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기목사/믿음이란? (히 11:1)
<서론>
“믿음이란?”무엇인가? 이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에는 믿음이란 바라는 것 즉 소망하고 꿈꾸는 목표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의 증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쉬운 말 같지만 굉장히 어렵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 즉 우리 속에 꿈꾸고 소망하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실상과 증거를 꼭 쥔 것이 믿음이란 것입니다. 실상이란 헬라어로 ‘휘포스타시스’라고 말하는데 증빙서류, 등기서류 또는 발판 등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는 것이 아직 보이지 않아도 믿음이 있으면 바라고 소망하는 것을 반드시 이뤄진다는 믿음이 있으면 그것이 우리가 증빙서류나 집이나 부동산의 등기서류를 증거로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집을 아직 이사 가지 않아도 그 집에 등기서류나 증빙서류를 손에 쥐고 있으면 그 집이 내 것인 것처럼 아직 보지 못하고 취하지 못했으나 믿음이 있으면 믿음은 이미 그것이 내 것이 되었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을 믿습니까? 믿음은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데, 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믿음을 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난 다음 하나님 말씀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의 인격이 배후에 있기 때문에 절대로 거짓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마음에 깨달아야 돼요. 말씀을 듣고도 이 무슨 말인지 모르면 소용이 없어요. 말씀을 듣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깨닫고 그래서 깨달은 그 위에 분명한 꿈을 꾸고 담대하게 나도 믿는다. 이루어진다. 그렇게 하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란 실상과 증거를 갖고 담대히 나아가면 성령께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 하시고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본론>
1. 하나님의 말씀에 서야 한다
무엇이든지 첫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거나 믿는 것 아닙니다. 내가 믿고 싶은 것이라고 무엇이든지 이것도 믿고 저것도 믿고 믿는다. 그것은 토대가 없는 집과 같아서 흔들리고 무너집니다. 하나님 말씀 위에 서서 믿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고 이 성경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듣고 묵상하고 그 말씀의 내용을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목회 처음 시작할 때 요한삼서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 이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그 말씀이 깨달아질 때 천지가 환해지는 것 같아요. 전에는 그 성경말씀을 읽고 지나갔는데 내가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듣고 마음에 깨달아져서 아~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내 영혼의 죄를 다 청산했으므로 영혼이 잘되고 저주를 다 짊어졌으므로 범사가 잘되고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으므로 건강하기를 원하시는구나. 완전 구원이구나. 삼박자 축복이구나. 전인구원이구나. 이것을 알자마자 마음에 큰 믿음이 생기고 기쁨이 생기고 그 다음부터 시골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니면서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려도 믿음만 있으면 영혼이 잘 되가고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것을 눈에 쥔 것과 같다. 시간만 지나면 성령이 이루어 주신다. 믿음만 있으면 다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게 담대하게 가르칠 수 있고 그것을 듣고 믿은 사람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을 보았었습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마음에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마태복음 4장 4절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우리가 세상에 떡만 먹고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말씀으로 살 수 있다. 그 말씀 속에 놀라운 생명이 들어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호수아 1장 8절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기를 이 율법책 즉 성경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평탄하게 하고 형통하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걸림돌이 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일이 잘되고 평탄하고 형통하게 하기 위해서 말씀을 주신 것이므로 그 말씀을 우리가 주야로 묵상하고 깨닫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대한 믿음을 흔들어 놓으려고 마귀는 와서 시험을 많이 합니다.
