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120401 예수님의 눈물 (눅 19:35~44)[WPA세계기도성회 준비]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2. 10. 11. 15:06

120401 예수님의 눈물 ( 19:35~44)     

성경본문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놓고 예수를 태우니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무리 중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일본 전자업체 SHARP의 눈물이라.’ 그런 글이 있네요.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SHARP가 곧 대만에 팔리게 되었다고 하는 거죠. 자존심이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단 한 업체만의 일이 아니고 일본 전자업계의 상황이죠. 1980년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전 세계의 안방 TV시장은  일본이 완전히 점령했지만 2006년 이후에는 한국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기 시작했어요. 이제는 그 격차를 따라잡기 어렵게 된 것입니다.

일본 전자업계가 이렇게 몰락하게 된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IT시장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했다. 아날로그 시대의 왕좌에 안주하면서 디지털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일본의 고유한 폐쇄적인 기업문화, 예를 들어 SHARP만 하더라도 자기들이 개발한 기술은 자기 회사제품에만 장착하도록 하는 거예요. 안 판다는 거예요. 그래서 SONY가 할 수 없이 삼성하고 손을 잡았더니 일본 정부가 여러 가지 많은 불이익을 주었다고 하는 거죠. 또 부실한 리더십, 한국은 신속하게 결정할 수 있는 구조가 되어 있지만 일본은 기업의 주요 주주들이 대개 은행권인데 무책임한 투자논의를 지루하게 이끌어가면서 늘 때를 놓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일본 전체의 장기침체가 배경이라고 하는 거죠. 성실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일본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타났는가? 시대변화를 놓쳤다고 하는 거죠. 성경적 표현으로 얘기하면 하나님의 시간표를 보지 못했다고 하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장면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들어갈 때 전국에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에 막 쏟아져 나와서 만세를 부르는 것입니다.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길에 깔기도 하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려주일이라고 하는 것이죠.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아무 때나 입성하신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시간표를 따라서 입성하고 계셔요. 유월절에 들어가셨어요. 유월절이라는 것은 애굽의 노예생활 속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이지요. 출애굽 한 후로 홍해로 가로막혔을 때 또 한 번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으로 홍해를 건너고 광야에 들어가는 과정을 기억하는 절기가 유월절이잖아요. 출애굽과 홍해 이적과 가나안에 들어가는 과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예고하는 예표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오신 자기를 드러내기 위하여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거예요. 예수님은 못 박혀 죽은 것이 틀림없지만 시간은 자기가 선택한 거예요. 이게 예수님의 기획연출이에요.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유월절 입성에 앞서서 5리 밖에 있는 베다니라는 마을에서 나사로를 살리시잖아요. 그러니 유월절에 몰려들던 사람들에게 얼마나 엄청난 뉴스가 되겠어요? 그 예수가 누구냐? 기다리고 있었을 때 들어가셨다는 것이죠. 사람들이 찬송을 부르니까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거칠게 항의합니다. ‘저 사람들로 하여금 노래 부르지 못하게 하시오.’ 그랬더니 예수님의 말씀이 만약 저들로 하여금 노래하지 못하게 한다면 이 주위에 있는 모든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이다.” 그 찬송을 받으셨어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메시아니까, 왕이시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유월절 입성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모든 복음서에 다 나오지만 독특하게 누가복음서에서는 찬송을 받으시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예수님이 환호하는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눈물을 흘리셨어요. 정작 예루살렘 성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셨어요. “네가 평화의 비밀을 알았어야만 하는데 지금 네 눈에는 감추어져 있구나.” 곧 이 성에 다가올 엄청난 재앙을 보고 계시는 것이죠. 돌 위에 돌 하나도 얹혀지지 아니하고 갓난아이까지도 인정사정 없이 땅바닥에 메어치게 될 참혹한 멸망이 다가오고 있는데 전혀 알지 못하고 있어요.

여러분, 예루살렘이란 히브리어로 이르샬라임’, ‘평화의 도시라는 말이에요. 평화의 도시인데 평화의 비밀을 모르고 있어요. 메시야가 왔다고 소리 지르고 만세를 부른 무리들의 환호 속에 감추어진 죄악이 있어요. 마가복음 8 38절에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 당시늬 예루살렘도 그랬고 지금 자카르타도 마찬가지예요. 정치, 경제,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로마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주실 다윗의 후손, 메시야를 찾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속지 않으셔요.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셨어요. 편안한 삶이 문제가 아니에요. 진정한 삶의 평안이 문제예요. 그건 하나님과의 평화를 발견하기 전에는 없는 것이죠. 그러기에 많은 백성들의 찬송을 받으시면서도 이 찬송이 찬송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셔야 하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기에 안타까워하셔요. 제자들에게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들도 지금 그 뜻을 알지 못하고 있어요. 환호와 찬송에 도취되어버렸어요. 그것이 안타까워서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거예요.

