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간증+믿음의 글

[스크랩] 큰 기쁨을 체험하다/김승옥 소설가의 신앙간증 5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4. 7. 10:55

회개기도의 중요성
 1981년 4월 말, 하나님의 손을 뵌지 며칠 후, 나는 경기도 파주군에 있는 오산리 금식기도원으로 혼자 갔다. 지금은 현대적이고 거대한 시설로 발전했지만 당시엔 성전도 대형 천막에 지나지 않은, 개척중인 야산 기도원이었다. 기도원 원장은 지금은 소천하신 그 유명한 최자실 목사님이었고 부원장이 지금은 테헤란로에서 강남순복음교회를 담임하는 김성광 목사였다. 최자실 목사님의 아들로서 미국 뉴욕 순복음교회 목사로 있다가 이 기도원 부원장으로 온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나를 전도한 대학선배 부부와 함께 우리 집에도 오셔서 "기도원에 한번 놀러 오세요. 박수치고 찬송 부르면 스트레스도 해소되고 좋습니다." 농담처럼 권하기도 했었는데 그 기도원에 꼭 가고 싶었던 것이다. 기도원이라면 병자들 모여있는 불결한 곳이라고 여기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한 기도원 가야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해왔었는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나니까 제일 먼저 가고 싶은 곳이 기도원이었다. 김성광 목사는 반갑게 마지하며 자신이 쓰던 방을 나에게 쓰라고 내주었다. 
 기도원에는 여기 저기 기도굴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았다. 한두 사람이 들어가서 큰 소리로 외치며 기도해도 남에게 시끄럽지 않을 공간을 땅 속에 만들어 놓은 것이다. 나도 그 기도굴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눈을 감았다. 1960년 서울에 와서 대학 다니기 시작할 무렵부터 나는 무신론자가 되어 기도하기를 그만두었었다. 20년만에 처음으로 기도를 해보는 것이다. 무슨 기도를 해야할지 몰랐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 안쪽에 아주 가까이서 다 듣고 계신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고 있을 뿐. 나는 더듬거리며 회개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10계명에 비춰보면서 죄라고 생각되는 모든 기억들을 하나 하나 입 밖에 내어 말하면서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고 고백했다. 생각나면 한 마디하고 또 생각나면 한 마디 하는 식으로 두시간 정도 기도를 하고 있는데 문득 어떤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말할 수 없이 황홀한 기쁨이 온몸을 가득 채우는 것이었다.   마치 기쁨이라는 기체가 온몸을 가득 채우고 있는 듯했다. 그 기쁨은 그 어떠한 생리적 기쁨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욱 황홀한 기쁨이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인간이 그토록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이 기쁨, 이 인간에 대한 사랑의 느낌, 이 황홀감, 이것이 바로 성령(聖靈)이구나. 세상과 인간은 생명으로 가득차게 느껴지고 참으로 힘차게 살아가고 싶은 의욕감으로 충만해지는 것이었다. 그 이후 뜻밖의 현상이 생겼다. 가령 방문객을 만나면 그 사람 마음이 다 읽혀지는 것이었다. 무슨 목적으로 나를 찾아왔고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그냥 미리 알게 되는 것이었다. 마치 내가 점쟁이가 된 것 같았다. 사람의 마음 속을 알 수 있는 이 능력, 이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이고, 이것이 바로 최초의 인간이 죄짓고 에덴에서 쫓겨나기 이전의 상태 즉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었던 무죄(無罪)상태의 영혼이구나. 이것이 바로 예수 믿으면 우리가 받게 되는 '죄사함 받은 영혼' 상태로구나.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죄사함. 마치 때가 낀 거울을 닦듯이 죄로 덮인 우리 영혼을 닦아 영혼세계를 투명하게 볼 수 있게 해주는 '죄사함'. 모든 인간을 에덴의 행복으로 회복 시키기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무엇인지 나는 알만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있다"던 예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중요한 가르침인지 알 수 있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자기 죄를 하나님 앞에 인정하며 사죄하는 일이 바로 성령 받는 비결이었다.

 그 해 12월 어느 날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 마악 아침기도를 시작하려는데 내 의식(영혼, 마음, 정신)이 머리통 전체를 통해서 몸 밖으로 빠르게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마치 치약 튜브에서 치약 나가듯이. 몸 밖을 벗어나자 새카만 어둠인데 그 어둠 속을 무슨 로켓처럼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몸을 벗어버린 영혼은 오히려 더 초롱초롱하게 맑고 또렷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인가, 몸을 빠져나오다니? 목적지도 모른 채 어둠 속을 날아가고 있으려니 그토록 외로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제야 '아이구, 이게 하늘세계로 가는 길이구나!' 그런 깨달음이 드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죽고 싶으면 이곳으로 오면 되지만 이곳에서는 죽지도 못하고 영원히 이 어둠 속을 날아다니고 있어야만 하는가 하는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아니 세상에서 지은 죄 때문에 지옥불길 속으로 가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이 들면서 무서운 공포심이 밀려들기도 했다. 그런 공포심과 외로움을 느끼고 있으려니까 다음 순간 내 의식은 다시 내 몸 속으로 돌아왔다. 거의 단절이라할 만큼 빠른 속도로 돌아온 것이다. 이 체험으로 나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나누어지는 현상이 바로 죽음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 여동생의 죽음에서 절실히 느끼기 시작했던 죽음에 대한 실제적 해답을 얻은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명령
 1982년 10월, 나는 처음으로 외국여행을 하게 되었다. 문화공보부에서 문학인 해외연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문학인들 아홉 명에 인솔자로 문공부 직원 한 사람, 도합 10명씩 그룹을 지어 약 2주일 동안 세 나라를 여행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현지 문학인들과 교류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관광여행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가난한 문인들에게는 마치 기적처럼 파격적인 행사였다. 그때까지도 우리 국민들의 외국여행이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던 시대였다. 돈이 많은 사람들도 부부가 함께 외국여행을 할 수 없는 제도였다. 해외도피를 할 수 없도록 부부 중 한 사람은 국내에 남아야 한다. 외화(外貨)를 아끼기 위해서도 외국여행은 극도로 제한되었다. 외국의 장학금을 받게된 유학생이나 공직자의 출장, 무역업자의 비지니스 그리고 운동선수의 국제경기참가 정도가 아니면 여권을 낼 수도 없던 시대였다. 아니 달러를 아무나 자유롭게 쓰고 여권이 쉽게 나오는 제도라고 할지라도 가난한 문학인들에게는 외국여행이란 꿈처럼 비현실적인 일이다. 그런데 정부에서 비용을 대어 문인들에게 외국여행을 시켜준다는 것이다. 전두환정권이 들어서자마자 민주화 투쟁하는 문학인들 달래느라고 이 행사를 꾸민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당시 문공부 차관이던 실세 허문도씨가 '현대'의 정주영회장에게 비용을 부담시키고 이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는 소문도 퍼졌다. 그 바람에 데모 등을 주도하는 문인들 중에는 이 여행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내가 속한 일행은 소설가 박연희, 이호철, 박완서, 시인 홍윤숙, 평론가 김치수씨 등등, 역시 열 명이 프랑스와 그리스 그리고 인도를 여행했다. 

출처 : 주님 오시리 구름타고 오시리
글쓴이 : 주님사랑 원글보기
메모 :