빌리 그레함 박사가 나이 30이 되었을 때 벌써 세계적인 유명한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과 모여서 성경을 가지고서 철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토론을 하다가 마음에 의심이 들어왔습니다. 정말 성경이 하나님 말씀인가. 성경을 믿을 수 있는가. 그러자 그의 인생이 사시나무 흔들리듯이 흔들렸습니다. 성경을 의심하게 되니까 믿을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경책 한권을 들고 캘리포니아 산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께 엎드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 내가 성경에 대한 의심을 가지니까 내 인생 전체가 뒤흔들립니다. 성경을 믿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루 기도하고 있는데 마음속에 이러한 확신이 들어오더니만 입에서 고함 소리가 나오더래요. 나는 어떻게 되든지 성경의 하나님 말씀인 것을 믿는다. “주님, 저는 성경을 오직 믿음으로 하여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철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질문이나 의심보다 믿음의 눈으로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 말씀인 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렇게 고백하고 난 다음에, 그는 자신 안에서 일어난 영적 전쟁에서 이기고 그때부터 확신하여 말씀에 서서 신앙생활하고 설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원수는 우리에게 의심을 넣어 마구 흔들어 믿음에서 떨어지도록 합니다. 그럴 때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여 깨닫고 마음에 확고하게 서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 위에 서야 믿음이 바로설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는 하나님이 묵시로써 주신 말씀인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은 감각적인 지식이지만 성경말씀은 계시적인 지식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해준 지식으로 인간적인 감각으로는 증명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성령으로 믿으면 하나님의 은총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2. 믿음과 감각
둘째로, 우리가 믿음과 감각이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감각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져보고 그래서 아는 것은 3차원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4차원적인 것입니다. 4차원은 3차원보다 높아서 보지 못하고 귀에 들리지 않고 냄새 못 맡고 맛 못보고 만져보지 않았는데 그러나 사실 진리가 주어진 이것은 4차원적인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인데 하나님을 감각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귀로 직접 들었습니까? 하나님 체취를 했습니까? 하나님 손으로 만졌습니까? 도무지 감각으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속에 영혼은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믿습니다. 그게 믿음인 것입니다. 희한하게 여러분 오늘 하나님을 보지도 듣지도 만지지도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신 것을 믿고 있잖아요. 그것은 성령이 여러분에게 주신 지식인 것입니다. 인간적인 지식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은 감각으로는 체험상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꿈꾸고 말하는 것입니다. 체험상으로는 없어요. 없는데 우리는 하나님 성령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생각하고 꿈꾸고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 81편 10절에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야훼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세상에서 인간의 수단과 방법과 능력으로 채우는 것도 있지만 주님께서 안 보이는 하나님이시만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믿고 입을 넓게 연다. 믿음의 입을 넓게 열면 하나님이 채워 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채워 주시는 삶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도 있거니와 하나님 믿음으로 사는 생활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힘으로 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아브라함은 믿음에서 탁월한 분이었습니다.
로마서 4장 17절로 22절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시고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을 수 없는 중에 믿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으로는 바랄 수 없어요. 인간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나가는 것이 우리가 믿음인 것입니다.