그런데 사회가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가 되는 데에는 종교지도자들의 책임이 있는 거예요. 오늘도 마찬가지죠. 안타깝게도 먹고 사는 게 풍성해질수록 교회도 세속화 물결에 휩쓸려 가버렸어요. 교회 안에서도 돈이 왕 노릇하고 있어요. 또 반대로 교회의 정체성을 지키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교리에 묶여 있어요. 율법에 묶여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잖아요.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 누룩이라고 하는 것은 빵에 조금만 들어가면 빵을 부풀게 하잖아요. 성경에서 누룩은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지요. 나쁜 것이 들어와서 전체를 물들이는 것. 바리새인의 누룩은 율법주의, 교리주의를 말하는 거예요. 또 헤롯의 누룩이라는 것은 세속주의자를 말해요. 교회생활을 하나의 교양으로 여기고 세상에서는 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세속화, 어떻게 하면 그것을 벗어버릴 수 있을까? 그리스도를 바로 발견하는 방법밖에는 없죠.

빌립보서 1장에 보니 사도바울이 로마감옥에 갇혔습니다. 죽을 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밖으로부터 들리는 소문이 있어요. 사도바울이 갇혔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는 동료들은 사도바울 몫까지 더 열심히 하겠다고 몸부림치고 있는데, 교회도 인간의 집단인지라 또 다른 팀들은 이런 상황을 내심 즐기고 있어요. 사도바울 팀에 대해서 시기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러나 그런 소문을 들으면서 사도바울이 놀라운 말을 해요. “진심으로 하든지 혹 시기나 경쟁심으로 하든지 오직 그리스도만 전해진다면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나야 살든지 죽든지 오직 그리스도만 높아지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우리 신앙의 목표예요. 그저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의 뜻만을 붙들고 나아가는 것이 소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던 거예요. 하나님과의 깊은 평화,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는 비밀을 전혀 알지 못하고 환호하고 만세를 부르면서 이제 다 해결됐다고 기뻐하는 무리들과 덩달아 춤추는 제자들의 모습에 눈물을 흘리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지난 주간에 WPA세계기도성회를 준비하면서 우리도 눈물 흘릴 일이 있었어요. WPA세계기도성회가 1984년 한국에서 첫 번째로 열렸고 이번이 30년 만에 열리는 두 번째 기도성회이죠. ‘이슬람 선교의 문을 열어주십시오하는 것과 남북한의 평화통일을 위한 기도가 이번 기도대회의 두 가지 주제입니다. 이 일에 참여하는 우리들에게는 또 하나의 목표가 있어요. 급속하게 확대되고 있는 한인사회 가운데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데 하나 되는 한인공동체를 만들고, 먼저 믿는 우리가 중심에 서야 되겠다는 것이죠.

지난 2년 동안 이 일을 섬겨오면서 연합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기야 부부도 어려운데 교회는 쉽겠어요? 다 연합하자고 말하지만 몸으로 나서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물론 마음으로라도 바라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죠. 또 기회가 주어져야 연합을 할 수 있겠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그 일을 맡겨주셨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일했어요. 에베소서 4 1절에서 6절에 보면 하나님의 소원이 있어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요, 주 예수 그리스도도 한 분이시요, 성령도 한 분이시요, 그분을 향한 우리의 믿음도 하나요, 우리가 한 세례를 받고 하나의 소망을 가지고 하나 되었으니 성령이 하나되도록 이끌어가시는 그 일을 힘써 지켜라.

그런데 지난 수요일에 우리가 뼈아픈 결정을 했습니다. 일부 교회에서 반대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얻은 지식으로 신학적인 문제들을 제기하고 심지어 이단 운운하는 이야기들이 있었어요. 여러분, 신학은 그 교회를 대표하는 목사가 책임을 지는 거예요.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평신도들이 신학을 운운한다는 것은 지나친 거예요. 인터넷에서 뭐라고 말하는지 쭉 읽어봤어요. 그 글을 쓴 사람이 어떤 신학적 입장에서 쓰고 있는지를 알아야 해요. 그런 것을 분별할 안목이 없는 사람들이 신학을 들먹이다니. 흔히 그렇듯이 신학은 그저 명분일 뿐이고 갈등이 누적되어서 나타난 것뿐이죠. 아무튼 연합을 위해서 이 일을 하는데 단 한 교회라도 이 일 때문에 흔들리거나 어려움을 겪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이제까지 기도하면서 기획하고 추진하던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하고 공식적인 조직을 해체하기로 했어요. 해체함으로써 여기에 관련되어 있는 목사님이나 장로님들의 짐을 벗겨드리기로 했어요. 교회 안에서 시빗거리가 되지 않도록.

