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초대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불붙는 마음으로 나아가서 전도합니다. 병자를 고칩니다. 귀신을 내어쫓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교회가 확장되어 나아가는 모습이 있어요. 여기에 나타나는 성령은 위로부터 임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도록 힘을 부어주시는 성령이에요. 성령의 은사적인 모습이에요. 이 은사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도록 부어주시는 거예요.

그러나 또 하나 요한복음에 나와 있는 성령의 모습이 있어요. 초대교회가 세워지고 뻗어나가는 동안에 좋은 일들이 많았지만 사람은 역시 연약하기 때문에 잘못된 일들도 있었어요. 사도행전 5장만 하더라도 뜨거웠던 예루살렘 교회에서 하나님 앞에 헌신한다는 사람 중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경쟁하는 마음이 생겨 내가 이 교회에서 이만큼 일했는데 저기 어디 무슨 구브로 섬 출신 바나바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이렇게 많은 헌금을 하니 안되겠다. 우리도 뭔가를 해야겠다해서 재산의 절반을 헌금하면서 이게 전부입니다.’ 이러고 냈지요. 그런데 어떻게 됐어요? 베드로 사도에게 큰 책망을 받잖아요. ‘너는 왜 시기하고 경쟁하는 마음으로 성령을 속이려 하느냐그대로 죽었잖아요.

또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복음을 전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체험하게 되잖아요. 나중에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와서 그들을 위해 기도했을 때 예루살렘 교회에 부어졌던 것 같이 성령의 은혜가 부어질 때 사람들이 너무 기뻐했는데 시몬이라는 사람이 헌금을 크게 바치면서 나에게도 이런 능력을 주십시오.’ 그랬더니 베드로가 뭐라고 말합니까? ‘네가 하나님의 능력을 돈으로 사려고 하느냐. 네 돈과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의 능력을 자기 유익을 위해 쓰려고 하는 잘못된 모습을 베드로가 지적한 것이요. 그 사람의 이름을 따서 시모니즘이라는 말이 생겼어요. ‘시모니즘이라는 것은 돈을 바쳐서 교회의 직분을 사는 악한 일들을 말합니다.

보세요. 사람은 불완전해요. 성령의 은사를 경험하고 놀라운 사역을 행할지라도 그 능력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그러나 잘못된 동기와 욕심을 가지고 내 유익을 위해 쓰려고 할 때 어그러지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요한복음에 보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와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 위에 능력으로만 머물러계시는 성령이 아니라 인격이신 하나님께서 영으로 내 마음에 오셔서 나와 함께하시면서 나를 인도하신다.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신다. 내주하시고 인도하시는 성령을 말해요.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에요.

여러분, 가끔 제가 여러분 신앙의 유익을 위해서 설교 강단을 통해서 불붙는 마음으로 설교를 한다든지 헌신하는 사람들의 예화를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해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고백할 때 성령으로 내게 오셔서 나를 이끌어주시고 사랑하시는 것을 봐야 해요.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을 듣고, 믿고, 주로 고백할 때 영원한 약속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돼요.

오늘 말씀은 이렇게 말하지요.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의 모습을 얘기해요. 첫째는 찬송하는 사람이에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는 사람이에요. 두 번째는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에요. 세 번째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부부와 부모와 자녀, 형제 이웃 간에 서로를 존중하고 세워주는 것이   성령충만한 사람의 모습이에요. 그게 신앙의 기본이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삶의 방식으로 정해주신 거예요. 가끔 찬송을 부르면서 갈등이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이 찬송가라는 게 한 150년 전에 미국 무디 부흥운동 때부터 불려지던 찬송들이 많이 실려있지요. 한 세대 전까지도 찬송가를 부르는데 별무리가 없었는데 요즘 하도 세상이 빨리 변하니까 우리가 주위에서 듣는 찬양의 리듬 가락과는 많이 달라요. 그 가사 내용에 공감하기가 쉽지 않아요. 어떻게 해야 찬송을 부르면서 정말 주님을 온전히 고백하게 될 것인가? 숙제가 아닐 수 없어요.

