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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용기목사/믿음의 근원인 바라봄의 법칙 (히 11:1-3)

성령충만땅에천국 2013. 5. 12. 18:27

조용기목사/믿음의 근원인 바라봄의 법칙 (히 11:1-3)


대단히 감사합니다. 전번 주일 몸은 싱가폴에 있으면서 마음은 우리 교회 와 있었습니다. 비둘기가 나무 위에 앉아 있어도 마음은 콩밭에 있다고.. 설교는 그곳에 있는 청년들에게 하면서 여러분 얼굴이 늘 내 눈앞에 있었습니다. 저는 평생을 해외 선교를 하며 지내왔는데 싱가폴처럼 청년들이 많이 모인 교회는 본적이 없습니다. 전부 젊은이들이에요. 어디에서 그런 젊은이들이 와 있는지 알수가 없을 정도로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찬양하는 것을 보게 될 때 싱가폴의 미래가 밝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한국을 사모하고 한국에 있는 성도들의 신앙을 본받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세계 모든 성도들에게 모범이 되어있는 것을 생각할 때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십시오. 나는 예수님 안에서 행복한 사람입니다. 나는 기쁘고 즐겁습니다. 소망이 넘칩니다. 옆에 계신 분들에게 당신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인사해 주십시오.


<서론>
“믿음의 근원인 바라봄의 법칙”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실제로 육안으로 바라보든, 마음으로, 영안으로 바라보든 믿음은 바라봄의 실상인 것입니다. 바라보는 대상은 믿음을 통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클로드 브리스톨(Claude M. Bristol)은「신념의 마력」이란 책에서 믿음을 “마음 그림 그리기”라고 말했습니다. 즉, 믿음이란 우리 마음에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그림을 그려 놓고 항상 바라보는 것이 믿음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우리가 소원하는 것을 생생히 그려서, 마음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릴 때까지 쉬지 않고 떠올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성공하기를 원하면 성공한 자신의 모습을 그려서 바라보고, 병이 낫기를 원하면 병낫고 건강하게 된 자기의 모습을 마음에 그려놓고 항상 바라보고 마음속에 자기의 소원하는 바가 이루어진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셰익스피어는“미덕을 갖추지 못했다면 가진 척이라도 하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바라고, 되고자 하는 사람의 모습을 먼저 마음에 그리고 바라보며, 현재 이루어진 것처럼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7절에서 바울 선생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마음속에 그려놓고 바라보고 기도하고 감사할 때 하나님 성령께서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봄의 실상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눈이나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든, 혹은 영의 눈으로 바라보든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은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했습니다. 바라는 것이 뭡니까? 바라는 것이 꿈 아닙니까? 믿음이란 꿈의 실상이다. 실상이란 것은 집문서라는 말입니다. 후퍼스타시스라고 집문서다. 믿음은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집문서와 같다. 집문서는 내가 그 집을 어께 걸머지고 안 다닐지라도 손에 쥐고 있으면 그 집이 내 것인 것을 보증해주는 것처럼 여러분께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바라보는 소원이 이미 여러분께 이루어진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말씀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언제나 여러분보고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이미 믿음이 있으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진 증거가 있기 때문에 그대로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론>
1. 선악과를 바라본 하와
첫째로, 인류 타락의 원인은 선악과를 바라본 하와 때문인 것입니다. 하와가 마귀의 꾀임에 따라 선악과를 주의깊게 바라봤습니다. 그때부터 큰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인데 바라보았다 말입니다. 마귀가 바라봄을 통해서 타락의 길을 연 것입니다.
창세기 3장 4절로 6절에 보면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고 말했습니다.
여자가 나무를 바라본 즉 마귀가 그를 통해서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를 얻기에 탐스러워 보이도록 인도를 해준 것입니다. 바라봄이 가져온 마음의 느낌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를 얻기에 탐스럽기도 했지만 요새는 잘못 이해한 믿음인 것입니다. 바라보면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란 여러분, 그대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못 바라보면 잘못된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결과는 마음먹은 대로 따먹고 남편까지 동참하도록 설득하여 먹였습니다. 하나님이 먹으면 죽는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바라보는 것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바라봄의 법칙이 강하든지 바라보는 것에 내가 끌려가고 바라본 목적이 내게 끌려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6절에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세기 3장 22절로 24절에 보면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그 남편에게 그 선악과를 먹게 하고 난 다음에 버림을 당했던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야훼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모든 오늘날 우리가 당하는 비극과 슬픔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버린 결과로 다가온 것입니다.