목요일마다 교회들이 함께 모여 중보기도 하던 모임도 지난 목요일을 마지막으로 중단했습니다. 운영본부도 해체했습니다. 이제까지 기도하고 준비해왔던 실무 팀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어요. 지난 수요일에 어려운 결정을 함께 내리고 목요일 중보기도집회에서 모든 분들에게 그것을 말씀 드렸어요.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이제 이 일을 어떻게 하실 것인가 생각하니 분명 또 다른 계획이 준비되어 있음을 믿으면서도 안타깝고 답답한 현실에 눈물을 금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목요일 기도시간에 이 사실을 알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한 선교사님이 찬양을 인도하는 가운데 그가 겪었던 에피소드를 이야기할 때 제가 얼마나 위로를 얻었는지 몰라요. ‘, 하나님의 시간표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제가 여러분에게 그 글을 낭독해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손에 맡기십시오.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히브리인들이 날로 번성함을 보고 이집트의 왕 바로는 위협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는 히브리인이 낳은 신생아 중 남자아이는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한 여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잘생긴 것을 보고 차마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엄마의 마음일 것입니다.

하지만 석 달이 되자 더 이상 숨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한 상자를 준비했습니다.

그것이 갈대상자입니다.

 

모세의 어미는 상자를 준비하며 내내 울었을 것입니다.

갈대 숲 사이 나일강 위에 상자를 띄우는 순간 그녀의 눈가에 또 하나의 강이 흘렀을 것입니다.

아이를 잃어버린 이의 가슴도 무너지는데 아이를 버려야 하는 어미의 가슴은 어떻겠습니까?

아이는 고아가 되고 부모는 죄인이 되는 순간입니다.

여인은 하늘을 향해 얼마나 원망했을까요?

정의가 사라진 세상을 향해 얼마나 가슴을 쳤을까요?

정의가 무너진 시대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세상에 아들을 제 손으로 버려야 하는 정의는 없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아이는 목욕하러 강에 나온 공주의 손에 건짐을 받았습니다.

아이는 노예의 아들이 아니라 왕의 아들로 자라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아이의 엄마는 젖을 먹이는 유모로 택함을 받았습니다.

아이는 당대에 가장 훌륭한 영재교육을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받게 되었고

엄마는 왕실로부터 유모의 품삯을 넉넉히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불의를 멋지게 역전시키십니다.

갈대상자, 포기할 수 없는 것을 포기하는 아픈 이별입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내 품에 있으면 노예의 아들이지만

떠나보내면 왕의 아들로 자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오늘 지독히도 움켜쥐고 싶지만 떠나보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상상할 수 없는 축복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이것은 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조심해야 합니다. 나름대로 비판하고 반대했던 사람들도 다 교회를 사랑해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장으로서 일하다가 나이 삼십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집을 떠났을 때 가족들이 어떻게 반응했을 것 같습니까?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해석하기를 저것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자그마한 귀신들을 내어쫓은 것이라고 하는 말이 소문이 되어 퍼지니까 집안망신 시킨다고 어머니와 동생과 친척들이 예수를 붙들러 나오는 대목이 나옵니다.

갈릴리 호수까지 왔지만 많은 무리들 앞에서 말씀을 전하는 예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서 사람을 시켜서 우리가 왔다고 소식을 전합니다. 상상해보세요. 이제 나이 서른밖에 안된 젊은 예수가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어떠했겠습니까? 성경에는 그런 이야기가 의도적으로 빠져 있지만 제가 보기엔 예수님도 섭섭하고 화가 나셨던 것 같아요. 말씀을 듣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인가? , 여기 내 어머니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이다.” 그 말을 전해들은 어머니나 동생들이 어떠했겠습니까? 화를 내면서 돌아갔을 것입니다.