3. 바라는 것이 이루어진 모습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가 셋째로, 믿음은 바라고 꿈꾸는 것이 이루어진 모습에 집중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란 뭐냐,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에 아직 없는데 이루어진 모습을 마음속에 상상하고 꿈꾸고 그것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는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는데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소망하고 꿈을 얻었으면 그 꿈을 가슴에 간직하고 그것에 집중해야 되는 것입니다. 동남풍이 불고 서북풍이 불어도 거기에 흔들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로 3절에 보면 주님만 바라보아야지 환경을 바라보면 실패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보이는 것은 우리가 보이는 그 자체로 된 것이 아니라 안 보이는 배후의 세력이 그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보이지요. 자기 스스로가 된 것이 아니라 안 보이는 하나님의 성령이 생기를 넣어 주어서 성령을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지요.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된 것이 아니라 안 보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을 지어 주어서 우리가 인생이 된 것입니다. 오늘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보이는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안 보이는 하나님 말씀이 배후에 있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믿음의 세계는 보이는 세계가 아니라 안 보이는 세계를 더불어 사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동물들은 믿음의 세계가 없어요. 왜냐하면 동물은 영이 없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와 교제가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이 있기 때문에 영적인 세계와 교제하고 안 보이는 영적 세계에서 이루어진 것을 믿음으로 현실적으로 나타나게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는 환경을 바라보고 흔들리면 안돼요. 환경은 우리 믿음이 결과적으로 나타난 것이 환경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속에 생각을 통해서 믿음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으로 생각을 통해서 우리가 소원하고 꿈꾸는 것이 이루어진 것을 집중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몸에 병이 많이 들어서 많이 고통스러운데 성경에는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가 나음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눈에 안보이고 현재 손에 만질 수 없고 느낄 수 없는데 성경은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가 나음을 입었다. 하나님의 영적인 말씀을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우리가 아프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곳에 집중을 하면 그것을 믿을 수 없어요. 그러나 아픔에도 불구하고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음을 집중해서 채찍에 맞아 나음을 입은 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앉으나 서나 나음을 얻고 건강해진 내 모습을 바라보고 저것이 내 모습이다. 저것이 내 모습이다. 아무리 옆에서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그것에 정신을 팔지 말고 내가 내 꿈을 집중적으로 바라볼 때 그때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 가운데 하나는 상상력이다.” 우리 마음의 생각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서 소중한 것입니다. 로마의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한 사람의 인생은 그의 생각에 따라 만들어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행동이 아니라 그 마음속에 안 보이는 생각에 따라서 인간이 만들어진다. 미국의 사상가이자 시인인 랠프 왈도 에머슨은 “사람이 온종일 품고 있는 생각은 바로 그 자신이 된다”라고 말하여 생각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하루 종일 생각하고 있으면 생각이 그가 된다는 것입니다. 노만 비센트 필 박사는 “그대의 생각을 변화시켜라. 그러면 그대는 그대 자신의 세계를 변화시키게 될 것이다” 생각이 달라지면 환경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들은, 마음의 생각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것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눈에 보이는 모든 세계가 안 보이는 하나님의 생각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생각이 있고 만물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 환경도 우리 생각이 있고 만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보고 장엄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50여년 전에 이미 세워진 건물이니까 장엄하지요. 그러나 이 건물이 그대로 된 것은 아닙니다. 먼저 저의 생각에 안 보이는 형태로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저는 이 교회를 생각 속에 꿈꾸고 있었어요. 그 생각이 나타난 것이 건물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이 먼저 있고 현실이 나타난 것입니다. 물질세계는 안 보이는 생각을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각인 말씀을 받아들이고 집중하면 그 말씀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꿈과 목표를 갖고 그것을 생각하며 바라볼 때 믿음이 생깁니다. 목표를 두고 꿈을 꾸고 그것을 늘 바라보고 생각하면 믿음이 생깁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은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진 모습에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증거이기 때문에 이미 문서를 손에 쥔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믿은 대로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바로 이루어진 것과 같은 것입니다.