황성주 박사는 그가 쓴「성서 건강학」에서 인간의 뇌와 연결되어 있는 신경 중에서, 보는 것이 가장 발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시신경이 유난히 크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눈은 우리 뇌의 사고 기능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운전할 때 자동차의 시야가 가려지면 운전을 할 수 없듯이, 눈의 피로해지면 심신이 따라서 피로해 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을 혹사하면 두통이 생기며 만사가 귀찮아지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6장 22절에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시며 눈과 몸의 관계를 말씀하셨습니다. 보는 것이 몸을 이끌어가는 등불이라고 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본다는 것은 굉장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황성주 박사는 “우리는 사랑하는 것을 바라보고, 바라보는 것을 사랑하게 되어 눈이 가는 곳에 마음이 따라다닌다.”고 말한 것입니다. 보는 것에 마음이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보는 것의 마력”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강자라도 보는 것의 마력 앞에서는 마음을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라디오에 비해 TV의 영향력이 큰 이유도 TV는 청각과 함께 시각이 함께 사용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게 된 것도 사탄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바라보자, 과연 먹음직하고 보암직하며 지혜를 얻기에 탐스럽게 보이는 나무로 악한 지혜를 마귀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죄의 종이 되어 하나님께 버림받고 오늘날 이 세상에 비극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용하신 바라봄의 법칙을 우리 생활 속에 깊이 묵상하고 무시하지 말고 바라봄의 법칙을 사용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생활 가운데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들이 잘못 바라보므로 아담과 하와처럼 비극을 체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 바라봄의 법칙
75세 된 아브라함의 기도 응답으로 별들을 바라보게 한 것을 성경에는 잘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75세가 될 때까지 아무 이름도 없는 목자였습니다. 인정도 안해주고 유명하지도 않고 별볼일없는 영감이었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들어서 내 전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나님이 가라는 땅을 바라보는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믿음으로 출발한 것이 아브라함 생애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그는 75세까지 무명의 사람이었는데 75세 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을 바라봄으로부터 새로운 인생이 출발한 것입니다. 여러분 나이가 많다고 아이고 나이가 많은데 뭘 하겠노. 낙심하지 마십시오. 아브라함은 75세 인생출발이었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은 젊은 사람만 쓰지 않아요. 노인도 쓰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 변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장로님들 중에도 노인들 여기 많이 앉아 있어요. 모세는 무려 80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이스라엘을 이끌어 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끌어 나갈 때 필요하면 나이 많은 사람도 성령을 주셔서 사용하신 것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인데 75세인 아브라함이 아들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많이 해도 응답이 오지 않아요. 그리고 마음에 믿어지지 않아요. 기도는 많이 했는데 마음이 믿어지지 않고 괴로워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하루 그에게 말하기를 그 천막 안에서 꿇어 엎드려서 자꾸만 부르짖지 말고 천막 밖으로 나오라. 그리고 밤에 하늘을 쳐다 보라. 별들을 헤아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5절로 6절에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야훼를 믿으니 야훼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별들을 셀 수 있나 바라보라고 했었습니다. 그리고 바라보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전에까지 안믿어졌어요. 75세 된 노인이 65세 된 자기 부인을 통해서 아들을 낳으려고 기도를 하는데 안보면 믿음이 생길는지 몰라도 다 쭈글쭈글한 자기 아내를 쳐다보니까 기가 막힙니다. 내 도저히 자식 얻지 못하겠다. 우리 집에 기르는 종을 후속자로 삼아야 되겠다. 그렇게 말할 때 하나님께서 그렇지 않다. 네 몸에서 아들이 낳을 것이라고 밤에 그를 불러내서 하늘을 쳐다보고 별들을 헤아리라고 했는데 별들을 헤아리고 바라보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뭘 보느냐. 별을 봅니다. 얼마나 헤아렸느냐.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네 자손이 그와 같이 많으리라. 그 바라보자마자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믿습니다. 하나님이 잘됐다. 올바르다. 의롭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여러분, 바라보면 믿음이 생깁니다. 잘못 바라보면 부정적인 믿음이 생기고 잘 바라보면 긍정적인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거역한 한가지가 있습니다. 고향을 떠날 때 75세 네 전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고향도 떠나고 친척도 떠나고 아비집도 떠나라고 했는데 다 떠났습니다. 고향도 떠나고 친척도 떠났는데 아비집을 못 떠났습니다. 왜냐, 자기 조카를 데리고 출발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없이 고아가 된 조카를 불쌍히 여기사 동정으로 그를 데리고 출발했는데 하나님을 거역했다 말입니다. 