언제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왔겠습니까? 아마도 역시 제일 먼저 돌아온 것은 어머니예요.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을 때 이유야 어떻든 아들이 죽는다는데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어요. 십자가 아래에 나오게 됩니다. 그 때까지도 동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요.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에 마가 다락방에 120명이 모여서 기도하는 그 자리에, 사도행전 1 14절에 보니 예수의 동생들이 다른 무리와 함께 모여 전심으로 기도에 힘쓰더라.” 그리고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교회가 시작될 때 그들은 일꾼들이 됩니다. 신약성경 뒷부분에 야고보서가 나와요. 야고보서의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예요. 요한계시록 바로 앞에는 유다서가 나와요. 그 유다는 또 예수님의 동생 유다예요. 처음에는 모르고 반대했었지만 언젠가 하나님이 쓰시는 거죠.

오늘 우리만 의롭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나아갈 때 오늘 이런 어려움이 있지만 여기엔 더 깊은 하나님의 뜻이 있구나. 하나님의 시간표구나. 마치 출애굽기 14 13절에 있는 말씀같이 애굽을 탈출해서 숨가쁘게 도망 나왔는데 그만 홍해에 가로막힌 상황이에요. 배도 없고.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셔요.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 지금 여기까지 온 거예요.

이제 남은 과제가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되고 서로 연합하는 기회를 놓칠 수 없어요. 오히려 더 비둘기같이 순결하게 뱀같이 지혜롭게 일을 이루어야 해요.

이 일 때문에 한목협의 모든 목사들이 긴급히 모였습니다. 세계기도성회에 참여하든 참여하지 않든 다 같이 모여서 뜻을 모았습니다. 행여나 갈등이 있다면 다 털어내고 곧 있을 부활절 연합예배에 다 같이 모여서 하나됨을 온 성도들과 교민들에게 보여주자.

또 부활절 연합예배의 하나됨을 위해서 60년 한인 역사상 처음으로 크리스천 비즈니스맨들이 함께 모여서 한인목회자들과 한인선교사들을 초청해서 새 시대에 하나되는 한인공동체를 함께 건설해나갑시다. 하나되게 하소서.’ 라는 주제로 4 3일 화요일 저녁 6시에 주님의교회에서 모입니다. 우리 교회 식구들은 다 가야 해요. ? 이제까지 연합을 위해서 목청을 높였는데 정작 그런 자리에 가지 않는다면 우리야말로 거짓말쟁이가 되는 거잖아요. 교회 이름을 걸고 가야 해요.

또 하나는 WPA세계기도성회의 공적인 조직은 할 수 없이 해체했습니다만 이미 인도네시아 교회와 40년 만에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약속했어요. 45일 기도집회 첫날 개회식 찬양을 한인들이 맡기로 했단 말이에요. 새로 조직을 개편해서 앞으로 남은 한 달 동안 준비해서 나아가려고 합니다. 지지부진하면 이것은 대한민국 망신이에요. 거기 모인 사람들은 우리가 여기 사는 사람들인지 한국에서 온 사람인지 그런 것은 몰라요. 무조건 한국 사람이라는 것만 알아요. 약속을 지켜야 해요.

여러분, 기억하세요? 1982년에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결승전, 한일전에서 한대화선수가 9회 말 투아웃에서 역전 쓰리런 홈런을 날렸어요. 그래서 43으로 이겼어요. 얼마나 통쾌합니까? 얼마나 국민들을 기쁘게 했습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셔요. 하나님께서 지금 역전 쓰리런 홈런을 날리시겠다는 거예요. 우리에게 와서 응원해달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시간이에요.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가만히 서서라는 것은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 아니에요.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리라는 거예요.

또 하나 있어요. 100명 성가대뿐만 아니라 이번 성회 운영경비를 후원해달라고 요청을 받았고 하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러나 이제 조직이 다 해체되었으니 어떻게 하겠어요? 우리가 마음을 모으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절묘하게 넘치도록 채워서 주시겠죠. 인도네시아 사람들하고 40년 만에 처음 한 약속을 깨뜨리면 우리는 영원히 이 사람들 앞에 얼굴을 못 들어요. 신용을 잃는 거예요. 교회만 잃는 게 아니에요. 한인비즈니스도 잃는 거예요. 기회잖아요. 한번 하나님의 마음을 후련하게 할 수 있는 기회잖아요. 절호의 기회잖아요. 성경대로 돼가는 거예요. 애굽을 탈출하면 다 된 줄 알았더니 홍해에 가로막히지만 오히려 그 일을 통해서 이것이 하나님의 시간임을 다시 한번 보여주시는 거예요. 드디어 홍해를 건너고 나서 만세를 부르고 춤추고 노래하지 않습니까? 그런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