4. 마음의 결단이 있어야 한다
넷째로, 우리가 믿음이 생활을 할 때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의 결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예 한번 맡겼으면 그로 말미암아 안되면 죽더라도 맡기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었다가 안 믿었다가 믿었다가 의심했다가 하나님께 맡겼다가 도로 빼앗았다가 이러면 아무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주여~ 아침에는 내가 믿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믿습니다. 맡깁니다. 그러다가 점심때 주님 도로 내 놓으십시오. 도로 내가 걸머지고 가겠습니다. 자기가 다 걸머지고 갑니다. 그러면 그것 믿음이 아니지요. 많은 사람이 기도할 때 전부 내놓습니다. 하나님 내 개인도 가정살이도 염려, 근심도 다 내놓습니다. 기도하고 난 다음 일어설 때는 안녕히 계십니다. 또 다음에 와서 내놓겠습니다. 도로 다 안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내어 맡겨 버려야지 완전히 내어 맡기고 하나님이 잘못하면 어떻게 하느냐. 잘못하면 같이 죽지요. 죽을 각오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헤엄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물에 몸을 던질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물에 몸을 맡겨야 물이 그 몸을 띄워 주고 헤엄을 치게 만들어 주지 물에 들어가서 막 자기가 살겠다고 물을 때리고 발로 차고 하면 물이 네가 다 해봐라. 나는 도와줄 수 없다. 그러는 것입니다. 물 속에 헤엄을 배우는 사람도 물에 자기를 맡기는 것처럼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하나님께 맡겨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살면 살고 죽으면 죽으리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하나님이 불 가운데서 건져주시지 아니하실지라도 우상에 절하지 않겠다고 했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다 하니까 불 속에 던져 놓으니까 제4의 사람 하나님의 사자가 와서 불길을 막고서 그들을 살려준 것입니다. 믿고 살면 살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과 마음에 담대함이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로 39절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믿음이 있어요. 믿음이 없는 것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믿었다가 자꾸 뒤로 물러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물러가는 사람 기뻐하지 않아요. 한번 믿었으면 결판을 낼 정도로 결심하고 밀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두려워하고 물러가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가복음 14장 25절로 2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물위로 걸어오는데 밤 사경에 파도가 치고 캄캄한데 흰 빛을 내면서 물위로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오니까 제자들이 배를 타고 보다가 전부 유령인줄 알고 고함을 쳤습니다. 뱃사람들은 밤에 유령이 물위로 걸어오는 것을 보면 물에 빠져 죽는다는 징크스가 있습니다. 우리가 죽었다고 고함을 치니까 예수님이 내니 두려워 말라. 그때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님이시거든 나를 물 위로 걸어오게 하소서. 주님이 걸어오라. 말씀 한마디 했습니다. 사람의 경험으로 물 위로 걸은 적이 없습니다. 물 위로 걷는 것을 본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고 실제로 물 위로 걸어본 적 없는 인간 경험으로는 그런 일이 없는 일인데 주님 말씀 한마디로 밤중에 사경에 물 위로 걸어오는 예수님께서 내가 예수님이니 두려워말라고 하시고 난 다음에 물 위로 걸어오게 해달라고 하니까 걸어오라고 말했었습니다. 이 베드로가 물위로 걸어간다는 것은 여러분 목숨을 바쳐놓은 것입니다. 만일 물 위로 발을 내밀었다가 주님이 안 붙들어 주시면 물 파도에 밤중에 휩쓸려가면 누구도 건질 수 없습니다. 죽을 각오하고 모험을 가지고 베드로가 물 위에 뛰어 들어가니까 사람으로서 처음으로 쩌벅쩌벅 물 위로 걸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모험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모험심이 있는 사람이 믿음이 능력있게 활용되고 발전합니다. 모험심이 없이 너무 조심스러우면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녀를 난간에 세워 놓고 야~ 뛰어 내려라 받아줄게. 야~ 뛰어내려라 받아줄게. 자녀 중에 모험심이 많은 사람은 뛴다~ 탁 뛰지요. 그러면 받아주지요. 그러나 모험심이 없는 자녀는 뛴다~ 하나, 둘! 하나, 둘! 아이 나는 못해. 야~ 엄마가 받아줄게 뛰어~ 하나, 둘. 하나, 둘 아 나 못해. 그러면 평생 못 뛰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믿어 내가 받아줄게. 그러면 믿습니다 하고 뛰어내리는 사람은 받아주는데 믿어. 하나님 정말 받아줄래요? 받아 준다니까! 혹시 안받아주면 어떻게 해요? 받아준다니까! 그래도 혹시 안 받아주면 어떻게 해요. 뛰어내려! 못해요. 다음에 할께요. 그러면 그 믿음은 발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와 같이 위대한 믿음의 모험을 할 수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데려온 중풍병자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댁에 와서 말씀을 증거하는데 사람이 인산인해로 모여서 입구까지 꽉 들어찼으니 중풍병자를 들것에 들고 온 사람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모험을 했어요. 집에 사다리를 놓고 지붕에 올라가서 지붕을 뜯어내는 것입니다. 만일 중풍병자가 안 나으면 집 한 채를 도로 지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풍병자를 지붕에 끌고 올라가서 로프에 매달리는데 떨어뜨리면 중풍에 걸린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상처까지 입으면 죽습니다. 죽을 각오하고 모험으로 예수님 앞에 침상을 내리니까 예수님이 앉아서 그 믿음을 보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믿음은 나 혼자 숨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이 믿음인데 주님이 믿음을 보시고 소자여 네 죄사함을 받았다. 침상을 짊어지고 집으로 가라. 나아서 간 것입니다. 모험으로 믿어야 믿음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5. 담대히 시인하고 모험으로 행해야 한다