하나님이 다 버리고 아내 손만 잡고 떠나라 했는데 조카를 데리고 떠났으니 아비집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사사건건이 조카가 문제인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기근이 다가오니 조카가 울고불고 배고프다고 해서 조카 때문에 할 수 없이 그 아내를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가면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자기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하고 나를 오빠라고 부르라고 하고 여동생, 오빠 부르면서 나가서 애굽으로 내려가서 아내를 바로왕에게 뺏기는 수모까지 겪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가 고향으로 가나안땅으로 돌아왔는데 또 초지 때문에 싸웠습니다. 아브라함의 종들하고 조카의 종들이 풀밭을 가지고 싸웁니다. 서로 초목이 있어야 양떼를 칠 수 있으니까 초장을 가지고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싸움이 보통 싸움 아닙니다. 어린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 된다고.. 종들끼리 싸워서 그 다음에는 아브라함과 조카끼리 서로 가족 간에 싸우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우리 이렇게 싸우면 안되겠다. 이방 땅에 와서 아재비와 조카가 싸우면 어떻게 하느냐. 네가 동에 가면 내가 서로 가고 너가 남이라고 하면 내가 북으로 가겠다. 네가 먼저 떠나라. 그러니 조카가 저 요단뜰을 바라보고 물이 넉넉하고 좋은 소돔과 고모라 지역을 바라보고 좋은 것은 자기가 다 차지해서 삼촌 나 저리가겠습니다. 저 땅은 내것입니다. 그래서 삼촌이 가거라. 그리고 아브라함이 있는 곳은 순 바위산, 메마른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조카 롯하고 싸우지 않고 그 땅을 점령할 수 있는 길을 여신 것은 아브라함아 오너라. 높은 데 올라오니까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바라봄의 법칙입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네가 네 눈으로 보는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하리라. 조카하고 생강할 필요없다. 힘으로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자에게 내가 이 땅을 준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3장 14절로 15절에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낙심해서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말고 눈을 들어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여러분 바라보면 그 바라보는 것이 여러분에게 끌려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라보는 데로 끌려가고 바라보는 것이 여러분에게 끌려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놀라운 능력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안바라보면 아무것도 안일어나는 것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게 되고 여러분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꿈을 가슴에 새기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입을 넓게 연다는 것은 꿈을 크게 가져라. 그 말인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 능히 하겠다. 구하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을 구하고 생각합니까? 소원을 구하고 생각하는 것인데 바라보는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생각하고 간구하면 넘치도록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사용하기 원하면 바라봄의 법칙을 활용해야 되는 것입니다. 바라보기 시작하면 믿음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안바라보면 믿음이 움직이지 않아요. 바라보면 믿음이 생깁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자기 오라버니가 죽어서 무덤에 넣은지 나흘이 되었는데 주님께서 그 오라버니를 살리러 왔으나 마르다와 마리아가 믿지를 않았습니다. 자꾸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나이다. 무덤의 돌문을 옮기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비웃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중에 호통을 쳤습니다. 마르다여, 내게 네게 말하노니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믿기 전에는 예수님이 역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르다가 마리아와 함께 가서 돌문을 움직여 놓으니까 예수님이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니 수의를 입은 채 살아서 나온 것입니다. 믿음이 활동하기 시작하는 것은 우리가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실천을 하면 믿음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7절에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죽은 자를 살리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는 것은 여러분의 믿음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싱가폴에 가서도 이점을 굉장히 지적했습니다. 성경에는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뽕나무더러 뽑혀 저 바다에 던져도 된다고 했는데 겨자씨 한알이란 왜 주님이 겨자씨를 들었습니까? 겨자씨는 모든 시중에 제일 적은 씨입니다. 겨자씨보다 더 적은 씨가 없어요. 최소로 적은 씨입니다. 그러나 씨중에 가장 적은 씨, 겨자씨 한알 만한 믿음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응답해 주겠다. 그러면 이것을 우리 현대어로 어떻게 해석하는 것입니까? 숫자중에 100중에 제일 적은 숫자는 `1 아닙니까? 1,2,3,4,5,6,7,8,9,10... 하나로부터 시작하지 않습니까? 믿음을 100으로 친다면 여러분의 제일 적은 믿음은 1입니다. 그러면 100% 믿음에 미달하는 1% 믿음만 있어도 태산을 옮기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1% 믿음은 다 있다 말입니다. 자꾸 사람들이 믿음이 없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사탄의 부정적인 말에 귀를 기울여서 그런 것입니다. 마귀는 와서 너 믿음없다. 