범사에 감사하라.” ‘감사할 만한 것을 감사하는 것을 넘어서서 감사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감사하는 것그게 진정한 감사죠. 서로 복종하라.” 복종이란 단어만큼 현대인들이 싫어하는 말이 없어요. 대통령도 욕하는 세상인데 누구에게 복종하겠어요. 입에 풀칠만 할 수 있으면 우리는 누구에게도 굽히려 하지 않아요. 그러나 성경은 말해요.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경외하기 때문에, 그분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분께서 세우신 방법이기 때문에 명령을 좇아서 복종하는 거예요. 남편에게 아내에게 이웃에게 복종하는 것이지요.

이게 성도로서 우리의 바람직한 모습인데 이건 마치 아까 말한 장애인 기업과 똑같지 않습니까? 우리가 온전히 찬송합니까? 온전히 감사합니까? 온전히 복종해요? 아니요. 아니에요. 병 정도가 아니에요. 병은 치료하면 나아질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는 아직 진행되는 상태를 말한다면 장애라는 것은 이미 어떤 틀로 고착되어버린 거지요. 정상은 아닌데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어요. 결혼해서 10, 20년을 살았는데도 못 고치는 것은 장애예요. 불편한 대로 사는 거예요. 어떻게 살아요? 아까 장애인들이 일하면서 뭐라고 그래요?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다고 감격하듯이 이렇게 어그러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시고 지켜주시는 사랑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지요. 이게 교회의 은총이에요.

에베소서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증언하는 거예요. 아무리 해도 못 고치는 장애인 같은 우리들, 제대로 찬송도 감사도 복종도 못하는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오늘도 품에 안으시는 거예요. 교회는 장애인 회사와 같은 거예요. 한 울타리 안에서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묶어놓으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데는 놀라운 계획이 있어요. 명절이 되면 떡을 먹잖아요. 강원도 양양에 떡 마을이 있더라고요. 강원도 산골짜기 농촌에서는 가난을 해결할 방법이 없잖아요? 그런데 설악산 주위가 관광지니까 아낙네들이 벌어먹고 살려고 떡을 만들어 언덕길을 넘어서 오색약수터에 가서 떡 바구니를 펼쳐놓고 떡을 파는 거예요. 그 얼마나 힘들고 고생스러워요. 쉽게 입이 떨어집니까? 잡상인이라고 쫓겨나고 수모를 겪던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어 함께 모여 떡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점점 알려져서 지금은 미국에서도 주문이 온대요. 얼마나 잘 만드는지 모든 떡을 다 만들어요. 아낙네들이 다 같이 모여서 새벽 3시부터 떡을 만들어내기 시작해요. 자기들이 다 사장이에요. 참여한 사람이 다 사장이에요. 월말 되면 수고한 만큼 공동배분을 해요. 새벽 3시부터 떡 만드는 일이 쉽겠어요? 그런데 함께 하니까 어려운 중에서도 재미가 있는 거예요. 옛날에는 혼자서 떡을 만들어 산을 넘고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 어렵게 떡을 팔아야 했고 배고픔에 힘들어해야 했는데 이제는 함께하니까 널리 알려져서 미국에서도 떡 주문이 오는 유명한 떡 마을이 되었어요. 거긴 아예 주소가 떡 마을이 되어버렸어요. 교회가 바로 이래야 합니다.

우리가 홀로 성령충만하기 어려워요. 같이 찬송하고 말씀 듣고 감사하고 복종하는 법을 배우면서 서로 격려하고 하나님의 생명의 떡을 함께 먹고 마시고 나누어주는 풍요로운 삶을 이루어야 해요. 그 떡 마을이 이제는 시집온 사람들이 부지런히 배워요. 마을 이장이 이렇게 말해요. ‘이 떡 마을이 100년 가도록여러분, 떡 만들어 파는 사람들도 100년의 비전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오늘도 구원의 역사를 펼쳐나가시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고린도후서 61~2절에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이 사실을 알고 찬송할 때 이게 명절이잖아요. 이 사실을 알고 음식을 나눌 때 그게 생명의 양식이 되는 것이지요. 여기에 교회의 은총이 있고 그 은총을 덧입고 살아갈 때 우리의 인생은 값진 인생이 되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