다섯째로, 우리가 믿음을 믿었으면 담대하게 입술로 고백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이 아무것도 없어도 마음에 믿었으면 믿음대로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은 대로 나는 나았다. 나는 문제가 해결 되었다. 나는 입학 되었다. 나는 사업이 되었다. 나는 평안을 얻었다. 마음에 믿음이 생기면 믿음대로 말하고 그 다음 믿은대로 창조적으로 명령해야 되는 것입니다. 평안하라! 건강하라! 입학이 돼라! 사업이 되라! 명령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입으로 시인하고 창조적인 명령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모험심이 없이는 승리할 수 없기 때문에 모험심을 가지고서 행하고 난 다음에는 담대하게 입으로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보십시오. 모험심을 가지고 행해야 믿음이 살아있지 모험심을 가지고 행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을 가지고 모험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께 찾아가면 그 결과로 상을 주신다. 복을 주신다고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살아계신 것도 이만 저만 믿지 못하고 찾아가도 하나님이 상 주실 것을 믿지 못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반드시 살아계시고 우리가 주님을 발견하면 주님께서 상급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았는데 왜그러냐, 다윗은 굉장히 모험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양을 칠 때 사자나 곰이 와서 양을 물고 가면 보통 사람 같으면 사자와 곰이 와서 양을 물고가면 그냥 도망을 치든지 고함을 치다가 도망치지 따라가지 않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이 같이 계신 것을 알고 믿고 사자와 곰을 따라가서 그 입에서 양을 빼앗았습니다. 그래서 사자와 곰이 달라들면 수염을 잡고 같이 쳐서 사자와 곰을 죽였었습니다. 그는 믿음을 실천하는 사람으로서 실천할 때 얼마나 큰 하나님의 능력이 따라오는 것을 체험한 사람인 것입니다. 모험을 해야 체험을 할 수 있어요. 믿음은 체험을 해야 힘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체험했다. 할 수 있다. 그 말에는 당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체험을 하지 못한 믿음은 용감하지 못합니다. 체험을 한 믿음은 용감하고 담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7장 34절로 37절에 보면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 사울과 이스라엘 군인들이 골리앗을 보고 다 기절초풍을 했습니다. 40일 동안 골리앗이 나와서 큰 소리로 공갈을 치니 혼비백산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데 10대 소년인 다윗이 와서 그 말을 듣고 내가 나가서 싸우겠다. 사울왕이 너는 소년이요, 저 사람은 장군인데 못나간다. 내가 나가지요. 곰과 사자하고도 싸웠는데 저놈하고 내가 못 싸울게 있습니까? 굉장한 용감한 모험심이 나타난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야훼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다윗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살아서 돌아올 것이라 기대 안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같이 나가는 담대한 모험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혼자서 한다면 모험심을 가지지 못해요. 하나님이 같이 하기 때문에 모험심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날 보고 하는 말이 목사님이 50년 이상 설교를 했으니까 이제는 강단에 서서 눈 감고도 설교할 수 있지요? 여러분, 눈감고 설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주일날 한번 설교하려면 일주일 내내 고민하고 토요일에는 반죽음이 됩니다. 수십년 동안 했는데요. 50년 동안 해도 내가 하나님 말씀을 증거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 힘든일인지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담대하게 나갈 수 있는 것은 성령이 같이 계신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부르셔서 성령이 기름부어 주시고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을 주시므로 성령에 의해서 나간다고 하면 마음속에 담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 주의 사역인 것입니다. 이처럼 모험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 혼자 힘으로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하는데 어떻게 내 혼자 되는 것입니까? 여러분 장사를 해도 주님과 같이 한다. 정치를 해도 주님과 같이 한다. 사업을 해도 내가 하나님과 같이 한다. 같이 하는 당사자가 나와 같이 있으므로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모험을 가지고 행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모험심을 가지고 나갈 때 굉장히 강한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행할 때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믿을 때 입으로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입으로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말해야 돼요.