너는 믿음이 없으니까 할 수 없다고 그러는데 하나님은 1%의 믿음이 있는 것을 바라보고 움직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은 가장 적은 믿음인데 숫자로는 1%의 믿음입니다. 1%의 믿음도 내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진짜로 속은 것입니다. 교회 와 앉아있다는 것이 1% 보다 믿음이 많이 있기 때문에 와서 앉아있는 것입니다. 전혀 없으면 믿음이 전혀 안생기는데 왜 교회 와서 앉아 있어요? 교회에서 시간 보내고 물질드리고 하나님 말씀 배우는 것이 1% 이상의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당신은 믿음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 믿음을 통해서 주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고 없는 것도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여러분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충분한 동력이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무능력하고 무력한 사람이 아닙니다. 힘이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요한삼서 1장 11절에는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그런데 악한 행실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것이 마음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에 의해서... 그래서 그리 끌려가는 것입니다. 바라보는 대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TV를 통해서 악한 장면을 늘 바라보면 바라보는데 무슨 죄가 있느냐. 그렇지가 않습니다. 내가 그리로 끌려가고 그것이 내게 끌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비디오 가게 가면 온갖 사회적인 퇴폐 비디오 영화가 많습니다. 그것을 가지고서 그냥 입 딱 벌리고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 무슨 죄가 있느냐. 보는데... 그런데 입 딱 벌리고 있는데 싹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마음을 점령해요. 마음에 가득한 것이 밖으로 나옵니다.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나온다고 생명이 마음에서 나오지 않고 사망이 마음에서 넘쳐 나오니까 생활이 파괴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와서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마음에 생명수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마음에 생명이 들어오게 되므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생명의 역사가 나오므로 여러분 생활에 변화가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3. 바라봄의 법칙을 적용한 야곱
우리가 바라봄의 법칙을 실생활에 적용해야 될 것입니다.
자연법칙을 다스리는 야곱을 우리가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원래 사람을 지어 놓으셨을 때 우리의 운명과 환경을 다스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를 노예로 만들지 않고 다스리는 자로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것으로 말미암아 마귀와 죄악의 종이 되었으나 주님께서 십자가에 오셔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은즉 그러므로 믿음에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시편 8편 5절로 6절에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그를 즉,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만들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만물을 다스리는 것을 사람에게 맡겼습니다. 그가 손으로 지은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와 같이 운명과 환경을 다스리는 자로 지음을 받았지 지배를 받는 노예로써 지음을 받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다스리느냐.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다스리는 것입니다. 내가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좋은 그림을 마음속에 그려놓고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안된다. 못한다. 실패한다. 패배한다. 잘못된 그림을 그려놓고 그를 보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마귀의 종, 죄악의 종, 질병의 종, 저주의 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이와 같은 좋은 그림을 마음속에 그려놓고 그것을 바라보면 여러분이 믿음이 생겨나게 되고 믿음이 생겨나면 주님께서 의롭다고 말씀하시고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좋은 그림을 그려 놓고 좋은 환경에서 그 좋은 모습을 마음속에 간직한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이 결국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콩히 목사 싱가폴에 교회보면 엄청나게 크지요. 엄청나게 큰 교회가 된 것은 콩히 목사의 마음속에 그 엄청나게 큰 교회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그림을 누가 그리는데 도와 주느냐. 저가 그리는데 도와준 것입니다. 그래서 저를 신앙의 아버지라고 말하는데 제가 싱가폴에서 부흥회를 여는데 운동장에서 했는데 한 5만명이 닷새 동안 모였어요. 그런데 그때 콩히 목사가 고등학교 학생으로써 휠체어 부스에서 일을 했습니다. 못걷는 사람이 휠체어에 실려서 오면 그를 차에서 안고 내려서 휠체어에 앉혀서 자리에 밀어 주고 집회 마치면 도로 끌고 안아 차에 태워 주고 했는데 인도네시아에서 비행기를 타고 집회에 참석하러 온 중년의 남자가 있었어요. 하체 마비가 되어서 전혀 움직이지 못해요. 그 사람을 고등학생인 콩히 목사가 안고 내려서 집회에 참석시키고 또 안아서 차에 도로 싣기고 했는데 사흘째 되던 날 집회를 마치고 난 다음에 휠체어에서 안아서 차에 실으려고 가니까 일어나 버렸어요. 그래서 차에 타러 가는 것이 아니라 강단으로 걸어 올라가서 나는 오늘 이 시간에 휠체어에 마비된 채로 왔으나 나았다고 간증하는 것을 보고 그도 울고 그를 밀고 봉사하던 콩히 목사도 울었습니다. 고등학교 학생인데 너무 마음에 감격을 느껴서 나도 주의 종이 되겠다고 그때 주의 종이 되겠다는 헌신을 하고 난 다음에 그 다음부터 우리 교회를 이 멀리 비행기 타고 와서 참석을 하고 제가 그를 만나서 제자 삼고 꿈을 가지라고 늘 강조한 것입니다. 이 교회를 보고 너도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그래서 그는 왕대밭에 와서 보고 왕대만 봤지 군중은 못봤습니다. 적은데 나무밭은 못봤어요. 교회란 이렇게 큰 교회가 되는구나. 꿈을 그리고 그 꿈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나가서 제일 처음에는 싱가폴에서 굉장히 적은 교회로 시작했습니다. 너무 교회가 허술하고 자동차가 없어서 싱가폴에 있는 우리 CGI 멤버 목사님이 헌 자동차를 한 대 사주어서 그것을 타고서 교회를 돌보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속에 그 판자집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의도순복음교회 같은 큰 교회가 마음에 있었어요. 그러면서 자기는 스승이었던 저보다는 좀 더 큰 교회를 지어야 되겠다. 우리 교회보다 좀 더 큰 교회를 바라보았는데 지금 교회가 우리 교회보다 큽니다. 장엄합니다. 그가 꿈을 꾸니까 믿음이 생겼습니다. 믿음이 생기니까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바라보고 믿음으로 말하고 믿음으로 행하니 주님께서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싱가폴의 사람도 서울에 와서 배워서 싱가폴에 가서 서울에 있는 교회보다 더 큰 교회를 목회하게 되었는데 여러분 왕대밭에서 뭘 하십니까? 여기와서 쩨쩨하게 생각하고 나는 못한다. 나는 안된다. 할 수 없다. 나는 죽는다. 그렇게 하면은 그러면 왕대밭에 온 사람이 아닌데 잘못 왔어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할 수 있습니다. 용서받고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하고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건강하고 치료받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축복을 받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써 남에게 꾸어주고 나누어 주면서 살게 되는 여러분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영생복락을 얻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꿈을 꾸고 좋은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고 믿으면 하나님이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믿음을 가졌고 그 믿음이 현실에 나타나게 된 것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로 3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바라는 것이 꿈입니다. 바라보는 것은 꿈이 아닙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입니다. 실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이루어졌지만 밖으로 얼마 안있으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는 자에게 반드시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상을 주셔요.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헛된 믿음이 아닙니다.


4. 영생과 바라봄의 법칙
영생을 얻는 길과 바라봄의 법칙도 우리가 성경에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를 지날 때 길이 멀고 물이 없고 음식이 박하니 백성들이 불평을 말했습니다. 기도하고 찬미하지 않고 원망과 불평을 말하니까 하나님이 노하셔서 불뱀을 명령하시매 불뱀이 와서 물매 수많은 사람들이 물려 죽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회개하고 모세에게 살려달라 하니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니 불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 쳐다보는 사람마다 고침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그래서 불뱀을 빨리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았는데 뱀에 물려서 독이 올라 통통 부어 죽어가는 사람도 쳐다만보면 독이 싹 가셔지고 나았습니다. 그 사건을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하루 밤중에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유대인의 지도자요, 다윗의 교인인 니고데모가 하나님이 당신하고 같이 계시지 아니하시면 이런 큰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틀림없이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 나같이 늙은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서 또 나올 수 있습니까? 어떻게 거듭납니까?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누구든지 어떻게 믿습니까? 바라봄의 법칙을 가지면 믿음이 생겨나기 때문에 누구든지 십자가에 매달린 나를 바라보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여러분 예수 안믿는 사람들이 십자가 밑에 와서 예수님을 바라보면 바라보자마자 그 꿈이 믿음을 마음에 생성하게 만들어서 믿고 구원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강도 두 사람이 좌편, 우편에 매달렸지 않습니까? 한 사람의 강도는 예수님을 흉보고 욕을 했습니다. 너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우리를 함께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그런데 다른 강도는 그것을 꾸짖었습니다. 야 이놈아, 너와 나는 우리 죄를 지은 대가로 지금 못박혔지만 이 사람은 죄를 지은 적이 없다. 좋은 일밖에 한일이 없다. 그리고 난 다음 주님을 쳐다보고 바라보았습니다. 같이 십자가에 못박혀 있으면서도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 나라 임할 때 나를 기억하옵소서. 예수님이 그 자리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너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좋은 일 한 것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좋은 일 한 것 없습니다. 강도가 잡혀서 사형선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을 바라보자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 믿음을 통해서 주님이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것은 바라볼 때 생겨나는 것이므로 바라보는 것을 여러분 아주 중요하게 여겨야 되는 것입니다.