다윗은 사무엘상 17장 45절로 47절에 블레셋 사람에게 나갈 때 엄청난 가슴이 저릿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 볼까요? 사무엘상 17장 45절로 47절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야훼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야훼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야훼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야훼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기도가 아닙니다.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골리앗을 보고 담대하게 자기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야훼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얼마나 담대한 고백인 것입니까? 오늘 야훼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겠다. 전쟁은 야훼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이렇게 담대하게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귀를 보고 마귀야 나가다오. 제발 날 괴롭히지 말고 나가다오.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탄아!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주님께서 내게 정사와 권세와 마귀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능력을 주셨으니 물러가라!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나갈찌어다. 이렇게 입술에 담대한 고백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백은 입으로 시인하는 것하고 창조적으로 명령하는 것하고 두 가지가 동시에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주님 내가 기도했는데 주님이 축복해 주셔서 내 사업이 잘되게 해주심을 믿고 감사합니다. 사업을 잘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다음에는 돌아서서 사업은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잘될지어다. 저주는 물러가라! 형통은 다가와라! 축복받을찌어다! 입으로 시인하고 감사하는 것하고 그 다음은 창조적인 명령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게 입술의 고백인 것입니다. 두가지가 꼭 겸해야 되는데 대개 많은 사람들은 두 가지가 겸하지 않아요. 하나님 내게 마음에 평안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마음에 평안하고 기쁘고 행복하고 좋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마음이 평안하게 되었음을 기쁘고 감사합니다. 그러고 난 다음 그치면 안돼요. 마음은 평안할찌어다. 기쁘고 즐거울찌어다. 하나님의 은총이 임할지어다.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적인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머리에는 인정하고 축복하고 인정하고 다음번에는 창조적인 명령을 내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결과를 가져오는 좋은 길인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패배자와 승자자의 차이가 어떤지 압니까? 존 맥스웰은「당신 안에 잠재된 리더십을 키우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제를 어둡게 보는 사람은 패배자가 되고, 문제를 밝게 보는 사람은 승리자가 된다.” 문제가 생기면 아이구 이제 망했다. 이제는 절단이다. 이제는 끝났다. 모든 것을 어둡게 보고 가슴을 치면 그 사람 패배자가 돼요. 그러나 문제를 밝게 봅니다. 또 한가지 기회가 온다. 어려운 일이 다가오고 고통이 다가오는 것 같지만 주님이 같이 계시므로 또 한번 기적이 일어나려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좋은 일을 주시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좋게 보는 사람은 성공하는 것입니다. 일을 나쁘게 보는 사람은 점점 나빠지고 좋게 보는 사람은 점점 좋아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문제가 생기면 방해물을 먼저 보는 것입니다. 자기가 장애가 되는 문제를 먼저보고 그것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패배자가 되지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산을 보고 자꾸 태산이 다가오니 죽었다. 그러나 성공하는 사람은 문제가 다가오면 나를 건지시는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문제가 생기면 방해물을 먼저 봅니다. 그러나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문제보다 목표물을 먼저 보고 그 문제의 방해물보다 목표를 통해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땅을 바라보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사람들은 땅을 보고 하늘을 바라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땅을 보고 모든 좌절과 절망을 가슴에 가득히 안고 하늘을 바라보니 하나님이 안보이지요.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날 버렸죠? 그런데 문제가 생기면 먼저 기도굴에 뛰어 들어가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난 다음 하나님을 잔뜩 바라보고 그 다음 문제를 바라봅니다. 요까짓것 이것 아무것도 아니다. 내게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이런 시련이 굴러들어왔구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면 실패합니다. 가장 패배의 선구자가 두려움인 것입니다. 마귀가 여러분 우리를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킬 때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두려움을 갖다 주는 것입니다. 