민수기 21장 8절로 9절에 “야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바라봄의 법칙으로 오늘도 예수님을 쳐다보며 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로 15절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셨으니 다 이루어 놓은 예수님만 바라보면 여러분이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 믿는 것은 예수를 바라보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날 위해서 몸찢고 피흘린 것을 바라보고 그 의미를 되새기며 내 죄, 내 허물, 내 병, 내 저주, 내 죽음을 짊어졌다는 의미를 되새기면서 바라보면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몸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을 바라보고서 마음속에 그를 짊어지면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도 똑같이 부활로써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여 또한 온전케 하신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믿음은 바라봄이 있어야 하므로 십자가 대속의 주님을 바라보고 깨달아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중생, 성령충만, 치료와 축복, 부활은 바라볼 때 마음속에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항상 바라봐야 될 것은 요한삼서 1장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여러분 바라보고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그러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에 대한 아주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영혼이 잘되어서 성령충만하고 범사가 형통하여 남에게 애꿎은 소리 듣지 않고 도와달라고 손 내밀지 않고 강건하여 장수하고 그 이상 더 바랄 것 뭐 있습니까? 그런 그림을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면 믿음이 생겨나고 믿음이 생겨나면 눈에는 아무 증거 없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주님은 내 믿음대로 될찌어다고 말씀합니다. 반드시 그대로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은 이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하나님은 크게 역사해 주시는데 전 한전 사장이셨던 김쌍수 씨는「5%는 불가능해도 30%는 가능하다」라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음에 품는 것은 마음에 원하는 삶의 이미지를 그리는 것이다. 패배와 실패의 이미지를 그리는 사람은 실패자의 인생을 살게 된다. 승리와 성공, 풍요로움, 기쁨, 평화, 행복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은 아무리 큰 장애물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런 인생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부정적으로 그리지 말고 긍정적으로 그리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버드대학교의 윌리엄 제임스 교수는,“이루고 싶은 모습을 마음속에 그린 다음 충분한 시간 동안 그 그림을 간직하고 있으면 반드시 그대로 실현된다.” 이루고 싶은 그림을 마음속에 그렸다가 아침에 그렸다가 저녁에 지워 버리고 월요일날 그렸다가 다음 토요일날 아이구 안된다 집어 치워버려 하며 치워버리면 안돼요. 충분한 시간, 이루고 싶은 그림을 마음에 그렸으면 그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으면 그것이 이루어진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를 “심리학의 하나의 법칙”이라고 그는 불렀습니다. 우리가 목표하고 소원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마음에 그리고 바라보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성경에는 바라봄의 법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보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루고 싶은 것을 마음속에 바라보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바라보는 것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바라보고 있으면 믿음이 생기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하고 믿음으로 선언하면 내 믿음대로 될찌어다.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2~3년 전, 한 방송국에서 “부도를 만난 중소기업 사장”들을 찾아 인터뷰한 내용이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생선 초밥집을 하다가 실패하고 파산하여, 은행 빚을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된 분이 있습니다. 그는 가족과 떨어져 살면서 초밥집 주방장으로 다시 취직하여 기도하며 재기를 꿈꾸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최고의 초밥집을 경영하는 꿈을 꾸면서 그가 운영하는 초밥집의 주방과 홀 등을 상세하게 그리며 그것을 노트에 꼼꼼히 그려놓았습니다. 장차 난 이러한 초밥집을 만들어서 이런 주방을 꾸며서 이런 음식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대접하여 재기하겠다고 그림을 그리고 그를 마음속에 간직했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마음 꿈속에는 자기가 세우는 초밥집에 사람들이 줄을 서서 올 것을 바라보았지만 초밥집을 다시 시작하려니까 자본이 없어요. 신용불량자가 된 그에게 돈을 빌려줄 사람도 없고 그런데 하루는 기도하는 중에 구청에 가서 창업자금을 신청하라는 하나님의 계시가 있어서 구청에 가서 창업자금을 신청했는데 원래 신용불량자가 되면 구청에서 돈 안줘요. 그런데 구청에서 5천만원을 창업자금을 대줬어요. 그래서 그가 5천만원을 가지고서 그는 또다시 초밥집을 시작했는데 자기가 초밥집 일하는 그 대위에 성경을 항상 올려놓고 항상 성경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는데 요새는 불티가 나게 초밥이 팔린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모여서 방송에까지 나와서 고백할 정도까지 되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반드시 한번 실패했다고 해서 늘 실패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꿈과 소망을 갖고 기도하며 믿음으로 바라보면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말씀을 듣고 그것을 마음에 새겨보고 믿고 말하면 성취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와서 설교 말씀을 듣고 마음에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그림 그려서 바라보고 믿고 나는 반드시 성공한다. 축복받는다. 승리한다고 입으로 시인하고 나가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구원의 말씀을 듣고 십자가를 마음에 상상하여 바라보고 믿고 고백하면 구원까지 받는 것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은 모든 믿음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시간 여러분, 모든 사람은 다 마음에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이 세상에 안믿는 사람도 그림을 그리고 믿는 사람도 그림을 그리는데 그림이란 뭐냐, 소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소원이 무엇입니까? 물으면 내 소원은 이런 것입니다. 저런 것입니다 말하잖아요. 좋은 화려한 옷을 입고 싶은 소원이 있는 사람은 자기 마음속에 옷을 꿈꿔 보잖아요. 화려한 옷을 꿈꿔 봅니다. 봄이 오니까 칙칙한 겨울 옷을 벗어버리고 화사한 봄옷을 입은 자기 모습을 그려 보지요. 어떠한 직장을 원합니까? 자기가 원하는 직장을 마음속에 그려 보지요. 소원을 다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그림을 그리더라도 이루어준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장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여러분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고 기도하고 믿으면 하나님은 옆에 와서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축복을 해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당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무서워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주님이 도와주겠다는데 누가 겁을 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오늘 이 자리에 계셔서 여러분보고 참으로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널 붙들리라 했으니 하나님 한분만 빽을 삼아도 씩씩히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꿈을 안 꾸기 때문에 여러분 늘 뒤처지는 것입니다. 꿈을 꾸면 하나님이 역사하는 것이지요.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성경은 말하는 것입니다. 꿈이 없는데 하나님이 도와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꿈을 꾸십시오. 저는 한평생을 꿈을 꾸면서 살았습니다. 저는 능력이 없고 무능하고 무식한 사람이지만 하나님 말씀을 듣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은 이후에는 꼭 꿈을 꾸었습니다. 세계에서 최대교회를 이룩하겠다. 수만명이 모이는 교회를 짓겠다. 그리고 온 천하 만국에 다니면서 복음을 증거하겠다는 꿈을 항상 꾸었습니다. 적은 것은 적은 꿈을 꾸고 큰 것은 큰 꿈을 꾸었는데 세월이 지나고 난 다음 일을 다 그치고 오늘 돌아보니 저의 꿈꾼 것에 넘치도록 능히 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내가 꿈을 더 크게 꾸었으면 더 크게 될뻔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꿈을 접고 드러 앉을 수가 없습니다. 내 나이 서양 나이로 76인데 자꾸 한국 나이로 77이라고 해서 내가 아니다 아니다. 한 살 나는 뺀다. 나는 한국식 나이로 계산 안하고 서양 나이로 계산한다. 내가 76살이지만 꿈은 50대의 청춘과 같이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적은 꿈도 꾸고 큰 꿈도 꿉니다. 꿈을 바라보고 믿으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도 꿈을 꾸고 바라보고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꿈만 꾸면 꿈이 믿음을 만들어 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운행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여러분과 함께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꿈을 꾸도록 기다리고 계십니다. 꿈을 꾸게 되면 성령은 역사해서 여러분을 이끌어 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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