마음에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면 패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욥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내 무서워하던 그것이 내게 왔고 내 두려워하는 것이 내 몸에 미쳤다고 말한 것입니다. 어떤 문제가 생겨와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무서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담대합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에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환경에 갖다 놓아도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 이외에 어떻게 두려움을 이기겠습니까? 두려움을 이기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제켜 놓고는 못이기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면 패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기도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문제가 생기거든 하나님을 먼저 찾으세요.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고 하나님이 성령이 임하셔서 내가 너와 같이 하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된다. 그 하나님 음성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나가면 문제가 생겨도 합동하여 선을 이룬 줄 알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함께 하심이라. 주께서 함께 하시면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했었습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방해물을 바라보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같이 계시므로 어떠한 방해물이 다가와도 내가 더 밝히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하게 되면 승리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문제를 보는 시각에 따라 방해물이 되어 일을 그르칠 수도 있고, 또 다른 기회로 보아 새로운 창조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역경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은 하나같이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초점을 맞추어 위대한 일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부터 먼저 찾는다. 문제를 직접 부딪치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기도하고 함께 나가서 부딪친다. 볼찌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항상 함께 함이라. 주님이 함께 계신 것을 알고 부딪치면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려운 환경을 바라보며 두려워하면 실패할 뿐입니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라볼 때, 문제는 새로운 가능성이 되어 또 다른 기회가 됩니다. 입술로 담대하게 승리를 외치며 나아가면 위대한 역사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문제는 한걸음 더 향상된 삶을 살게 하기 위한 시련으로 다가온다고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문제가 다가오면 그 문제와 그 동등 혹은 그 이상의 축복도 반드시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의 목전에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머리에 발라 잔이 넘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연히 문제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문제를 극복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이기고 문제를 통해서 더 큰 꿈을 얻고 더 큰 일을 이루게 하려고 섭리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결론>
믿음이 기적적인 역사를 가져오는 재료인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기적이 나타나요. 믿음이 바로 하나님이 사용하는 손길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믿음이 있는 곳에 와 계시고 믿음이 있는 자에게는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쫓아서 목표를 분명히 가지고 꿈을 꾸고서 기도하면 믿음이 생겨나면 믿음이 생겨나면 이미 실상과 증거를 손에 쥔 것으로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문제를 당했을 때 기도굴에 들어가서 부르짖고 기도하는 것 시간 낭비가 아닙니다. 그 속에서 믿음을 얻으면 문제가 해결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문제의 해결을 가슴에 품고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인도네시아는 인구 2억 명 가운데 기독교 신자는 10퍼센트 정도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세계에서 가장 큰 무슬림 국가인 것입니다. 그 가운데 수라바야에 가면 수라바야에 2만 5천명의 좌석이 있는 교회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세 배 만합니다. 거의 운동장만한 교회입니다. 저기 사진에 나오네요. 그런 교회인데 거기에 에이브라함 알렉스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나와 거의 동년배의 목사님인데 그 목사님이 그 큰 교회를 이룩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무슬림교 국가에서 목사 노릇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런데 아기를 낳았는데 뇌성마비 아기를 낳았어요. 수족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주변에 있는 무슬림 교도들이 자 너희 하나님 좋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목사 아들을 뇌성마비로 낳게 하였으니 참 잘했다. 너 하나님 어디 계시냐. 온 천지에 조롱입니다. 그런데 이 에이브라함 알렉스 목사님은 큰 믿음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는 그때부터 결심하고 그 아들이 완전히 나은 모습을 바라보고 바라봄의 법칙으로 아침과 저녁과 점심과 어느 때든지 아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나아서 건강한 모습을 바라보고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꿈을 가지고 믿음을 마음속에 품고 내 아들은 건강하게 되었다는 것을 꿈꾸고 기도를 했는데 이슬람교도들이 계속 비난하고 교인들도 더 당황하고 굉장히 큰 시험에 걸렸었습니다. 그러나 늘 아들이 온전하게 건강하게 된 모습을 바라보고 입술로 담대히 시인하며 우리 아들은 낫는다. 건강하다. 두 발로 서게 된다. 아들은 나을찌어다. 그러면서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매일 집중해서 기도하기를 한 달을 해도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 두 달 효과가 없지요. 석 달이 지나도 아무 변화가 없습니다. 마귀가 와서 포기하라. 뇌성마비로 태어난 아기가 어떻게 낫느냐. 포기하라. 그렇게 말하는데 그는 포기하지 않고 바라봄의 법칙으로 끊임없이 어린 아기가 낳은 모습을 바라보고 그리고 그 꿈을 꾸고 믿음을 계속했습니다. 하나님, 이 아이를 일으켜 세워줄 줄 믿습니다. 이 아이는 나았다. 건강하다. 씩씩하다. 두 다리로 선다. 그렇게 시인하면서 넉 달째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지거든요. 믿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꿈과 마음속에 바람을 가지고 있었으나 믿을 수는 없었는데 계속 기도하니까 이제는 믿음이 마음에 생겨서 눈에는 아무 증고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려도 믿음이 생겼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니 이미 이루어진 실상을 잡은 것입니다. 증거를 손에 쥔 것입니다. 아들이 아직 뇌성마비라도 이미 실상을 나은 실상을 믿음으로 가지고 아직 일어나지 못했지만 일어난 증거를 믿음으로 가졌습니다. 믿음은 실상이요 증거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는 그 믿음을 가지고 그 다음에는 강하고 담대하게 사람들 앞에 말했습니다. 내 아들은 나았다. 내 아들은 이제 건강을 얻었다. 두 다리로 선다. 내 아들은 나을지어다. 서서 걸어라. 사람들이 다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다섯 달 된 이후에 하루아침에 아들을 위해서 기도해주러 아들 방에 들어가니까 아들이 일어서서 아빠 하면서 두 팔을 내밉니다. 아들이 옆에 서 있는 것 보십시오. 저렇게 컸습니다. 그러니 아버지가 믿기는 믿었지만 기절초풍을 했습니다. 거기에서 그가 느낀 것은 야~ 하나님의 능력은 제한이 없구나. 우리 믿음도 한계가 없구나. 믿은 대로 되는구나. 그렇다면 이 무슬림교 국가에서 세계적인 교회를 한번 세워보자.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그래서 이제는 아들을 바라봄의 법칙으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교회를 바라보고서 그것을 바라봄의 법칙으로 바라보고서 꿈꾸고 믿고 기도한 결과에 하나님이 무슬림 국가에서 많은 기사와 이적이 생기고 병이 낫기 시작하니까 사람들이 구름떼같이 모여와서 오늘날 이슬람 국가에서 최대의 교회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바라는 것이 이루어진 모습에 집중하며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살면 살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의 결단을 하고 입술로 담대히 시인하며 나아갈 때 믿음이 기적적인 역사를 가져옵니다. 믿음이 바로 하나님의 손길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의 가장 큰 보배는 믿음이요, 무기인 것입니다. 우리가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희망찬 꿈을 가지고 기도하면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안돼요.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면 아예 기막힌 것입니다. 믿음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희망찬 꿈을 가져야 돼요. 꿈을 희망차게 가져야 돼요. 바라봄의 법칙으로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바라보고 그리고 기도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바라보면서 기도를 계속하고 긍정적으로 시인하며 기도하면 어느 시간에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음이 평안해지고 이루어졌다. 증거가 생겨나고 믿음에 바라는 것을 서류를 손에 쥔 것 같은 실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믿음이 실상과 증거만 손에 쥐면 그때는 활개치고 나가서 큰 소리로 입으로 시인하고 명령하고 나가면 틀림없이 기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 재미로 예수 믿는 것입니다. 이 재미로 우리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다 이런 체험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체험을 하면 신앙은 점점 더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모두 다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있고 하나님이 분량대로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믿음이 있습니다. 마귀의 훼방을 물리치고 믿음을 활용하십시오.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적은 여러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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